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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8장 엘레나(2)
노래를 할 수 있는 직업은 음유시인밖에 없었다.
―무기는 뭘로 씁니까?
―철퇴요.
―철퇴? 보통 전사는 검이나 창을 쓰지 않나요?
“이거 완전히 해변 버라이어티 특집이 유승주의 무대가 되었네.”
―지난번에 ‘동굴의 사신’ 아시죠?
―아, 일주일간 신문과 TV를 난리나게 한…….
“어? 내가 그랬었나?”
머쓱해지는 현이였다.
―그 사신이 쓰는 철퇴의 모습을 보고, 철퇴에 매력을 느꼈거든요. 그래서 무기로 쓰고 있습니다. 무게가 나가지만 타격력은 최고거든요.
TV에서 현이의 이야기가 나오자 아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한아영 양이 거기서 납치되셨죠? 그 사신의 얼굴을 봤나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아서 인터넷에서는 옛날 영화 ‘반지의 XX’의 나X굴과 똑같다고 ‘사신’ 말고도 ‘나X굴’이라고도 불리고 있는데요?
“아영아…… 제발…….”
―못 봤어요. 얼굴은 후드를 벗지 않아서 볼 수가 없었어요.
“휴…….”
아영이 다행히 거짓말을 해 주었다.
―이거야 원. 그 사신의 얼굴을 꼭 보고 싶군요. 전 이번에 길드를 창설했습니다. 군사 길드로 키워서 세력을 넓히려고요. 그래서 나중에 그 사신의 정체를 밝히겠습니다. 여러분, 꼭 저희 길드에 가입해 주세요. 저희 길드의 이름은 ‘이터널 솔져’입니다!
“미X 녀석, 왜 거기서 길드 이야기가 나오냐? 저거 순 자기 홍보를 하는 거 아냐?”
삑!
현이는 어쩐지 화가 났다. 자신의 여자 친구인 아영을 건드리는 것도 모자라서 감히 자신을 노리는 게 못마땅했다.
“아이디가 ‘유’라고 했지? 에르메키아 월드를 접게 해 주겠어! 그렇다면 나 자신을 키워야겠군…….”
현이와 아영의 공공의 적이 생겼다.
촤라라라락!
“음……. 화약…… 화약……. 그렇지! 여기 있구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현이는 곧장 캡슐에 들어가지 않고 백과사전에서 화약을 찾아보았다.
화약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흑색화약과 면화약이다. 흑색화약은 질산칼륨 75%, 숯 15%, 황 10%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재료를 따로따로 곱게 갈아 섞어서 물로 반죽한다.
……중략……
면화약은 솜이나 정제한 나무 셀룰로오스를 황산과 질산혼합물로 적셔서 만든다. 혼합물에 적신 솜을…….
‘굉장해! 역시 나와 있구나! 이 방법을 에르메키아 월드에서 쓰면 판타지 게임의 혁명을 불러일으킬 거야! 마법과 과학의 공존이라……. 판타지 세계에 과학의 무기인 총이 나오면……. 흐흐흐흐. 혁명이라……. 현동이가 좋아하는 말이군.’
사전의 내용을 외운 뒤 데네브는 다시 캡슐 속으로 들어갔다.
[홍채 인식, 신체검사 완료. 에르메키아 월드에 접속합니다. 데네브 님, 현재 가수면 모드입니다.]
“으음.”
데네브는 천천히 눈을 떴다. 로그아웃한 지 정확히 2시간 만에 다시 접속한 것이다. 게임상에선 벌써 8시간이 지났다.
[가수면 모드를 해제합니다.]
“아직 새벽인가. 내가 너무 일찍 잤군.”
차가운 공기가 폐 속에 들어오는 걸 느끼며 아직도 어두운 하늘을 보면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에게 걸었던 무중력 마법을 해제했다.
“으, 무중력 상태로 자는 건 좋은데 다시 중력을 느끼니 서 있기가 힘들군. 아이템 창.”
아이템 창이 나오자마자 데네브는 ‘연금술의 모든 것’을 꺼냈다.
“오랜만에 꺼내네. 스승님, 제가 당신의 뒤를 이어서 계속 이 책을 쓰게 됐군요.”
데네브는 평평한 바위에 앉아 깃펜을 꺼내 책 뒷면 공백 페이지에 화약에 대해 적기 시작했다. 까먹지 않기 위해서였다.
서걱서걱.
꼬로록!
“배고프네…….”
