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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방송국 14층 직원 휴게실 입구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동글동글한 두상에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주변을 살피며 앞에 있는 여자를 향해 슬며시 지갑을 내밀었다.
“언니. 여기…….”
“매번 고맙다. 까딱하면 점심도 못 먹을 뻔했어.”
지갑을 받아 들며 루리가 씩 웃자 결아도 배시시 웃었다.
“고맙긴……. 그럼 난 이만.”
“엇. 결아야. 잠깐만.”
맡은 바 임무를 마치고 빛의 속도로 몸을 돌리는 결아를 루리가 턱 잡아 돌려세웠다.
“으, 응? 왜?”
결아는 마치 쫓기는 작은 짐승처럼 커다란 눈을 초조하게 굴렸다. 루리는 결아가 가져온 빨간 지갑을 열고 배추 잎 하나를 척 꺼내 내밀었다.
“날 더운데 오느라 고생했어. 이걸로 하드라도 하나 사 먹으면서 가.”
지갑은 빨간색을 써야 돈이 술술 잘 들어온다고 루리는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과는 달리 항상 저 지갑에서 돈이 술술 나가던 모습만 봐 오던 결아는 얼른 사양했다.
“아니야. 집도 코앞인데 뭐. 별로 덥지도 않…….”
“어허. 이 언니 섭섭하게. 넣어 둬, 넣어 둬.”
옹알거리는 결아의 말을 무시한 루리가 억지로 배추 잎을 쥐여 주고는 어린애 학교 보내듯 등을 떠밀었다.
“언니 오늘 늦으니까 먼저 밥 먹고. 문단속 잘하고 자.”
“으……응. 고마워.”
결아는 손에 배추 잎을 고이 쥔 채 작은 머리통으로 끄덕거렸다. 그러면서도 발은 자기도 모르게 종종걸음으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빨리 이곳을 탈출해야 해.
결아는 비장하게 눈을 빛냈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종종 뒷걸음질 치던 결아는 루리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얼른 방향을 바꿨다. 지금이야! 결아는 비상구 쪽으로 돌진해서 쏙 들어갔다.
“후아! 아무도 없는 곳에 오니까 이제야 좀 안심이 되네.”
아무도 없는 비상구 안에 들어온 결아는 조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어날 때부터 소심하게 응애 하더라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올 정도로 소심함을 타고난 결아였다. 그런 자신과는 달리 타고난 후광을 온몸에 장착하고 다니는 연예인들은 결아에겐 마치 다른 세계에 사는 생명체처럼 무서운 존재였다. 방송국은 그런 외계인들이 사방에서 넘실거리는 공포스러운 곳이라 결아는 이곳에 올 때마다 루리 몰래 늘 엘리베이터가 아닌 비상구 계단을 이용했다.
“엘리베이터 탔다가 연예인이라도 만나면……. 으으 끔찍해.”
결아는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쭉 끼쳐 와 가볍게 몸서리를 쳤다. 14층을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솔직히 꽤 힘든 일이었지만, 자신의 콩알만 한 심장과 정신 건강에는 이 편이 훨씬 나았다.
“운동 되고 좋지 뭐.”
나름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와 마침내 1층에 다다랐다. 이제 탈출의 고지가 눈앞. 결아는 어서 빠져나갈 생각에 비상구 문을 벌컥 열었다.
쾅!
“앗!”
그런데 문이 무언가와 강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웬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이, 이게 무슨 소리지?
결아의 동공이 급격히 흔들렸다. 내가 지금 뭔가 사고를 친…… 건 아니겠……. 아! 이럴 때가 아니지!
결아는 핏기가 싹 가신 창백한 얼굴로 얼른 문밖으로 튀어 나갔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갑자기 문을 여는 바람에……. 정말 정말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머리가 땅에 닿을 듯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지만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한 옹알이 소리였다.
“하, 어이가 없네.”
남자의 목소리에 읍소하듯 사과하던 결아가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상대방을 확인하려는데……. 어? 왜 아무리 고개를 들어도 얼굴이 보이지 않지? 거인인가? 키가 무척이나 큰 사람이었다. 고개를 한참 위로 올리고 나서야 드디어 얼굴이 보였다.
