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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귀여운 강아지 2화
당시 녀석은 시골에서 막 온 탓에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엄마에게 듣기로는 몸이 안 좋아서 공기 좋고 물 좋은 시골에서 살다 왔다고 했다. 말투가 할아버지와 비슷했고 억양도 좀 다르다 보니 또래 아이들로부터 자주 놀림을 받았다.
원래 아이들이란 천진한 잔인함을 갖고 있어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점을 보이면 집요하게 파고들어 놀렸다. 딱히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직 여물지 않은 마음에 상처를 내기에는 충분했다. 특히 이수하처럼 조용하면 더 그렇겠지.
전에 살던 시골에는 60년은 더 사신 어른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이수하가 또래와 지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소심한 탓에 누가 조금만 놀라게 해도 하얗게 질리는데 놀림이야 오죽했을까.
이수하가 말만 하면 아이들이 와다다다, 달려들어 그 말투를 따라 했다. 해맑게 웃으면서 ‘시골에서 왔대요, 시골에서 왔대요.’ 하고 놀리는 건 기본이었다.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아이들이 아는지 모르겠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별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놀림받는 데는 말투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때 이수하는 어머니의 취향인지 모르겠지만, 예쁜 옷들을 입고 다녔다. 치마를 입는 건 아니었지만, 세일러복 스타일의 셔츠라던가, 동물 귀가 달린 후드, 그게 아니어도 눈에 띄는 색을 자주 입었다. 노란색, 주황색, 보라색. 심지어 분홍색도 있었다.
‘엄마, 이수하 옷 때문에 유치원에서……’
놀림당하던데, 하는 말은 엄마의 단호한 말과 함께 사그라졌다.
‘수하 예쁘잖아. 얼마나 잘 어울리니. 요정같이 귀엽잖아.’
요정같이. 그 요정같이가 문제였다. 그때 이수하는 지나치게 요정 같았다.
차라리 본인이 당당하면 상관없겠는데 이수하는 낯가림이 심하고 소심했다. 가만히 보면 자신도 그런 옷을 입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은데 차마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니 아이들이 놀려도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옷자락을 쥘 뿐이었다.
그리고 김설의는 그런 이수하가 못마땅했다. 김설의의 위에는 폭군 같은 형이 둘이나 있어서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하지 않으면 따까리로 살 수밖에 없었다. 정글 같은 집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같이 망나니 폭군이 돼야 했으니 그런 김설의가 보는 이수하는 한심함, 그 자체였다.
유치원에서 종종 놀림당하는 이수하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관심 없었다. 무리에 끼어서 같이 놀리지도 않았지만 도와주지도 않았다. 형들의 갈굼과 괴롭힘 속에 사는 처지에서 보면 저런 건 스스로 헤쳐 나가야 했다.
이수하가 별다르게 반항을 하거나 선생님들에게 이르는 등의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놀림의 강도는 점점 강해졌다.
괴롭힘이 가장 절정일 때는 일부 짓궂은 놈들이 정말 남자애인지 확인해 본다며 이수하의 바지를 홀랑, 까기도 했다.
김설의는 이수하가 당연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동글동글한 눈매를 찌푸리며 말없이 바지를 끌어 올렸다. 이수하로부터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자 애들은 바짝 약이 올라 더더욱 괴롭혔다.
아니, 그래. 생각해 보면 그때 또래들이 아무리 괴롭혀도 녀석은 눈물 한 방울 짜내지 않았다. 눈꼬리가 비스듬하게 떨어져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지만 결국 참아 넘겼다.
그래도 큰 충격을 받긴 한 것 같았다. 도시에 와서 만난 또래와 잘 지내기는커녕 놀림과 괴롭힘만 당한 탓에. 아니, 어쩌면 인생 대부분을 시골에서 주위 어른들로부터 독보적인 예쁨만을 받고 자란 탓에 충격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김설의마저 못 본 척하자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는지 이수하는 하루하루 얼굴이 어두워지고 시선이 점점 더 바닥에서 헤맸다.
