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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5장 이상하게 만난 남과 여(2)


“아이고, 아이고, 허리야. 허리가 뻐근하네…….”
오랫동안 캡슐 속에 있던 현이는 뻐근한 허리를 잡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은 청소를 안 해서 그런지 먼지가 수북했다.
“이런! 나와라, 부하 A!”
현이는 거실 구석에 있던 납작한 청소기 로봇을 가동했다.
“청소 실시!”
위이이이잉.
청소기 로봇은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사이에 데네브는 소파에 누워서 리모콘으로 TV를 켜고 뉴스 채널로 돌렸다.
―에르메키아 월드의 정액비가 없다는 이유로 이웃집에서 강도 살해를 한 이 모씨가 경찰에 구속되었습니다. 이 모씨는…….
“머저리, 게임 머니는 뭐 할 때 쓰는 거냐? 아니면 알아서 벌어야지.”
―에르메키아 월드에 대항하기 위해, ‘(주)전쟁의 모든 것’사에서 가상현실 게임인 ‘제2차 세계대전’을 출시했습니다. 가상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즐길 수 있는 뛰어난 박진감의 전투가 넘쳐나는…….
“요즘은 가상현실 게임이 대세군. 그런데 회사 이름이 참 이상하네.”
―오늘의 특보입니다. 국내 최고의 아이돌 스타이자, GTV 채널 에르메키아 뉴스의 앵커 한아영 양이 인터뷰를 하기 위해 던전으로 갔다가 던전 몬스터로 있던 유저에게 납치되었습니다. 납치된 지 현실 시간으로 1시간 뒤 한아영 양은 캡슐에서 나온 뒤…….
“어? 내 이야기다!”
현이는 어린애처럼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TV를 주시했다. 이 모습만큼은 정말 어린아이처럼 귀여워 보였다. 그 뒤의 뉴스도 현이와 아영의 이야기뿐이었다.
‘헤에, 내가 엄청난 여자와 만났구나. 재미있는데? 처음으로 말 걸고 친해진 여자가 아이돌 스타라니……. 내가 복이 있는 건가? 아버지, 어머니. 저 여자 친구 생겼어요! 한아영이 데이트 신청했다구요!’
현이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TV를 끄고 마당으로 나가 밤하늘의 별을 보았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현이가 하늘을 보는 동안 에르메키아 월드 시르벤 왕국의 수도 시르벤 시티에는 유저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다시 여기는 주점 ‘술집’.
“에휴, 현이 녀석. 저 많은 유저들을 무슨 재주로 이긴다지?”
일당백은 오늘도 ‘술집’에 모여 용병단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술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한 청소년이지만 자기 절제를 할 줄 알아서 술은 안 마시고 대신에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게. 어이, 일당백. 현이가 얼마나 버티는지 내기나 할까?”
일당백 옆에 앉아 있던 타락성직자가 말했다.
“그래, 그래. 난 10분에 2골드!”
“뭐라고? 네놈 따위에게 질 수 없다! 난 15분에 3골드!”
“뭐? 네놈? 난 4골드!”
“난 20분에 5골드!”
“나도, 나도!”
“전 1골드요.”
“에게? 째째하다.”
“이게 전 재산이라고요!”
누가 보면 시끌벅적한 깡패 집단 같지만, 자세히 보면 우정이 두텁고 단결심이 강한 일당백 용병단이었다.
“아마 이길 걸요?”
“뭐라고?”
일당백과 그의 용병단원들이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구석에서 와인 잔을 들고 있는 여인, 용병단에서 유일하게 비전투원이자 참모인 월령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간단하죠.”
일당백이 월령에게 묻자, 월령은 식탁에 종이를 펴고 깃펜을 들었다. 다른 용병단들과 일당백은 그 종이를 보았다.
“우리가 들어갔던 동굴 출입구는 한 명밖에 못 들어갈 만큼 좁아요. 그쵸?”
월령이 종이에 동굴 그림을 간단히 그리면서 설명했다.
