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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돌아오는 주말. 오늘은 진혁의 특별 휴가 마지막 날이다. 점심때까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그는 자신이 자는 동안 책상에 앉아 조용히 공부를 하고 있는, 왠지 오늘따라 더 사랑스러워 보이는 조카의 얼굴에 뽀뽀를 날려 주고는 흐흐 웃었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던 그녀의 꼬리를 잡고 난 후부터 그는 이상하게 기분이 날아다닌다.
그렇게 그 기분에 취해 실실거리던 그는, 정확히 밥 먹을 시간에 맞춰 미주가 쾅쾅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밥 먹어!”
밥 얻어먹는 주제에 부를 때 한 번에 나가야지 안 그러면 언제 밥주걱이 날아올지 모른다. 진혁과 기원은 미주가 한 번 더 밥 먹으라 외치기 전에 재빨리 방을 나갔다.
며칠 출장을 가서 볼 수 없었던 기원의 아빠, 매형이 보였다.
“언제 오셨어요?”
“어제 저녁 늦게 왔지 처남, 우리 밥 먹고 기원이랑 셋이 사우나라도 갈까? 남자끼리 뭉쳐야지.”
기원의 아빠, 미주의 남편이자 진혁에게는 매형이기도 한 그는 사우나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그 뜨거운 곳으로 목간 가서 때 빼고 땀내는 게 삶의 낙이라고 할 정도로 사우나를 즐긴다.
하지만 그 하나뿐인 삶의 낙인 사우나에 한 번 가면 몇 시간이고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아 누나는 매형이 사우나 가는 것을 싫어한다. 동그란 누나의 눈이 세모꼴로 바뀐다.
“매형, 누나가 흘겨보는데요?”
“흠흠, 밥이나 먹자…….”
역시나 이 집의 최강 권력자인 누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매형도 이렇게 바로 깨깽 하고 꼬리를 내린다. 진혁은 계속 생각하고 있던 말을 식탁에서 꺼냈다.
“매형, 저 여기서 당분간 좀 지내면 안 될까요?”
“당연히 되지. 안 그래도 우리 세 식구밖에 없어서 적적한데. 처남이 와 주면 좋지.”
“뭐, 나야 별로 상관없지만…… 우리 집에서 너 회사까지 1시간도 넘게 걸리잖아. 굳이 왜 여기서 지내려고?”
매형과 달리 역시 누나는 날카롭다. 진혁의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다. 진짜 이유를 들키지 않기 위해 결국은 진혁은 재빨리 변명했다.
“그…… 그거야 한 여사 때문이지……. 본가랑 여기는 거리가 있으니까 자주는 못 오겠지.”
미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진혁의 궁색한 변명이 의심스럽기는 매한가지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거기다가 남편은 출장을 자주 가기 때문에 집에 큰 남자가 없어 힘들 때도 있을 때도 있으니깐 동생을 머슴으로 쓰면 되겠다. 힘을 쓰든 안 쓰든 우리 집의 모든 잡무는 이제부터 진혁의 몫이다.
그런 것보다도 기원이 외삼촌을 형처럼 친구처럼 저렇게나 따르는데 어쩌겠는가?
“나는 외삼촌이 우리 집에 있는 거 찬성이야.”
“요 귀여운 우리 조카님, 우리 밥 먹고 자전거 타러 갈까?”
“좋아!!”
일주일이 다 되어 가도록 집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먹고 빈둥거리고 자기만 한 동생을 보며 미주가 언제 저 꼴을 안 보나 싶어 물었다.
“너 언제까지 특별휴가야?”
“내일까지.”
창으로 보이는 밖은 산책하고 운동하기에 알맞은 바람이 불고 햇빛이 따사로웠다. 진혁이 간단하게 대답을 마치고 조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조카님, 가자. 가서 공원도 한 바퀴 돌고 오케이?”
“오케이!”
공원으로 나간 진혁의 큰 자전거와 기원의 작은 자전거가 나란히 달린다. 기원은 잘생기고 재밌기까지 하는 외삼촌이 자신의 집에 더 머무른다는 것이 좋다. 외삼촌은 이렇게 자주 자신과 자전거도 타 주고 잘 놀아 주기까지 한다.
작은 자전거의 템포에 맞춰 페달을 밟는 큰 자전거의 모습이 다정스럽다. 몇 바퀴나 돌고 돌며 지칠 줄도 모르게 페달을 밟던 기원이와 진혁은 자전거를 멈추고 가쁜 숨을 내쉬며 벤치에 털썩 앉았다. 밥 먹은 것이 거의 다 소화되었는지 한창 성장기에 있는 기원이 외삼촌을 졸랐다.
“외삼촌, 저기 큰 마트 가서 아이스크림 사 먹자.”
“그래, 대신 엄마한테는 비밀이야.”
“엉.”
“가자.”
진혁과 기원은 공원을 벗어나 가까운 큰 마트로 자전거를 몰았다. 마트 앞 자전거 거치대에 자전거를 세운 그들은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마트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그 때 낯익은 얼굴 하나가 마트 입구에서 불쑥 나왔다. 단발머리의 그녀! 몸에 딱 맞는 분홍색 추리닝을 입은 그녀다. 진혁이 먼저 말을 걸기도 전에 기원이 그녀를 불렀다.
