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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마주한 두 남자의 분위기가 매우 싸늘했다. 고요한 침묵 속, 숨을 쉬는 것조차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그들은 각자 다른 마음으로 불편한 분위기를 견뎠다.
“네가 어떻게…….”
나지막이 갈라진 목소리가 분노와 함께 흔들렸다. 한숨을 내쉬던 다른 목소리는 고개를 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미안하네. 할 말이 없어. 먼저 일어나겠네.”
“…….”
온몸을 바들거리던 남자는 먼저 일어선 그를 뚫어져라 바라만 봤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린 회사. 믿기 힘든 현실에 망연자실했다.
“어? 손, 손님! 여기 좀 도와주세요!”
남자는 결국 무너졌다. 한 발자국조차도 버거웠던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1. 동기
석호는 매일 바쁜 하루를 보냈다. 번듯한 중소기업 영업부에서 대리직을 맡은 그는 모든 업무를 알아서 척척해 낼 만큼 책임감이 강하고 꽤 유능한 직원이었다. 석호는 오늘도 여전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조금은 지친 얼굴로 겨우 한숨 돌리려던 찰나 그의 휴식을 방해하는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석호는 발신자를 확인한 후 어깨를 가라앉히며 작은 숨을 내뱉었다.
“예, 어머니.”
—석호야…….
전화 너머 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분명 젖은 음성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목소리가…….”
—아버지가 쓰러지셨어.
“네?”
석호는 눈을 번뜩이며 벌떡 일어섰다. 며칠 전에 뵈었을 때만해도 건강하셨는데 쓰러지시다니?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갑자기 왜요? 아니, 위독하신 거예요? 암튼 제가 바로 갈게요.”
—그래. 와서 얘기하자.”
석호는 통화를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회사를 나왔다. 힘없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심장이 욱신거리며 내려앉았다. 병원에 도착하니 떨림이 더 심해졌다. 심호흡을 하고 병실 문을 연 석호는 울상인 어머니와 마주하고 아버지부터 살폈다.
“아버지는요? 어떠신 거예요?”
어머닌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신적 충격이 컸던 모양이야. 고비는 넘겼다는데 아직 깨어나질 못하시네.”
석호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정신적 충격이라니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것이…….”
어머니는 머뭇거리며 석호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그가 알지 못한 큰일이 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쓰러진 이유, 하루아침 몰락해 버린 집안. 석호는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래서요? 이제 아버지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나도 잘은 모르겠다만 여철그룹으로 넘어간 거 아니겠니? 평생을 몸 바쳐 일군 터전인데 다른 곳도 아니고 믿었던 친구한테 그랬으니, 충격이 크신 게지.”
석호는 올라오는 화를 겨우 억누르고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집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설마 그것마저 넘어가는 거예요?”
“아휴, 나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구나. 네 아버지가 깨어나야 알 수 있지 않겠니?”
“…….”
석호는 젖어 드는 어머니 목소리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여철그룹이라면 몇 해 전 위기가 닥쳤을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던 아버지의 오랜 친구의 회사였다. 아버지 입장에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뒤통수를 맞은 셈이니, 그 충격은 상당히 깊었을 것이다.
석호는 누워 있는 아버지를 보니 자꾸 울화가 치밀었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무너져 버린 아버지가 안쓰럽고 풍전등화의 집안 사정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원망 한 번 못 해 보고 걱정만 해야 하는 어머니도 딱하고, 이렇게 되기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힘이 되지 못한 자신까지 그저 모든 것이 한심하고 분노가 일었다.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제와 효자 코스프레를 하기에 적절한 타이밍을 놓친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집안과 아버지를 위해 뭐라도 해야만 했다. 석호는 주먹을 그러쥐고 벌떡 일어섰다.
“왜? 가려고?”
어머니는 석호의 움직임에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았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그는 작은 숨을 내쉬고 어머니를 다독였다.
“네, 죄송해요. 급히 가 볼 때가 있어서요. 아버지 깨어나시면 바로 연락 주세요.”