“어……!”
결아의 눈이 놀라운 듯 커졌다. 세, 세상에!
결아가 충격과 공포에 굳어 있는데 눈앞의 남자에게서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내려왔다.
“감히 내 얼굴에 상처를 내? 너 이게 얼마짜리 얼굴인 줄 알아?”
현재 한국 내에서 가장 핫하게 떠오르는 스타, 배우 선우휘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코를 가리고 있는 그의 손을 타고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이 코피라는 걸 확인하자 결아는 다리에 힘이 훅 풀렸다.
아니, 아닐 거야. 내가 선우휘의 코에서 코, 코피를 터뜨렸을 리가 없어. 아니야, 이건 꿈이야. 꿈일 거야……!
아무리 부정해 봐도 눈앞에서 단단히 화가 난 표정으로 코피를 흘리며 서 있는 남자는 그 유명한 선우휘가 맞았다.
“저, 저, 정말 죄송, 히끅. 죄송합, 히끅. 죄송합니다.”
결아는 버퍼링이 걸린 듯 딸꾹질을 연발하며 사과했다. 방금 전 자신이 코피를 터뜨린, 이 나라에서 가장 촉망받는 스타에게 붙잡혀 비상구 안으로 끌려 들어오게 된 이후로 완전한 패닉 상태였다.
“사과하면 될 일인가? 배우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휘의 싸늘한 목소리에 결아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이젠 퍼렇게 변하고 있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백 번 천 번 잘못한 일이니 부디 하, 한 번만 용서를…….”
“용서?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조금의 자비심도 없이 흘러나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결아는 사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아, 아니 그게…… 히끅.”
“넌 사과를 바닥 보고 하냐?”
그 말에 움찔한 결아는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꼴깍. 휘를 본 결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그리스 남신의 조각을 가져다 놓은 듯 빼어났다. 깎아지른 날렵한 턱과 높은 콧날, 색기를 품은 듯한 섬세한 입술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지닌 짙은 다크브라운색 눈동자까지. 보기만 해도 여자들 눈에서 하트를 뿅뿅 튀어나오게 할 마성의 마스크였다.
하지만 결아에겐 그저 공포의 대상일 뿐이었다.
무, 무서워……!
결아는 오들오들 떨리는 강아지 같은 눈으로 휘를 올려다봤다. 저렇게 사람 얼굴 같지 않게 생긴 남자와 이런 밀폐된 곳에서 단둘이 있으니까 꼭…….
꼬, 꼭 미술실에 있는 눈깔 없는 석고상이랑 마주 보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한밤중에 미술실에서 석고상을 봤을 때의 공포심이 떠올라 결아는 쭈뼛 소름이 돋았다. 그때 이후로 석고상과 닮은 조각남은 결아에겐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휘는 결아가 떨든 말든 팔짱을 끼고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내가 왜 널 용서해 줘야 되냐고.”
결아는 본능처럼 뒷걸음질 치며 옹알거렸다.
“아, 안 되겠지……요? 하, 하긴 배우는 얼굴이 생명인데…… 그 얼굴에 상처를 입혀 놓고 그냥 용서해 달라고 하는 건 너무 염치없는 짓…….”
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 눈앞에 있는 여자를 위아래로 쓰윽 훑어보았다. 햄스터처럼 귀엽게 생긴 여자가 바들바들 떨며 물기가 가득 들어찬 눈으로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때 결아를 보고 있던 그의 눈에 의외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아, 넌?
동글동글한 눈에 동글동글한 얼굴에 동글동글한 머리통을 가진 단발머리 여자애는 분명 그의 기억에 있던 여자였다. 그것도 여러 번.
왜 몰라봤지?
휘는 오히려 자신이 이 여자를 지금까지 몰라봤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아마 코가 뭉개져서 화가 난 데다 여자가 거의 고개를 들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계속 뒤통수만 보고 있었으니까. 말없이 결아를 내려다보던 휘가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재밌네.
입가에 슬몃 떠올랐던 미소를 싹 지운 그가 싸늘하게 말했다.