“선생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란 상아는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큰 형체와 작은 형체를 보고 소스라치며 들고 있던 맥주와 소시지를 떨어뜨렸다. 떨어진 맥주와 소시지를 쳐다본 네 개의 눈동자 위로 상아의 새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요즘 커피는 참 디자인이 세련되게 나온단 말이야. 그…… 그렇죠? 기원이 외삼촌.”
“그러네요?”
기원은 선생님이 떨어뜨린 캔을 보고 어떤 음료수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선생님은 내가 같은 캔이라고 맥주와 커피를 구분도 못 하는 줄 아나 보다. 엄마랑 아빠가 짠, 하고 마시고 혀를 꼬아 발음하게 하는 음료가 술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는데. 선생님도 어른이신데 당연히 드실 수 있는 거지.
“선생님도 힘드시면 술 한 잔 하실 수도 있죠, 뭐 다 이해해요.”
“어…… 어? 그……래. 고맙다.”
매사에 당황하지 않는 상아지만, 주말에, 그것도 낮에 술이나 마시는 선생님으로 보여질까 걱정이 되었다. 아직은 자신의 반 아이들에게는 최상의 모습만 보여 주고 싶고 최고의 선생님으로 남아 있고 싶은 그녀다.
상아는 눈앞에 떨어진 맥주를 부숴 버리고 싶었다.
“나도 맥주나 한 캔 마셔야겠다.”
맥주나 마셔야겠다는 기원의 외삼촌의 말을 들은 상아가 떨어진 맥주를 주워 얼른 건넸다.
“아, 그럼 이거 드세요.”
술을 건네받은 그의 티셔츠 끝자락을 조카인 기원이 당기며 짐짓 경고했다.
“외삼촌 음주운전은 안 돼.”
“차 가지고 오셨어요?”
진혁과 기원은 동시에 거치대에 세워 둔 자전거를 가리켰다.
상아는 앞에 남자가 조금 새롭게 보였다. 첫 만남이 그렇게 좋은 기억은 아니었고 또다시 만났을 때는 남자 친구가 있냐고 물어 와서 저를 당황시킨 남자가 조카를 데리고 자전거 타러 나온 모습에 상아는 남자가 조금 달라 보였다. 한두 번 일회성으로 조카와 놀아 주는 외삼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자전거는 끌고 가지, 뭐.”
셋은 나란히 걸었다. 두 명은 한 손에 맥주를, 한 명은 아이스크림을 들었다. 두 명은 자전거를 끌고 한 명은 발걸음으로 보폭을 맞추었다. 순식간에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는 기원이 다시 자전거에 올라 공원을 돌았다.
맥주 캔을 든 두 사람은 근처 벤치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때 다른 자전거의 주인이 물었다.
“요즘도 선보러 다니십니까?”
“네? 아니요. 이제는 안 다녀요.”
“다행이네요. 저는 어떠세요?”
“네?”
“처음 본 순간부터 상아 씨가 맘에 들었습니다.”
순간 시끄러웠던 공원은 관객이 없어 적막에 둘러싸인 공연장처럼 조용해졌다. 기원이 자전거를 타며 손을 흔들며 뭐라뭐라 큰 소리로 불렀으나 상아의 귀에는 주인공을 맡은 이 남자의 목소리만 또렷이 들려왔다.
바람이 살살 불던 공원에 모든 공기가 멈추고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의 눈동자만 보였다.
4.
난생처음 진지한 남자의 고백을 들었던 그날 밤에 상아는 길고 긴 꿈을 꾸었다. 꿈에서도 그녀는 자고 있었는데, 주변이 환한 것으로 봐서 아침 무렵이었나 보다.
눈을 떠 보니 갓 지은 밥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부엌에서 자신을 부르는 달콤한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꿈이긴 하지만 결국은 내가 결혼하는 데 성공했나 보다. 그렇다면 나의 반쪽이신 그 상대는 누구일까?
“여보, 일어나서 밥 먹어.”
꿈속의 상아는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편다. 아, 머리가 아프다. 어제 마신 캔맥주가 문제였나 보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어제 그 반질반질한 남자가 그런 소릴 하니까…… 어라? 이게 아닌데…… 아, 모르겠다.
생각이 뒤죽박죽 섞이고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밥이나 먹고 생각해야지. 상아는 깨질 듯한 머리를 붙잡고 부엌으로 나간다.
주방의 싱크대에 선 한 남자가 흰 셔츠 차림에 에이프런을 두르고 밥과 국을 뜨고 있다. 뒷모습뿐이지만 듬직하게 딱 벌어진 어깨하며 쭉 뻗은 다리 위의 탄탄한 엉덩이도 딱 붙어 올라가 있었다. 누구 남편인지 참 결혼 잘했구나, 상아가 꿈이지만 감탄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밥과 국이 놓인 쟁반을 든 남자가 뒤를 돌자, 얼굴이 보인다.
“허……헉.”
어제 그 반지반질한 기원이 외삼촌이다. 꿈속에서의 상아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예요?”
남자는 특유의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며 대답했다.
“왜……라니……? 여보야, 우리 어제 결혼하기로 했잖아.”
“내…… 내가 언제요?”
아무리 꿈이 무의식이 의식에 대한 말 걸기라고 하지만 저 남자와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라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응으으…… 응애…….”