데네브는 아직 자고 있는 엘프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조금 있으면 일어날 시간이니 식사 준비나 해야겠다. 저렇게 아름다운 미녀들을 굶길 수야 없지. 아공간 오픈.”
아공간에서 재료를 꺼내는 데네브였다.
“재료가 별로 없네. 뭐, 곧 마을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파이어 볼트.”
화악!
장작에 불을 붙이고 프라이팬을 올렸다. 오늘 아침은 베이컨 요리였다.
치지지지지. 치지지지.
“으으윽! 맛있는 냄새. 김치, 밥이랑 같이 먹으면 최고인데…….”
촤아아아!
“어? 웬 물소리?”
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계곡이었다.
“아…….”
엘레나였다. 엘레나가 일행이 자고 있는 사이에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데네브를 눈치 채지 못한 채 반대편을 보고 있었다. 그 덕분에 데네브는 엘레나의 나신을 적나라하게 볼 수가 있었다.
“예쁘다.”
풀어헤친 젖은 머리카락,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흰 살결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었다.
데네브는 그 모습을 그저 멍하니 보고 말았다.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아니지, 잠깐…….’
데네브는 얼른 자신의 엄지손톱만 한 돌멩이를 주웠다.
“이 멍청아!”
따악!
“꺅!”
풍덩!
데네브는 돌멩이를 힘껏 던져서 엘레나의 머리를 맞췄다.
그리고 엘레나는 그 돌을 맞고 물속으로 머리를 처박았다.
“나이스 헤드 샷!”
“데…… 데네브? 어…… 언제 일어났어? 꺄악! 보지 마!”
이제야 데네브를 눈치 채고 물에 몸을 담그는 엘레나였다.
“시끄러! 세상에…… 남자가 옆에서 자고 있는데, 목욕하는 엘프 여자가 어디 있냐? 서…… 설마 엘레나, 넌 그쪽 세계에 몸을 담았던 것이냐?”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짓는 연기를 하면서 데네브는 엘레나를 보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내가 변태로 몰린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야 되니 엘레나 널 희생시키마.’
이른바 ‘다 봐 놓고 뒤집어 씌우기 작전’. 즉, 데네브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작전이었다.
“그…… 그건! 아무튼! 난 그쪽 세계에 한 발짝도 들이지 않았어! 난 아직 처녀이고, 다만 몸이 끈적끈적해서 목욕한 거야!”
‘오오오, 동요하고 있어. 동요하고 있어.’
얼굴이 붉어진 채 횡설수설하는 엘레나를 보고 데네브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러셨어요? 그런데 이걸 어쩌나? 엘레나, 네가 처녀이거나 목욕하게 된 이유는 중요하지 않거든? 중요한 건 남자가 바로 옆에서 자고 있는데, 옷 홀딱 벗은 다음에 대놓고 목욕한 게 잘못이지. 엘레나, 뭐하는 짓?”
“흐윽! 난 그냥 데네브가 자고 있어서, 조용히 하면 안 들킬 것 같아서…….”
“호오, 그러면서 몰래 하는 스릴을 느끼는 건가? 역시 그쪽 세계에…….”
“아냐! 난 아니라고! 아니야! 난 그런 애가 아니라고! 으아아아앙!”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며 절규하는 엘레나였다.
‘이거이거, 내가 잘못해서 앞날이 창창한 엘프 하나 요절시키는 거 아냐? 정신 분열 증세 같은데? 내가 심했나.’
괜히 미안해져서 머리를 긁는 데네브였다.
‘이거 다독여 줘야겠군.’
데네브는 곧장 로브를 벗어서 엘레나에게 다가갔다.
“히익! 오지 마! 오지 마! 제발! 이 변태!”
“어이, 어이. 오해 마.”
기겁하는 엘레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데네브는 부드럽게 웃어 줬다.
“자, 우선 이걸 입어. 옷은 어디 있어? 오늘 일은 아무도 모르게 할게. 괜찮아, 울지 마.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로브로 몸을 덮어서 물에서 나오게 했다.
“저…… 정말? 훌쩍.”
“응, 걱정 마. 자, 옷은 어디 있어?”
“저기…… 저기 있어.”
엘레나는 커다란 바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가서 갈아입어. 안 볼 거니까 걱정 마.”
“훌쩍, 으……응.”
엘레나는 로브를 걸치고는 옷을 갈아 입으러 바위 뒤로 갔다.
