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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내 생애 처음입니다(2)


“왜 그러세요?”
자신을 또렷이 직시하는 그의 시선에 부담감을 느낀 은결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강윤우 팀장의 닫혀 있던 입술이 열렸다.
“닦으시죠.”
“네?”
은결은 말과 동시에 제게 손수건 하나를 내미는 그를 멍하게 응시했다. 그는 주저하다 말했다.
“눈물, 흐르는데.”
……!
화들짝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는 사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이 뺨을 타고 아래로 툭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점심시간에 갑자기 불려 나가서 뻥 차여 버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누군가 제게 장난이었더라도 좋아한다는 말을 뱉어 냈기 때문일까. 아마도 전자 쪽이겠지.
속이 미쳐 버릴 만큼 욱신거리는 게 모두 남자친구에게 차인 충격으로 인해 그런 거라고 되뇌며 그녀는 입술을 세게 악물었다.
“하하, 사……사실 말이에요. 저 오늘 기분이 되게 안 좋았어요.”
잘 마주치기 힘든, 그것도 왕자라고 불리는 인기인 앞에서 멍하게 울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그에게서 손수건을 받아 든 은결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밝게 소리쳤다.
“이거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말이죠…… 저, 방금 전에 남자친구한테 차였거든요!”
풀이 죽는다면 지는 거다, 끊임없이 속으로 외치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강윤우 팀장은 그런 은결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아니 글쎄, 저보고 인상이 나쁘대요. 여자친구한테 인상이 나쁘다고 헤어지자는 남자, 어떻게 생각해요? 팀장님이 보시기에도 제가 그렇게 무섭게 보이나요?”
그의 대답을 들을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은결은 뭔가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강 팀장보다 먼저 말을 뱉어 냈다.
“하긴,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은 나빠 보이긴 하죠. 인정해요! 이렇게 사납게 생긴 여자는 제가 봐도 드문 편이니까. 뭐, 무섭다는 소리를 안 들은 것도 아니고.”
하아, 한숨을 쉬던 그녀는 이젠 나도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어요. 이게 다, 선천적인 거거든요. 그래도 그렇지 얼굴을 어떻게 뜯어 고쳐요. 제가 우리 부모님의 딸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건데.”
강윤우 팀장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은결은 돌연 화가 치밀어 올라 눈을 치켜뜨며 외쳤다.
“그렇지만…… 너무한 거 아니에요? 사귀는 여자의 콤플렉스를 건드리다니. 진짜 최악의 남자잖아요, 그거! 팀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저한테 동의하시는 거죠?”
내가 왜 이런 말까지 이 남자에게 하고 있는 걸까.
그것도 오늘에서야 처음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남자에게, 대체 왜.
아무래도 그의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눈물을 흘려 버렸던 게 꽤나 부끄러웠던 건지도 모른다. 그 부끄러움을 무마시키기 위해 과장된 몸짓과 얼굴로 소리를 뱉어 내고 있는 건지도.
은결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자책하고 또 자책했지만 물꼬를 트기 시작한 말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어쨌든…… 질 나쁜 농담이었지만, 덕분에 기분은 많이 풀렸네요. 고마워요, 팀장님.”
그 누구에도 털어놓지 못할 일을 낯선 이에게 실컷 풀어놓으니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가볍다. 은결은 왠지 개운해지는 것을 느끼며 싱긋 웃어 보였다. 이번엔 제대로 웃은 거겠지. 그녀는 방금 전 지었던 미소보다 이번의 미소가 훨씬 더 자연스러웠다는 것을 깨달으며 뿌듯해했다.
강윤우 팀장은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가지 표정을 보여 주는 그녀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돈은 돌려받지 않을 거예요.”
마음이 점점 안정되는 것을 느낀 은결은 움켜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얼굴을 완벽하게 닦은 후 그를 직시했다.
“친하지 않은 사람에겐 빚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성격이라서 말이죠. 아무리 상사시라도, 어쩔 수가 없네요.”
하고.
나름 쿨하게 고개를 까딱인 후 손수건까지 쥐여 준 그녀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려 했다.
‘……!’
그러나 은결의 의지는 그녀가 등을 돌려 발을 앞으로 내딛었을 때 손목을 잡아 버리는 누군가의 커다란 손에 의해 막혀 버렸다. 이 휴게실 내에 있던 사람이 그녀를 제외하곤 단 한 사람밖에 없었기에 그녀의 손목을 잡은 이가 누군지 쉽게 짐작 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강윤우 팀장에게로 몸을 돌린 은결이 눈을 크게 뜨자, 그는 얼른 은결에게서 손을 떼어 내곤 말했다.
“같이 마시죠.”
“예?”
그 남자는 예쁘게 웃었다.
“커피, 같이 마셔요.”

