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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고백은 처음입니다
“너, 인상이 나빠.”
27년 동안 줄곧 들어왔던 말을 좋아하던 상대에게 듣는 기분이란, 한마디로 개떡 같다. 일부러 얼굴을 구기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지.
왠지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지만 은결은 꾹 참았다.
“헤어지자는 이유가 그거야?”
차라리 또 다른 여자친구가 생겼다면 바쁜 자신과 만나지 못해 그랬던 거라, 마음이 흔들렸던 거라 생각하면 된다. 요즘 줄곧 야근을 해 왔으니 아마도 서운했겠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저와 헤어지려는 원인이 외모와 관련되었다면 사정은 다르다. 은결은 제 얼굴에 칼을 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인상이 나쁘다는 말을 줄곧 들어왔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것은 이런 얼굴이라도 좋아해 줄 누군가가 있을 거라 믿어 왔기 때문이다.
은결은 부디 그 이유만은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눈앞에서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어.”
그러나 남자에겐 자비란 없었다.
은결의 약점이 찢어진 눈매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이렇게 끝을 맺을 예정이었다면, 처음부터 사귀어 주지를 말지.
은결은,
“너같이 험악한 여자친구를 데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무서워하잖아.”
라는 말까지 덧붙이는 남자를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말없이 아래로 얼굴을 떨어뜨리는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는 매캐한 담배 연기를 그녀에게 뿜으며 속삭였다.
“웬만하면 수술하지 그래? 눈매 교정만 해도 훨씬 부드러워질 텐데 말이야.”
“…….”
“뭐, 네가 인상만 좋아지면 나도 널 그리 싫어하지는 않으니까 계속 사귀어 줄 수도…… 윽!”
은결이 비흡연자라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굳이 제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걸로도 모자라 성형 수술 권유까지 하다니. 최악의 남자였다.
은결은 자신이 들어 올린 주먹에 정확히 얼굴을 가격당한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을 바라보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그건 내가 사양이다, 이 자식아!”
*
“어머, 고은결 씨, 왜 벌써 와? 남자친구랑 점심 먹는다고 나가지 않았어?”
점심시간이 시작된 지 10분이 채 되지 않아 회사로 돌아왔다. 놀랍게도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아마도 서운함보다 화가 더 났기 때문일 거다.
은결은 문을 열자마자 자신을 의아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는 기획 3팀의 정채영 대리를 바라봤다. 불과 몇 분 전에 정 대리를 향해 웃으며 남자친구가 맛있는 점심을 사 주겠다고 회사 밖으로 불러낸 걸 자랑하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괜스레 비참해졌다.
“배…… 불러서요. 그냥 빨리 왔어요.”
은결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제 자리로 걸어갔다. 정 대리가 ‘왜 저래?’ 하고 주변의 직원들과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모른 척했다.
“그럼 은결 씨, 사무실 좀 부탁해. 우리 점심 먹고 올게!”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제 책상 위에 엎드려 버리는 은결에게 정 대리가 말했다. 알겠다는 듯 손을 들어 올리자 점심을 함께 먹기로 했던 직원들과 정 대리가 사무실을 벗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나간 이후 고요해진 사무실엔 은결 한 명뿐이다. 이 넓은 공간에 저 혼자밖에 없다는 것도 쓸쓸한데 배까지 고프니 눈물이 핑 돌려 했다.
‘울지 말아야지.’
하지만 여기서 참지 못하고 울게 된다면 저를 버린 남자에게 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 때문에 차인 것도 서러운데 보기 흉하게 울 수는 없지.
은결은 입술을 꽉 깨물며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성난 아귀처럼 꼬르륵 요동치는 아랫배를 움켜쥐며 터벅터벅 사무실을 벗어났다.
지하에 위치한 매점까지 내려가기엔 시간이 촉박했으므로 사무실 근처의 휴게실로 향했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는 자판기의 커피라도 입안에 쏟아부어야 할 것 같아 주머니를 뒤적였다. 마침 500원짜리 동전 하나가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이게 웬 호재냐 싶어 입꼬리를 올린 그녀는 밀크 커피 한 잔을 뽑기 위해 동전 투입구로 500원을 밀어 넣으려 했다.
“아.”
“…….”
오늘은 되는 일이 없는 날인 걸까.
