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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사람이 믿기 힘든 일을 겪게 되면 일반적으로 거치는 코스가 있다. 처음엔 현실 부정. 그다음엔 분노. 그리고 마지막은 체념의 단계. 결아는 지금 현실 부정의 상태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그 남자와 헤어진 이후 내내 머릿속에선 같은 말만 떠오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내 인생에 갑자기 이런 일이 왜?
“그 선우휘, 선우휘라니! 왜 하필 그 남자의 얼굴을!”
뒤늦게 부르짖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왜 하필 그 남자란 말인가!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남자를!
선우휘는 데뷔하자마자 드라마에서 잘생기고 성격 까칠한 재벌 3세 역으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 이후로 재벌 3세 역을 또 했는데, 그것도 연달아 대박을 치는 바람에 몇 년 사이 몸값이 폭등했다. 그래서 지금 연예계에서 가장 높은 주가를 올리고 있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와 얽히게 되다니…….
“도, 도저히 안 되겠다. 일단 청심환을 하나 먹고…….”
결아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액상 청심환을 한 병 꺼내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후우, 진정하자. 진정…… 헉!”
― 사노라면~ 언젠가는~ 바앍은~
그러고도 안 되겠는지 환으로 된 청심환도 꺼내 달달 떨리는 손으로 껍질을 벗겨 내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려 결아가 화들짝 놀랐다. 서, 설마? 결아는 숨을 꿀꺽 삼킨 뒤 청심환을 내려놓고 부들거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그, 그 남자다!
저장하지는 않았으나 딱 한 번 보고도 머릿속에 각인처럼 새겨진 전화번호가 휴대폰 액정에 보란 듯이 떠 있었다. 10초 동안 숨도 쉬지 않고 휴대폰을 보고 있던 결아가 핏기 없는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
―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요’ 자가 나오기도 전에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결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사과했다.
“죄송해.”
― 집 주소.
이번에도 그는 ‘요’ 자를 들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잠깐, 그런데 방금 이 남자가 뭐라고 했지?
“……네?”
― 집 주소 부르라고.
“집 주소는 왜…….”
―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여, 영등포구…….”
무서운 목소리에 겁에 질린 결아가 집 주소를 줄줄 읊어 줬다.
― 30분 후에 집 앞에 은색 승용차 하나 서 있을 거니까 나와서 타.
“그걸 타면 어디로 가는…….”
뚝.
어? 끊었어? 결아는 끊긴 휴대폰을 든 채로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나오라니……. 설마 지금 그 남자가 여기로 온다는 건가?
“안 돼!”
결아는 절규하듯 소리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 선우휘가 온다니……. 차라리 저승사자가 온다는 말이 덜 무섭겠어!

정석은 휘가 불러 준 주소 앞에 차를 댔다.
“여기 맞지?”
주변을 휘 둘러보자 전방에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마스크, 모자, 머플러를 있는 대로 온몸에 칭칭 감고 있는 여자.
한여름에 덥지도 않나?
별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고 생각하며 보고 있는데 그 여자가 더 수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다섯 걸음 뒷걸음질 치더니 다섯 걸음 또 다가왔다가 다시 다섯 걸음 뒷걸음질 치고……. 그렇게 같은 자리를 문워크 하듯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날이 덥다 보니 정신이 혼미한 사람이 많네. 하긴 요즘 날이 좀 더워야지. 쯔쯧.”
정석이 측은지심이 섞인 시선으로 보다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데 형이 말한 여자는 어딨는…… 어?”
접신한 사람처럼 같은 자리를 뱅뱅 돌던 여자가 우뚝 멈추더니 자신의 차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설마 저 여자인가? 정석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창문을 내렸다. 그러자 질주해 오던 여자가 정석의 얼굴을 보곤 그 자리에 딱 멈췄다.
어? 그 남자가 아니잖아?
결아는 은색 승용차에 휘가 아닌 다른 남자가 타고 있는 것을 보고 낭패감에 젖었다. 모르는 사람 차를 향해 달려드는 여자라니. 얼마나 자신을 수상하게 생각할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아가 주춤주춤 뒷걸음치고 있는데 정석이 고개를 내민 채 말했다.
“형한테 전화받으신 분이죠?”
“네? 아, 네. 네.”
정석의 말을 알아들은 결아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타세요. 형이 보내서 왔어요.”
굳이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결아는 이 차가 휘가 보낸 차가 맞다는 걸 알고 다시 다가갔다.
“초면에 실례합……니다.”
옹알거리는 목소리로 말한 결아가 조심스럽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긴장된 표정으로 벨트를 매고 있는 결아의 모습을 정석이 관찰하듯 바라봤다.
흐음. 이 여자였단 말이지……. 정석이 몹시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결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 긴장되나? 돌덩이처럼 굳어 있는 결아에게 정석이 얼른 웃으며 말했다.
“전 형 매니저 유정석이라고 해요.”