“어떻게 할 거야?”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
“돈으로 보상하든가, 아님 몸으로 때우든가.”
“도…… 돈이라면 얼마를…….”
달달 떨며 결아가 묻자 휘가 가볍게 손가락을 하나 펴 들었다.
“1억.”
“네에?”
1억이란 소리에 결아가 고개를 퍼뜩 들자, 눈앞에서 휘가 조각 같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이 얼굴로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인 줄 알아? 한 5억 부르려던 거 불쌍해서 봐준 거야.”
잔인한 목소리에 결아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저, 그, 그런 큰돈은 없는데…….”
눈물 때문에 결아의 말끝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흐려지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이 바보!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다니.
“돈 없어? 그럼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겠네.”
냉랭한 휘의 목소리에 결아가 결국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 흐윽……. 원하시면 자, 장기라도 팔 테니 우리 식구들만은 제발…….”
그 짧은 시간에 1억 원을 얻기 위해 새우잡이 배에 실려 가는 부모님과 언니가 통곡을 하는 장면까지 상상해 버린 결아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터져 버린 결아의 울음소리에 휘가 인상을 썼다.
“별로 건강해 보이지도 않는데 장기 같은 건 필요 없고, 할 줄 아는 거 있어?”
“전 그냥…… 흑. 호, 혼자 하는 걸 잘…… 흐으윽.”
결아가 말 반, 공기 반이 아니라 말 반, 흐느낌 반으로 대답하자 휘가 인상을 썼다.
“울지 마. 우는 여자 싫어하니까.”
“흑. 네, 알았습…… 힉. 히끅. 히끅.”
억지로 울음을 멈추려 하자 무서워서 멈췄던 딸꾹질이 다시 터져 나왔다. 결아가 놀란 얼굴로 얼른 제 입술을 손으로 막았지만 딸꾹질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쯧.”
휘가 짜증스럽게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휴대폰을 꺼냈다.
“일단 자세한 건 나중에 다시 말할 테니까, 전화번호.”
“히끅…… 네?”
휘가 휴대폰을 불쑥 꺼내 들었다. 결아는 휴대폰을 잡고 있는 그의 우아하고 기다란 손가락을 의아하게 쳐다보며 물먹은 눈을 깜박거렸다.
“부르라고.”
“아, 네, 네. 공일공…….”
결아가 부른 번호를 빠르게 입력한 휘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결아의 가방 안에 있는 휴대폰 벨소리가 청아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 사노라면~ 언젠가는~ 바앍은 날도 오겠지~
결아가 허둥지둥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려는데 벨소리를 확인한 휘가 툭,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결아를 냉랭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벨소리 취향 한번.”
“죄, 죄송…….”
왜 벨소리로 사과해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엉겁결에 나온 결아의 사과 멘트가 끝나기도 전에 휘가 뒤돌아섰다. 그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비상구를 빠져나갔다.
“…….”
문이 닫히자 그가 가고 난 자리에서 서늘한 바람이 일더니 결아의 온몸을 감쌌다. 정적에 휩싸인 비상구 안에서 온몸을 푸르르 떤 결아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갔다.”
하아, 토해져 나온 한숨과 함께 결아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손에 쥔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자 처음 보는 번호가 부재중 전화로 떡하니 떠 있었다.
“이제 어떡하면 좋지……?”
화면을 멍하니 보고 있던 결아의 커다란 두 눈이 다시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미간을 일그러뜨린 휘가 피 묻은 손수건을 짜증스럽게 쓰레기통으로 툭 던졌다.
“진짜 상처라도 난 거 아냐?”
명품 콧대라고 추앙받는 이 코에 문제가 생겼으면 너 진짜 가만 안 둔다.
휘가 얼얼한 콧대를 매만지며 방송국 로비를 가로지르는데 그의 뒤에서 쨍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꺄악! 휘 오빠!”
“오빠아아아!”
휘가 시야에 포착되자 입구에 진을 치고 있던 팬들이 돌고래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이런.”
