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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저녁 마와리를 돌다가 접한, 폭행 관련 사건.
경찰서를 돌아다니다 보면 하룻밤 사이에도 숱하게 접하는 게 바로 폭행 사건이다. 기사로 나가는 것보다 킬(Kill: 기삿거리가 될 만한 게 아니라 버리는 것을 의미)되는 게 훨씬 많은 것이 폭행 사건이기에, 처음에는 그 사건 역시 그런 흔한 일들 중 하나로 치부되었다.
그 폭행 사건에 최태혁이 얽혀 있다는 걸 알기 직전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던 모 국회의원의 자식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다. 거기서부터 파고들어 간 일이 이만큼 커진 것이다.
취재원을 통해 국회의원 박원식과 대진그룹 차남 최태혁이 이 회원제 클럽 내에 별도로 마련된 VIP 전용 룸에서 만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뒤, 그녀는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그들이 만나기 전에 먼저 움직여 증거 보강을 위한 상황을 깔아 놓아야 했으니 말이다.
이제 그 결실을 얻는 일만 남았다.
녹음기를 움켜쥔 선혜의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클럽 직원을 가장하여 들어온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클럽 내에서, 더구나 VIP들을 위하여 마련된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을 터였다. 설령 자신이 들켜서 어떤 꼴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러니 진형이 몇 번이나 염려하여 자신을 만류한 마음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조금만 기다리라고요, 선배. 내가 제대로 특종 하나 갖고 출근할 테니까.’
그녀는 술렁거리는 속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천천히 허리를 폈다.
바로 그때였다.
“어? 넌 뭐야? 언제 들어온 거야? 아니, 허락도 없이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여자의 가슴을 빨던 박원식이 선혜의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호통치듯 외쳤다. 그와 동시에 선혜의 몸이 얼어붙었다.
아차!
그녀는 제 실수를 깨닫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자신의 행동이 그의 의심을 불러올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틀린 건 아니었는지 박원식이 얼굴을 찡그린 채 여자를 밀치고는 몸을 일으켰다.
“뭐야, 이거? 수상한데? 야, 너 뭔데 들어온 거야? 게다가 방금 뭘 주웠던 거 같은데…… 손에 쥐고 있는 게 뭐야? 이리 내놔 봐.”
박원식은 바지 밖으로 튀어나온 성기를 옷 속으로 집어넣을 생각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선혜를 향해 다가왔다. 졸지에 남자의 성기를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된 선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방금 박원식이 내놓으라고 말한 녹음기를 더욱 힘주어 쥔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거, 진짜 수상한 년이네. 야, 너 말이야. 여기서 일하는 거 아니지? 응? 어디서 누가 보냈어? 보아 하니 피도 안 마른 애송이 같은데.”
박원식은 노련했다. 거의 삼십여 년을 정치판에서 굴렀으니 당연할 법한 얘기였다. 이제 겨우 수습을 면한 신입 기자가 상대하기에는 과한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간파한 박원식이 입꼬리를 비틀어 웃고는 선혜를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다가온 만큼 선혜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아 입술을 꾹 깨문 채 녹음기를 움켜쥔 손을 바르르 떨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에 대한 답은 떠오르지 않는 게 문제였다.
“멀쩡한 몸뚱어리로 나가고 싶으면 얌전히 내놔, 아가씨. 보아 하니 녹음기, 아니면 도청기인 것 같은데 말이야. 겨우 그런 걸로 나, 박원식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응? 누가 무슨 대가로 아가씨를 꾀여 낸 건지 모르지만, 이쯤에서 내 말 듣는 게 좋을 거야.”
박원식이 그녀의 손에 쥐여 있는 녹음기의 끄트머리 부분을 보고는 억지로 실룩실룩 웃어 보이며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의원님? 장 상무, 대체 무슨 일이에요?”
룸 안의 돌변한 분위기를 뒤늦게 알아차린 최태혁이 여자의 몸 안에 사정한 뒤,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박원식과 도준을 향해 연이어 물음을 던졌다. 그때까지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도준이 자신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주먹을 느슨하게 풀고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룸을 잘못 찾아 들어온 직원인데, 뭔가…… 의원님께서 오해를 하신 것 같군요.”
“오해?”
“예, 오해 말입니다. 의원님.”
도준은 넥타이의 매듭을 손으로 당겨 느슨하게 푼 뒤,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힘주어 주먹을 쥐었던 탓인지 손톱이 파고들었던 손바닥이 쓰라렸다. 그러나 그는 덤덤한 얼굴로 선혜와 박원식을 향해 다가갔다.