“에휴! 괜히 그래 가지고 엘레나만 불쌍하게 만들었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옷을 갈아입은 엘레나가 훌쩍거리며 로브를 들고 나왔다.
“그래, 어느 정도 진정됐어?”
“응.”
“가서 베이컨 먹자. 마침 베이컨 굽고 있었거든.”
“응. 어라? 이 냄새는 뭐야? 탄내가 나는데?”
“엉?”
킁킁!
“으악! 내 베이컨님이!”
베이컨들이 프라이팬에서 석탄 덩어리처럼 타고 있었다.
“내…… 내가 끌게! 나이아스!”
엘레나의 말에 손바닥만 한 파란색의 소녀가 허공에서 나왔다.
“어라?”
‘저건…….’
“정령?”
“나이아스! 물대포!”
“아…… 안 돼!”
물의 정령 나이아스는 소화기만 한 강력한 물줄기를 만들어 타고 있는 프라이팬에 뿌렸다. 그 강력한 물줄기 덕분에 그나마 남아 있던 베이컨들과 프라이팬이 날아가 계곡에 빠진 뒤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후 프라이팬은 건졌지만 베이컨들은 물고기들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고 말았다.
“베이컨님…….”
한동안 계곡에서 데네브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미안해, 데네브. 내가 잘못했어.”
“괜찮다니까, 이미 지나간 건데……. 이제 그만 해.”
“쳇, 난 용서 못해.”
“맞아. 엘레나 언니 덕분에 아침을 굶었으니까.”
“이봐요. 당신들도 이제 그만 해요.”
“으으으…….”
엘레나 덕분에 일행들은 아침을 굶게 되었다. 그래서 데네브를 제외한 다른 엘프들은 엘레나에게 불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엘레나는 정령술사였어?”
데네브는 아침에 보았던 물의 정령을 생각하며 말했다.
“에? 우리 엘프는 선천적으로 정령과 친화력이 있는데다가 정령을 볼 수 있어서 기본으로 2가지 속성의 정령과 계약하는데?”
“그러면 그 정령으로 그 납치범들이나 몬스터들과 싸울 수 있는 거 아냐?”
“그건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면 숲에 피해가 가잖아.”
“아…….”
‘역시 숲의 종족인가…….’
“어머나! 쟤네들 뭐하는 거니?”
“둘이 사귀나?”
“저렇게 꼭 붙어 가지고.”
“결혼해! 결혼해!”
데네브와 엘레나가 꼭 붙어서 이야기를 하자 다른 엘프 아가씨들이 둘을 보면서 온갖 말들을 했다.
“헤에, 점심밥도 굶고 싶으신가 봐요?”
“…….”
“그래, 그렇게 조용해야죠.”
밥을 굶기 싫었는지 엘프 아가씨들은 한동안 조용해졌다.
[엘프 엘레나와의 친밀도가 높아졌습니다.]
‘어라?’
데네브는 눈앞에 나온 알림글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친밀도가 왜 계속 올라가는 거지? 서로 웃고 떠든 것밖에 없는데 왜 그럴까? 뭐, 나야 엘프랑 친해지면 좋은 거지만. 오늘까지 치면 족히 40번은 올라간 것 같은데.’
데네브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웃는 엘레나를 보았다. 청순가련하고 눈이 맑아 보였다.
‘에휴, 기우인가?’
“왜 그래?”
“아, 아냐.”
점심때가 지난 뒤, 데네브 일행은 거대한 나무가 있는 숲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 엘프들의 숲이야. 여기에는 우리 엘프들의 결계가 있어서 인간이나 몬스터는 들어올 수 없어. 메테오를 써도 파괴하는 건 불가능하지. 하지만…….”
엘레나가 데네브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결계 안으로 같이 들어갔다.
“우리랑 손을 잡으면 들어갈 수 있지.”
“헤에, 간단하네.”
엘레나와 데네브가 결계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엘프의 숲을 최초로 발견하셨습니다.]
‘지도에 표시해야지.’
“마을은 여기서 멀어?”
“한 20분 정도 걸어가면 돼.”
데네브가 엘레나에게 웃어 보였다.
“여태까지 길 안내하느라고 수고했어.”
“뭘……. 데네브가 도와줬으니까 우리가 다시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거지.”
[엘프 엘레나와의 친밀도가 높아졌습니다.]
‘또 오르네. 뭐 나한테는 좋은 거니까. 엘프랑 친해지면 얻을 게 많을 테지.’
“그런데 여기 있는 나무들은 비정상적으로 크군.”