인상을 찡그린 휘는 그들을 피해 엘리베이터 쪽 통로로 들어갔다. 아까도 팬들 때문에 비상구로 갔던 건데, 거기서 하필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휘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칼을 흩트리다가 피식 웃었다.
“세상 참 좁아.”
그 여자를 이렇게 만나다니……. 휘가 쿡쿡 웃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어머!”
엘리베이터 안에서 막 내리려던 여자 아나운서가 휘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선우휘잖아?
지금까지 수많은 연예인을 인터뷰해 봤지만 실물이 이만큼 잘생긴 남자는 처음이었다. 인터뷰 이후 따로 마주칠 일이 없어서 내심 아쉬웠는데, 마침 기회다 싶어 그녀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그의 앞에 섰다.
“전에 인터뷰 때 뵀는데, 잘 지내셨……. 어어?”
눈웃음을 살랑살랑 날리며 인사하는 그녀의 옆을 휘가 쓱 지나갔다. 상큼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아나운서가 뒤돌아보자 휘는 태연한 얼굴로 닫힘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뭐, 뭐 저런……!
아나운서는 닫히는 문 사이로 보이는 휘를 새빨개진 얼굴로 바라봤다.
“하! 뭐야? 듣던 것보다 더 싸가지잖아? 대놓고 사람을 무시해?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성격이 개차반이라더니. 소문이 맞는 모양이네.”
이미 위로 올라가고 있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노려보며 쏘아붙이던 여자는 몸을 홱 돌렸다.
“형! 어디 갔다 와요?”
막 전화를 걸려던 정석이 대기실로 들어오는 휘를 보고는 잽싸게 다가왔다.
“내가 너한테 일일이 보고하고 다녀야 되냐?”
휘가 시니컬한 얼굴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아, 아니 스케줄 남았는데 또 저번처럼 사라졌을까 봐 걱정을……. 형! 얼굴이 왜 그래요! 어디서 맞았어요?”
휘의 코가 빨개진 것을 본 정석이 놀란 얼굴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호들갑스럽게 얼굴을 살피는 정석에게 휘가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별거 아니야. 좀 부딪혔어.”
“엑스레이 찍어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됐어. 메이크업으로 가려지기만 하면 되니까.”
“그래도 얼굴로 먹고사는 사람이 조심 좀 하지…….”
물러난 얼굴에 다시 바짝 다가와선 요리조리 살피는 정석의 얼굴을 휘가 손으로 밀어 냈다.
“시끄러워, 니 할 일이나 해.”
“배우 얼굴 관리하는 것도 내 일인 거 몰라요? 그만해서 다행인데 앞으론 정말 조심 좀 해요.”
정석이 구시렁거리며 소파에 앉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저나 새 코디 뽑아야 되는데……. 형, 조금만 성질 좀 죽여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럼 제 수명도 십 년은 늘 것 같은데.”
정석이 신세 한탄하듯 중얼거리며 힘 빠진 얼굴로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그러다 문득 휘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근데 뭔가 나 모르는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코디도 도망가고 코도 다쳐서 와 놓곤 기분은 아까보다 좋아 보이는 것 같은데.”
대충 메이크업으로 상처를 가린 휘가 소파에 앉으며 긴 다리를 꼬았다.
“재밌는 걸 발견했거든.”
“……네?”
정석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휘를 바라봤다. 그러자 볼 때마다 악마란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사악하게 잘생긴 휘가 씨익 웃었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근사하게 웃는 얼굴을 보자 정석은 본능적으로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재밌는…… 거요? 그게 뭔데요?”
“있어. 그런 거.”
정석의 의심스러운 눈빛은 가볍게 무시한 휘가 휘파람을 불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뭔데요? 아, 게임 시작하면 안 돼요. 이제 진짜 준비해야 될 시간이니까.”
“게임하려는 거 아니야.”
휘가 최근 통화 목록에 입력된 번호를 누르고 저장하기를 연달아 눌렀다. 그러고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흠. 뭐가 좋을까……. 그래. 이게 딱이다.”
휘가 생각났다는 듯 터치패드를 누르곤 씩 웃었다.
