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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반가웠네, 진성.”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진성이라 불린 남자는 다정하게 어깨를 두드리는 선비를 향해 정중하게 읍하여 인사했다.
남자는 몹시 유쾌한 얼굴로 그를 배웅하는 이가 아닌, 곁에서 조심스레 경계의 기색을 감춘 이를 흥미롭게 바라보다 불쑥 입을 열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존함을 여쭈어도 좋겠습니까.”
“정암(靜菴)이라 불러 주십시오.”
사대부의 이름자란 급제자 방이라도 붙어야 알릴 수 있는 것이니 아마 자호(字號)를 댄 것이리라.
남자가 입속으로 몇 번 되뇌며 그 자호가 따라붙어 있던 시구를 되새겼다. 학자다운 결백한 성품을 드러내는 자호는 누가 붙여 준 것인지는 몰라도 몹시 잘 어울렸다.
진심으로 다음을 기약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으나 굳이 그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한두 번 정도는 더 만나게 될 터였다. 이 인연을 이어 갈 수 있을지는 그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으리라.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는 남자의 곁을 새로 나타난 선비가 스쳤다. 남자의 정체를 알아본 그 얼굴에 곤혹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공손히 인사하는 이에게 더없이 정중한 인사를 돌려주고 표표히 걸음을 딛는 남자의 뒤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가 닿았다.
“형님, 저자에게 어찌 그리 공손히 대하십니까.”
“뉘신 줄 알고! 목소리를 낮추게!”
새로 등장한 선비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들은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점잖은 표정을 하고 있던 그자, 정암은 어떤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을지가 궁금했으나 돌아보지는 않았다.
제법 재미있는 광경을 마주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가 오기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을 다른 이를 향해 발을 옮겼다.
유유자적한 걸음을 딛던 남자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엷어지며 입매가 굳어졌다. 조금 전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유쾌하게 웃던 선비는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몹시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사죄의 인사를 건네어 올 것이다.
대군 나리, 소인이 불민하여 미처 알아 뵙지 못하였사옵니다.
정체를 숨기어 상대를 놀린 것은 그였지만 반성은 상대의 몫이 될 터였다. 그 상황을 그저 즐겁다고 여겨도 괜찮은 것일까. 그게 정말 즐겁기는 한가.
제 정체를 알리는 일은 늘 껄끄러웠다. 마음을 나눌 만한 누군가를 찾았다 생각하여도, 혹은 잠깐의 풍류를 즐기고자 하여도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순간 상대의 반응이 돌변했다. 예의를 갖추는 태도 이면으로 그가 품은 마음을 짐작코자 하는 이도 있었고, 후일을 기약하며 친교를 쌓으려 애쓰는 이도 있었다.
그저 경외하는 듯 보이는 이라 하여도 그것이 진심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그런 이들은 그를 가까이하려 들지도 않았다.
하여, 그의 정체를 감추고자 애썼다. 역(懌)이라는 이름이나 낙천(樂天)이라는 자가 아닌, 좀처럼 알아듣는 이가 없는 진성(晉城)이라는 군호(君號)를 알려 주었다. 오늘처럼 다음 만남 이전에 이미 들켜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였으나, 적어도 그날 하루는 소소한 유희를 즐기는 마음으로 어울릴 수 있었다.
상념에 잠긴 사이 목적지가 가까워졌다. 역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팔랑이는 나비처럼 분주히 오가기를 좋아하는 고운 여인이 어울리지 않게 서재에 앉아 뾰로통한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오늘은 함께 서재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책장을 넘기기로 한 날이었으니.
그러나 역이 막 제집 담장 근처에 닿았을 때 그의 눈에 띈 것은 주인 나리의 귀가를 기다리는 청지기도 아니요, 오래도록 앉아 있다 제풀에 지친 몸 가벼운 아씨도 아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성거리고 있는 그 얼굴은 틀림없이 사랑스러운 아씨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는 그녀의 유모였다.
‘아아, 부인.’
역이 낮은 한숨을 삼키며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도 그의 여인이 무언가 일을 낸 모양이었다.
둥근 접시 위에는 다 털어 내지 못한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포도송이가 소담하게 담겨 있었다.
여의(如意)는 내내 잘 펼쳐져 있던 책을 밀어내고는 서안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한 접시를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유모, 이것은…….”
