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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식사하러 나가시는 거예요? 다녀오세요.”
알은체를 하는 사무실 사람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찬영은 전화기를 어깨와 얼굴 사이에 끼운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번 주 중으로는 마치기 힘들다고 앓는 소리를 하던 현장소장과의 통화가 길어지고 있었다.
제법 잘나간다는 건축사사무소 팀장으로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지 한 달. 모든 것은 순조로웠고 나름대로 여유를 찾아가고 있었지만, 문만 열고 나서면 가득한 스모그와 발 디딜 곳 없이 복잡하기만 한 시내의 풍경은 여전히 적응이 어려웠다.
같이 점심이나 하자며 찾아온 택일을 만나러 회사에서 100m쯤 떨어진 식당으로 간 찬영은 심각한 표정으로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는 택일을 발견하고는 앞에 자리를 잡았다. 제대를 하고 잠깐 만났던 적이 있었으니 한 7년 만인가.
“어이, 친구. 오랜만이다.”
“그러게. 아무튼 정말 반갑다.”
오랜만에 나누는 악수에 힘이 실렸다.
“어떻게 이 형님이 먼저 찾게 만드냐. 아무튼 매정한 놈이야.”
“하하. 미안. 나름대로 적응을 하느라 힘들었다.”
“잘나가는 놈들이 꼭 핑계는 많지. 불고기백반 시켰는데 괜찮지?”
친구란 것이 이래서 무서운 걸까. 7년이라는 긴 시간이 무색할 만큼 오랜만의 만남인데도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19살의 소년에서 남자가 되고, 이제 서른에 접어든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때의 친구 같으니 말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젠 어린 소년이 아닌, 제법 성인 남자의 태가 난다는 것 정도.
“얘기 들었다. 너 무슨 박람회인가 어디서 상 받았다며? 지난번에 수명이가 그러더라. 네가 설계한 집에 가 봤는데 아주 끝내주더라고.”
“운이 좋았지, 뭐.”
찬영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짜식. 잘난 놈이 겸손은…….”
지난해 그가 설계했던 친환경 주택이 런던에서 열린 국제건축박람회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덕분에 여러 방송 프로에까지 소개가 될 정도로 제법 유명세를 탔던지라 건축업계에선 고찬영을 차지하기 위해 몸살을 앓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사이 그들의 식탁 위로 음식이 차려졌다. 근처에서 소문난 집이라더니 맛이 제법 훌륭하다. 대접에 나온 차진 흰쌀밥에 잘 끓어오른 불고기를 넣어 쓱쓱 비벼 먹던 택일이 그릇이 거의 바닥을 드러낼 무렵 수저 끝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치켜떴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다.
“너도 나올 거지?”
“어디?”
“다음 주에 동창회 있어. 애들 너 들어왔다는 소식 듣고 다들 데려오라고 성화다. 너 데려간다고 큰소리 뻥뻥 쳐 놨는데 안 오면 아주 잡아먹을 기세야.”
“…….”
동창회라는 말에 찬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택일을 쳐다봤다. 일단 일부터 저지르고 보는 습관은 여전하다.
“해마다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 얼굴이나 보자고 만든 거였는데, 이참엔 제대로 한번 모여 보려고. 연락 끊긴 애들도 아주 끈질기게 수소문해서 대부분 찾아냈다. 우리가 또 한다면 하는 의지의 한국인들 아니냐?”
연우는? 동창회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물음이 제멋대로 튀어나올 뻔했다. 억지로 말을 입안에 가두고 쓸데없이 오이만 집어 와작 씹었다.
“시간 봐서.”
“허, 너 지금 튕기는 거냐? 형님이 몸소 초빙까지 하러 온 마당에?”
“…….”
대답이 없는 찬영을 힐긋거리며 택일이 느물거리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신경이 쓰일 때마다 나타나는 그 미묘한 표정엔 찬영이 하고 싶은 말이 이미 쓰여 있었다.
“궁금한 거 있으면 뜸 들이지 말고 물어라. 이 형님이 여우 같은 마누라랑 살다 보니 눈치가 백 단이 됐다. 척 봐도 십 리는 본다고.”
“그런 거 없어.”
“새끼,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 네 얼굴에 다 쓰였거든. 거울로 보여 줘?”
“…….”
“연우, 많이 변했다.”
