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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이윽고 여자가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을 때 혹시나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앉은 앞자리에 등을 보이고 앉았다. 다급히 일어나 다가서서 말을 걸려고 하는데 웬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서며 인사했다. 기회를 놓친 진혁은 실례인 줄 알았지만 조심히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계속된 상대방 남자의 무례한 질문들에 여자는 잘 참는 듯하더니만 결국에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로 남자를 K.O시켜 버렸다. 딱 봐도 상대 남자가 너무 무례하게 구니깐 여자가 일부러 한 말이라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진혁은 열심히 웃음을 참으려고 해 봤지만 결국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전에도 그러더니 역시 저 여자는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앞에 줄행랑치고 있는 여자를 따라잡은 그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저기, 잠시만요.”
“누구요? 저요? 왜 따라오세요?”
남자가 자신을 따라오자 놀란 상아가 물음을 연신 뱉어 냈다. 아까는 배꼽이 빠지도록 웃어 대던 남자가 근사한 웃음을 띠고 물어 왔다.
“네, 저 기억나지 않으세요?”
“잘 모르겠는데요.”
“저한테 지켜보겠다고 막 경고 주고 그러셨는데요.”
“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상아는 이 말을 끝으로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쏜살같이 달려 차에 탔다. 그리고 뒤에서 남자가 뭐라 하는데도 무시하고는 시동을 걸어 급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빠르게 출발한 차는 먼지만 남기고 사라졌다. 잠깐 사이에 그녀를 또 놓쳐 버리고 만 진혁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떠올랐다.
그 사달을 내고 월요일 날 출근하기 전에 상아는 마주하게 될 교무부장의 얼굴이 떠올라 살짝 두렵기는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앞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학교에서 상아는 교무부장의 부름에 잘 피해 다녔지만 좁은 학교에서 결국은 마주치고 말았다. 상아는 부장 앞에서 그날의 자신의 행동이 민망해져 손을 꼼지락거렸다. 학교를 졸업한 지 한참 된 것 같은데도 혼날 때면 항상 학생이 된 것 같았다.
“이 선생, 우리 할 얘기 있지 않나?”
“네……? 그게…….”
상아의 고개가 떨어뜨려졌고 그 위로 야단이 들려왔다.
“이 선생,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야? 어떻게 밤마다 쉬지 않고 하고 있다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그것도 결혼도 안 한 처자가…… 내 듣는데 낯 뜨거워서 정말…… 에잉.”
“그분께서 제가 노산일까 걱정을 하시길래 밤마다 운동을 하고 있으니 걱정 마시라는 뜻에서 드린 말인데……. 부장님…… 도대체…… 뭘 생각하신 거죠? 말도 없이 그렇게 가 버리셔서 그날 제가 얼마나 상처받았는데요. 저는 평생 혼자 살아야 할 몸인가 봐요. 흑흑흑.”
상아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급의 눈물 연기를 선보였다. 그녀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의 강아지 눈망울로 앞에 부장선생님을 올려다봤다. 부장 선생님의 당황한 모습이 보였다.
“그럼 연하랑 수두룩 빽빽하게 만났다는 말은 도대체 뭐야?”
“그건 우리 아이들 이야기였죠. 이제까지 제가 가르친 아이들이 족히 수백 명은 될 건데……. 교사는 매일 어린애들과 만나니까 젊어진다. 뭐 그런 뜻에서…….”
아…… 이건 좀 아니였나……. 부장선생님의 표정이 좋지 앉다.
“부장님 모처럼 신경 써 주셨는데 이렇게 돼서 죄송합니다. 다 제 불찰입니다.”
상아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과를 드리고 급히 자리를 떴다.
마음이 괜찮지 않다. 어른답게 행동했어야 했다. 상대가 그랬다고 해도 자신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때늦은 후회가 되었다.
아이들과 있으면 자신은 항상 청춘인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산부인과가 필요할 정도로 늙어 보이나 보다. 이제 다시는 인연을 찾아보겠다고 선 같은 건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3.
