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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한솔재단은 학교에서 상주하는 교사들의 근무 태만과 수업 연구에 대한 불성실함을 막고자 교사들을 주기적으로 한솔중·고로 상호 배치했고, 지역 사회에 대한 환원 차 한솔중학교 역시 한솔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수업 외 여러 프로그램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때문에 학부모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도 전에 한솔중학교 근처로 이사를 오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와 달리 한솔고등학교는 신입생 정원으로 청주시 지역 주민의 40%를 받고, 전국 단위 60%의 학생들은 중학교 내신 상위 1% 이내도 들어오기 어려울 만큼 치열한 입시 경쟁을 치르고 입학해야 했다.
매년 여름에 시행되는 간부 수련회는 한솔중학교 학생회장과 부회장, 2·3학년 각 정·부반장과 한솔고 학생회장과 부회장, 1·2학년 정·부반장을 대상으로 1박 2일간 이루어졌다.
방학 동안 고등학교 기숙사가 비워지고 학교 내 각종 프로그램을 위한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굳이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학부모들이 안심하고 보내는 터라 매년 모든 학급의 간부가 참석했다.
오전 일찍 두 학교 생활 지도부장의 일장연설을 시작으로 간부 학생들이 학교 뒤로 등산을 마치고 내려왔다. 그리고 사달은 오후 물놀이 시간에 일어났다. 학교 뒷산이라 우습게 봤던 등산과 유격 훈련이 장장 네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다 보니 모두들 대충 씻은 후 수영복을 거리낌 없이 꺼내 입고 풀로 뛰어들었다.
한솔중학교 부회장인 단영은 3반 반장인 희연, 2반 부반장 보람과 함께 물장난을 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허기진 배를 달래고자 매점에 핫도그를 사러 갔다 오는 길이었다. 한 손에 수영모를, 다른 손에 핫도그 세 개를 들고 두 친구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순간, 누군가가 핫도그를 빼앗고 그녀를 풀장 안으로 처넣어 버렸다.
순식간에 당한 일이었다. 단영은 가슴까지 오는 수심의 풀장에 빠져 있는 대로 물을 들이마시며 허우적거렸다. 놀란 나머지 수면 위로 떠오르지도 못하고 있을 때 일으켜 준 사람은 한솔중 학생회장, 민준이었다.
단영은 차리지 못한 정신은 둘째 치고, 머리카락이 양 볼에 찰싹 들러붙은 자신의 몰골에 그 자리에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하필 민준의 앞에서 이런 꼴을 보여야 하는지. 아니, 어쩌면 울었을지도 몰랐다. 물방울인지 눈물인지 구분도 안 되었을 뿐.
그때, 그녀는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그가 풀 바깥에 있는 남학생에게 고함지르는 소리를.
“형, 그만하지 못해? 단영이 겁먹었잖아!”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키가 한참이나 커서 얼굴도 또렷이 안 보이는 하복 차림의 남학생이 슬리퍼를 끌며 씨익 미소 짓고 있는 게 아닌가.
“형이라니?”
“사촌 형이야. 고모 아들.”
단영의 격앙된 소리에 민준이 미안한 얼굴로 주춤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아, 한솔고 부회장 강태준.”
신상 정보를 더 내놓으라는 단영의 날카로운 눈빛에 민준이 망설이며 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대답에 단영은 얼굴을 찌푸리며 속내를 그대로 드러냈다.
말로만 듣던 한솔고 깡태가 민준의 사촌 형이었어?
풀에서 나온 단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 태준은 온데간데없었다. 힘으로야 어떻게 못 해도 입으로는 뜯어 주어야 성에 풀리거늘.
그러나 그 일만 신경 쓰고 있기에는 하루가 너무 아쉬웠다. 단영이 미안해 죽을 듯하는 민준이 사 온 간식을 맛있게 나누어 먹고 풀 바깥에서 발을 담근 채 공놀이를 하는 친구들을 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등을 걷어차 풀 안으로 그녀를 밀어 버렸다.