“그래, 그러긴 할 건데…….”
석호는 말끝을 흐리는 어머니 어깨를 붙잡고 시선을 마주했다.
“어머니, 마음 굳게 하셔야 돼요. 아버지 반드시 깨어나실 거예요. 아시잖아요, 강인한 분이신 거. 힘드시겠지만 어머니까지 무너지시면 안 돼요. 아셨죠?”
“나는 괜찮은데 아버지가 걱정이구나. 네 아버지, 회사가 전부였잖니.”
석호는 어깨를 들었다 내리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무심했어요. 진즉 알았다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
“…….”
어머니는 석호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누워 계신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가녀린 어깨를 들썩였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어머니의 한숨 섞인 한탄이 고스란히 느껴져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석호는 병원을 나오자마자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자신이 뭘 할 수 있을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아 자꾸 얼굴만 일그러졌다. 그때 석호를 달래주듯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친구인 유안이었다.
“어, 유안아.”
—잘 지냈냐? 퇴근했지?
석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다시 말을 이었다.
“퇴근했지. 왜?”
—간만에 술이나 한잔할까 싶어서. 지금 올래?
괜히 솔깃했다. 지금 자신의 처지가 답답하기도 했고 생각해 보니 유안은 얼마 전까지 여철그룹에서 일했었다. 석호는 눈을 번뜩이며 걸음을 빨리했다.
“알았어. 어딘데?”
—좀 시끄러워도 괜찮지? 여기 클럽이야. 지난번에 세형이 총각 파티 한다고 모였던 곳 알지?
“응, 알아. 금방 갈게.”
석호는 클럽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유안에게 물어볼 것이 많아 부리나케 움직였다. 가는 내내 왜 이리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동석호! 여기!”
석호는 유안의 손짓에 따라 어깨를 들썩이며 움직였다.
“많이 기다렸어?”
유안은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아니, 괜찮아. 일단 한 잔 받아라.”
“어, 그래.”
석호는 유안이 따라 주는 술을 받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끄럽고 사람이 많은 장소는 딱 질색이었지만 여철그룹에 대해 물어보려면 감안해야 하는 일이었다. 석호는 유안의 눈치를 살피며 말할 기회를 기다렸다. 눈치가 빠른 유안이 그의 초조함을 대번에 읽었는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넌지시 입을 열었다.
“너 나한테 뭐 할 말 있지?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말해, 인마.”
석호는 뜨끔하며 유안을 바라봤다.
“귀신이네.”
한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괜히 난감하기만 했다.
“어, 저 여자 여철그룹 외동딸 같은데? 뭐지? 애인은 아닌 것 같고. 석호야, 저기 좀 봐봐. 저 여자 남자한테 추행당하는 것 같지 않아? 간만에 기사도 정신 좀 발휘해 봐?”
“……!”
여철그룹 외동딸인 것 같단 유안의 말에 석호는 저절로 시선이 돌아갔다. 화려한 치장을 하고 곱상한 외모의 여자는 취객으로 보이는 웬 남자의 치근덕거림을 상대하고 있었다.
석호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여자를 도와주고 접근해 여철그룹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확실해? 여철그룹 딸 맞느냐고.”
석호가 재차 확인을 위해 유안에게 되물었다. 갑자기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그가 이상했던 유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어, 확실해. 내가 여철그룹 다녔었잖아. 거기 낙하산 상무로 있었어. 근데 네가 웬일이야? 여자한테 관심을 다 보이고.”
“관심은 아니고, 암튼 너 나 좀 도와줘라.”
“뭘?”
유안은 점점 더 이상했다.
“내가 저 여자한테 가 볼 테니까 일 해결하고 나면 알은척 좀 해 줘. 이유는 묻지 말고. 내가 나중에 다 얘기할 테니까.”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왜? 맘에 들어?”
“아씨, 그런 거 아니야. 저 여자를 좀 알아야 할 이유가 있어서 그래. 그냥 좀 묻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주라, 응?”