8장 엘레나(2)
노래를 할 수 있는 직업은 음유시인밖에 없었다.
―무기는 뭘로 씁니까?
―철퇴요.
―철퇴? 보통 전사는 검이나 창을 쓰지 않나요?
“이거 완전히 해변 버라이어티 특집이 유승주의 무대가 되었네.”
―지난번에 ‘동굴의 사신’ 아시죠?
―아, 일주일간 신문과 TV를 난리나게 한…….
“어? 내가 그랬었나?”
머쓱해지는 현이였다.
―그 사신이 쓰는 철퇴의 모습을 보고, 철퇴에 매력을 느꼈거든요. 그래서 무기로 쓰고 있습니다. 무게가 나가지만 타격력은 최고거든요.
TV에서 현이의 이야기가 나오자 아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한아영 양이 거기서 납치되셨죠? 그 사신의 얼굴을 봤나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아서 인터넷에서는 옛날 영화 ‘반지의 XX’의 나X굴과 똑같다고 ‘사신’ 말고도 ‘나X굴’이라고도 불리고 있는데요?
“아영아…… 제발…….”
―못 봤어요. 얼굴은 후드를 벗지 않아서 볼 수가 없었어요.
“휴…….”
아영이 다행히 거짓말을 해 주었다.
―이거야 원. 그 사신의 얼굴을 꼭 보고 싶군요. 전 이번에 길드를 창설했습니다. 군사 길드로 키워서 세력을 넓히려고요. 그래서 나중에 그 사신의 정체를 밝히겠습니다. 여러분, 꼭 저희 길드에 가입해 주세요. 저희 길드의 이름은 ‘이터널 솔져’입니다!
“미X 녀석, 왜 거기서 길드 이야기가 나오냐? 저거 순 자기 홍보를 하는 거 아냐?”
삑!
현이는 어쩐지 화가 났다. 자신의 여자 친구인 아영을 건드리는 것도 모자라서 감히 자신을 노리는 게 못마땅했다.
“아이디가 ‘유’라고 했지? 에르메키아 월드를 접게 해 주겠어! 그렇다면 나 자신을 키워야겠군…….”
현이와 아영의 공공의 적이 생겼다.
촤라라라락!
“음……. 화약…… 화약……. 그렇지! 여기 있구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현이는 곧장 캡슐에 들어가지 않고 백과사전에서 화약을 찾아보았다.
화약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흑색화약과 면화약이다. 흑색화약은 질산칼륨 75%, 숯 15%, 황 10%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재료를 따로따로 곱게 갈아 섞어서 물로 반죽한다.
……중략……
면화약은 솜이나 정제한 나무 셀룰로오스를 황산과 질산혼합물로 적셔서 만든다. 혼합물에 적신 솜을…….
‘굉장해! 역시 나와 있구나! 이 방법을 에르메키아 월드에서 쓰면 판타지 게임의 혁명을 불러일으킬 거야! 마법과 과학의 공존이라……. 판타지 세계에 과학의 무기인 총이 나오면……. 흐흐흐흐. 혁명이라……. 현동이가 좋아하는 말이군.’
사전의 내용을 외운 뒤 데네브는 다시 캡슐 속으로 들어갔다.
[홍채 인식, 신체검사 완료. 에르메키아 월드에 접속합니다. 데네브 님, 현재 가수면 모드입니다.]
“으음.”
데네브는 천천히 눈을 떴다. 로그아웃한 지 정확히 2시간 만에 다시 접속한 것이다. 게임상에선 벌써 8시간이 지났다.
[가수면 모드를 해제합니다.]
“아직 새벽인가. 내가 너무 일찍 잤군.”
차가운 공기가 폐 속에 들어오는 걸 느끼며 아직도 어두운 하늘을 보면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에게 걸었던 무중력 마법을 해제했다.
“으, 무중력 상태로 자는 건 좋은데 다시 중력을 느끼니 서 있기가 힘들군. 아이템 창.”
아이템 창이 나오자마자 데네브는 ‘연금술의 모든 것’을 꺼냈다.
“오랜만에 꺼내네. 스승님, 제가 당신의 뒤를 이어서 계속 이 책을 쓰게 됐군요.”
데네브는 평평한 바위에 앉아 깃펜을 꺼내 책 뒷면 공백 페이지에 화약에 대해 적기 시작했다. 까먹지 않기 위해서였다.
서걱서걱.
꼬로록!
“배고프네…….”