“그렇지.”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들어올 수 있는 인원은 제한적이라는 것이지요. 그 길목에서 차례대로 한 사람씩 제거해 버리면, 아무리 많은 적이 와도 섬멸할 수 있어요.”
“마치 좁은 입구에 들어오는 저글링 개떼를 마린 몇 마리로 막아 내는 것처럼?”
“그렇죠. 하지만 그게 막힌다고 해도 또 여러 가지로 막을 방법이 있어요.”
“뭔데?”
“바로 트랩이죠. 오리하르콘 문에 설치되어 있던 그런 트랩들요. 트랩만으로도 여러 사람들을 제거할 수 있으니까요. 분명히 데네브라는 분은 직접적으로 싸우는 일이 없을 거예요.”
“그렇군.”
월령의 말에 수긍하는 용병단원들이었다.
하지만 월령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따르르르르르릉. 철컥!
오전 11시가 되자 현이는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은 늦잠을 잤다.
“우우, 더 잘래.”
더 자고 싶어서 다시 누운 현이었지만 푹 자서 그런지 잠이 안 왔다.
벅벅!
머리를 긁으며 현이는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쏴아아아아.
“윽, 차가워. 따뜻한 물은 언제 나오는 거야?”
몇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싸움을 해야 되는 사람치고 현이는 너무나 여유로워 보였다.
띵동!
“에? 누구? 나한테 올 사람은 없는데?”
띵동!
“예, 예. 나가요, 나가.”
끼익!
현이는 머리만 감고는 현관문으로 나갔다.
대문 밖에는 검은색 커다란 승용차가 보였다.
‘누구지?’
“누구세요?”
“저기, 여기가 김현 씨 댁 아닌가요?”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
“맞는데요?”
“아, 데네브 님?!”
“서, 설마…….”
철컹, 끼이이이익!
현이는 얼른 대문을 열었다. 대문 밖에는 아영이 있었다. 검은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 빨간 베레모에 하얀색 와이셔츠, 주름진 빨간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 뒤에는 경호원이 선글라스를 쓴 채 주위를 살폈다.
“한아영…….”
현이는 멍하게 아영을 쳐다보았다.
“네, 저예요.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여…… 여긴 대체…… 어떻게 아셨나요?”
“카오스 사에 부탁을 좀 했죠.”
“그거 개인 정보 유출 아닌가요?”
“그렇죠.”
“쩝, 이거 신고해야 되는 거 아니예요? 핫핫핫! 아니, 그런데 얼굴이 왜 빨개요?”
“오…… 옷이.”
현재 현이의 옷차림은 푸른색 잠옷이었다. 이 시간에 잠옷을 입고 있는데다가 단추가 다 풀려 있었다. 아영이 보기 민망했던 것이다.
“아…… 하하하하! 지금 일어나서 씻고 있었거든요. 자, 들어오세요.”
“아, 예.”
“아영 씨, 어서 들어가시죠.”
“네, 언니.”
집 안으로 아영이네를 들여보낸 현이는 그 둘을 소파에 앉히고 차를 대접했다.
“갑자기 찾아오셔서 내어 드릴 게 이것밖에 없네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그게…… 저…….”
아영의 얼굴이 도로 빨개졌다.
“어제 내일 만나자고…….”
“네?”
현이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 그거 게임에서 만나자고 한 거 아니었어요?”
“아닌데요.”
“헤에, 그래요? 어차피 게임으로 만날 텐데.”
“네.”
“…….”
“…….”
그 뒤 그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차만 홀짝거리며 마셨다.
“데네브 님, 아니 김현 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응?’
계속 아무 말 없이 차나 마시는 둘의 모습이 답답했는지 은주가 나서서 말했다. 현이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의해 살짝 기겁하고 말았다.
“일단 게임에서 아영 씨를 납치한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 덕분에 더 좋은 방송거리가 나왔으니까요. 그렇지만 이제는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 나가느냐가 문제입니다.”
“간단하죠. 그냥 한아영 양은 기둥에 묶여 있으시면 됩니다.”
“그리고요?”