“단영아, 네가 참아. 오늘 형이 발에 종기가 나서 물에 들어가면 안 된대. 그래서 간부 수련회에 참석 못 한다고 했더니, 생활 지도부장님이 부회장이 빠지면 안 된다고 학생감찰이라도 하라고 하셨대.”
민준이 또 사색이 되어 대신 사과를 해 왔다.
“그래서? 이게 감찰이야?”
분에 찬 단영의 입술이 절로 떨려 왔다.
“그러지 말라고 했더니 추억이 많아야 더 즐거…….”
단영의 차가운 눈빛에 차마 민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발바닥에 난 종기를 핑계 삼아 후배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주는 깡태. 그에게도 잊지 못할 추억을 주기 위해 단영은 화장실에 간다는 말을 남기고 몸을 숨겼다.
그녀의 눈매가 목적물을 향해 번뜩인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다들 수영복 차림인 가운데 하복에 슬리퍼를 신고 있는 장신의 남학생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입술을 야무지게 다문 단영은 풀장 가까이 쪼르르 달려가 자신의 수영모에 물을 한가득 퍼 담았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파라솔 아래 의자에 앉아 심드렁한 표정으로 음료를 마시는 그에게 까치발을 세우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깡태!”
버럭 지르는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태준이 그대로 물벼락을 맞았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그의 상의 교복 위로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한껏 얼굴을 찌푸린 그가 어찌할 새도 없이 냅다 도망친 단영은 이미 풀 속에 들어온 상태였다.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서 휘파람을 삐, 하고 불어 주의를 끈 그녀는 한쪽 팔을 물 밖으로 높이 뻗어 유유히 손짓했다. 들어올 수 있으면 들어와 보라는 놀림과 거사를 이룬 통쾌한 얼굴로 물속 깊이 잠수하여 친구들이 있는 곳까지 사라져 갔다.
아직 무슨 일인지 파악하지 못한 그의 어이없는 얼굴만 남겨 둔 채.
그리고 지금 단영은 물을 한가득 담아도 터지지 않도록 큰 검정 비닐봉지 두 장을 겹쳐 손잡이 부분을 단단히 묶고 있었다. 2차 복수를 위한 준비물이었다.
“단영아, 아깐 어쩌다 보니 성공했지만 이번엔 무리야.”
“그러니까 너희가 깡태 주의 좀 분산시켜 줘.”
단영이 의지를 굽히지 않고 말했다.
“우리가 무슨 수로?”
“민준이.”
단영이 턱짓으로 풀 건너편에 있는 민준을 가리키자 보람과 희연이 동시에 그쪽을 쳐다보았다. 민준이 태준에게 무언가 항의하듯 따지고 있었다.
“민준이한테 가서 깡태 인사 좀 시켜 달라고 그래.”
“인사?”
희연이 두 눈꺼풀을 크게 껌뻑거렸다.
“그래, 희연이 너 아침마다 교문에서 깡태에게 그렇게 당한다며? 이참에 인맥 좀 넓혀 놔. 밑져야 본전이잖아.”
한솔중·고는 한성학원이라고 크게 적힌 1차 출입문을 동시에 통과한 뒤, 50여 미터의 길을 더 지나야만 두 개의 건물로 각기 등교를 할 수 있었다. 1차 출입문 지도는 한솔고 부회장을 필두로 한솔고 간부들이 하고 있었다.
깡태. 한솔중학교 3학년생들이 강태준에게 붙인 별명이었다. 재단만 같을 뿐, 직속 선배라고도 할 수 없는 학생들에게 늘 당했던 한솔중학교 여학생들은 교문 지도를 하는 그들에게 각각의 별명을 붙여 놓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깡패 강태준을 줄인 깡태였다.
머리는 어깨에 닿지 않을 것. 넘을 경우 묶을 것. 교복 조끼와 와이셔츠, 상의 재킷에 모두 이름표가 붙어 있을 것. 치마 밑으로 무릎을 보이지 말 것. 바지통은 너무 타이트하게 줄이지 말 것. 출입문은 8시 이전에 넘을 것.