[호구]
액정 위에 뜬 두 글자를 휘가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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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 14층 직원 휴게실 입구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동글동글한 두상에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주변을 살피며 앞에 있는 여자를 향해 슬며시 지갑을 내밀었다.
“언니. 여기…….”
“매번 고맙다. 까딱하면 점심도 못 먹을 뻔했어.”
지갑을 받아 들며 루리가 씩 웃자 결아도 배시시 웃었다.
“고맙긴……. 그럼 난 이만.”
“엇. 결아야. 잠깐만.”
맡은 바 임무를 마치고 빛의 속도로 몸을 돌리는 결아를 루리가 턱 잡아 돌려세웠다.
“으, 응? 왜?”
결아는 마치 쫓기는 작은 짐승처럼 커다란 눈을 초조하게 굴렸다. 루리는 결아가 가져온 빨간 지갑을 열고 배추 잎 하나를 척 꺼내 내밀었다.
“날 더운데 오느라 고생했어. 이걸로 하드라도 하나 사 먹으면서 가.”
지갑은 빨간색을 써야 돈이 술술 잘 들어온다고 루리는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과는 달리 항상 저 지갑에서 돈이 술술 나가던 모습만 봐 오던 결아는 얼른 사양했다.
“아니야. 집도 코앞인데 뭐. 별로 덥지도 않…….”
“어허. 이 언니 섭섭하게. 넣어 둬, 넣어 둬.”
옹알거리는 결아의 말을 무시한 루리가 억지로 배추 잎을 쥐여 주고는 어린애 학교 보내듯 등을 떠밀었다.
“언니 오늘 늦으니까 먼저 밥 먹고. 문단속 잘하고 자.”
“으……응. 고마워.”
결아는 손에 배추 잎을 고이 쥔 채 작은 머리통으로 끄덕거렸다. 그러면서도 발은 자기도 모르게 종종걸음으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빨리 이곳을 탈출해야 해.
결아는 비장하게 눈을 빛냈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종종 뒷걸음질 치던 결아는 루리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얼른 방향을 바꿨다. 지금이야! 결아는 비상구 쪽으로 돌진해서 쏙 들어갔다.
“후아! 아무도 없는 곳에 오니까 이제야 좀 안심이 되네.”
아무도 없는 비상구 안에 들어온 결아는 조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어날 때부터 소심하게 응애 하더라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올 정도로 소심함을 타고난 결아였다. 그런 자신과는 달리 타고난 후광을 온몸에 장착하고 다니는 연예인들은 결아에겐 마치 다른 세계에 사는 생명체처럼 무서운 존재였다. 방송국은 그런 외계인들이 사방에서 넘실거리는 공포스러운 곳이라 결아는 이곳에 올 때마다 루리 몰래 늘 엘리베이터가 아닌 비상구 계단을 이용했다.
“엘리베이터 탔다가 연예인이라도 만나면……. 으으 끔찍해.”
결아는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쭉 끼쳐 와 가볍게 몸서리를 쳤다. 14층을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솔직히 꽤 힘든 일이었지만, 자신의 콩알만 한 심장과 정신 건강에는 이 편이 훨씬 나았다.
“운동 되고 좋지 뭐.”
나름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와 마침내 1층에 다다랐다. 이제 탈출의 고지가 눈앞. 결아는 어서 빠져나갈 생각에 비상구 문을 벌컥 열었다.
쾅!
“앗!”
그런데 문이 무언가와 강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웬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이, 이게 무슨 소리지?
결아의 동공이 급격히 흔들렸다. 내가 지금 뭔가 사고를 친…… 건 아니겠……. 아! 이럴 때가 아니지!
결아는 핏기가 싹 가신 창백한 얼굴로 얼른 문밖으로 튀어 나갔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갑자기 문을 여는 바람에……. 정말 정말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머리가 땅에 닿을 듯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지만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한 옹알이 소리였다.
“하, 어이가 없네.”
남자의 목소리에 읍소하듯 사과하던 결아가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상대방을 확인하려는데……. 어? 왜 아무리 고개를 들어도 얼굴이 보이지 않지? 거인인가? 키가 무척이나 큰 사람이었다. 고개를 한참 위로 올리고 나서야 드디어 얼굴이 보였다.