때로는 물리적인 폭력보다 정신적 폭력이 더 깊고 잔인하다. 특히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어린 시절에는 그 상처가 더 날카롭게 박힌다.
급기야 이수하는 유치원에 가는 것을 거부했다. 유치원 버스가 집 앞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인 유치원 선생님이 이수하 집에 들어가 데리고 나오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등원 거부는 하루, 이틀…… 일주일을 지나서 무려 2주나 계속되었다.
그 사실을 굳이 말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에 김설의는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자기 아들도 아닌데 엄마가 무슨 수로 해결을 하겠는가. 선생님이 데리러 와도 안 간다는데, 엄마가 가잔다고 이수하가 갈 것도 아니고.
그사이 제 아들을 어르고 달랜 옆집 아줌마는 어찌어찌 이수하가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하소연 겸 고민 상담을 위해 엄마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털어놓았으니까.
아직 애들이 어려서 그런 거니 걱정 말라고 위로하며, 이수하의 엄마를 돌려보낸 엄마는 그 즉시 몽둥이를 쥐고 김설의를 찾았다.
당시 큰형과 팔씨름을 하고 있던 김설의는 거실로 끌려 나와 공개적으로 맞았다. 느닷없이 봉변당한 김설의는 맞아서 발개진 곳을 손으로 문지르며 치솟는 울음을 참아야 했다. 아파서가 아니라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 이놈의 자식. 내가 수하랑 잘 지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뭘 어떻게 했기에 걔가 유치원에 안 간다고 그래? 너도 같이 괴롭힌 거 아니야?”
아니라고 말해도 엄마는 믿지 않았다. 그 아프다는 빗자루 막대 부분으로 엉덩이를 맞다가 결국 북받치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관심도 없다고, 이수하는!”
이웃사촌한테 관심이 없다는 게 말이 되냐고 더 혼났다. 더 짜증 나는 건 자신이 맞는 것을 본 큰형 새끼가 방에 있던 작은형까지 불러와 킬킬거리며 웃는 것이었다.
아니, 왜 내가 이수하를 지켜 줘야 하는데. 이수하가 뭐라고.
물론 지금 생각하면 유치원 애들이 이수하에게 지나쳤다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 당시에 김설의는 녀석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빗자루로 맞아 새빨갛게 달아오른 엉덩이를 두 손으로 조물조물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옆에서 작은형 새끼가 ‘엄마, 김설의 얘 우는데요.’ 하고 깐족거렸지만, 그때는 그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입술이라도 깨물지 않으면 형 말대로 진짜 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는 가차 없었다. 책임지고 이수하와 놀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는 엄포가 이어졌다.
“수하는 가뜩이나 낯가리는데 네가 도와줘야지. 우리 막내 할 수 있지, 응?”
일곱 살 김설의는 반항했지만, 어머니는 강력했고 결국 질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 날 엄마와 함께 옆집에 찾았다. 엄마는 아줌마에게 차나 한잔하자고 권했고 김설의는 이수하의 방 앞에 억지로 들이밀어졌다.
“야, 나 들어간다.”
노크도 하지 않고 그냥 문을 벌컥 열었다. 온갖 장난감이 가득한 방구석에서 이수하가 무릎을 끌어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헐.”
이수하를 만나러 왔지만, 막상 들어오니 방 안을 꽉 채운 장난감에 더 관심이 갔다.
장난감 진짜 많다. 아, 저거 마트 갔을 때 엄마한테 사 달라고 했다가 꿀밤 맞은 건데. 와, 저거는 나온 지 얼마 안 된 건데. 이런 데서 살면 온종일 심심하지 않겠다. 형들 눈치 볼 일도 없고.
구석에 쭈그리고 있던 이수하는 갑자기 들이닥친 김설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까만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옅은 놀라움과 짙은 의문이었다.
자꾸만 장난감으로 향하려는 시선을 겨우 붙들고 이수하에게 말했다.
“가자.”
