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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귀여운 강아지 1화
1부


“설의, 안녕?”
김설의는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김설의. 보드랍고 예쁘장한 이름과 다르게 그는 키도 덩치도 큰 고등학생이었다. 다년간 검도를 배운 덕분에 자세도 반듯했고 외모도 꽤 훤칠했다. 다만, 더러운 성격을 증명하듯 찢어진 눈 끝이 그의 인상을 전체적으로 서늘하고 차갑게 만들고 있었다.
덕분에 가만히 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함부로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데 유독 그에게 다가와 치근대는 한 사람이 있었다. 지금 등 뒤에서 이름을 부른 남자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김설의는 뒤돌아 제게 웃으며 인사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때는 꽃들이 막 절정을 이루기 시작하는 늦은 봄. 민들레 포자가 바람을 타고 둥실둥실 떠오르고, 아침 해는 이미 저 높이 떠 있었다. 서늘하지도 뜨겁지도 않은 따뜻한 볕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리고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얼굴에 드리우는 봄볕만큼이나 다정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이수하였다. 성가시도록 그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이수하.
눈꼬리가 접힐 정도로 수줍게 웃던 이수하는 막상 김설의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시선을 내렸다. 운동화 끝으로 흙바닥을 괜히 문지르다가 눈치를 보듯이 눈동자만을 슬쩍 올렸다. 그러다가 또 눈이 마주치면 바닥으로 향한다.
그렇게 같은 행동이 서너 번쯤 반복됐을까?
“……한 번만 더 고개 숙이면 처맞는다.”
“…….”
슬그머니 얼굴을 든 그는 무표정한 얼굴의 김설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숙이며 배시시 웃었다.
누구의 시선이라도 사로잡을 것 같은 꽃미남이 가만히 웃는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김설의에게 이수하의 존재는 귀찮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토할 것 같으니까 예쁜 척하지 마라.”
“나 예뻐?”
예쁜 얼굴에 혹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아니, 혹한 일 자체가 없지만 어쨌든 매일같이 보는 매끈한 얼굴은 이제 익숙하다 못해 지겹기까지 했다.
“미친 새끼.”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하지만 김설의는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침을 뱉는 수고보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을 택했다. 설의는 그에게서 더 빨리 멀어지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애초에 돌아봐서는 안 됐다. 부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외면해야 했음에도 무의식중에 뒤돌고 말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앞만 보고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이수하는 ‘설의.’ 하고 입을 열었다. 설의, 김설의. 그 이름 안에는 간절한 애정과 빛나는 동경이 가득했다.
들리지 않는다. 않는다, 않는…… 씨발.
무시한 채 성큼성큼 걷던 김설의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 상황이 정말 질린다는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어느새 고개는 뒤로 돌아가 있다.
“…….”
물기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던 이수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주인에게 잔뜩 혼난 강아지처럼 축 처진 눈꼬리에는 서러움이 번져 있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손끝이 간질간질해지며 답답해졌다.
“아, 진짜.”
“…….”
터져 나오는 짜증을 억지로 꾹꾹 눌러 담으며 뒷머리를 헤집었다. 머리로는 그냥 무시하고 가자. 저 자식도 생각이 있으면 저러다 말겠지. 생각하면서도 결국은 ‘야.’ 그 한 마디를 내뱉으며 손을 까딱 저었다.
“빨리 와.”
비를 잔뜩 맞은 것처럼 우울한 빛이 가득 번져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지며 뺨이 봉긋하게 솟아올랐다.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이 팔락팔락거릴 정도로 순식간에 뛰어온 이수하가 김설의 앞에서 방글방글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까지 울상을 지었던 사람답지 않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설의야.”
김설의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뺨에 감기는 바람만큼이나 부드러웠지만, 그 이름의 주인공은 싸늘했다.
“아, 진짜 짜증 난다.”
못마땅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어디 아파?’ 하고 이수하가 물어 왔다.
입을 달싹이던 김설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대답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딱히 대답할 가치도 없었다. 더 이상 말을 섞어 봤자 제 속만 터지겠다 싶어 돌아서자 이수하가 옆에 졸랑졸랑 따라붙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아니,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맹렬하게 쫓으며 걷고 있었다.
