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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도준이 작게 실소를 내뱉고는 뒤로 젖히고 있던 고개를 똑바로 했다. 그리고 담배를 비벼 끈 뒤에 다시 술잔을 입 안에 털어 넣으려는데 룸 밖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지?
VIP 전용 룸이기에 이쪽으로 다른 사람이 올 리 없었다. 룸 안에서 호출하기 전까지는 종업원들조차 근처에 얼씬할 수도 없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흠…….”
도준이 눈을 가늘게 뜬 채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룸 안을 둘러보았다. 박원식과 최태혁, 두 사람 모두 바깥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여자와의 정사에 푹 빠져 있는 모양새였다.
하기야 평범한 인간이라면 방음이 철저하다고 알려진 공간 너머의 인기척을 알아차리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그는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팔짱을 낀 채 소파에 몸을 기댔다. 지루함을 견딜 수 없어 이쯤에서 일어나 볼까 궁리하던 참인데, 조금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할 듯싶었다.
‘뭔가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것 같기도 한데, 그걸 놓칠 수야 없지.’
도준의 입꼬리가 슬쩍 비틀려 올라간 것과 동시에 출입문 바로 밖에서 누군가가 잔뜩 긴장하여 숨을 들이쉬는 게 들렸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애당초 듣는 게 불가능한 소리였다. 숨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런 적막한 공간에서라면 모를까. 아니, 그런 공간이라 하더라도 문 너머의 숨소리까지 들릴 리 없었다.
적어도 ‘인간’일 경우에는 말이다.
그는 다시금 시선을 돌려 룸 안에 있는 이들을 쳐다보았다. 서로 뒤엉켜 있는 몸뚱어리들을 조소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누군가가 카트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합…… 흐읍!”
문 밖에서 한참 서서 숨을 몰아쉬었던 장본인은 자그마한 여자였나 보다. 도준이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는 룸 안의 광경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방금 들린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클럽 직원임을 알리는 유니폼 차림의 여자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입을 벙긋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여자만큼, 아니, 여자보다 더 눈을 크게 부릅뜨고 도준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본 건 말이다. 어떻게 그대가…….
여자를 보던 그의 얼굴이 참혹하다 싶을 만큼 심하게 일그러졌다. 두 번 다시 찾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바로 그 여자가 제 눈앞에 스스로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가 그토록 당신을 간절히 원했을 땐 단 한 번도 먼저 다가온 적 없었으면서. 이제 와서, 왜 내 눈앞에 나타난 건데!’
물론 여자가 일부러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게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옷차림을 보아 하니 이곳에서 일하는 것일 테고, 카트를 끌고 온 걸 보면 룸 안의 테이블을 새로 세팅하기 위한 목적으로 들어온 것이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그런 것들을 머리 굴려 추측하기에 앞서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알 리 없었다.
여자는 이미 몇 번이나 환생을 거듭하였으니.
오래전 생의 인연을 기억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처럼 수백 년을 살아가는 뱀파이어가 아닌 이상 말이다.
그 모든 걸 머리로 생각하면서도 여자를 바라보는 도준의 눈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하지만 여자는 그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채 바들바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에 굉장히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충격을 받다니?
그제야 도준이 이맛살을 좁히며 여자가 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냉큼 혀를 차며 인상을 구겼다. 짐승처럼 들러붙어 있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젠장!”
도준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눈앞을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호출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아무리 직원이라 해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말입니다. ……강지은 씨.”
오랫동안 살아온 세월 덕분일까. 그는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들썩이는 가슴속과 달리 겉으로는 냉정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도준이 가까스로 침착하게 말을 걸며 여자의 유니폼에 달려 있는 명찰을 확인한 뒤, 이름을 덧붙여 불렀다.
강지은.
