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그들의 사랑은 길었다
1화
프롤로그
오후의 초여름 거리는 더없이 밝고 환했다.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강렬한 햇살 한 줄에 찌푸리고 있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지 않아 작은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뜬 단영은 손에 들린 장대 우산을 난감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장마철에 있을 만한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거리를 지나는 다른 이들의 손에는 흔한 접이 우산 하나 들려 있지 않았다.
어제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폭우처럼 쏟아지는 소나기를 만났었다. 오도 가도 못해 난처했던 기억에 오늘은 날씨부터 검색하고 집을 나섰다. 제대로 준비했다고 여겼는데 종일토록 비 구경은 하지도 못했다.
단영은 부동산에서 나와 지하철을 올라타자마자 휴대폰을 들어 최근 검색창을 다시 열었다. 찬찬히 훑어보니 집을 나서며 본 예보는 지난해 오늘의 날씨를 운운한 누군가의 블로그 창이었다.
바보같이. 접이식 우산이 구비되어 있는데도 손에 잡힌 게 왜 하필 이것이었는지. 불과 두어 시간 전까지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장대 우산으로 햇살을 가리며 거리를 거닐던 단영은 민준과의 만남 앞에서 새삼스러울 것 없는 자신의 덤벙거림이 원망스러웠다. 누가 봐도 집에서 대충 걸치고 나온 차림새에 지팡이 같은 장대 우산. 이 꼴로 민준의 약혼녀와 첫 만남을 가져야 하다니.
단영은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훑어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약속 장소 앞에서 어정거리길 벌써 10여 분째였다. 깨끗이 빨아 처음 꺼내 입은 티셔츠가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얼까. 사람을 외관과 행색으로 판단한 적도, 또 그것 때문에 위축된 적도 없었다.
단영은 근래 몇 가지 이유로 곤궁함에 처하다 보니 사람을 만날 마음의 여유가 없나 보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마땅찮은 표정을 애써 지웠다.
가방에서 울려 퍼지는 휴대폰의 진동음 소리에 카페의 문손잡이를 호기롭게 잡으려던 단영의 손이 툭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깨끗하게 닦여진 큰 유리문 너머, 매끈한 어깨선을 따라 떨어진 슈트 핏이 멋진 남자와 그에 어울리는 한 여자가 그녀의 눈동자 안으로 들어왔다. 하얀 민소매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자의 수줍은 미소에서 비단 차림새뿐만 아니라 살아온 삶의 질이 저와 다름을 느꼈다.
“여보세요. 아, 민준아. 그렇지 않아도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미안해서 어떡하지? 갑자기 일이 생겨서 만나기 어려울 것 같은데…….”
만남을 망설이던 말은 단영이 입을 열자 어렵지 않게 불쑥 튀어 나왔다.
태준은 목적지인 카페 간판이 보이는 빌딩의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몰며 핸들 옆 시계에 힐긋 눈길을 주었다. 시간을 확인한 순간, 가게에서 30m 정도 떨어진 곳에 잠시 차를 주차키로 마음을 바꾸었다.
운전석에서 내려 서둘러 옮기던 그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차체 앞에 몸을 기대고 있는 그에게선 조금 전 시간에 쫓기던 모습이 아니라 진중함이 묻어났다. 거리를 향해 한 번, 카페 창가로 한 번, 다시 도로변을 향해 되돌아서기를 반복하는 한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태준의 얼굴은 무덤덤했지만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저 망설임의 끝은 언제일까. 지켜보던 태준이 가게를 향해 성큼 걷기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여자도 마음을 결정했는지 몸을 돌렸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그녀는 카페의 문을 연 순간 한 걸음 뒤에서 따라 들어가려던 그를 향해 갑자기 몸을 돌렸다.
여자의 작은 어깨가 그의 가슴팍으로 살짝 부딪혀 왔다. 그녀의 손에 들려진 장대 우산이 툭 소리를 내면서 땅에 떨어졌다.
“아, 죄송합니다.”
“여기.”
“고맙습니다.”
태준이 장대 우산을 주워 건네자 그녀가 한 손으로 우산을 받아 들었다. 그의 어깨 즈음에 있던 그녀의 고개가 꾸벅 숙여졌다. 시선은 여전히 땅을 향한 채였다.