“포도입지요.”
마치 누가 뒤를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의의 말허리를 급하게 뚝 끊는 유모의 대답에 그녀의 눈썹이 움직였다.
“설마 내가 이게 포도인 걸 모를까.”
앉아만 있어도 늘어질 것 같은 무더위는 한풀 수그러들었다. 새벽이면 흰 이슬이 내려앉는다는 백로(白露)를 갓 지나 포도가 제철이었다.
잘 익은 포도알에 송골송골하게 맺힌 물방울은 아침 이슬을 연상케 했다. 백로 아침, 그녀가 선 위쪽에 매달린 나뭇가지를 흔들어 이슬을 튀기던 사내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콩잎 위의 이슬을 훑어 마시면 속병이 낫는다던데. 나뭇잎이어도 효험은 비슷하지 않겠소?”
여의가 얼굴을 찌푸리며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아니하던 포도 접시를 외면했다.
그 사내, 그녀를 서안 앞에 앉혀 놓은 낭군은 점심때가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부인과의 약조도 잊을 만큼 그리 중한 일이 무어 있나, 짜증스러운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 앞에 앉아 계시느라 식사도 거르셨잖습니까.”
유모가 다시 한 번 접시를 달그락거려 포도의 존재를 일깨웠다.
서안 위에서 쫓겨난 책은 한 시진 남짓 한 장도 넘어가지 않았고, 점심때가 지나도록 물 한 방울 입에 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때가 지나 이미 끼니를 챙기기는 어려워졌고, 달콤한 과일로 속을 채우며 기분 전환이라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여의가 마지못해 서안을 살짝 밀며 허리를 곧게 폈다. 오래 앉아 있어서 못이 박일 것 같은 엉덩이를 살짝 들썩이며 팔을 앞으로 뻗어 손끝을 모아 쥐고 위로 쭉 올렸다. 이번에는 유모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씨께서 혼례를 올리신 지 벌써 다섯 해입니다. 성년을 넘긴 것도 세 해 전의 일이고요. 그런데 어찌 아직도 행동거지는 철없는 아이 같으십니까.”
줄곧 앉아 있느라 굳어진 몸을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잔소리가 한가득 밀려들었다. 여의가 억울한 마음으로 유모를 살짝 흘겨보았으나 대꾸하지는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몇 배는 더 많은 잔소리가 들려올 게 뻔했다. 불퉁한 얼굴을 하고는 다시 포도 접시를 내려다보다가 애꿎은 포도송이를 타박했다.
“송이가 과하게 크네.”
“찬모가 제일 실하고 잘생긴 놈으로 골랐다 했습니다. 설마 찬모의 눈썰미를 탓하시옵니까?”
무슨 말을 해도 본전을 찾기 어려웠다. 여의가 입을 꾹 다문 채 포도송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모의 눈빛이 그녀를 재촉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척 고집스러운 입매를 유지했다. 무언의 압박으로도 상대의 행동을 이끌어 내지 못한 유모가 입을 열었다.
“잡숫지 아니하시렵니까?”
“꼭 먹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
“포도가 뜻하는 바를 모르지 아니하실 텐데요, 아씨.”
“그쯤은 알고 있지.”
“느끼시는 바 없으십니까?”
“그것이 어디 인력으로 되는 일이던가.”
여의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알알이 주렁주렁 매달린 모양새 때문인지 포도에는 다산(多産)의 의미가 있어, 그해 처음 수확한 포도를 사당에 고하고 맏며느리에게 먹이곤 했다. 아마 여의의 앞에 놓인 포도 역시 어디선가 처음으로 따 왔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먹으라고 강권할 까닭이 있나.
유모의 말대로 여의가 혼례를 올린 지 벌써 다섯 해째였다. 역이 성년에 이른 이후로만 셈해도 이태가 지났다. 여느 여인이라면 이쯤이면 젖을 물린 아이 하나쯤은 안고 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이 댁 주인아씨는 출산은 고사하고 회임도 하지 아니하였는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여의의 곁을 오래도록 지켜 온 유모의 속이 타는 연유이기도 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모른 척하신다면, 나라도 나서야지.’
유모가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벌써 일 년 넘게 참아 온 말을 입에 올렸다.