*

“흐음.”
보기만 해도 우아미가 흘러넘치는 남자는 코끝으로 커피의 진한 향기를 빨아들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여자라면 누구나 홀려 버릴 것 같은 얼굴이지만 안타깝게도 은결의 취향과는 거리가 있었기에 혹하지는 않았다.
강윤우 팀장은 후광이 비치는 얼굴을 은결에게 꽂으며 말했다.
“향이 좋네요.”
“자판기 커핀데요.”
퉁명스러운 은결의 대답에 강 팀장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으나 그의 회복력은 빠른 편이었다. 그는 휴게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로 은결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좋네요. 고은결 씨랑 마시고 있으니까 그런가.”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 내는 걸 보면 분명히 선수다. 은결은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왜 이곳에 앉아 있는지 아직까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려 본다면 약간은 수긍할 수 있다.
‘싫은데요.’
‘그럼 안 되죠. 고은결 씨는 나한테 빚을 졌잖습니까.’
커피를 함께 마시자는 그의 제안에 단칼에 거절하는 은결을 보며 강 팀장은 말했었다. 500원도 이미 돌려줬는데 빚은 무슨 빚? 어이가 없어 그를 바라보는 은결에게 기획 2팀의 왕자는 속삭였다.
‘내 손수건, 썼잖아요.’
고작 손수건 빌려 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몸을 돌리려는 은결을 잡아 세웠다.
그 후,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강 팀장의 주도하에 두 사람은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매너남은 무슨.’
협박남이구만.
말을 하면 할수록 눈앞의 남자에 대한 이미지가 깨진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씰룩거리던 그녀는 결국 참다못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 팀장이 의아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자 그녀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저기 말이에요, 강윤우 팀장님.”
“네, 고은결 씨.”
강윤우 팀장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제 이름이 묘하게 간지럽게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녀는 저를 바라보는 그를 무심하게 노려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죠?”
대뜸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나, 커피를 함께 마시자고 하지 않나. 그녀가 이 회사에 입사를 한 지 2년이 흘러가건만 그동안 접점이라곤 없었던 사람과 대화를 하려니 마음이 몹시 불편하다.
은결은 유쾌해야 할 자신의 점심시간이 몹시 우울해지고 있음을 느끼며 그를 적대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러자 도리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남자의 얼굴엔 의문이 가득하다.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뭐를.
“고은결 씨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었는데.”
은결은 황당스럽기 그지없는 그 말을 또 꺼내는 윤우를 향해 싸늘하게 대답했다.
“농담이셨잖아요.”
“고백을 농담으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날이 선 답변이 들려왔다. 은결은 곧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남자에게 조심스레 되물었다.
“진담……이셨어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멍해짐과 동시에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강윤우 팀장은 비틀거리는 은결을 부축하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
그의 부축에 겨우 제자리를 잡은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강 팀장을 쳐다봤다. 그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 앉으시죠.”
“아, 네에.”
뭐가 뭔지 모르겠다. 진담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기는 한데, 와 닿지는 않는다. 은결은 부드럽게 속삭이는 그를 흘긋거리다 어느새 식어 있는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강윤우 팀장이 말하는 게 들려온다.
“커피가 식겠습니다.”
“식은 커피를 싫어하지는 않아요.”
“기억해 둬야겠군요.”
그는 매우 다정한 음성을 뱉어 냈다. 은결은 더 이상 김이라곤 피어오르지 않는 종이컵을 응시했다. 눈을 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앞에 아른거리는 강윤우 팀장의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눌렀다 스윽 고개를 들어 강 팀장을 바라보았다.
왕자가 내게 왜 이러는 걸까.
혹시 다른 사람이랑 무슨 내기라도 한 건가?
기획 3팀의 사나운 여자를 함락시키면 승리한다는 그런 내기라도 되는 거야?
한 번 시작된 망상은 끝없이 퍼져 나갔다. 결론이 좋지 않은 쪽으로 끝나자 미간이 저절로 좁아졌다.
은결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마시던 강 팀장이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은결에게 눈길을 돌려온다.
“매우 따갑군요. 고은결 씨의 시선은.”
그 말이 꼭 ‘눈빛이 사나워.’라고 들렸던 터라 기분이 나빠진 은결은 차갑게 대응했다.
“장난이라면 여기서 그만두세요.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봤으니깐요.”
보다니?
놀라는 은결에게 그는 말을 덧붙였다.
“그 남자가 고은결 씨한테 하는 말을 모두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까 고은결 씨도 말해 주지 않았습니까? 차이셨다고.”
아.
“그래서 저는 기회,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까?”
놀리는 건 사양이라고 말할 예정이었는데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어 내지 못했다. 은결은 ‘기회’라는 말에 유독 힘을 주는 그를 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 그 말을 알아채자마자 다시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강윤우 팀장님!”
“예?”
“그렇게 안 봤는데 팀장님 역시 그 남자랑 똑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람을 놀리는 건 정도껏 하세요! 매우 실망입…….”
꼬르륵―!
“……니다.”
들렸을까?
분명 들렸을 거다.
들렸을 테지.
들렸을 거야!
잘 익은 홍시마냥 얼굴이 익어 가는 게 느껴졌다. 뱃고동 소리가 나자마자 입을 다물어 버렸으니까. 뒤늦게 말을 끝맺어 보았지만 이미 고개를 푹 숙여 버린 후였다.
은결은 귀가 새빨갛게 변했을 거라 확신하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아아.”
가만히 은결의 말을 들어 주고만 있던 강윤우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든 그녀는 배를 슥슥 문지르는 그의 행동에 의아해했다.
강 팀장은 떨리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은결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배가 많이 고프네요.”
그는 매우 자연스럽게 손목에 찬 시계를 흘긋거렸다.
“아직 점심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어때요. 식사하러 가시겠습니까?”