“너 좀 이상하다? 생전 남의 일은 관심도 없으면서.”
“그랬지. 근데 저 여자는 관심 좀 가져 보려고.”
“에? 진짜? 정말 뭔데 그래.”
“아, 글쎄 그건 나중에. 알았지? 부탁한다.”
“야! 동석호!”
석호는 유안에게 의미심장한 부탁을 한 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원래 남의 일에 조금의 관심도 없던 그였지만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이거 안 놔? 너 진짜 콩밥 좀 먹어볼래?”
“아휴, 앙탈이 심하네. 그냥 딱 한 잔만 같이 하자니까 왜 이렇게 비싸게 굴어. 너도 이러려고 혼자 온 거 아니야? 괜히 내숭 떨지 말고 이리 좀…… 에? 넌 또 뭐야?”
“그만하시죠. 굉장히 꼴사나운데.”
석호는 남자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고 조곤조곤 말했다.
“아씨, 그러니까 넌 뭐냐고. 네가 상관할 일 아니잖아. 좋은 말로 할 때 이거 놓고 꺼져라.”
“꺼져야 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쪽인 것 같은데. 조용히 술이나 마시고 가지?”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위압감을 뽐내는 석호를 보며 몸을 움찔했다.
“에이, 재수 없게. 이, 이걸 놔야 갈 거 아니야. 빨, 빨리 안 놔?”
석호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진즉 그럴 것이지. 잘 생각했어.”
“별…… 에잇.”
남자는 석호를 있는 대로 노려보며 오만상을 구기고 사라졌다. 석호는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다 조용히 여자를 돌아봤다.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웬만하면 그쪽도 이만 들어가시죠?”
석호의 볼멘소리에 진서는 놀란 눈을 깜빡거렸다.
“뭐, 괜찮아요.”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석호가 피식 웃곤 가볍게 고개를 수그렸다.
“다행이네요. 그럼 전 이만.”
“네, 고마워요.”
마주한 두 남자의 분위기가 매우 싸늘했다. 고요한 침묵 속, 숨을 쉬는 것조차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그들은 각자 다른 마음으로 불편한 분위기를 견뎠다.
“네가 어떻게…….”
나지막이 갈라진 목소리가 분노와 함께 흔들렸다. 한숨을 내쉬던 다른 목소리는 고개를 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미안하네. 할 말이 없어. 먼저 일어나겠네.”
“…….”
온몸을 바들거리던 남자는 먼저 일어선 그를 뚫어져라 바라만 봤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린 회사. 믿기 힘든 현실에 망연자실했다.
“어? 손, 손님! 여기 좀 도와주세요!”
남자는 결국 무너졌다. 한 발자국조차도 버거웠던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1. 동기
석호는 매일 바쁜 하루를 보냈다. 번듯한 중소기업 영업부에서 대리직을 맡은 그는 모든 업무를 알아서 척척해 낼 만큼 책임감이 강하고 꽤 유능한 직원이었다. 석호는 오늘도 여전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조금은 지친 얼굴로 겨우 한숨 돌리려던 찰나 그의 휴식을 방해하는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석호는 발신자를 확인한 후 어깨를 가라앉히며 작은 숨을 내뱉었다.
“예, 어머니.”
—석호야…….
전화 너머 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분명 젖은 음성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목소리가…….”
—아버지가 쓰러지셨어.
“네?”
석호는 눈을 번뜩이며 벌떡 일어섰다. 며칠 전에 뵈었을 때만해도 건강하셨는데 쓰러지시다니?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갑자기 왜요? 아니, 위독하신 거예요? 암튼 제가 바로 갈게요.”
—그래. 와서 얘기하자.”
석호는 통화를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회사를 나왔다. 힘없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심장이 욱신거리며 내려앉았다. 병원에 도착하니 떨림이 더 심해졌다. 심호흡을 하고 병실 문을 연 석호는 울상인 어머니와 마주하고 아버지부터 살폈다.