그 남자가 멍한 자신의 이마에 살짝 입 맞추고는 거실을 가로질러 어느 작은 방으로 들어간다. 울음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저 남자와 나 사이에 애도 있나 보다.
설마…… 속도위반……? 우리 엄마가 알면 날 살려 두지 않았을 텐데 무사한 걸 보니 잘 넘어갔나 보다.
그 남자가 나온다. 남자가 우리 집 곰 인형 지. 수. 를 들쳐 메고 있다.
“에구, 우리 지수 배고팠쪄요? 아빠가 우리 지수 맘마 줄게요.”
진혁이 능숙한 듯 곰 인형 엉덩이를 토닥토닥하면서 기어이 젖병을 곰 인형에게 물렸다. 상아는 그제야 꿈속이지만 바짝 정신을 차리고 진혁에게 물었다.
“저기요. 최진혁 씨…… 이거 꿈이지요?”
“네, 멍멍멍멍.”
멍멍 하는 개소리가 점점 울리는 듯이 커지더니 진혁이 씨익 웃었다.
상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나서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강한 꿈의 여운 때문에 한참을 누워 있었다.
멍멍멍이라니…… 이런! 다시는 꾸고 싶지도 않고 다시는 없어야 할 개꿈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났다.
“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꿈에서까지 그 남자를 만나다니.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지만 실제로는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 개꿈을 꾸고 나서 기분이 나빠야 정상인데 의외로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이 이상하다. 상아가 안고 있던 곰 인형 지수를 꼬집고 그 큰 머리를 흔들어 댔다.
“지수야, 요즘 너 내 꿈에 너무 자주 등장한다?”
당연히 지수는 아무 말이 없지. 상아가 진지하게 지수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이제 그 남자까지 데리고 내 꿈에 주연을 맡으셨어요. 그만 나와도 될 것 같은데? 내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니.”
상아는 애꿎은 곰 인형만 때리며 침대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소리쳤다.
잘생긴 그 얼굴 때문일까? 꿈에서 만난 남자의 모습에 침을 흘릴 뻔했다. 얼굴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상아였지만 잘생겨서 나쁠 건 없다. 아니 정신 차리자.
상아는 두 손으로 ‘짝’ 소리 나게 자신의 뺨을 한 대 때렸다. 그러고는 욕실로 들어가 흘러내리는 물에 몸을 맡겼다. 욕실 밖으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고 물소리와 섞여 들려왔다.
*
서울 고층빌딩 숲 사이 위치한 법무법인 한율.
진혁이 차를 주차시키고 한율이라고 적힌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한율은 우리나라의 로펌 중 1, 2위를 다투는 큰 회사이다. 그리고 그는 여기 한율의 이혼전문변호사이다.
다른 사람들은 치정싸움에 얽힌 일들을 하찮게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겪어 본 사람은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으리라. 진혁이 이혼전문을 맡게 된 데는 어린 시절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
그가 9살, 누나가 11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다. 아버지의 바람이 문제였다. 아버지는 애원하는 가족을 놔두고 다른 여자에게 가 버렸다. 결혼은 그 사람의 인생에서 큰 조각이다. 그 조각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이혼이라면? 조각은 돌아가도 그 자리에는 자국이 남는다. 그 자국이 큰 상처가 되지 않도록…… 곪지 않도록…… 하는 일이 진혁이 하는 일이다.
주차장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에 오른 진혁은 같은 회사 선배 변호사를 만났다. 진혁이 고개 숙여 반듯하게 인사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어이, 최 변. 휴가 동안 잘 쉬었나?”
“네? 흐흐.”
갑자기 입에서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선배 변호사가 들고 있는 커피 캔을 보고 순간 맥주를 커피라 속이던 상아가 생각났다. 별것 아닌 커피 캔에도 자신의 고백에 당황해 크게 뜬 검고 예뻤던 눈이 떠올랐다. 이제는 정말 시도 때도 없이 그 여자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나오는 걸 멈출 수가 없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평소에는 잘 웃지도 않는 후배가 자신을 보더니 실없이 웃는다. 혹시 차에서 급하게 먹은 삼각김밥 김이 이에 끼기라도 했나 싶어 거울을 보며 입을 벌려 보니, 다행히 깨끗했다.
“아, 아닙니다. 웃긴 일이 생각나서요…….”
“사람 참 실없기는…….”
엘리베이터에서 같이 내린 김 변호사가 진혁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사무실로 가 버렸다. 진혁도 자신의 사무실이 위치한 민법 소송 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좋은 아침입니다. 저 없는 동안 잘 지내셨어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최 변호사의 모습에 김 비서가 벌떡 일어나 격하게 반겼다. 무려 일주일 만에 저 멋진 얼굴을 보는 거다.
“꺅! 변호사님!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요.”
“네, 김 비서님.”
김 비서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뒤로 보이는 지긋하게 나이 든 김 부장을 보고 안부를 물었다.
“부장님도 별일 없으셨죠?”
“그럼요, 변호사님 안 계시는 동안 저희 열심히 했습니다.”
급한 소송을 다 마무리한 진혁은 휴가를 받았지만 법원에 들어갈 소장 작성하고 의뢰인 면담을 잡아야 했던 두 사람은 휴가를 받지 못했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그도 휴가는 받지 못했으리라. 이번 일만 끝나면 두 사람도 휴가를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다. 진혁이 고마운 마음을 담아 말했다.