1초, 1cm의 양보도 없는 작태가 생활 지도부 선생님보다 더했다.
한 번만 봐 달라고 눈길을 보내면 그 자리에서 이름을 외우거나 관리자 명단에 올려 다음 날부터 순순히 교문을 지나치게 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어 본 이는 거의 없었다. 날 선 눈빛 하나로 모든 것을 제압했다. 언젠가 염색을 하고 온 한솔중 3학년 남학생이 자신의 덩치만 믿고 뻗대었다가 교문 앞에서 내동댕이쳐진 일화 이래로 그를 거스르는 자는 없었다.
그런 그가 수업 시간임이 분명한 때에 경계 담벼락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이 한솔중 여학생의 눈에 포착되면서 한솔고 여학생들의 인기남 강태준은 깡태가 되었다.
그 유명세는 익히 들었지만 단영은 오늘 처음 태준을 보았다.
언제나 7시 30분 전에 등교하는 단영은 아무도 없는 교문을 통과했고 작년 하계 수련회는 여름 감기가 심하게 걸려 참석하지 못한 바람에 그의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다. 익히 풍문으로 들어 왔을 뿐이었다.
“희연아. 그냥 내가 잽싸게 도망갈 수 있게 말만 몇 마디 시켜 주면 돼.”
희연의 답도 듣지 않고 단영은 부리나케 아이들 틈에 몸을 숨긴 채 태준과 민준이 있는 건너편으로 움직였다.
“할 수 없네.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단영이 하나 잘못되면 우리 남은 인생도 힘들어져. 돕는 흉내라도 내야지. 아까 깡태 당하는 거 보니까 속은 시원하더라. 가자, 보람아.”
희연의 눈빛에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전의가 나타났지만 셋 중 가장 내성적이고 겁이 많은 보람은 희연의 손에 이끌려가면서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처음엔 심심해서 쭈뼛거리고 있는 애들 친절하게 풀 안으로 인도했지. 근데 것도 재미없어서 한두 번 하다가 안 했다니까.”
“그런데 왜 단…….”
“민준아.”
태준에게 열심히 항의하던 민준이 희연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 희연아.”
희연이 태준에게 힐긋 눈길을 준 뒤 누구냐는 듯 표정으로 묻자 민준의 내키지 않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우리 사촌 형. 한솔고 부회장.”
“그래? 한솔고에 사촌 형이 있었어?”
아침마다 반갑지 않은 만남을 하면서도 희연은 처음 보는 사이마냥 태준에게 생긋 눈웃음을 건넸다. 능청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보람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나저나 얘는 어디에 있는 거야, 하고 주변을 둘러보던 보람이 거의 적진까지 들어와 기회를 엿보고 있는 단영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민준이와 같은 반 부반장인 여보람이라고 해요.”
놀란 보람이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을 소개하자 희연과 민준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졌다.
“뭐야. 왜 우르르 몰려와서는…… 민준이 너 찾으러 온 모양인데.”
그 순간이었다.
“깡태!”
날카롭게 날린 목소리와 함께 단영은 민준을 지나쳐 태준의 앞에 정면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두 팔로 힘들게 들고 온 검정 비닐봉지를 태준의 하의에 그대로 투척했다.
주변의 시선이 동시에 한곳으로 쏠렸다. 민준은 어쩔 줄 몰라 했고, 희연과 보람도 하필 물벼락을 맞은 곳이 민망한 부위인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태준의 반응을 확인할 사이도 없이 단영은 빠르게 몸을 돌려 풀을 향해 냅다 뛰었다.
“아!”
그 순간 단영의 어깨가 누군가의 가슴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뭐야, 이건.”
“아, 죄송합니다.”
잠시 비틀거리던 단영이 다시 뛰려고 했지만 태준에게 그만 팔목을 잡히고 말았다.
“곤란하지. 두 번씩이나 이러면.”
“어머, 어떡해. 우리 단영이 어떡해!”