“아, 전 이결아예요.”
옹알거리는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얼굴을 칭칭 감싼 머플러 때문인 것 같았다.
“덥지 않아요? 그건 벗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아, 네, 네.”
결아가 얼른 머플러와 마스크를 벗었다. 야구 모자를 쓴 그녀는 모자에 얼굴이 거의 가려질 정도로 작은 얼굴이었다. 자세히 보니 어깨 정도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것이 학생이 아닐까 싶어 정석이 물었다.
“실례지만 몇 살이세요?”
“스물다섯 살……이요.”
개미만 한 목소리로 대답한 결아가 고개를 숙이자 정석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스물다섯? 중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데?
아이처럼 뽀얀 피부에 수시로 흔들리는 까만 동공을 보고 있자니 정석은 왠지 그녀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만남에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자라니, 신선하네. 그래서 형이 관심 가진 건가? 정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차 시동을 걸었다.
“형이 직접 오지 않아서 실망했어요?”
“아! 아뇨! 그, 그럴 리가요!”
결아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너무 격렬하게 젓다 보니 모자가 훌렁 벗겨질 정도였다. 그 바람에 결아는 머리가 핑 돌아 모자를 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 현기증이…….”
“하핫. 재밌는 분이네. 아무튼 출발합니다.”
정석이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태연한 정석에 반해 결아는 산소 결핍을 느끼며 불안한 얼굴로 차 문에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이 차가 향하는 곳은…… 선우휘가 있는 곳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식은땀이 났다. 도망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언니가 내 대신 새우잡이 배에 타게 되겠지? 아아, 그건 안 돼…….
결아는 침통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하며 뒤로 물러나는 풍경들을 암울하게 응시했다.

입구부터 으리으리한 고급 주상 복합 건물에 들어선 결아는 정석의 안내에 따라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17층으로 올라갔다. 17층까지 올라가는 시간이 영겁의 세월처럼 길게 느껴졌다.
<잭과 콩나무>처럼 콩나무 줄기라도 내려왔으면. 아니, 여긴 한국이니까 우리나라 전래동화처럼 동아줄이라도……! 결아가 헛된 구원을 바라는 사이 17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어?”
결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리베이터 문 앞에 복도도 입구도 없이 바로 축구장처럼 넓은 거실이 떡하니 펼쳐졌다. 놀란 결아가 내리질 않고 서 있자 뒤에 있던 정석이 그녀의 어깨를 톡톡 쳤다.
“결아 씨? 안 내려요?”
“아아, 네!”
결아가 그제야 화다닥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뒤에서 정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전 가 볼게요.”
“네? 가, 가신다고요?”
결아가 토끼 눈을 뜨고 뒤돌아보니 이미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정석은 내려가 버린 뒤였다. 나만 두고 가 버리다니……! 결아가 두려움과 절망에 젖어 있는데 뒤에서 TV로 많이 듣던 목소리가 들렸다.
“늦었어.”
헉……. 결아는 그 순간 깨달았다.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탈출을 감행했어야 했다고. 매니저의 정석같이 생긴 정석이라는 남자가 생각보다 편안하게 대해 줘서 그만 망각해 버리고 만 것이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남자가……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라는 걸.
결아가 불안한 얼굴로 천천히 돌아봤다. 그곳엔 팔짱을 끼고 서 있는 휘가 보였다. 블랙 티셔츠에 블랙 진을 입은 올 블랙의 기다란 남자는 마치 방금 TV 화면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아, 안녕하세…….”
“따라와.”
결아의 인사를 끊은 휘가 오만하게 턱짓을 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소파가 있는 쪽으로 먼저 걸어갔다. 결아는 앞서 걸어가는 휘를 멍하니 바라봤다.
저 남자의 군살 없는 탄탄한 뒤태를 보니…… 왜 갑자기 슈베르트의 <마왕>이 생각나는 걸까? 아, 나 그 노래 음악 시간에 배우고 무서워서 일주일 동안 밤에 잠도 못 잤는데…….
“오라는 소리 안 들려?”
“아, 네!”
흠칫 놀란 결아는 그제야 넓은 거실 한복판을 종종거리며 가로질렀다. 엉거주춤 휘 앞에 서자 그가 소파 쪽으로 슥 턱짓을 했다.
“앉아.”
키우는 개한테 명령하는 듯한 턱짓이었지만, 결아는 고급스러운 레오파드 러그가 깔린 화이트 소파에 잽싸게 앉았다. 한여름에 웬 러그가 깔려 있나 싶었는데 추울 정도로 냉방이 잘되어 있어 전혀 덥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 냉방만이 아니라 저 남자 눈에서 느껴지는 냉기 때문……인가?
결아가 오도카니 소파 위에 앉은 채 휘를 흘끔거리자 그가 긴 다리를 우아하게 교차시켜 걸어왔다. 그러더니 맞은편 소파에 앉……는 게 아니라 왜, 왜 내 옆에 앉는 건데요?
