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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아홉째 날, 늦은 오후가 돼서야 눈을 떴다. 옆에 누운 경이는 스케치북에 나비를 그리고 있었다. 알록달록 오색 날개를 가진 나비는 눈이 시릴 정도로 예뻤다.
“웬 나비야?”
쇳소리같이 갈라지는 목소리를 애써 낮추며 묻자 화들짝 놀란 경이가 내 얼굴에 볼을 비벼 왔다.
“소우가 그려서.”
나비라……. 나는 눈을 깜박이며 찬란한 나비를 바라보았다. 나비는 자유와 환생을 의미했다. 딱딱한 고치를 벗고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나비는 환생을, 여린 풀잎을 뜯어먹으며 제한된 삶을 살던 애벌레가 두 날개를 가진 나비가 되는 건 자유를 의미했다. 그래서 수용소에 갇혔던 이들이 나비를 동경하며 벽에 나비를 새겨 넣은 것이라고 책에서 읽었었다. 그런 의미를 지닌 나비를 경이가 그리니 우리의 처지가 확실하게 보였다. 날개가 잘린 나비. 그것이 우리의 처지였다.
“그리지 마.”
“왜?”
“내가 싫어.”
나비를 그리는 경이가 환생할까 무서웠다. 벗어날 수 없는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버림당하고 주워지고 이용당하는 삶이 반복될까 봐. 그건 너무 불공평하고 경이와 나에게 무서운 삶이었다. 만약 생이 또 이어진다면 이번까지만. 그 정도로 나는 지쳐 있었다.
“그러니까 그리지 마.”
“그래도. 나비를 많이 그리다 보면 다시 태어날 수 있대.”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비님한테 비는 중이란 말이야. 다시 태어나도 형 동생으로 태어나게 해 달라고. 예쁘게 그리면 그릴수록 내 소원을 들어준대.”
“헛소리야.”
“진짜라고 했단 말이야.”
“형 말 못 믿어?”
노란 크레파스를 쥔 너는 뭐라고 웅얼거렸지만 끝내 침대 밖으로 조심스럽게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밀어냈다. 경이는 입술을 내밀고 투덜거렸다.
“심심한데 이제 뭐해? 형은 자기만 하잖아.”
그 말을 뱉은 건 분명한 시위였다. 나는 튀어나온 경이의 입술을 꾹 누르곤 소곤소곤 옛이야기를 해 주었다.
옛날에 말이야. 옛날에…….
쉴 새 없이 옛날이야기를 해 주던 나는 저녁밥이 배급되고 나서야 쉴 수 있었다. 내 식판과 자기 식판을 들고 온 경이는 숟가락을 들고 밥을 퍼먹었지만, 나는 스프를 몇 번 떠먹다가 말았다. 안 먹어? 경이의 물음에 나는 맛이 없다고 대답해 주었다. 경이는 숟가락을 들어 내 밥까지 긁어 먹고는 두툼하게 솟은 배를 두드렸다.
배에서 팡팡 소리가 난다며 신기해하는 경이를 바라보다 힘없이 벽에 등을 기댔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오르고 열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 독에 온몸에 잠식된 듯했다. 뜨거운 안구를 손으로 꾹 누르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유일하게 빛을 내고 있던 형광등이 소등되었다. 9시다. 이소우와 희희낙락거리며 떠들던 경이는 불이 꺼지자 어미에게 찾아오는 강아지처럼 내 품으로 기어들어 왔다.
“아직 안 졸린데 금세 밤이야.”
밥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등된 것이 불만이었나 보다.
“빨리 자야 착한 어린이지.”
“잠이 안 오는데.”
“자.”
조용히 손을 올려 경이의 눈을 가려 주었다. 네가 빨리 자야 내가 편해지니까. 자기 싫다고 발버둥 치던 경이는 한참이 지나서야 잠들었다. 자고 있는 경이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제는 정말 한계다. 그걸 깨닫고 있었으면서 억지로 시간을 끌었다. 울컥울컥 치미는 피를 침대 한구석에 뱉어 내며, 예쁜 내 분신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고생이 많았다, 경아. 못난 형 만나서. 못난 어머니랑 아버지랑 만나서. 정말 고생이 많았다. 좀 더 좋은 집에 태어났더라면 사랑을 많이 받았을 텐데.