단영은 붙잡힌 두려움보다 이름이 밝혀진 사실이 더 경악스러웠다.
“단영? 너희랑 같은 패거리였어? 그건 그렇고, 고개나 좀 들어보시지?”
화가 난 목소리는 아니었다. 흥분도 묻어 있지 않았다. 처음 들어보는 깡태의 목소리는 변성기를 넘긴 어른의 소리였고, 그 톤도 낮았다.
이판사판이다. 단영이 태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수영모를 벗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팔, 놓죠?”
“놓으면? 또 물속으로 사라지려고?”
역시나 1차 투척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범인이 자신이라는 사실도.
꽉 부여 잡힌 팔목의 통증과 태준의 날카로운 시선이 단영을 긴장에 빠뜨렸지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당찼다.
“이름, 얼굴 다 팔린 마당에 사라진다고 돼요? 손 놓고 제대로 된 계산이나 해 보자고요.”
“계산?”
태준이 스르륵 단영의 팔을 놓았다. 단영은 팔을 한 번 탁 털어 버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또 쿵, 하고 누군가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돌아보니 태준에게 붙잡힌 원인을 제공한 그 남학생이었다. 태준의 친구인지 그의 입술 선은 호를 그리고 있었고, 눈엔 흥미진진함이 한 가득이었다. 어느덧 주변으로 모여든 사람도 꽤 되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한솔고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강태준이 바지 한가운데가 홀딱 젖은 채 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키 차이 때문에 단영이 그를 향해 서자 자연스럽게 허리 아래로 시선이 갔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조금씩 실감이 났다.
“말해 보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을까.”
“핫도그, 그리고 발바닥.”
“뭐야, 지금 스무고개 해?”
“핫도그 세 개 갈취한 것도 모자라 절 풀 안에 빠뜨렸잖아요.”
잠시 말이 없던 태준의 눈썹이 살짝 위로 치켜 올랐다.
“그 대가로 이렇게 만들어 놓으셨다? 여긴 그 핫도그 주인들이고?”
태준이 희연과 보람에게 차례로 눈길을 주었다.
“아, 그게. 저희는 그 핫도그 괜찮…….”
태준의 눈빛에 주눅이 든 희연이 불쑥 내뱉다가 단영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끝까지 말을 맺지 못했다. 그 옆에 선 보람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단영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작 본인은 될 대로 되라 싶은데, 친구들이 난감해하자 괜히 죄스러워졌다.
“형, 일단 바지부터 갈아입자.”
“민준이 넌 빠져 있어. 너, 이름이 단영이라고 했지?”
“네. 서단영이요.”
쭈뼛, 다시 긴장되었으나 단영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그래, 서단영. 덕분에 잘 먹은 핫도그는 변상하지. 풀 안으로 빠져서 물먹은 것은 내 교복으로 퉁치고. 그럼 이 바지에 대한 계산은 어떻게 하지? 주변 사람들에게 눈요깃거리가 된 것까지도 포함해서.”
“저 물 두 번 먹였잖아요. 그것도 발로 차서. 거기에 비하면 약과네요, 뭐.”
단영의 말뜻을 알아차리기 위함인지 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일직선으로 다물렸던 입술 끝이 얇게 말려 올라갔다. 순간 단영의 두 눈꺼풀이 흠칫 떨렸다. 한순간이긴 했지만 아주 기분 나쁜 미소였다.
“어쩌나. 계산대를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난 널 발로 차서 빠뜨린 기억이 없거든.”
“무슨 소리예요? 아까 저쪽에서 발로 절 뻥 찼잖아요!”
“내가 너를 발로 찰 수 있었으면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어. 저 풀 속에 있었지.”
단영은 좀 전에 민준으로부터 사촌 형의 발이 불편하다는 말을 들은 것이 떠올랐다.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저 군청색 민소매를 입고 있었는데? 설핏 단영의 얼굴에 난감함이 퍼지는 순간, 태준이 그녀의 뒤에 있는 남자의 팔을 획 잡아당겼다.
