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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왠지 반기지 않은 듯 보이는 소율 때문에 예전처럼 당연하게 들어설 수 없었다. 작지만 아담한 선우의 집은 시카고에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마치 그곳으로 가면 자신도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선우의 집은 외로울 때나 아플 때나 쓸쓸할 때 만병통치약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못 이기는 척 끌려 왔는데 소율의 얼굴을 보니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소율의 상태를 몰라서, 어색하고 불편해할지도 몰라서.
“가긴 뭘 가! 소율아, 저 새끼 잡아. 나 저 새끼랑 밤새 이야기 좀 해야 하니까. 응?”
선우가 몸을 가눌 수 없는 것처럼 휘청이며 혀 꼬이는 소리로 응석을 부렸다. 조금 전과 다른 모습에 그는 두 남매의 모습을 구경하며 피식 웃을 뿐이었다. 선우의 연기를 소율이 눈치채지 못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이안 오빠, 내숭 떨지 말고 선우 오빠랑 놀다 가. 내일 당장 출근할 것도 아니잖아. 주말인데. 모처럼 왔으니 늦었지만, 밥도 먹고. 얼굴에 빈속이라고 적혀 있는 것 같은데.”
선우가 소율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내키지 않아 하던 얼굴을 걷고 돌아서려는 그의 발걸음을 돌려세웠다.
“……그래. 고마워.”
처음 생각대로 돌아서야 했다. 만병통치약이든 선우의 집 공기가 아무리 그리워도. 그런데 입으로는 고맙다고 말하며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소율의 뒤를 따라서. 퉁퉁대는 모습까지도 여전히 귀여워서 시선을 뗄 수 없었지만.
“앉아, 아무 곳이나. 처음 온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낯선 얼굴 하지 말고.”
“응? 그래. 아아…….”
여전히 아기자기한 선우의 집은 그대로였으나 7년 전과 달라진 점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검은색의 낡았던 소파 대신 알록달록한 색감의 패브릭 소파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고, 여전히 선우와 소율의 사진으로 도배가 된 한쪽 벽면에는 그가 보지 못한 소율의 고등학교 졸업사진과 대학 입학 사진, 얼마 전임을 증명하는 졸업 사진이 더해져 있었다. 거실 한쪽 귀퉁이엔 선우의 아버지가 키우던 것이라고 선우 어머니가 엄청 애지중지하시던 난초가 화분 갈이를 한 덕분인지 좀 더 늘어나서 거실의 한쪽 귀퉁이를 다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조금 전에 된장찌개를 끓인 듯 구수한 된장 냄새가 진동하는……. 7년 전과 다를 바 없는 그곳만의 향기에 그는 가슴 저 아래가 천천히 데워져 오는 것 같았다. 한기로 가득했던 온몸이 다시 정상체온을 되찾기 시작한 것처럼 여전히 행복한 냄새로 가득했다. 그곳은 그렇게 그대로였다. 그가 많이 변해 버린 것과 달리.
“계속 그러고 있을래? 앉아. 처음 온 사람처럼 두리번거리지 말고.”
“응? 아, 아니…….”
“아, 아니다. 오빠! 얼른 들어가서 옷 갈아입고 이안 오빠 갈아입을 옷도 좀 챙겨 줘. 설마 저렇게 쫙 빼입은 모습으로 우리 식탁에 앉게 할 생각은 아니지? 된장찌개와 어울리는 모습으로 데리고 와. 난 내 식탁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하고 앉는 것 딱 질색이야. 알지?”
“알았다. 제발 그만 좀 해라. 계집애가 어떻게 나이들 수록 엄마를 닮아서 잔소리만 느는 건지. 가자, 이안아. 너 여기 계속 있다가는 소율이한테 잡아먹힐 거야. 저거 아주 사악한 마녀거든. 제 마음에 안 들면 널 찜통에 넣고 삶아 먹어 버리려고 들 테니까. 얼른!”
소율을 향해 선우가 악의적인 멘트를 날렸지만 정작 이안은 잡아먹을 거라는 말에 뜨끔해 어기적대며 따라 걷고 있었다. 그날 소율이 했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잡아먹고 싶다고. 뽀얀 얼굴을 하고 고작 17살밖에 안 된 고등학생이 23살 한창나이의 그를 침대로 밀어붙이고 목덜미에 입술을 내리며 한 말이었다.
과연 그 말뜻을 알기나 할까 생각되었지만, 한순간 소율을 침대로 눕힌 후 작고 아담한 그 가슴을 움켜쥐고 보드랍고 빨간 그 입술을 머금어 보고 싶다는 욕망에 떨었던 그날을 기억하게 해서.
“미친. 이안 오빠 얼굴 좀 봐. 내가 정말 사악한 마녀가 된 줄 알잖아. 안 본 7년 사이 괴상한 여자가 된 줄 알겠다. 오빠, 너는 하나뿐인 동생을 그런 여자로 만들고 싶냐?”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만! 됐고. 경고야. 오빠 넌 내일 아침밥 없으니까 점심까지 거르고 싶으면 계속 그따위로 입 놀려봐.”
“윽! 저 자식 또 지랄이네. 예, 예. 알았습니다. 입 다물겠습니다.”
“그 입은 오늘 아침에도 사고 치더니 하루가 안 가네. 에휴.”