조심스럽게 꺼낸 택일의 말에 찬영은 들고 있던 수저를 말없이 내려놓았다. 입안에 있던 밥알을 꿀꺽 삼키는데 괜히 목이 막혔다. 물컵을 들어 단숨에 비워 냈다. 건너편에서 바라보고 있는 택일의 시선에 안쓰러움이 떠올랐다.
연우. 여전히 콱 박혀 빠지지 않는 가시 같은 이름. 입안에서 맴도는 이름에 또다시 목이 따끔거린다.
“나도 알 만큼은 아니까 속이려 들지 말고 사실대로 털어놓으시지. 이래 봬도 나 눈치 하나 끝내주게 빠른 대한민국 경사다.”
“털어놓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너도 알잖아.”
“아니. 솔직히 난 모르겠다. 왜 결혼 안 하냐? 지난번에 너 들어왔다는 소식 듣고 집에 전화했더니 어머니 아주 걱정이 많으시던데.”
“서른이 늦었다면 세상 사람들 어이없어한다.”
“새끼, 나이 서른에 애 셋 딸렸다고 하면 다들 기절하겠네.”
“하고 싶다고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아직 연우를 못 잊은 건 아니고?”
택일의 물음에 찬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벌써 10년이 다 된 일들. 이제 와 잊고 말고 할 것들이 뭐가 남았을까 싶지만 찬영은 알고 있다. 여전히 그의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은 이름 이연우. 생각하면 애틋하고, 또 한편으로는 원망스러운, 희미하게 변색이 되어 가지만 여전히 남은 감정의 잔재들. 그도 안다. 완전히 그 찌꺼기들을 털어 내지 못하면 다시 시작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잖아. 연우, 날 지독히 미워했어.”
“원래 사랑과 애증은 한 끗발 차이야, 인마. 바탕에 사랑이 깔리지 않으면 미움이고 나발이고 없어.”
한입 가득 음식을 밀어 넣고 우물거리는 택일이 얼른 먹으라며 접시를 찬영에게로 밀었다.
“할머니는…… 아직도 살아 계시니?”
“너 진짜 몰랐어?”
택일이 좀 놀란 눈치다.
“한 3년 됐나? 겨울에 돌아가셨어. 연우도 그전엔 서울에서 살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선 그 집으로 들어갔지. 맞다, 내가 연우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네 집에 전화했더니 어머님이 받으시던데 말 안 해?”
“…….”
“난 또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줄 알았지. 그런 줄도 모르고 지독한 새끼라고 네 욕 실컷 했었는데……. 하필이면 폭설이 쏟아진 때 할머니 장례 치르느라고 고생 옴팡지게 했었다.”
일흔이 다 된 나이에도 참 짱짱하던 분이셨다. 그래서 100세는 거뜬하게 넘길 줄 알았다. 더 이상 연우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말라며 바로 앞에서 문을 닫아 버리던 노인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머리에 떨어지던 소금 세례들이 아직도 가끔 꿈에 나타나 그를 괴롭히고는 했었다.
“연우는 괜찮았어?”
“괜찮을 리가 있냐. 한동안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서 선미가 걔 지켜보느라고 좀 힘들었었지. 지난 일이니까 말이 쉽지, 난 그때 연우도 잘못되는 줄 알고 좀 걱정했었다. 할머니 따라가 버릴 줄 알았었는데, 시간이 약이라고 좀 지나니까 다 털고 일어나더라.”
식사를 마치고 나와 근처 커피숍에서 택일이 어렵게 꺼냈다. 동창회도 동창회지만 택일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정작 다른 것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헤어진 사람에게 전할 만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택일이도 어지간히 속이 탄 모양이었다.
“사실은 너한테 부탁이 있어서 온 거다. 연우 말릴 사람이 너밖에 없을 것 같아서 그래. 우리가 아무리 설득을 해도 소용이 없다. 고생길 훤한 것이 눈에 보이는데 연우 그게 도통 말을 안 들어. 연우 시집 한번 보내 보겠다고 나도, 선미도 참 애 많이 썼다. 다 싫대. 뭔 이유가 그렇게도 많은지 허우대 멀쩡한 놈들 줄기차게 보내도 다 싫대. 그러더니 얼마 전부터 누굴 만난다더라. 그게 누군지 알아? 빌어먹을. 애 둘 딸린 홀아비. 그게 말이 되냐? 나 니들 안 보고 사는 건 상관 안 하겠지만 연우 그러는 건 도저히 못 보겠더라. 부담스러울 거라는 건 알지만 네가 좀 말려 봐.”