도준이 속으로 여자의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어쩐지 이름이 입 안에서 서걱대며 굴러다니는 느낌이 생소하고 불편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여자의 첫 이름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여러 번 환생을 거듭할 때마다 바뀌었던 이름 또한 그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각기 다른 이름은 언제나 그에게 그립고 애틋한 감정을 주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강지은’이란 이름은 전혀 그런 감정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에 대한 의구심을 풀지 못해 도준의 미간이 좁혀지려는 찰나, 여자가 그때까지도 소위 ‘멘붕’ 상태에 가까웠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붕붕 젓더니 이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아, 저기…… 죄송합니다. 룸을 잘못 찾아 들어왔어요!”
강지은, 아니, ‘우선혜’는 방금 제 앞의 남자가 꺼낸 물음을 상기하고는 부랴부랴 변명을 둘러댔다.
진형이 소개해 준 사람을 통해 클럽 안에 잠입하는 것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늘 비번인 여직원의 유니폼까지 몰래 빌려 입고 나니 클럽 여기저기를 기웃거려도 그 누구의 의심을 살 일도 없었다. 두어 시간 전에 몰래 들어와 녹음기를 설치했을 때도 방해를 일절 받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방심했던 듯싶다. VIP 전용 룸의 보안을 일반 룸과 똑같이 여기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는 난감함을 느끼며 거듭 고개를 숙이고 90도 넘게 허리를 숙였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런 식으로 어이없이 들킬 수는 없어!’
선혜는 제 앞에 서 있는 남자의 구두코를 보며 절박한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터라 남자의 시선을 직접 마주한 건 아니지만,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누구였지?
선혜는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기 위해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남자의 얼굴은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어두운 조명 탓에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점도 있지만, 그보다 룸 안에 펼쳐진 난잡한 광경을 보고 기겁한 탓에 미처 그를 확인하지 못한 이유가 더 컸다.
물론 그렇다 해도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있었다. 남자가 자신이 취재하려던 대진그룹의 최태혁이나 박원식 의원은 아니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최태혁과 박원식은 조금 전의 난잡한 광경 속에서 이미 보았으니 말이다.
그럼 누구란 거야?
그녀가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궁리를 하고 있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사과는 이제 그만해도 됩니다. 고개 들어요.”
“아, 예!”
선혜는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곧바로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쳐다보고 있던 남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장도준.
그제야 그녀는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경 엔터프라이즈’의 최연소 상무가 바로 눈앞의 남자, 장도준이다. 신문의 경제 섹션에 툭하면 등장하는 재계의 주요 인사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기야 그 정도 거물급이니 이 자리에 동석을 한 것이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란 생각에 저절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장도준.
그리고 최태혁과 박원식.
그들의 내밀한 속사정까지야 완벽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기자들 사이에서 ‘장도준’은 꽤 희귀한 인물 중 하나였다.
삼십 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본인의 능력으로 ‘도경 엔터프라이즈’의 상무 직책까지 올라간 남자.
도경그룹 후계자와 가까운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낙하산 운운하는 구설에 오른 적도 있으나 상무로 승진하자마자 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어 그의 뒤에서 수군거리던 이들을 부끄럽게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점만으로 장도준이 기자들 사이에서 희귀하단 평을 듣는 건 아니었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외부에 전혀 드러나지 않은 사생활과 스캔들 하나 없는 완벽함이 그런 평가를 불러온 이유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젊은 나이에 거머쥔 성공에 취하여 금세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다. 본인이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주변의 유혹이 극심한 터라 자칫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장도준은 예외였다. 그걸 인정할 수 없었던 어느 선배 기자가 한동안 그의 주변을 맴돌았지만 건진 거라고는 화보 수준의 사진 몇 장이 전부였다고 했던가. 선혜는 동료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주고받았던 얘기를 떠올렸다.
‘웃으며 할 얘기가 아니었잖아!’
그녀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도준의 눈을 마주하는 게 부담스러워 저절로 그의 시선을 피해 다른 쪽을 보았다. 그러나 선혜는 제 눈에 비친 광경에 금세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도준의 존재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광경이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시야 안에 들어왔다. 그나마 그에게 가려져 온전한 광경이 아니라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상황이었다.