“아버지는요? 어떠신 거예요?”
어머닌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신적 충격이 컸던 모양이야. 고비는 넘겼다는데 아직 깨어나질 못하시네.”
석호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정신적 충격이라니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것이…….”
어머니는 머뭇거리며 석호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그가 알지 못한 큰일이 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쓰러진 이유, 하루아침 몰락해 버린 집안. 석호는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래서요? 이제 아버지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나도 잘은 모르겠다만 여철그룹으로 넘어간 거 아니겠니? 평생을 몸 바쳐 일군 터전인데 다른 곳도 아니고 믿었던 친구한테 그랬으니, 충격이 크신 게지.”
석호는 올라오는 화를 겨우 억누르고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집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설마 그것마저 넘어가는 거예요?”
“아휴, 나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구나. 네 아버지가 깨어나야 알 수 있지 않겠니?”
“…….”
석호는 젖어 드는 어머니 목소리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여철그룹이라면 몇 해 전 위기가 닥쳤을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던 아버지의 오랜 친구의 회사였다. 아버지 입장에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뒤통수를 맞은 셈이니, 그 충격은 상당히 깊었을 것이다.
석호는 누워 있는 아버지를 보니 자꾸 울화가 치밀었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무너져 버린 아버지가 안쓰럽고 풍전등화의 집안 사정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원망 한 번 못 해 보고 걱정만 해야 하는 어머니도 딱하고, 이렇게 되기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힘이 되지 못한 자신까지 그저 모든 것이 한심하고 분노가 일었다.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제와 효자 코스프레를 하기에 적절한 타이밍을 놓친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집안과 아버지를 위해 뭐라도 해야만 했다. 석호는 주먹을 그러쥐고 벌떡 일어섰다.
“왜? 가려고?”
어머니는 석호의 움직임에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았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그는 작은 숨을 내쉬고 어머니를 다독였다.
“네, 죄송해요. 급히 가 볼 때가 있어서요. 아버지 깨어나시면 바로 연락 주세요.”
“그래, 그러긴 할 건데…….”
석호는 말끝을 흐리는 어머니 어깨를 붙잡고 시선을 마주했다.
“어머니, 마음 굳게 하셔야 돼요. 아버지 반드시 깨어나실 거예요. 아시잖아요, 강인한 분이신 거. 힘드시겠지만 어머니까지 무너지시면 안 돼요. 아셨죠?”
“나는 괜찮은데 아버지가 걱정이구나. 네 아버지, 회사가 전부였잖니.”
석호는 어깨를 들었다 내리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무심했어요. 진즉 알았다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
“…….”
어머니는 석호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누워 계신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가녀린 어깨를 들썩였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어머니의 한숨 섞인 한탄이 고스란히 느껴져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석호는 병원을 나오자마자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자신이 뭘 할 수 있을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아 자꾸 얼굴만 일그러졌다. 그때 석호를 달래주듯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친구인 유안이었다.
“어, 유안아.”
—잘 지냈냐? 퇴근했지?
석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다시 말을 이었다.
“퇴근했지. 왜?”
—간만에 술이나 한잔할까 싶어서. 지금 올래?
괜히 솔깃했다. 지금 자신의 처지가 답답하기도 했고 생각해 보니 유안은 얼마 전까지 여철그룹에서 일했었다. 석호는 눈을 번뜩이며 걸음을 빨리했다.
“알았어. 어딘데?”
—좀 시끄러워도 괜찮지? 여기 클럽이야. 지난번에 세형이 총각 파티 한다고 모였던 곳 알지?
“응, 알아. 금방 갈게.”
석호는 클럽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유안에게 물어볼 것이 많아 부리나케 움직였다. 가는 내내 왜 이리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동석호! 여기!”
석호는 유안의 손짓에 따라 어깨를 들썩이며 움직였다.
“많이 기다렸어?”
유안은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아니, 괜찮아. 일단 한 잔 받아라.”