맞선 보기로 한 상대방 여자를 만나지도 않고 선을 파투 내고 오는 바람에 어머니인 한 여사를 망신시킨 진혁은 지금 한 여사의 눈을 피해 누나네 집에 몰래 머물고 있었다. 그는 누나네 집에서 모처럼 받은 일주일만의 휴가를 만끽하고 있었다.
밀린 잠을 늘어지게 자고 있을 때,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내고 그를 발로 깨우는 사람이 있었다. 이 집의 모든 권력을 가지고 절대적으로 군림하고 있는 누나, 최미주였다.
“야, 그만 일어나. 일어나 봐, 응?”
진혁이 미주의 손에 들린 이불을 다시 빼앗아 들고 잠투정을 부렸다.
“왜 이래. 나 졸려.”
동생을 발로 깨우고 있는 그의 누나 미주는 한때 잘나가는 동시통역사였다. 결혼하고 기원을 낳고 나서부터는 하던 일을 접고 집에서 할 수 있는 번역 일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번에 들어간 영미소설 편집장이 데드라인이 일주일이나 남은 작품을 갑자기 서둘러 번역해 줄 수 없겠냐고 부탁하며 사정해 왔다.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대답을 하긴 했지만 오늘 있을 학부모 총회에 못 가게 되는데, 큰일이다! 아들의 5학년을 함께할 담임선생님도 뵙고 싶었고 아들 기원이에게 꼭 가겠다고 약속했는데 어떡하지? 누구를 대신 보내야 하는데. 누구?
생각하다 손님방에 누워 있는 동생을 깨우기 시작했다.
“어서 일어나, 나 대신 학부모 총회 좀 가 줘. 오늘까지 원고 넘길 게 있어서 못 갈 거 같아.”
“왜 이래, 나 피곤해.”
진혁은 1년 동안 밀려오는 일감에 묻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 달려서 일을 해치웠다. 그리고 이 얼마만에 받은 휴가인가. 먹고 늘어지게 자고 다시 먹고 다시 늘어지게 자는 게 이번 휴가에 할 일이었다. 누나가 깨우든 말든 절대로 그는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미리미리 아버지 되는 연습한다고 생각해. 얼른 일어나.”
“내가 어딜 봐서 애 아빠야?”
좋게 타일렀지만 진혁이 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결국은 미주는 협박을 했다. 저번에 맞선 보러 나가서는 여자를 만나 보지도 않고 바람맞히는 바람에 한 여사가 지금 머리털을 세우고 진혁을 잡으려 레이더망을 펼쳐 놓고 있는데 신고한다고 엄포를 놨다.
“가라면 가! 엄마한테 너 여기 있다고 말한다?”
진혁이 미주의 반협박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씻으러 욕실로 들어가면서 능글거렸다.
“가면 되잖아. 한 여사한테 전화하기만 해 봐, 근데 담임선생님은 예쁘신가?”
“너 기원이 담임선생님께 예의 없게 굴기만 해 봐, 확 그냥, 막 그냥.”
예쁘고 소녀 같던, 하지만 지금은 아줌마가 되어 버린 미주의 강력한 발차기가 날아왔다. 진혁이 순순히 항복했다.
“알았어! 내가 또 한 매너 하잖아.”
진혁이 너스레를 떨며 욕실문을 닫았다. 진혁의 누나 미주는 장난기 뒤에 숨겨진 그의 참모습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겉보기에는 생바람둥이처럼 보이는 동생이었지만 꽤 지고지순한 데가 있었다. 한 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으면 주위는 보지 않고 올인 하는 구석이 있다. 만약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여자라면 동생은 그 여자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걸 것이다.
이제 나이를 제법 먹은 동생도 결혼을 생각할 나이가 됐는데 어서 빨리 좋은 여자를 만나 자신처럼 단단한 가정을 꾸렸으면 싶다.
*
학부모 총회. 평소에도 자라나는 아이들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단정하게 입고 다니는 상아였지만, 학부모 총회 날에는 되도록 더 옷을 갖춰 입으려고 노력했다. 얼마 전 산 투피스를 꺼내 들고 입으려 했지만 그때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다시 옷장을 헤쳐 내고 있었다.