*

‘나는 무슨 생각인 걸까?’
은결은 수도 없이 생각했다.
식사를 하러 가자는 그의 말에 뒤를 따를 때도, 차 문을 열어 주는 그의 호의에 고개를 까딱일 때도, 회사와 꽤나 거리가 있는 분식집 앞에 차를 세운 그가 내리라고 말할 때도, 돈가스 2개요, 라는 말을 그가 뱉어 낼 때도. 끊임없이, 쉬지 않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회사에서 말 한 번 나누지 않던 남자와 오늘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같이 커피를 마시고, 함께 식사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런 모험은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배가…… 고프니까.’
천둥보다 더 큰 소리로 울리던 뱃고동 소리를 떠올리며 은결은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배가 고프니까.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눈앞의 남자가 몇 분 전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였든, 일단 허기진 배를 채워야 하잖아? 그래야 퇴근 시간까지 일을 할 수도 있지!
“자, 주문하신 돈가스 두 개, 나왔습니다요. 맛있게 드십쇼!”
작은 분식집이었다. 차를 타고 올 정도로 회사와 떨어져 있었기에 한 번도 오지 못했던. 점심시간이지만 손님이 많지는 않았다. 이런 곳에서 정말 장사를 할까 싶을 정도여서 왜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건지 의문이 들기도 했었는데, 은결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돈가스를 바라보자마자 강 팀장이 저를 데려온 이유를 깨달았다.
‘맛있겠어!’
침이 고였다. 배가 무척 고팠던 이유도 있었지만 음식 냄새가 너무 좋았다. 당장이라도 포크를 집어 들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눈앞에 그 남자가 있었기에 꾹 참았다.
머뭇거리는 그녀를 향해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 집 돈가스는 매우 맛있는 편입니다. 학창 시절부터 자주 찾던 곳이죠. 아마 고은결 씨도 좋아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어서 들어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이니까.”
은결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다른 꿍꿍이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직 의혹을 덜 수는 없다. 그래도 눈앞의 돈가스는 매우 맛있어 보였다. 그녀는 엄청난 고민에 휩싸였지만 결국 본능에 지고야 말았다.
“잘…… 먹겠습니다!”
눈앞에 놓인 맛깔스러운 음식을 입에 넣지 않는다면 퇴근 시간까지 버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누구와 함께 있든 간에 일단 배는 채우자는 생각으로 포크를 집어 든 은결은 자신의 돈가스를 썰어 준 그에게 고맙다며 고개를 까딱여 주곤 잘 썰린 돈가스 조각 하나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맛있어!’
확실히 왕자의 단골집답게 돈가스는 환상적이었다. 감격스러워 눈물이 다 나올 정도였다. 은결은 허겁지겁 돈가스 조각을 먹으며 배를 채웠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회사의 다른 식구들에게도 꼭 추천해 줘야지.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좀 천천히 드세요. 체하겠군요.”
“아, 네.”
“…….”
응?
싱글벙글 웃으며 돈가스를 먹던 은결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제 접시 안에 수북이 쌓인 돈가스 조각과는 달리 강윤우 팀장의 그릇에는 돈가스가 반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릴 무렵이었다. 분명 그가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순식간에 반이나 사라진 돈가스는 모두 나한테 온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