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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모르는 사랑
1화
1. 어떻게 우리가(1)
아침 여섯 시. 하나는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조금 더 자고 싶은 마음이 몸을 짓눌렀지만 강한 정신력으로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 곤히 자고 있는 시언을 보았다. 시언은 아침이라 얼굴이 퉁퉁 부은 데다 입까지 반쯤 벌어져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저 고운 왕자님처럼 보였다. 하나는 그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고 나온 하나는 화장대에 앉아 머리를 말리고 간단히 화장을 했다. 같이 산 지 벌써 3년이나 되었지만 하나는 항상 시언보다 먼저 일어나 씻고 단장을 했다.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축 늘어진 아줌마의 느낌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결혼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하고 싶었다. 하나는 남녀 간에는 적당한 신비감이 있어야 사랑이 유지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본인은 그러한 신비감을 잘 조절하고 있기 때문에 8년의 사랑이 이토록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남색 원피스에 귀여운 앞치마를 두르고 거울 앞에서 빙 돌아보았다. 남색 원피스를 입으니 안 그래도 하얀 피부가 더욱 희게 보였다. 하나는 검고 긴 생머리에, 우유처럼 새하얗고 부드러운 피부, 약간 처진 듯 순수해 보이는 눈매, 크고 맑은 눈동자, 오뚝한 콧날, 연분홍빛 입술, 계란형 얼굴을 가진 대표적인 청순 미인이었다. 하나는 거울을 보며 긴 머리를 살짝 묶고 주방으로 갔다.
오늘 아침 메뉴는 동그랑땡과 콩나물무침, 감자볶음, 김치, 된장찌개였다.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으며 구수한 냄새를 풍겼다. 간도 잘 맞았다. 오늘따라 요리가 잘된 것 같아 콧노래가 절로 났다. 상을 다 차리자 시언이 잠에서 막 깬 부스스한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일어났어? 얼른 와.”
“이제 아침 너무 신경 쓰지 말라니까. 간단히 토스트 같은 거 해 먹어도 돼.”
“밀가루 잘 안 받잖아. 3년을 꼬박꼬박 밥 챙겨 먹다가 어떻게 갑자기 그런 걸 먹어. 얼른 앉아.”
하나가 웃으며 시언을 끌어당겨 자리에 앉혔다.
“흠∼ 요즘 날 왜 이렇게 생각해 주나? 뭔가 수상해.”
하나가 장난치듯 말하자 시언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아냐. 그냥, 고마워서 그렇지. 자기 힘든 것도 싫고.”
“나 하나도 안 힘들어. 적응된 지 한참인데 뭘. 그러니까 우리 착한 자기는 그만 미안해하고 그냥 맛있게 먹어 주기만 하면 돼요. 알았지?”
하나가 싱긋 웃으며 시언의 볼을 꼬집자 시언도 얼핏 웃었다.
“알았어. 고마워.”
“고마우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나가 입술을 내밀고 시언을 보았다. 시언은 헛웃음을 흘리며 상체를 일으켜 하나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춰 주었다.
“좋아. 이거면 밥값은 다 한 거야.”
하나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시언은 그런 하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빙긋 웃으며 밥을 한술 떠먹었다.
“맛있다.”
시언의 웃는 모습을 보며 하나는 더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그리고 오늘따라 유독 결혼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처음 만났던 스무 살이 엊그제 같은데, 그녀는 벌써 스물여덟 살이었고 그는 서른 살이었다. 이제는 슬슬 8년 연애의 종지부를 찍어야 할 것 같았다.
의현은 팔짱을 끼고 서서 배우들이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조연출 성수는 의현의 눈치를 살피며 배우들을 흘긋거렸다. 배우들도 의현의 심각한 분위기를 느끼고는 약간 주눅 든 기세로 연기를 계속했다.
의현이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잠깐 멈출까요?”
성수가 조용히 물었으나 의현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앞만 보았다. 그의 앞에는 약간 삐딱한 자세로 시큰둥하게 연기를 하고 있는 은영이 있었다.
“그만.”
한참 뒤, 결국 의현이 입을 열었다. 배우들이 모두 동작을 멈추었다.
“고은영, 따라 나와.”