“어……!”
결아의 눈이 놀라운 듯 커졌다. 세, 세상에!
결아가 충격과 공포에 굳어 있는데 눈앞의 남자에게서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내려왔다.
“감히 내 얼굴에 상처를 내? 너 이게 얼마짜리 얼굴인 줄 알아?”
현재 한국 내에서 가장 핫하게 떠오르는 스타, 배우 선우휘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코를 가리고 있는 그의 손을 타고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이 코피라는 걸 확인하자 결아는 다리에 힘이 훅 풀렸다.
아니, 아닐 거야. 내가 선우휘의 코에서 코, 코피를 터뜨렸을 리가 없어. 아니야, 이건 꿈이야. 꿈일 거야……!
아무리 부정해 봐도 눈앞에서 단단히 화가 난 표정으로 코피를 흘리며 서 있는 남자는 그 유명한 선우휘가 맞았다.
“저, 저, 정말 죄송, 히끅. 죄송합, 히끅. 죄송합니다.”
결아는 버퍼링이 걸린 듯 딸꾹질을 연발하며 사과했다. 방금 전 자신이 코피를 터뜨린, 이 나라에서 가장 촉망받는 스타에게 붙잡혀 비상구 안으로 끌려 들어오게 된 이후로 완전한 패닉 상태였다.
“사과하면 될 일인가? 배우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휘의 싸늘한 목소리에 결아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이젠 퍼렇게 변하고 있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백 번 천 번 잘못한 일이니 부디 하, 한 번만 용서를…….”
“용서?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조금의 자비심도 없이 흘러나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결아는 사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아, 아니 그게…… 히끅.”
“넌 사과를 바닥 보고 하냐?”
그 말에 움찔한 결아는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꼴깍. 휘를 본 결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그리스 남신의 조각을 가져다 놓은 듯 빼어났다. 깎아지른 날렵한 턱과 높은 콧날, 색기를 품은 듯한 섬세한 입술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지닌 짙은 다크브라운색 눈동자까지. 보기만 해도 여자들 눈에서 하트를 뿅뿅 튀어나오게 할 마성의 마스크였다.
하지만 결아에겐 그저 공포의 대상일 뿐이었다.
무, 무서워……!
결아는 오들오들 떨리는 강아지 같은 눈으로 휘를 올려다봤다. 저렇게 사람 얼굴 같지 않게 생긴 남자와 이런 밀폐된 곳에서 단둘이 있으니까 꼭…….
꼬, 꼭 미술실에 있는 눈깔 없는 석고상이랑 마주 보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한밤중에 미술실에서 석고상을 봤을 때의 공포심이 떠올라 결아는 쭈뼛 소름이 돋았다. 그때 이후로 석고상과 닮은 조각남은 결아에겐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휘는 결아가 떨든 말든 팔짱을 끼고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내가 왜 널 용서해 줘야 되냐고.”
결아는 본능처럼 뒷걸음질 치며 옹알거렸다.
“아, 안 되겠지……요? 하, 하긴 배우는 얼굴이 생명인데…… 그 얼굴에 상처를 입혀 놓고 그냥 용서해 달라고 하는 건 너무 염치없는 짓…….”
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 눈앞에 있는 여자를 위아래로 쓰윽 훑어보았다. 햄스터처럼 귀엽게 생긴 여자가 바들바들 떨며 물기가 가득 들어찬 눈으로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때 결아를 보고 있던 그의 눈에 의외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아, 넌?
동글동글한 눈에 동글동글한 얼굴에 동글동글한 머리통을 가진 단발머리 여자애는 분명 그의 기억에 있던 여자였다. 그것도 여러 번.
왜 몰라봤지?
휘는 오히려 자신이 이 여자를 지금까지 몰라봤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아마 코가 뭉개져서 화가 난 데다 여자가 거의 고개를 들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계속 뒤통수만 보고 있었으니까. 말없이 결아를 내려다보던 휘가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재밌네.
입가에 슬몃 떠올랐던 미소를 싹 지운 그가 싸늘하게 말했다.