“딸이 있어도 아들이 없으면 홀대받습니다. 한데 아씨는 딸조차도 없으신 것을요. 이래서는 나리께서 첩실을 들이신다 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시앗을 본다고?”
여의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막 포도송이 위로 향하던 손이 그 자리에서 멈추어 머뭇거리다 조용히 무릎 위로 귀환했다.
유모가 재빨리 여의의 표정에 떠오른 흔들림을 감지하고 기회를 놓칠세라 말을 이었다.
“지금이야 아씨의 자색이 고우니 나리께서 다른 마음을 먹지 아니하시지요. 그러나 용모가 고운 것은 한때입니다. 훗날 용모가 쇠하고 후사까지 생산치 못하면 사내의 마음이 떠나는 건 한순간입니다. 측실을 들일 수 없는 사내는 부마뿐이니, 대군 나리께서 소실을 얻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지 않습니까. 언제까지고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어요.”
“장부(丈夫)가 소실을 얻자고 들면 후사가 있고 없음 따위가 무슨 상관일까.”
여의가 시들하게 대꾸했다. 첩을 들인다는 말에 교태를 부리는 여인이 역의 옆에 선 모습을 상상했다.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쳐 올랐으나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스스로를 가다듬었다. 유모의 말이 길게 이어지자 열이 올랐던 머리가 도리어 차갑게 식었다.
시앗을 보는 건 꿈에도 생각하고 싶지 아니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 여의가 딱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아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들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이었다. 장성한 아들이 줄줄이 있는 자도 온갖 핑계를 들어 측실을 들이고 관기나 기녀를 품에 안았다.
“최소한 소박을 맞는 일은 없겠지요, 아씨.”
“포도를 먹는다 하여 회임할 수 있다면 팔도 방방곡곡의 포도는 씨가 마를 걸세.”
아씨의 무덤덤한 반응에 유모가 회심의 일격을 준비하여 들이댔다. 그러나 여의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모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서안 위를 정리했다. 지극정성으로 기원해도 모자랄 판에 저래서야 아이가 생기기는 할지, 아이가 들어선들 지킬 수 있을지나 의심스러웠다.
“사라지셨다……?”
유모가 이러저러하게 설명한 이야기를 듣고 난 역이 낮게 되풀이했다. 얼굴이나 분노하거나 당황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와 마주 선 여의의 유모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손을 맞대고 비비적거리는 것과는 몹시 대조적인 태도였다.
“집 안은 모두 찾아보았는가?”
“안채와 별당은 모두 돌아보았습니다.”
“사랑은?”
“큰방과 와방에도 아니 계셨습니다.”
여의의 유모가 집안에 소요를 일으키지 않고 둘러볼 수 있는 범위는 그만큼이 전부였다. 아씨가 사라졌다고 집 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가 얼토당토않은 곳에서 발견되면 그 나름대로 곤란했다.
아무리 주인아씨여도 아랫사람에게 우습게 보여서는 권위를 세울 수 없었다. 딸 이상으로 애지중지 품어 온 아씨가 그런 대접을 받게 할 수는 없었다.
역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어렸다. 여러 상황을 그리며 초조하게 귀를 기울인 것에 비해 벌어진 일은 몹시 단순했다. 조그만 다람쥐 같은 여인이 어디엔가 숨어 그가 찾아내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생각에 확신을 갖기 위해, 점잖은 목소리로 유모에게 일렀다.
“들어가서 아씨의 외출복이 그대로 있는가 확인하게.”
“외출복…… 말씀이십니까?”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는 부인이 곱게 성장(盛裝)하고 쓰개를 두르고 나갔을까?”
그제야 말뜻을 깨달은 유모가 안쪽으로 사라졌다. 역이 가만히 선 채로 자신의 예상이 빗나갔을 경우를 대비했다. 그의 부인이 행선지로 삼을 만한 곳을 예측하고, 그와 길이 엇갈리지 아니할 방도 따위를 조심스레 떠올렸다. 오래지 않아 집 안으로 사라졌던 유모가 되돌아왔다. 안도감과 혼란이 뒤섞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대로 있사옵니다.”
“그렇겠지.”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던 역이 유모를 돌아보았다.
“아씨는 내 찾아낼 것이니, 자네는 들어가서 좀 쉬게나.”