한참이고 경이의 고운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스산한 냉기가 차오르는 새벽이 되었을 때 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경이의 목을 움켜쥐었다.
“형아야, 이제 헤븐에 가는 거야?”
자고 있는 줄 알았던 경이가 눈을 떴다. 보이지 않지만 알 수 있다. 어둠 속에 가려진 그 얼굴이 얼마나 예쁘게 웃는지.
“나 죽는 거지? 죽으면 미미처럼 엄마랑 아빠랑 만날 수 있지?”
경이의 어린 생각은 죽음을 미화시켜 놓았다. 어쩌면 내가 한몫했을 수도.
“…….”
“형아 죽어서 따듯한 흙 덮고 있으면 헤븐에 갈 수 있는 거지? 응?”
“그래.”
적어도 너는.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을 거야.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곳으로 경이를 만나러 갈 거야. 사람은 다 죽게 되어 있으니까. 그때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면 손 꼭 잡고 놓지 마.
“와아- 신나.”
경이의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숨이 모자란 경이는 눈을 크게 뜨고 버둥거렸다. 헥헥거리며 내 팔을 팡팡 치는 경이를 보며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숫자를 셀 때마다 눈물이 비집고 흘러내렸다. 경이의 하얀 옷을 내 피눈물이 적신다. 신이 원망스러웠다. 이런 짓을 하게 만든 신이.
경아, 너는 형을 용서하지 마.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서러움과 슬픔을 애써 삼켰다. 경이는 버둥거리던 손을 내 손등 위에 포갰다. 그것이 꼭 나를 위로하는 것만 같아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렸다.
“꺼허윽, 혀아…… 헤브, 헤브…….”
조인 숨통을 비집고 경이는 헤븐을 속삭였다. 바르르 떨리며 까뒤집혀지던 경이의 눈이 감기자 심장이 떨어졌다. 고통스러웠다. 가는 목을 옥죄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을 풀고 경이를 끌어안았다.
경아, 나도, 나도 곧 갈 테니까, 그러니까.
말을 잇다말고 꾹 입술을 다물었다. 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 멀리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넌 그 아이 의견도 묻지 않았지? 걔가 살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 묻지도 않고 네 이기심에 아이를 죽인 거야.”
“경이는 나와 같이 헤븐에 가고 싶어 했어! 내가 없으면 얘가 제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해?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다 죽어 버릴 거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거둬 가는 게 낫잖아!”
울컥, 입 밖으로 피가 흘러나왔다.
“그건 네 생각이잖아.”
주먹을 쥐었다. 장레이의 말이 맞다. 항상 경이에게 내 의견만을 고집해 왔다. 이 작은 머리통을 가진 경이도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는데도, 내 생각을 강요해 왔다. 그런데도 경이는 다음 생에도 내 동생으로 태어나고 싶다 했다.
“뭐 어쩌겠어. 이미 죽었는데.”
“악!”
가슴을 북치고 올라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악악거리며 몸을 말다가 경이를 끌어안았다. 살고 싶었어? 그래서 나비를 그렸던 거야? 계속해 생을 이어 나가고 싶어서? 응? 말을 잇지 못하고 경이의 몸을 흔들었다. 힘없이 흔들리는 몸이 애처로워, 경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죽여 울었다.
“멍청이, 형제가 멍청한 건 똑같네. 잘 들어봐, 안 죽었어. 사람이 쉽게 죽어?”
그의 말대로 가슴으로 귀를 가져다 대자 심장이 펄쩍펄쩍 뛰었다. 고마움에 경이의 목을 끌어안고 경이의 볼에 내 볼을 문댔다. 내 이기심에 경이를 죽이려 했다. 독이 슬금슬금 퍼져 새파래진 얼굴로 나는 경이의 옆에 있었다. 목에 생긴 붉은 손자국을 바라볼 때마다 목이 조였다.
살고 싶었어? 나는 아기같이 입술을 옹알이는 경이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 물음을 묻기도 전에 기나긴 잠의 나락에 빠졌다.
그날 밤, 경이를 죽이려 했던 건 내 마지막인 걸 알아서다. 마지막에 너와 함께 헤븐에 가고 싶어서. 자그마한 경이의 손을 꼭 쥐곤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경아, 못난 형이 마지막으로 해 줄 말이 있어.