“설의, 숙제했어? 안 했으면 내가…….”
“상관 말고 그냥 닥쳐.”
“어? 응…….”
교문이 가까워질수록 시끄러워지는 틈에서 김설의는 그저 앞만 보면서 걷고 있었다. 단지 그뿐이었지만, 시선이 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등하교 시간뿐 아니라 길거리를 걷고 있어도 어렵지 않게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김설의에게 향하는 것들은 아니었다.
묵묵히 앞을 보며 걷던 김설의가 고개를 돌렸다.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이수하가 깜짝 놀란 듯 헛숨을 들이키다가 이내 눈을 접어 웃었다. 누군가에게는 지겨울 만큼 익숙하고, 또 다른 누구들에게는 동경과 선망을 불러일으키는 미소였다.
“이수하. 넌 뭐가 그렇게 재밌냐?”
“드디어 내 이름 불러 주네.”
기쁘다.
속삭이듯 중얼거린 이수하가 그의 옆에 서자 좀 더 노골적인 시선들이 달라붙었다. 저들끼리 수군대는 소리가 김설의의 귓가에 들릴 만큼 커졌다.
이수하, 이수하, 이수하. 이수하.
지난 십 몇 년간 지겹게 들은 이름이 또다시 귓가로 쏟아졌다. 김설의의 눈매가 서늘해지며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챈 이수하가 입술을 안쪽으로 말며 눈치를 살짝 봤다.
두 사람을 힐끔대던 아이들 틈에서 급기야 ‘이수하 옆에 있으니 김설의가 더 성격 더러워 보인다.’ 하는 말이 터져 나왔다. 결국, 자신의 이름까지 호출당하자 더는 참지 못한 김설의가 수군대는 무리에게 시선을 던졌다.
졸지에 뾰족한 시선을 받은 학생들이 흠칫 놀랐다가 더욱더 빠른 소리로 소곤대면서 두 사람 곁을 지나갔다.
이것 역시 이력이 날 정도로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
가뜩이나 눈 끝이 찢어져 입을 다물고 있으면 차가워 보이는데 작정하고 인상까지 쓰자, 김설의의 얼굴은그야말로 누구 한 명 걸리기만 하면 곤죽을 먹일 것처럼 흉흉했다.
턱을 조금 내린 채 눈을 치켜뜨고 보던 이수하가 그의 셔츠 자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상대해 주고 싶지 않아 의도적으로 무시하자 이번엔 좀 더 힘주어 꾹꾹 잡아당겼다.
“미안, 설의.”
지금 이게 이수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그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수하 때문에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듣고 있는 것도 맞았다.
“뭐.”
“화났어?”
“신경 꺼.”
화났냐고? 글쎄. 이걸 화났다고 해야 하는 건가.
이수하와 알고 지낸 게 벌써 열 손가락을 꼽아도 넘을 만큼 오래되었다. 흔히들 소꿉친구라고 하던가? 아니면 불알친구?
얼굴이 잘나다 못해 빛나는 이수하와 비교 아닌 비교를 당한 것도 그만큼 길었다. 그깟 얼굴 껍데기가 뭐라고, 결국 그냥 겉가죽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럼에도 얼굴이 주는 영향력은 정말 컸다.
이수하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싸늘해졌다. 어릴 때는 그래도 덩치도 조그맣고 여렸으니까 이해했지, 지금은 180센티미터가 넘는 사내새끼가 치대고 엉겨 붙고. 다른 애들은 다정하고 상냥하다는 말투도 솔직히 닭살 돋았다.
김설의는 새삼스럽게 제 옆에 선 이를 훑었다. 영락없이 여자애로 보이던 예전과는 많이 다르지만, 여전히 예쁘장했다.
어릴 적 이수하는 자신의 얼굴을 싫어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얼굴 덕을 보는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이수하가 이득을 보든지 말든지는 뭐 아무래도 좋았다. 김설의는 애초에 그가 어떻게 생겼던지 관심이 없었다.
귀찮은 불알친구. 그에게 가지는 감정은 그게 전부인데 그래서 어쩌라고.