데네브는 아직 자고 있는 엘프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조금 있으면 일어날 시간이니 식사 준비나 해야겠다. 저렇게 아름다운 미녀들을 굶길 수야 없지. 아공간 오픈.”
아공간에서 재료를 꺼내는 데네브였다.
“재료가 별로 없네. 뭐, 곧 마을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파이어 볼트.”
화악!
장작에 불을 붙이고 프라이팬을 올렸다. 오늘 아침은 베이컨 요리였다.
치지지지지. 치지지지.
“으으윽! 맛있는 냄새. 김치, 밥이랑 같이 먹으면 최고인데…….”
촤아아아!
“어? 웬 물소리?”
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계곡이었다.
“아…….”
엘레나였다. 엘레나가 일행이 자고 있는 사이에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데네브를 눈치 채지 못한 채 반대편을 보고 있었다. 그 덕분에 데네브는 엘레나의 나신을 적나라하게 볼 수가 있었다.
“예쁘다.”
풀어헤친 젖은 머리카락,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흰 살결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었다.
데네브는 그 모습을 그저 멍하니 보고 말았다.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아니지, 잠깐…….’
데네브는 얼른 자신의 엄지손톱만 한 돌멩이를 주웠다.
“이 멍청아!”
따악!
“꺅!”
풍덩!
데네브는 돌멩이를 힘껏 던져서 엘레나의 머리를 맞췄다.
그리고 엘레나는 그 돌을 맞고 물속으로 머리를 처박았다.
“나이스 헤드 샷!”
“데…… 데네브? 어…… 언제 일어났어? 꺄악! 보지 마!”
이제야 데네브를 눈치 채고 물에 몸을 담그는 엘레나였다.
“시끄러! 세상에…… 남자가 옆에서 자고 있는데, 목욕하는 엘프 여자가 어디 있냐? 서…… 설마 엘레나, 넌 그쪽 세계에 몸을 담았던 것이냐?”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짓는 연기를 하면서 데네브는 엘레나를 보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내가 변태로 몰린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야 되니 엘레나 널 희생시키마.’
이른바 ‘다 봐 놓고 뒤집어 씌우기 작전’. 즉, 데네브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작전이었다.
“그…… 그건! 아무튼! 난 그쪽 세계에 한 발짝도 들이지 않았어! 난 아직 처녀이고, 다만 몸이 끈적끈적해서 목욕한 거야!”
‘오오오, 동요하고 있어. 동요하고 있어.’
얼굴이 붉어진 채 횡설수설하는 엘레나를 보고 데네브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러셨어요? 그런데 이걸 어쩌나? 엘레나, 네가 처녀이거나 목욕하게 된 이유는 중요하지 않거든? 중요한 건 남자가 바로 옆에서 자고 있는데, 옷 홀딱 벗은 다음에 대놓고 목욕한 게 잘못이지. 엘레나, 뭐하는 짓?”
“흐윽! 난 그냥 데네브가 자고 있어서, 조용히 하면 안 들킬 것 같아서…….”
“호오, 그러면서 몰래 하는 스릴을 느끼는 건가? 역시 그쪽 세계에…….”
“아냐! 난 아니라고! 아니야! 난 그런 애가 아니라고! 으아아아앙!”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며 절규하는 엘레나였다.
‘이거이거, 내가 잘못해서 앞날이 창창한 엘프 하나 요절시키는 거 아냐? 정신 분열 증세 같은데? 내가 심했나.’
괜히 미안해져서 머리를 긁는 데네브였다.
‘이거 다독여 줘야겠군.’
데네브는 곧장 로브를 벗어서 엘레나에게 다가갔다.
“히익! 오지 마! 오지 마! 제발! 이 변태!”
“어이, 어이. 오해 마.”
기겁하는 엘레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데네브는 부드럽게 웃어 줬다.
“자, 우선 이걸 입어. 옷은 어디 있어? 오늘 일은 아무도 모르게 할게. 괜찮아, 울지 마.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로브로 몸을 덮어서 물에서 나오게 했다.
“저…… 정말? 훌쩍.”
“응, 걱정 마. 자, 옷은 어디 있어?”
“저기…… 저기 있어.”
엘레나는 커다란 바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가서 갈아입어. 안 볼 거니까 걱정 마.”
“훌쩍, 으……응.”
엘레나는 로브를 걸치고는 옷을 갈아 입으러 바위 뒤로 갔다.