의현은 그 말만 던지고 먼저 연습실을 나가 버렸다. 이어서 천둥이 내리치는 듯한 ‘쾅’ 소리가 들렸다. 참다못한 배우들이 은영을 향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그러나 은영은 사과는커녕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이에 화가 난 배우들과 은영 사이에 작은 싸움이 날 뻔했지만 성수가 필사적으로 말려 은영을 연습실 밖으로 내보냈다.
의현은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은영은 당당한 걸음으로 그의 앞으로 가 섰다. 의현은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은영의 눈에 서린 감정들이 무엇인지를.
“너.”
의현은 한 템포 쉰 뒤 차분하면서도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쯤에서 그만둬라.”
“뭘 말이에요?”
“연기 하지 말라고. 넌 그럴 주제가 안 되는 것 같다.”
의현이 말을 마치고 들어가려는데 은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런 선배는요? 선배는 연출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의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공적인 일도 제대로 처리 못 하면서. 그게 연출이에요?”
그러자 의현이 얼핏 웃으며 말했다.
“넌 이래서 안 돼.”
“뭐라구요?”
“넌 눈치도, 판단력도, 프로 정신도 없어. 오직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나 목매고 너만 생각하지.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공적인 일을 처리 못 한다고? 네가 말하는 개인적인 감정이 뭔데. 일주일 전에 네가 나한테 고백한 거? 그게 나한테 어떤 감정이라도 불러올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또, 공적인 일은 뭐지? 내가 오늘 네 역할을 주연에서 조연으로 바꾼 거? 그래, 그건 공적인 일이라 치자. 근데 그게 네 고백 때문이라는 건 아주 큰 착각이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일은 나한테,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거든.”
의현의 말에 은영은 잠시 멍해 있다가 이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 알겠어?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공적인 일을 처리 못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지난 일주일 동안 네가 연기에 한 번이라도 몰입한 적 있어? 그저 잡생각만 하고 나만 신경 쓰고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쓰고. 내가 네 역할을 바꾼 건, 순전히 네 연기가, 노력이 부족해서야.”
“진짜 잔인하네요.”
은영은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오른 눈으로 의현을 보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8년이에요. 스무 살 때 첨 대학 와서 선배 만나고 지금까지 8년이요. 지금까지 선배 하나만 보고 믿고 따르면서 여기까지 왔다구요. 선배한테 내 인생의 3분의 1을 바쳤는데. 그 시간도, 그동안의 맘고생도, 다 너무 억울하고 아파 죽겠는데. 근데 뭐라구요? 연기까지 그만두라구요? 정말, 그런 말이 나와요?”
8년이라는 말에 의현은 속으로 움찔했지만 겉으로는 동요하지 않은 척,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내가 언제 네 시간 나한테 바쳐 달라고 부탁했어? 8년 동안 나 사랑해 달라고 부탁했냐고. 네 맘대로 좋아하고 네 맘대로 따라온 거야. 근데 이제 와서 내 탓을 하면 안 되지. 그러게, 8년이나 참아 온 거 조금 더 참지 그랬어. 그랬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뭐라구요?”
은영은 의현의 마지막 말에 마음이 꽁꽁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선배 정말, 내가 알던 최의현 맞아요?”
“넌 날 알았던 적이 없어. 알고 있다고 멋대로 착각했을 뿐이지.”
은영은 헛웃음을 흘렸다. 각오를 안 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저 한 번의 용기 때문에, 지난 8년의 시간은 물론 한 사람까지 완전히 잃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선배는, 사랑이란 걸 해 본 적 있어요?”
은영은 스무 살 때부터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그가 스물다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세 번의 길고 짧은 연애를 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은영은 궁금했다. 그가 그 세 번의 연애에서 정말 ‘사랑’을 했었는지. 그의 연애는 세 번 다 여자 쪽에서 고백했고 여자 쪽에서 이별을 통보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늘 무덤덤했고 무신경했다. 그러한 모습들이 은영의 짝사랑을 8년이나 가능하게 한 이유 중 하나였지만, 은영은 그의 그러한 모습들이 한편으로는 가엾게 느껴지기도 했다.
은영의 질문에 의현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은영이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그의 눈을 마주하고 있자, 마침내 입을 열어 말했다.
“있어.”
“…….”
“지금도 하고 있고.”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깜짝 놀란 은영을 두고, 의현이 먼저 등을 돌렸다. 다시 연습실로 들어가는 그를 보면서 은영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나, 못 들은 거예요!”