미안해. 사랑해.

***

한때는 시인들이 찬양하는 아름다운 나라였다. 지도에서 이름이 지워진 나라는 공국으로 농사를 주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순박한 곳이었다. 순박한 나라가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진 이유는 간단했다. 공국은 가난했고 제국은 부유했다. 계속되는 적자에 시달리던 대공은 공국을 제국에게 팔아 버리고 망명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나라는 제국의 편리대로 자로 그어져 1-20 구역으로 나누어졌다. 제국은 식민지인들에게 제국민들과 다를 바 없이 평등하다 이야기하지만, 그들은 철저한 식민지인들이었고 제국민들의 살과 피가 되었다. 여기에 있는 아이들도 식민지에 속한 아이였다.
“이홍! 이제 못하겠다. 차라리 반역자들을 때려잡는 게 낫지. 이건 고문이야.”
내가 난리를 쳐도 이홍은 다리를 꼬고 앉아 우아하게 차를 들었다. 우아한 손놀림을 구사하는 저 손에 얼마나 수많은 피를 묻혔는지 그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 것이다.
“그래서 쓸 만한 애는 골랐어? 네 임무는 내 개새끼를 추리는 거였을 텐데.”
“처음부터 네 개로 그 애가 마음에 들었던 거잖아.”
그래서 나를 그 아이가 있던 방으로 넣은 거고.
“혈통이 시원찮아서 널 보낸 거잖아. 하자가 있나 없나 확인하는 차원에서 말이야.”
그러게 왜 이홍의 눈에 띄어서는! 이홍은 광기가 서린 눈으로 쿠키를 집어 윤재를 닮은, 윤경의 입에 쿠키를 넣어 줬다. 아끼는 강아지에게 간식을 주는 모습과 흡사해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가 마음에 든 건대? 외모도 뛰어나지도 않아. 데이터 결과도 썩 훌륭하지도 않았어. 더욱이 제국에 대한 반발심도 있는 놈을 왜 네 개로 부리겠단 건대?”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불구덩이라도 뛰어드는 게 마음에 들었거든. 개가 가지고 있어야 할 뛰어난 자질이 있어. 그 강한 의지만 있다면 훌륭한 개가 되는 건 시간문제지.”
“그때도 말했지만, 그 애는 어려.”
“20살이면 제국에선 성인이지. 식민지 아이들을 좀 더 많이 잡아들이기 위해 미성년자에 속하는 나이를 높인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야. 이미 그 애를 놔줬었어. 그랬는데도 다시 내 눈에 띄지 않았나? 내가 데리고 오지 않았으면 그 아인 제국민의 노예로 팔려 나갔을 거야.”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그건 부모를 잃은 식민지 아이들의 반복과도 같은 일상이었다. 이홍은 바들바들 떠는 윤경의 머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콕콕 볼살을 찌르더니 만족한 듯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애들은 놔줘. 불쌍한 아이들이야.”
“불쌍한 아이들은 수도 없이 널렸어. 더욱이 제트를 주입하지 않았나. 내가 놓아주면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거다. 내 소속 군인이 아니면 중화제를 구할 수 없어.”
제트는 이홍 소유의 군대에서 비밀리에 만들고 있는 신종 독이었다. 해독제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완화제밖에는. 일주일 단위로 완화제를 맞으면 정상인처럼 살 수 있지만 그 안으로 중화제를 맞지 못하면 혈관에 독이 침투해 인체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죽게 된다. Z-중화제만 있으면 누구든 자신의 개로 만들 수 있었다. 이홍이란 자는 자신의 친우이기 전에 무서운 이다.
“아이들은 내가 거둘게. 중화제도 네게 사지. 돈은 원하는 만큼 불러도 좋아.”
“거절. 나는 내 실험체를 밖으로 내돌리지 않아. 나가는 순간 이유 불문하고 전량 폐기다. 내 눈에 들어온 걸 두 번이나 놔줄 만큼 무르지 않아. 계속 내 것을 뺏어 가려 한다면 아무리 너라도 봐주지 않아.”