따뜻한 밀크 커피 한 잔으로 퇴근 시간까지 버텨 보려 했던 은결의 다짐은 저와 동시에 동전 투입구로 손을 뻗은 또 다른 사람에 의해 와르르 무너졌다. 그녀는 자신이 쥐고 있던 500원짜리 동전과 똑같은 크기의 동전을 밀어 넣으려는 사람의 팔을 발견하고 나지막한 탄식을 터뜨렸다.
거지 같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올린 은결은 미간을 좁혔다.
‘눈부셔.’
사람의 얼굴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느낌이란 이런 걸까. 말 한마디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 보여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기 피부 못지않은 하얀 얼굴에 커다란 눈, 오뚝한 코, 붉은 입술을 자랑하고 있는 남자는 검은 눈동자에 은결을 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남자는,
‘기획 2팀의 왕자…… 였나?’
비록 같은 팀 직원은 아니었지만 회사를 다니는 이라면 누구라도 이 남자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은결이 속한 기획 3팀과 끈질긴 악연을 유지하고 있는 기획 2팀에서도 유능하다고 소문나 있는 걸로도 모자라 얼굴까지 훤칠하여 왕자 소리를 듣고 있는, 기획 2팀의 팀장. 강윤우.
말단 직원인지라 기획 2팀의 팀장인 그와는 입사한 이래 말 한 마디 나누어 본 적이 없었던 은결은 저를 직시하고 있는 강윤우 팀장을 향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님 먼저 하세요.”
계급도 한참은 낮은 데다 웬만한 이들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오라를 풍기는 이에게 맞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그의 대답을 기다릴 생각도 없이 뒤로 살짝 물러났다.
‘확실히 잘생기긴 했네.’
기획 2팀을 끔찍이 싫어하는 기획 3팀 식구들 중에서도, 특히 여직원들이 강윤우 팀장이 지나갈 때마다 꺅꺅거리던 이유가 있었다.
그런 강 팀장이 점심 식사 시간에 홀로 휴게실에 있었다는 사실을 다른 여직원들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놀랄까. 아마 내 안구를 공유하고 싶다며 부러워했겠지. 자랑할 게 없으니 이거라도 자랑해야겠다,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은결은 달콤한 커피향이 코앞에서 느껴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깨를 들썩이던 그녀가 얼굴을 들어 올리자 냉랭한 얼굴의 강 팀장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예?”
양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게 밀크 커피를 내민 저의가 뭘까. 레이디 퍼스트. 뭐, 이런 건가. 은결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자신에게 커피를 받으라는 듯 묵묵히 서 있는 강윤우 팀장에게서 그것을 건네받았다.
“고, 고맙습니다.”
매너남이네.
그 남자에게 차인 이후로 바닥을 기던 기분이 조금은 풀어졌다. 그래서 나름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려 눈꼬리를 휘었다. 물론 이 같은 미소도 상대의 눈에는 억지로 웃는 것처럼 보이겠지. 항상 그래 왔으니까.
은결은 씁쓸한 웃음이 입가로 번지는 것을 느꼈다.
“참, 이거 받으세요.”
“…….”
“그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공짜로 얻어먹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꽉 움켜쥐고 있던 500원을 강윤우 팀장의 커다란 손 위에 얹은 은결은 목례하곤 뒤로 돌아섰다.
오른손에 들린 종이컵이 무척 따뜻했다. 배가 채워질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던 그녀는 사무실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고은결 씨.”
갑자기 들린 자신의 이름에 은결은 걸음을 멈췄다. 내 이름을 알고 있었나? 그와 대화를 나눈 건 오늘이 처음이건만 기획 3팀의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네?”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자 강윤우 팀장이 미간을 살짝 좁히는 게 보였다. 차가운 기운을 풍기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건가? 은결은 살짝 긴장했다.
‘아! 혹시 내가 500원을 줘서?’
기획 2팀의 왕자는 은결에게 어쩌면 호의를 베풀려 했던 건지도 모른다. 눈을 꼭 감고 커피를 사 줄 생각이었는데 굳이 500원을 제 손에 쥐여 준 은결이 불쾌했던 건지도 모르지.
은결은 굳은 얼굴의 강 팀장을 흘깃거리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결심했다는 듯 이를 악물며 강 팀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팀장님, 저는 원래 남한테 대가 없이는…….”
“고백은 처음입니다.”
아무래도…… 타이밍의 문제일까?
