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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2. 가질 수 없는 너(2)
그런 그녀가 짐을 챙겨서 나가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에게서 무언가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와의 만남이 두려웠다. 지금 불안해하고 있는 어떤 것들이 명확한 사실이 되어 다가올까 봐 그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그와의 만남을 미루어서라도, 이별을 멀리하고 싶었다.
하나는 캐리어 두 개를 현관에 두고 집을 한 번 둘러보았다. 혹시 놓고 가는 게 없는지 확인 차원이기도 했고, 다시는 못 올 수도 있는 이 집을 눈과 마음에 담아두기 위해서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드는 감정은 괴로움뿐이었다. 집 안 모든 곳에 그와 그녀가 있었다. 부엌에서 요리하고 있는 그녀를 그가 등 뒤에서 부드럽게 끌어안아 주었다. 그들은 밥을 먹으며 장난을 쳤고, 소파에서 입을 맞추었고, 함께 운동을 했고, 같이 드라마를 보았고, 같이 샤워를 했고, 가끔 격렬한 키스도 했고, 침대 위에서 따뜻한 사랑을 나누었다. 바로 오늘 아침까지도 그녀는 이곳에서 그와의 미래를 그리며 사무치게 행복했었다.
남색 원피스에 귀여운 앞치마를 두르고 거울 앞에서 빙 돌던 하나가, 현관에 서 있는 하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가슴이 아팠다.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그와 함께했던 3년이 전부 환상처럼 느껴졌다.
하나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리고 현관문을 잡았다. 짐을 챙기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아직 시언은 오지 않았다. 아직 두고 간 게 있을지도 모르는데 한 번만 더 둘러볼까, 조금만 더 있어 볼까, 하는 마음에 손가락이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웃음이 났다.
문을 열었다. 캐리어 두 개를 힘들게 끌고 나왔는데 누군가 그녀 앞에 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 하고 뛰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았다. 시언이길 바랐지만, 의현이었다. 의현이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캐리어 두 개를 가져가더니 앞서 걸었다. 짐이 무거울까 봐 따라와 준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지금껏 참았던 눈물이 몽땅 쏟아질 것 같았다.
하나는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을 내려가고 차 앞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의현은 트렁크를 열어 캐리어를 싣고 나서 차에 타려다가 멍하니 서 있는 하나를 보았다. 그녀는 마치 혼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하나가 천천히 뒤를 돌아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10층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깜박하고 불을 켜 놓고 왔어요.”
“…….”
“다시 갔다 와야 될 것 같아요.”
하나가 아파트로 들어가려고 발을 내디딘 순간, 의현이 그녀의 팔을 잡아 돌렸다.
“금방 갔다 올게요. 혹시 안 올지도 모르는데, 새벽 내내 켜져 있으면…….”
의현은 하나의 말을 더 듣지 않았다. 그는 힘으로 하나를 잡아끌어 억지로 차에 태웠다.
“오빠.”
“나 피곤해. 더 이상 기다리기 싫어.”
그는 그 말만 하고 운전석에 올라 차 문을 잠갔다. 하나도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의현은 한숨을 쉬며 안전벨트를 맸다.
“벨트 매. 좀 거칠지도 모르니까.”
의현의 운전은 정말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고 거칠었지만, 하나는 시언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온통 멍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의현의 집은 다행히도 방이 세 개여서 하나는 빈 방을 편히 쓸 수 있었다. 짐을 대강 정리해 놓고 잘 준비를 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의현이었다.
“바닥 좀 불편하면 내 방에서 잘래? 내가 여기서 잘게.”
“아니요. 괜찮아요. 저 원래 아무 데서나 잘 자요.”
“그래도. 이불이랑 베개도 새 걸로 바꿔 놨어.”
“아, 아니에요. 안 그러셔도 돼요, 정말.”
“오늘만 내 방에서 자. 맘이 불편할 땐 몸이라도 편해야지.”
하나는 그의 마지막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른.”
그는 그 틈을 타 하나를 제 방으로 끌었다. 의현의 방은 하나의 방 바로 옆이었다.
“……감사해요.”
의현은 하나가 침대에 앉는 것까지 본 뒤에 방을 나갔다.