대답을 들을 틈도 없이 손목을 붙잡고 일으켰다. 첫날 그랬던 것처럼 이수하의 작은 몸뚱이는 열없이 끌려왔다.
그렇게 이수하는 유치원에 다시 가게 됐다.
그날은 기분이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작은형과 한바탕했기 때문이다. 작은형 새끼는 사람이 아니라 악마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악랄하고 못될 수 없다. 나이가 많다는, 힘이 더 세다는 이유로 말도 안 되게 괴롭혔다.
쌓인 분노를 풀지도 못하고 속으로 삼키고 있던 그때, 김설의는 녀석들의 만행을 목격하고 말았다. 전부터 죽자고 이수하를 괴롭히던 꼬맹이들은 그날도 선생님이 잠깐 안 보이는 틈을 타 열심히 녀석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평소라면 이수하가 해결할 일이라 생각해서 그냥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당하고만 있는 이수하의 모습이 그날 아침 자신의 모습과 겹쳐졌다.
뒤이어 짜증 나는 형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던 나날, 이 머릿속에서 터졌다.
만화책을 읽고 있다가 큰형이 오면 빼앗기던 일, TV를 먼저 보고 있다가도 작은형이 오면 채널이 딴 데로 돌아가던 일, 역시 어린애들은 볼이 통통하다며 두 형이 번갈아 가며 양쪽 뺨을 쥐고 흔들던 일 등등.
저 이수하에게는 자신의 모습이, 주위를 뱅뱅 도는 아이들에게는 형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결국 화를 이기지 못한 김설의는 주먹을 꽉 쥐고 소리를 지르며 그들에게 달려들었고, 그 뒤에는 뭐, 상상에 맡기겠다. 다만, 김설의가 아무리 또래보다 키가 커도 두 명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금세 온몸에 상처 자국이 가득해졌다.
그래도 이제껏 두 명의 형에게 맞은 짬밥이 있기 때문에 당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둘 중 한 명은 코피가 터졌고 한 명은 눈이 밤탱이가 됐다.
아이들은 엉엉 울며 선생님에게 이르러 갔고, 김설의는 승리한 장군처럼 당당하게 섰다. 허리에 손을 척 얹고 뒤를 돌아보자 이수하가 보고 있었다.
그때, 아줌마의 손을 잡고 김설의의 집에 와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뭐라고 딱 정의를 내리긴 어렵지만, 그 까만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선명한 반짝임이었다.
바둑알처럼 유난히 까만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흔히 샛별 같은 눈, 이라고 말하는데 그때 이수하 역시 그랬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김설의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당황이 몰려왔다.
왜, 남, 남자애가 왜 저렇게…….
순수한 동경이 담긴 눈을 선명히 내보이는 이수하에 김설의는 괜히 멋쩍어졌다.
“야. 앞으로 누가 괴롭히면 말해. 내가 다 정리해 줄 테니까.”
그 당시 집에서 최하위 서열이었던 김설의는 누군가가 자신을 동경 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에 매우 우쭐해져 있었다. 한껏 들뜬 그는 과장된 목소리로 말을 툭 내뱉었다. 이수하의 눈이 더 영롱하게 빛났다.
“진…짜?”
“너 몇 월생이야?”
“11월.”
“야, 나 10월생이거든. 이제 너 나보고 형이라고 불러.”
“혀, 혀엉?”
“그래. 형.”
“혀엉, 형.”
그 말을 한 이수하가 통통하고 뽀얀 두 손을 마주 잡고 굼지럭거렸다. 그야말로 툭 누르면 빨간 물이 떨어질 것처럼 양 뺨이 달아올라서는 몸을 배배 꼬고 있던 녀석이 배시시 웃었다.
“어? 아. 서, 설의야. 피, 피.”
“야,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혀, 형, 피, 피.”
“피?”
꿀을 바른 것처럼 반짝이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덜덜 떨리는 이수하의 손가락이 얼굴을 가리키는 것과 동시에 김설의는 코가 뜨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난히 코가 따끔거린다 했더니 결국 코피가 터진 것 같았다.
