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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깊이 잠든 시간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의 거리는 마치 다른 세상이라도 되는 듯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선혜는 익숙하지 않은 하이힐을 신은 채 다급히 뛰다가 맞은편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다가오던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그 바람에 발목이 옆으로 꺾이면서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그녀는 통증을 호소할 틈도 없이 저와 부딪친 사내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벌게진 눈을 부릅뜨고 시비를 막 걸려던 취객이 일행의 만류에 못 이기는 척 다시 비틀대며 멀어져 갔다. 시비가 붙지 않아 다행이었다. 지난번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가 경찰서까지 간 적이 있는 터라 이번만큼은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쪽 경찰서라면, 수습 기간 내내 지겨울 정도로 마와리(기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은어. 담당 경찰서를 돌며 사건, 사고를 챙기는 것)를 돌았던 곳이잖아.

절대 그런 일은 사양하고 싶다. 선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다시금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곧바로 발목에서 올라온 통증으로 인해 단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몸을 숙였다.

“아야…….”

고개를 숙인 선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발목의 인대를 다친 것인지 발을 딛는 게 힘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접질린 발목을 만져 보았다. 발목이 금세 퉁퉁 부어오른 것인지 평소보다 1.5배는 굵어진 듯싶었다. 선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이런 발목 상태로 오늘 취재를 할 수나 있을까,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엄습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무조건 한다! 이래 봬도 입사 한 달 만에 ‘독종’이란 별명까지 붙었던 우선혜가 고작 발목 좀 삐었다고 나약하게 굴 수야 없지.”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리에 힘을 주고 허리를 폈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체중이 실리면서 발목의 통증이 배가되었다. 선혜는 저절로 찡그려지던 표정을 고치며 두 손을 꽉 쥐었다가 놓았다.

이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도 악착같이 살아 왔다.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었던 열 살 이후로 눈칫밥을 얻어먹으면서도 독종처럼, 그렇게 버티며 하루하루를 채웠다. 그 채워 나간 시간이 있는데, 이제 와서 나약해지면 억울하지.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고는 다리를 절룩이면서도 나름대로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 근처에 다다랐다. 선혜는 휘황찬란한 불빛 아래에 부나방처럼 모여든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갔다. 알싸한 알코올 냄새와 땀에 젖어 짙어진 체취가 코끝을 자극했다.

“잠깐만요. 지나갈게요!”

클럽 밖까지 요란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그녀의 목소리가 금세 묻혀 버렸다. 귓속까지 먹먹하게 만드는 소란함에 선혜는 얼굴을 찡그리며 거듭 목소리를 높였다.

“길을 조금만 비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혜의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꼼짝도 하지 않으려 했다. 저마다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며 클럽 입구 근처에 줄지어 서서 입장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배려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기요. 좀 지나갈…….”

선혜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하지 못하다가 다시금 힘을 내어 제게 몸을 기대다시피 한 누군가를 떠밀었다. 그러나 자그마한 체구로 덩치 큰 사내를 밀어 낸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녀가 한숨을 내쉰 뒤에 다시 한번 힘을 내려는 순간, 인파 속에서 누군가의 팔이 쑥 튀어나오더니 선혜의 손목을 낚아챘다.

“어? 어어?”

선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누군가에게 손목을 붙들린 채 순식간에 사람들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토록 어려웠던 일이 단번에 해결된 것이다. 그리고 그 해결사가 그녀의 눈앞에 서서 짜증을 내며 투덜거렸다.

“야, 우선혜! 너는 도착했으면 곧바로 연락부터 했어야지. 여기서 놀고 있냐? 얼씨구? 게다가 그 요란한 화장은 뭐냐? 꿈에 나올까 두렵다, 인마.”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어요, 선배. 그리고 제 화장한 얼굴이 뭐가 어때서요? 나름대로 신경 써서 했구먼.”

그녀는 저녁 마와리를 돌고 시간이 빠듯한 상황에서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화장한 게 억울해서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방금 선혜를 인파 속에서 꺼내 준 이진형이 콧방귀를 뀌며 어깨를 으쓱였다.

“눈은 시퍼렇고, 입술은 새빨갛고. 딱 ‘조커’ 같은데?”

“진형 선배, 진짜 이럴 거예요!”

그의 말에 발끈한 선혜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만 진형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피식 웃고는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런 그의 앞에서 혼자 열을 내며 화를 내는 것도 우스웠다. 그녀는 금세 어깨를 축 늘어뜨린 뒤, 한숨과 함께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클럽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 확실한 거죠?”