은결이 말을 뱉어 냄과 동시에 강윤우 팀장의 말이 흘러나왔다. 두 남녀는 인적 없는 고요한 복도에 서서 입을 연 채로 서로를 응시했다.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은결은 진지한 얼굴의 강윤우 팀장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옅게 웃으며 말했다.
“팀장님 먼저 말씀하세요.”
강 팀장은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뱉어 내더니 이내 다시 은결을 바라보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서 실수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으니 미리 양해 바랍니다.”
은결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강윤우 팀장은 어리둥절해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은결은 눈을 굴리다 수긍하며 대답했다.
“아, 이 커피를요?”
그럼 왜 나를 준 거야?
보기보다 이상한 남자가 아닐 수 없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은결은 들고 있던 커피를 그에게 다시 건네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팔이 뻗어지기 직전 다시금 강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을요.”
“…….”
“…….”
“네?”
1. 내 생애 처음입니다(1)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매는 은결에게 있어선 어릴 적부터 쭉 콤플렉스였다. 그녀는 예쁘게 휘어진다면 모를까, 사나운 인상을 풍기는 자신의 눈이 싫었다.
너무 찢어져서 작아 보이기까지 하는 눈을 크게 뜨면 달라질까 생각해서 일부러 힘을 주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 친구들이 그녀 가까이로 다가오지 않았다.
쌍꺼풀 수술을 하면 힘을 줄 필요도 없었으므로 중학교 시절에 수술을 시켜 달라며 부모님께 떼를 쓴 적도 있었다. 아직 어려서 안 된다는 말을 듣자마자 토라진 얼굴로 밖으로 뛰쳐나가 쌍꺼풀 액을 사서 눈두덩에 덕지덕지 바른 적도 있었고, 그런 제 모습을 가족들에게 들켜 버린 적도 있었다.
‘그렇게 수술이 하고 싶어?’
이런 모습으로 살고 싶지 않다며 엉엉 울어 버리는 은결을 타이르던 그녀의 어머니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은결에게 물었었다. 주저하지도 않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은결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 주던 어머니는 흐리게 웃으며 속삭였다.
‘하지만 그런 은결이 얼굴을 좋아해 줄 사람도 있을 텐데…….’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나도 싫은데! 너무 무섭고 싫은데!’
버럭 외치는 은결을 꼭 끌어안아 주며 어머니는 다정하게 말했다.
‘엄마는 있을 거라 믿어. 우리 은결이가 어떤 모습을 하더라도, 은결이만 좋아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엄마는, 믿어.’
고작 중학교 2학년. 아직 만난 사람보다 만날 사람들이 더 많은 열다섯의 소녀는 상냥한 어머니의 속삭임에 홀라당 넘어갔고, 언젠가 자신의 사나운 인상도 좋아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여태껏 살아왔었다. 물론 지난 27년 동안 그녀의 첫 인상을 ‘무섭다’고 말한 사람들보다 ‘좋다’고 말한 사람이 손에 꼽을 만큼 적다는 게 문제긴 했지만.
어떨 땐 매섭고 사나운 얼굴이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었기에 여전히 성형 수술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말이지.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아닌가.
은결은 방금 들었던 말을 되새기며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얼굴을 일그러뜨릴 때마다 주위 사람들에게 ‘무서워 보여!’라는 말을 들어 억지로 웃으려 노력하는 편이기는 했으나 이번만큼은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했다.
그녀는 커피를 든 채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 검은 눈동자가 시야로 들어왔다. 태연하기도 하지. 은결은 마치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남자를 향해 입꼬리를 올려 주었다.
“그런 농담은, 재미없어요.”
제 딴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화를 내는 것처럼 보였을까?
조금 고민을 했다. 입을 길게 찢으며 말을 해도 눈이 전혀 웃고 있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자신을 잘 화를 내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물론, 지금 이 상황이 전혀 웃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딱딱해진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라면 약간의 위트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은결은 손을 휘휘 저으며 외쳤다.
‘생긴 것과는 다른 사람인가.’
그러면서 스윽 강윤우 팀장을 흘겨본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획 2팀의 ‘왕자’라 불리고 있고 언뜻 들은 바로는 온몸에 카리스마가 배어 있다던 사람인데 대화를 나눠 보니 실없기 그지없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만큼 마음이 헤픈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상대가 팀장님이라 아주 약간은,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신선했어요!”
하지만 너무 차갑게 응수하면 상대가 당황할 수도 있기에 칭찬도 곁들어 주며 은결은 미소 지었다. 강 팀장은 그런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프롤로그.