관심이 없으니까 부러움 역시 없었다. 그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이 이수하를 찬양하든 숭배하든 딴 세상 일이었다. 하지만 이수하를 높이기 위해 김설의의 머리채를 잡고 흔든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동안 미녀와 야수라든가, 부터 돌쇠와 마님, 심지어는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개소리까지 수도 없이 들었다. 보통은 이수하가 좋고 예쁜 것들이었고 김설의가 악독하고 나쁜 것이었다.
그래, 뭐 그것도 넓게 생각하면 이해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뒤에서 뭐라고 지껄이던 그거야 본인들의 마음이니까. 하지만 들으라는 듯 대놓고 떠드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었다.
당연히 그들을 보는 시선이 고울 리 없었고, 그럼 또 아이들은 굳은 얼굴의 그를 보고 무서워했다.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비호감도가 쌓이다 보니 이제 와서는 어떻게 수습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더 이상 김설의를 언급하지만 않는다면.
찬양을 하려면 이수하만 치켜세우고 부둥부둥 해 주면 되지 왜 꼭 자신까지 끌어들여 곁다리 취급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수하와 불알친구인 것이 잘못은 아니잖아.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수하와 엮이지 않을 것이다.
“설의, 화 풀어.”
좀처럼 인상을 풀지 않자 녀석이 또다시 이름을 부른다. 눈치를 보는 것이다.
“이수하, 너도 참…….”
그래도 어떻게 보면 하늘은 공평하게도 이수하에게 좋은 것만 주진 않았다. 특출나게 어여쁜 얼굴을 주고 좆같은 성격까지 같이 주셨다. 김설의가 이수하를 부러워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였다. 겉만 멀쩡하면 뭐 하나. 알맹이가 저 꼴인데.
어릴 때부터 특유의 소심함으로 징징거리고 엉겨 붙기 일쑤였던 이수하는 열아홉 살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했다. 김설의가 조금만 무시하거나 화를 내면 금방 비 맞은 강아지같이 처량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김설의의 시선이 자신의 교복 셔츠 끝자락을 소심하게 쥐고 있는 이수하에게 향했다. 그만 좀 놔 달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옷자락을 잡고 있는 손의 힘은 풀리지 않았다.
어릴 때 영향인지 이수하는 김설의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아니,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고분고분했다. 하지만 가끔 이상한 데서 고집을 피웠다.
그 이상한 고집은 주로 스킨십에 관련된 거였다. 마치 꿀을 찾는 꿀벌처럼 달라붙는데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나아진 거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도 때도 없이 손을 잡거나 어깨를 끌어안으려 했으니까. 진심으로 개지랄하자 저도 놀랐는지 최근에 좀 잦아든 게 이 정도였다.
그래도 오늘은 이쯤에서 곱지 않은 아이들 시선을 치워 버리고 싶었다.
“좀 떨어져서 걸어.”
“왜 화났는데?”
축 처진 어깨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이수하는 충분히 처연해 보였지만 그를 보는 김설의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내가 화가 나 보이냐?”
탁, 손을 쳐 내자 이수하가 금방 입매를 굳혔다. 길게 뻗은 눈매와 달리 둥근 눈 끝이 반짝였다. 이수하가 지질한 것도, 그 지질한 남자와 비교당하는 것도 이제는 일상이 돼 버려서 화도 나지 않았다.
“나 내치지 마.”
“지랄 좀 하지 마. 여기서 그 말이 왜 나오냐?”
“김설의, 설의야.”
조금이라도 밀어 내려거나 거부하려고 하면 이수하는 저런 얼굴을 하고 엉겨 붙는다. 김설의가 받아 주지 않으면 죽어 버릴 것처럼. 그러면 결국 그는 이수하에게 곁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받아 몸에 밴 탓도 있고, 두 사람에게는 그게 ‘보통’이기도 했다.
“아침부터 왜 이렇게 질척거려?”
“……이 정도도 안 돼?”
“됐다, 됐어. 말을 말자.”
싸늘한 얼굴의 김설의가 돌아서자 몇 초간 침묵하던 이수하가 다시 졸졸 쫓아온다. 만약 자신이었으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침을 퉤 뱉고 욕을 한 바가지 했을 것 같은데 이수하는 자존심도 없나 보다.
하긴 얘한테 뭘 바랄까.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김설의는 익숙한 발소리를 무시한 채로 교문 안으로 들어섰고 그 뒤를 이수하가 따랐다.

