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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띠리리리리.
화창한 토요일 아침, 침실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이불을 덮고 있던 형체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이불 속에서 살짝 손만 나와서는 전화기를 들었다 놓자 다시 방 안이 조용해졌다.
침대에서 나올 생각이 없는 듯이 형체는 더 몸에 이불을 돌돌 애벌레처럼 말았다.
얼마 후 다시 시끄럽게 다시 전화가 울려 댔다. 결국은 일어난 여자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울리는 전화에 응답했다.
“음음, 여보세요.”
― 상아, 아직도 자고 있니? 오늘 나 데리러 오기로 하지 않았어?
“네? 지금 몇 시?”
정신 차리고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친한 친구 선이가 강의하는 요리 교실에 가기로 약속을 했는데 큰일 났다!
어젯밤 인기리에 종영한 외계에서 온 남자가 나오는 드라마를 우연히 접하고 여자 주인공에 빙의되어 행복감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끝까지 보다가 쓰러졌는데 늦잠을 잤나 보다.
“엄마, 나 지금 출발해요. 30분 있다 나오세요!”
일어난 차림 그대로 현관으로 뛰쳐나가 차키만 집어 들고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고 차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급히 차에 타 시동을 걸고 규정 속도는 지키되 최대한 밟았다. 다행히 약속한 시간에 늦지 않고 딱 맞춰 부모님 댁에 도착했다.
대문 밖에서 딸을 기다리고 있던 중년 여성이 운전석에 타고는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녀의 몰골을 보고 혀를 찼다.
“이상아, 이놈의 가시나! 꼴이 그게 뭐니? 밖에 나올 때 그 추리닝 좀 안 입을 수 없니?”
“미안미안, 엄마. 나 전화 받고 나서야 일어났어요. 그리고 학교에 출근하는 날도 아닌데 편안한 옷이 최고죠.”
“정도껏 편안해야지. 아주 온 동네가 너한테는 안방이지?”
“아닌데, 못 봐 줄 정도야?”
“거울을 좀 보라고. 아이고, 내 입만 아프지. 그 몰골로 엄마 망신시키지 말고 나 내려 주고는 바로 집에 가라.”
그제야 상아가 앞에 거울을 내려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드라마와 함께했던, 자기 몸을 아끼지 않던 치킨의 희생에 힘입어 눈은 퉁퉁 붓고 부은 눈에는 눈곱도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거기다 편안함을 최고로 여기는 그녀가 머리 감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고수하는 단발머리도 눌려 엉망이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제 눈에 붙은 눈곱도 떼고 눌린 머리를 감추기 위해 후드 티의 모자도 뒤집어썼다. 그러고는 쯧쯧 혀를 차고 있는 엄마의 품에 안겼다.
“김 여사, 내가 부끄러운 거야? 에이~ 왜 이러셔. 사랑해, 김 여사. 그래도 이왕 갔는데 선이한테 인사는 하고 가야지.”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딸의 애교에 김 여사는 누가 너를 말리겠느냐? 엄마인 나도 못 말리는데, 하며 그러려니 하고 쉽게 단념하고 말았다.
차는 조용히 달리고 달려 목적지인 문화센터에 도착했다. 입구에 차를 잠시 댄 후 어머니를 내려 드리고 다시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상아는 화장실로 달려가서 간단하게 세수하고 얼굴을 정리했다. 이왕 왔으니 친구인 선이에게 인사만 하고 가야겠다 싶어 강의실로 향했다.
그런데 강의실 앞에 선 선이와 어떤 남자가 그녀의 감시 레이더망에 잡혔다. 허우대 멀쩡한 놈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보고 웃으며 인사한다.
아니, 저런 호랑말코 늑대 같은 놈을 봤나! 딱 봐도 능글거리는 웃음과 잘생긴 상판대기가 맘에 들지 않았다. 남자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지만 역시나 자신의 친구는 더 공손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암암, 역시!!
벽에 바짝 붙어 얼굴을 가리고 주시하다가 남자가 밖으로 나가자 재빨리 따라 나갔다. 그리고 앞에서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던 남자를 따라가 키 큰 남자의 높은 어깨를 툭툭 쳤다.