“아무 일도 아니야, 미안해. 오전에 말한 부탁은 나중에 다시 전화…….”
다시 한번 묵례를 살짝 건넨 뒤 통화를 하며 도로변으로 향하는 여자의 등 뒤로 한동안 그의 시선이 머물렀다.
1화
연이틀 내리던 비가 그쳤다. 오프 때마다 집을 알아보느라 지칠 대로 지친 단영의 두 눈은 쉽사리 떠지길 거부했지만 모처럼의 환한 햇살이 늦잠을 방해했다.
침대를 벗어나기 무섭게 오전 내도록 바쁜 그녀였다. 병원으로 출근했으면 모를까, 집 안 구석구석 밀린 일거리를 찾는 마음은 하염없이 바빴다.
단영은 어깨에 걸쳐진 집 전화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오른편 귀를 전화기에 단단히 눌렀다. 홑이불을 높은 빨랫줄에 널기 위해 팔을 뻗느라 울먹이며 떼를 쓰는 보람의 청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안 돼. 간만에 있는 오프인데, 그곳에서 영혼 뺏기고 올 일 없어.”
—단영아, 한 번만. 응? 내가 오죽하면 너한테 같이 가자고 하겠니.
“글쎄, 안 된다니까. 내일 이른 출근이란 말이야. 이번 주말엔 엄마에게 가는 것도 알잖아.”
단영은 한 손으로 물기에 젖은 얇은 이불의 주름을 꼼꼼히 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전화기를 고쳐 잡으며 단호하게 의사 표시를 했다. 보람의 애끓는 목소리에 마음은 조금 불편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무아지경의 공연이라니. 겨우 지탱해 나가는 에너지를 뺏기고 올 수는 없었다.
지난겨울 크리스마스 때 보람이 좋은 콘서트 티켓이 생겼다며 데려간 곳이 무아지경의 공연이었다. 세 시간 가까이나 되는 공연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얼마나 환호성을 내질렀던지 다음 날엔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생애 한 번 있는 경험으로는 나쁘지 않았다고 여겼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또 좋은 콘서트가 있다는 보람의 말에 무아지경이면 말도 꺼내지 말라고 했더니, 이번엔 대학로에 있는 작은 아트홀 공연이라 했다. 역시나 무아지경의 앨범 발표회였다. 어이없어하는 그녀에게 동문 좋다는 게 뭐냐고 배시시 웃으며 변명을 하던 보람이었다.
무아지경의 리더, 이선무.
크리스마스 공연에선 거리가 멀어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소극장 아트홀 공연에서 봤을 때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한솔고등학교 밴드 출신이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명성이 자자한 사립 명문 자사고인 한솔고 졸업생이 아무리 노래가 좋다고 한들 밴드 그룹의 리더라니. 일면식도 없는 선배지만 그의 인생 또한 평탄치는 않았겠다고 여기며 단영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좋을 것 하나 없는 학창 시절이었다. 머리에서 깨끗이 지우고 싶을 만큼.
단영은 다시 어깨와 한쪽 귀에 전화기를 야무지게 끼우고 옷걸이에 젖은 빨래를 널면서 생각을 몰아내듯 쐐기를 박았다.
“안 돼. 아니, 싫어.”
—너 정말 이럴래? 내가 몇 시간짜리 콘서트장에 가자고 했어, 뭘 했어? 예나 언니 카페에 홍보 공연해 주러 온다잖아. 언니 얼굴도 보고, 가서 술도 좀 팔아 주고, 표조차 구하기 어렵다는 인디 밴드 노래도 공짜로 듣고 얼마나 좋아?
예나. 그 언니의 성이 뭐였더라. 무리하게 기억을 더듬어도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솔중학교와 고등학교 앞에서 작은 분식집을 하던 그녀를 홍대 앞에서 만났다고 보람이 호들갑을 떨며 연락을 해 왔다. 알고 보니 그것도 무아지경을 쫓아다니던 중 우연히 겪은 일이었다.
“취향에 안 맞으니까. 거기 다녀오면 다음 날까지 귀가 먹먹해서 환자들이 부르는 소리도 안 들려.”
—콘서트도 아니고 카페 공연이야. 몇 곡이나 한다고 그러니? 이번엔 금방 끝날 거야.
“그러게. 제대로 된 공연도 아니고,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즐기자는 거잖아. 하여튼 난 싫어.”