결국, 평소에 잘 입지도 않는 H라인 스커트에 깔끔한 흰색 블라우스를 매치했다. 그리고 잘 하지도 않는 알이 작은 진주 귀걸이를 꺼내 끼고 깊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잘할 수 있다. 아자아자 파이팅!”
아이들이 돌아간 교실. 오늘은 학부모님들이 아이들의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누나를 대신해 온 진혁이 교실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게시판에는 학급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 조카가 그린 그림이 어디 있나, 진혁이 전시된 많은 그림들 중에서 기원이 그린 그림을 찾아냈다. 자식, 못하는 게 없어요. 제일 잘 그렸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다른 그림들보다 기원의 그림이 열 배는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진혁이다.
그 때 앞문이 스르륵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그러자 모든 시선이 들어오는 담임선생님인 듯 보이는 여자에게 집중됐다. 진혁도 조카의 담임선생님이 누군가 싶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여자. 그의 심장이 그녀를 단번에 알아봤다.
그녀다.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
진혁의 눈이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반짝였다. 칠판 앞 교탁에 선 그녀가 자신을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5학년 3반 담임 이상아입니다. 제가 추구하는 학급급훈은 배려하고 창의적인 아이들입니다. 학급 특색사업으로는 1인1역할, 독서하는 어린이, 척척박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1년 동안 아이들과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상아가 준비한 간략한 소개, 1년 동안 아이들이 어떻게 생활할 것인지부터 해서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전반적인 설명을 끝냈다. 그러고는 상아가 학부모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궁금한 점이 있으신 학부모님께서는 편하게 질문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선생님, 수행평가는 미리 공지를 해 주시는 건가요?”
“네, 단원평가나 수행평가는 일주일 전에 공지하고 평가기준 또한 학생들과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매년 그렇듯 학부모님들께서는 아이들 성적에 관심이 많으셨다. 성적에 대한 질문이 대부분이었고 상아는 최대한 자세히 상냥히 성심성의껏 답을 해 드렸다.
“더 이상 질문이 없으시면 이상으로 학부모 총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 누가 손을 번쩍 들었다. 대부분 어머니들이 참석하시는 학부모 총회에 가끔은 몇 분의 아버지가 오시기도 하지만 손을 든 젊은 남자는 아무리 봐도 학부모처럼은 안 보였다.
흰색 셔츠에 아래위로 갖춰 입은 검정색 슈트는 맞춤 양복처럼 남자의 몸에 잘 맞아 보인다. 넥타이를 매지 않고 단추를 두어 개 푼 셔츠 사이로 여유로움이 묻어 나왔다. 남자의 얼굴을 보고 상아는 머릿속에 저장된 디스크를 열어 검색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아 ,맞다. 생각났다. 그 남자다. 호텔 커피숍에서 자신을 쫓아왔던 남자! 여기서 또 만나다니. 잘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만났다.
상아가 태연한 척 대답했다.
“네, 질문하세요.”
“선생님, 남자 친구 있으십니까?”
난데없이 나타난 젊은 남자가 담임선생님께 묻는 질문에 교실에는 정적이 흘렀고,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 터져 나왔다.
“어머머머, 웬일이야…….”
상아는 이를 꽉 물고 억지로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했다.
“개인적인 질문은 총회가 끝난 뒤에 해 주십시오.”
어머니들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남자가 물어 오는 질문에 머릿속이 하얘져서 상아는 급하게 총회를 마무리했다.
“더 이상 없으시면 학부모 총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매년 학교에 학부모 총회를 와 봤지만 그저 매년 반복되는 평범한 총회여서 특별한 일이라곤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난데없는 구경거리에 즐거운 듯 학부모들은 교실을 떠나면서 꼭 한 마디씩 하고 갔다.
“선생님, 잘해 보세요. 호호호.”
“잘 어울려요, 선생님.”
