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2화
5장 이상하게 만난 남과 여(3)


소용돌이치는 작은 구 위에 서 있는 사람. 하얀색에 밑자락이 너덜너덜한 왕실 문양의 금실이 수놓아져 있는 로브에 흑단 지팡이. 물론 후드 안은 어둠으로 짙었다.
“데…… 데네브!”
싸움은 그렇게 시작됐다.
‘허걱! 이게 이렇게 센 거였나? 다음부터는 좀 더 작은 병에 담아야겠다.’
데네브는 머리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면서, 아리시아가 묶여 있는 나무 기둥 뒤쪽으로 하강했다. 하강하는 동안 유저들은 데네브를 주시하기만 했다. 아까의 폭발에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이런, 제가 두려우신가요? 저를 이겨야 여기 계시는 아리시아 님을 구하죠.”
데네브는 아리시아의 얼굴에 손을 댔다. 이미 사전에 약속을 한 것이다. 아리시아는 일부러 힘없는 척 연기를 했다.
“저…… 저!”
“그 손 안 치워!”
“이 개X끼야! 넌 오늘 죽었어!”
데네브에게 자극받은 유저 몇몇이 데네브에게 달려들었다.
“옳거니! 그렇게 나오셔야죠.”
데네브도 덩달아서 그들에게 달려들면서 소매 속에 손을 댔다.
“또 폭약을!”
“이번엔 어림없다!”
뒤에서 어떤 아처 유저가 화살을 날리자, 다른 아처 유저들도 화살을 날렸다.
팅팅팅!
“아니!”
“이 로브는 실 속에 오리하르콘을 녹여 만든 것입니다. 그딴 화살은 못 뚫어요.”
그리고 소매에서 나온 것은 오리하르콘과 미디엄 샤일러 합금 철퇴.
차라라라라락!
쇠사슬의 마찰음과 함께 커다란 철퇴가 데네브의 왼손에 들렸다.
“자, 나의 경험치들아. 나에게 경험치를 다오! 오세요!”
“미X놈!”
“어떻게 마법사가…….”
“베틀 메이지라도 창밖에 안 드는데.”
“하하하하하!”
데네브가 가장 가까이 있던 전사 유저에게 철퇴를 휘둘렀다. 그 유저는 방패로 철퇴를 막으려고 했다.
콰앙!!
“커윽! 내…… 철 방패가…….”
방패는 박살이 나 버렸고, 그 유저는 멀리 날아가서 로그아웃됐다.
“흐아아압!”
데네브 뒤쪽에서 다른 유저 하나가 달려들었다. 커다란 참수도를 들고 있었다.
“죽어라! 요참!”
참수도가 포물선을 그리면서 빠르게 데네브의 허리로 파고들었다.
“어이쿠, 나 죽네.”
데네브는 간단하게 파고드는 참수도를 뛰어넘어서 피했다.
“그래비티 볼.”
“커헉!”
데네브에게 칼은 휘두른 유저가 갑자기 피를 토했다.
“무…… 무슨 짓을…….”
“당신의 몸 안에 중력을 가진 구를 넣어 놨죠. 지금은 1G랍니다. 그럼 이건 어떤가요? 잘 가세요. 10G.”
콰직! 콰직! 우지끈! 우두둑!
“……!!”
그 유저는 온몸이 뒤틀리면서 하나의 고깃덩어리처럼 뭉쳐져 죽었다.
“헤에, 역시 보기가 좋지 않군요. 어라? 왜들 안 오세요?”
유저들은 경직된 채 데네브를 쳐다보았다. 중력 마법의 첫 출현이었다. 게다가 사람이 잔인하게 죽었는데, 여전히 데네브의 목소리가 장난스러워서 무섭게 느껴진 것이다.
“그렇군요. 제가 잔인해 보이나요?”
“그…….”
로브를 입은 여자 마법사 유저가 나섰다. 그 유저는 곧장 토할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잘 참고 있었다.
“그 마법들은 어디서 배우신 거죠?”
“가르쳐 줄 의무가 없습니다만?”
“…….”
“계속하죠. 전 사냥을 하고 싶거든요.”