—서단영! 친구 좋다는 게 뭐야? 강남 갈 때도 따라가는 게 친구 아냐?
“그럼 민준이라도 불러서 가든지.”
—공적인 일로도 보기 어려운 애를 어떻게 불러? 네 일 앞에서야 슈퍼맨이지.
“무슨 말이야, 그건 또? 언제는 민준이가 회사에 들를 때마다 밥 사 주는 덕에 직원들이 깍듯이 대해 준다며.”
보람은 민준의 회사 HS그룹 자문 로펌 세무 담당 변호인단 중의 하나였다.
—요즘은 회사 들어가도 보기 힘들어. 직급이 더 올랐다던데 너 못 들었어? 지난 주말에 잠깐 민준이 만나기로 했다며?
“……아, 갑자기 딴 일이 생겨서.”
지난 주말, 급한 일을 핑계로 자리를 피한 단영은 아직 민준과 통화하지 못했다. 그에게서 부재중 통화가 두 번 들어오긴 했지만 모두 병실 라운딩을 할 때였고, 도저히 입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아 부러 먼저 걸지 않았다.
—하여튼, 이젠 약혼녀까지 있는 애를 그런 데 불러내고 싶지 않아. 나도 노래가 좋아서 가는 것도 아닌데 둘이 마주 앉아 뭐해?
약이 오른 걸까. 혼자서는 그런 곳에 절대 못 가는 보람이 조바심이 난 걸까. 그제야 단영이 듣고 싶었던 말이 나왔다.
“그럼 왜 가는데? 너 무아지경 팬이잖아. 그래서 크리스마스 시즌 공연엔 지방까지 따라간 것 아니었어?”
그럼 그렇지, 보람과 친구가 되고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는 시간이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자신보다 시끄러운 것은 더 질색인 보람이 보채는 걸 보니 필시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던 그녀의 의혹이 풀리려는 순간이었다.
“건반 두드리는 현아인가 하는 여자 빼고. 선무, 지훈, 태경 중에 누구야? 뻔질나게 공연 핑계 대고 쫓아다니는 인물이 누군지 말해 봐. 그러면 이 언니가 이번만 특별히 한 번 더 따라가 보든가.”
모른 척 묻는 단영의 양 입가에 짓궂은 웃음이 살짝 번졌다.
단영은 가게에 들어서도록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보람에게 구태여 물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가게의 구석진 무대 한편에서 열심히 공연을 준비하는 네 사람 중, 보람의 시선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 꽂혀 있었다. 그 모습에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무심함을 깨달으며 보람에게 살짝 미안해졌다.
게다가 카페 아미코에 울려 퍼지는 발라드 음률은 무아지경에 대한 선입견을 바꾸어 놓았다. 시끄러운 게 밴드 음악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잔잔하고 애절한 가사와 남자 보컬의 허스키한 음색이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어우러져 요 몇 주 지칠 대로 지친 그녀의 마음을 조금은 느슨하게 해 주었다.
“뭐야. 보람이 무슨 일 있어?”
스무디를 꼭 쥔 채 무대만 바라보고 있는 보람을 향해 단영이 곁눈질을 해 보이자 예나가 의아한 듯 물어왔다. 단영은 여전히 단아하고 여성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예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그녀의 나이가 스물을 갓 넘은 듯했으니 지금은 서른 후반쯤 되었겠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더 젊어 보였다.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고 다정하던 그녀를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단영은 보람과 통화할 때 한 번씩 아미코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내심 의아했었다. 보람이 예나를 알 게 된 것은 자신을 통해서였다. 무슨 이유로 찾는 걸까 하던 질문의 답을 이제야 알았다. 공연 때문이 아니더라도 밴드 멤버들이 간간히 이곳에서 맥주를 마신다는 사실을.
“언니도 아직 못 들…….”
“아! 저 사람…… 설마 깡태?”
공연이 시작된 후 시종일관 말없이 무대만 바라보던 보람이 새된 목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의자 모퉁이에 걸어 놓은 단영의 가방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단영은 가방을 들어 올리며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보람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무대를 향한 단영이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할 때 무아지경의 무, 리더 이선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 무아지경은 이 친구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사실 앞서 여러분에게 들려 드렸던 저희 밴드의 데뷔곡인 ‘퍼스트 러브’와 ‘일방통행’, 모두 이 친구가 작곡한 것입니다. 유명한 가수들도 많은데 친구라는 이유로 번번이 곡을 주면서도 어떻게 하다 보니 저희 공연을 한 번도 볼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오늘 이 무대를 준비했습니다.”