고백은 처음입니다
“너, 인상이 나빠.”
27년 동안 줄곧 들어왔던 말을 좋아하던 상대에게 듣는 기분이란, 한마디로 개떡 같다. 일부러 얼굴을 구기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지.
왠지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지만 은결은 꾹 참았다.
“헤어지자는 이유가 그거야?”
차라리 또 다른 여자친구가 생겼다면 바쁜 자신과 만나지 못해 그랬던 거라, 마음이 흔들렸던 거라 생각하면 된다. 요즘 줄곧 야근을 해 왔으니 아마도 서운했겠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저와 헤어지려는 원인이 외모와 관련되었다면 사정은 다르다. 은결은 제 얼굴에 칼을 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인상이 나쁘다는 말을 줄곧 들어왔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것은 이런 얼굴이라도 좋아해 줄 누군가가 있을 거라 믿어 왔기 때문이다.
은결은 부디 그 이유만은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눈앞에서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어.”
그러나 남자에겐 자비란 없었다.
은결의 약점이 찢어진 눈매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이렇게 끝을 맺을 예정이었다면, 처음부터 사귀어 주지를 말지.
은결은,
“너같이 험악한 여자친구를 데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무서워하잖아.”
라는 말까지 덧붙이는 남자를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말없이 아래로 얼굴을 떨어뜨리는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는 매캐한 담배 연기를 그녀에게 뿜으며 속삭였다.
“웬만하면 수술하지 그래? 눈매 교정만 해도 훨씬 부드러워질 텐데 말이야.”
“…….”
“뭐, 네가 인상만 좋아지면 나도 널 그리 싫어하지는 않으니까 계속 사귀어 줄 수도…… 윽!”
은결이 비흡연자라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굳이 제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걸로도 모자라 성형 수술 권유까지 하다니. 최악의 남자였다.
은결은 자신이 들어 올린 주먹에 정확히 얼굴을 가격당한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을 바라보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그건 내가 사양이다, 이 자식아!”
*
“어머, 고은결 씨, 왜 벌써 와? 남자친구랑 점심 먹는다고 나가지 않았어?”
점심시간이 시작된 지 10분이 채 되지 않아 회사로 돌아왔다. 놀랍게도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아마도 서운함보다 화가 더 났기 때문일 거다.
은결은 문을 열자마자 자신을 의아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는 기획 3팀의 정채영 대리를 바라봤다. 불과 몇 분 전에 정 대리를 향해 웃으며 남자친구가 맛있는 점심을 사 주겠다고 회사 밖으로 불러낸 걸 자랑하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괜스레 비참해졌다.
“배…… 불러서요. 그냥 빨리 왔어요.”
은결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제 자리로 걸어갔다. 정 대리가 ‘왜 저래?’ 하고 주변의 직원들과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모른 척했다.
“그럼 은결 씨, 사무실 좀 부탁해. 우리 점심 먹고 올게!”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제 책상 위에 엎드려 버리는 은결에게 정 대리가 말했다. 알겠다는 듯 손을 들어 올리자 점심을 함께 먹기로 했던 직원들과 정 대리가 사무실을 벗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나간 이후 고요해진 사무실엔 은결 한 명뿐이다. 이 넓은 공간에 저 혼자밖에 없다는 것도 쓸쓸한데 배까지 고프니 눈물이 핑 돌려 했다.
‘울지 말아야지.’
하지만 여기서 참지 못하고 울게 된다면 저를 버린 남자에게 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 때문에 차인 것도 서러운데 보기 흉하게 울 수는 없지.
은결은 입술을 꽉 깨물며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성난 아귀처럼 꼬르륵 요동치는 아랫배를 움켜쥐며 터벅터벅 사무실을 벗어났다.
지하에 위치한 매점까지 내려가기엔 시간이 촉박했으므로 사무실 근처의 휴게실로 향했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는 자판기의 커피라도 입안에 쏟아부어야 할 것 같아 주머니를 뒤적였다. 마침 500원짜리 동전 하나가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이게 웬 호재냐 싶어 입꼬리를 올린 그녀는 밀크 커피 한 잔을 뽑기 위해 동전 투입구로 500원을 밀어 넣으려 했다.
“아.”
“…….”
오늘은 되는 일이 없는 날인 걸까.