김설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등으로 코를 문질렀다.
“형……. 괜찮, 아?”
“괜찮아.”
“한쪽…… 더 나는데.”
미친 쌍코피. 그리 오래 살진 않았지만, 김설의 인생에 처음 겪는 쌍코피였다.
헉. 피가 번진 손바닥을 보느라 김설의는 고개를 숙였고 턱 끝을 따라 미지근한 것이 뚝뚝 떨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울멍울멍하던 이수하는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쌍코피 나는 것도 잊을 정도로 놀랐다.
마침 꼬맹이들의 신고를 받고 온 선생님이 하얗게 질린 이수하와 쌍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김설의를 발견했다.
화들짝 놀란 선생님의 긴급한 연락을 받고, 양쪽 집안의 부모님이 우르르 유치원으로 몰려왔다. 처음에는 항의하며 시끄럽게 떠들던 꼬맹이들의 부모님은 그로부터 10분도 채 되지 않아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반년 가까이 묵묵하게 견디던 이수하가 그간 있었던 일 대해 다 불었기 때문이다.
저런 것도 기억하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또박또박 말하는데, 순간 김설의는 저렇게 할 수 있으면서 왜 이제껏 참았는지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연신 죄송하다며 사과하던 엄마도 원인이 밝혀지자 얼굴을 싹 바꾸었다. 물론 그 애들도 다치긴 했지만, 이쪽 역시 쌍코피가 터졌다. 거기다가 싸움의 원인이 이수하를 괴롭힌 저쪽에 있으니 더는 굽실댈 이유가 없었다.
엄마는 아줌마보다 더 흥분했고 결국 꼬맹이들 부모님이 사과하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됐다. 그리고 그날 김설의는 짜장면을 상으로 받았다.
그 뒤로 2인조 꼬맹이는 괴롭히는 대신 끊임없이 이수하 곁을 맴돌며 친해지고 싶다는 뜻을 팍팍 내비쳤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이수하의 관심은 온통 김설의뿐으로 그가 마치 신이라도 되는 듯이 굴었다.
그러나 좋은 추억은 아니었지.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지난 기억을 떠올리던 김설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생각해 보면 아마 그때 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조금이라도 밀어 내려고 하면 불안한 얼굴로 맴도는 게.
초등학교 1학년 때에는 같은 반이 안 됐다고 엉엉 울었었지. 점심시간에 자신과 밥 안 먹고 다른 애들이랑 먹는다고 우울한 얼굴을 했고.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친구 챙겨 주지도 않는다고 엄마한테 한 소리 들었다.
아니, 왜 내 친구가 이수하밖에 없어.
그 당시 김설의는 사내아이들에게 제법 인기가 많았다. 또래보다 훤칠했고 축구, 족구 같은 운동도 곧잘 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남자아이들에게 스포츠를 잘한다는 건 곧 인기인을 말하는 것이었다.
친구들이란 차고 넘칠 만큼 많은 김설의에 비해 이수하에게는 친구라고 불릴 만한 애들이 따로 없었다. 여자애들보다도 하얗고 어여쁜 얼굴은 남자애들에게 흥밋거리가 아니었고,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의 이수하는 그들 사이에서 어딘지 모르게 붕 뜬 존재 같았다.
때문에 녀석에게 동성 친구란 김설의밖에 없었다. 김설의는 딱히 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사람은 둘도 없는 불알친구가 돼 있었다.
아니, 불알을 본 적도 없는데 불알친구는 무슨.
그러나 이수하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아이들은 물론 선생들도 김설의부터 찾았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이수하는 김설의가 나타나야만 얼굴을 풀고 웃었다.
김설의가 아무리 그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었다. 김설의가 놀아 주지 않거나 신경 쓰지 않으면 이수하는 엄마에게 알렸다. 물론 노골적으로 ‘어머님, 아드님이 저랑 안 놀아 줍니다.’ 하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우울하고 처연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설의가…….’ 하고 이름만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을 알아챈 엄마는 그 즉시 김설의를 불렀다. 집 안에 있으면 곧장 끌려갔고 도장에라도 가 있으면 전화를 걸어 호출하기 일쑤였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미 게임은 끝이었다.