택일이 남기고 간 말들이 잔잔한 호숫가에 던져진 돌이 되어 파장을 일으켰다. 폭풍처럼 심하지는 않았지만, 겨우 버티고 서 있던 조각배는 그 물결에 춤을 추다 결국 뒤집어져 버린다. 그 안에 담겨진 기억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며 찬영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모니터엔 꽤 많은 사이트들이 떠 있었다.
‘예담’을 찾아 들어가자 눈에 익은 정겨운 한옥의 풍경들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ㄷ’ 자 형태로 지어진 100년도 넘은 고택. 숙박요금과 집 안 내부를 안내하는 사진들 위로 찬영의 메마른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기억과는 조금 달라졌다고 하나 분명 눈에 익은 것들이다.
게스트하우스라…….
사실 지금쯤이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만 아니면 다시는 발도 딛고 싶지 않다고 늘 노래를 불렀던 연우를 알기에 그곳이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집이 되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홈페이지를 빠져나와 예담을 다녀간 사람들이 올린 블로그를 찾아 들어갔다. 여러 군데를 뒤지다 사진 한 장을 발견한 찬영이 분주히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눈동자가 사람들 틈에 낀 한 여자에게 고정되었다.
친절하고 예쁜 주인과 함께, 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사진 속에 연우가 웃고 있다.
어깨까지 내려오던 긴 머리는 짧은 커트가 되어 있었고, 원래도 예뻤던 이목구비는 더욱 여성스러워져 있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해도 못 알아볼 만큼 변해 있었지만 찬영은 단번에 연우를 알아보았다.
그를 황홀하게 만들었던 눈빛도,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미치게 만들었던 입술도, 여전히 곁을 내주지 않을 것 같은, 조금은 깍쟁이 같은 분위기도 그대로다.
넌 여전하구나…….
까만 가죽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진중함이 가득했던 연우의 그림자가 덮쳐들었다. 연우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뻐근하다. 찬영은 팔을 들어 눈을 감은 얼굴을 가렸다.
‘네가 내 앞에서 당당한 남자로 설 수 있을 때, 그때 나타나. 이렇게 무능하고 구질구질하게 사는 거 나 싫어. 지금은 내가 널 버리지만 억울하면 그때 가서 네가 날 버리란 말이야.’
그렁그렁한 눈물을 매달고 소리치던 연우가 보였다. 지금이 그때라고 장담을 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늦어지면 설 기회조차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연우, 듣고 있니? 나 널 만나러 갈 거야. 네가 버린 남자가 어떻게 됐는지 똑똑히 보여 줄게.
1.(1)
퇴근 시간을 조금 앞당겼지만 결코 여유롭지 못한 도로 사정으로 인해 약속 시간에 늦어 버렸다.
택일이 가르쳐 준 장소에 다다른 찬영은 복잡한 주차장에서 겨우 빈자리를 찾아내고는 차를 세웠다. 막 시동을 끄는데 택일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주차장이야.”
―그래? 잘됐다. 길눈 어두운 까마귀 여사들께서 큰길에서 해매고 있는 모양인데 좀 가 봐. 미국 물 좀 드셨다는 고매하신 고찬영 님께서 몸소 에스코트를 해 줘야 하지 않겠어?
“귀찮아.”
―인마. 넌 어떻게 예나 지금이나 기사도 정신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냐? 기사도 정신은 국 끓여 먹으라고 있는 게 아니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여자들은 말이지, 아무리 잘났더라도 나처럼 유부남이 마중 나오는 건 질색을 한단 말이지.
이어지는 잔소리에 리모컨을 눌러 차문을 잠그던 찬영은 이마를 구겼다.
“그만 좀 하지? 떠드느라 네 입도 피곤하겠다.”
―아무튼 난 너만 믿는다.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끊긴 전화에 찬영은 전화를 노려보다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천천히 주차장을 벗어났다. 저만치 환하게 불을 밝힌 유리창 너머 사람들의 그림자가 북적거렸다. 반짝거리는 작은 전구들이 온통 가지를 휘감은 나무 사이를 지나 이층 건물 앞에 선 찬영은 ‘장수가든’이라고 쓰인 간판을 올려다보며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찾아 물었다. 지포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고 한 모금을 깊숙이 빨아들였다. 아니라고 부정을 하고 싶지만 희미한 긴장감이 등골을 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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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하러 나가시는 거예요? 다녀오세요.”