이홍이 이를 드러내며 윤경의 머리를 잡아챘다. 그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윤경이 아악-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는지, 이홍은 테이블을 뒤엎었다. 그는 내키는 대로 행동했고, 내키는 대로 먹어 치웠으며 가지고 싶으면 가졌다. 현 황제의 아들로 황태자에게 영친왕이라는 호칭까지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식민지로 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개새끼와 닮아서 애완견으로 쓰려 했는데 영 버릇이 없어. 귀여운 애완견이라도 주인 앞에선 짖으면 안 된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야.”
목소리가 낮아졌다. 화가 났다는 의미다. 그가 총을 꺼내자 히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겁에 질린 윤경이 울었다. 총구는 아이를 향했지만 그것으로 위협하려는 대상은 나였다.
네가 그 아이를 걸고넘어질수록 당하는 건 이 아이야, 계속 해 보려면 해 보든가. 이홍은 짜증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물러나는 것밖엔 방도가 없었다. 나는 그 아이가 그토록 지키려고 애를 쓰던 윤경의 목소리를 들으며 ICB(Intensive Care Box)안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윤재를 떠올렸다. 이름처럼 금방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그 아이를.

***

쌕쌕-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이 내 숨소리인지 남의 숨소리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 누군가 생을 이어 나가고 있는 소리다.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가락이 물속을 부유했다. 보이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살짝 눈을 뜨니 시야가 부옇다.
숨을 느리게 쉬며 입과 코를 막고 있는 것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먹먹한 귀를 태울 듯이 울렸다. 그것보다 더욱 시급한 건 무방비한 입과 코로 흘러 들어오는 물이었다. 컥컥거리며 손을 휘젓는 것도 잠시 촤아아악- 물이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입과 코로 산소가 공급되었다. 모자란 숨을 몰아쉬며 몸을 세우고 주위를 둘러봤다. 귀를 아리게 하는 사이렌은 여전히 울려 퍼졌다.
죽은 게 아니었나? 어째서 내가 ICB에 들어 있지?
상황판단이 안 돼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자 다다다- 거리는 소리와 함께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왔다.
“무슨 일이지?”
“실험체가 산소 공급 장치를 제거해서 생긴 소란입니다.”
“그러게 억제대를 하라고 하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이렇게 빨리 정신을 차릴 줄 몰랐습니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Semi Coma 상태라…….”
“변명은 집어 치워!”
호통을 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의사는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Z-03 자네 괜찮나?”
그건 내 이름이 아니야. 그런 우스운 말로 날 부르지 마.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면서 아까 마신 물을 뱉어 낼 수 있으면 뱉어 내게. 독을 중화시키는 물이라 마시면 목이 칼칼할 걸세.”
목이 맵다. 콜록콜록. 기침으로 목구멍에 들어 있는 물을 뱉어 냈다. 그러자 여러 명의 사람이 내 몸 위로 수건을 올려 주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걸 깨달은 것도 잠시, 경이가 머리를 스쳤다.
“경이는?”
“누굴 말하는지 모르겠군.”
“경이를 데려다줘요.”
“우선 쉬고 내일 이야기하도록 해.”
나이가 지긋한 의사는 내 몸을 침대 쪽으로 이끌었지만, 그대로 버티고 섰다.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으나 경이를 보여 주지 않으면 그들을 따를 수 없었다.
눈으로 주변을 빠르게 훑어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 둘러보았다. 그때 시야로 의료용 가위가 들어왔다. 중년 의사의 팔을 밀어 내고 테이블 위에 놓인 가위를 집어 올렸다. 날카로운 가위 날에서 섬광이 났다. 몇 명의 의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경이 어디 있어! 경이를 데리고 오라고!”
내 동생, 내 동생 경이를 데려오란 말이다. 안 그러면 여기 있는 새끼들 다 죽여 버릴 거야.
“진정해. 정말 우리는 경이란 사람이 누군지 몰라.”
“어떻게 모를 수 있어! 나랑 같이 있었는데! 설마 그 애를 죽였어……? 죽였냐고 묻잖아.”
“그거에 대해선 천천히 알아보마. 우선 가위 좀 내려놓아.”
“내 앞에 데리고 와요. 그게 먼저야.”
대치가 계속 이어지자 군인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비상벨을 누른 것이다. 입술을 사리물었다. 전투복을 입은 군인들은 자세를 잡고 건을 겨눌 때까지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Z-03 조용히 무기를 내려놓고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안 그러면 쏜다.”