“어, 그래.”
석호는 유안이 따라 주는 술을 받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끄럽고 사람이 많은 장소는 딱 질색이었지만 여철그룹에 대해 물어보려면 감안해야 하는 일이었다. 석호는 유안의 눈치를 살피며 말할 기회를 기다렸다. 눈치가 빠른 유안이 그의 초조함을 대번에 읽었는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넌지시 입을 열었다.
“너 나한테 뭐 할 말 있지?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말해, 인마.”
석호는 뜨끔하며 유안을 바라봤다.
“귀신이네.”
한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괜히 난감하기만 했다.
“어, 저 여자 여철그룹 외동딸 같은데? 뭐지? 애인은 아닌 것 같고. 석호야, 저기 좀 봐봐. 저 여자 남자한테 추행당하는 것 같지 않아? 간만에 기사도 정신 좀 발휘해 봐?”
“……!”
여철그룹 외동딸인 것 같단 유안의 말에 석호는 저절로 시선이 돌아갔다. 화려한 치장을 하고 곱상한 외모의 여자는 취객으로 보이는 웬 남자의 치근덕거림을 상대하고 있었다.
석호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여자를 도와주고 접근해 여철그룹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확실해? 여철그룹 딸 맞느냐고.”
석호가 재차 확인을 위해 유안에게 되물었다. 갑자기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그가 이상했던 유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어, 확실해. 내가 여철그룹 다녔었잖아. 거기 낙하산 상무로 있었어. 근데 네가 웬일이야? 여자한테 관심을 다 보이고.”
“관심은 아니고, 암튼 너 나 좀 도와줘라.”
“뭘?”
유안은 점점 더 이상했다.
“내가 저 여자한테 가 볼 테니까 일 해결하고 나면 알은척 좀 해 줘. 이유는 묻지 말고. 내가 나중에 다 얘기할 테니까.”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왜? 맘에 들어?”
“아씨, 그런 거 아니야. 저 여자를 좀 알아야 할 이유가 있어서 그래. 그냥 좀 묻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주라, 응?”
“너 좀 이상하다? 생전 남의 일은 관심도 없으면서.”
“그랬지. 근데 저 여자는 관심 좀 가져 보려고.”
“에? 진짜? 정말 뭔데 그래.”
“아, 글쎄 그건 나중에. 알았지? 부탁한다.”
“야! 동석호!”
석호는 유안에게 의미심장한 부탁을 한 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원래 남의 일에 조금의 관심도 없던 그였지만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이거 안 놔? 너 진짜 콩밥 좀 먹어볼래?”
“아휴, 앙탈이 심하네. 그냥 딱 한 잔만 같이 하자니까 왜 이렇게 비싸게 굴어. 너도 이러려고 혼자 온 거 아니야? 괜히 내숭 떨지 말고 이리 좀…… 에? 넌 또 뭐야?”
“그만하시죠. 굉장히 꼴사나운데.”
석호는 남자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고 조곤조곤 말했다.
“아씨, 그러니까 넌 뭐냐고. 네가 상관할 일 아니잖아. 좋은 말로 할 때 이거 놓고 꺼져라.”
“꺼져야 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쪽인 것 같은데. 조용히 술이나 마시고 가지?”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위압감을 뽐내는 석호를 보며 몸을 움찔했다.
“에이, 재수 없게. 이, 이걸 놔야 갈 거 아니야. 빨, 빨리 안 놔?”
석호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진즉 그럴 것이지. 잘 생각했어.”
“별…… 에잇.”
남자는 석호를 있는 대로 노려보며 오만상을 구기고 사라졌다. 석호는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다 조용히 여자를 돌아봤다.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웬만하면 그쪽도 이만 들어가시죠?”
석호의 볼멘소리에 진서는 놀란 눈을 깜빡거렸다.
“뭐, 괜찮아요.”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석호가 피식 웃곤 가볍게 고개를 수그렸다.
“다행이네요. 그럼 전 이만.”
“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