의현이 잠시 발을 멈추었다.
“선배가 내 고백 못 들은 걸로 한다고 했던 것처럼, 나도 못 들은 거라고요. 오늘 말들 다요. 나 연기 계속할 거예요. 그러니까 맘대로 조연 자리까지 빼 버리진 마요.”
잠시 후, 그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너 하는 거 봐서.”
“정말!”
의현은 연습실로 들어갔고 은영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있어.’
‘지금도 하고 있고.’
그 말이 진심인가 싶어, 도저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하나는 해영과 함께 공항에 갔다. 1년 전에 파리로 디자인 공부를 하러 간 윤아가 오늘 귀국을 하기 때문이었다.
윤아와 해영은 대학에서 만난 하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세 명 다 처음엔 K대 사범대 국어교육과에서 만났지만, 하나와 해영은 본래대로 과를 졸업해서 교사가 된 반면, 윤아는 중간에 의상학과로 전과를 해서 디자이너를 준비하고 있었다.
“얘들아!”
게이트에서 나온 윤아가 친구들을 발견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왔다. 세 사람은 마치 신입생 때로 돌아간 것처럼 서로 껴안고 요란스러운 인사를 했다. 그러다 윤아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오빠는? 우리 오빠는 안 왔어?”
“응. 내가 아까 연락했는데 오늘 연극 연습 때문에 많이 바쁘신 것 같더라고. 이따 집에서 보재.”
해영의 말에, 윤아는 내심 서운한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쳇. 내가 오늘 들어갈 줄 아나 보지?”
“오늘 안 들어가려구?”
“당연하지!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건데. 너네, 오늘 들어가면 배신이야!”
하나는 잠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시언에게선 아무 연락도 없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들이라도 외박하는 것은 싫어할 텐데. 시언이 혼자 자면서 걱정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윤아의 부탁도 무시할 수 없어서 일단은 즐겁게 놀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의 걱정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야, 너희들 사랑은 다 영원할 것 같지? 절대 그렇지 않다. 남잔 다 쓰레기야, 쓰레기! 이게 바로 진리라고! 알어?”
그동안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며 화기애애하던 것도 잠시, 윤아가 자신과 반년을 동거했던 파리의 남자가 다른 글래머 여성과 바람이 나서 떠나 버린 얘기를 하면서 술을 엄청 마신 덕에 가장 먼저 취해 버린 것이었다.
시간은 아직 열한 시가 좀 안 되어 있었다.
“어떡하지?”
그런데 해영이 아까부터 계속 전화를 하는 듯하더니 결국 난감한 얼굴로 하나에게 말했다.
“현준이가 지금 많이 아픈가 봐. 아침부터 몸살기가 있더니. 나 먼저 가 봐야 될 것 같은데.”
현준은 해영이 만나는 세 살 연하의 남자였다.
“그럼 윤아는 어떡하고?”
“의현 오빠 불러서 데리고 가라고 해야지, 뭐. 내가 전화할 테니까 네가 의현 오빠 올 때까지 좀만 더 달래고 있어라. 미안해, 하나야. 오랜만에 셋이 같이 자면 좋은데.”
“아니야. 내가 잘 돌려보낼게. 넌 얼른 가 봐. 걱정되겠다.”
“고마워. 내가 전화해 둘게!”
해영은 남자친구의 목숨이 금방 위태롭기라도 한 듯 다급히 술집을 빠져나갔다. 윤아는 여전히 오징어처럼 몸을 흐느적거리며 없는 술을 탈탈 털어 마시고 있었다. 하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휴대폰을 꺼내어 보았다.
시언에게서는 저녁 여섯 시쯤 한 번 연락이 온 뒤로 아무 연락도 없었다. 그것도 하나가 오늘 윤아와 해영을 만나서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말을 하자, 자신도 오늘 야근 때문에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르니 편하게 놀다 오라는 이야기였다. 예전에는 누구랑 있든 술을 먹는다고 하면 삼십 분에 한 번씩은 연락을 하면서 걱정을 하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삐치곤 했는데, 지금은 아무 연락도 없으니 왠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나는 반 정도 찬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다가 가볍게 입으로 털어 넣었다. 오늘따라 술도 유독 쓰게만 느껴졌다.