빨간 적외선이 내 심장 쪽으로 몰려들었다. 경이의 생사도 확인하지 못하고 개죽음을 당하는 건 내 쪽에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위협적으로 날을 세웠던 가위를 내리니 군인들이 팔을 잡아 비틀었다.
“아티반, 아티반을 주사해!”
한 여의사가 빠른 속도로 달려와 내 팔에 진정제를 주사했다.
“경이, 내 동생 경이 좀…….”
군인들에게 팔을 붙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애절한 눈으로 여의사를 보며 애원했다.
제발 내 동생 경이 좀 데리고 와 달라고. 제발…….
“억제대 가지고 와. 또 난리치기 전에.”
분주하게 달리는 의사들은 내 진정한 진정제를 모르나 보다. 경이 하나만 있으면 될걸. 약 에 취한 다리가 꺾여 들어갔다. 정맥을 타고 순식간에 진정제가 돈 것이다. 흐릿해지는 눈을 껌뻑이는 순간에도 경이를 떠올랐다. 그러다 이내 사고를 할 수 없게 되는 순간, 고개를 떨구었다.

***

눈을 뜨면 다시 진정제가 주사되었다. 눈이 핑핑 돌고 몸이 핑핑 돌았다. 그래서 눈을 감았고, 눈을 감고 있으면 잠이 들었다. 꿈결에 경이가 울먹거렸다.
무서워, 형. 언제 와?
움푹 파인 눈 주위로 눈물이 고였다. 나도 보고 싶어, 그렇게 정신없이 중얼거리다 눈을 뜨니 고즈넉한 방 한가운데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피부에 닿는 이불의 촉감이 부드러웠다. 낯선 공간에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연구소가 아니었다. 원목으로 꾸며진 따듯한 느낌의 방은 분명 누군가의 집이었다. 몸을 일으켜 세우자 어제만 해도 몸을 단단히 억제고 있던 억제대가 사라졌다.
“일어났으면 이리 와.”
낮은 목소리. 어디선가 들었던 목소리였다. 침대에서 벗어나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침대 머리맡에 있던 하얀 백자를 든 채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신용할 수 없었다. 언제 내 근육에 안정제를 꽂아 넣을지 모른다. 남자는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거만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은 사냥복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선 짐승의 냄새도 피 냄새도 나지 않았다.
“여기 주인? 경이는 어디에 있어요?”
“하여튼 요즘 개새끼들은 버릇이 없어.”
남자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느슨하게 1인용 소파에 몸을 묻은 남자는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빨리 말해.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줄게요.”
푸하하하하. 남자는 가슴을 부여잡고 마구 웃더니 사납게 눈을 떴다. 반질반질 빛나는 까만 눈동자가 낯이 익었다. 그러니까…… 임시 보호소에서 마주쳤었던 그 눈과 흡사했다. 그때 보았던 눈이 맞나 가늠하기 위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아무리 봐도 그 남자다. 어둠 속에서 섬광을 띠던 눈을 잊을 수가 없었다.
보호소의 아이를 사 갔던, 우리를 지옥으로 몰아넣은.
“너 이 새끼!”
화가 순식간에 차오를 수 있다는 걸 지금에서야 알았다. 나를 구석으로 몰아 경이의 목을 조르게 만든 남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도자기를 들어 올려 그 남자의 머리를 내려쳤다. 아니, 내려치려 했다. 남자에게 쉽게 도자기를 빼앗기지만 않았다면 남자의 머리를 박살 냈을 테다. 억울해서 발을 동동 굴렸다. 가볍게 탁자로 도자기를 올린 남자는 한 손으로 내 두 손을 움켜쥐었다.
“멍멍아, 주인에게 달려들어선 안 돼.”
남자의 붉은 입꼬리 한쪽이 상승했다. 그러더니 커다란 손 하나가 짝- 소리를 내며 뺨을 내려쳤다.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눈에서 섬광이 튀었다.
“허락 없이 올려다봐서도 안 돼.”