한솔재단은 학교에서 상주하는 교사들의 근무 태만과 수업 연구에 대한 불성실함을 막고자 교사들을 주기적으로 한솔중·고로 상호 배치했고, 지역 사회에 대한 환원 차 한솔중학교 역시 한솔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수업 외 여러 프로그램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때문에 학부모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도 전에 한솔중학교 근처로 이사를 오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와 달리 한솔고등학교는 신입생 정원으로 청주시 지역 주민의 40%를 받고, 전국 단위 60%의 학생들은 중학교 내신 상위 1% 이내도 들어오기 어려울 만큼 치열한 입시 경쟁을 치르고 입학해야 했다.
매년 여름에 시행되는 간부 수련회는 한솔중학교 학생회장과 부회장, 2·3학년 각 정·부반장과 한솔고 학생회장과 부회장, 1·2학년 정·부반장을 대상으로 1박 2일간 이루어졌다.
방학 동안 고등학교 기숙사가 비워지고 학교 내 각종 프로그램을 위한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굳이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학부모들이 안심하고 보내는 터라 매년 모든 학급의 간부가 참석했다.
오전 일찍 두 학교 생활 지도부장의 일장연설을 시작으로 간부 학생들이 학교 뒤로 등산을 마치고 내려왔다. 그리고 사달은 오후 물놀이 시간에 일어났다. 학교 뒷산이라 우습게 봤던 등산과 유격 훈련이 장장 네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다 보니 모두들 대충 씻은 후 수영복을 거리낌 없이 꺼내 입고 풀로 뛰어들었다.
한솔중학교 부회장인 단영은 3반 반장인 희연, 2반 부반장 보람과 함께 물장난을 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허기진 배를 달래고자 매점에 핫도그를 사러 갔다 오는 길이었다. 한 손에 수영모를, 다른 손에 핫도그 세 개를 들고 두 친구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순간, 누군가가 핫도그를 빼앗고 그녀를 풀장 안으로 처넣어 버렸다.
순식간에 당한 일이었다. 단영은 가슴까지 오는 수심의 풀장에 빠져 있는 대로 물을 들이마시며 허우적거렸다. 놀란 나머지 수면 위로 떠오르지도 못하고 있을 때 일으켜 준 사람은 한솔중 학생회장, 민준이었다.
단영은 차리지 못한 정신은 둘째 치고, 머리카락이 양 볼에 찰싹 들러붙은 자신의 몰골에 그 자리에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하필 민준의 앞에서 이런 꼴을 보여야 하는지. 아니, 어쩌면 울었을지도 몰랐다. 물방울인지 눈물인지 구분도 안 되었을 뿐.
그때, 그녀는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그가 풀 바깥에 있는 남학생에게 고함지르는 소리를.
“형, 그만하지 못해? 단영이 겁먹었잖아!”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키가 한참이나 커서 얼굴도 또렷이 안 보이는 하복 차림의 남학생이 슬리퍼를 끌며 씨익 미소 짓고 있는 게 아닌가.
“형이라니?”
“사촌 형이야. 고모 아들.”
단영의 격앙된 소리에 민준이 미안한 얼굴로 주춤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아, 한솔고 부회장 강태준.”
신상 정보를 더 내놓으라는 단영의 날카로운 눈빛에 민준이 망설이며 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대답에 단영은 얼굴을 찌푸리며 속내를 그대로 드러냈다.
말로만 듣던 한솔고 깡태가 민준의 사촌 형이었어?
풀에서 나온 단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 태준은 온데간데없었다. 힘으로야 어떻게 못 해도 입으로는 뜯어 주어야 성에 풀리거늘.
그러나 그 일만 신경 쓰고 있기에는 하루가 너무 아쉬웠다. 단영이 미안해 죽을 듯하는 민준이 사 온 간식을 맛있게 나누어 먹고 풀 바깥에서 발을 담근 채 공놀이를 하는 친구들을 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등을 걷어차 풀 안으로 그녀를 밀어 버렸다.