“김 비서님과 김 부장님이 뭐 언제는 열심히 안 해 주셨나요? 저는 두 분 덕분에 두 다리 쭉 뻗고 쉬었습니다. 김 부장님, 업무보고 좀 해 주세요.”
김 부장님께 부탁하고 안쪽에 마련된 사무실 방으로 들어서는 진혁에게 김 비서가 언제나처럼 밝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변호사님 커피 한 잔 타다 드릴까요?”
“그럼 너무 감사하죠.”
검정색 재킷을 벗어 걸어 놓고는 그는 업무 보고를 받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김 부장이 들어온다. 그가 본격적인 일을 시작한다.
“의뢰인은 누구입니까?”
“네, 44세 남성으로 본명은 김철수입니다.”
“부장님, 상황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지금 남편과 부인 둘 다 합의이혼을 원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이를 한 명씩 데려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부부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고 헤어지는 데 이의가 없다면 합의이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재판이혼으로 가게 되는데, 이들은 합의이혼이 가능한 상황인데도 아이들이 문제가 되어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형제인가요? 자매인가요?”
“네, 형제 2명입니다. 한 명은 11살, 한 명은 9살입니다.”
“꼭 그 아이들을 따로 따로 보내야 합니까?”
“의뢰인은 둘 다 데려오고 싶어 하는데 부인 쪽에서 반대하나 봅니다.”
“둘 다 보내든지, 둘 다 데려오든지 하는 게 아이들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게.”
이혼을 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는 큰 혼란과 상처를 안겨 주게 될 것인데 거기다 한쪽이 한 명만 데려가겠다고? 싸우게 되면 아이들이 받을 고통이 엄청날 것이다. 조정이 필요할 것 같다.
“제가 의뢰인을 만나 보고, 부인 쪽 변호사와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김 부장이 노크하고 나가고는 김 비서가 커피를 들고 들어온다.
“최 변호사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럽 없이. 맞죠?”
“네, 감사합니다. 김 비서님. 그리고 3시에 의뢰인하고 약속 잡아 주세요.”
돌아서는 김 비서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김 비서가 문고리를 잡는 손이 떨린다. 잠깐 휴가 갔다 온 사이 진혁은 더 멋있어졌다. 김 비서의 가슴이 콩닥된다.
“부장님…… 우리 변호사님 너무 멋지지 않아요?”
“아서라. 못 오를 나무 쳐다보는 거 아니다, 너.”
“치이…… 혹시 알아요?”
“의뢰인하고 약속 잡아야 되는 거 아냐? 최 변호사님이 저렇게 친절하셔도 일에 제대로 안 하는 사람은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알지?”
“잡으면 되잖아요.”
김 비서가 은근슬쩍 최 변호사를 그녀에게 갖다 붙였다.
입사 때부터 최 변호사와 쭉 계속해 온 김 부장은 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안다. 저렇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는 있지만 그건 전부 예의에서 나오는 것일 뿐 절대 같이 일하는 여자들에게 진지한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그리고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그다.
진혁의 팀은 그가 없는 동안 새로 시작하는 소송의 소장을 작성해 접수하고 예약을 받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약속한 3시.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온다. 의뢰인인가 보다.
“안녕하세요. 김철수입니다.”
“네, 여기로 들어오세요.”
김 비서가 문을 열어 주니 펜대를 돌리며 서류를 보고 있던 진혁이 의자에서 일어난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제가 이번 의뢰를 받은 최진혁입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이리로 앉으시죠.”
“의뢰하신 내용을 보니까 김철수 씨 앞으로 자녀 중 형을, 부인 쪽으로 동생을 보낸다고 하시던데요.”
“네, 맞습니다.”
진혁은 처음 사항을 보고받았을 때부터 생각했던 말을 전했다.
“이혼은 일단 부인분과 남편분 두 분의 문제이긴 하지만…… 최우선으로 자녀분들을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압니다. 하지만 부인 쪽에서도 아이들을 원하고 있는 터라…….”
“이혼가정의 아이들은 자연스레 부모님의 이혼이 나 때문은 아닌가라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겠죠.”
“…….”
“또 어찌 되었든 의뢰인분이나 부인분은 생계를 위해서 일을 하셔야 될 겁니다. 형제도 없이 혼자 남겨진 아이들이 그 상처를 어떻게 이겨 낼지 솔직히 걱정이 됩니다. 옆에 형이나 동생이 있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아내도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두 분 중 한 분이 맡아서 키우시고…… 면접교섭권으로 한 달에 한 번씩이나 두 번씩 만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면접교섭권이란 부부가 이혼한 뒤 자식을 양육하지 않는 부모가 자식을 만나거나 전화 또는 편지 등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이른다.
“제가 애들 엄마와 상의해 보겠습니다.”
진혁의 말을 듣고 나서 생각이 많아진 의뢰인이 돌아갔다.
“휴우.”
이혼을 진행하면서도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면 감정이 앞선다. 매번 이러지 말자…… 다짐을 하면서도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 그 아이들의 상처와 내 상처가 겹쳐 보였다. 어른이 되면서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안에는 아직 다 자라지 못한 그 아이가 있는가 보다.
엄마가 일하러 나가고 없는 집 안에서 누나는 내게 엄마고, 아빠였다. 남겨진 아이들이 더 상처받지 않도록…… 그 자국이 깊지 않기를 바라 본다.