오늘의 일은 소문이 빠른 이 동네에서 삽시간에 퍼져 나갈 것이다. 온 학교에 상아에 대한 말이 난무할 것이다. 상아의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한바탕 소란이 쓸고 지나간 교실에는 그 남자와 상아만이 남았다. 남자가 또다시 아까의 질문을 물어 왔다.
“흠흠, 남자 친구 있으십니까?”
상아는 앞의 남자가 지금 자신에게 왜 이러나 싶었다. 상아가 톡 쏘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얼마 전에 큰 소리로 웃더니 쌍팔년도 수법으로 작업을 거는 남자는 있더군요.”
“흠흠, 아무튼 없단 말이죠? 저는 기원이 외삼촌, 최진혁입니다.”
진혁이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명함에는 ‘한율 로펌 이혼전문 변호사 최진혁’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상아는 명함을 받아 들고는 이걸 왜 나에게 주는가 싶어 멀뚱멀뚱 명함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명함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말하며 상아의 손에 꼭 들려 주고 교실을 나왔다. 아니, 나서다 돌아서서 선전포고를 날렸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다음에 또 만나요, 이상아 선생님!”
그가 날리고 간 선전포고에 상아가 어버버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다시 만나자는 말이 왜 빈말처럼 들리지 않는 걸까 자신의 인생이 저 남자와 어떡하든 엮일 것 같은 이 느낌. 상아는 그 자리에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교실을 나온 진혁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그녀의 이름이 뭐고 직업이 무엇인지까지 알게 됐다.
1번 만나면 우연이고 2번 만나면 인연이며 3번 만나면 운명이라고 하더니 결국은 이렇게 만날 거면서 맘속으로 애만 태웠다. 거기다 이렇게 가까이에 있다니.
마지못해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부모 총회로 향했던 그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새털같이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
미주가 진혁이 집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밖으로 나왔다.
“어때? 담임선생님 좋아 보이셔?”
“응.”
“그래? 유인물은 잘 챙겨 왔어?”
“응.”
학부모 총회에 다녀온 동생은 정신이 어디로 가출이라도 했는지 계속 실실거리며 자신의 물음에 ‘응’으로만 대답하고 있었다.
“왜 이래? 설마 왜 담임선생님이 엄청난 미인이시더냐?”
“응.”
“뭐야?”
미주의 이단 옆차기가 날아왔다. 제대로 들어간 이단 옆차기에도 동생은 실실 웃기만 했다. 그러더니 기원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카 방에 있는 책상에 앉아 책장에 꽂힌 책을 살펴보면서도 진혁은 계속 실실거렸다. 그는 학원을 간 기원을 내내 기다렸다. 밤 10시가 돼서야 조카 기원이 들어왔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참 학원도 많이 다닌다.
“다녀왔습니다.”
“우리 조카님 왔어?”
“요 귀여운 녀석.”
진혁이 기원이 싫어하는 볼을 잡아당기며 조카를 세게 끌어안는다.
“외삼촌 숨 막혀.”
흥분에 취해 잊고 계속해서 안고 있다가 기원이 비명을 지르고 나서야 팔에 힘을 푸는 진혁이었다.
“기원아…….”
“응?”
“담임선생님 어때?”
진혁이 그래도 상아와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인 조카에게 물었다. 사실은 상아가 여자로서 어떠냐는 말이 목구멍으로까지 차올랐다. 내가 아무리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지만 애한테……. 속으로 말을 삼켰다.
“그냥 좋으셔.”
진혁이 조카를 취조하듯 말꼬리는 잡고 하나하나 캐물었다. 그녀를 정복하려면 더 많이 알수록 유리할 터이니.
“어떤 점이 좋은데?”
외삼촌이 좀 이상하다. 학부모 총회에 갔다 온 뒤로 저렇게 빙글댄다. 혹시…… 선생님께서 내가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말한 건 아닐까? 에이, 설마……? 진짜 그런가 보다……. 저렇게 집요하게 물어보는 걸 보면 말이다.
“몰라, 나 잘래.”
“조카님 벌써 사춘기야? 말은 해 주고 가야지…….”
동상이몽(同床異夢), 오해만 깊어 가는 야심한 밤이었다.