“단영아, 네가 참아. 오늘 형이 발에 종기가 나서 물에 들어가면 안 된대. 그래서 간부 수련회에 참석 못 한다고 했더니, 생활 지도부장님이 부회장이 빠지면 안 된다고 학생감찰이라도 하라고 하셨대.”
민준이 또 사색이 되어 대신 사과를 해 왔다.
“그래서? 이게 감찰이야?”
분에 찬 단영의 입술이 절로 떨려 왔다.
“그러지 말라고 했더니 추억이 많아야 더 즐거…….”
단영의 차가운 눈빛에 차마 민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발바닥에 난 종기를 핑계 삼아 후배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주는 깡태. 그에게도 잊지 못할 추억을 주기 위해 단영은 화장실에 간다는 말을 남기고 몸을 숨겼다.
그녀의 눈매가 목적물을 향해 번뜩인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다들 수영복 차림인 가운데 하복에 슬리퍼를 신고 있는 장신의 남학생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입술을 야무지게 다문 단영은 풀장 가까이 쪼르르 달려가 자신의 수영모에 물을 한가득 퍼 담았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파라솔 아래 의자에 앉아 심드렁한 표정으로 음료를 마시는 그에게 까치발을 세우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깡태!”
버럭 지르는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태준이 그대로 물벼락을 맞았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그의 상의 교복 위로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한껏 얼굴을 찌푸린 그가 어찌할 새도 없이 냅다 도망친 단영은 이미 풀 속에 들어온 상태였다.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서 휘파람을 삐, 하고 불어 주의를 끈 그녀는 한쪽 팔을 물 밖으로 높이 뻗어 유유히 손짓했다. 들어올 수 있으면 들어와 보라는 놀림과 거사를 이룬 통쾌한 얼굴로 물속 깊이 잠수하여 친구들이 있는 곳까지 사라져 갔다.
아직 무슨 일인지 파악하지 못한 그의 어이없는 얼굴만 남겨 둔 채.
그리고 지금 단영은 물을 한가득 담아도 터지지 않도록 큰 검정 비닐봉지 두 장을 겹쳐 손잡이 부분을 단단히 묶고 있었다. 2차 복수를 위한 준비물이었다.
“단영아, 아깐 어쩌다 보니 성공했지만 이번엔 무리야.”
“그러니까 너희가 깡태 주의 좀 분산시켜 줘.”
단영이 의지를 굽히지 않고 말했다.
“우리가 무슨 수로?”
“민준이.”
단영이 턱짓으로 풀 건너편에 있는 민준을 가리키자 보람과 희연이 동시에 그쪽을 쳐다보았다. 민준이 태준에게 무언가 항의하듯 따지고 있었다.
“민준이한테 가서 깡태 인사 좀 시켜 달라고 그래.”
“인사?”
희연이 두 눈꺼풀을 크게 껌뻑거렸다.
“그래, 희연이 너 아침마다 교문에서 깡태에게 그렇게 당한다며? 이참에 인맥 좀 넓혀 놔. 밑져야 본전이잖아.”
한솔중·고는 한성학원이라고 크게 적힌 1차 출입문을 동시에 통과한 뒤, 50여 미터의 길을 더 지나야만 두 개의 건물로 각기 등교를 할 수 있었다. 1차 출입문 지도는 한솔고 부회장을 필두로 한솔고 간부들이 하고 있었다.
깡태. 한솔중학교 3학년생들이 강태준에게 붙인 별명이었다. 재단만 같을 뿐, 직속 선배라고도 할 수 없는 학생들에게 늘 당했던 한솔중학교 여학생들은 교문 지도를 하는 그들에게 각각의 별명을 붙여 놓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깡패 강태준을 줄인 깡태였다.
머리는 어깨에 닿지 않을 것. 넘을 경우 묶을 것. 교복 조끼와 와이셔츠, 상의 재킷에 모두 이름표가 붙어 있을 것. 치마 밑으로 무릎을 보이지 말 것. 바지통은 너무 타이트하게 줄이지 말 것. 출입문은 8시 이전에 넘을 것.