단영의 표정에 조금씩 변화가 일었다. 그리고 미세하게 속눈썹이 떨렸다. 예나를 향해서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이 무언으로 묻고 있었다. 예나는 그저 웃음만 지어 보였다.
“자, 그럼 그가 만든 세 번째 곡 ‘지독한 거짓말’을 작곡가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영광을 여러분께 드리겠습니다. 기타 앤 보컬, 강태준!”
선무에게서 기타를 건네받은 그가 첫 음을 조율하자 장내는 힘찬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기타 소리에 섞인 박수 때문인지, 낯선 듯 낯익은 그의 실체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평소보다 맥주를 많이 마신 탓인지 단영의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뭐야. 정말 깡태 맞아? 예나 언니, 정말 그 한솔고 깡태예요?”
발을 동동 구르며 호들갑을 떠는 보람의 말에 예나가 무어라고 대답을 하는지 단영의 멍한 귀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 * *
1999년 여름.
내리쬐는 태양이 살갗을 찢어 놓을 것 같은 오후였다.
오늘은 대 한솔중·고등학교 간부 수련회 첫날이었다. 두 학교는 유치원에서 과학고 및 외국어고,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최고 재단 법인 한솔재단이 건립한 학교 중 역사와 전통이 가장 오래된 곳이었다. 중학교는 다른 공립학교와 마찬가지로 주거지에 인접한 초등학생들의 복불복 추첨제 배정이었지만, 한솔고등학교는 열성 있는 엄마들이 기를 쓰고 자식을 보내려 하는 전국 최고 자사고 중 하나였다.
한솔중학교는 담벼락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 한솔고등학교와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 담벼락의 3분의 1은 넓은 그물망으로 되어 있어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타고 넘기 수월했다. 더군다나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300m 숲길 통학로를 걸어 들어가 제1정문을 함께 쓰고 있는 터라 양 학교 학생들의 마음의 경계는 얇았다.
1화
프롤로그
오후의 초여름 거리는 더없이 밝고 환했다.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강렬한 햇살 한 줄에 찌푸리고 있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지 않아 작은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뜬 단영은 손에 들린 장대 우산을 난감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장마철에 있을 만한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거리를 지나는 다른 이들의 손에는 흔한 접이 우산 하나 들려 있지 않았다.
어제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폭우처럼 쏟아지는 소나기를 만났었다. 오도 가도 못해 난처했던 기억에 오늘은 날씨부터 검색하고 집을 나섰다. 제대로 준비했다고 여겼는데 종일토록 비 구경은 하지도 못했다.
단영은 부동산에서 나와 지하철을 올라타자마자 휴대폰을 들어 최근 검색창을 다시 열었다. 찬찬히 훑어보니 집을 나서며 본 예보는 지난해 오늘의 날씨를 운운한 누군가의 블로그 창이었다.
바보같이. 접이식 우산이 구비되어 있는데도 손에 잡힌 게 왜 하필 이것이었는지. 불과 두어 시간 전까지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장대 우산으로 햇살을 가리며 거리를 거닐던 단영은 민준과의 만남 앞에서 새삼스러울 것 없는 자신의 덤벙거림이 원망스러웠다. 누가 봐도 집에서 대충 걸치고 나온 차림새에 지팡이 같은 장대 우산. 이 꼴로 민준의 약혼녀와 첫 만남을 가져야 하다니.
단영은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훑어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약속 장소 앞에서 어정거리길 벌써 10여 분째였다. 깨끗이 빨아 처음 꺼내 입은 티셔츠가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얼까. 사람을 외관과 행색으로 판단한 적도, 또 그것 때문에 위축된 적도 없었다.
단영은 근래 몇 가지 이유로 곤궁함에 처하다 보니 사람을 만날 마음의 여유가 없나 보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마땅찮은 표정을 애써 지웠다.