마지막엔 결국 엄마가 시키는 대로 서로 껴안고 ‘친하게 지내자.’를 노래처럼 중얼거렸다.
그때는 혼나기 싫어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었다.
엄마는 지나치게 이수하를 좋아했다. 본인 말로는 녀석처럼 참하고 깜찍한 딸을 낳고 싶었는데 현실은 시커먼 아들 셋이라나? 하지만 그 이수하도 시커먼 아들이라는 것을 왜 모르실까.
물론 그만큼 이수하네 아줌마도 김설의에게 잘해 주고 예뻐해 줬지만 글쎄, 친구 엄마랑 잘 지내서 뭐 하냐? 수중에 들어오는 콩고물도 없는 것을.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옛 기억에 김설의는 한숨만 푹 내쉴 뿐이었다.
***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의자 밖으로 한쪽 발을 빼내어 준비하고 있던 아이들은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와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교실을 뛰쳐나갔다. 굶주린 아이들이 운동장 밖으로 쏟아져 나오며 매점까지 이어지는 그들만의 전쟁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열아홉 봄, 지난 2년간 그랬듯 김설의는 운동장 벤치에 누워 있었다. 봄볕이 그대로 얼굴 위로 내려앉으며 따뜻함이 번졌다.
도시락을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벌써 배가 고팠다. 근육량도, 운동량도 많은 김설의에게 도시락 하나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 사실을 엄마에게 어필도 해 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매정한 거절뿐이었다.
‘도시락 하나 싸는 것도 귀찮은데 두 개라니. 네가 직접 싸던가.’
냉정히 말하는 엄마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형들은 이미 졸업했기 때문에 더더욱 찌그러졌다. 괜히 뻗대다가 하나도 안 싸 줄 것 같아서.
매점에 갔다 올까 하는 생각은 들이닥치는 귀찮음에 포기를 했다. 지금 매점에 가면 발 디딜 틈도 없을 터였다.
막 피기 시작하는 꽃봉오리들 사이로 금색 빛이 쏟아져 나왔다. 한쪽 팔로 머리를 받치고 옆으로 누운 김설의는 눈을 감았다. 사실 김설의는 지금 이때가 가장 좋았다.
봄과 여름의 중간. 덥지도 춥지 않은 따뜻한 날씨와 기분 좋은 바람 같은 것들.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아올랐다가 내려앉는 촉감을 느끼던 김설의가 문득 들려오는 소음에 눈을 떴다. 신입생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들이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 저렇게 뛰어다니면 더울 텐데도 잔뜩 신나 보였다.
“좋을 때네.”
김설의도 중학교 때까지는 저렇게 놀았었다.
점심을 먹자마자 운동장에 우르르 몰려가 수업 시작종이 아슬아슬하게 칠 무렵 교실에 앉았다. 한 시간 가까이 뛰어다닌 탓에 온통 땀범벅이었고, 당연히 교복은 척척하게 달라붙고는 했다.
채 가시지 않은 열기가 뺨에 어리고 벌어진 입 사이로는 더운 숨이 훅훅 쏟아졌다.
‘선생 아직 안 왔지?’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다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면 항상 이수하가 있었다. 이수하는 무표정한 얼굴에 눈만 가늘게 뜬 채 김설의를 보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배시시 웃었다.
순간 끼치는 이상한 느낌에 인상을 쓰면 녀석이 웃는 얼굴로 손수건을 건네줬다.
‘땀 닦아.’
‘됐다.’
물론 그것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때, 이수하의 얼굴이, 표정이, 시선이……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기묘했던 그 느낌만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러니까 그때 이수하는 마치…….
“음.”