1초, 1cm의 양보도 없는 작태가 생활 지도부 선생님보다 더했다.
한 번만 봐 달라고 눈길을 보내면 그 자리에서 이름을 외우거나 관리자 명단에 올려 다음 날부터 순순히 교문을 지나치게 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어 본 이는 거의 없었다. 날 선 눈빛 하나로 모든 것을 제압했다. 언젠가 염색을 하고 온 한솔중 3학년 남학생이 자신의 덩치만 믿고 뻗대었다가 교문 앞에서 내동댕이쳐진 일화 이래로 그를 거스르는 자는 없었다.
그런 그가 수업 시간임이 분명한 때에 경계 담벼락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이 한솔중 여학생의 눈에 포착되면서 한솔고 여학생들의 인기남 강태준은 깡태가 되었다.
그 유명세는 익히 들었지만 단영은 오늘 처음 태준을 보았다.
언제나 7시 30분 전에 등교하는 단영은 아무도 없는 교문을 통과했고 작년 하계 수련회는 여름 감기가 심하게 걸려 참석하지 못한 바람에 그의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다. 익히 풍문으로 들어 왔을 뿐이었다.
“희연아. 그냥 내가 잽싸게 도망갈 수 있게 말만 몇 마디 시켜 주면 돼.”
희연의 답도 듣지 않고 단영은 부리나케 아이들 틈에 몸을 숨긴 채 태준과 민준이 있는 건너편으로 움직였다.
“할 수 없네.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단영이 하나 잘못되면 우리 남은 인생도 힘들어져. 돕는 흉내라도 내야지. 아까 깡태 당하는 거 보니까 속은 시원하더라. 가자, 보람아.”
희연의 눈빛에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전의가 나타났지만 셋 중 가장 내성적이고 겁이 많은 보람은 희연의 손에 이끌려가면서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처음엔 심심해서 쭈뼛거리고 있는 애들 친절하게 풀 안으로 인도했지. 근데 것도 재미없어서 한두 번 하다가 안 했다니까.”
“그런데 왜 단…….”
“민준아.”
태준에게 열심히 항의하던 민준이 희연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 희연아.”
희연이 태준에게 힐긋 눈길을 준 뒤 누구냐는 듯 표정으로 묻자 민준의 내키지 않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우리 사촌 형. 한솔고 부회장.”
“그래? 한솔고에 사촌 형이 있었어?”
아침마다 반갑지 않은 만남을 하면서도 희연은 처음 보는 사이마냥 태준에게 생긋 눈웃음을 건넸다. 능청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보람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나저나 얘는 어디에 있는 거야, 하고 주변을 둘러보던 보람이 거의 적진까지 들어와 기회를 엿보고 있는 단영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민준이와 같은 반 부반장인 여보람이라고 해요.”
놀란 보람이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을 소개하자 희연과 민준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졌다.
“뭐야. 왜 우르르 몰려와서는…… 민준이 너 찾으러 온 모양인데.”
그 순간이었다.
“깡태!”
날카롭게 날린 목소리와 함께 단영은 민준을 지나쳐 태준의 앞에 정면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두 팔로 힘들게 들고 온 검정 비닐봉지를 태준의 하의에 그대로 투척했다.
주변의 시선이 동시에 한곳으로 쏠렸다. 민준은 어쩔 줄 몰라 했고, 희연과 보람도 하필 물벼락을 맞은 곳이 민망한 부위인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태준의 반응을 확인할 사이도 없이 단영은 빠르게 몸을 돌려 풀을 향해 냅다 뛰었다.
“아!”
그 순간 단영의 어깨가 누군가의 가슴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뭐야, 이건.”
“아, 죄송합니다.”
잠시 비틀거리던 단영이 다시 뛰려고 했지만 태준에게 그만 팔목을 잡히고 말았다.
“곤란하지. 두 번씩이나 이러면.”
“어머, 어떡해. 우리 단영이 어떡해!”