가방에서 울려 퍼지는 휴대폰의 진동음 소리에 카페의 문손잡이를 호기롭게 잡으려던 단영의 손이 툭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깨끗하게 닦여진 큰 유리문 너머, 매끈한 어깨선을 따라 떨어진 슈트 핏이 멋진 남자와 그에 어울리는 한 여자가 그녀의 눈동자 안으로 들어왔다. 하얀 민소매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자의 수줍은 미소에서 비단 차림새뿐만 아니라 살아온 삶의 질이 저와 다름을 느꼈다.
“여보세요. 아, 민준아. 그렇지 않아도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미안해서 어떡하지? 갑자기 일이 생겨서 만나기 어려울 것 같은데…….”
만남을 망설이던 말은 단영이 입을 열자 어렵지 않게 불쑥 튀어 나왔다.
태준은 목적지인 카페 간판이 보이는 빌딩의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몰며 핸들 옆 시계에 힐긋 눈길을 주었다. 시간을 확인한 순간, 가게에서 30m 정도 떨어진 곳에 잠시 차를 주차키로 마음을 바꾸었다.
운전석에서 내려 서둘러 옮기던 그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차체 앞에 몸을 기대고 있는 그에게선 조금 전 시간에 쫓기던 모습이 아니라 진중함이 묻어났다. 거리를 향해 한 번, 카페 창가로 한 번, 다시 도로변을 향해 되돌아서기를 반복하는 한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태준의 얼굴은 무덤덤했지만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저 망설임의 끝은 언제일까. 지켜보던 태준이 가게를 향해 성큼 걷기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여자도 마음을 결정했는지 몸을 돌렸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그녀는 카페의 문을 연 순간 한 걸음 뒤에서 따라 들어가려던 그를 향해 갑자기 몸을 돌렸다.
여자의 작은 어깨가 그의 가슴팍으로 살짝 부딪혀 왔다. 그녀의 손에 들려진 장대 우산이 툭 소리를 내면서 땅에 떨어졌다.
“아, 죄송합니다.”
“여기.”
“고맙습니다.”
태준이 장대 우산을 주워 건네자 그녀가 한 손으로 우산을 받아 들었다. 그의 어깨 즈음에 있던 그녀의 고개가 꾸벅 숙여졌다. 시선은 여전히 땅을 향한 채였다.
“아무 일도 아니야, 미안해. 오전에 말한 부탁은 나중에 다시 전화…….”
다시 한번 묵례를 살짝 건넨 뒤 통화를 하며 도로변으로 향하는 여자의 등 뒤로 한동안 그의 시선이 머물렀다.
1화
연이틀 내리던 비가 그쳤다. 오프 때마다 집을 알아보느라 지칠 대로 지친 단영의 두 눈은 쉽사리 떠지길 거부했지만 모처럼의 환한 햇살이 늦잠을 방해했다.
침대를 벗어나기 무섭게 오전 내도록 바쁜 그녀였다. 병원으로 출근했으면 모를까, 집 안 구석구석 밀린 일거리를 찾는 마음은 하염없이 바빴다.
단영은 어깨에 걸쳐진 집 전화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오른편 귀를 전화기에 단단히 눌렀다. 홑이불을 높은 빨랫줄에 널기 위해 팔을 뻗느라 울먹이며 떼를 쓰는 보람의 청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안 돼. 간만에 있는 오프인데, 그곳에서 영혼 뺏기고 올 일 없어.”
—단영아, 한 번만. 응? 내가 오죽하면 너한테 같이 가자고 하겠니.
“글쎄, 안 된다니까. 내일 이른 출근이란 말이야. 이번 주말엔 엄마에게 가는 것도 알잖아.”
단영은 한 손으로 물기에 젖은 얇은 이불의 주름을 꼼꼼히 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전화기를 고쳐 잡으며 단호하게 의사 표시를 했다. 보람의 애끓는 목소리에 마음은 조금 불편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무아지경의 공연이라니. 겨우 지탱해 나가는 에너지를 뺏기고 올 수는 없었다.
지난겨울 크리스마스 때 보람이 좋은 콘서트 티켓이 생겼다며 데려간 곳이 무아지경의 공연이었다. 세 시간 가까이나 되는 공연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얼마나 환호성을 내질렀던지 다음 날엔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생애 한 번 있는 경험으로는 나쁘지 않았다고 여겼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또 좋은 콘서트가 있다는 보람의 말에 무아지경이면 말도 꺼내지 말라고 했더니, 이번엔 대학로에 있는 작은 아트홀 공연이라 했다. 역시나 무아지경의 앨범 발표회였다. 어이없어하는 그녀에게 동문 좋다는 게 뭐냐고 배시시 웃으며 변명을 하던 보람이었다.