어차피 같은 반이라 오래 떨어져 있을 수는 없어도 등굣길만큼은 편하게 오고 싶었는데, 오늘도 역시 실패였다. 곱지 않은 눈으로 이수하를 노려봐도 당사자는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입을 벌려 웃는다.
객관적으로 보기 좋은 웃음이었지만 김설의에게 이수하는 객관적으로 평가할 가치도 없었다. 녀석은 그냥 사람 1에 지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쟤가 내 애인 될 것도 아닌데 얼굴이 잘생기고 못생기고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콧방귀를 한 번 뀐 김설의는 인상을 쓰며 또 부질없는 한마디를 내던졌다.
“좀 떨어져, 인마.”
“왜? 같이 가자.”
이수하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 떨어트리려고 해 봤지만 그때뿐이고 곧 다시 엉겨 붙었다. 떨어져, 하고 싸늘하게 말해도 꿈쩍도 안 한다. 예전에는 조금만 얼굴을 구겨도 기가 팍 죽어서 꼬리를 말았는데 요즘은 모르는 척 웃는다.
이수하는 교실에 들어서고도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어제 뭐 했어? 손바닥이 딱딱하네.”
슬쩍 눈치 보듯 힐끔거리며 손을 맞잡았다. 털어 내려고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아예 무시하자 그 틈에 이수하가 손깍지를 꼈다. 일부러 주먹을 쥐었는데도 끝내 파고든 손가락이 손바닥을 감싸 쥐었다. 틈 없이 달라붙은 손 사이로 봄의 열기가 어룽거렸다.
“이런 게 좋냐?”
“응.”
수줍게 내리깔았던 눈동자가 위로 떠오르며 기다랗게 뻗은 속눈썹이 팔락거리는 광경은 충분히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놨다.
“좋아.”
물론, 그 대상이 김설의가 아닐 때 이야기였다.
같은 남자 손을 잡아 봤자 불쾌하기만 하던데 이수하는 지나칠 정도로 스킨십을 좋아했다. 하지 말라 말하고, 화내고, 때로는 차갑게 쳐 내도 변함없었다. 이게 10년 넘게 반복되다 보니 이제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아이고, 내 팔자야.
새삼스럽게 자신의 삶에 회의감을 느낀 김설의가 한숨을 내쉬자 이수하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 왔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그를 보는 눈은 냇가의 조약돌처럼 새카맣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김설의의 마음을 채우는 것은 귀찮음이었고, 다시금 이수하의 팔을 쳐 내는 손은 냉정했다. 철썩, 낯설고 차가운 소리와 함께 내쳐진 팔을 잠시 내려다보던 이수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
“…….”
“야, 담임 왔다.”
내리꽂히는 시선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때맞춰 등장한 담임이 출석부를 두어 번 두드렸다. 뺨이 따가울 정도로 빤히 보던 이수하가 김설의에게서 겨우 고개를 돌렸다.
하. 김설의는 저도 모르게 숨을 토해 냈다. 한 번만 더 건드리면 진심으로 화내려고 했는데 알아차린 것을 보면 눈치가 빨랐다. 역시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한 거였다.
이수하에게서 벗어나자 쏟아지던 시선들 역시 사라졌다. 교실 안에 있는 녀석의 추종자들이 김설의를 노려보는 것을 그만 둔 모양이다.
“진짜 귀찮네.”
김설의가 처음부터 아이들로부터 기피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때에는 남자애들 사이에서 항상 인기투표 1위였고, 체육 시간에 짝을 지어서 뭘 하는 게 있으면 모두 같이하고 싶다며 난리였다. 중학생 초반까지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김설의는 아웃사이더였다.

김설의와 이수하의 인연은 아주 오래되었다. 아직 정체성이 완전하게 형성되지 못한 일곱 살, 두 사람의 시작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토록 끈질기고 긴 연의 시작은 김설의의 의사는 하나도 반영되지 않은 아주 우연한 것이었다. 이수하가 그의 동네에, 정확히는 옆집으로 이사를 오면서부터였다.
낮은 이층집의 평범한 김설의네와 달리 옆집은 그야말로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3층 주택이었지만 그런 건 뭐 사소한 거니까.