“의원님, 옷부터 먼저 추스르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저 직원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같은 사내의 물건을 보고 대화하기가 조금…….”
도준이 농담처럼 웃으며 건넨 말에 박원식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바지춤을 추슬렀다. 흉물스러운 성기가 옷 속으로 감춰지고 나니 선혜의 얼굴에도 그나마 핏기가 조금 돌았다. 아니, 그것보다는 도준이 끼어들면서 팽팽하게 당겨졌던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진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길 빠져 나갈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선혜의 눈이 흔들렸다. 박원식뿐만 아니라 최태혁까지도 저를 의심 가득한 얼굴로 보고 있는데, 무사히 나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정신 차려! 불가능하다고 미리 포기할래? 그 따위 정신으로 무슨 기자가 되겠단 거야!
그녀는 꺾이려는 무릎에 힘을 주어 버티고 서서 속으로 절박하게 외쳤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그 오래된 격언이라도 붙들고 싶었다.
그 간절한 마음에 응답이라도 온 것일까.
선혜는 자신을 돌아보며 싱긋 웃는 도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흠칫 놀라는 사이에 그가 다시 시선을 돌리더니 박원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 저 직원은 룸을 잘못 찾아 들어왔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 전에 제가 직접 확인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잘못, 들어왔다고? 장 상무가 확인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의원님.”
“하지만! 녹음기인지 도청기인지를 갖고 있다고, 좀 전에 의원님이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최태혁이 냉큼 도준과 박원식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신 혼자 존재감 없이 구경만 하는 걸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 말에 선혜의 얼굴에서 다시 한번 핏기가 사라지려는 찰나, 도준이 자신의 바지 주머니와 재킷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더니 그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아가씨가 주운 게 혹시 내 휴대전화 아닙니까?”
“……예? 예, 예에?”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선혜를 향해 도준이 다가오는 듯싶더니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그녀의 손에 쥐여 있던 녹음기를 가져가 버렸다.
“……!”
아, 안 되는데!
선혜가 다급한 마음에 입을 열려는 순간, 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역시 내 휴대전화가 맞네요. 그렇지 않아도 어디에 떨어뜨렸나 찾던 중이었는데 다행이군요.”
도준은 그녀에게서 빼앗다시피 한 녹음기를 확인하는 시늉을 하더니 안도했다는 듯 말하며 자신의 재킷 안쪽에 녹음기를 집어넣었다.
어, 어어…….
선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준이 입꼬리를 올려 웃더니 이내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박원식과 최태혁을 돌아보고는 말을 건넸다.
“먼저 가 봐야겠습니다, 의원님. 나중에 연락하죠, 최 전무.”
“아니, 왜 벌써 가시는가?”
박원식이 순식간에 바뀐 상황에 적응을 하지 못한 듯 멍한 얼굴로 눈만 끔뻑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다급히 도준을 붙잡으려 했다. 선혜에 대한 의심이 도준의 말 몇 마디에 풀리기라도 한 듯 그녀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 모습이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깜빡 잊고 있었지 뭡니까.”
도준은 태연한 얼굴로 박원식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최태혁에게도 간단히 인사를 건넨 뒤, 출입문 쪽으로 나가려다가 선혜를 향해 물었다.
“강지은 씨도 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예?”
“호출 들어온 룸에서 난리가 났을 텐데. 아직까지 오지 않았다고.”
그는 피식 웃으며 선혜가 끌고 들어왔던 카트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제야 자신이 변명조로 둘러댔던 말을 다시금 상기한 선혜가 부랴부랴 카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떻게 돌려받지?
카트 손잡이를 잡은 그녀의 손끝이 새하얗게 질렸다. 머릿속을 채운 건 오로지 도준에게 빼앗긴 녹음기뿐이었다. 그 덕분에 위기 상황을 넘겼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된 건 아니었다.
장도준이 대체 무슨 이유로?
그가 재계의 거물급 인사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관심 대상은 아니었다. 자신이 취재하고자 하는 건 대진그룹과 정치권의 유착관계였으니 말이다. 저 녹음기에서 찾으려는 증거 역시 그에 관련된 것뿐이었다.
‘아, 설마!’
도경그룹도 함께 엮어 있었던 건가? 선혜는 눈을 크게 뜨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가정한다면 도준의 행동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도경마저 그렇다니…….’
만약 지금 자신이 가정한 것이 사실이라면, 제대로 된 특종이 될 터였다. 재계 1위의 독보적인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도경그룹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부정한 일, 불미스러운 사건 등에 연관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다양한 미담과 투명한 경영으로 주목을 받았다면 모를까. 그런 도경이 이와 같은 의혹의 주인공 중 하나가 된다면…….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느낄 배신감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 나가요?”