“어떻게 할 거야?”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
“돈으로 보상하든가, 아님 몸으로 때우든가.”
“도…… 돈이라면 얼마를…….”
달달 떨며 결아가 묻자 휘가 가볍게 손가락을 하나 펴 들었다.
“1억.”
“네에?”
1억이란 소리에 결아가 고개를 퍼뜩 들자, 눈앞에서 휘가 조각 같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이 얼굴로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인 줄 알아? 한 5억 부르려던 거 불쌍해서 봐준 거야.”
잔인한 목소리에 결아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저, 그, 그런 큰돈은 없는데…….”
눈물 때문에 결아의 말끝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흐려지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이 바보!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다니.
“돈 없어? 그럼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겠네.”
냉랭한 휘의 목소리에 결아가 결국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 흐윽……. 원하시면 자, 장기라도 팔 테니 우리 식구들만은 제발…….”
그 짧은 시간에 1억 원을 얻기 위해 새우잡이 배에 실려 가는 부모님과 언니가 통곡을 하는 장면까지 상상해 버린 결아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터져 버린 결아의 울음소리에 휘가 인상을 썼다.
“별로 건강해 보이지도 않는데 장기 같은 건 필요 없고, 할 줄 아는 거 있어?”
“전 그냥…… 흑. 호, 혼자 하는 걸 잘…… 흐으윽.”
결아가 말 반, 공기 반이 아니라 말 반, 흐느낌 반으로 대답하자 휘가 인상을 썼다.
“울지 마. 우는 여자 싫어하니까.”
“흑. 네, 알았습…… 힉. 히끅. 히끅.”
억지로 울음을 멈추려 하자 무서워서 멈췄던 딸꾹질이 다시 터져 나왔다. 결아가 놀란 얼굴로 얼른 제 입술을 손으로 막았지만 딸꾹질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쯧.”
휘가 짜증스럽게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휴대폰을 꺼냈다.
“일단 자세한 건 나중에 다시 말할 테니까, 전화번호.”
“히끅…… 네?”
휘가 휴대폰을 불쑥 꺼내 들었다. 결아는 휴대폰을 잡고 있는 그의 우아하고 기다란 손가락을 의아하게 쳐다보며 물먹은 눈을 깜박거렸다.
“부르라고.”
“아, 네, 네. 공일공…….”
결아가 부른 번호를 빠르게 입력한 휘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결아의 가방 안에 있는 휴대폰 벨소리가 청아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 사노라면~ 언젠가는~ 바앍은 날도 오겠지~
결아가 허둥지둥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려는데 벨소리를 확인한 휘가 툭,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결아를 냉랭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벨소리 취향 한번.”
“죄, 죄송…….”
왜 벨소리로 사과해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엉겁결에 나온 결아의 사과 멘트가 끝나기도 전에 휘가 뒤돌아섰다. 그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비상구를 빠져나갔다.
“…….”
문이 닫히자 그가 가고 난 자리에서 서늘한 바람이 일더니 결아의 온몸을 감쌌다. 정적에 휩싸인 비상구 안에서 온몸을 푸르르 떤 결아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갔다.”
하아, 토해져 나온 한숨과 함께 결아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손에 쥔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자 처음 보는 번호가 부재중 전화로 떡하니 떠 있었다.
“이제 어떡하면 좋지……?”
화면을 멍하니 보고 있던 결아의 커다란 두 눈이 다시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미간을 일그러뜨린 휘가 피 묻은 손수건을 짜증스럽게 쓰레기통으로 툭 던졌다.
“진짜 상처라도 난 거 아냐?”
명품 콧대라고 추앙받는 이 코에 문제가 생겼으면 너 진짜 가만 안 둔다.
휘가 얼얼한 콧대를 매만지며 방송국 로비를 가로지르는데 그의 뒤에서 쨍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꺄악! 휘 오빠!”
“오빠아아아!”
휘가 시야에 포착되자 입구에 진을 치고 있던 팬들이 돌고래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이런.”