“반가웠네, 진성.”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진성이라 불린 남자는 다정하게 어깨를 두드리는 선비를 향해 정중하게 읍하여 인사했다.
남자는 몹시 유쾌한 얼굴로 그를 배웅하는 이가 아닌, 곁에서 조심스레 경계의 기색을 감춘 이를 흥미롭게 바라보다 불쑥 입을 열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존함을 여쭈어도 좋겠습니까.”
“정암(靜菴)이라 불러 주십시오.”
사대부의 이름자란 급제자 방이라도 붙어야 알릴 수 있는 것이니 아마 자호(字號)를 댄 것이리라.
남자가 입속으로 몇 번 되뇌며 그 자호가 따라붙어 있던 시구를 되새겼다. 학자다운 결백한 성품을 드러내는 자호는 누가 붙여 준 것인지는 몰라도 몹시 잘 어울렸다.
진심으로 다음을 기약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으나 굳이 그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한두 번 정도는 더 만나게 될 터였다. 이 인연을 이어 갈 수 있을지는 그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으리라.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는 남자의 곁을 새로 나타난 선비가 스쳤다. 남자의 정체를 알아본 그 얼굴에 곤혹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공손히 인사하는 이에게 더없이 정중한 인사를 돌려주고 표표히 걸음을 딛는 남자의 뒤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가 닿았다.
“형님, 저자에게 어찌 그리 공손히 대하십니까.”
“뉘신 줄 알고! 목소리를 낮추게!”
새로 등장한 선비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들은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점잖은 표정을 하고 있던 그자, 정암은 어떤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을지가 궁금했으나 돌아보지는 않았다.
제법 재미있는 광경을 마주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가 오기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을 다른 이를 향해 발을 옮겼다.
유유자적한 걸음을 딛던 남자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엷어지며 입매가 굳어졌다. 조금 전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유쾌하게 웃던 선비는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몹시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사죄의 인사를 건네어 올 것이다.
대군 나리, 소인이 불민하여 미처 알아 뵙지 못하였사옵니다.
정체를 숨기어 상대를 놀린 것은 그였지만 반성은 상대의 몫이 될 터였다. 그 상황을 그저 즐겁다고 여겨도 괜찮은 것일까. 그게 정말 즐겁기는 한가.
제 정체를 알리는 일은 늘 껄끄러웠다. 마음을 나눌 만한 누군가를 찾았다 생각하여도, 혹은 잠깐의 풍류를 즐기고자 하여도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순간 상대의 반응이 돌변했다. 예의를 갖추는 태도 이면으로 그가 품은 마음을 짐작코자 하는 이도 있었고, 후일을 기약하며 친교를 쌓으려 애쓰는 이도 있었다.
그저 경외하는 듯 보이는 이라 하여도 그것이 진심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그런 이들은 그를 가까이하려 들지도 않았다.
하여, 그의 정체를 감추고자 애썼다. 역(懌)이라는 이름이나 낙천(樂天)이라는 자가 아닌, 좀처럼 알아듣는 이가 없는 진성(晉城)이라는 군호(君號)를 알려 주었다. 오늘처럼 다음 만남 이전에 이미 들켜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였으나, 적어도 그날 하루는 소소한 유희를 즐기는 마음으로 어울릴 수 있었다.
상념에 잠긴 사이 목적지가 가까워졌다. 역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팔랑이는 나비처럼 분주히 오가기를 좋아하는 고운 여인이 어울리지 않게 서재에 앉아 뾰로통한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오늘은 함께 서재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책장을 넘기기로 한 날이었으니.
그러나 역이 막 제집 담장 근처에 닿았을 때 그의 눈에 띈 것은 주인 나리의 귀가를 기다리는 청지기도 아니요, 오래도록 앉아 있다 제풀에 지친 몸 가벼운 아씨도 아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성거리고 있는 그 얼굴은 틀림없이 사랑스러운 아씨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는 그녀의 유모였다.
‘아아, 부인.’
역이 낮은 한숨을 삼키며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도 그의 여인이 무언가 일을 낸 모양이었다.
둥근 접시 위에는 다 털어 내지 못한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포도송이가 소담하게 담겨 있었다.
여의(如意)는 내내 잘 펼쳐져 있던 책을 밀어내고는 서안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한 접시를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유모, 이것은…….”