선혜는 도준의 뒤쪽으로 보이는 남녀의 벌거벗은 몸 때문에 부르르 몸을 떨고는 다시 눈을 굴려 천장을 쳐다보았다.
“강지은 씨.”
그 순간, 도준이 다시금 그녀를 불렀다. 그와 동시에 선혜의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아, 그래. 나는 지금 ‘강지은’이잖아.
그녀는 자신이 왜 이곳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잠입했는지, 그 이유를 다시 한번 상기했다.
바로 대진그룹과 정치권의 유착관계 의혹에 대해 파헤치고자 한 것이 아니던가.
데스크에서 알았더라면 수습 딱지를 뗀 지 얼마 안 된 피라미 녀석이 덥석 물기에는 위험한 사안이라며 반대했을 터였다. 그래서 진형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몰래 취재를 해 온 것이고.
정신 차리자, 우선혜!
아직 상황이 끝난 게 아니잖아.
녹음기를 설치했다고 다 된 일이 아니라고.
선혜는 저도 모르게 풀어졌던 마음을 다잡은 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과 달리 그녀의 눈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그 변화를 알아차린 도준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예, 상무님.”
“……나를 아는가 봅니다?”
“뉴스에서 종종 뵙는 얼굴인걸요.”
그녀가 차분하면서도 상냥한 웃음과 함께 그의 말에 대꾸했다. 가슴은 미친 듯 쿵쾅대며 뛰고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선혜의 태도는 고객을 대하는 종업원의 정중한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아…… 내가 편견을 갖고 있었군요. 이런 곳에서 근무하는 아가씨라면 경제 기사 같은 건 관심 없을 거라 생각해서. 미안합니다.”
도준이 그녀를 쳐다보다가 가볍게 웃더니 이내 매너 좋게 사과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뒤쪽을 힐끔 쳐다보며 눈짓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하기야 저렇듯 반대의 경우도 있으니 말이죠.”
“……흠, 흐흠. 뭐, 그, 그렇죠.”
선혜는 여전히 여자의 몸 깊숙이 성기를 박아 넣으며 허리를 움직이기 바쁜 남자들을 보고는 민망함을 헛기침에 담아 털어 내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다시 카트를 뒤쪽으로 물리며 도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상무님. 실례를 저지른 점,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죠. 괜히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요.”
도준이 손사래를 치며 그녀의 사과를 받고는 자연스럽게 자리로 돌아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선혜는 자신에게서 관심을 끊은 듯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는 그를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카트를 끌고 뒤쪽으로 움직였다.
‘여기 있다!’
선혜의 눈이 룸 내부의 벽 아래쪽으로 향했다가 반짝였다. 소파와 벽 사이에 자신이 설치해 두었던 녹음기가 온전한 모습으로 붙어 있는 걸 확인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는 다시 시선을 들어 룸 안을 살폈다. 여전히 박원식과 최태혁은 여자와의 정사에 빠져 있는 터라 제 존재 자체를 아예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나마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면, 방금 전 자신과 대화까지 나눈 장도준이었다. 그렇지만 그 역시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일개 종업원에게 관심을 둘 이유가 어디 있을까.
다행이다.
선혜가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얼굴을 찡그리고는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갑자기 속이 꽉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답답해졌다.
‘왜 이렇지? 긴장해서 그런가.’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가슴을 거듭 쓸어내리며 다시금 도준을 쳐다보았다. 스스로 깨닫지는 못했으나 도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한없이 그리운 누군가를 보듯 깊이 침잠되어 있었다.
‘됐어. 지금 중요한 건 녹음기를 수거해서 무사히 빠져나가는 거잖아. 밖에 나가면 편의점 가서 소화제라도 사 먹지, 뭐.’
그녀는 잡념을 털어 내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뒤, 조심스럽게 룸 안을 재차 살피고는 허리를 구부렸다. 손끝에 걸린 녹음기를 꽉 움켜쥔 선혜의 얼굴에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우연이었다. 자신이 이 일에 대하여 취재를 하게 된 계기는 딱히 의도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사소한 사건이었을 뿐이다.