인상을 찡그린 휘는 그들을 피해 엘리베이터 쪽 통로로 들어갔다. 아까도 팬들 때문에 비상구로 갔던 건데, 거기서 하필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휘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칼을 흩트리다가 피식 웃었다.
“세상 참 좁아.”
그 여자를 이렇게 만나다니……. 휘가 쿡쿡 웃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어머!”
엘리베이터 안에서 막 내리려던 여자 아나운서가 휘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선우휘잖아?
지금까지 수많은 연예인을 인터뷰해 봤지만 실물이 이만큼 잘생긴 남자는 처음이었다. 인터뷰 이후 따로 마주칠 일이 없어서 내심 아쉬웠는데, 마침 기회다 싶어 그녀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그의 앞에 섰다.
“전에 인터뷰 때 뵀는데, 잘 지내셨……. 어어?”
눈웃음을 살랑살랑 날리며 인사하는 그녀의 옆을 휘가 쓱 지나갔다. 상큼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아나운서가 뒤돌아보자 휘는 태연한 얼굴로 닫힘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뭐, 뭐 저런……!
아나운서는 닫히는 문 사이로 보이는 휘를 새빨개진 얼굴로 바라봤다.
“하! 뭐야? 듣던 것보다 더 싸가지잖아? 대놓고 사람을 무시해?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성격이 개차반이라더니. 소문이 맞는 모양이네.”
이미 위로 올라가고 있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노려보며 쏘아붙이던 여자는 몸을 홱 돌렸다.
“형! 어디 갔다 와요?”
막 전화를 걸려던 정석이 대기실로 들어오는 휘를 보고는 잽싸게 다가왔다.
“내가 너한테 일일이 보고하고 다녀야 되냐?”
휘가 시니컬한 얼굴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아, 아니 스케줄 남았는데 또 저번처럼 사라졌을까 봐 걱정을……. 형! 얼굴이 왜 그래요! 어디서 맞았어요?”
휘의 코가 빨개진 것을 본 정석이 놀란 얼굴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호들갑스럽게 얼굴을 살피는 정석에게 휘가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별거 아니야. 좀 부딪혔어.”
“엑스레이 찍어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됐어. 메이크업으로 가려지기만 하면 되니까.”
“그래도 얼굴로 먹고사는 사람이 조심 좀 하지…….”
물러난 얼굴에 다시 바짝 다가와선 요리조리 살피는 정석의 얼굴을 휘가 손으로 밀어 냈다.
“시끄러워, 니 할 일이나 해.”
“배우 얼굴 관리하는 것도 내 일인 거 몰라요? 그만해서 다행인데 앞으론 정말 조심 좀 해요.”
정석이 구시렁거리며 소파에 앉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저나 새 코디 뽑아야 되는데……. 형, 조금만 성질 좀 죽여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럼 제 수명도 십 년은 늘 것 같은데.”
정석이 신세 한탄하듯 중얼거리며 힘 빠진 얼굴로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그러다 문득 휘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근데 뭔가 나 모르는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코디도 도망가고 코도 다쳐서 와 놓곤 기분은 아까보다 좋아 보이는 것 같은데.”
대충 메이크업으로 상처를 가린 휘가 소파에 앉으며 긴 다리를 꼬았다.
“재밌는 걸 발견했거든.”
“……네?”
정석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휘를 바라봤다. 그러자 볼 때마다 악마란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사악하게 잘생긴 휘가 씨익 웃었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근사하게 웃는 얼굴을 보자 정석은 본능적으로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재밌는…… 거요? 그게 뭔데요?”
“있어. 그런 거.”
정석의 의심스러운 눈빛은 가볍게 무시한 휘가 휘파람을 불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뭔데요? 아, 게임 시작하면 안 돼요. 이제 진짜 준비해야 될 시간이니까.”
“게임하려는 거 아니야.”
휘가 최근 통화 목록에 입력된 번호를 누르고 저장하기를 연달아 눌렀다. 그러고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흠. 뭐가 좋을까……. 그래. 이게 딱이다.”
휘가 생각났다는 듯 터치패드를 누르곤 씩 웃었다.
[호구]
액정 위에 뜬 두 글자를 휘가 만족스럽게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