“포도입지요.”
마치 누가 뒤를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의의 말허리를 급하게 뚝 끊는 유모의 대답에 그녀의 눈썹이 움직였다.
“설마 내가 이게 포도인 걸 모를까.”
앉아만 있어도 늘어질 것 같은 무더위는 한풀 수그러들었다. 새벽이면 흰 이슬이 내려앉는다는 백로(白露)를 갓 지나 포도가 제철이었다.
잘 익은 포도알에 송골송골하게 맺힌 물방울은 아침 이슬을 연상케 했다. 백로 아침, 그녀가 선 위쪽에 매달린 나뭇가지를 흔들어 이슬을 튀기던 사내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콩잎 위의 이슬을 훑어 마시면 속병이 낫는다던데. 나뭇잎이어도 효험은 비슷하지 않겠소?”
여의가 얼굴을 찌푸리며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아니하던 포도 접시를 외면했다.
그 사내, 그녀를 서안 앞에 앉혀 놓은 낭군은 점심때가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부인과의 약조도 잊을 만큼 그리 중한 일이 무어 있나, 짜증스러운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 앞에 앉아 계시느라 식사도 거르셨잖습니까.”
유모가 다시 한 번 접시를 달그락거려 포도의 존재를 일깨웠다.
서안 위에서 쫓겨난 책은 한 시진 남짓 한 장도 넘어가지 않았고, 점심때가 지나도록 물 한 방울 입에 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때가 지나 이미 끼니를 챙기기는 어려워졌고, 달콤한 과일로 속을 채우며 기분 전환이라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여의가 마지못해 서안을 살짝 밀며 허리를 곧게 폈다. 오래 앉아 있어서 못이 박일 것 같은 엉덩이를 살짝 들썩이며 팔을 앞으로 뻗어 손끝을 모아 쥐고 위로 쭉 올렸다. 이번에는 유모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씨께서 혼례를 올리신 지 벌써 다섯 해입니다. 성년을 넘긴 것도 세 해 전의 일이고요. 그런데 어찌 아직도 행동거지는 철없는 아이 같으십니까.”
줄곧 앉아 있느라 굳어진 몸을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잔소리가 한가득 밀려들었다. 여의가 억울한 마음으로 유모를 살짝 흘겨보았으나 대꾸하지는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몇 배는 더 많은 잔소리가 들려올 게 뻔했다. 불퉁한 얼굴을 하고는 다시 포도 접시를 내려다보다가 애꿎은 포도송이를 타박했다.
“송이가 과하게 크네.”
“찬모가 제일 실하고 잘생긴 놈으로 골랐다 했습니다. 설마 찬모의 눈썰미를 탓하시옵니까?”
무슨 말을 해도 본전을 찾기 어려웠다. 여의가 입을 꾹 다문 채 포도송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모의 눈빛이 그녀를 재촉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척 고집스러운 입매를 유지했다. 무언의 압박으로도 상대의 행동을 이끌어 내지 못한 유모가 입을 열었다.
“잡숫지 아니하시렵니까?”
“꼭 먹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
“포도가 뜻하는 바를 모르지 아니하실 텐데요, 아씨.”
“그쯤은 알고 있지.”
“느끼시는 바 없으십니까?”
“그것이 어디 인력으로 되는 일이던가.”
여의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알알이 주렁주렁 매달린 모양새 때문인지 포도에는 다산(多産)의 의미가 있어, 그해 처음 수확한 포도를 사당에 고하고 맏며느리에게 먹이곤 했다. 아마 여의의 앞에 놓인 포도 역시 어디선가 처음으로 따 왔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먹으라고 강권할 까닭이 있나.
유모의 말대로 여의가 혼례를 올린 지 벌써 다섯 해째였다. 역이 성년에 이른 이후로만 셈해도 이태가 지났다. 여느 여인이라면 이쯤이면 젖을 물린 아이 하나쯤은 안고 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이 댁 주인아씨는 출산은 고사하고 회임도 하지 아니하였는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여의의 곁을 오래도록 지켜 온 유모의 속이 타는 연유이기도 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모른 척하신다면, 나라도 나서야지.’
유모가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벌써 일 년 넘게 참아 온 말을 입에 올렸다.