따뜻한 밀크 커피 한 잔으로 퇴근 시간까지 버텨 보려 했던 은결의 다짐은 저와 동시에 동전 투입구로 손을 뻗은 또 다른 사람에 의해 와르르 무너졌다. 그녀는 자신이 쥐고 있던 500원짜리 동전과 똑같은 크기의 동전을 밀어 넣으려는 사람의 팔을 발견하고 나지막한 탄식을 터뜨렸다.
거지 같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올린 은결은 미간을 좁혔다.
‘눈부셔.’
사람의 얼굴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느낌이란 이런 걸까. 말 한마디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 보여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기 피부 못지않은 하얀 얼굴에 커다란 눈, 오뚝한 코, 붉은 입술을 자랑하고 있는 남자는 검은 눈동자에 은결을 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남자는,
‘기획 2팀의 왕자…… 였나?’
비록 같은 팀 직원은 아니었지만 회사를 다니는 이라면 누구라도 이 남자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은결이 속한 기획 3팀과 끈질긴 악연을 유지하고 있는 기획 2팀에서도 유능하다고 소문나 있는 걸로도 모자라 얼굴까지 훤칠하여 왕자 소리를 듣고 있는, 기획 2팀의 팀장. 강윤우.
말단 직원인지라 기획 2팀의 팀장인 그와는 입사한 이래 말 한 마디 나누어 본 적이 없었던 은결은 저를 직시하고 있는 강윤우 팀장을 향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님 먼저 하세요.”
계급도 한참은 낮은 데다 웬만한 이들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오라를 풍기는 이에게 맞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그의 대답을 기다릴 생각도 없이 뒤로 살짝 물러났다.
‘확실히 잘생기긴 했네.’
기획 2팀을 끔찍이 싫어하는 기획 3팀 식구들 중에서도, 특히 여직원들이 강윤우 팀장이 지나갈 때마다 꺅꺅거리던 이유가 있었다.
그런 강 팀장이 점심 식사 시간에 홀로 휴게실에 있었다는 사실을 다른 여직원들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놀랄까. 아마 내 안구를 공유하고 싶다며 부러워했겠지. 자랑할 게 없으니 이거라도 자랑해야겠다,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은결은 달콤한 커피향이 코앞에서 느껴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깨를 들썩이던 그녀가 얼굴을 들어 올리자 냉랭한 얼굴의 강 팀장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예?”
양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게 밀크 커피를 내민 저의가 뭘까. 레이디 퍼스트. 뭐, 이런 건가. 은결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자신에게 커피를 받으라는 듯 묵묵히 서 있는 강윤우 팀장에게서 그것을 건네받았다.
“고, 고맙습니다.”
매너남이네.
그 남자에게 차인 이후로 바닥을 기던 기분이 조금은 풀어졌다. 그래서 나름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려 눈꼬리를 휘었다. 물론 이 같은 미소도 상대의 눈에는 억지로 웃는 것처럼 보이겠지. 항상 그래 왔으니까.
은결은 씁쓸한 웃음이 입가로 번지는 것을 느꼈다.
“참, 이거 받으세요.”
“…….”
“그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공짜로 얻어먹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꽉 움켜쥐고 있던 500원을 강윤우 팀장의 커다란 손 위에 얹은 은결은 목례하곤 뒤로 돌아섰다.
오른손에 들린 종이컵이 무척 따뜻했다. 배가 채워질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던 그녀는 사무실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고은결 씨.”
갑자기 들린 자신의 이름에 은결은 걸음을 멈췄다. 내 이름을 알고 있었나? 그와 대화를 나눈 건 오늘이 처음이건만 기획 3팀의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네?”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자 강윤우 팀장이 미간을 살짝 좁히는 게 보였다. 차가운 기운을 풍기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건가? 은결은 살짝 긴장했다.
‘아! 혹시 내가 500원을 줘서?’
기획 2팀의 왕자는 은결에게 어쩌면 호의를 베풀려 했던 건지도 모른다. 눈을 꼭 감고 커피를 사 줄 생각이었는데 굳이 500원을 제 손에 쥐여 준 은결이 불쾌했던 건지도 모르지.
은결은 굳은 얼굴의 강 팀장을 흘깃거리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결심했다는 듯 이를 악물며 강 팀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팀장님, 저는 원래 남한테 대가 없이는…….”
“고백은 처음입니다.”
아무래도…… 타이밍의 문제일까?