도준의 목소리에 다시금 정신이 들었다. 선혜는 황급히 박원식과 최태혁을 향해 고개를 조아려 한 번 더 사과한 뒤, 카트를 밀고 룸 밖으로 나갔다. 도준이 그녀의 뒤를 느긋하게 따라 나왔다. 가냘픈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곧 아무렇지 않게 선혜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그녀가 흠칫 몸을 떨더니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기, 장 상무님. 좀 전에 가져가신, 그…….”
“녹음기 말입니까?”
“……!”
선혜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도준의 입에서 천연덕스럽게 ‘녹음기’란 말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복도에는 자신과 도준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룸 역시 방음이 철저히 되고 있으니 안쪽 어디에서도 자신과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준처럼 이렇듯 ‘대놓고’ 말을 꺼낼 배짱은 없었다. 그의 대담한 행동에 말문이 막히는 바람에 그녀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자 도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날 밝으면 다시 얘기합시다.”
“뭐, 뭐라고요? 아니, 저기…….”
덤덤하기까지 한 말에 당황한 선혜가 손을 뻗어 그의 재킷 소매를 잡았다. 그러자 도준이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힐끗 제 옷소매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황급히 그의 소매를 잡았던 손을 아래로 내린 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돌려주세요.”
“…….”
“돌려주세요, 그…… 그 녹음기.”
그녀는 주저하다가 단단히 각오한 얼굴로 덧붙여 말했다. 도준이 선혜의 말을 듣다가 피식 웃었다. 냉철해 보이는 남자의 미소가 이토록 따스해 보이다니. 선혜는 순간적으로 그의 웃는 얼굴에 가슴이 두근거려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그는 언제 웃었던가 싶게 서늘한 얼굴로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이미 말했지만 시간이 늦었습니다. 이 녹음기를 되찾고 싶다면, 날 밝은 뒤에 다시 나를 찾아오십시오.”
“하, 하지만!”
“그리고 녹음기를 되찾으러 올 때는, 솔직한 모습으로 와야 할 겁니다. 지금처럼 그렇게 어울리지도 않는 남의 이름 빌릴 게 아니라. 알겠습니까, ‘가짜’ 강지은 씨?”
“……!”
선혜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도준은 돌아서서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그저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도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저녁 마와리를 돌다가 접한, 폭행 관련 사건.
경찰서를 돌아다니다 보면 하룻밤 사이에도 숱하게 접하는 게 바로 폭행 사건이다. 기사로 나가는 것보다 킬(Kill: 기삿거리가 될 만한 게 아니라 버리는 것을 의미)되는 게 훨씬 많은 것이 폭행 사건이기에, 처음에는 그 사건 역시 그런 흔한 일들 중 하나로 치부되었다.
그 폭행 사건에 최태혁이 얽혀 있다는 걸 알기 직전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던 모 국회의원의 자식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다. 거기서부터 파고들어 간 일이 이만큼 커진 것이다.
취재원을 통해 국회의원 박원식과 대진그룹 차남 최태혁이 이 회원제 클럽 내에 별도로 마련된 VIP 전용 룸에서 만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뒤, 그녀는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그들이 만나기 전에 먼저 움직여 증거 보강을 위한 상황을 깔아 놓아야 했으니 말이다.
이제 그 결실을 얻는 일만 남았다.
녹음기를 움켜쥔 선혜의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클럽 직원을 가장하여 들어온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클럽 내에서, 더구나 VIP들을 위하여 마련된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을 터였다. 설령 자신이 들켜서 어떤 꼴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러니 진형이 몇 번이나 염려하여 자신을 만류한 마음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조금만 기다리라고요, 선배. 내가 제대로 특종 하나 갖고 출근할 테니까.’
그녀는 술렁거리는 속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천천히 허리를 폈다.
바로 그때였다.
“어? 넌 뭐야? 언제 들어온 거야? 아니, 허락도 없이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여자의 가슴을 빨던 박원식이 선혜의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호통치듯 외쳤다. 그와 동시에 선혜의 몸이 얼어붙었다.
아차!
그녀는 제 실수를 깨닫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자신의 행동이 그의 의심을 불러올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틀린 건 아니었는지 박원식이 얼굴을 찡그린 채 여자를 밀치고는 몸을 일으켰다.
“뭐야, 이거? 수상한데? 야, 너 뭔데 들어온 거야? 게다가 방금 뭘 주웠던 거 같은데…… 손에 쥐고 있는 게 뭐야? 이리 내놔 봐.”