“제가 한아영 양을 살짝 괴롭혀 준다면, 분노에 휩싸인 유저들이 알아서 오겠죠.”
“그 괴롭힌다는 것이?”
“목을 도발적으로 만진다라든가, 아니면 크게 한 대 쳐 주고 기절하신 척을…….”
“크흠!”
은주가 불편하다는 듯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현이를 노려보는 모습이 마치 ‘우리 아영 씨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죽을 줄 알아!’라고 하는 것 같았다.
‘허걱, 저거 뭐야.’
현이는 과연 은주가 자신에게 쉽게 로그아웃을 당한 유저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은주가 무섭게 느껴졌다.
“언니.”
“네, 아영 씨.”
“이만 나가 줘. 현이 님이 불편해 하시잖아.”
“네?! 하지만…….”
“그 일쯤은 나랑 현이 님이 상의해서 처리할 수 있어.”
“……네, 알겠습니다.”
“휴우∼ 마치 드래곤 피어에 눌리는 줄 알았습니다.”
은주가 나가는 것을 확인한 현이가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데네브의 이마에 땀이 조금 맺혀 있었다.
“하긴, 우리 은주 언니는 저를 너무 과하게 보호해서 탈이죠. 사람들이 은주 언니만 봐도 무서워서 저에게 접근도 잘 못한다니까요.”
“그래요? 핫핫핫! 저렇게 살면 누가 데려가려나? 핫핫핫핫.”
“하하. 그건 그래요.”
어느덧 현이와 아영은 서로에 대한 마음의 벽을 허물고 점점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더니 나중에는 경어에서 서로에게 반말까지 사용하게 되었다.
“오늘 이야기 잘 나누었어.”
아영이 현이의 집 대문을 나서며 말했다.
“그런가? 그러면 6시 반까지 접속해 줘. 아직 준비할 게 있으니까.”
“응, 알겠어. 근데 계속 나 만나 줄 수 있어?”
“응? 그래야겠지? 마음이 맞는 것 같은데.”
현이의 답변에 아영의 볼이 붉어졌다.
“잘 가.”
“응.”
아영은 현이의 배웅으로 도로 차를 타고 가 버렸다.
“한아영……. 마음이 순수한 여자군.”
데네브는 점점 멀어지는 아영이 탄 차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만났지만, 잘 만난 것 같아. 이성끼리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 건 엄마 이후 처음이군.”
현이의 마지막 말에는 왠지 쓸쓸함이 가득하였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7시가 되었다.
미리 와서 죽치는 유저들로 데네브의 동굴은 소란스러웠다. 유저들이 무척 붐벼서 서 있을 만한 곳이 없었다. 게다가 좁은 동굴에 사람이 많아지자 공기가 매우 탁해져 숨쉬기가 곤란한 유저가 속출했다.
“안 되겠다. 우리는 뒤로 빠진다.”
일당백은 용병단원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붐벼서는 대단위 마법에 걸리면 학살이 된다. 그러니까 뒤로 빠지자. 유저들이 없을 때를 노리자.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철컥, 끼이이이이이.
갑자기 육중한 오리하르콘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빛이 나왔다. 푸른 잔디 위에 박힌 나무 기둥에 묶여 있는 여인, 바로 아리시아가 보였다.
“한아영이다!”
앞에 있던 유저가 소리쳤다. 그 순간 유저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한아영을 구하자!”
또 누군가의 말에 유저들이 우르르 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런, 이런! 이런 함정에 걸리시다니요. 당신들 같은 바보들에게 저의 마법을 쓰는 게 아깝군요.”
위에서 소리가 났다. 유저들이 위를 쳐다보는 순간 기다란 도자기 호리병이 보였다.
콰아아아앙!
커다란 폭발이 있었고 유저들은 그 자리에서 폭사하거나 폭압으로 날아가 버렸다.
“으으윽!”
“누…… 누가 좀 도와줘…….”
“커…… 커헉!”
곳곳에서 고통으로 인한 신음이 흘렀다. 멀쩡한 사람들은 다시 위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