“이보세요!”
어깨를 치며 부르는 소리에 남자가 잘생긴 얼굴에서 나오는 근사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봤다.
“네? 무슨 일이시죠?”
돌아본 남자의 눈에 여자의 차림이 들어왔다. 후드를 뒤집어쓰고는 무릎이 나온 추리닝 바지에 신발은 그 유명한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어디서 늘어지게 자다가 금방 침대에서 뛰쳐나온 것 같은 추리한 차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여자의 반짝이는 눈이었다. 검고 깊은 눈동자가 자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게다가 처음 보는 여자가 다짜고짜 하는 말은 그에게 적잖은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큼, 역시 웃음이 헤퍼, 바람둥이 같은데. 혹시 여자 많이 만나 봤어요? 아까 그 예쁜 처자는 안 돼요. 껄떡대지 마요!”
여자의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던 남자는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여자가 말하는 처자가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 바람둥이라고 자신을 단정시켜 버리는 여자를 보며 불쾌하거나 나쁘기는커녕 즐겁다.
“아…… 아까 요리 선생님이랑 친하신가 봐요? 헌데 내가 여자가 적을지 많을지 댁이 어떻게 알고?”
“당신 같은 스타일은 안 돼요! 여하튼 조심해요, 지켜보고 있겠어요.”
상아는 눈에 최대한 힘을 주고는 남자를 위협적으로 쳐다봤다.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듯 두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키고 부리부리하게 부라렸다. 그리고 추리한 차림에도 당당함이 흘러넘치는 걸음으로 사라졌다.
진혁은 순식간에 자신을 강타하고 지나간 여자가 사라지자 뒤로 고개를 젖혀 가며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항상 손수 운전해서 문화센터까지 가시던 어머니께서 오늘은 왠지 아들이 태워 주는 차를 타고 싶다고 하실 때부터 예상했어야 했다. 지상 최고 자유연애를 주장하시는 어머니도 아들이 서른의 중반이 다가오자 슬슬 조바심이 나시나 보다.
도착해서도 차에서 내리시지도 않고 안까지 함께 가자시는 어머니를 따라 들어간 강의실 앞에서 어머니가 입이 마르게 칭찬하시던 요리 선생님인 것 같은 여자를 만났다. 딱 봐도 나 착해요, 라고 얼굴에 써 붙인 듯한 단아한 여자는 이름도 한자 착할 선을 쓰는 김선이라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그 요리 선생을 나와 이어 주고 싶으신 것 같지만 자신은 지금 방금 지나간 여자가 더 맘에 들었다. 마치 새끼 고양이를 지키는 어미 고양이 한 마리를 본 거 같았다. 아까 여자가 흥미로웠다면 방금 본 여자는 신세계였다. 갑자기 사는 게 즐거워졌다.

1.


봄이 다가와서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 아침, 상아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새 학기가 시작된다고 긴장했던지 깊이 잠들지 못하고 어제 밤새 찝찝한 꿈에 시달렸다. 어젯밤 꿈속에서 주연을 맡은 상아는 40살이 넘어서도 혼자 사는 노처녀였다. 연극 주연의 독백처럼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평소 결혼에 목매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또 평생 혼자 살자 주의도 아니었기에 더욱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그 학부모가 글쎄…… 나보고 뭐라는 줄 알아? 선생님은 그 나이 되도록 애가 없으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이렇게 말하는 거야…….”
듣는 사람도 없건만 자신은 연신 말을 뱉어 내고 있었다.
“뭐? 지수 너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지수야, 우리 기분도 꿀꿀한데 치맥 어때? 이런 기분에는 치킨과 맥주가 최고지.”
그렇다! 꿈속의 나는 매일 끌어안고 자는 테디 베어에게 계속해서 말도 걸고 밥도 떠먹여 주고 있었다.
“나 한 입, 지수 한 입.”
곰 인형이 밥을 먹을 턱이 있나…….
“지수야, 왜 먹지를 못하니?”