“물론이지. 뒷문으로 가면 빨대(정보 제공하는 취재원을 일컫는 은어)가 나와 있을 거야. 이진형이 보냈다고 하면 돼. 야, 인마. 넌 진짜 나한테 엎드려 절해도 부족할 판에, 바락바락 대들고 언성이나 높이고 말이지. 자기 나와바리(배정된 취재 구역을 뜻하는 은어)도 아닌 곳에서 후배 취재하는 거 돕겠다고 이러고 있는 선배가 또 있는 줄 알아? 아무리 너랑 내가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라 해도 그렇지.”

“당연히 잘 알죠, 선배. 그래서 제가 선배한테 충성하잖아요. 나중에 삼겹살 10인분 쏠게요.”

선혜가 투덜대는 진형의 말에 냉큼 맞장구를 치고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팔에 팔짱을 슬쩍 꼈다. 법조(법원과 검찰청에 출입하는 기자를 통칭)가 된 지 불과 1년 지났다는데 날렵하던 몸은 어디로 가고 두둑하게 살이 붙은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녀는 진형의 옆구리 쪽을 장난스럽게 찌르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선배, 다이어트 좀 해야겠어요? 윤경 언니가 살 쪘다고 구박 안 해요?”

“걔는 나 살 찐 줄 몰라. 요새 얼굴 못 본 지 꽤 됐거든. 거의 검찰청 앞에서 24시간 뻗치기(취재를 위하여 계속 한 곳에서 대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은어) 했잖냐. 얼굴 볼 새가 어디 있어?”

진형이 살짝 눈을 찡그리며 턱을 긁적였다. 애인 얘기가 나오니 금세 그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런데 걔가 어디서 법조 쪽이 힘들단 얘기를 들었는지 요 며칠 툭하면 걱정하느라 메시지 보내고 난리다, 난리.”

그는 짐짓 뿌듯한 얼굴로 제 애인 자랑을 은근히 덧붙였다. 선혜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저러니 회사 내에서도 팔불출이라 소문이 파다하게 났지, 싶었다.

“윤경 언니가 나중에 선배 보고 배신감 느끼는 거 아니에요? 고생해서 피골이 상접한 줄 알았던 남친이 뒤룩뒤룩 살쪄서 나타나면 배신감 들 거 같은데.”

“그러니까 억울한 거지. 이게 몸 편하고 마음 편해서 찐 살이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만날 크림빵만 꾸역꾸역 먹어 대느라 붙은 살이요, 취재원 비위 맞추느라 거의 하루도 안 빠지고 폭탄주 마시다가 붙은 살인데.”

진형은 선혜의 말에 억울하다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고등학생 때만 하더라도 날렵한 스타일이었던 학교 선배는 어느새 후덕한 모습의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물론 진형 본인이야 절대 ‘아저씨’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오늘 정말 감사해요, 선배.”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법조 출입 기자가 되고 난 뒤에 한층 더 바빠진 진형의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비록 자신은 이제 겨우 수습을 면한 신입 기자라고는 하지만, 선임 기자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뛰어다니고 체력의 한계를 넘는 상황을 겪으며 취재를 하러 다니는지 숱하게 봐 온 터였다. 더구나 법조 출입 기자 쪽은 아예 사생활을 포기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악명 높지 않던가.

“됐어, 인마. 고마우면 네 이름 걸고 제대로 특종 하나 건져 봐. 우리 차장이랑 부장이 늘 입에 달고 사는 거 있잖아. 도꼬다이(특종을 뜻하는 은어). 그놈의 도꼬다이 타령 때문에 가끔은 환청까지 들릴 지경이라니까.”

진형이 괜히 멋쩍은 얼굴로 툴툴대며 데스크(기사를 수정하고 편집하는 간부를 의미) 흉을 보았다. 선혜가 피식 웃고는 짐짓 다부진 표정으로 대꾸했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선배. 아주 제대로, 쾅, 하고 터뜨릴 테니까.”

다름 아닌 대진그룹이 얽혀 있는 정경유착 건이니 말이다. 선혜의 우쭐한 표정을 보던 진형이 미간을 찡그리더니 이내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뭐든지 신중하게 해. 특종 잡겠다고 물불 못 가리고 뛰어들었다가 네 이름을 단독 특종 기사 하단에서 보는 대신, 부고란에서 보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는 진심으로 염려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 고등학교 후배이자 이제는 같은 신문사 후배가 된 선혜가 의욕을 앞세웠다가 혹여 위험해지기라도 할까 싶어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진형을 향해 유쾌하게 웃어 보인 뒤에 클럽의 뒷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야! 우선혜! 조심…….”