무아지경의 리더, 이선무.
크리스마스 공연에선 거리가 멀어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소극장 아트홀 공연에서 봤을 때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한솔고등학교 밴드 출신이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명성이 자자한 사립 명문 자사고인 한솔고 졸업생이 아무리 노래가 좋다고 한들 밴드 그룹의 리더라니. 일면식도 없는 선배지만 그의 인생 또한 평탄치는 않았겠다고 여기며 단영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좋을 것 하나 없는 학창 시절이었다. 머리에서 깨끗이 지우고 싶을 만큼.
단영은 다시 어깨와 한쪽 귀에 전화기를 야무지게 끼우고 옷걸이에 젖은 빨래를 널면서 생각을 몰아내듯 쐐기를 박았다.
“안 돼. 아니, 싫어.”
—너 정말 이럴래? 내가 몇 시간짜리 콘서트장에 가자고 했어, 뭘 했어? 예나 언니 카페에 홍보 공연해 주러 온다잖아. 언니 얼굴도 보고, 가서 술도 좀 팔아 주고, 표조차 구하기 어렵다는 인디 밴드 노래도 공짜로 듣고 얼마나 좋아?
예나. 그 언니의 성이 뭐였더라. 무리하게 기억을 더듬어도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솔중학교와 고등학교 앞에서 작은 분식집을 하던 그녀를 홍대 앞에서 만났다고 보람이 호들갑을 떨며 연락을 해 왔다. 알고 보니 그것도 무아지경을 쫓아다니던 중 우연히 겪은 일이었다.
“취향에 안 맞으니까. 거기 다녀오면 다음 날까지 귀가 먹먹해서 환자들이 부르는 소리도 안 들려.”
—콘서트도 아니고 카페 공연이야. 몇 곡이나 한다고 그러니? 이번엔 금방 끝날 거야.
“그러게. 제대로 된 공연도 아니고,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즐기자는 거잖아. 하여튼 난 싫어.”
—서단영! 친구 좋다는 게 뭐야? 강남 갈 때도 따라가는 게 친구 아냐?
“그럼 민준이라도 불러서 가든지.”
—공적인 일로도 보기 어려운 애를 어떻게 불러? 네 일 앞에서야 슈퍼맨이지.
“무슨 말이야, 그건 또? 언제는 민준이가 회사에 들를 때마다 밥 사 주는 덕에 직원들이 깍듯이 대해 준다며.”
보람은 민준의 회사 HS그룹 자문 로펌 세무 담당 변호인단 중의 하나였다.
—요즘은 회사 들어가도 보기 힘들어. 직급이 더 올랐다던데 너 못 들었어? 지난 주말에 잠깐 민준이 만나기로 했다며?
“……아, 갑자기 딴 일이 생겨서.”
지난 주말, 급한 일을 핑계로 자리를 피한 단영은 아직 민준과 통화하지 못했다. 그에게서 부재중 통화가 두 번 들어오긴 했지만 모두 병실 라운딩을 할 때였고, 도저히 입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아 부러 먼저 걸지 않았다.
—하여튼, 이젠 약혼녀까지 있는 애를 그런 데 불러내고 싶지 않아. 나도 노래가 좋아서 가는 것도 아닌데 둘이 마주 앉아 뭐해?
약이 오른 걸까. 혼자서는 그런 곳에 절대 못 가는 보람이 조바심이 난 걸까. 그제야 단영이 듣고 싶었던 말이 나왔다.
“그럼 왜 가는데? 너 무아지경 팬이잖아. 그래서 크리스마스 시즌 공연엔 지방까지 따라간 것 아니었어?”
그럼 그렇지, 보람과 친구가 되고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는 시간이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자신보다 시끄러운 것은 더 질색인 보람이 보채는 걸 보니 필시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던 그녀의 의혹이 풀리려는 순간이었다.
“건반 두드리는 현아인가 하는 여자 빼고. 선무, 지훈, 태경 중에 누구야? 뻔질나게 공연 핑계 대고 쫓아다니는 인물이 누군지 말해 봐. 그러면 이 언니가 이번만 특별히 한 번 더 따라가 보든가.”