돌아오는 주말. 오늘은 진혁의 특별 휴가 마지막 날이다. 점심때까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그는 자신이 자는 동안 책상에 앉아 조용히 공부를 하고 있는, 왠지 오늘따라 더 사랑스러워 보이는 조카의 얼굴에 뽀뽀를 날려 주고는 흐흐 웃었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던 그녀의 꼬리를 잡고 난 후부터 그는 이상하게 기분이 날아다닌다.
그렇게 그 기분에 취해 실실거리던 그는, 정확히 밥 먹을 시간에 맞춰 미주가 쾅쾅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밥 먹어!”
밥 얻어먹는 주제에 부를 때 한 번에 나가야지 안 그러면 언제 밥주걱이 날아올지 모른다. 진혁과 기원은 미주가 한 번 더 밥 먹으라 외치기 전에 재빨리 방을 나갔다.
며칠 출장을 가서 볼 수 없었던 기원의 아빠, 매형이 보였다.
“언제 오셨어요?”
“어제 저녁 늦게 왔지 처남, 우리 밥 먹고 기원이랑 셋이 사우나라도 갈까? 남자끼리 뭉쳐야지.”
기원의 아빠, 미주의 남편이자 진혁에게는 매형이기도 한 그는 사우나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그 뜨거운 곳으로 목간 가서 때 빼고 땀내는 게 삶의 낙이라고 할 정도로 사우나를 즐긴다.
하지만 그 하나뿐인 삶의 낙인 사우나에 한 번 가면 몇 시간이고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아 누나는 매형이 사우나 가는 것을 싫어한다. 동그란 누나의 눈이 세모꼴로 바뀐다.
“매형, 누나가 흘겨보는데요?”
“흠흠, 밥이나 먹자…….”
역시나 이 집의 최강 권력자인 누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매형도 이렇게 바로 깨깽 하고 꼬리를 내린다. 진혁은 계속 생각하고 있던 말을 식탁에서 꺼냈다.
“매형, 저 여기서 당분간 좀 지내면 안 될까요?”
“당연히 되지. 안 그래도 우리 세 식구밖에 없어서 적적한데. 처남이 와 주면 좋지.”
“뭐, 나야 별로 상관없지만…… 우리 집에서 너 회사까지 1시간도 넘게 걸리잖아. 굳이 왜 여기서 지내려고?”
매형과 달리 역시 누나는 날카롭다. 진혁의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다. 진짜 이유를 들키지 않기 위해 결국은 진혁은 재빨리 변명했다.
“그…… 그거야 한 여사 때문이지……. 본가랑 여기는 거리가 있으니까 자주는 못 오겠지.”
미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진혁의 궁색한 변명이 의심스럽기는 매한가지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거기다가 남편은 출장을 자주 가기 때문에 집에 큰 남자가 없어 힘들 때도 있을 때도 있으니깐 동생을 머슴으로 쓰면 되겠다. 힘을 쓰든 안 쓰든 우리 집의 모든 잡무는 이제부터 진혁의 몫이다.
그런 것보다도 기원이 외삼촌을 형처럼 친구처럼 저렇게나 따르는데 어쩌겠는가?
“나는 외삼촌이 우리 집에 있는 거 찬성이야.”
“요 귀여운 우리 조카님, 우리 밥 먹고 자전거 타러 갈까?”
“좋아!!”
일주일이 다 되어 가도록 집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먹고 빈둥거리고 자기만 한 동생을 보며 미주가 언제 저 꼴을 안 보나 싶어 물었다.
“너 언제까지 특별휴가야?”
“내일까지.”
창으로 보이는 밖은 산책하고 운동하기에 알맞은 바람이 불고 햇빛이 따사로웠다. 진혁이 간단하게 대답을 마치고 조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조카님, 가자. 가서 공원도 한 바퀴 돌고 오케이?”
“오케이!”
공원으로 나간 진혁의 큰 자전거와 기원의 작은 자전거가 나란히 달린다. 기원은 잘생기고 재밌기까지 하는 외삼촌이 자신의 집에 더 머무른다는 것이 좋다. 외삼촌은 이렇게 자주 자신과 자전거도 타 주고 잘 놀아 주기까지 한다.
작은 자전거의 템포에 맞춰 페달을 밟는 큰 자전거의 모습이 다정스럽다. 몇 바퀴나 돌고 돌며 지칠 줄도 모르게 페달을 밟던 기원이와 진혁은 자전거를 멈추고 가쁜 숨을 내쉬며 벤치에 털썩 앉았다. 밥 먹은 것이 거의 다 소화되었는지 한창 성장기에 있는 기원이 외삼촌을 졸랐다.
“외삼촌, 저기 큰 마트 가서 아이스크림 사 먹자.”
“그래, 대신 엄마한테는 비밀이야.”
“엉.”
“가자.”
진혁과 기원은 공원을 벗어나 가까운 큰 마트로 자전거를 몰았다. 마트 앞 자전거 거치대에 자전거를 세운 그들은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마트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그 때 낯익은 얼굴 하나가 마트 입구에서 불쑥 나왔다. 단발머리의 그녀! 몸에 딱 맞는 분홍색 추리닝을 입은 그녀다. 진혁이 먼저 말을 걸기도 전에 기원이 그녀를 불렀다.