넓은 운동장에는 축구하는 아이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한편에서는 족구나 농구를 하는 무리도 있었고, 철봉 옆 벤치에서는 여자애들이 과자를 먹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1학년에서부터 이제 막 수험생이 된 3학년까지 적지 않은 숫자의 아이들이 각자 점심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마른 운동장에서 흙바람이 이는 것을 생각 없이 보다가 시선을 돌린 김설의는 생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한 광경을 발견하곤 눈을 깜빡였다.
이수하가 보였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고 앞에 여자애가 있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저 나무 아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슨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애초에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고백을 하면 이루어진다는 이상한 소문이 도는 나무였다.
다른 학교의 전설이라고 하면 보통 자정에 동상이 움직인다든가 과학실의 인체 해부 마네킹이 살아움직인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열세 번째 계단을 밟으면 다른 세계로 떨어진다든가 하는 괴기스러운 것들이 대부분인데, 이 학교는 뭔 놈의 사랑을 이루어 주는 나무 같은 게 존재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뭐, 그렇게라도 짝을 만나고 싶은 솔로들의 한 맺힌 절규를 형상화한 건가.
학교를 세운 사람이 특히 좋아하기라도 한 건지 벚나무는 교정 끝까지 주욱, 연이어 심어져 있었다. 봄이 되면 수많은 가지 끝에 몽글몽글한 꽃이 피어나는 광경 하나는 아주 볼만했다.
그 죽 이어진 수십 그루의 벚나무 중에서도 유독 저 나무는 특별했다. 음, 그러니까 겹벚꽃이라고 하던가? 꽃잎이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가 겹쳐져 더 풍성하고 화려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사랑을 이루어 주니 마니 하는 황당한 소문이 난 듯했다.
당시 녀석은 시골에서 막 온 탓에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엄마에게 듣기로는 몸이 안 좋아서 공기 좋고 물 좋은 시골에서 살다 왔다고 했다. 말투가 할아버지와 비슷했고 억양도 좀 다르다 보니 또래 아이들로부터 자주 놀림을 받았다.
원래 아이들이란 천진한 잔인함을 갖고 있어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점을 보이면 집요하게 파고들어 놀렸다. 딱히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직 여물지 않은 마음에 상처를 내기에는 충분했다. 특히 이수하처럼 조용하면 더 그렇겠지.
전에 살던 시골에는 60년은 더 사신 어른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이수하가 또래와 지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소심한 탓에 누가 조금만 놀라게 해도 하얗게 질리는데 놀림이야 오죽했을까.
이수하가 말만 하면 아이들이 와다다다, 달려들어 그 말투를 따라 했다. 해맑게 웃으면서 ‘시골에서 왔대요, 시골에서 왔대요.’ 하고 놀리는 건 기본이었다.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아이들이 아는지 모르겠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별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놀림받는 데는 말투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때 이수하는 어머니의 취향인지 모르겠지만, 예쁜 옷들을 입고 다녔다. 치마를 입는 건 아니었지만, 세일러복 스타일의 셔츠라던가, 동물 귀가 달린 후드, 그게 아니어도 눈에 띄는 색을 자주 입었다. 노란색, 주황색, 보라색. 심지어 분홍색도 있었다.
‘엄마, 이수하 옷 때문에 유치원에서……’
놀림당하던데, 하는 말은 엄마의 단호한 말과 함께 사그라졌다.
‘수하 예쁘잖아. 얼마나 잘 어울리니. 요정같이 귀엽잖아.’
요정같이. 그 요정같이가 문제였다. 그때 이수하는 지나치게 요정 같았다.
차라리 본인이 당당하면 상관없겠는데 이수하는 낯가림이 심하고 소심했다. 가만히 보면 자신도 그런 옷을 입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은데 차마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니 아이들이 놀려도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옷자락을 쥘 뿐이었다.
그리고 김설의는 그런 이수하가 못마땅했다. 김설의의 위에는 폭군 같은 형이 둘이나 있어서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하지 않으면 따까리로 살 수밖에 없었다. 정글 같은 집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같이 망나니 폭군이 돼야 했으니 그런 김설의가 보는 이수하는 한심함, 그 자체였다.