누가 개새끼고 누가 주인이라는 거야? 입술을 짓씹었다. 남자의 얼굴로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맑은 침이 얼굴로 튀자 남자의 표정이 구겨졌다. 두 손이 잡힌 채로 몸이 넘어가더니 내 몸 위에 올라탄 남자가 내 얼굴을 제 쪽으로 가져다 댔다.
“나는 예쁜 토끼나 병아리 같은 것들 보다 미친개나 야생마 같은 것들을 좋아해. 그런 것들을 짓밟고 올라서는 데 희열을 느끼거든. 네가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기뻐. 정복하고 올라타고 싶어지거든.”
습기가 가득한 남자의 숨이 내 얼굴로 뱉어졌다. 그게 기분이 나빠 고개를 돌리니 남자는 자신을 똑바로 보게 했다. 자유로운 남은 손으로 제 턱을 그러쥐는데 이길 수가 없었다.
“말 안 듣는 개새끼를 어떻게 교육하는지 알아? 광에다 가둬 놓고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때리고 또 때리지. 그러면 벌벌 떨면서도 말을 잘 들어. 그런 방법은 쓰지 않도록 말 좀 들어.”
손가락이 볼을 꽉 눌렀다. 꼴사납게 입이 벌어지고 꽉 깨물고 있던 이가 제자리로 돌아가자 남자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내 앞에서 이를 드러내서도 안 돼. 가르쳐 줄게 많아서 꽤 즐겁군.”
남자는 다시 권태로운 자세로 소파에 앉더니 차를 입에 가져다 댔다. 아까 보았던 사나운 맹수의 모습과 다른 모습이라 눈살이 찌푸려졌다.
“경이는?”
“존댓말.”
“경이는 어디 있지?”
“존댓말.”
“그러면 경이가 무사한지만이라도 알려 줘.”
“말을 안 듣는군. 그게 네 매력이기도 하지만.”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남자에 대한 무서움이 아니라 경이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나려는 전조현상이다.
왜 경이를 보여 주지 않는 거야?
설마 죽었어?
별생각을 다 떠올리며 차오르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눈을 깜박거리지 않고 정면을 보았다.
“쓸모없을 줄 알았는데 훌륭한 목줄이 되겠어.”
남자는 소름 끼치게 웃었다.
“내 침실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 마.”
침실? 침실? 온갖 이상한 생각이 떠오르다 고개를 저었다. 같은 남자다. 예쁘고 말랑한 여자를 놔두고 그런 짓을 저지를 리 없다.
“쓸데가 없어서 뒤처리용으로 써 보았는데 꽤 재밌었어. 아프다고 낑낑거리는 게 볼만했거든.”
너, 너 용서 못 해! 몸이 남자에게 튀어 나갔다. 남자는 씩- 미소를 띠며 옆으로 비켜나 다리를 내밀었다. 꼴사납게 남자의 발에 걸린 나는 엎어져 바닥을 굴렀다. 내 머리에 남자가 발을 올렸다.
“네가 아무리 내 흥미를 끄는 유일한 강아지라도 말이지. 무언가 때문에 내 앞에서 사정없이 날뛰면 나는 그 무언가를 부숴 버리고 싶어져. 경이라고 했던가. 널 닮은 그거.”
건들지 마. 내가 음산하게 중얼거리자 남자는 ‘글쎄’로 응수했다.
“너 하는 거에 달렸겠지.”
발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날 뚫어지게 본 남자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냈다. 전자담배가 상용화 되어 있는 지금은 보기 힘든 구담배였다. 그는 달칵 소리와 함께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느긋하게 담배를 태웠다. 빨간 불덩이가 담배의 새하얀 부분을 잡아먹으며 재를 남겼다.
“내 어여쁜 개새끼가 되어 준다면 건드리지 않는 건 고려해 보도록 하지.”
송곳니가 드러날 정도로 웃는 남자는 사신과 비슷했다. 헤븐에 가자 했던 우리는 진짜 지옥에 떨어진 거였다. 연구소에 들어갔던 그 순간부터.
“알아들었는지 모르겠군.”
회색의 눈이 그의 손에서 떨어져 내렸다. 사르륵 사르륵. 그게 참 처량하고 아름다워 보여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참으면, 나도, 나도…….
“내 개새끼가 될 거야?”
“그래, 그러면 되잖아.”
내 목소리가 방 안으로 울려 퍼지자 남자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이홍과 나의 네 번째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