모른 척 묻는 단영의 양 입가에 짓궂은 웃음이 살짝 번졌다.
단영은 가게에 들어서도록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보람에게 구태여 물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가게의 구석진 무대 한편에서 열심히 공연을 준비하는 네 사람 중, 보람의 시선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 꽂혀 있었다. 그 모습에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무심함을 깨달으며 보람에게 살짝 미안해졌다.
게다가 카페 아미코에 울려 퍼지는 발라드 음률은 무아지경에 대한 선입견을 바꾸어 놓았다. 시끄러운 게 밴드 음악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잔잔하고 애절한 가사와 남자 보컬의 허스키한 음색이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어우러져 요 몇 주 지칠 대로 지친 그녀의 마음을 조금은 느슨하게 해 주었다.
“뭐야. 보람이 무슨 일 있어?”
스무디를 꼭 쥔 채 무대만 바라보고 있는 보람을 향해 단영이 곁눈질을 해 보이자 예나가 의아한 듯 물어왔다. 단영은 여전히 단아하고 여성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예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그녀의 나이가 스물을 갓 넘은 듯했으니 지금은 서른 후반쯤 되었겠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더 젊어 보였다.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고 다정하던 그녀를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단영은 보람과 통화할 때 한 번씩 아미코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내심 의아했었다. 보람이 예나를 알 게 된 것은 자신을 통해서였다. 무슨 이유로 찾는 걸까 하던 질문의 답을 이제야 알았다. 공연 때문이 아니더라도 밴드 멤버들이 간간히 이곳에서 맥주를 마신다는 사실을.
“언니도 아직 못 들…….”
“아! 저 사람…… 설마 깡태?”
공연이 시작된 후 시종일관 말없이 무대만 바라보던 보람이 새된 목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의자 모퉁이에 걸어 놓은 단영의 가방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단영은 가방을 들어 올리며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보람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무대를 향한 단영이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할 때 무아지경의 무, 리더 이선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 무아지경은 이 친구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사실 앞서 여러분에게 들려 드렸던 저희 밴드의 데뷔곡인 ‘퍼스트 러브’와 ‘일방통행’, 모두 이 친구가 작곡한 것입니다. 유명한 가수들도 많은데 친구라는 이유로 번번이 곡을 주면서도 어떻게 하다 보니 저희 공연을 한 번도 볼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오늘 이 무대를 준비했습니다.”
단영의 표정에 조금씩 변화가 일었다. 그리고 미세하게 속눈썹이 떨렸다. 예나를 향해서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이 무언으로 묻고 있었다. 예나는 그저 웃음만 지어 보였다.
“자, 그럼 그가 만든 세 번째 곡 ‘지독한 거짓말’을 작곡가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영광을 여러분께 드리겠습니다. 기타 앤 보컬, 강태준!”
선무에게서 기타를 건네받은 그가 첫 음을 조율하자 장내는 힘찬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기타 소리에 섞인 박수 때문인지, 낯선 듯 낯익은 그의 실체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평소보다 맥주를 많이 마신 탓인지 단영의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뭐야. 정말 깡태 맞아? 예나 언니, 정말 그 한솔고 깡태예요?”
발을 동동 구르며 호들갑을 떠는 보람의 말에 예나가 무어라고 대답을 하는지 단영의 멍한 귀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 * *
1999년 여름.
내리쬐는 태양이 살갗을 찢어 놓을 것 같은 오후였다.
오늘은 대 한솔중·고등학교 간부 수련회 첫날이었다. 두 학교는 유치원에서 과학고 및 외국어고,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최고 재단 법인 한솔재단이 건립한 학교 중 역사와 전통이 가장 오래된 곳이었다. 중학교는 다른 공립학교와 마찬가지로 주거지에 인접한 초등학생들의 복불복 추첨제 배정이었지만, 한솔고등학교는 열성 있는 엄마들이 기를 쓰고 자식을 보내려 하는 전국 최고 자사고 중 하나였다.
한솔중학교는 담벼락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 한솔고등학교와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 담벼락의 3분의 1은 넓은 그물망으로 되어 있어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타고 넘기 수월했다. 더군다나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300m 숲길 통학로를 걸어 들어가 제1정문을 함께 쓰고 있는 터라 양 학교 학생들의 마음의 경계는 얇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