“선생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란 상아는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큰 형체와 작은 형체를 보고 소스라치며 들고 있던 맥주와 소시지를 떨어뜨렸다. 떨어진 맥주와 소시지를 쳐다본 네 개의 눈동자 위로 상아의 새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요즘 커피는 참 디자인이 세련되게 나온단 말이야. 그…… 그렇죠? 기원이 외삼촌.”
“그러네요?”
기원은 선생님이 떨어뜨린 캔을 보고 어떤 음료수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선생님은 내가 같은 캔이라고 맥주와 커피를 구분도 못 하는 줄 아나 보다. 엄마랑 아빠가 짠, 하고 마시고 혀를 꼬아 발음하게 하는 음료가 술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는데. 선생님도 어른이신데 당연히 드실 수 있는 거지.
“선생님도 힘드시면 술 한 잔 하실 수도 있죠, 뭐 다 이해해요.”
“어…… 어? 그……래. 고맙다.”
매사에 당황하지 않는 상아지만, 주말에, 그것도 낮에 술이나 마시는 선생님으로 보여질까 걱정이 되었다. 아직은 자신의 반 아이들에게는 최상의 모습만 보여 주고 싶고 최고의 선생님으로 남아 있고 싶은 그녀다.
상아는 눈앞에 떨어진 맥주를 부숴 버리고 싶었다.
“나도 맥주나 한 캔 마셔야겠다.”
맥주나 마셔야겠다는 기원의 외삼촌의 말을 들은 상아가 떨어진 맥주를 주워 얼른 건넸다.
“아, 그럼 이거 드세요.”
술을 건네받은 그의 티셔츠 끝자락을 조카인 기원이 당기며 짐짓 경고했다.
“외삼촌 음주운전은 안 돼.”
“차 가지고 오셨어요?”
진혁과 기원은 동시에 거치대에 세워 둔 자전거를 가리켰다.
상아는 앞에 남자가 조금 새롭게 보였다. 첫 만남이 그렇게 좋은 기억은 아니었고 또다시 만났을 때는 남자 친구가 있냐고 물어 와서 저를 당황시킨 남자가 조카를 데리고 자전거 타러 나온 모습에 상아는 남자가 조금 달라 보였다. 한두 번 일회성으로 조카와 놀아 주는 외삼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자전거는 끌고 가지, 뭐.”
셋은 나란히 걸었다. 두 명은 한 손에 맥주를, 한 명은 아이스크림을 들었다. 두 명은 자전거를 끌고 한 명은 발걸음으로 보폭을 맞추었다. 순식간에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는 기원이 다시 자전거에 올라 공원을 돌았다.
맥주 캔을 든 두 사람은 근처 벤치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때 다른 자전거의 주인이 물었다.
“요즘도 선보러 다니십니까?”
“네? 아니요. 이제는 안 다녀요.”
“다행이네요. 저는 어떠세요?”
“네?”
“처음 본 순간부터 상아 씨가 맘에 들었습니다.”
순간 시끄러웠던 공원은 관객이 없어 적막에 둘러싸인 공연장처럼 조용해졌다. 기원이 자전거를 타며 손을 흔들며 뭐라뭐라 큰 소리로 불렀으나 상아의 귀에는 주인공을 맡은 이 남자의 목소리만 또렷이 들려왔다.
바람이 살살 불던 공원에 모든 공기가 멈추고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의 눈동자만 보였다.
4.
난생처음 진지한 남자의 고백을 들었던 그날 밤에 상아는 길고 긴 꿈을 꾸었다. 꿈에서도 그녀는 자고 있었는데, 주변이 환한 것으로 봐서 아침 무렵이었나 보다.
눈을 떠 보니 갓 지은 밥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부엌에서 자신을 부르는 달콤한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꿈이긴 하지만 결국은 내가 결혼하는 데 성공했나 보다. 그렇다면 나의 반쪽이신 그 상대는 누구일까?
“여보, 일어나서 밥 먹어.”
꿈속의 상아는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편다. 아, 머리가 아프다. 어제 마신 캔맥주가 문제였나 보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어제 그 반질반질한 남자가 그런 소릴 하니까…… 어라? 이게 아닌데…… 아, 모르겠다.
생각이 뒤죽박죽 섞이고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밥이나 먹고 생각해야지. 상아는 깨질 듯한 머리를 붙잡고 부엌으로 나간다.
주방의 싱크대에 선 한 남자가 흰 셔츠 차림에 에이프런을 두르고 밥과 국을 뜨고 있다. 뒷모습뿐이지만 듬직하게 딱 벌어진 어깨하며 쭉 뻗은 다리 위의 탄탄한 엉덩이도 딱 붙어 올라가 있었다. 누구 남편인지 참 결혼 잘했구나, 상아가 꿈이지만 감탄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밥과 국이 놓인 쟁반을 든 남자가 뒤를 돌자, 얼굴이 보인다.
“허……헉.”
어제 그 반지반질한 기원이 외삼촌이다. 꿈속에서의 상아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예요?”
남자는 특유의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며 대답했다.
“왜……라니……? 여보야, 우리 어제 결혼하기로 했잖아.”
“내…… 내가 언제요?”
아무리 꿈이 무의식이 의식에 대한 말 걸기라고 하지만 저 남자와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라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응으으…… 응애…….”