도준이 작게 실소를 내뱉고는 뒤로 젖히고 있던 고개를 똑바로 했다. 그리고 담배를 비벼 끈 뒤에 다시 술잔을 입 안에 털어 넣으려는데 룸 밖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지?
VIP 전용 룸이기에 이쪽으로 다른 사람이 올 리 없었다. 룸 안에서 호출하기 전까지는 종업원들조차 근처에 얼씬할 수도 없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흠…….”
도준이 눈을 가늘게 뜬 채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룸 안을 둘러보았다. 박원식과 최태혁, 두 사람 모두 바깥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여자와의 정사에 푹 빠져 있는 모양새였다.
하기야 평범한 인간이라면 방음이 철저하다고 알려진 공간 너머의 인기척을 알아차리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그는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팔짱을 낀 채 소파에 몸을 기댔다. 지루함을 견딜 수 없어 이쯤에서 일어나 볼까 궁리하던 참인데, 조금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할 듯싶었다.
‘뭔가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것 같기도 한데, 그걸 놓칠 수야 없지.’
도준의 입꼬리가 슬쩍 비틀려 올라간 것과 동시에 출입문 바로 밖에서 누군가가 잔뜩 긴장하여 숨을 들이쉬는 게 들렸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애당초 듣는 게 불가능한 소리였다. 숨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런 적막한 공간에서라면 모를까. 아니, 그런 공간이라 하더라도 문 너머의 숨소리까지 들릴 리 없었다.
적어도 ‘인간’일 경우에는 말이다.
그는 다시금 시선을 돌려 룸 안에 있는 이들을 쳐다보았다. 서로 뒤엉켜 있는 몸뚱어리들을 조소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누군가가 카트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합…… 흐읍!”
문 밖에서 한참 서서 숨을 몰아쉬었던 장본인은 자그마한 여자였나 보다. 도준이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는 룸 안의 광경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방금 들린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클럽 직원임을 알리는 유니폼 차림의 여자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입을 벙긋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여자만큼, 아니, 여자보다 더 눈을 크게 부릅뜨고 도준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본 건 말이다. 어떻게 그대가…….
여자를 보던 그의 얼굴이 참혹하다 싶을 만큼 심하게 일그러졌다. 두 번 다시 찾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바로 그 여자가 제 눈앞에 스스로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가 그토록 당신을 간절히 원했을 땐 단 한 번도 먼저 다가온 적 없었으면서. 이제 와서, 왜 내 눈앞에 나타난 건데!’
물론 여자가 일부러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게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옷차림을 보아 하니 이곳에서 일하는 것일 테고, 카트를 끌고 온 걸 보면 룸 안의 테이블을 새로 세팅하기 위한 목적으로 들어온 것이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그런 것들을 머리 굴려 추측하기에 앞서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알 리 없었다.
여자는 이미 몇 번이나 환생을 거듭하였으니.
오래전 생의 인연을 기억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처럼 수백 년을 살아가는 뱀파이어가 아닌 이상 말이다.
그 모든 걸 머리로 생각하면서도 여자를 바라보는 도준의 눈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하지만 여자는 그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채 바들바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에 굉장히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충격을 받다니?
그제야 도준이 이맛살을 좁히며 여자가 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냉큼 혀를 차며 인상을 구겼다. 짐승처럼 들러붙어 있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젠장!”
도준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눈앞을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호출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아무리 직원이라 해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말입니다. ……강지은 씨.”
오랫동안 살아온 세월 덕분일까. 그는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들썩이는 가슴속과 달리 겉으로는 냉정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도준이 가까스로 침착하게 말을 걸며 여자의 유니폼에 달려 있는 명찰을 확인한 뒤, 이름을 덧붙여 불렀다.
강지은.