은결이 말을 뱉어 냄과 동시에 강윤우 팀장의 말이 흘러나왔다. 두 남녀는 인적 없는 고요한 복도에 서서 입을 연 채로 서로를 응시했다.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은결은 진지한 얼굴의 강윤우 팀장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옅게 웃으며 말했다.
“팀장님 먼저 말씀하세요.”
강 팀장은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뱉어 내더니 이내 다시 은결을 바라보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서 실수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으니 미리 양해 바랍니다.”
은결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강윤우 팀장은 어리둥절해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은결은 눈을 굴리다 수긍하며 대답했다.
“아, 이 커피를요?”
그럼 왜 나를 준 거야?
보기보다 이상한 남자가 아닐 수 없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은결은 들고 있던 커피를 그에게 다시 건네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팔이 뻗어지기 직전 다시금 강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을요.”
“…….”
“…….”
“네?”
1. 내 생애 처음입니다(1)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매는 은결에게 있어선 어릴 적부터 쭉 콤플렉스였다. 그녀는 예쁘게 휘어진다면 모를까, 사나운 인상을 풍기는 자신의 눈이 싫었다.
너무 찢어져서 작아 보이기까지 하는 눈을 크게 뜨면 달라질까 생각해서 일부러 힘을 주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 친구들이 그녀 가까이로 다가오지 않았다.
쌍꺼풀 수술을 하면 힘을 줄 필요도 없었으므로 중학교 시절에 수술을 시켜 달라며 부모님께 떼를 쓴 적도 있었다. 아직 어려서 안 된다는 말을 듣자마자 토라진 얼굴로 밖으로 뛰쳐나가 쌍꺼풀 액을 사서 눈두덩에 덕지덕지 바른 적도 있었고, 그런 제 모습을 가족들에게 들켜 버린 적도 있었다.
‘그렇게 수술이 하고 싶어?’
이런 모습으로 살고 싶지 않다며 엉엉 울어 버리는 은결을 타이르던 그녀의 어머니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은결에게 물었었다. 주저하지도 않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은결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 주던 어머니는 흐리게 웃으며 속삭였다.
‘하지만 그런 은결이 얼굴을 좋아해 줄 사람도 있을 텐데…….’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나도 싫은데! 너무 무섭고 싫은데!’
버럭 외치는 은결을 꼭 끌어안아 주며 어머니는 다정하게 말했다.
‘엄마는 있을 거라 믿어. 우리 은결이가 어떤 모습을 하더라도, 은결이만 좋아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엄마는, 믿어.’
고작 중학교 2학년. 아직 만난 사람보다 만날 사람들이 더 많은 열다섯의 소녀는 상냥한 어머니의 속삭임에 홀라당 넘어갔고, 언젠가 자신의 사나운 인상도 좋아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여태껏 살아왔었다. 물론 지난 27년 동안 그녀의 첫 인상을 ‘무섭다’고 말한 사람들보다 ‘좋다’고 말한 사람이 손에 꼽을 만큼 적다는 게 문제긴 했지만.
어떨 땐 매섭고 사나운 얼굴이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었기에 여전히 성형 수술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말이지.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아닌가.
은결은 방금 들었던 말을 되새기며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얼굴을 일그러뜨릴 때마다 주위 사람들에게 ‘무서워 보여!’라는 말을 들어 억지로 웃으려 노력하는 편이기는 했으나 이번만큼은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했다.
그녀는 커피를 든 채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 검은 눈동자가 시야로 들어왔다. 태연하기도 하지. 은결은 마치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남자를 향해 입꼬리를 올려 주었다.
“그런 농담은, 재미없어요.”
제 딴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화를 내는 것처럼 보였을까?
조금 고민을 했다. 입을 길게 찢으며 말을 해도 눈이 전혀 웃고 있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자신을 잘 화를 내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물론, 지금 이 상황이 전혀 웃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딱딱해진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라면 약간의 위트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은결은 손을 휘휘 저으며 외쳤다.
‘생긴 것과는 다른 사람인가.’
그러면서 스윽 강윤우 팀장을 흘겨본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획 2팀의 ‘왕자’라 불리고 있고 언뜻 들은 바로는 온몸에 카리스마가 배어 있다던 사람인데 대화를 나눠 보니 실없기 그지없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만큼 마음이 헤픈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상대가 팀장님이라 아주 약간은,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신선했어요!”
하지만 너무 차갑게 응수하면 상대가 당황할 수도 있기에 칭찬도 곁들어 주며 은결은 미소 지었다. 강 팀장은 그런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