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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2)


……왔을까?
연우를 만나면 뭐라고 인사를 건네야 할지 어젯밤부터 고민을 했었다. 어떤 눈으로 널 봐야 할까. 어떤 목소리로 널 불러야 할까. 혈관을 떠도는 팔딱이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몇 번이나 침대에서 일어나 애꿎은 냉장고 문만 열어 댔었다. 그러다 잠이 든 건 새벽이 다 되어서였다.
불이 켜진 가로등 밑에서 반쯤 태운 담배를 툭 털어 휴지통에 던지고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봤다.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 너 찬영이 아니니? 맞지?”
어둠이 내린 인도 위를 걸어오는 여자들 중 하나가 목소리를 높여 알은체를 해 왔다.
“맞구나! 나야, 최선미. 너 언제 들어왔어? 정말 몰라보게 멋있어졌다. 아무튼 반갑다, 야.”
배가 부른 여자가 빠르게 다가오더니 손을 잡고 흔들었다.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키가 작아 늘 제일 앞자리에 앉았던 그들의 단짝 최선미.
“너도 여전하구나.”
웃으며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는데 여전히 키가 작은 선미의 뒤로 걸음을 멈춘 그림자가 보였다. 선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 돌부처처럼 굳어 있는 그림자.
165의 키에 여전히 가느다란 몸. 이마를 가린 앞머리 때문에 얼굴이 겨우 조막만 해 보이는 하얀 얼굴. 연우가 분명했다. 내 친구였던 이연우. 내 아내였던 이연우. 내 첫사랑.
찬영은 선미의 손을 놓고 천천히 연우에게로 다가갔다.
긴장으로 딱딱해진 어깨와 꼭 쥐어진 손이 보였다. 적어도 너에게 난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은 아니란 말이구나. 묘한 승리감이 허리를 기어올랐다. 천천히 거슬러 올라간 연우의 얼굴에선 아무것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어둠이 드리워진 탓에 여전히 맑은 밤하늘을 닮았을 그녀의 눈동자가 제대로 보이지가 않는다. 찬영은 연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손을 내밀었다. 피할 줄 알았던 연우가 머뭇거림도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작고 가느다란 손이 폭 싸였다.
“오랜만이다.”
“……그래.”
“잘 지내지?”
“응, 꽤 잘 지내.”
풋풋한 숙녀에서 이제는 어엿한 여자가 되어 버린 연우의 담담한 미소에 찬영은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그 따스함에 긴장한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10년 만의 해후가 미치게 좋아서.

연우는 왁자지껄한 소음들 사이에 혼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귓가에 왱왱거리는 말소리들이 늘어진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처럼 묘하게 들렸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야만 하는데 그 간단한 동작이 어렵다. 이런 흔들림…… 너무 오랜만이다.
몇 개의 테이블 건너 짙은 남색의 등. 애써 거둬들인 시선이 자꾸만 그쪽으로 쏠렸다. 어느 여자라도 한 번쯤은 관심을 가질 법한 남자. 식당 안에 있는 여자들이 그를 힐긋거리는 것이 심심찮게 보였다. 제법 컸던 키에 이젠 사내다운 무언가까지 더해져 들어서면서부터 이목을 끄는 찬영이었다.
“쟤 연락처 알아?”
“나도 모르지. 가서 물어볼까?”
“아직 결혼도 안 했다며? 어떤 여자일지 모르겠지만 아주 대박이겠다.”
“누가 아니래. 저번에 방송에 나오는 거 봤어? 설마 했었는데 나 완전 깜짝 놀랐잖아. 소문 듣자 하니 쟤 데려가려고 사방에서 난리였다던데, 찬영이 장래엔 고속도로가 뚫린 거지. 그것뿐이야? 인물은 또 얼마나 잘났게.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으니 누군진 모르지만 고찬영이 잡는 애는 완전 로또 맞은 거지.”
계속되는 수군거림에 입안이 익모초 즙을 한 사발 들이켠 것처럼 썼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들려오는 건 찬영의 이름뿐이다.
찬영이 오는 줄 알았더라면 아마 오지 않았을 거다. 이렇게 바보처럼 등에서조차 눈도 떼지 못할 줄 알았더라면, 결코 오지 않았을 거다. 가슴 한쪽을 잘라 낸 듯 휑한 느낌. 잊고 있었던 아픔이 수면으로 다시 떠올랐다.