다시 소매 속에 손을 집어넣는 데네브를 보면서 유저들은 경직된 채 서 있기만 했다. 그리고 데네브의 소매에서 나온 건 화살 한 묶음이었다.
“어? 뭐야, 화살?”
“화살로 우릴 잡겠다는 소리야 뭐야?”
“여러분! 싸웁시다! 저 미친 녀석을 죽이고 한아영 양을 구합시다!”
“와아아아아!!”
누군가의 선동으로 유저들이 이번엔 떼거리로 데네브에게 달려들었다. 다구리엔 장사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휘익!
“가라! 매직 미사일!”
퍼퍼퍼퍼펑! 피이이이잉!
화살들이 불꽃을 뿜으며 유저들에게 쏟아졌다.
파바바바박!
“크아악!”
“으윽!”
“컥!”
앞에 있던 전사 계열의 유저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화살이 미사일처럼…….”
“머릿수는 우리가 한참 더 많습니다! 마법사는 마법을, 도적들은 단검을 던지세요! 아처들도 화살로 견제를!”
“파이어 애로우!”
“라이트닝 볼트!”
“아이스 포그!”
마법사들이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겨우 2서클 이하 수준이었다.
“나와 싸우시려면 그 정도로는 어림없습니다. 안티 그래비티 실드.”
반투명한 실드가 데네브를 감쌌다. 실드는 반중력을 이용해서 유저들이 쏜 마법을 튕겨 내 버렸다.
“그것도 중력 마법이냐!”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옷을 입은 유저 한 명이 달려들면서 소리쳤다.
“조합 스킬 결계 파괴!”
쨍그랑!
“어라?”
“그 어떤 실드도 파괴하는 나만의 스킬이다!”
“아, 저 사람. 랭킹 9위에 있는 문 님이다!”
“정말! 나 저분 인터넷으로 봤어.”
어떤 유저가 문이라고 하자 다른 유저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흥, 어떠냐? 나의 스킬이.”
“헤에, 드디어 제대로 된 사냥감을 만났군요. 문 님이라고요?”
“그렇다. 오늘 안으로 너의 얼굴을 세상에 공개하지.”
“그 도전을 받아들이죠. 나에게서 중력의 제약을 거둬라. 제로 그래비티!”
중력이 없어진 데네브가 높게 천장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천장에 손을 붙였다.
“됐다! 이틈에 한아영 양을!”
갑자기 유저들이 아리시아를 구하기 위해 데네브를 무시하고 달려들었다.
“아앗! 나랑 안 싸우고 가시면 안 돼요! 이익! 가라, 매직 미사일!”
퍼버버버벙! 피이이잉!
화살들이 불꽃을 뿜으며 날아갔다.
“헉!”
“피해!”
데네브가 이번엔 화살을 세 묶음이나 꺼내서 발사하고 폭약 두 병을 던졌다.
파바바바박! 퍼엉! 쾅!
“내 앞에 있는 적에게 다시는 땅을 밟는 영광을 누리지 못하게 하라. 리버스 그래비티.”
“우왓!”
“어라!”
“어? 어?”
선두에 있던 유저가 대부분 죽자, 뒤에 있던 유저들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데네브는 그들에게 리버스 그래비티를 걸었다. 마법에 걸린 유저들은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다.
“당신들은 나중에 처리하죠.”
차라라락! 휘잉! 퍼억! 쿵!
“켁!”
“큭!”
데네브는 철퇴를 휘두르며 유저들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런, 무식한!”
“저렇게 큰 걸 자유자재로 휘두르다니…….”
유저들은 하나 둘씩 죽어 나갔다.
“흥! 뒤가 비었어!”
누군가가 소리쳤다.
푹!
“커억.”
데네브가 오른손에 있던 지팡이로 그 유저를 찔렀다. 그 유저도 로그아웃당했다.
“문 님? 어디 계십니까?”
데네브는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문을 찾으려고 그를 불러 댔다.
“여기다.”
‘윽, 살기!’
“컥!”
데네브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머리 위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빗나간 단검은 근처에 있던 불쌍한 다른 유저의 목에 박혔다. 문은 지금 어딘가에 숨은 채 일격필살을 노리고 있었다.
“으으, 겨우 살았네.”
“윈드 커터!”