이윽고 여자가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을 때 혹시나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앉은 앞자리에 등을 보이고 앉았다. 다급히 일어나 다가서서 말을 걸려고 하는데 웬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서며 인사했다. 기회를 놓친 진혁은 실례인 줄 알았지만 조심히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계속된 상대방 남자의 무례한 질문들에 여자는 잘 참는 듯하더니만 결국에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로 남자를 K.O시켜 버렸다. 딱 봐도 상대 남자가 너무 무례하게 구니깐 여자가 일부러 한 말이라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진혁은 열심히 웃음을 참으려고 해 봤지만 결국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전에도 그러더니 역시 저 여자는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앞에 줄행랑치고 있는 여자를 따라잡은 그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저기, 잠시만요.”
“누구요? 저요? 왜 따라오세요?”
남자가 자신을 따라오자 놀란 상아가 물음을 연신 뱉어 냈다. 아까는 배꼽이 빠지도록 웃어 대던 남자가 근사한 웃음을 띠고 물어 왔다.
“네, 저 기억나지 않으세요?”
“잘 모르겠는데요.”
“저한테 지켜보겠다고 막 경고 주고 그러셨는데요.”
“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상아는 이 말을 끝으로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쏜살같이 달려 차에 탔다. 그리고 뒤에서 남자가 뭐라 하는데도 무시하고는 시동을 걸어 급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빠르게 출발한 차는 먼지만 남기고 사라졌다. 잠깐 사이에 그녀를 또 놓쳐 버리고 만 진혁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떠올랐다.
그 사달을 내고 월요일 날 출근하기 전에 상아는 마주하게 될 교무부장의 얼굴이 떠올라 살짝 두렵기는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앞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학교에서 상아는 교무부장의 부름에 잘 피해 다녔지만 좁은 학교에서 결국은 마주치고 말았다. 상아는 부장 앞에서 그날의 자신의 행동이 민망해져 손을 꼼지락거렸다. 학교를 졸업한 지 한참 된 것 같은데도 혼날 때면 항상 학생이 된 것 같았다.
“이 선생, 우리 할 얘기 있지 않나?”
“네……? 그게…….”
상아의 고개가 떨어뜨려졌고 그 위로 야단이 들려왔다.
“이 선생,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야? 어떻게 밤마다 쉬지 않고 하고 있다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그것도 결혼도 안 한 처자가…… 내 듣는데 낯 뜨거워서 정말…… 에잉.”
“그분께서 제가 노산일까 걱정을 하시길래 밤마다 운동을 하고 있으니 걱정 마시라는 뜻에서 드린 말인데……. 부장님…… 도대체…… 뭘 생각하신 거죠? 말도 없이 그렇게 가 버리셔서 그날 제가 얼마나 상처받았는데요. 저는 평생 혼자 살아야 할 몸인가 봐요. 흑흑흑.”
상아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급의 눈물 연기를 선보였다. 그녀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의 강아지 눈망울로 앞에 부장선생님을 올려다봤다. 부장 선생님의 당황한 모습이 보였다.
“그럼 연하랑 수두룩 빽빽하게 만났다는 말은 도대체 뭐야?”
“그건 우리 아이들 이야기였죠. 이제까지 제가 가르친 아이들이 족히 수백 명은 될 건데……. 교사는 매일 어린애들과 만나니까 젊어진다. 뭐 그런 뜻에서…….”
아…… 이건 좀 아니였나……. 부장선생님의 표정이 좋지 앉다.
“부장님 모처럼 신경 써 주셨는데 이렇게 돼서 죄송합니다. 다 제 불찰입니다.”
상아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과를 드리고 급히 자리를 떴다.
마음이 괜찮지 않다. 어른답게 행동했어야 했다. 상대가 그랬다고 해도 자신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때늦은 후회가 되었다.
아이들과 있으면 자신은 항상 청춘인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산부인과가 필요할 정도로 늙어 보이나 보다. 이제 다시는 인연을 찾아보겠다고 선 같은 건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3.
