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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는 사방이 막힌 어두컴컴한 공간에 있었다. 위쪽에 나무로 된 살이 늘어선 좁은 창으로 가늘게 들어오는 빛살은 어둠을 몰아내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혹여 누군가의 눈에 띌까 문까지 닫아 놓고 있으니 흡사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갇힌 모양새 같기도 했다. 그러나 버젓이 제 발로 들어왔기에 어둠이 두렵지는 않았다. 들어와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나, 벌써 오 년째 머무르는 제집의 일부였다.
여의가 소매로 코를 가렸다. 가느다랗게 비쳐 드는 몇 줄기 햇살 사이로 조금 전 문을 닫을 때 보얗게 일어난 먼지가 나풀거렸다.
한 손으로는 터져 나오려 하는 재채기를 막으며 다른 손으로 주변을 더듬거렸다. 몇 걸음 디뎌도 손에 잡히는 것은 물론이고 발에 차이는 것도 없었다. 여의가 생각을 바꾸어 가만히 멈추어 섰다.
오래지 않아 어둠에 눈이 익자 그녀의 주변을 둘러싼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주인의 성벽을 반영하듯 깔끔하게 정리되어 어두운 가운데에도 무엇이 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구석에 접혀진 병풍과 둘둘 말린 채 쌓인 족자, 가지런하게 늘어선 칼 따위를 지나 빼곡하게 책이 들어찬 책장으로 눈이 갔다. 여의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
서재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여기까지 쫓겨난 책을 보니 여태 모습을 드러내지 아니하는 무정한 낭군의 얼굴이 떠오른 탓이었다.
“밤 깊도록 예서 나가지 말아야지.”
여의가 어깃장 같은 혼잣말을 하며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녀가 여기에 숨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를 찾느라 온 집 안이 발칵 뒤집히고 나서야 어슬렁 나타나면 정인의 얼굴에도 근심의 빛이 떠올라 있을까. 혹 이만큼이나 나이를 먹고도 아이처럼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나무라려나.

“사내의 마음이 떠나는 건 한순간입니다.”

유모의 목소리를 떠올린 여의가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그가 약조를 까맣게 잊고 늦는 것은 어디서 고운 처자를 만나 수작이라도 걸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정말 그녀에게서 마음이 떠나 첩실을 얻고 기녀에게 눈을 돌리면 어쩌나.
오래도록 숨어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시들해졌다. 무심코 뻗은 손끝에 책등이 닿자 아무 생각 없이 손에 닿는 책을 뽑아 들었다.
그렇게 몇 번, 양팔이 책으로 가득 찬 여의가 밖으로 나가려 몸을 돌렸으나 문 근처에 닿기도 전에 문이 활짝 열렸다. 갑작스러운 환한 빛에 여의가 눈을 깜박거렸다.
그 빛 사이에 자리한 시커먼 사람의 형체가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찾았다.”
달짜근한 목소리의 주인이 팔을 벌렸다. 그녀가 품으로 뛰어들 것을 확신하는 듯한 동작에 여의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근심 따위는 갖지 않아도 좋았다. 가질 필요가 없었다.
책까지 한 아름 안은 여인이 온몸으로 부딪쳐 든 탓에 역의 몸이 잠시 흔들려 책 몇 권이 바닥에 흩어졌다. 익숙한 향기 위로 오래된 먼지 내음이 피어올랐다.
역이 여의의 어깨를 가볍게 쥐어 몸에서 떼어 내며 짐짓 얼굴을 찌푸려 보였다.
“먼지 구렁에 뒹굴던 괭이를 주워 온 모양새 아니오.”
“정(淨)치 못하여 버리고 가시렵니까.”
“그건 내면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이나 하는 짓이라오.”
역이 살짝 몸을 굽히더니 여의를 안아 들었다. 그 바람에 여의의 팔에 안겨 있던 나머지 책들이 그의 발치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여의가 당황한 얼굴로 작게 속삭였다.
“저…….”
“걱정 마오.”
역이 고개를 돌려 턱짓했다. 여의는 저만치에 선 하인 몇 명과 그 뒤쪽에 고개만 삐죽 내민 유모의 얼굴을 보고는 그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었다.