박원식은 바지 밖으로 튀어나온 성기를 옷 속으로 집어넣을 생각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선혜를 향해 다가왔다. 졸지에 남자의 성기를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된 선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방금 박원식이 내놓으라고 말한 녹음기를 더욱 힘주어 쥔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거, 진짜 수상한 년이네. 야, 너 말이야. 여기서 일하는 거 아니지? 응? 어디서 누가 보냈어? 보아 하니 피도 안 마른 애송이 같은데.”
박원식은 노련했다. 거의 삼십여 년을 정치판에서 굴렀으니 당연할 법한 얘기였다. 이제 겨우 수습을 면한 신입 기자가 상대하기에는 과한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간파한 박원식이 입꼬리를 비틀어 웃고는 선혜를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다가온 만큼 선혜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아 입술을 꾹 깨문 채 녹음기를 움켜쥔 손을 바르르 떨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에 대한 답은 떠오르지 않는 게 문제였다.
“멀쩡한 몸뚱어리로 나가고 싶으면 얌전히 내놔, 아가씨. 보아 하니 녹음기, 아니면 도청기인 것 같은데 말이야. 겨우 그런 걸로 나, 박원식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응? 누가 무슨 대가로 아가씨를 꾀여 낸 건지 모르지만, 이쯤에서 내 말 듣는 게 좋을 거야.”
박원식이 그녀의 손에 쥐여 있는 녹음기의 끄트머리 부분을 보고는 억지로 실룩실룩 웃어 보이며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의원님? 장 상무, 대체 무슨 일이에요?”
룸 안의 돌변한 분위기를 뒤늦게 알아차린 최태혁이 여자의 몸 안에 사정한 뒤,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박원식과 도준을 향해 연이어 물음을 던졌다. 그때까지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도준이 자신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주먹을 느슨하게 풀고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룸을 잘못 찾아 들어온 직원인데, 뭔가…… 의원님께서 오해를 하신 것 같군요.”
“오해?”
“예, 오해 말입니다. 의원님.”
도준은 넥타이의 매듭을 손으로 당겨 느슨하게 푼 뒤,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힘주어 주먹을 쥐었던 탓인지 손톱이 파고들었던 손바닥이 쓰라렸다. 그러나 그는 덤덤한 얼굴로 선혜와 박원식을 향해 다가갔다.
“의원님, 옷부터 먼저 추스르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저 직원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같은 사내의 물건을 보고 대화하기가 조금…….”
도준이 농담처럼 웃으며 건넨 말에 박원식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바지춤을 추슬렀다. 흉물스러운 성기가 옷 속으로 감춰지고 나니 선혜의 얼굴에도 그나마 핏기가 조금 돌았다. 아니, 그것보다는 도준이 끼어들면서 팽팽하게 당겨졌던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진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길 빠져 나갈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선혜의 눈이 흔들렸다. 박원식뿐만 아니라 최태혁까지도 저를 의심 가득한 얼굴로 보고 있는데, 무사히 나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정신 차려! 불가능하다고 미리 포기할래? 그 따위 정신으로 무슨 기자가 되겠단 거야!
그녀는 꺾이려는 무릎에 힘을 주어 버티고 서서 속으로 절박하게 외쳤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그 오래된 격언이라도 붙들고 싶었다.
그 간절한 마음에 응답이라도 온 것일까.
선혜는 자신을 돌아보며 싱긋 웃는 도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흠칫 놀라는 사이에 그가 다시 시선을 돌리더니 박원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 저 직원은 룸을 잘못 찾아 들어왔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 전에 제가 직접 확인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잘못, 들어왔다고? 장 상무가 확인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의원님.”
“하지만! 녹음기인지 도청기인지를 갖고 있다고, 좀 전에 의원님이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최태혁이 냉큼 도준과 박원식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신 혼자 존재감 없이 구경만 하는 걸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 말에 선혜의 얼굴에서 다시 한번 핏기가 사라지려는 찰나, 도준이 자신의 바지 주머니와 재킷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더니 그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아가씨가 주운 게 혹시 내 휴대전화 아닙니까?”
“……예? 예, 예에?”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선혜를 향해 도준이 다가오는 듯싶더니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그녀의 손에 쥐여 있던 녹음기를 가져가 버렸다.
“……!”
아, 안 되는데!
선혜가 다급한 마음에 입을 열려는 순간, 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역시 내 휴대전화가 맞네요. 그렇지 않아도 어디에 떨어뜨렸나 찾던 중이었는데 다행이군요.”
도준은 그녀에게서 빼앗다시피 한 녹음기를 확인하는 시늉을 하더니 안도했다는 듯 말하며 자신의 재킷 안쪽에 녹음기를 집어넣었다.