“에휴! 괜히 그래 가지고 엘레나만 불쌍하게 만들었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옷을 갈아입은 엘레나가 훌쩍거리며 로브를 들고 나왔다.
“그래, 어느 정도 진정됐어?”
“응.”
“가서 베이컨 먹자. 마침 베이컨 굽고 있었거든.”
“응. 어라? 이 냄새는 뭐야? 탄내가 나는데?”
“엉?”
킁킁!
“으악! 내 베이컨님이!”
베이컨들이 프라이팬에서 석탄 덩어리처럼 타고 있었다.
“내…… 내가 끌게! 나이아스!”
엘레나의 말에 손바닥만 한 파란색의 소녀가 허공에서 나왔다.
“어라?”
‘저건…….’
“정령?”
“나이아스! 물대포!”
“아…… 안 돼!”
물의 정령 나이아스는 소화기만 한 강력한 물줄기를 만들어 타고 있는 프라이팬에 뿌렸다. 그 강력한 물줄기 덕분에 그나마 남아 있던 베이컨들과 프라이팬이 날아가 계곡에 빠진 뒤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후 프라이팬은 건졌지만 베이컨들은 물고기들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고 말았다.
“베이컨님…….”
한동안 계곡에서 데네브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미안해, 데네브. 내가 잘못했어.”
“괜찮다니까, 이미 지나간 건데……. 이제 그만 해.”
“쳇, 난 용서 못해.”
“맞아. 엘레나 언니 덕분에 아침을 굶었으니까.”
“이봐요. 당신들도 이제 그만 해요.”
“으으으…….”
엘레나 덕분에 일행들은 아침을 굶게 되었다. 그래서 데네브를 제외한 다른 엘프들은 엘레나에게 불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엘레나는 정령술사였어?”
데네브는 아침에 보았던 물의 정령을 생각하며 말했다.
“에? 우리 엘프는 선천적으로 정령과 친화력이 있는데다가 정령을 볼 수 있어서 기본으로 2가지 속성의 정령과 계약하는데?”
“그러면 그 정령으로 그 납치범들이나 몬스터들과 싸울 수 있는 거 아냐?”
“그건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면 숲에 피해가 가잖아.”
“아…….”
‘역시 숲의 종족인가…….’
“어머나! 쟤네들 뭐하는 거니?”
“둘이 사귀나?”
“저렇게 꼭 붙어 가지고.”
“결혼해! 결혼해!”
데네브와 엘레나가 꼭 붙어서 이야기를 하자 다른 엘프 아가씨들이 둘을 보면서 온갖 말들을 했다.
“헤에, 점심밥도 굶고 싶으신가 봐요?”
“…….”
“그래, 그렇게 조용해야죠.”
밥을 굶기 싫었는지 엘프 아가씨들은 한동안 조용해졌다.
[엘프 엘레나와의 친밀도가 높아졌습니다.]
‘어라?’
데네브는 눈앞에 나온 알림글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친밀도가 왜 계속 올라가는 거지? 서로 웃고 떠든 것밖에 없는데 왜 그럴까? 뭐, 나야 엘프랑 친해지면 좋은 거지만. 오늘까지 치면 족히 40번은 올라간 것 같은데.’
데네브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웃는 엘레나를 보았다. 청순가련하고 눈이 맑아 보였다.
‘에휴, 기우인가?’
“왜 그래?”
“아, 아냐.”
점심때가 지난 뒤, 데네브 일행은 거대한 나무가 있는 숲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 엘프들의 숲이야. 여기에는 우리 엘프들의 결계가 있어서 인간이나 몬스터는 들어올 수 없어. 메테오를 써도 파괴하는 건 불가능하지. 하지만…….”
엘레나가 데네브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결계 안으로 같이 들어갔다.
“우리랑 손을 잡으면 들어갈 수 있지.”
“헤에, 간단하네.”
엘레나와 데네브가 결계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엘프의 숲을 최초로 발견하셨습니다.]
‘지도에 표시해야지.’
“마을은 여기서 멀어?”
“한 20분 정도 걸어가면 돼.”
데네브가 엘레나에게 웃어 보였다.
“여태까지 길 안내하느라고 수고했어.”
“뭘……. 데네브가 도와줬으니까 우리가 다시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거지.”
[엘프 엘레나와의 친밀도가 높아졌습니다.]
‘또 오르네. 뭐 나한테는 좋은 거니까. 엘프랑 친해지면 얻을 게 많을 테지.’
“그런데 여기 있는 나무들은 비정상적으로 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