꿈속의 상아는 곰이 밥을 받아먹지 않자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맙소사…… 니가 운수좋은 날의 김첨지냐……. 뭘 먹지를 못하니야? 얼씨구, 울기까지?
내가 봐도 꿈속의 주인공인 나는 참 가관이었다. 소리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음에도 아직도 꿈 안에 있는 것만 같았다. 꿈이 너무 생생해 더 놀란 그녀가 손을 덜덜 떨며 핸드폰을 들어 가장 친한 친구 선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는 친구에게 다짜고짜 하소연을 시작했다.
“선아, 나 진짜 어떡해?”
― 왜? 아침부터 무슨 일 있어?
“내, 내가 꿈을 꿨는데, 40대까지 노처녀인 걸로도 모라자서 인형한테 말도 걸고 밥도 막 먹여 주고. 나 어떻게 해.”
곧 도래할 자신의 생생한 미래를 본 것 같아 불안한 마음에 손까지 덜덜 떨려 오는데 수화기 너머로 친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하하. 근데 상아야, 너 오늘 새 학기라고 하지 않았어?
자신은 걱정이 돼서 죽겠는데 웃는 선이에게 한 소리 하려다가 새 학기라는 소리에 시계를 쳐다본 그녀는 분침과 시침이 가리키는 숫자에 놀라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허걱…… 늦었다.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상아는 집에서 줄기차게 입고 있던 김치 국물 묻은 편안한 옷의 대명사 추리닝 세트를 재빨리 벗어 던지고 욕실로 향했다.
출근할 때만큼은 예의를 차리는 그녀가 아이들과의 첫 만남을 위해 준비한 옷은 반짝반짝 별이 그려진 블라우스와 9부 하얀 슬랙스 바지이다. 준비한 옷을 입고 그녀는 학교로 향했다.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한 그녀는 아이들이 오길 기다리며 교실을 한 번 훑어봤다. 어제 겨우 환경정리를 끝냈다. 그러니깐 환경정리란 교실 뒤에 있는 커다란 초록색 게시판, 칠판 양옆에 있는 작은 게시판을 포함한 교실 전반의 정리를 이르는 말이다.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이 쓸데없고, 소모적이고, 피곤한 일을 왜 하는가?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의 아이가 하루의 대부분을 그 교실에서 공부하고 친구를 사귀고 꿈도 키워 가고 있다면? 흐뭇해지는 가슴을 안고 부족한 솜씨로 상아는 최선을 다해 뒤의 초록 칸들을 채웠다.
학창시절부터 예체능에는 흥미도 재능도 없는 그녀였다. 교대에 다니면서 뜀틀이며, 피아노며, 서예 등에 시달렸는데, 그중에도 그녀를 가장 괴롭힌 것은 피아노였다. 체육이나 미술은 노력하는 만큼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었지만 피아노는 역부족이었다. 상아는 교사가 된 뒤에도 종종 말하곤 했다.
“예전에 부르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크리스마스 때 하도 들어서 그저 그런 곡인 줄 알았는데 피아노로 직접 쳐 보고서야 알았답니다. 전혀 고요하지 않은 곡이더라고요. 그 수많은 알파벳 b자의 플랫이 제 손가락을 괴롭혔어요. 그 뒤로는 온 맘을 다해 경건한 마음으로 부르고 있답니다.”
그 험난했던 교사가 되는 길을 무사히 통과한 상아는 이제 어엿한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그리고 이제 저 넓은 게시판을 채우는 것도 척척 해내는 베테랑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완성한 게시판을 바라보는 상아의 눈에 뿌듯함이 차올랐다. 이걸 내가 만들었다니. 걸작일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하나둘씩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왔다. 이제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 평생을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갈 일만 남았다.
자리에 아이들이 모두 앉아 있는 걸 보니 시작해도 되겠다. 처음 자리한 낯선 반에 처음 보는 친구들까지, 조용하던 아이들이 어느새 금방 친해진 새로운 친구를 보며 재잘재잘댄다. 지금부터 이 교실에서 나와 아이들의 지지고 볶는 일상들이 펼쳐질 것이다.