“자.”
결아는 바로 옆에서 들리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어깨를 흠칫거렸다. 눈앞 테이블 위의 종이를 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보였다.
“여기 사인해.”
종이 위로 펜을 툭 던지며 휘가 시크하게 말하자 결아가 의아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이게 뭔데요?”
“계약서.”
“무슨 계약서요?”
결아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휘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마치 마왕처럼 무시무시한 얼굴로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하나를 해도 확실히 해야지. 시간 줄 테니까, 잘 읽어 보고 사인해.”
“아, 네…….”
휘가 자신의 손목시계를 힐긋 보며 관용을 베푼다는 식으로 말하자 결아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그러니까 읽어 보라는 말……이지? 결아가 조심스럽게 종이를 잡고 눈앞에 갖다 댔다. 제일 위에 쓰여 있는 커다란 글씨가 보였다.
“노예 계약서……?”
결아의 까만 눈이 쟁반만큼 커졌다. 제 눈앞에 버젓이 쓰여 있는 글씨를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노예 계약서라니……?
“저, 저기 이, 이게 무슨…….”
결아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종이를 가리키며 옹알거렸다.
“한글 못 읽어?”
휘가 인상을 찡그리자 결아가 침을 꼴깍 삼켰다.
“설마 진짜로, 정말로 이대로 하실 건…… 아니죠?”
“네 눈엔 내가 장난으로 이런 걸 만들 만큼 한가해 보이냐?”
시베리아 북풍 같은 휘의 차가운 시선에 결아는 말문이 막히고 숨이 막히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뭐 해? 빨리 읽지 않고.”
“아, 네.”
정신 차리자. 호랑이 굴에 끌려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댔어. 결아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다시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을은 지금부터 세 달간 갑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하며 만일 이를 어길 시엔 을이 손해를 끼친 1억 원에 위약금 5억 원을 추가로 배상…….」

“5, 5억? 5억 원이라고요?”
결아가 눈을 쟁반만 하게 뜨고는 고개를 쳐들었다.
“왜? 너무 적나? 하긴, 내가 생각해도 내 몸값이 있는데 너무 적은 것 같다는 생각은 했어. 한 10억 원쯤은 했어야 하는데.”
악마 같은 얼굴로 중얼거리는 휘를 보며 결아가 입을 뻐끔거렸다. 이, 이게 신체 포기 각서와 뭐가 달라?
“자. 읽었으면 사인해.”
휘는 태연하게 결아가 사인해야 할 곳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펜을 들고 굳어 있던 결아가 흔들리는 동공으로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말을 꺼냈다.
“저…… 물어볼 것이 있는데…….”
“뭔데.”
휘가 한쪽 눈썹을 날카롭게 치켜올리고 쳐다보자 결아는 눈을 스리슬쩍 내리깔았다.
“저기…… 호, 혹시 노예라는 것이 그…… 말하자면 그…… 그러니까 예컨대 말하자면 그…….”
“그러니까 말하자면, 뭐.”
휘가 짜증스럽게 되묻자 결아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설마 유, 육체적 관계라거나 그런 건……!”
용기를 최대한으로 끌어모은 결아가 겨우 말하다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휘의 수려한 얼굴이 잠시 그녀를 향했다. 그의 시선을 느낀 결아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린 손에서 두 손가락만 벌리고 휘를 쳐다봤다.
“…….”
말없이 결아를 보던 그의 입술 끝이 호선을 그리며 길게 휘어져 올라갔다.
“육체적 관계라.”
갑자기 휘가 소파 위를 손으로 짚더니 결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
조각 같은 얼굴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결아는 소파에 등이 찰싹 달라붙을 정도로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휘가 한 팔을 소파 등에 뻗어 그 사이에 결아를 가뒀다.
이 남자가 도대체 왜 이래? 자기 콧날이 얼마나 명품 콧날인지 보여 주려고 이럴…… 리는 없겠고, 자기 속눈썹이 얼마나 긴지 보여 주려고 이러는 거야?
TV 화면에서만 보던 여심을 사로잡는다는 짙은 다크브라운색 눈동자가 지근거리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무서워만 보이던 그의 눈을 가까이서 보니, 시선이 포박당한 듯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왜 이러지? 눈동자에 무슨 마력이라도 지닌 걸까?
결아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휘를 응시하자 그가 거리를 더 좁혀 왔다.
“네가 말한 그 육체적 관계라는 게…….”
휘가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결아의 동그란 턱을 들어 올렸다.
뭐, 뭘 하려는……? 휘의 입술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거, 거기서 더 다가오면 어쩌려고!
결아는 숨도 못 쉬고 제 앞에 가까이 있는 휘를 바라봤다. 휘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결아의 입술에 닿을 듯 다가갔다. 그러자 결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안 돼! 닿는……!
“혹시 이런 관계를 말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