진형이 한 번 더 당부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선혜가 손을 들어 인사하듯 좌우로 흔들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잠시 그 자리를 응시하다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리를 저는 것 같던데 또 어디서 다친 거래? 하여간 일하는 것 빼면 허당이란 말이야. 뭐, 어쨌든 알아서 잘하겠지. 어린애도 아닌데.”

사실, 어린애가 아니라 더 걱정이기는 하지만. 진형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든지 어설프기 마련인 수습 기간에도 야무지게 저 할 일을 잘 해낸 만큼, 이번에도 그녀가 잘 해낼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휴우, 믿자! 믿어! 그렇지 않으면 나까지 왕창 깨질 텐데.”

진형에게 이번 일은 모험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어디도 아닌, 대진그룹이 연관되어 있는 일이었다. 재계 1위인 도경만큼은 아니더라도 2인자로서 확고히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곳이 바로 대진이다. 그런 대진그룹의 치부가 드러날지도 모르는 일인데, 애당초 수습 딱지를 뗀 지 얼마 안 된 말진(업무를 공유하는 같은 팀의 막내 기자를 의미하는 은어)에게 그 일을 배당할 정도로 간 큰 선임이 있을 리 만무했다. 즉, 선혜가 이번 취재를 데스크나 선배들 몰래 독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저럴 땐 배짱 좋단 말이야. 다른 땐 맹하기 그지없는 녀석이.”

혼잣말을 중얼대던 진형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여동생 같은 녀석이라 괜히 마음이 더 쓰인 탓이다. 그렇지만 그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선혜 스스로 원하지도 않는 동정심이나 안쓰러움을 느끼는 건 되레 그녀를 모욕하는 것일 터였다.

“그래, 내가 누구를 걱정하냐. 내 앞가림이나 잘해야지. 그나저나 윤경이한테 연락하기는 너무 늦은 시간인가? 그냥 찜질방에 갔다가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하나.”

진형은 어느새 새벽 4시를 향해 가고 있는 시간을 확인한 뒤, 찌뿌드드한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기지개를 켜고는 발길을 돌렸다. 눈 잠깐 붙이고 나면 금방 날이 밝을 테니 피로를 풀기에도 바쁠 게 분명했다.





chapter 1



담배 끝이 빨갛게 타들어갔다. 도준은 손가락에 걸려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끈 뒤,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난잡한 광경에 무심히 시선을 던졌다.

“야, 너무 헐렁하잖아. 조금 더 조여 봐.”

최태혁이 여자의 엉덩이를 찰싹, 소리 나게 때리며 명령했다. 그러고는 다시 여자의 음부에 제 성기를 문지르며 짐승처럼 끙끙거렸다.

미친놈, 제 물건 작은 것도 자랑이냐?

여자한테 헐렁하다고 뭐라 할 게 아니라, 그만큼 제 물건이 작은 걸 사죄해야 할 판에 외려 조여 보라니. 덜떨어진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

도준은 기가 막힌다는 듯 피식거리며 고개를 가로젓고 또다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여자에게 들러붙어 헉헉거리는 최태혁의 모습이 흡사 흘레붙은 개를 연상시켰다.

어느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대진그룹의 차남, 최태혁이 이렇듯 여자 엉덩이에 제 몸을 비벼대며 헐떡이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깔끔하고 세련된 외모로 한때 모델 활동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도준은 미간을 좁힌 채 최태혁의 벌거벗은 몸을 혐오스럽다는 듯 쳐다보다가 이내 눈을 돌렸다. 그러나 눈을 돌린 보람도 없이 그곳에서도 음란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흐으, 그래. 조금 더 깊숙이 빨아 봐.”

흰머리가 희끗한 사내가 자식뻘 될 법한 젊은 여자의 머리를 제 사타구니에 밀어붙이며 신음을 흘렸다. 젖은 소리와 함께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건드렸다. 남들보다 수백, 수천 배는 뛰어난 후각을 갖고 있는 도준으로서는 비위가 상하다 못해 뒤집힐 것만 같았다.

하여간 예전이나 지금이나 인간들 더럽게 노는 건 변하지 않았다니까.

그는 헛웃음을 뱉으며 소파 등받이에 기댄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가 어둑한 허공으로 올라가 이내 사라졌다. 그 연기의 희미한 흔적을 공허한 시선으로 좇던 도준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룸 안에 있던 어느 누구도 그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만약 알아차렸다 해도 본인들이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의 눈이 붉게 변할 리 없다는 건 기본 상식이다. 아무리 술과 약에 취해 여자를 안고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런 상식 정도는 머릿속에 남아 있을 터였다.

다만, 그 상식이 도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게 숨겨진 진실일 테지만 말이다.

그는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