단영은 붙잡힌 두려움보다 이름이 밝혀진 사실이 더 경악스러웠다.
“단영? 너희랑 같은 패거리였어? 그건 그렇고, 고개나 좀 들어보시지?”
화가 난 목소리는 아니었다. 흥분도 묻어 있지 않았다. 처음 들어보는 깡태의 목소리는 변성기를 넘긴 어른의 소리였고, 그 톤도 낮았다.
이판사판이다. 단영이 태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수영모를 벗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팔, 놓죠?”
“놓으면? 또 물속으로 사라지려고?”
역시나 1차 투척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범인이 자신이라는 사실도.
꽉 부여 잡힌 팔목의 통증과 태준의 날카로운 시선이 단영을 긴장에 빠뜨렸지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당찼다.
“이름, 얼굴 다 팔린 마당에 사라진다고 돼요? 손 놓고 제대로 된 계산이나 해 보자고요.”
“계산?”
태준이 스르륵 단영의 팔을 놓았다. 단영은 팔을 한 번 탁 털어 버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또 쿵, 하고 누군가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돌아보니 태준에게 붙잡힌 원인을 제공한 그 남학생이었다. 태준의 친구인지 그의 입술 선은 호를 그리고 있었고, 눈엔 흥미진진함이 한 가득이었다. 어느덧 주변으로 모여든 사람도 꽤 되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한솔고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강태준이 바지 한가운데가 홀딱 젖은 채 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키 차이 때문에 단영이 그를 향해 서자 자연스럽게 허리 아래로 시선이 갔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조금씩 실감이 났다.
“말해 보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을까.”
“핫도그, 그리고 발바닥.”
“뭐야, 지금 스무고개 해?”
“핫도그 세 개 갈취한 것도 모자라 절 풀 안에 빠뜨렸잖아요.”
잠시 말이 없던 태준의 눈썹이 살짝 위로 치켜 올랐다.
“그 대가로 이렇게 만들어 놓으셨다? 여긴 그 핫도그 주인들이고?”
태준이 희연과 보람에게 차례로 눈길을 주었다.
“아, 그게. 저희는 그 핫도그 괜찮…….”
태준의 눈빛에 주눅이 든 희연이 불쑥 내뱉다가 단영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끝까지 말을 맺지 못했다. 그 옆에 선 보람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단영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작 본인은 될 대로 되라 싶은데, 친구들이 난감해하자 괜히 죄스러워졌다.
“형, 일단 바지부터 갈아입자.”
“민준이 넌 빠져 있어. 너, 이름이 단영이라고 했지?”
“네. 서단영이요.”
쭈뼛, 다시 긴장되었으나 단영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그래, 서단영. 덕분에 잘 먹은 핫도그는 변상하지. 풀 안으로 빠져서 물먹은 것은 내 교복으로 퉁치고. 그럼 이 바지에 대한 계산은 어떻게 하지? 주변 사람들에게 눈요깃거리가 된 것까지도 포함해서.”
“저 물 두 번 먹였잖아요. 그것도 발로 차서. 거기에 비하면 약과네요, 뭐.”
단영의 말뜻을 알아차리기 위함인지 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일직선으로 다물렸던 입술 끝이 얇게 말려 올라갔다. 순간 단영의 두 눈꺼풀이 흠칫 떨렸다. 한순간이긴 했지만 아주 기분 나쁜 미소였다.
“어쩌나. 계산대를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난 널 발로 차서 빠뜨린 기억이 없거든.”
“무슨 소리예요? 아까 저쪽에서 발로 절 뻥 찼잖아요!”
“내가 너를 발로 찰 수 있었으면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어. 저 풀 속에 있었지.”
단영은 좀 전에 민준으로부터 사촌 형의 발이 불편하다는 말을 들은 것이 떠올랐다.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저 군청색 민소매를 입고 있었는데? 설핏 단영의 얼굴에 난감함이 퍼지는 순간, 태준이 그녀의 뒤에 있는 남자의 팔을 획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