맞선 보기로 한 상대방 여자를 만나지도 않고 선을 파투 내고 오는 바람에 어머니인 한 여사를 망신시킨 진혁은 지금 한 여사의 눈을 피해 누나네 집에 몰래 머물고 있었다. 그는 누나네 집에서 모처럼 받은 일주일만의 휴가를 만끽하고 있었다.
밀린 잠을 늘어지게 자고 있을 때,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내고 그를 발로 깨우는 사람이 있었다. 이 집의 모든 권력을 가지고 절대적으로 군림하고 있는 누나, 최미주였다.
“야, 그만 일어나. 일어나 봐, 응?”
진혁이 미주의 손에 들린 이불을 다시 빼앗아 들고 잠투정을 부렸다.
“왜 이래. 나 졸려.”
동생을 발로 깨우고 있는 그의 누나 미주는 한때 잘나가는 동시통역사였다. 결혼하고 기원을 낳고 나서부터는 하던 일을 접고 집에서 할 수 있는 번역 일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번에 들어간 영미소설 편집장이 데드라인이 일주일이나 남은 작품을 갑자기 서둘러 번역해 줄 수 없겠냐고 부탁하며 사정해 왔다.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대답을 하긴 했지만 오늘 있을 학부모 총회에 못 가게 되는데, 큰일이다! 아들의 5학년을 함께할 담임선생님도 뵙고 싶었고 아들 기원이에게 꼭 가겠다고 약속했는데 어떡하지? 누구를 대신 보내야 하는데. 누구?
생각하다 손님방에 누워 있는 동생을 깨우기 시작했다.
“어서 일어나, 나 대신 학부모 총회 좀 가 줘. 오늘까지 원고 넘길 게 있어서 못 갈 거 같아.”
“왜 이래, 나 피곤해.”
진혁은 1년 동안 밀려오는 일감에 묻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 달려서 일을 해치웠다. 그리고 이 얼마만에 받은 휴가인가. 먹고 늘어지게 자고 다시 먹고 다시 늘어지게 자는 게 이번 휴가에 할 일이었다. 누나가 깨우든 말든 절대로 그는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미리미리 아버지 되는 연습한다고 생각해. 얼른 일어나.”
“내가 어딜 봐서 애 아빠야?”
좋게 타일렀지만 진혁이 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결국은 미주는 협박을 했다. 저번에 맞선 보러 나가서는 여자를 만나 보지도 않고 바람맞히는 바람에 한 여사가 지금 머리털을 세우고 진혁을 잡으려 레이더망을 펼쳐 놓고 있는데 신고한다고 엄포를 놨다.
“가라면 가! 엄마한테 너 여기 있다고 말한다?”
진혁이 미주의 반협박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씻으러 욕실로 들어가면서 능글거렸다.
“가면 되잖아. 한 여사한테 전화하기만 해 봐, 근데 담임선생님은 예쁘신가?”
“너 기원이 담임선생님께 예의 없게 굴기만 해 봐, 확 그냥, 막 그냥.”
예쁘고 소녀 같던, 하지만 지금은 아줌마가 되어 버린 미주의 강력한 발차기가 날아왔다. 진혁이 순순히 항복했다.
“알았어! 내가 또 한 매너 하잖아.”
진혁이 너스레를 떨며 욕실문을 닫았다. 진혁의 누나 미주는 장난기 뒤에 숨겨진 그의 참모습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겉보기에는 생바람둥이처럼 보이는 동생이었지만 꽤 지고지순한 데가 있었다. 한 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으면 주위는 보지 않고 올인 하는 구석이 있다. 만약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여자라면 동생은 그 여자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걸 것이다.
이제 나이를 제법 먹은 동생도 결혼을 생각할 나이가 됐는데 어서 빨리 좋은 여자를 만나 자신처럼 단단한 가정을 꾸렸으면 싶다.
*
학부모 총회. 평소에도 자라나는 아이들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단정하게 입고 다니는 상아였지만, 학부모 총회 날에는 되도록 더 옷을 갖춰 입으려고 노력했다. 얼마 전 산 투피스를 꺼내 들고 입으려 했지만 그때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다시 옷장을 헤쳐 내고 있었다.