1화
1. 어떻게 우리가(1)
아침 여섯 시. 하나는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조금 더 자고 싶은 마음이 몸을 짓눌렀지만 강한 정신력으로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 곤히 자고 있는 시언을 보았다. 시언은 아침이라 얼굴이 퉁퉁 부은 데다 입까지 반쯤 벌어져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저 고운 왕자님처럼 보였다. 하나는 그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고 나온 하나는 화장대에 앉아 머리를 말리고 간단히 화장을 했다. 같이 산 지 벌써 3년이나 되었지만 하나는 항상 시언보다 먼저 일어나 씻고 단장을 했다.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축 늘어진 아줌마의 느낌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결혼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하고 싶었다. 하나는 남녀 간에는 적당한 신비감이 있어야 사랑이 유지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본인은 그러한 신비감을 잘 조절하고 있기 때문에 8년의 사랑이 이토록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남색 원피스에 귀여운 앞치마를 두르고 거울 앞에서 빙 돌아보았다. 남색 원피스를 입으니 안 그래도 하얀 피부가 더욱 희게 보였다. 하나는 검고 긴 생머리에, 우유처럼 새하얗고 부드러운 피부, 약간 처진 듯 순수해 보이는 눈매, 크고 맑은 눈동자, 오뚝한 콧날, 연분홍빛 입술, 계란형 얼굴을 가진 대표적인 청순 미인이었다. 하나는 거울을 보며 긴 머리를 살짝 묶고 주방으로 갔다.
오늘 아침 메뉴는 동그랑땡과 콩나물무침, 감자볶음, 김치, 된장찌개였다.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으며 구수한 냄새를 풍겼다. 간도 잘 맞았다. 오늘따라 요리가 잘된 것 같아 콧노래가 절로 났다. 상을 다 차리자 시언이 잠에서 막 깬 부스스한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일어났어? 얼른 와.”
“이제 아침 너무 신경 쓰지 말라니까. 간단히 토스트 같은 거 해 먹어도 돼.”
“밀가루 잘 안 받잖아. 3년을 꼬박꼬박 밥 챙겨 먹다가 어떻게 갑자기 그런 걸 먹어. 얼른 앉아.”
하나가 웃으며 시언을 끌어당겨 자리에 앉혔다.
“흠∼ 요즘 날 왜 이렇게 생각해 주나? 뭔가 수상해.”
하나가 장난치듯 말하자 시언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아냐. 그냥, 고마워서 그렇지. 자기 힘든 것도 싫고.”
“나 하나도 안 힘들어. 적응된 지 한참인데 뭘. 그러니까 우리 착한 자기는 그만 미안해하고 그냥 맛있게 먹어 주기만 하면 돼요. 알았지?”
하나가 싱긋 웃으며 시언의 볼을 꼬집자 시언도 얼핏 웃었다.
“알았어. 고마워.”
“고마우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나가 입술을 내밀고 시언을 보았다. 시언은 헛웃음을 흘리며 상체를 일으켜 하나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춰 주었다.
“좋아. 이거면 밥값은 다 한 거야.”
하나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시언은 그런 하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빙긋 웃으며 밥을 한술 떠먹었다.
“맛있다.”
시언의 웃는 모습을 보며 하나는 더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그리고 오늘따라 유독 결혼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처음 만났던 스무 살이 엊그제 같은데, 그녀는 벌써 스물여덟 살이었고 그는 서른 살이었다. 이제는 슬슬 8년 연애의 종지부를 찍어야 할 것 같았다.
의현은 팔짱을 끼고 서서 배우들이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조연출 성수는 의현의 눈치를 살피며 배우들을 흘긋거렸다. 배우들도 의현의 심각한 분위기를 느끼고는 약간 주눅 든 기세로 연기를 계속했다.
의현이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잠깐 멈출까요?”
성수가 조용히 물었으나 의현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앞만 보았다. 그의 앞에는 약간 삐딱한 자세로 시큰둥하게 연기를 하고 있는 은영이 있었다.
“그만.”
한참 뒤, 결국 의현이 입을 열었다. 배우들이 모두 동작을 멈추었다.
“고은영, 따라 나와.”
