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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석호를 뒤따라왔던 유안이 쭈뼛거리다 진서에게 알은척을 했다.
“저기 근데 여 상무님 맞으시죠?”
유안의 알은척에 진서가 흠칫하며 그들을 바라봤다.
“절 아시나요?”
유안은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요. 잘 알죠. 얼마 전까지 여철에 다녔으니까요.”
“아, 그러셨구나.”
유안은 석호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 여긴 제 친구예요. 동석호라고.”
“네, 아무튼 감사했어요.”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그럼 저흰 이만.”
진서는 유안과 함께 돌아서는 석호를 넌지시 바라보다 뭔가 생각난 듯 다급하게 그들을 불러 세웠다.
“저기, 잠깐만요!”
석호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진서는 저를 바라보는 그를 힐끔거리다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뭐 다른 건 아니고요. 이거 받으세요.”
그녀가 석호에게 건넨 것은 제 명함이었다. 석호는 어리둥절해하며 진서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별 뜻은 없어요. 그냥 감사해서 나중에 밥이라도 사려고요. 시간 나실 때 연락 주세요. 그럼 전 이만.”
“…….”
석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돌아서는 진서를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유안은 재미있는 가십이라도 발견한 듯 그의 어깨를 툭 치며 피식거렸다.
“뭐냐, 새로운 작업 방식이야? 대단한데? 암튼 이제 이유나 말해 줘.”
석호는 진서의 명함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곤 유안과 시선을 마주한 채 작은 숨을 내뱉었다.
“알았어. 대신 비밀 지켜.”
갑자기 튀어나온 비밀이란 단어에 유안은 괜히 움찔했다.
“비밀? 알았어. 근데 너 오늘 진짜 이상하다. 대체 뭔데 그래?”
석호는 가슴을 들었다 내리고 유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놨다. 잠자코 듣기만 하던 유안은 술을 들이켜더니 굳어진 얼굴로 석호를 바라봤다.
“그래서 아버지는 좀 어떠하셔?”
석호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못 깨어나셨어. 충격이 크셨던 모양이야.”
“그러시겠지. 너도, 어머니도 걱정이 많겠다.”
“그냥 죄송할 뿐이야.”
석호의 한숨에 유안은 눈을 크게 추켜세우며 석호를 주시했다.
“근데 이 명함으로 뭘 어쩌려는 건데?”
유안의 말에 석호는 그저 웃기만 했다.
“웃지만 말고 방법을 얘기해 봐.”
“생각해 봐야지. 일단 그 딸에 대해 아는 거 있음 다 말해 줘.”
유안은 입술을 오므렸다 피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부서가 달라서 잘은 모르는데 소문에 의하면 여 상무가 성격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야. 여 상무 비서로 일하던 직원들이 길어야 3개월이었거든. 생긴 건 곱상한데, 차갑고 냉정하고 막말을 좀 많이 하나 보더라.”
“그래?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무서운 게 없는 건가?”
“여철 회장이 억지로 상무 자리 앉히면서 일부러 예민하게 군다는 소리도 있고. 암튼 소문이 무성한 여자야. 오죽하면 비서로 여자를 채용 못 한다고까지 하겠냐. 엄청 까다롭게 구나 봐.”
“그래…….”
석호는 유안의 말을 들으며 진서가 남기고 간 명함을 다시 주시했다. 자신의 계획대로 그녀의 연락처를 알아내긴 했지만 어떤 식으로 여철그룹에 접근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녀를 이용한다는 게 어쩐지 도덕적으로 꺼림칙한 일이었지만 석호에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며 술을 들이켰다. 그의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유안은 뭐라도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 제 휴대폰으로 조용히 여철그룹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았다. 확연히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팝업으로 보이는 문구 하나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야,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거 좀 봐봐.”
석호는 유안의 호들갑에 심드렁한 얼굴로 휴대폰을 바라봤다.

여철그룹 비서 채용. 경력 무관, 군필 남성.

“이거…….”
유안이 석호에게 보인 것은 여철에서 비서를 채용한다는 공고문이었다. 석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안을 주시했다.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남자라고 하는 거 보면 틀림없이 여 상무 비서야. 이거라면 자연스레 여철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 아니겠어? 여철 회장은 네 얼굴도 모른다며. 너도 뵌 적 없고. 비밀스레 접근하기 좋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유안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석호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금 회사에서 나름 인정을 받고 있었고, 돈벌이가 끊기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서는 해 본 적도 없고 확실하지 않은 일에 모험을 하는 것도 겁이 났다.
유안은 망설이는 석호에게 일이 잘못되면 제가 도와주겠다며 호언장담을 했다. 석호는 그가 고마웠지만 섣불리 선택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실소를 내뱉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벨소리가 울렸다. 기다리던 소식이 있던 터라 곧바로 휴대폰을 확인한 그는 다소 흥분한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예, 어머니. 아버지는요?”
어머니의 목소리는 조금 나아진 듯했다.
—막 깨어나셨어. 조금 기력이 없으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한시름 놨다.
“다행이네요. 지금 바로 갈게요.”
—에이, 뭐 하러. 너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내가 잘 말할 테니 걱정 말고 쉬어라. 좀 있다가 전화나 한 번 하렴.
석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작은 숨을 내쉬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어머니가 고생이 많으세요. 죄송해요.”
—그런 소리 말아. 난 괜찮아. 네 아버지 깨어나신 것만으로도 감사해.
“네, 그럼 이따 전화 드릴 게요.”
—그래.
어머니와 통화를 마치자 묘한 공허함이 밀려들었다. 일그러지는 인상을 저도 어쩌지 못한 석호는 깊은 숨을 내뱉으며 다시 술을 마셨다.
“어머니셔? 아버지는 괜찮으시대?”
눈치 빠른 유안이 석호의 굳어진 얼굴을 보며 조심스레 되물었다.
“응, 깨어나셨대.”
“아휴, 다행이네. 그럼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유안이 몸을 움직이며 꿈틀거리자 석호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아니, 오지 말라하셔. 아무래도 아버지가 난처해하시는 모양이야. 당신 잘못도 아닌데.”
“아버지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가족들한테도 미안하고, 면목 없을 수도 있고. 암튼 깨어나셨다니 한시름 놓이네.”
“응.”
석호는 유안의 다독임이 고마웠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힘든 마음을 같이 공유하고 걱정하는 마음 씀씀이가 오늘따라 유난히 와 닿았다. 이젠 자신의 결정만 남았다. 아버지를 대신해 비밀스런 모험을 시작할 것인지, 선택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었다.