“우왁!”
바람의 칼날이 데네브에게 달려들었지만 로브를 뚫지 못하고 없어졌다. 하지만 커다란 고통은 뒤따랐다.
“그래비티 볼, 그래비티 볼, 그래비티 볼, 그래비티 볼.”
우직! 우직! 우직! 우직!
다시 4명의 유저가 덩어리가 되어 로그아웃당했다.
“마나가…….”
데네브의 마나가 거의 다 됐다.
“죽어라!”
“선빵!”
푹!
“허억!”
“핫핫핫! 네놈의 검이 내 지팡이에 비해서 짧은 것에 대해 후회하도록!”
로그아웃당하는 유저에게 데네브가 소리쳤다. 지쳐서 그런지 데네브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죽어라, 죽어서 나에게 경험치를…… 파이어 인더 홀!”
또다시 폭약을 던졌다.
퍼엉!
“흐아아악!”
“까아아아악!”
저 멀리 유저들이 날아갔다. 또 다른 유저들은 잘 구워지고 있었다.
“하하하하하하!!”
데네브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동굴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세상에…….”
아리시아는 묶여 있는 상태에서 데네브의 싸움 장면을 보고 있었다. 데네브가 이기고 있었다. 유저들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철퇴를 휘두르며, 동굴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아영이 있는 내부를 제외하면 통로가 좁은 동굴의 특성을 이용해서 유저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현아, 너 정말 대단하다.”
“나 데네브의 이름으로 너희들에게 죽음을!”
“히…… 히익!”
“도…… 도망치자!”
“못 이겨!”
“그럼 한아영 양은?”
“몰라! 우선 우리들 먼저 살고 봐야지.”
데네브에게 많이 위축당한 유저들은 서로 도망가기에 바빴다. 도망가다가 서로를 밟아서 죽기까지 했다.
“윈드!”
데네브는 도망가는 그들에게 강한 바람을 불러서 빨리 도망가게 해 주었다. 친절한(?) 데네브 덕분에 넘어져서 밟혀 죽는 유저들 수가 많아졌다.
“어중이떠중이는 필요 없지요. 그렇죠, 문 님?”
데네브가 동굴 벽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어떻게 알았지?”
동굴 벽과 똑같은 색깔의 천으로 가리고 있던 문이 나왔다. 아주 감쪽같았다.
“감으로.”
“그렇군. 내가 널 과소평가하고 인기척을 제대로 지우지 못했어.”
‘감이라니까요.’
혼자서 데네브를 과찬하는 문을 보며 데네브는 어이없는 시선을 보냈지만, 얼굴이 안 보여서 문은 그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거기! 바위! 어서 나와! 아까 전부터 숨어서 뭐하는 거야! 안 나오면 폭약 던진다.”
“하, 하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면서 일당백과 그의 용병단원들이 나왔다.
“어? 현동이와 그의 똘마니들이군.”
“똘마니라니!”
“너 죽을래?”
용병단원들이 발끈했다.
“아뇨, 살고 싶어요.”
“…….”
가볍게 넘기는 데네브였다.
“어? 일당백 님. 데네브와 아시는 사이였습니까?”
“아, 예, 문 님. 학교 친구입니다.”
“호오.”
문은 잠시 데네브와 일당백을 쳐다보았다. 문과 일당백은 같이 랭킹 10위권에 드는 사람들인지라 서로 연락을 하면서 지내 왔었다.
“좋은 친구를 두었군요.”
“그렇죠? 문 님, 부탁할 게 있습니다.”
“뭔데요?”
“데네브와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 주세요. 저를 봐서요.”
“그런…….”
“부탁드립니다. 제가 나중에 한턱 쏘죠.”
“……알겠습니다, 일당백 님. 그럼 전 물러나죠.”
어두운 연기가 나오더니 문을 감쌌다. 그리고 연기가 사라지자 문 역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들어가서 이야기할까?”
다시 조용해진 동굴을 둘러보며, 일당백이 데네브에게 말했다.
“아아, 그러지. 마침 힘들어졌거든.”
끼이이이익! 쿵! 철커덕!
일행은 데네브의 동굴 안으로 들어갔고 육중한 오리하르콘 문은 다시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