이사한 첫날, 이수하의 어머니가 이사 기념으로 떡을 돌린다며 아직 어렸던 이수하의 손을 붙들고 찾아왔다.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열어 놓은 창문 틈으로 햇살이 낮게 내리기 시작한 늦은 오후였을 것이다.
당시 엄마는 저녁밥을 하는 중이었고, 김설의는 유치원을 마치고 거실에 있었다.
이렇게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때, 작은형과 싸우고…… 아니, 일방적으로 처맞고 있었으니까.
어릴 때에는 보통 한두 살의 나이 차이가 꽤 많은 것을 좌우한다. 키, 덩치, 힘까지. 김설의보다 세 살 많은 둘째 형은 어린 동생을 압박하고 괴롭히는 무법자에 지나지 않았다.
한 손에는 김이 펄펄 나는 시루떡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작고 하얀 손을 붙들고 왔던 이수하의 어머니는 개싸움을 하는 형제를 놀란 눈으로 봤다. 엄마는 괜히 민망하셨는지 그만하라고 했지만 그만둘 리가.
형이 김설의의 머리를 쥐어박았고, 김설의는 그 손을 피가 비칠 정도로 야무지게 물었다. 결국, 두 사람 다 등짝 한 대씩 얻어맞은 후에야 떨어졌고, 작은형은 방문을 쾅 하고 닫았다가 다시 슬쩍 열었다.
바람이 불어서 닫힌 거지, 내가 닫은 게 아니고……. 전 국민 자녀들 베스트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리고 그때 김설의는 이수하를 처음 봤다. 제 엄마 다리 사이에서 고개를 빠끔히 내밀던 어린아이는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움츠리며 다시 뒤로 숨었다. 그냥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왜 저렇게 놀래? 저쪽이 너무 놀라니까 그가 되레 더 놀랐다.
고개를 갸웃하던 김설의는 곧 제 몰골이 정상이 아니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했다.
‘어휴, 이사 오셨나 보네. 서 있지 말고 좀 들어와요.’
엄마의 권유에 녀석의 어머니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들어오셨고, 설의는 그제야 다리에 달랑달랑 매달리다시피 한 이수하와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수하야.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해야지? 응?”
아줌마가 제가 잡고 있는 자그마한 손을 당기며 다정하게 말했지만 이수하는 도리질을 쳤다. 제 엄마의 바짓단이 무슨 구원 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김설의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곤 볼록 튀어나온 하얗고 둥근 뺨이 전부였다.
까만 눈과 머리카락, 하얀 뺨과 그 위를 덮은 발그레한 홍조. 어린 그가 보기에도 무척 예쁜 얼굴이었다.
“야, 놀자.”
툭 내뱉은 말에 작고 둥근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김설의는 이수하의 손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놀랄 정도로 쉽게 딸려 오는 몸뚱이에 순간 당황했지만 금방 표정을 수습하고 손을 놨다.
“난 김설의인데.”
“…….”
응당 돌아오는 것이 있어야 함에도 조개처럼 꽉 다물린 이수하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노란 양말을 신은 발끝이 서로 마주 닿은 채 꿈지럭댔고 시선은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좀 낯을 가려서. 수하야, 친구한테 이름 말해 봐.”
“…….”
“미안, 설의라고 했니? 얘 이름은 수하야, 이수하.”
난 얘한테 물어봤는데 왜 아줌마가 대답해요? 입 안을 가득 채운 말을 내뱉기도 전에 엄마가 먼저 말했다.
“아이고, 딸인가 보네. 우리는 아들만 셋인데. 어쩜 이렇게 예쁠까.”
“우리 애도 아들이에요.”
“어머, 어머. 진짜? 아들이 왜 이렇게 예쁘대. 올망졸망한 게 너무 귀엽네.”
그때쯤 김설의의 관심은 반응 없는 또래 아이에게서 오락기로 옮겨 간 지 오래였고, 그 뚱한 옆모습을 이수하가 힐끔힐끔 봤다.
3년간 부녀회장을 연임한 엄마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이수하네 어머니와 금방 친해졌다. 이웃사촌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두 아이가 같은 나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이수하는 자연스럽게 김설의가 등원 중인 유치원에 같이 다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