도준이 속으로 여자의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어쩐지 이름이 입 안에서 서걱대며 굴러다니는 느낌이 생소하고 불편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여자의 첫 이름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여러 번 환생을 거듭할 때마다 바뀌었던 이름 또한 그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각기 다른 이름은 언제나 그에게 그립고 애틋한 감정을 주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강지은’이란 이름은 전혀 그런 감정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에 대한 의구심을 풀지 못해 도준의 미간이 좁혀지려는 찰나, 여자가 그때까지도 소위 ‘멘붕’ 상태에 가까웠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붕붕 젓더니 이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아, 저기…… 죄송합니다. 룸을 잘못 찾아 들어왔어요!”
강지은, 아니, ‘우선혜’는 방금 제 앞의 남자가 꺼낸 물음을 상기하고는 부랴부랴 변명을 둘러댔다.
진형이 소개해 준 사람을 통해 클럽 안에 잠입하는 것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늘 비번인 여직원의 유니폼까지 몰래 빌려 입고 나니 클럽 여기저기를 기웃거려도 그 누구의 의심을 살 일도 없었다. 두어 시간 전에 몰래 들어와 녹음기를 설치했을 때도 방해를 일절 받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방심했던 듯싶다. VIP 전용 룸의 보안을 일반 룸과 똑같이 여기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는 난감함을 느끼며 거듭 고개를 숙이고 90도 넘게 허리를 숙였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런 식으로 어이없이 들킬 수는 없어!’
선혜는 제 앞에 서 있는 남자의 구두코를 보며 절박한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터라 남자의 시선을 직접 마주한 건 아니지만,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누구였지?
선혜는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기 위해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남자의 얼굴은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어두운 조명 탓에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점도 있지만, 그보다 룸 안에 펼쳐진 난잡한 광경을 보고 기겁한 탓에 미처 그를 확인하지 못한 이유가 더 컸다.
물론 그렇다 해도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있었다. 남자가 자신이 취재하려던 대진그룹의 최태혁이나 박원식 의원은 아니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최태혁과 박원식은 조금 전의 난잡한 광경 속에서 이미 보았으니 말이다.
그럼 누구란 거야?
그녀가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궁리를 하고 있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사과는 이제 그만해도 됩니다. 고개 들어요.”
“아, 예!”
선혜는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곧바로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쳐다보고 있던 남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장도준.
그제야 그녀는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경 엔터프라이즈’의 최연소 상무가 바로 눈앞의 남자, 장도준이다. 신문의 경제 섹션에 툭하면 등장하는 재계의 주요 인사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기야 그 정도 거물급이니 이 자리에 동석을 한 것이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란 생각에 저절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장도준.
그리고 최태혁과 박원식.
그들의 내밀한 속사정까지야 완벽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기자들 사이에서 ‘장도준’은 꽤 희귀한 인물 중 하나였다.
삼십 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본인의 능력으로 ‘도경 엔터프라이즈’의 상무 직책까지 올라간 남자.
도경그룹 후계자와 가까운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낙하산 운운하는 구설에 오른 적도 있으나 상무로 승진하자마자 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어 그의 뒤에서 수군거리던 이들을 부끄럽게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점만으로 장도준이 기자들 사이에서 희귀하단 평을 듣는 건 아니었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외부에 전혀 드러나지 않은 사생활과 스캔들 하나 없는 완벽함이 그런 평가를 불러온 이유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젊은 나이에 거머쥔 성공에 취하여 금세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다. 본인이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주변의 유혹이 극심한 터라 자칫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장도준은 예외였다. 그걸 인정할 수 없었던 어느 선배 기자가 한동안 그의 주변을 맴돌았지만 건진 거라고는 화보 수준의 사진 몇 장이 전부였다고 했던가. 선혜는 동료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주고받았던 얘기를 떠올렸다.
‘웃으며 할 얘기가 아니었잖아!’
그녀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도준의 눈을 마주하는 게 부담스러워 저절로 그의 시선을 피해 다른 쪽을 보았다. 그러나 선혜는 제 눈에 비친 광경에 금세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도준의 존재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광경이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시야 안에 들어왔다. 그나마 그에게 가려져 온전한 광경이 아니라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상황이었다.