“그래. 잘 자.”
잘 자, 라는 그의 말은 무척 부드럽고 따스하고 감미로웠지만 하나는 그날 밤 편히 잠들지 못했다.
새벽 다섯 시가 되도록 시언에게서는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새벽, 1분 1초가 하나에게는 10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정말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진동이 울려서 확인해 보면 친구의 메시지나 광고 문자였다. 만약 그가 정말 여자를 방에 데려다만 놓고 나왔더라면 그녀가 없는 것을 보았을 테고, 그럼 바로 집으로 갔을 것이었다. 그리고 집에도 없는 걸 보았다면 바로 연락을 했어야 했다. 그것이 당연한 순서였다.
하나는 그와의 만남이 두려우면서도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면서 사정을 말해 주기를, 당장 윤아의 집까지 찾아와 그녀를 붙잡고 껴안아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새벽 다섯 시 삼십 분. 하나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화가 나다 못해 억울하고 분한 감정까지 들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잠옷 차림으로 나온 하나는 무작정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었다.
그때, 옆방 문이 열리고 의현이 나왔다. 하나의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뭐 해?”
그는 놀라서 하나에게 다가갔다.
“잠깐 나가려고요.”
“어딜 가는데.”
“집에요. 놓고 온 게 있어서.”
“놓고 온 게 뭔데.”
“향수요. 향수를 놓고 왔어요. 오빠가 저번 달에 사 준 건데. 그게 엄청 비싼 거거든요. 얼른 가서 가져와야 돼요.”
하나는 얼핏 보기에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하나가 결국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의현은 재빨리 그녀를 따라 나갔다. 그리고 급히 뛰어가려는 하나를 붙잡았다.
두 사람은 아파트 복도에 서 있었다. 2월 말의 새벽 공기는 몹시 차가웠다.
“제정신이야? 그 차림을 하고 어딜 간다 그래!”
의현이 결국 하나에게 큰 소리를 냈다. 하지만 하나는 그의 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는 듯, 잡힌 손목만 빼내려 애썼다.
“이하나!”
“놔줘요. 이것 좀.”
“무슨 향수인데. 내가 사 주면 될 거 아니야.”
“놔 달라구요.”
“그까짓 거 내가 사 줄 테니까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놔요, 제발! 아프단 말이에요!”
하나가 의현의 손을 있는 힘껏 뿌리치며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하나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아프다구요. 아프단 말이에요……!”
하나는 벌겋게 부어오른 손목을 잡고 말했다. 의현은 말없이 그녀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미안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보았지만 하나가 한 발 뒤로 주춤하더니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 울먹거림은 이윽고 울음이 되어 터져 나왔다. 하나는 차가운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모든 것이 뿌옇게 보였다. 그와 동시에 시언과의 추억들이 하나둘 뿌연 안개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대학교 1학년 때 영화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던 것과, 엠티에서 만취한 하나를 챙겨 주던 시언에게 다른 남자 선배의 이름을 부르며 주사를 부렸던 것, 처음 고백 받았던 것, 학교 호수에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집 앞에서 첫 키스를 나누었던 것, 그가 군대를 간 뒤 일주일 내내 눈물로 밤을 지새웠던 것, 매일매일 손이 닳도록 편지를 쓰고 전화를 기다리고 면회를 가며 2년을 기다렸던 것, 영화를 보고 평이 엇갈려 사소한 말다툼을 하다 싸움으로 번져 1주일이나 모른 척 지냈던 것, 같이 제주도 여행을 갔던 것, 4주년 때 깜짝 이벤트를 받았던 것, 멀리 있을 땐 밤을 새워 통화를 하던 것, 그리워하던 것…… 미치도록 서로를 사랑하던 그 모든 순간들이 흑백사진처럼 흐리게 떠올랐다가 찢어지듯 사라졌다.
그것을 생각하니 하나는 견딜 수 없이 가슴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아파요. 너무 아파요…….”