그 남자가 멍한 자신의 이마에 살짝 입 맞추고는 거실을 가로질러 어느 작은 방으로 들어간다. 울음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저 남자와 나 사이에 애도 있나 보다.
설마…… 속도위반……? 우리 엄마가 알면 날 살려 두지 않았을 텐데 무사한 걸 보니 잘 넘어갔나 보다.
그 남자가 나온다. 남자가 우리 집 곰 인형 지. 수. 를 들쳐 메고 있다.
“에구, 우리 지수 배고팠쪄요? 아빠가 우리 지수 맘마 줄게요.”
진혁이 능숙한 듯 곰 인형 엉덩이를 토닥토닥하면서 기어이 젖병을 곰 인형에게 물렸다. 상아는 그제야 꿈속이지만 바짝 정신을 차리고 진혁에게 물었다.
“저기요. 최진혁 씨…… 이거 꿈이지요?”
“네, 멍멍멍멍.”
멍멍 하는 개소리가 점점 울리는 듯이 커지더니 진혁이 씨익 웃었다.
상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나서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강한 꿈의 여운 때문에 한참을 누워 있었다.
멍멍멍이라니…… 이런! 다시는 꾸고 싶지도 않고 다시는 없어야 할 개꿈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났다.
“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꿈에서까지 그 남자를 만나다니.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지만 실제로는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 개꿈을 꾸고 나서 기분이 나빠야 정상인데 의외로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이 이상하다. 상아가 안고 있던 곰 인형 지수를 꼬집고 그 큰 머리를 흔들어 댔다.
“지수야, 요즘 너 내 꿈에 너무 자주 등장한다?”
당연히 지수는 아무 말이 없지. 상아가 진지하게 지수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이제 그 남자까지 데리고 내 꿈에 주연을 맡으셨어요. 그만 나와도 될 것 같은데? 내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니.”
상아는 애꿎은 곰 인형만 때리며 침대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소리쳤다.
잘생긴 그 얼굴 때문일까? 꿈에서 만난 남자의 모습에 침을 흘릴 뻔했다. 얼굴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상아였지만 잘생겨서 나쁠 건 없다. 아니 정신 차리자.
상아는 두 손으로 ‘짝’ 소리 나게 자신의 뺨을 한 대 때렸다. 그러고는 욕실로 들어가 흘러내리는 물에 몸을 맡겼다. 욕실 밖으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고 물소리와 섞여 들려왔다.
*
서울 고층빌딩 숲 사이 위치한 법무법인 한율.
진혁이 차를 주차시키고 한율이라고 적힌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한율은 우리나라의 로펌 중 1, 2위를 다투는 큰 회사이다. 그리고 그는 여기 한율의 이혼전문변호사이다.
다른 사람들은 치정싸움에 얽힌 일들을 하찮게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겪어 본 사람은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으리라. 진혁이 이혼전문을 맡게 된 데는 어린 시절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
그가 9살, 누나가 11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다. 아버지의 바람이 문제였다. 아버지는 애원하는 가족을 놔두고 다른 여자에게 가 버렸다. 결혼은 그 사람의 인생에서 큰 조각이다. 그 조각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이혼이라면? 조각은 돌아가도 그 자리에는 자국이 남는다. 그 자국이 큰 상처가 되지 않도록…… 곪지 않도록…… 하는 일이 진혁이 하는 일이다.
주차장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에 오른 진혁은 같은 회사 선배 변호사를 만났다. 진혁이 고개 숙여 반듯하게 인사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어이, 최 변. 휴가 동안 잘 쉬었나?”
“네? 흐흐.”
갑자기 입에서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선배 변호사가 들고 있는 커피 캔을 보고 순간 맥주를 커피라 속이던 상아가 생각났다. 별것 아닌 커피 캔에도 자신의 고백에 당황해 크게 뜬 검고 예뻤던 눈이 떠올랐다. 이제는 정말 시도 때도 없이 그 여자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나오는 걸 멈출 수가 없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평소에는 잘 웃지도 않는 후배가 자신을 보더니 실없이 웃는다. 혹시 차에서 급하게 먹은 삼각김밥 김이 이에 끼기라도 했나 싶어 거울을 보며 입을 벌려 보니, 다행히 깨끗했다.
“아, 아닙니다. 웃긴 일이 생각나서요…….”
“사람 참 실없기는…….”
엘리베이터에서 같이 내린 김 변호사가 진혁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사무실로 가 버렸다. 진혁도 자신의 사무실이 위치한 민법 소송 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좋은 아침입니다. 저 없는 동안 잘 지내셨어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최 변호사의 모습에 김 비서가 벌떡 일어나 격하게 반겼다. 무려 일주일 만에 저 멋진 얼굴을 보는 거다.
“꺅! 변호사님!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요.”
“네, 김 비서님.”
김 비서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뒤로 보이는 지긋하게 나이 든 김 부장을 보고 안부를 물었다.
“부장님도 별일 없으셨죠?”
“그럼요, 변호사님 안 계시는 동안 저희 열심히 했습니다.”
급한 소송을 다 마무리한 진혁은 휴가를 받았지만 법원에 들어갈 소장 작성하고 의뢰인 면담을 잡아야 했던 두 사람은 휴가를 받지 못했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그도 휴가는 받지 못했으리라. 이번 일만 끝나면 두 사람도 휴가를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다. 진혁이 고마운 마음을 담아 말했다.