유치원에서 종종 놀림당하는 이수하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관심 없었다. 무리에 끼어서 같이 놀리지도 않았지만 도와주지도 않았다. 형들의 갈굼과 괴롭힘 속에 사는 처지에서 보면 저런 건 스스로 헤쳐 나가야 했다.
이수하가 별다르게 반항을 하거나 선생님들에게 이르는 등의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놀림의 강도는 점점 강해졌다.
괴롭힘이 가장 절정일 때는 일부 짓궂은 놈들이 정말 남자애인지 확인해 본다며 이수하의 바지를 홀랑, 까기도 했다.
김설의는 이수하가 당연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동글동글한 눈매를 찌푸리며 말없이 바지를 끌어 올렸다. 이수하로부터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자 애들은 바짝 약이 올라 더더욱 괴롭혔다.
아니, 그래. 생각해 보면 그때 또래들이 아무리 괴롭혀도 녀석은 눈물 한 방울 짜내지 않았다. 눈꼬리가 비스듬하게 떨어져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지만 결국 참아 넘겼다.
그래도 큰 충격을 받긴 한 것 같았다. 도시에 와서 만난 또래와 잘 지내기는커녕 놀림과 괴롭힘만 당한 탓에. 아니, 어쩌면 인생 대부분을 시골에서 주위 어른들로부터 독보적인 예쁨만을 받고 자란 탓에 충격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김설의마저 못 본 척하자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는지 이수하는 하루하루 얼굴이 어두워지고 시선이 점점 더 바닥에서 헤맸다.
때로는 물리적인 폭력보다 정신적 폭력이 더 깊고 잔인하다. 특히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어린 시절에는 그 상처가 더 날카롭게 박힌다.
급기야 이수하는 유치원에 가는 것을 거부했다. 유치원 버스가 집 앞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인 유치원 선생님이 이수하 집에 들어가 데리고 나오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등원 거부는 하루, 이틀…… 일주일을 지나서 무려 2주나 계속되었다.
그 사실을 굳이 말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에 김설의는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자기 아들도 아닌데 엄마가 무슨 수로 해결을 하겠는가. 선생님이 데리러 와도 안 간다는데, 엄마가 가잔다고 이수하가 갈 것도 아니고.
그사이 제 아들을 어르고 달랜 옆집 아줌마는 어찌어찌 이수하가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하소연 겸 고민 상담을 위해 엄마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털어놓았으니까.
아직 애들이 어려서 그런 거니 걱정 말라고 위로하며, 이수하의 엄마를 돌려보낸 엄마는 그 즉시 몽둥이를 쥐고 김설의를 찾았다.
당시 큰형과 팔씨름을 하고 있던 김설의는 거실로 끌려 나와 공개적으로 맞았다. 느닷없이 봉변당한 김설의는 맞아서 발개진 곳을 손으로 문지르며 치솟는 울음을 참아야 했다. 아파서가 아니라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 이놈의 자식. 내가 수하랑 잘 지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뭘 어떻게 했기에 걔가 유치원에 안 간다고 그래? 너도 같이 괴롭힌 거 아니야?”
아니라고 말해도 엄마는 믿지 않았다. 그 아프다는 빗자루 막대 부분으로 엉덩이를 맞다가 결국 북받치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관심도 없다고, 이수하는!”
이웃사촌한테 관심이 없다는 게 말이 되냐고 더 혼났다. 더 짜증 나는 건 자신이 맞는 것을 본 큰형 새끼가 방에 있던 작은형까지 불러와 킬킬거리며 웃는 것이었다.
아니, 왜 내가 이수하를 지켜 줘야 하는데. 이수하가 뭐라고.