결국, 평소에 잘 입지도 않는 H라인 스커트에 깔끔한 흰색 블라우스를 매치했다. 그리고 잘 하지도 않는 알이 작은 진주 귀걸이를 꺼내 끼고 깊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잘할 수 있다. 아자아자 파이팅!”
아이들이 돌아간 교실. 오늘은 학부모님들이 아이들의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누나를 대신해 온 진혁이 교실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게시판에는 학급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 조카가 그린 그림이 어디 있나, 진혁이 전시된 많은 그림들 중에서 기원이 그린 그림을 찾아냈다. 자식, 못하는 게 없어요. 제일 잘 그렸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다른 그림들보다 기원의 그림이 열 배는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진혁이다.
그 때 앞문이 스르륵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그러자 모든 시선이 들어오는 담임선생님인 듯 보이는 여자에게 집중됐다. 진혁도 조카의 담임선생님이 누군가 싶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여자. 그의 심장이 그녀를 단번에 알아봤다.
그녀다.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
진혁의 눈이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반짝였다. 칠판 앞 교탁에 선 그녀가 자신을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5학년 3반 담임 이상아입니다. 제가 추구하는 학급급훈은 배려하고 창의적인 아이들입니다. 학급 특색사업으로는 1인1역할, 독서하는 어린이, 척척박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1년 동안 아이들과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상아가 준비한 간략한 소개, 1년 동안 아이들이 어떻게 생활할 것인지부터 해서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전반적인 설명을 끝냈다. 그러고는 상아가 학부모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궁금한 점이 있으신 학부모님께서는 편하게 질문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선생님, 수행평가는 미리 공지를 해 주시는 건가요?”
“네, 단원평가나 수행평가는 일주일 전에 공지하고 평가기준 또한 학생들과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매년 그렇듯 학부모님들께서는 아이들 성적에 관심이 많으셨다. 성적에 대한 질문이 대부분이었고 상아는 최대한 자세히 상냥히 성심성의껏 답을 해 드렸다.
“더 이상 질문이 없으시면 이상으로 학부모 총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 누가 손을 번쩍 들었다. 대부분 어머니들이 참석하시는 학부모 총회에 가끔은 몇 분의 아버지가 오시기도 하지만 손을 든 젊은 남자는 아무리 봐도 학부모처럼은 안 보였다.
흰색 셔츠에 아래위로 갖춰 입은 검정색 슈트는 맞춤 양복처럼 남자의 몸에 잘 맞아 보인다. 넥타이를 매지 않고 단추를 두어 개 푼 셔츠 사이로 여유로움이 묻어 나왔다. 남자의 얼굴을 보고 상아는 머릿속에 저장된 디스크를 열어 검색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아 ,맞다. 생각났다. 그 남자다. 호텔 커피숍에서 자신을 쫓아왔던 남자! 여기서 또 만나다니. 잘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만났다.
상아가 태연한 척 대답했다.
“네, 질문하세요.”
“선생님, 남자 친구 있으십니까?”
난데없이 나타난 젊은 남자가 담임선생님께 묻는 질문에 교실에는 정적이 흘렀고,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 터져 나왔다.
“어머머머, 웬일이야…….”
상아는 이를 꽉 물고 억지로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했다.
“개인적인 질문은 총회가 끝난 뒤에 해 주십시오.”
어머니들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남자가 물어 오는 질문에 머릿속이 하얘져서 상아는 급하게 총회를 마무리했다.
“더 이상 없으시면 학부모 총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매년 학교에 학부모 총회를 와 봤지만 그저 매년 반복되는 평범한 총회여서 특별한 일이라곤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난데없는 구경거리에 즐거운 듯 학부모들은 교실을 떠나면서 꼭 한 마디씩 하고 갔다.
“선생님, 잘해 보세요. 호호호.”
“잘 어울려요, 선생님.”