알은체를 하는 사무실 사람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찬영은 전화기를 어깨와 얼굴 사이에 끼운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번 주 중으로는 마치기 힘들다고 앓는 소리를 하던 현장소장과의 통화가 길어지고 있었다.
제법 잘나간다는 건축사사무소 팀장으로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지 한 달. 모든 것은 순조로웠고 나름대로 여유를 찾아가고 있었지만, 문만 열고 나서면 가득한 스모그와 발 디딜 곳 없이 복잡하기만 한 시내의 풍경은 여전히 적응이 어려웠다.
같이 점심이나 하자며 찾아온 택일을 만나러 회사에서 100m쯤 떨어진 식당으로 간 찬영은 심각한 표정으로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는 택일을 발견하고는 앞에 자리를 잡았다. 제대를 하고 잠깐 만났던 적이 있었으니 한 7년 만인가.
“어이, 친구. 오랜만이다.”
“그러게. 아무튼 정말 반갑다.”
오랜만에 나누는 악수에 힘이 실렸다.
“어떻게 이 형님이 먼저 찾게 만드냐. 아무튼 매정한 놈이야.”
“하하. 미안. 나름대로 적응을 하느라 힘들었다.”
“잘나가는 놈들이 꼭 핑계는 많지. 불고기백반 시켰는데 괜찮지?”
친구란 것이 이래서 무서운 걸까. 7년이라는 긴 시간이 무색할 만큼 오랜만의 만남인데도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19살의 소년에서 남자가 되고, 이제 서른에 접어든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때의 친구 같으니 말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젠 어린 소년이 아닌, 제법 성인 남자의 태가 난다는 것 정도.
“얘기 들었다. 너 무슨 박람회인가 어디서 상 받았다며? 지난번에 수명이가 그러더라. 네가 설계한 집에 가 봤는데 아주 끝내주더라고.”
“운이 좋았지, 뭐.”
찬영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짜식. 잘난 놈이 겸손은…….”
지난해 그가 설계했던 친환경 주택이 런던에서 열린 국제건축박람회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덕분에 여러 방송 프로에까지 소개가 될 정도로 제법 유명세를 탔던지라 건축업계에선 고찬영을 차지하기 위해 몸살을 앓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사이 그들의 식탁 위로 음식이 차려졌다. 근처에서 소문난 집이라더니 맛이 제법 훌륭하다. 대접에 나온 차진 흰쌀밥에 잘 끓어오른 불고기를 넣어 쓱쓱 비벼 먹던 택일이 그릇이 거의 바닥을 드러낼 무렵 수저 끝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치켜떴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다.
“너도 나올 거지?”
“어디?”
“다음 주에 동창회 있어. 애들 너 들어왔다는 소식 듣고 다들 데려오라고 성화다. 너 데려간다고 큰소리 뻥뻥 쳐 놨는데 안 오면 아주 잡아먹을 기세야.”
“…….”
동창회라는 말에 찬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택일을 쳐다봤다. 일단 일부터 저지르고 보는 습관은 여전하다.
“해마다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 얼굴이나 보자고 만든 거였는데, 이참엔 제대로 한번 모여 보려고. 연락 끊긴 애들도 아주 끈질기게 수소문해서 대부분 찾아냈다. 우리가 또 한다면 하는 의지의 한국인들 아니냐?”
연우는? 동창회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물음이 제멋대로 튀어나올 뻔했다. 억지로 말을 입안에 가두고 쓸데없이 오이만 집어 와작 씹었다.
“시간 봐서.”
“허, 너 지금 튕기는 거냐? 형님이 몸소 초빙까지 하러 온 마당에?”
“…….”
대답이 없는 찬영을 힐긋거리며 택일이 느물거리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신경이 쓰일 때마다 나타나는 그 미묘한 표정엔 찬영이 하고 싶은 말이 이미 쓰여 있었다.
“궁금한 거 있으면 뜸 들이지 말고 물어라. 이 형님이 여우 같은 마누라랑 살다 보니 눈치가 백 단이 됐다. 척 봐도 십 리는 본다고.”
“그런 거 없어.”
“새끼,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 네 얼굴에 다 쓰였거든. 거울로 보여 줘?”
“…….”
“연우, 많이 변했다.”