오랜만의 출현에 반가웠는지 다들 찬영을 붙잡고 늘어지기 바쁘다. 그래서인지 식당에 들어선 이후 늘 찬영의 등만 보였다. 한때 그녀에게 세상의 전부처럼 보였던 그 등이 왜 이렇게 낯설까……. 씁쓸함에 괜히 입가가 조여들었다.
이 땅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몇 년 전 미국으로 떠난 이후 소식을 듣지 못했다. 사실은 듣지 않으려 했었다. 찬영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잔뜩 굳어 버리는 자신 때문에 아무도 그녀 앞에서 찬영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었다. 이제는 정말 잊어 가는 거라고 애써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지금 한 공간에 그가 머물고 있다는 것이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난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연우의 아릿한 시선이 허공을 떠돌았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선미는 다른 여자애들과 가정사에 대해 한창 떠들어 대고 있었다. 결혼한 여자들만이 공감하는 그런 얘기들. 시집 이야기, 아이 이야기, 남편 이야기.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에 귀가 따갑다.
연우는 그만 일어서고 싶었다.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은 멀쩡한 정신인데도 취기가 오른 사람처럼 어지러웠다. 망설이는 사이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어디 아프냐?”
택일이다. 모처럼 잔뜩 힘을 준 택일의 머리카락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평소 같았으면 살찐 엘비스 프레슬리 같다고 핀잔을 주었을 연우였지만 그럴 기운도 없다. 비어 있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택일은 내내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연우의 잔에 쨍 하고 제 잔을 부딪치더니 꿀꺽 시원하게 털어 넣었다. 애주가답게 캬, 하는 효과음을 잊지 않는다.
“좀 바빴더니 피곤한가 봐.”
“그러게 좀 작작 좀 하지.”
“나이 서른은 괜히 먹은 게 아니잖아. 이제 늙어 가기 시작하나 보지.”
희미하게 웃으며 엄살을 피우는 연우를 장난스럽게 고개를 흔들며 쳐다보던 택일이 턱으로 찬영을 가리켰다.
“니들 처음이지? 찬영이 자식 하나도 안 변했더라.”
“……그래.”
하나도 안 변했더라.
“소감이 어때?”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어느새 그늘이 지는 연우의 얼굴이 못마땅해 택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반가워할지 알았더니 아닌가 보네?”
“…….”
“아직도 그 사람 만나냐?”
갑작스런 택일의 질문에 연우는 잠시 눈만 깜박였다. 그러다 택일이 누굴 말하는 건지 깨달았다.
“응.”
“미련하기는.”
“후, 이제 인정해 주네. 내가 원래 좀 미련해. 알잖아?”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연우의 눈동자가 자꾸만 어디론가 향한다. 그 끝에 찬영이 있다는 것을 아는 택일은 두 바보들이 한심해 낮게 한숨을 흘렸다. 대체 헤어진 지가 언젠데 그렇게 애틋하게 바라보냐. 지켜보는 택일이 다 딱했다.
“너…… 아니다.”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다 마는 택일을 돌아봤다. 연우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난 괜찮아, 하고 나직이 속삭였다.
다른 사람들은 알 리가 없는 비밀을 공유한 사람들만의 눈빛. 찬영을 바라보는 연우의 것도, 연우를 바라보는 택일의 것도, 그들을 바라보는 선미의 것도 다들 그러했다.
얼마나 더 그렇게 억지로 앉아 있었을까. 여전히 찬영의 등을 바라보고 있던 연우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워낙 시끄러운 탓에 연우가 일어나는 것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몇 없었다. 선미에게 인사를 해야지 싶은데 보이지 않는다.
“왜? 가려고?”
“응, 이따 선미가 나 찾으면 먼저 갔다고 좀 전해 줄래? 머리가 아파서 일어나야겠어.”
“괜찮겠어? 태워다 줄까?”
택일이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어슬렁어슬렁 계단까지 따라 내려왔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붉어진 택일의 얼굴에 연우는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너 경찰 됐다고 음주 면허라도 취득한 줄 아는데, 나 이래 봬도 준법시민이다. 핸들 잡으면 대번에 신고할 거라고.”