의현은 그 말만 던지고 먼저 연습실을 나가 버렸다. 이어서 천둥이 내리치는 듯한 ‘쾅’ 소리가 들렸다. 참다못한 배우들이 은영을 향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그러나 은영은 사과는커녕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이에 화가 난 배우들과 은영 사이에 작은 싸움이 날 뻔했지만 성수가 필사적으로 말려 은영을 연습실 밖으로 내보냈다.
의현은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은영은 당당한 걸음으로 그의 앞으로 가 섰다. 의현은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은영의 눈에 서린 감정들이 무엇인지를.
“너.”
의현은 한 템포 쉰 뒤 차분하면서도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쯤에서 그만둬라.”
“뭘 말이에요?”
“연기 하지 말라고. 넌 그럴 주제가 안 되는 것 같다.”
의현이 말을 마치고 들어가려는데 은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런 선배는요? 선배는 연출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의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공적인 일도 제대로 처리 못 하면서. 그게 연출이에요?”
그러자 의현이 얼핏 웃으며 말했다.
“넌 이래서 안 돼.”
“뭐라구요?”
“넌 눈치도, 판단력도, 프로 정신도 없어. 오직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나 목매고 너만 생각하지.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공적인 일을 처리 못 한다고? 네가 말하는 개인적인 감정이 뭔데. 일주일 전에 네가 나한테 고백한 거? 그게 나한테 어떤 감정이라도 불러올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또, 공적인 일은 뭐지? 내가 오늘 네 역할을 주연에서 조연으로 바꾼 거? 그래, 그건 공적인 일이라 치자. 근데 그게 네 고백 때문이라는 건 아주 큰 착각이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일은 나한테,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거든.”
의현의 말에 은영은 잠시 멍해 있다가 이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 알겠어?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공적인 일을 처리 못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지난 일주일 동안 네가 연기에 한 번이라도 몰입한 적 있어? 그저 잡생각만 하고 나만 신경 쓰고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쓰고. 내가 네 역할을 바꾼 건, 순전히 네 연기가, 노력이 부족해서야.”
“진짜 잔인하네요.”
은영은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오른 눈으로 의현을 보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8년이에요. 스무 살 때 첨 대학 와서 선배 만나고 지금까지 8년이요. 지금까지 선배 하나만 보고 믿고 따르면서 여기까지 왔다구요. 선배한테 내 인생의 3분의 1을 바쳤는데. 그 시간도, 그동안의 맘고생도, 다 너무 억울하고 아파 죽겠는데. 근데 뭐라구요? 연기까지 그만두라구요? 정말, 그런 말이 나와요?”
8년이라는 말에 의현은 속으로 움찔했지만 겉으로는 동요하지 않은 척,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내가 언제 네 시간 나한테 바쳐 달라고 부탁했어? 8년 동안 나 사랑해 달라고 부탁했냐고. 네 맘대로 좋아하고 네 맘대로 따라온 거야. 근데 이제 와서 내 탓을 하면 안 되지. 그러게, 8년이나 참아 온 거 조금 더 참지 그랬어. 그랬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뭐라구요?”
은영은 의현의 마지막 말에 마음이 꽁꽁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선배 정말, 내가 알던 최의현 맞아요?”
“넌 날 알았던 적이 없어. 알고 있다고 멋대로 착각했을 뿐이지.”
은영은 헛웃음을 흘렸다. 각오를 안 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저 한 번의 용기 때문에, 지난 8년의 시간은 물론 한 사람까지 완전히 잃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선배는, 사랑이란 걸 해 본 적 있어요?”
은영은 스무 살 때부터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그가 스물다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세 번의 길고 짧은 연애를 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은영은 궁금했다. 그가 그 세 번의 연애에서 정말 ‘사랑’을 했었는지. 그의 연애는 세 번 다 여자 쪽에서 고백했고 여자 쪽에서 이별을 통보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늘 무덤덤했고 무신경했다. 그러한 모습들이 은영의 짝사랑을 8년이나 가능하게 한 이유 중 하나였지만, 은영은 그의 그러한 모습들이 한편으로는 가엾게 느껴지기도 했다.
은영의 질문에 의현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은영이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그의 눈을 마주하고 있자, 마침내 입을 열어 말했다.
“있어.”
“…….”
“지금도 하고 있고.”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깜짝 놀란 은영을 두고, 의현이 먼저 등을 돌렸다. 다시 연습실로 들어가는 그를 보면서 은영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나, 못 들은 거예요!”