선혜는 도준의 뒤쪽으로 보이는 남녀의 벌거벗은 몸 때문에 부르르 몸을 떨고는 다시 눈을 굴려 천장을 쳐다보았다.
“강지은 씨.”
그 순간, 도준이 다시금 그녀를 불렀다. 그와 동시에 선혜의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아, 그래. 나는 지금 ‘강지은’이잖아.
그녀는 자신이 왜 이곳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잠입했는지, 그 이유를 다시 한번 상기했다.
바로 대진그룹과 정치권의 유착관계 의혹에 대해 파헤치고자 한 것이 아니던가.
데스크에서 알았더라면 수습 딱지를 뗀 지 얼마 안 된 피라미 녀석이 덥석 물기에는 위험한 사안이라며 반대했을 터였다. 그래서 진형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몰래 취재를 해 온 것이고.
정신 차리자, 우선혜!
아직 상황이 끝난 게 아니잖아.
녹음기를 설치했다고 다 된 일이 아니라고.
선혜는 저도 모르게 풀어졌던 마음을 다잡은 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과 달리 그녀의 눈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그 변화를 알아차린 도준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예, 상무님.”
“……나를 아는가 봅니다?”
“뉴스에서 종종 뵙는 얼굴인걸요.”
그녀가 차분하면서도 상냥한 웃음과 함께 그의 말에 대꾸했다. 가슴은 미친 듯 쿵쾅대며 뛰고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선혜의 태도는 고객을 대하는 종업원의 정중한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아…… 내가 편견을 갖고 있었군요. 이런 곳에서 근무하는 아가씨라면 경제 기사 같은 건 관심 없을 거라 생각해서. 미안합니다.”
도준이 그녀를 쳐다보다가 가볍게 웃더니 이내 매너 좋게 사과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뒤쪽을 힐끔 쳐다보며 눈짓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하기야 저렇듯 반대의 경우도 있으니 말이죠.”
“……흠, 흐흠. 뭐, 그, 그렇죠.”
선혜는 여전히 여자의 몸 깊숙이 성기를 박아 넣으며 허리를 움직이기 바쁜 남자들을 보고는 민망함을 헛기침에 담아 털어 내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다시 카트를 뒤쪽으로 물리며 도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상무님. 실례를 저지른 점,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죠. 괜히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요.”
도준이 손사래를 치며 그녀의 사과를 받고는 자연스럽게 자리로 돌아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선혜는 자신에게서 관심을 끊은 듯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는 그를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카트를 끌고 뒤쪽으로 움직였다.
‘여기 있다!’
선혜의 눈이 룸 내부의 벽 아래쪽으로 향했다가 반짝였다. 소파와 벽 사이에 자신이 설치해 두었던 녹음기가 온전한 모습으로 붙어 있는 걸 확인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는 다시 시선을 들어 룸 안을 살폈다. 여전히 박원식과 최태혁은 여자와의 정사에 빠져 있는 터라 제 존재 자체를 아예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나마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면, 방금 전 자신과 대화까지 나눈 장도준이었다. 그렇지만 그 역시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일개 종업원에게 관심을 둘 이유가 어디 있을까.
다행이다.
선혜가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얼굴을 찡그리고는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갑자기 속이 꽉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답답해졌다.
‘왜 이렇지? 긴장해서 그런가.’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가슴을 거듭 쓸어내리며 다시금 도준을 쳐다보았다. 스스로 깨닫지는 못했으나 도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한없이 그리운 누군가를 보듯 깊이 침잠되어 있었다.
‘됐어. 지금 중요한 건 녹음기를 수거해서 무사히 빠져나가는 거잖아. 밖에 나가면 편의점 가서 소화제라도 사 먹지, 뭐.’
그녀는 잡념을 털어 내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뒤, 조심스럽게 룸 안을 재차 살피고는 허리를 구부렸다. 손끝에 걸린 녹음기를 꽉 움켜쥔 선혜의 얼굴에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우연이었다. 자신이 이 일에 대하여 취재를 하게 된 계기는 딱히 의도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사소한 사건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