떨어진 책이 아니라 저들이 문제인 것이라고, 아랫사람이 보는데 안방마님 체면이 무어가 되느냐는 이야기가 턱 끝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그 말을 꾹 참고는 그저 고개만 흔들어 보였다. 그녀에게 닿은 매끄러운 옷자락 안에서부터 전해지는 체온이 따스하여 그렇게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
“정리해서 서재로 들여 주게.”
역이 여의를 안은 채 걸음을 딛다가 하인들의 곁을 지나며 짧게 말했다.
여의가 살짝 고개를 들었을 때, 여전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유모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도로 고개를 파묻었다. 그 와중에도 유모의 표정이 뇌리에 남았다. 흐트러진 모습을 아랫것들에게 보이면 안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유모가 왜 싱글거리는지 모르겠다고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여의를 서재에 들여놓은 역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방은 조금 전 나간 화려한 선비의 차림새와는 대조적으로 간소했다.
그럼에도 주인의 느낌이 은연중에 묻어난다는 것이 신기했다. 여의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엷은 묵향과 함께 익숙한 이의 체향이 함께 스며들었다.
조심스러운 기척과 함께 문이 열렸다. 언뜻 멀뚱히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의의 앞에 책이 차곡차곡 쌓였다. 여의가 무심한 손길로 하나씩 서안 아래로 내려놓았다. 책 위에 다른 책이 쌓이는 순간 제목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건성이었다.
서안 위에 마지막으로 남은 책 위에 막 손을 얹었을 때였다.
“부인.”
부드러운 목소리에 여의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길이 다정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따라 움직였다. 역이 맞은편에 앉더니 책 위에 얹힌 손을 잡아당겼다.
여의가 무어라 질문을 던질 새도 없었다. 손끝에 차가운 느낌이 닿으면 물에 적신 하얀 수건에도 잿빛 얼룩이 묻어났다.
여의가 수줍게 손을 잡아 뺐지만 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양손의 손끝 하나하나, 티끌의 흔적도 남지 않게 정성껏 닦아 낸 뒤에야 비로소 손을 놓아주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수건을 곱게 접어 옆에 내려놓았으나 여의가 곱게 눈을 흘겼다.
역이 은근한 눈웃음을 건넸다. 그 사소한 표정 하나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게 전혀 어렵지 않음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여의가 눈을 돌렸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디 조그만 생쥐가 무얼 들고 날랐는지 볼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역의 목소리에 여의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에는 길 고양이 취급을 하더니 지금은 그보다도 못한 생쥐였다.
역은 그 얼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으나, 서안으로 눈길을 떨어뜨리자마자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서안 위에 남겨진 책의 제목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 책 무더기 위에 얹어 놓은 뒤 피로한 듯 쉰 목소리를 냈다.
“무슨 책을 갖고 나왔는지, 알고 있소?”
대답이 없이 눈만 깜박거리는 여의를 향하는 역의 목소리가 주의를 주듯 살짝 엄격해졌다.
“아무리 사람들과 왕래가 적다 하여도 구설에 오를 만한 일은 피해야 하오.”
여의가 반발심이 희미하게 깃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저 책일 뿐이옵니다.”
“때로는 가장 강력한 흉기가 되오.”
역이 아이 달래듯 차분하게 대답하는 사이, 여의가 책 더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역이 그것을 발견하고 그 위를 꾹 눌렀으나 제목을 확인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 대체 저 제목 어디에 구설에 오를 만한 구석이 있사옵니까.”
역이 여의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몸이 가벼워 틈만 나면 눈을 피해 바깥나들이를 즐기면서도, 순진함이 지나쳐 세상 돌아가는 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아니하는 여인이 그의 부인이었다.
남편을 입신양명시키고자 부지런히 이 댁에서 저 댁으로 걸음을 옮기는 여인보다는 나을지 모르겠으나,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는 입신양명과 거리가 멀었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부인이 잘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문은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말며, 아는 이들도 써서는 아니 된다는 어명이 내린 바 있소.”
그게 벌써 육칠 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에는 그조차도 관심을 갖지 아니하였던 일, 어린 소녀가 그 일에 대해 제대로 알 리 없다.
어쩌면 책에 적힌 ‘訓民正音’이 언문의 다른 이름임을 알지 못할 수도 있었다. 역이 의구심을 갖고 여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여의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역이 얼굴을 찌푸렸다. 낭패였다. 긁어 부스럼이라고 할까.