* * *

오늘도 진서의 얼굴은 매우 좋지 못했다.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적성에도 맞지 않는 경영 수업을 하게 되면서 회사에 출근하는 날마다 줄곧 굳어진 얼굴이었다.
“하아, 뭐가 이렇게 많아.”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책상 위, 결재해야 할 서류 뭉치들이 그녀의 표정을 더 일그러뜨렸다. 낙하산으로 앉은 자리 때문인지 직원들도 슬금슬금 눈치만 보고 누구 하나 그녀에게 살갑게 구는 자가 없었다. 괜히 서럽고 모든 것이 불편하기만 해 더 예민하게 굴며 냉정하게 굴었다. 특히 옆에서 저를 보좌하는 비서들에게 더욱 차가웠다. 그로 인해 비서는 자주 바뀌었고 공석일 때가 많았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 달도 채 버티지 못한 김 비서가 후임이 채용되는 대로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 마침 오늘이 최종 면접 날이라 김 비서는 하루 종일 긴장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고 싶었기에 최종 면접이 그에게도 나름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때 별로 반갑지 않은 소리가 들렸다. 인터폰에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오만상을 구기며 바라보던 김 비서가 작은 숨을 내쉬고 상무실을 노크했다.
“부르셨습니까, 상무님.”
김 비서가 고개를 조아리자 진서는 그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제가 왜 불렀을까요?”
차가운 진서의 목소리에 김 비서는 몸을 움찔했다.
“네?”
“제가 아직 오늘 일정에 대해 못 들은 것 같은데, 아닙니까?”
김 비서는 그제야 눈을 번뜩였다.
“아, 일정 말씀드려야지요! 상무님께서 급한 일을 보고 계신 것 같아……. 큼, 지금 바로 알려 드릴까요?”
진서의 미간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김 비서님, 언제부터 그렇게 제 일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제가 무슨 일을 하든 개의치 마시고 김 비서님은 본인 일 알아서 하세요.”
진서의 볼멘소리에 김 비서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삐죽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일정 바로 올리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김 비서는 돌아서자마자 오만상을 구긴 채 상무실을 나왔다.
“아오, 진짜. 좀 좋게 말할 순 없나? 대체 성격이 왜 저 모양이야.”
진서의 차가움에 잔뜩 짜증이 난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쓴소리를 내뱉었다. 책상 위에 놓아 둔 진서의 스케줄 표를 집어 든 채 어깨를 들썩거린 그는 오늘 면접이 이루어지고 나면 저 얼굴을 매일 봐야 하는 스트레스도 끝이겠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울화가 치밀었던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김 비서는 슬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다시 상무실로 들어섰다.
“오늘 별다른 일은 없으시지만 오후에 비서 최종 면접이 있습니다.”
최종 면접이 있다는 김 비서의 말에 진서는 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김 비서님 드디어 해방되시겠네요. 결과가 어찌 될 진 모르지만 인수인계는 확실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물론입니다. 벌써 다 준비…… 아니, 제 말은…….”
“됐어요. 미리 해 두면 좋죠, 뭐. 이만 나가 보세요.”
“네.”
김 비서가 나가자 진서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상무로 앉은 지 2년째인데 족히 열 번은 더 바뀐 것 같았다. 물론 비서가 자주 바뀌는 데는 그녀 본인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나름의 스트레스가 컸던 터라 본의 아니게 제일 가까운 비서들에게 짜증 부리며 그들을 힘들게 했다. 모르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서는 서운했다. 그들은 어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저는 가끔 기분도 맞춰 주고, 때론 근무 시간도 줄여 주며 편의를 봐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이 들라치면 돌아오는 것은 사직서였다. 몇 번 겪다 보니 진서의 마음도 굳게 닫혀 버렸다. 차라리 이런 일이 비일비재해 회장 귀에게 들어가 자신이 그만두는 편이 회사를 위해서도 낫겠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 여 회장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진서 모르게 매번 비서를 다시 채용을 했고 그녀를 나무랄 뿐이었다.
진서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제 뜻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회사를 이어가 길 바라는 아버지가 야속했다. 게다가 이번엔 여철그룹과 비슷한 수준의 회사를 인수하면서 갑자기 늘어나 버린 업무가 진서는 너무나 벅찼다.
“이번엔 또 얼마나 버티려나.”
새로운 비서를 채용하기도 전이건만 입에선 좋지 않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그녀는 하루 종일 축 처진 어깨를 한 채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