어, 어어…….
선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준이 입꼬리를 올려 웃더니 이내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박원식과 최태혁을 돌아보고는 말을 건넸다.
“먼저 가 봐야겠습니다, 의원님. 나중에 연락하죠, 최 전무.”
“아니, 왜 벌써 가시는가?”
박원식이 순식간에 바뀐 상황에 적응을 하지 못한 듯 멍한 얼굴로 눈만 끔뻑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다급히 도준을 붙잡으려 했다. 선혜에 대한 의심이 도준의 말 몇 마디에 풀리기라도 한 듯 그녀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 모습이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깜빡 잊고 있었지 뭡니까.”
도준은 태연한 얼굴로 박원식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최태혁에게도 간단히 인사를 건넨 뒤, 출입문 쪽으로 나가려다가 선혜를 향해 물었다.
“강지은 씨도 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예?”
“호출 들어온 룸에서 난리가 났을 텐데. 아직까지 오지 않았다고.”
그는 피식 웃으며 선혜가 끌고 들어왔던 카트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제야 자신이 변명조로 둘러댔던 말을 다시금 상기한 선혜가 부랴부랴 카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떻게 돌려받지?
카트 손잡이를 잡은 그녀의 손끝이 새하얗게 질렸다. 머릿속을 채운 건 오로지 도준에게 빼앗긴 녹음기뿐이었다. 그 덕분에 위기 상황을 넘겼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된 건 아니었다.
장도준이 대체 무슨 이유로?
그가 재계의 거물급 인사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관심 대상은 아니었다. 자신이 취재하고자 하는 건 대진그룹과 정치권의 유착관계였으니 말이다. 저 녹음기에서 찾으려는 증거 역시 그에 관련된 것뿐이었다.
‘아, 설마!’
도경그룹도 함께 엮어 있었던 건가? 선혜는 눈을 크게 뜨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가정한다면 도준의 행동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도경마저 그렇다니…….’
만약 지금 자신이 가정한 것이 사실이라면, 제대로 된 특종이 될 터였다. 재계 1위의 독보적인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도경그룹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부정한 일, 불미스러운 사건 등에 연관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다양한 미담과 투명한 경영으로 주목을 받았다면 모를까. 그런 도경이 이와 같은 의혹의 주인공 중 하나가 된다면…….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느낄 배신감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 나가요?”
도준의 목소리에 다시금 정신이 들었다. 선혜는 황급히 박원식과 최태혁을 향해 고개를 조아려 한 번 더 사과한 뒤, 카트를 밀고 룸 밖으로 나갔다. 도준이 그녀의 뒤를 느긋하게 따라 나왔다. 가냘픈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곧 아무렇지 않게 선혜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그녀가 흠칫 몸을 떨더니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기, 장 상무님. 좀 전에 가져가신, 그…….”
“녹음기 말입니까?”
“……!”
선혜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도준의 입에서 천연덕스럽게 ‘녹음기’란 말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복도에는 자신과 도준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룸 역시 방음이 철저히 되고 있으니 안쪽 어디에서도 자신과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준처럼 이렇듯 ‘대놓고’ 말을 꺼낼 배짱은 없었다. 그의 대담한 행동에 말문이 막히는 바람에 그녀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자 도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날 밝으면 다시 얘기합시다.”
“뭐, 뭐라고요? 아니, 저기…….”
덤덤하기까지 한 말에 당황한 선혜가 손을 뻗어 그의 재킷 소매를 잡았다. 그러자 도준이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힐끗 제 옷소매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황급히 그의 소매를 잡았던 손을 아래로 내린 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돌려주세요.”
“…….”
“돌려주세요, 그…… 그 녹음기.”
그녀는 주저하다가 단단히 각오한 얼굴로 덧붙여 말했다. 도준이 선혜의 말을 듣다가 피식 웃었다. 냉철해 보이는 남자의 미소가 이토록 따스해 보이다니. 선혜는 순간적으로 그의 웃는 얼굴에 가슴이 두근거려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그는 언제 웃었던가 싶게 서늘한 얼굴로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이미 말했지만 시간이 늦었습니다. 이 녹음기를 되찾고 싶다면, 날 밝은 뒤에 다시 나를 찾아오십시오.”
“하, 하지만!”
“그리고 녹음기를 되찾으러 올 때는, 솔직한 모습으로 와야 할 겁니다. 지금처럼 그렇게 어울리지도 않는 남의 이름 빌릴 게 아니라. 알겠습니까, ‘가짜’ 강지은 씨?”
“……!”
선혜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도준은 돌아서서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그저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도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