조심스럽게 꺼낸 택일의 말에 찬영은 들고 있던 수저를 말없이 내려놓았다. 입안에 있던 밥알을 꿀꺽 삼키는데 괜히 목이 막혔다. 물컵을 들어 단숨에 비워 냈다. 건너편에서 바라보고 있는 택일의 시선에 안쓰러움이 떠올랐다.
연우. 여전히 콱 박혀 빠지지 않는 가시 같은 이름. 입안에서 맴도는 이름에 또다시 목이 따끔거린다.
“나도 알 만큼은 아니까 속이려 들지 말고 사실대로 털어놓으시지. 이래 봬도 나 눈치 하나 끝내주게 빠른 대한민국 경사다.”
“털어놓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너도 알잖아.”
“아니. 솔직히 난 모르겠다. 왜 결혼 안 하냐? 지난번에 너 들어왔다는 소식 듣고 집에 전화했더니 어머니 아주 걱정이 많으시던데.”
“서른이 늦었다면 세상 사람들 어이없어한다.”
“새끼, 나이 서른에 애 셋 딸렸다고 하면 다들 기절하겠네.”
“하고 싶다고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아직 연우를 못 잊은 건 아니고?”
택일의 물음에 찬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벌써 10년이 다 된 일들. 이제 와 잊고 말고 할 것들이 뭐가 남았을까 싶지만 찬영은 알고 있다. 여전히 그의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은 이름 이연우. 생각하면 애틋하고, 또 한편으로는 원망스러운, 희미하게 변색이 되어 가지만 여전히 남은 감정의 잔재들. 그도 안다. 완전히 그 찌꺼기들을 털어 내지 못하면 다시 시작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잖아. 연우, 날 지독히 미워했어.”
“원래 사랑과 애증은 한 끗발 차이야, 인마. 바탕에 사랑이 깔리지 않으면 미움이고 나발이고 없어.”
한입 가득 음식을 밀어 넣고 우물거리는 택일이 얼른 먹으라며 접시를 찬영에게로 밀었다.
“할머니는…… 아직도 살아 계시니?”
“너 진짜 몰랐어?”
택일이 좀 놀란 눈치다.
“한 3년 됐나? 겨울에 돌아가셨어. 연우도 그전엔 서울에서 살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선 그 집으로 들어갔지. 맞다, 내가 연우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네 집에 전화했더니 어머님이 받으시던데 말 안 해?”
“…….”
“난 또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줄 알았지. 그런 줄도 모르고 지독한 새끼라고 네 욕 실컷 했었는데……. 하필이면 폭설이 쏟아진 때 할머니 장례 치르느라고 고생 옴팡지게 했었다.”
일흔이 다 된 나이에도 참 짱짱하던 분이셨다. 그래서 100세는 거뜬하게 넘길 줄 알았다. 더 이상 연우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말라며 바로 앞에서 문을 닫아 버리던 노인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머리에 떨어지던 소금 세례들이 아직도 가끔 꿈에 나타나 그를 괴롭히고는 했었다.
“연우는 괜찮았어?”
“괜찮을 리가 있냐. 한동안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서 선미가 걔 지켜보느라고 좀 힘들었었지. 지난 일이니까 말이 쉽지, 난 그때 연우도 잘못되는 줄 알고 좀 걱정했었다. 할머니 따라가 버릴 줄 알았었는데, 시간이 약이라고 좀 지나니까 다 털고 일어나더라.”
식사를 마치고 나와 근처 커피숍에서 택일이 어렵게 꺼냈다. 동창회도 동창회지만 택일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정작 다른 것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헤어진 사람에게 전할 만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택일이도 어지간히 속이 탄 모양이었다.
“사실은 너한테 부탁이 있어서 온 거다. 연우 말릴 사람이 너밖에 없을 것 같아서 그래. 우리가 아무리 설득을 해도 소용이 없다. 고생길 훤한 것이 눈에 보이는데 연우 그게 도통 말을 안 들어. 연우 시집 한번 보내 보겠다고 나도, 선미도 참 애 많이 썼다. 다 싫대. 뭔 이유가 그렇게도 많은지 허우대 멀쩡한 놈들 줄기차게 보내도 다 싫대. 그러더니 얼마 전부터 누굴 만난다더라. 그게 누군지 알아? 빌어먹을. 애 둘 딸린 홀아비. 그게 말이 되냐? 나 니들 안 보고 사는 건 상관 안 하겠지만 연우 그러는 건 도저히 못 보겠더라. 부담스러울 거라는 건 알지만 네가 좀 말려 봐.”