“귀한 뜻을 품고 만든 글자를 그리 업신여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의의 말을 들은 역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를 비방하는 언문 투서가 붙은 바 있다는 말을 덧붙이면, 그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해할 것이다. 투서의 내용이 진실인지를 물을 것이고, 종내는 전하께서 군왕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의문까지도 드러내겠지. 친정에라도 가서 그 소리를 꺼내면.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밀려들 터였다. 결국 역은 알고 있는 진실을 마음에 품은 채로 퍽 강경한 목소리를 냈다.
“정음이든 언문이든, 그것을 알고 사용하려 드는 건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나 다름없소. 더군다나 부부인인 그대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오. 이 책은 도로 그 자리에 돌려놓을 것이나, 부인이 자꾸 미련을 가질 것 같다면 차라리 태워 없애는 편이 낫겠소.”
“받들겠사옵니다.”
여의가 한풀 꺾인 목소리를 냈다. 마냥 따스하던 둥근 눈에 준엄한 빛이 어리고, 한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이 가느다랗고 단호한 선을 그렸다. 그 변화를 보며 무어라 더 말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목숨을 내놓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그녀의 모험심 때문에 그가 위태로워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남들 눈에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보이는 모양이었지만, 필요한 만큼의 사리분별은 할 줄 알았다.
그녀의 남편은 선왕의 적자(嫡子)인 대군이었다. 사소한 흠집이라도 크게 부풀려져 왕의 귀에 들어가면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다.
역이 여전히 책 더미를 누른 손에 힘을 준 채 조금 더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부인과 백년해로하는 것뿐이오. 아무리 귀하다 한들 부인보다 중한 것은 없소. 한낱 종잇장 위의 먹물 흔적에 불과한 서책 따위가 그것을 방해하게 하고 싶지 않소.”
여의가 눈길을 떨어뜨렸다. 역이 책을 말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막 여의의 옆을 스쳐 지날 때, 그녀의 손이 역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여의는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허리에 팔을 감고 너른 등에 얼굴을 묻었다. 역은 그의 등에 기대인 여인에게서 가느다란 떨림이 전해 오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불렀다.
“부인.”
“송구하옵니다. 매번 심려만 끼쳐 드리게 되어…….”
여의가 말을 미처 맺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백년해로’라는 흔한 말의 그 어디가 그녀의 마음을 건드렸는지 잘 알 수 없었지만 가슴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역이 미소하며 그의 배 위에서 깍지 낀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를 놓치기라도 할까 염려하는 듯 꽉 모아 쥔 손을 풀고는 몸을 빙글 돌렸다.
“그 말은 절반만 옳소.”
더없이 다정한 속삭임이 여의의 귀를 간지럽혔다. 여의가 고개를 들어 역을 올려다보았다.
“내 심려를 감(減)하게 하는 것도 오로지 그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오.”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얼굴을 차마 더 마주 보지 못하고 여의가 눈을 감았다. 살짝 젖어 든 눈가에 엷은 이슬이 맺혔으나 방울져 흐를 정도는 아니었다.
아랫입술 위에 서늘한 느낌이 내려앉더니 이내 그녀와 비슷하게 물들어 갔다. 한없이 가져가도 모자란 듯 탐하고 아무리 나누어 주어도 줄지 않는 듯 내어 주기를 반복하다 보니 열기를 끊임없이 주고받는 그들을 감싸안은 공기가 서서히 달아올랐다.

날이 저물었다. 아침은 이슬이 내려앉은 정도로 서늘해도 낮 동안에는 태양이 땅을 뜨겁게 달구어, 어둠이 내려앉았어도 공기는 후텁지근했다. 그나마 조금씩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부부인 마님의 처신을 주시하는 유모가 알면 기함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더운 날씨에 하루 종일 버선 안에 파묻혀 있던 발이 가엾어 잠자리에 들 기약이 없는데도 벌써 맨발인 채였다.
방 한가운데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비단 금침이 깔렸다. 미적지근한 포도송이는 서재에서 이곳으로 옮겨 와 안쪽 문 옆의 소반에서 시들어 가고 있었다. 여의가 안마당 쪽으로 난 큰 창을 열어 둔 채 그 앞에 앉아 둥싯거리듯 느지막이 떠오르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