몇 차례 장난스럽게 굽실거리며 그의 손을 잡아끌고 방으로 들어온 선우가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너 봤냐? 우리 소율이 진짜 얼굴? 요조숙녀인 척하는 우리 소율이한테 반쯤 넘어간 얼굴을 하고 서 있던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을 보니 완전히 와르르 무너지지?”
“뭘…… 다 그런 것 아냐?”
“아이고, 이해심도 넓어라. 사실 녀석이 요즘 좀 예민해. 남친과 잘 안 되는지. 그래도 네 덕분에 무사히 통과했다. 안 그랬으면 술 마시고 들어왔다고 아주 애국가 4절까지 노래를 불러댔을 텐데. 후후.”
그러잖아도 그렇게 심하게 취한 상태는 아닌데 왜 저러나 했던 그는 그제야 선우가 왜 취한 척했는지 알 수 있었다. 소율에게 잔소리를 듣지 않아서 좋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침대에 주저앉아 키득대는 선우를 보며 그는 왠지 마음에 걸리는 대목을 짚었다.
“……남친이 있어?”
“야! 당연히 있지. 그럼 24살에 저렇게 예쁜데 사내 녀석들이 가만히 두겠냐? 내 동생이지만 가끔 내가 봐도 죽이게 예쁘다는 생각이 들 정돈데. 네 눈에도 그렇지 않던? 고등학생일 때의 우리 소율이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변했잖아. 하긴 그 무렵의 소율이는 한창 살집이 올라서 귀엽기만 했지 별로였어.”
“…….”
그는 선우의 말을 들으면서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선우의 말처럼 소율은 많이 변해 있었다. 성격도 외모도, 그리고 그를 대해는 태도도. 이젠 몰래 숨어서 훔쳐보거나 설레지 않을 것 같았다. 남친도 있다니 그를 여전히 짝사랑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고.
그런데 묘하게도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가슴 한쪽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마음인지. 설마 7년 전 그때 그 마음으로 자신을 기다리길 바랐던 것인지.
“난 벌써 가슴이 아프다. 저렇게 예쁜 내 동생을 채형이 같은 놈한테 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녀석 술도 안 먹고 말수도 적고. 아주 제 아버지를 똑 닮아서 성실 근면 상징의 캐릭터처럼 구는데 우리 소율이가 그런 채형이에게 평생 만족하며 살 수 있을지…….”
“채형이?”
“기억 안 나? 덩치는 산만 해서 늘 소율이 뒤를 쫄쫄 따라다니던 우리 옆집 변채형 말이야. 변선국 국회의원 아들. 진짜 재미없고 진짜 서민적인 그 아버지를 닮아서 얼마나 시시하게 살겠어. 어휴…… 제발 결혼하겠다는 말만 하지 않기를 바라야지.”
선우가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넋두리처럼 쏟아내는 말을 들으며 그는 7년 전 우연히 본 채형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를 바라보던 눈길이 사뭇 예사롭지 않았던 것도. 아마 그 당시 소율이 그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사납기 이를 데 없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분명히 그 무렵에도 채형은 소율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소율의 남친이 되었다니 인간승리……라고 할까? 오랫동안 기다려서 겨우 얻은 사랑이니 선우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결혼까지 갈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학예 제에서 줄리엣을 연기한다며 어머니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그의 앞에 섰던 소율의 모습과 그 곁에 선 채형……. 두 사람을 보는 그. 그런데 두 사람과 달리 자신은 그렇게 썩 행복해 보이지 않는. 소율이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그 남자 친구가 소율의 바로 곁에서 계속 얼쩡댄다는 것을 처음 알았던 그날의 자신이.
“이런. 너 소율이가 먼저 시집가면 똥차 신세 되는 것 알지? 여친도 없다면서. 결사반대해라, 어떻게든.”
“그럴까? 그래야겠지? 그러려고. 그런데 누가 그래? 나 여친 없다고.”
“뭐야, 그럼 여친 있어? 야, 그러는 놈이 형님이 귀국했는데 데리고 오지도 않아? 당장 인사부터 시켜!”
“미쳤냐? 너처럼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놈한테 내 여친을 소개시켜 주게. 서현이가 그러는데 너 대단했다고 하더라. 아주 돈 주앙(중세 민간 전설에 나오는 바람둥이 귀족의 이름)이었다면서?”
“야! 서현이가 그렇게 입이 가벼운 여자가 아닌데. 아무리 너라고 해도 그런 말까지 했어?”
“서현이가 널 걱정해서 한 말이지.”
“그래도…… 더는 소문 양성하지 마라. 특히 소율이에게는. 걔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다.”
왠지 소율은 몰랐으면 해서 조심스럽게 당부했다.
“소율이도 알아. 너 그렇고 그런 놈이라는 것. 아주 질적으로 나랑 다른 놈이라는 것도. 아마 너 당분간 나랑 놀기 힘들 거다. 예전처럼 우리 집에 들락거리는 것도 힘들 테고. 에고, 쌤통이다. 쌤통이야. 그때 우리 소율이가 나보다 널 더 좋아해서 얼마나 배가 아팠는데…….”
선우가 그의 말에 아주 신난 듯 떠들어대고 있었다. 선우가 미웠다. 그런 말까지 소율에게 전해서. 처음이었다. 선우가 미운 것이. 그 곁에서 그는 몹시도 못나고 이해가 안 되는 자신의 일면에 낯설어서 멍한 얼굴을 하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