택일이 남기고 간 말들이 잔잔한 호숫가에 던져진 돌이 되어 파장을 일으켰다. 폭풍처럼 심하지는 않았지만, 겨우 버티고 서 있던 조각배는 그 물결에 춤을 추다 결국 뒤집어져 버린다. 그 안에 담겨진 기억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며 찬영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모니터엔 꽤 많은 사이트들이 떠 있었다.
‘예담’을 찾아 들어가자 눈에 익은 정겨운 한옥의 풍경들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ㄷ’ 자 형태로 지어진 100년도 넘은 고택. 숙박요금과 집 안 내부를 안내하는 사진들 위로 찬영의 메마른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기억과는 조금 달라졌다고 하나 분명 눈에 익은 것들이다.
게스트하우스라…….
사실 지금쯤이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만 아니면 다시는 발도 딛고 싶지 않다고 늘 노래를 불렀던 연우를 알기에 그곳이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집이 되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홈페이지를 빠져나와 예담을 다녀간 사람들이 올린 블로그를 찾아 들어갔다. 여러 군데를 뒤지다 사진 한 장을 발견한 찬영이 분주히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눈동자가 사람들 틈에 낀 한 여자에게 고정되었다.
친절하고 예쁜 주인과 함께, 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사진 속에 연우가 웃고 있다.
어깨까지 내려오던 긴 머리는 짧은 커트가 되어 있었고, 원래도 예뻤던 이목구비는 더욱 여성스러워져 있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해도 못 알아볼 만큼 변해 있었지만 찬영은 단번에 연우를 알아보았다.
그를 황홀하게 만들었던 눈빛도,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미치게 만들었던 입술도, 여전히 곁을 내주지 않을 것 같은, 조금은 깍쟁이 같은 분위기도 그대로다.
넌 여전하구나…….
까만 가죽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진중함이 가득했던 연우의 그림자가 덮쳐들었다. 연우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뻐근하다. 찬영은 팔을 들어 눈을 감은 얼굴을 가렸다.
‘네가 내 앞에서 당당한 남자로 설 수 있을 때, 그때 나타나. 이렇게 무능하고 구질구질하게 사는 거 나 싫어. 지금은 내가 널 버리지만 억울하면 그때 가서 네가 날 버리란 말이야.’
그렁그렁한 눈물을 매달고 소리치던 연우가 보였다. 지금이 그때라고 장담을 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늦어지면 설 기회조차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연우, 듣고 있니? 나 널 만나러 갈 거야. 네가 버린 남자가 어떻게 됐는지 똑똑히 보여 줄게.
1.(1)
퇴근 시간을 조금 앞당겼지만 결코 여유롭지 못한 도로 사정으로 인해 약속 시간에 늦어 버렸다.
택일이 가르쳐 준 장소에 다다른 찬영은 복잡한 주차장에서 겨우 빈자리를 찾아내고는 차를 세웠다. 막 시동을 끄는데 택일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주차장이야.”
―그래? 잘됐다. 길눈 어두운 까마귀 여사들께서 큰길에서 해매고 있는 모양인데 좀 가 봐. 미국 물 좀 드셨다는 고매하신 고찬영 님께서 몸소 에스코트를 해 줘야 하지 않겠어?
“귀찮아.”
―인마. 넌 어떻게 예나 지금이나 기사도 정신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냐? 기사도 정신은 국 끓여 먹으라고 있는 게 아니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여자들은 말이지, 아무리 잘났더라도 나처럼 유부남이 마중 나오는 건 질색을 한단 말이지.
이어지는 잔소리에 리모컨을 눌러 차문을 잠그던 찬영은 이마를 구겼다.
“그만 좀 하지? 떠드느라 네 입도 피곤하겠다.”
―아무튼 난 너만 믿는다.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끊긴 전화에 찬영은 전화를 노려보다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천천히 주차장을 벗어났다. 저만치 환하게 불을 밝힌 유리창 너머 사람들의 그림자가 북적거렸다. 반짝거리는 작은 전구들이 온통 가지를 휘감은 나무 사이를 지나 이층 건물 앞에 선 찬영은 ‘장수가든’이라고 쓰인 간판을 올려다보며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찾아 물었다. 지포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고 한 모금을 깊숙이 빨아들였다. 아니라고 부정을 하고 싶지만 희미한 긴장감이 등골을 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