그녀는 결국 쓰라린 왼쪽 가슴을 움켜잡고 울며 호소하듯 말했다. 왼쪽 가슴을 부여잡은 하나의 손은 바들바들 떨렸고, 그녀의 울음소리에는 너무 가늘어서 끊어질 듯한 신음 소리가 간간이 섞여 있었다. 마치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처절하게 울었고 진심으로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아이처럼 우는 하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우는 하나의 얼굴을 조심스레 들어 보았다. 눈물로 온통 범벅이 된 하나의 얼굴이 보였다.
“……괜찮아.”
그는 하나의 눈물을 살며시 닦아 주며 말했다.
그의 나지막하고 따스한 음성이 하나의 귓속을 파고들어 심장까지 들어가는 것 같았다.
“……다 괜찮을 거야.”
의현은 하나의 눈물을 꼼꼼히 닦아 주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하나는, 그의 미소에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지만 슬픔은 배가 되어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때 의현이 하나의 부어오른 왼쪽 손목을 잡더니 조심스럽게 쓸어 주며 말했다.
“미안해. 아프게 해서.”
“…….”
“미안해.”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나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터져 나왔다. 마치 시언에게서 듣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언에게서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의현이 대신 해 주는 것만 같았다. 하나는 더 이상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의현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그러자 의현이 기다렸다는 듯 하나를 자신의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이를 달래듯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 천천히 두드려 주었다.
처음 안겨 보는 의현의 가슴은 무척 넓었다. 그리고 따뜻했다. 겨울의 추위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따뜻했다. 하나는 그 넓고 따스한 품에서 다친 가슴을 전부 드러내 놓고 후회 없을 만큼 울었다.
그녀의 눈물이 그의 가슴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도 모른 채. 지금 그가,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 버티면서 그녀의 눈물을 받아 주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편히, 울었다.
3. 사랑이 길을 잃어서
일주일이 지났다. 3월이 되었고, 하나는 소하고등학교 2학년 8반 담임으로 배정받았다. 집은 아직 구하지 못했고, 일주일이었지만 의현, 윤아와의 생활에 그럭저럭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하나는 이 생활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윤아도 한국에 잠깐 휴식차 온 것이어서 곧 다시 파리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하나도 얼른 집을 구해서 나가야 했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의 오빠라지만, 의현과 단둘이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언에게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었다.
“식사들 하세요!”
워낙 일찍 일어나서 밥을 차리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던 터라, 하나는 의현의 집에서도 아침 식사 당번을 자진해서 맡게 되었다. 덕분에 평소 아침을 잘 먹지 않던 의현과 윤아도 매일 건강한 아침을 강제로 먹게 되었다.
“와, 우리 하나 요리 솜씨는 진짜 죽인다니까.”
윤아가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 먹으며 신이 나서 말했다.
“야. 앉아서 젓가락으로 먹어.”
“완전 맛있어! 오빠! 얼른 나와 봐!”
막 샤워를 마친 의현이 욕실에서 나왔다. 그는 겉보기에는 시큰둥한 얼굴로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뭘 이렇게 많이 차렸어. 잠이나 좀 더 자지.”
“괜찮아요. 좋아서 하는 건데요, 뭐.”
하나는 밥이 그득한 공기를 나누어 준 뒤 자리에 앉았다. 처음엔 귀찮다며 아침 식사를 가장 반대하던 윤아가 밥을 가장 열심히 먹으며 말했다.
“암튼 우리 하나 데려가는 남자는 진짜 복 받은 거야. 예쁘지, 착하지, 몸매 좋지, 요리 잘하지, 내 친구지만 진짜 완벽한 신붓감이라니까.”
윤아의 칭찬에 하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야. 그니까 이시언 그 개자식은 이제 잊어버리고 얼른 다른 사람 찾아. 응? 근데 또 이 남자는, 너무 멀리서 억지로 찾아내서 연을 맺는 것보단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보는 게 좋다, 너.”
윤아가 너무 앞서 나간 듯싶자, 의현은 하나의 눈치를 보며 윤아를 저지시켰다.
“밥이나 먹어.”
하나는 웃고 있었지만 얼굴이 그리 밝지는 않았다. 윤아는 그때의 이야기를 들은 뒤,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말하지 않아도 끝난 거라며 시언을 향해 온갖 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하나가 절대 먼저 연락하지 못하도록 매 순간 옆에서 감시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