“김 비서님과 김 부장님이 뭐 언제는 열심히 안 해 주셨나요? 저는 두 분 덕분에 두 다리 쭉 뻗고 쉬었습니다. 김 부장님, 업무보고 좀 해 주세요.”
김 부장님께 부탁하고 안쪽에 마련된 사무실 방으로 들어서는 진혁에게 김 비서가 언제나처럼 밝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변호사님 커피 한 잔 타다 드릴까요?”
“그럼 너무 감사하죠.”
검정색 재킷을 벗어 걸어 놓고는 그는 업무 보고를 받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김 부장이 들어온다. 그가 본격적인 일을 시작한다.
“의뢰인은 누구입니까?”
“네, 44세 남성으로 본명은 김철수입니다.”
“부장님, 상황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지금 남편과 부인 둘 다 합의이혼을 원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이를 한 명씩 데려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부부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고 헤어지는 데 이의가 없다면 합의이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재판이혼으로 가게 되는데, 이들은 합의이혼이 가능한 상황인데도 아이들이 문제가 되어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형제인가요? 자매인가요?”
“네, 형제 2명입니다. 한 명은 11살, 한 명은 9살입니다.”
“꼭 그 아이들을 따로 따로 보내야 합니까?”
“의뢰인은 둘 다 데려오고 싶어 하는데 부인 쪽에서 반대하나 봅니다.”
“둘 다 보내든지, 둘 다 데려오든지 하는 게 아이들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게.”
이혼을 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는 큰 혼란과 상처를 안겨 주게 될 것인데 거기다 한쪽이 한 명만 데려가겠다고? 싸우게 되면 아이들이 받을 고통이 엄청날 것이다. 조정이 필요할 것 같다.
“제가 의뢰인을 만나 보고, 부인 쪽 변호사와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김 부장이 노크하고 나가고는 김 비서가 커피를 들고 들어온다.
“최 변호사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럽 없이. 맞죠?”
“네, 감사합니다. 김 비서님. 그리고 3시에 의뢰인하고 약속 잡아 주세요.”
돌아서는 김 비서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김 비서가 문고리를 잡는 손이 떨린다. 잠깐 휴가 갔다 온 사이 진혁은 더 멋있어졌다. 김 비서의 가슴이 콩닥된다.
“부장님…… 우리 변호사님 너무 멋지지 않아요?”
“아서라. 못 오를 나무 쳐다보는 거 아니다, 너.”
“치이…… 혹시 알아요?”
“의뢰인하고 약속 잡아야 되는 거 아냐? 최 변호사님이 저렇게 친절하셔도 일에 제대로 안 하는 사람은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알지?”
“잡으면 되잖아요.”
김 비서가 은근슬쩍 최 변호사를 그녀에게 갖다 붙였다.
입사 때부터 최 변호사와 쭉 계속해 온 김 부장은 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안다. 저렇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는 있지만 그건 전부 예의에서 나오는 것일 뿐 절대 같이 일하는 여자들에게 진지한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그리고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그다.
진혁의 팀은 그가 없는 동안 새로 시작하는 소송의 소장을 작성해 접수하고 예약을 받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약속한 3시.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온다. 의뢰인인가 보다.
“안녕하세요. 김철수입니다.”
“네, 여기로 들어오세요.”
김 비서가 문을 열어 주니 펜대를 돌리며 서류를 보고 있던 진혁이 의자에서 일어난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제가 이번 의뢰를 받은 최진혁입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이리로 앉으시죠.”
“의뢰하신 내용을 보니까 김철수 씨 앞으로 자녀 중 형을, 부인 쪽으로 동생을 보낸다고 하시던데요.”
“네, 맞습니다.”
진혁은 처음 사항을 보고받았을 때부터 생각했던 말을 전했다.
“이혼은 일단 부인분과 남편분 두 분의 문제이긴 하지만…… 최우선으로 자녀분들을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압니다. 하지만 부인 쪽에서도 아이들을 원하고 있는 터라…….”
“이혼가정의 아이들은 자연스레 부모님의 이혼이 나 때문은 아닌가라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겠죠.”
“…….”
“또 어찌 되었든 의뢰인분이나 부인분은 생계를 위해서 일을 하셔야 될 겁니다. 형제도 없이 혼자 남겨진 아이들이 그 상처를 어떻게 이겨 낼지 솔직히 걱정이 됩니다. 옆에 형이나 동생이 있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아내도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두 분 중 한 분이 맡아서 키우시고…… 면접교섭권으로 한 달에 한 번씩이나 두 번씩 만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면접교섭권이란 부부가 이혼한 뒤 자식을 양육하지 않는 부모가 자식을 만나거나 전화 또는 편지 등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이른다.
“제가 애들 엄마와 상의해 보겠습니다.”
진혁의 말을 듣고 나서 생각이 많아진 의뢰인이 돌아갔다.
“휴우.”
이혼을 진행하면서도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면 감정이 앞선다. 매번 이러지 말자…… 다짐을 하면서도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 그 아이들의 상처와 내 상처가 겹쳐 보였다. 어른이 되면서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안에는 아직 다 자라지 못한 그 아이가 있는가 보다.
엄마가 일하러 나가고 없는 집 안에서 누나는 내게 엄마고, 아빠였다. 남겨진 아이들이 더 상처받지 않도록…… 그 자국이 깊지 않기를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