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윤희에게서 ‘남자’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하윤의 머릿속엔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보았던 충격적인 장면이 되살아났다. 낯선 공간, 낯선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던 낯선 남자의 모습. 그리고 그 낯선 남자의 상반신을 뒤덮고 있던 붉은 키스마크들까지도 말이다.

마치 지금도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장면을 지우려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어 댄 하윤이 윤희를 향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라니? 누구 말하는 거야?”

― 기억 안 나? 우리 옆 테이블에 있던 남자들 말이야. 그중 한 사람이 하윤 쌤을 계속 쳐다봐서 우리가 관심 있는 거 아니냐면서 그랬었잖아.

“그랬던가? 기억이 잘…….”

― 으이그! 어제 평소보다 많이 마신다 했더니 대체 언제부터 필름이 끊긴 거야? 김진우 선생 말로는 그 남자들 S제약 직원들이라고 하더라. 아무튼 잠깐 바람만 쐬고 온다던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데다 하윤 쌤 계속 쳐다보던 남자도 같이 없어져서 우린 둘이 같이 어디로 가 버린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윤희의 말을 들으며 하윤은 양심의 가책 때문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준 동료 선생들에겐 미안하지만, 차마 어젯밤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어제 너무 취해서 술김에 그냥 집으로 와 버린 모양이야. 나도 눈떠 보니 집이라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하필 그 남자가 나랑 비슷한 시기에 없어진 바람에 다른 선생님들도 당황했겠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 아무 일도 없었으면 됐지, 뭐. 다른 선생님들한테도 잘 있다는 문자 한 통씩 보내 줘. 알았지?

“응. 그래야지. 이 쌤, 주말 잘 보내고, 월요일에 봐.”

― 정 쌤도 속 쓰릴 텐데 해장 잘하고, 주말엔 푹 쉬어.

윤희와 전화를 끊자마자 하윤은 침대에 털썩 몸을 눕혔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그녀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꿈이었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생생한 장면들과 온몸에 새겨진 낯선 통증들이 현실이라는 걸 일깨워 주고 있었다.

“처음 본 남자와 원나잇이라니. 최악이다, 정말…….”

이십 대에도 하지 않았던 실수를 서른에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누군가 시간을 되돌릴 기회를 준다면, 억만금을 치러서라도 그 기회를 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죽자! 죽어!”

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두 다리를 올려 허공에 발차기를 해 대던 하윤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엉엉 소리라도 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멍한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하윤이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올려 둔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게 다 그 자식 때문이야.”

어금니를 꽉 깨물고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핸드폰을 노려보던 그녀는 이내 벽을 향해 돌아누우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화장도 지우고, 옷도 갈아입어야 했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이불 속에 파묻혀 아무도 없는 세계로 차원 이동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던 하윤이 또 한 번 누군가를 향한 원망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김재호. 이 망할 인간!”

두 눈을 질끈 감은 하윤은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은 어느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날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 * *



3개월 전의 일이다. 불행은 언제나 그랬듯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들은 개인플레이보단 팀플레이를 즐기는 듯 꼭 둘 이상이 무리 지어 방문하곤 한다.

그날은 3년간 계약직 교사로 일했던 학교에서 해고 통지를 받은 날이었다. 하윤과 함께 일을 시작했던 동료들이 작년에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었고, 올해는 그녀의 차례라는 것에 누구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믿었던 만큼 배신감과 충격은 더 크게 다가왔다. 계약 만료 일주일을 남겨 놓고 교장 선생님의 호출이 있었다. 당연히 정규직 계약서를 쓸 거라고 예상했던 하윤의 앞에 놓인 종이엔 ‘계약 만료 통지서’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번엔 정하윤 선생이 꼭 정규 교사가 될 줄 알았는데, 아쉽게 됐네.’

‘아직 나이도 젊고, 초등학교 교사 자리는 그나마 티오가 많은 편이니까 좋은 곳에서 곧 연락 올 거야. 힘내. 정 선생.’

‘정 선생은 성실해서 어디 가나 좋은 선생님이란 평가 받을 수 있을 거야. 응원할게.’




함께 일하던 동료 교사들은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누구 하나 나서서 그녀를 위해 목소리를 내 주려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속으로는 해고의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찝찝한 기분으로 남은 일주일 근무를 마무리한 하윤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선생들 몇 명과 조촐한 송별회를 열었다. 간단하게 술 한잔을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그녀는 예상치 못했던 두 번째 불행과 맞닥뜨렸다.

그녀의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한 카페에 아주 익숙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엔 연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함께 있었는데, 두 사람은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진한 스킨십을 나누며 둘만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 있는 듯 보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리 대단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안구를 조금 테러했을 뿐이지, 스킨십이 죄는 아니지 않은가. 둘이 오죽 좋으면 공공장소에서 저렇듯 죽고 못 살까? 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는 장면이었다.

카페 안에 있는 그 남자가, 옆에 앉은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고 수시로 입술에 쪽쪽 입맞춤을 하고 있는 그 남자가 하윤이 5년이나 만난 그녀의 남자 친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김재호. 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통유리로 된 창밖에 서서 하윤은 그들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재호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그녀를 보고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처음 그들을 발견했을 땐, 바람을 피우려거든 적어도 현 여자 친구가 살고 있는 동네는 피하는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 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에 기가 막히고 화가 났었다. 하지만 재호와 눈이 마주치고 난 후에야 하윤은 자신이 대단한 착각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일부러 그녀가 살고 있는 동네를 골라 보란 듯이 데이트한 것이었다. 그녀의 눈에 띄기 위해서.



‘개새끼.’



제대로 알아볼 수 있게 정확한 입 모양으로 욕을 내뱉은 하윤은 그대로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재호와의 마지막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카페로 달려 들어가 재호의 멱살을 잡는다거나, 바람이 난 것을 따져 물을 정도의 열정이나 애정은 그녀에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실 두 사람은 이미 오래전부터 눈치를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먼저 이별을 말해 주기를. 이 관계를 끝내는 악역을 상대가 맡아서 해 주기를 말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결국 다른 여자가 생긴 재호에게 악역이 돌아간 것뿐이었다.

아무리 감정이 다 식어 버린 연인과의 이별이라 할지라도 전혀 타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정규직 전환을 확신했던 학교의 해지 통보와 맞물려 찾아온 불행은 하윤의 생활을 피폐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그때, 다행히 하늘이 그녀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은 듯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강원도 홍천, 화계초등학교 6개월 계약직 교사 모집. 정원 1명.」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교육청 구직란을 둘러보던 하윤은 6개월 계약직 교사를 구한다는 게시글을 발견하곤 뭔가에 이끌리듯 클릭했다.

서울시 교육청 구직란에 강원도 학교의 구인 공고가 올라온 것이 특이해서 눈길이 간 것도 있지만, 강원도 홍천은 하윤이 어렸을 적 잠시 살았던 곳이라 더 관심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화계초등학교는 그녀가 3학년, 4학년을 다닌 학교이기도 했고.

피폐해진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하윤은 마치 운명처럼 나타난 구인 공고에 망설임 없이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그녀의 지원을 기다렸다는 듯 화계초등학교에서 그녀를 환영한다는 메일이 도착했다.

공기 좋고, 물 맑은 홍천에서 하윤은 일도, 사랑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에너지를 비축해 서울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홍천에서의 생활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즐거웠고, 그녀의 마음속에서 3년 만에 해고 통지를 한 직장에 대한 미움과 5년이나 만난 남자 친구의 배신에 대한 상처도 차츰 아물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기만 했었다. 바로 어제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