“딸이 있어도 아들이 없으면 홀대받습니다. 한데 아씨는 딸조차도 없으신 것을요. 이래서는 나리께서 첩실을 들이신다 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시앗을 본다고?”
여의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막 포도송이 위로 향하던 손이 그 자리에서 멈추어 머뭇거리다 조용히 무릎 위로 귀환했다.
유모가 재빨리 여의의 표정에 떠오른 흔들림을 감지하고 기회를 놓칠세라 말을 이었다.
“지금이야 아씨의 자색이 고우니 나리께서 다른 마음을 먹지 아니하시지요. 그러나 용모가 고운 것은 한때입니다. 훗날 용모가 쇠하고 후사까지 생산치 못하면 사내의 마음이 떠나는 건 한순간입니다. 측실을 들일 수 없는 사내는 부마뿐이니, 대군 나리께서 소실을 얻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지 않습니까. 언제까지고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어요.”
“장부(丈夫)가 소실을 얻자고 들면 후사가 있고 없음 따위가 무슨 상관일까.”
여의가 시들하게 대꾸했다. 첩을 들인다는 말에 교태를 부리는 여인이 역의 옆에 선 모습을 상상했다.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쳐 올랐으나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스스로를 가다듬었다. 유모의 말이 길게 이어지자 열이 올랐던 머리가 도리어 차갑게 식었다.
시앗을 보는 건 꿈에도 생각하고 싶지 아니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 여의가 딱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아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들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이었다. 장성한 아들이 줄줄이 있는 자도 온갖 핑계를 들어 측실을 들이고 관기나 기녀를 품에 안았다.
“최소한 소박을 맞는 일은 없겠지요, 아씨.”
“포도를 먹는다 하여 회임할 수 있다면 팔도 방방곡곡의 포도는 씨가 마를 걸세.”
아씨의 무덤덤한 반응에 유모가 회심의 일격을 준비하여 들이댔다. 그러나 여의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모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서안 위를 정리했다. 지극정성으로 기원해도 모자랄 판에 저래서야 아이가 생기기는 할지, 아이가 들어선들 지킬 수 있을지나 의심스러웠다.
“사라지셨다……?”
유모가 이러저러하게 설명한 이야기를 듣고 난 역이 낮게 되풀이했다. 얼굴이나 분노하거나 당황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와 마주 선 여의의 유모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손을 맞대고 비비적거리는 것과는 몹시 대조적인 태도였다.
“집 안은 모두 찾아보았는가?”
“안채와 별당은 모두 돌아보았습니다.”
“사랑은?”
“큰방과 와방에도 아니 계셨습니다.”
여의의 유모가 집안에 소요를 일으키지 않고 둘러볼 수 있는 범위는 그만큼이 전부였다. 아씨가 사라졌다고 집 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가 얼토당토않은 곳에서 발견되면 그 나름대로 곤란했다.
아무리 주인아씨여도 아랫사람에게 우습게 보여서는 권위를 세울 수 없었다. 딸 이상으로 애지중지 품어 온 아씨가 그런 대접을 받게 할 수는 없었다.
역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어렸다. 여러 상황을 그리며 초조하게 귀를 기울인 것에 비해 벌어진 일은 몹시 단순했다. 조그만 다람쥐 같은 여인이 어디엔가 숨어 그가 찾아내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생각에 확신을 갖기 위해, 점잖은 목소리로 유모에게 일렀다.
“들어가서 아씨의 외출복이 그대로 있는가 확인하게.”
“외출복…… 말씀이십니까?”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는 부인이 곱게 성장(盛裝)하고 쓰개를 두르고 나갔을까?”
그제야 말뜻을 깨달은 유모가 안쪽으로 사라졌다. 역이 가만히 선 채로 자신의 예상이 빗나갔을 경우를 대비했다. 그의 부인이 행선지로 삼을 만한 곳을 예측하고, 그와 길이 엇갈리지 아니할 방도 따위를 조심스레 떠올렸다. 오래지 않아 집 안으로 사라졌던 유모가 되돌아왔다. 안도감과 혼란이 뒤섞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대로 있사옵니다.”
“그렇겠지.”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던 역이 유모를 돌아보았다.
“아씨는 내 찾아낼 것이니, 자네는 들어가서 좀 쉬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