오늘의 일은 소문이 빠른 이 동네에서 삽시간에 퍼져 나갈 것이다. 온 학교에 상아에 대한 말이 난무할 것이다. 상아의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한바탕 소란이 쓸고 지나간 교실에는 그 남자와 상아만이 남았다. 남자가 또다시 아까의 질문을 물어 왔다.
“흠흠, 남자 친구 있으십니까?”
상아는 앞의 남자가 지금 자신에게 왜 이러나 싶었다. 상아가 톡 쏘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얼마 전에 큰 소리로 웃더니 쌍팔년도 수법으로 작업을 거는 남자는 있더군요.”
“흠흠, 아무튼 없단 말이죠? 저는 기원이 외삼촌, 최진혁입니다.”
진혁이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명함에는 ‘한율 로펌 이혼전문 변호사 최진혁’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상아는 명함을 받아 들고는 이걸 왜 나에게 주는가 싶어 멀뚱멀뚱 명함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명함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말하며 상아의 손에 꼭 들려 주고 교실을 나왔다. 아니, 나서다 돌아서서 선전포고를 날렸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다음에 또 만나요, 이상아 선생님!”
그가 날리고 간 선전포고에 상아가 어버버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다시 만나자는 말이 왜 빈말처럼 들리지 않는 걸까 자신의 인생이 저 남자와 어떡하든 엮일 것 같은 이 느낌. 상아는 그 자리에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교실을 나온 진혁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그녀의 이름이 뭐고 직업이 무엇인지까지 알게 됐다.
1번 만나면 우연이고 2번 만나면 인연이며 3번 만나면 운명이라고 하더니 결국은 이렇게 만날 거면서 맘속으로 애만 태웠다. 거기다 이렇게 가까이에 있다니.
마지못해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부모 총회로 향했던 그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새털같이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
미주가 진혁이 집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밖으로 나왔다.
“어때? 담임선생님 좋아 보이셔?”
“응.”
“그래? 유인물은 잘 챙겨 왔어?”
“응.”
학부모 총회에 다녀온 동생은 정신이 어디로 가출이라도 했는지 계속 실실거리며 자신의 물음에 ‘응’으로만 대답하고 있었다.
“왜 이래? 설마 왜 담임선생님이 엄청난 미인이시더냐?”
“응.”
“뭐야?”
미주의 이단 옆차기가 날아왔다. 제대로 들어간 이단 옆차기에도 동생은 실실 웃기만 했다. 그러더니 기원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카 방에 있는 책상에 앉아 책장에 꽂힌 책을 살펴보면서도 진혁은 계속 실실거렸다. 그는 학원을 간 기원을 내내 기다렸다. 밤 10시가 돼서야 조카 기원이 들어왔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참 학원도 많이 다닌다.
“다녀왔습니다.”
“우리 조카님 왔어?”
“요 귀여운 녀석.”
진혁이 기원이 싫어하는 볼을 잡아당기며 조카를 세게 끌어안는다.
“외삼촌 숨 막혀.”
흥분에 취해 잊고 계속해서 안고 있다가 기원이 비명을 지르고 나서야 팔에 힘을 푸는 진혁이었다.
“기원아…….”
“응?”
“담임선생님 어때?”
진혁이 그래도 상아와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인 조카에게 물었다. 사실은 상아가 여자로서 어떠냐는 말이 목구멍으로까지 차올랐다. 내가 아무리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지만 애한테……. 속으로 말을 삼켰다.
“그냥 좋으셔.”
진혁이 조카를 취조하듯 말꼬리는 잡고 하나하나 캐물었다. 그녀를 정복하려면 더 많이 알수록 유리할 터이니.
“어떤 점이 좋은데?”
외삼촌이 좀 이상하다. 학부모 총회에 갔다 온 뒤로 저렇게 빙글댄다. 혹시…… 선생님께서 내가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말한 건 아닐까? 에이, 설마……? 진짜 그런가 보다……. 저렇게 집요하게 물어보는 걸 보면 말이다.
“몰라, 나 잘래.”
“조카님 벌써 사춘기야? 말은 해 주고 가야지…….”
동상이몽(同床異夢), 오해만 깊어 가는 야심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