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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어떻게 우리가(2)
혼자 소주 한 병을 시켜 마실까 말까 고민하면서 안주를 뒤적거리고 있던 때였다. 윤아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오라버니’라고 쓰여 있었다.
“여보세요.”
― 너 죽을래?
하나는 깜짝 놀라 말문이 닫혔다.
― 내가 네 대리 기사냐? 술을 적당히 먹어야지. 여보세요? 야. 안 들려?
의현의 목소리는 거의 반년 만에 듣는 것이었다. 윤아가 유학 가기 전에는 친오빠처럼 자주 봤지만 윤아가 유학을 가고 나서는 둘이 따로 볼 일이 없어서 만나지 못하다가 반년 전쯤 해영과 함께 그가 올린 연극을 보러 갔던 것이다.
― 야, 최윤아!
“오빠. 저 하나예요.”
그러자 의현에게서는 잠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통화가 끊겼나 싶어 휴대폰을 확인하려던 순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 어, 하나야.
“네. 죄송해요, 제가 말렸어야 되는데……. 여기 2층 오른쪽 구석진 곳이에요.”
― 어. 그래. 금방 갈게.
전화가 끊겼다. 하나는 물 한 잔을 마시고 머리를 살짝 다듬었다. 오랜만에 보는 의현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낯익은 형체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하나는 곧 그가 의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엷게 미소 지었다.
스무 살 때 윤아와 친구가 된 후로, 의현과도 벌써 8년째 알고 지내는 중이었다. 윤아의 집은 무척 잘살았다. 윤아의 아버지는 영하대병원의 부원장이었고 어머니는 70년대를 풍미했던 유명한 여배우였다. 윤아는 오빠 의현처럼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아 예술 쪽으로 재능이 발달했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대학은 아버지의 뜻대로 갔지만, 먼저 나와서 살던 오빠의 집에 들어가서 살기 시작했다. 하나는 그런 윤아의 집에 자주 놀러갔고 자연스럽게 의현과도 가까워지게 되었다.
“오랜만이네.”
어느새 테이블에 다가온 의현이 하나를 보고 짧게 웃으며 말했다.
“네. 하하.”
하나는 네, 말고는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어색하게 웃었다. 의현은 더 말하지 않고 취해서 흐느적거리는 윤아의 이마를 쿵 쥐어박더니 그녀의 양팔을 잡고 일으켰다.
“좀 도와줄래?”
“아, 네.”
하나는 얼른 가서 그가 윤아를 업는 것을 도와주었다. 문득 취한 동생을 업고 가는 의현의 등이 참 넓고 듬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현은 윤아를 곧바로 차에 태운 뒤 하나를 향해 말했다.
“너도 같이 타. 너부터 데려다 주고 집에 가면 되니까.”
“아니에요. 전 그냥 전철 타고 가도 돼요.”
“말 들어.”
의현은 단호한 표정으로 열린 차 문을 가리켰고 하나는 그의 고집은 절대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윤아의 옆으로 올라탔다. 의현은 그제야 운전석에 올랐다.
“감사합니다.”
“뭘.”
또다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의현과는 오래 알고 지내긴 했지만 어쩐지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가깝지 않은 거리감이 있었다.
“근데 저희 집…….”
“알아. 네 남자친구 집으로 가면 되잖아. 전에 한 번 간 적 있어서 기억해.”
시언과 만난 기간이 오래된 만큼, 의현도 시언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가장 최근에 본 것은 1년 전, 윤아가 유학을 가기 전날이었다. 그때 윤아가 시언의 집에서 하나, 해영과 함께 송별회를 하다가 너무 취한 바람에 의현이 데리러 왔었다. 하나는 그때를 생각하자 더 어색해지는 것 같았다. 동거를 한다는 사실이 무안해서인지, 그녀는 시언의 집에서 의현을 만나는 것이 왠지 민망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잠깐만요!”
멍하니 창문을 보고 있던 하나가 갑자기 소리쳤다.
“왜 그래?”
분명히 모텔촌이었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쪽 방향은 분명히 모텔들이 즐비한 골목인데, 왜 시언의 차가 그리 들어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혹시나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어 번호판까지 자세히 들여다보았지만 틀림없었다. 그의 차였다.
하나는 갑자기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저…… 저 차 좀 따라가 주세요.”
그 순간 의현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가 직감되어 표정이 굳었다.
의현은 시언의 차를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시언의 차는, 하나의 예감대로 한 모텔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들어가?”
의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의현은 뜨거운 숨을 내쉬며 시언의 차를 따라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룸미러로 본 하나의 두 눈은 벌써부터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차가 멈추었다. 의현은 시동을 껐다. 하나는 가만히 시언의 차를 바라보았다. 시언이 차에서 내리더니, 반대편으로 가서 낯선 여자를 부축해 내렸다. 여자는 만취한 듯 몸을 가누지 못했다.
“하나야.”
의현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하나는 벌컥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리고 가차 없이 시언에게 다가갔다. 의현은 내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둘 사이의 문제에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 일단 안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여자를 부축하다가 거의 끌어안다시피 한 시언이,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는 하나를 보고는 놀란 듯 그 자리에 굳어 섰다.
“하나야…….”
하나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시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길고 가느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8년이었다. 8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봐 온 남자였고, 3년 동안 매일같이 밥을 먹고 웃고 떠들고 잠을 자던 남자였다. 그토록 익숙한 남자였는데, 그 순간만큼은 지독히도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마치,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하나야, 잠깐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버려.”