“선생님 이름은 이상아다. 나의 클래스에 온 걸 환영한다. 나머지는 함께 지내면서 알아가도록. 끝.”
첫 등교일은 정규 수업 없이 전반적인 학급 규칙이나 자기소개로 이루어진다. 평소 마치는 시간보다 조금 일찍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갔다.

새해가 되어 한 학년 올라가는 초등학교 아이를 둔 엄마들의 관심사는 언제나 아이 담임선생님이 누구인지, 좋은 친구들은 많이 사귀었는지였다. 그래서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기원이 숨도 돌리기도 전에 미주가 물었다.
“우리 아들, 오늘 어땠어? 담임선생님은 어떠셔?”
“응? 좋았어.”
처음 올라간 학년의 담임선생님이 맘에 들었나 보다. 단번에 좋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그래도 엄마보다 좋을까 싶어 짐짓 미주가 장난쳤다.
“그래? 엄마보다 더? 엄마 질투 나는데?”
“그래도 엄마가 조금 더 좋아, 히히.”
“오케이, 방에 가 봐. 외삼촌 와 있다.”
외삼촌이 콩 심은 데 팥 난다고 해도 곧이곧대로 믿는 기원이 외삼촌이 왔다는 소리에 기뻐 방으로 달려갔다.
“진짜? 외삼촌!!”
기원이 방에 들어가니 외삼촌이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워낙 손이 귀한 집안이기에 아직 기원 대에는 기원 혼자였다. 기원의 아버지도 외동아들이었다.
친가 쪽에는 기원의 고모가 있었는데, 어릴 적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외가 쪽에는 엄마와 외삼촌 둘인데 외삼촌은 아직 결혼을 못했다. 외삼촌은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라고 박박 우겨 댔지만 내 눈으로 볼 때는 못한 것처럼 보였다.
외삼촌은 미운 삼삼이, 33세이다. 매번 철 좀 들어라, 하는 할머니의 잔소리와 함께 등짝 스매시를 면치 못한다. 이런 외삼촌이지만, 형제자매가 없는 나에게는 더 없이 좋은 형이자, 친구이다.
“외삼촌!!”
조카 기원이 외삼촌을 외치며 외삼촌의 배 위에 올라탔다. 자고 있던 진혁은 자신의 배에 올라탄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으음…… 우리 조카님 왔어? 외삼촌…… 딱 1시간만 더 자고 놀아 줄게.”
피이……. 외삼촌은 피곤했는지 저 말만 남기고 다시 잠들어 버렸다. 잠든 외삼촌의 모습은 꽤나 멋졌다. 길게 뻗은 외삼촌의 다리를 손뼘으로 재어 보니 10뼘도 넘는 듯했다.
남자치고는 하얀 피부가 매끄럽게 보여 손으로 외삼촌의 얼굴을 조심히 만져 본다. 까슬까슬한 수염이 만져진다. 앗, 따가……! 음, 코는 나보다 오뚝하고 눈썹도 나보다 잘생겼군. 히잉…… 아, 대신 나에게는 쌍꺼풀이 있다. 외삼촌의 눈은 옆으로 쭉 찢어지고 쌍꺼풀이 없어 무표정을 하고 있으면 꼭 화난 사람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보고 냉미남이라 부른다나 뭐라나…….
그 때 잠자는 숲 속의 왕자 외삼촌이 일어났다.
“으하함, 잘 잤다.”
외삼촌이 긴 팔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부탁했다.
“기원아, 가서 물 한 잔만 가져와.”
“응, 알았어. 외삼촌.”
기원이 나가자 침대에서 큰일이라도 난 것 같은 비명이 방을 가득 채웠다.
“으아아악, 이게 뭐야.”
물을 가지러 부엌으로 달려가던 기원이 방에서 들리는 외삼촌의 소리에 놀라 다시 방문을 열어젖혔다.
“외삼촌! 왜 그래?”
“어휴, 얼굴에 김이 잔뜩 묻었네?”
“……?”
“잘생김.”
맙소사! 내가 아무리 외삼촌을 좋아하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만 저 정도면 진짜 중증이다. 기원이가 외삼촌을 이제는 불쌍한 눈으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