의현이 잠시 발을 멈추었다.
“선배가 내 고백 못 들은 걸로 한다고 했던 것처럼, 나도 못 들은 거라고요. 오늘 말들 다요. 나 연기 계속할 거예요. 그러니까 맘대로 조연 자리까지 빼 버리진 마요.”
잠시 후, 그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너 하는 거 봐서.”
“정말!”
의현은 연습실로 들어갔고 은영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있어.’
‘지금도 하고 있고.’
그 말이 진심인가 싶어, 도저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하나는 해영과 함께 공항에 갔다. 1년 전에 파리로 디자인 공부를 하러 간 윤아가 오늘 귀국을 하기 때문이었다.
윤아와 해영은 대학에서 만난 하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세 명 다 처음엔 K대 사범대 국어교육과에서 만났지만, 하나와 해영은 본래대로 과를 졸업해서 교사가 된 반면, 윤아는 중간에 의상학과로 전과를 해서 디자이너를 준비하고 있었다.
“얘들아!”
게이트에서 나온 윤아가 친구들을 발견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왔다. 세 사람은 마치 신입생 때로 돌아간 것처럼 서로 껴안고 요란스러운 인사를 했다. 그러다 윤아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오빠는? 우리 오빠는 안 왔어?”
“응. 내가 아까 연락했는데 오늘 연극 연습 때문에 많이 바쁘신 것 같더라고. 이따 집에서 보재.”
해영의 말에, 윤아는 내심 서운한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쳇. 내가 오늘 들어갈 줄 아나 보지?”
“오늘 안 들어가려구?”
“당연하지!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건데. 너네, 오늘 들어가면 배신이야!”
하나는 잠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시언에게선 아무 연락도 없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들이라도 외박하는 것은 싫어할 텐데. 시언이 혼자 자면서 걱정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윤아의 부탁도 무시할 수 없어서 일단은 즐겁게 놀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의 걱정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야, 너희들 사랑은 다 영원할 것 같지? 절대 그렇지 않다. 남잔 다 쓰레기야, 쓰레기! 이게 바로 진리라고! 알어?”
그동안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며 화기애애하던 것도 잠시, 윤아가 자신과 반년을 동거했던 파리의 남자가 다른 글래머 여성과 바람이 나서 떠나 버린 얘기를 하면서 술을 엄청 마신 덕에 가장 먼저 취해 버린 것이었다.
시간은 아직 열한 시가 좀 안 되어 있었다.
“어떡하지?”
그런데 해영이 아까부터 계속 전화를 하는 듯하더니 결국 난감한 얼굴로 하나에게 말했다.
“현준이가 지금 많이 아픈가 봐. 아침부터 몸살기가 있더니. 나 먼저 가 봐야 될 것 같은데.”
현준은 해영이 만나는 세 살 연하의 남자였다.
“그럼 윤아는 어떡하고?”
“의현 오빠 불러서 데리고 가라고 해야지, 뭐. 내가 전화할 테니까 네가 의현 오빠 올 때까지 좀만 더 달래고 있어라. 미안해, 하나야. 오랜만에 셋이 같이 자면 좋은데.”
“아니야. 내가 잘 돌려보낼게. 넌 얼른 가 봐. 걱정되겠다.”
“고마워. 내가 전화해 둘게!”
해영은 남자친구의 목숨이 금방 위태롭기라도 한 듯 다급히 술집을 빠져나갔다. 윤아는 여전히 오징어처럼 몸을 흐느적거리며 없는 술을 탈탈 털어 마시고 있었다. 하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휴대폰을 꺼내어 보았다.
시언에게서는 저녁 여섯 시쯤 한 번 연락이 온 뒤로 아무 연락도 없었다. 그것도 하나가 오늘 윤아와 해영을 만나서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말을 하자, 자신도 오늘 야근 때문에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르니 편하게 놀다 오라는 이야기였다. 예전에는 누구랑 있든 술을 먹는다고 하면 삼십 분에 한 번씩은 연락을 하면서 걱정을 하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삐치곤 했는데, 지금은 아무 연락도 없으니 왠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나는 반 정도 찬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다가 가볍게 입으로 털어 넣었다. 오늘따라 술도 유독 쓰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