“뭐?”
맘 같아선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시원하게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고 싶었지만, 8년이었다. 8년이었기 때문에, 하나는 이 순간, 그에게 한 번의 믿음은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 지금 여기. 이 바닥에 버려.”
“……하나야.”
“내려놓지도 말고, 그대로 손 놔. 떨어져서 머리가 깨져 죽든 말든 상관 말고. 그리고 차에 타.”
“하나야, 잠깐만. 일단 우리 얘기부터 하자…….”
“내 말 안 들려? 그 여자 당장 이 주차장 바닥에 버리고 차에 타라고!”
시언은 난감한 표정으로 하나를 보았다. 하나는 온갖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시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못 해.”
“……뭐?”
“그렇게 못 해, 하나야.”
하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시언을 쳐다보았고, 시언은 그런 그녀를 언제나처럼 그윽하게 바라보면서도, 끝끝내 여자를 놓지 않았다.
“이시언.”
놓지, 않았다.
“이시언……!”
2. 가질 수 없는 너(1)
하나도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한 말은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시언이 안고 있는 이 낯선 여자가 정말로 그의 내연녀라고 해도, 만취해서 제 몸도 못 가누는 여자를 모텔 주차장에 버려두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게 얼마나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말인지, 하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시언이 비이성적인 척이라도 해 주기를 바랐다. 흉내라도 좋으니 낯선 여자가 아닌 자신을 잡아 주기를 바랐다. 알겠다고, 미안하다고, 내 말 좀 들어 달라고, 한 번만 잡아 주기를. 그럼 바보처럼 그를 믿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시언은 여자를 놓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려. 방에 데려다만 주고 올게.”
시언이 말했다. 그는 원망스러울 정도로 차분해 보였다.
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쳐다보았다. 시언은 하나의 시선을 피하며 여자를 업었다. 하나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잠깐만 기다려.”
시언이 모텔 쪽으로 몸을 틀었다.
끝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대로 들어가면 헤어지는 거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목울대를 간질이는 그 어떤 말도 혀끝까지 올라오지는 않았다.
8년을 만나면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던 말이었기 때문에, 그 후의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몇 번씩 헤어지고 다시 만난 관계였더라면, 또다시 만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기대어 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하나는 아니었다. 그동안 수도 없이 싸우고 화해하면서도 서로 한 번도 헤어지자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던 만큼,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정말 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는 아직, 그와의 이별이 무서웠다.
시언이 모텔 안으로 들어갔다. 하나는 그의 차 앞에 홀로 서 있었다. 의현은 차 안에서 그녀의 움츠린 뒷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핸들을 잡고 있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결국 그는 왼손을 차 문고리에 가져갔지만 열기 직전 손을 멈추었다. 맘 같아선 당장 문을 열고 내리고 싶었지만 그것이 자칫 하나의 마음과 선택을 해치는 일이 될까 두려웠다. 그는 지금 뒤돌아서 있는 하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시언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라면, 그와 다시 얘기를 하고 싶은 거라면 그가 나서는 일이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하나가 몸을 돌려 차로 다가오더니 망설임 없이 올라탔다. 그녀는 굳은 결의라도 한 듯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의현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 얼마나 힘들게 눈물을 참고 있는지.
“가요.”
“그냥 가?”
“네. 이시언네 집으로 가 주세요.”
의현은 더 묻지 않고 묵묵히 차를 돌렸다. 하나는 눈을 꼭 감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눈을 뜨면 혹여나 그가 벌써 내려오지는 않았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어질 것 같아서였다.
시언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윤아는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하나는 아까보다 많이 침착해진 얼굴로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오빠, 저 오늘만 오빠 집에서 자도 돼요?”
의현은 잠시 놀랐는지 한 박자 쉬고 대답했다.
“어, 집, 나오려고?”
“……네.”
“아예 나오는 거야?”
“……네.”
“그래.”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의현은 왜인지 목청을 한 번 다듬고 말했다.
“집 구하려면 시간 좀 걸릴 텐데, 더 오래 있어도 돼.”
전라도 광주가 고향인 하나는, 서울로 대학을 온 뒤로 쭉 자취 생활을 하다가 졸업한 뒤부터 시언의 집에서 함께 살았기 때문에 아직 집이 없었다. 의현은 하나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맘 써 주셔서 감사해요. 내일 윤아랑 얘기 좀 해 볼게요. 그럼 저 갔다 올게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천천히 와.”
하나는 엷게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오늘, 의현이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에 챙기기엔 짐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짐을 핑계로 이 집에 다시 오고 싶지는 않았다. 하나는 캐리어 두 개를 꺼내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하나의 옷을 넣었던 장롱 하나가 텅 비었다. 하나가 이 집에 들어왔을 때 깜짝 선물이라며 그가 마련해 주었던 화장대도, 책상도 모두 비어 갔다. 하나는 몇 번이나 울음이 쏟아질 뻔한 위기를 넘겨 가며 짐을 챙겼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 두 개씩 있던 것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와 함께 샀던 커플 텀블러, 머그컵, 칫솔, 수저, 슬리퍼, 잠옷 등…… 많은 것이 짝을 잃고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하나는 울지 않았다. 차오르는 울음을 꾸역꾸역 참아 냈다. 마음대로 엉엉 울어 버리면 모든 것이 끝난 기분이 들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생각했다. 아직 그에게서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러니 아직 그는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그들은 헤어진 것이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