“나도 겨우 먹고살 만한데 잘리고 싶지는 않다. 그랬다간 우리 마누라 날 잡아먹으려 들걸. 차라리 도둑이 낫지, 화난 우리 마누라는 너무 무서워. 그나저나 이렇게 가는 거 알면 다들 서운해할 텐데…….”
“나 하나쯤 없어져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아. 신경 쓰지 마.”
“아무튼 잘 들어가고 나중에 보자.”
“그래, 애들 데리고 언제 한번 놀러와. 화영 씨한테도 안부 전해 주고.”
어둠에 묻힌 인도를 걸어 버스정류장 쪽으로 향했다. 모처럼 신은 하이힐이 보도블록에 부딪치는 소리가 따각따각 서글프게 들려왔다.
바보처럼 또 도망을 친다. 자신에겐 하나뿐인 사랑으로부터, 어린 날의 긴 그림자로부터, 자신이 냈던 깊은 상처로부터 겁쟁이처럼 등을 돌린 채 도망을 친다.
그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걷는 내내 스무 살의 찬영이 떠올랐다.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자신에게만 허락하는 거라며 등을 내밀던, 자신만 믿고 따라오라던 듬직했던 찬영. 내가 사랑했던 유일한 남자.
해일처럼 밀려드는 기억에 괜히 심장이 욱신거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나도 잊혀지지 않은 기억들이 비죽비죽 솟아올라 사방에서 찔러 댄다. 아파 죽겠다.
지금까지 함께였더라도 찬영이 저렇게 성공했을까. 아니, 절대 그러지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넌 잘한 거야. 스스로의 물음에 대답하는 연우의 눈가가 기어이 붉어졌다. 자신의 선택에 절대 후회하지 않을 셈이다. 잘한 거라고, 아무도 해 주지 않은 칭찬을 스스로에게 해 주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덜 아플 것 같으니까.
느린 걸음으로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타야 할 버스가 막 도착을 하고 있었다. 우르르 몰리는 사람들의 뒤에 줄을 서 차례를 기다렸다.
“이연우, 기다려!”
가방에서 교통카드를 꺼내고 버스에 오르려는데, 뒤쪽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그녀를 얼음으로 만들어 버린 사이 버스는 그대로 떠났고 연우는 정류장에 혼자 남겨졌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그녀의 앞을 막아선 찬영이 허리를 숙인 채 헉헉거렸다.
“잠깐, 얘기 좀 해.”
다급하게 몰아쉬는 숨소리에 찬영의 목소리가 갈가리 찢겼다. 끊어져 버린 줄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몰라 연우를 앞에 두고 헛바퀴만 돌았다. 그러다 연우가 떠났다는 택일의 말에 뒤도 안 돌아보고 미친 듯이 달렸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만에 만난 연우인데 하마터면 눈앞에서 놓쳐 버릴 뻔했다.
“말해.”
잘못 들은 걸까. 쓸쓸함이 묻어나는 말투에 찬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디 좀 들어가자.”
“미안해. 시간이 없어.”
“연우야.”
이름을 부르자 연우가 고개를 들고는 똑바로 눈을 맞췄다. 더 이상 묶이지 않을 것 같은 짧은 머리카락이 낯설었다. 화장을 한 자그마한 얼굴이 낯설었다. 하지만 그 안에 남아 있는 어린 연우의 그림자가 익숙했다. 가슴 한구석에 묻어 두었던 해묵은 감정을 대번에 끄집어낼 만큼.
“찬영아.”
“…….”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연우의 목소리에 명치가 찌르르 울리자 찬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10년 만에 들어 보는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가 또다시 잔인하게 속삭인다.
“만나서 반가웠어.”
“그래.”
“여기까지야.”
“…….”
“잘 가.”
돌아서려는 연우의 팔을 확 잡아챘다. 온 힘을 실은 탓에 잡힌 부위가 아플 테지만 그런 것은 무시해 버렸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널 놓을 수는 없어. 너로 인해 걸어온 10년 세월이 억울해서라도 이대로 보내진 못해. 안 보내.
“또 등 보이면 가만 안 있어.”
찬영은 미친 듯이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꽉 다문 이 사이로 잘근잘근 씹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
“가만 안 있으면 어쩔 건데?”
차가운 목소리가 가슴 언저리에 부딪혔다. 찬영은 연우를 붙잡고 있는 손아귀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낮게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잔인한 희열이 느껴지는 건 또 뭐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