물론 지금 생각하면 유치원 애들이 이수하에게 지나쳤다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 당시에 김설의는 녀석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빗자루로 맞아 새빨갛게 달아오른 엉덩이를 두 손으로 조물조물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옆에서 작은형 새끼가 ‘엄마, 김설의 얘 우는데요.’ 하고 깐족거렸지만, 그때는 그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입술이라도 깨물지 않으면 형 말대로 진짜 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는 가차 없었다. 책임지고 이수하와 놀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는 엄포가 이어졌다.
“수하는 가뜩이나 낯가리는데 네가 도와줘야지. 우리 막내 할 수 있지, 응?”
일곱 살 김설의는 반항했지만, 어머니는 강력했고 결국 질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 날 엄마와 함께 옆집에 찾았다. 엄마는 아줌마에게 차나 한잔하자고 권했고 김설의는 이수하의 방 앞에 억지로 들이밀어졌다.
“야, 나 들어간다.”
노크도 하지 않고 그냥 문을 벌컥 열었다. 온갖 장난감이 가득한 방구석에서 이수하가 무릎을 끌어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헐.”
이수하를 만나러 왔지만, 막상 들어오니 방 안을 꽉 채운 장난감에 더 관심이 갔다.
장난감 진짜 많다. 아, 저거 마트 갔을 때 엄마한테 사 달라고 했다가 꿀밤 맞은 건데. 와, 저거는 나온 지 얼마 안 된 건데. 이런 데서 살면 온종일 심심하지 않겠다. 형들 눈치 볼 일도 없고.
구석에 쭈그리고 있던 이수하는 갑자기 들이닥친 김설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까만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옅은 놀라움과 짙은 의문이었다.
자꾸만 장난감으로 향하려는 시선을 겨우 붙들고 이수하에게 말했다.
“가자.”
대답을 들을 틈도 없이 손목을 붙잡고 일으켰다. 첫날 그랬던 것처럼 이수하의 작은 몸뚱이는 열없이 끌려왔다.
그렇게 이수하는 유치원에 다시 가게 됐다.
그날은 기분이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작은형과 한바탕했기 때문이다. 작은형 새끼는 사람이 아니라 악마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악랄하고 못될 수 없다. 나이가 많다는, 힘이 더 세다는 이유로 말도 안 되게 괴롭혔다.
쌓인 분노를 풀지도 못하고 속으로 삼키고 있던 그때, 김설의는 녀석들의 만행을 목격하고 말았다. 전부터 죽자고 이수하를 괴롭히던 꼬맹이들은 그날도 선생님이 잠깐 안 보이는 틈을 타 열심히 녀석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평소라면 이수하가 해결할 일이라 생각해서 그냥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당하고만 있는 이수하의 모습이 그날 아침 자신의 모습과 겹쳐졌다.
뒤이어 짜증 나는 형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던 나날, 이 머릿속에서 터졌다.
만화책을 읽고 있다가 큰형이 오면 빼앗기던 일, TV를 먼저 보고 있다가도 작은형이 오면 채널이 딴 데로 돌아가던 일, 역시 어린애들은 볼이 통통하다며 두 형이 번갈아 가며 양쪽 뺨을 쥐고 흔들던 일 등등.
저 이수하에게는 자신의 모습이, 주위를 뱅뱅 도는 아이들에게는 형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결국 화를 이기지 못한 김설의는 주먹을 꽉 쥐고 소리를 지르며 그들에게 달려들었고, 그 뒤에는 뭐, 상상에 맡기겠다. 다만, 김설의가 아무리 또래보다 키가 커도 두 명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금세 온몸에 상처 자국이 가득해졌다.
그래도 이제껏 두 명의 형에게 맞은 짬밥이 있기 때문에 당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둘 중 한 명은 코피가 터졌고 한 명은 눈이 밤탱이가 됐다.
아이들은 엉엉 울며 선생님에게 이르러 갔고, 김설의는 승리한 장군처럼 당당하게 섰다. 허리에 손을 척 얹고 뒤를 돌아보자 이수하가 보고 있었다.
그때, 아줌마의 손을 잡고 김설의의 집에 와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뭐라고 딱 정의를 내리긴 어렵지만, 그 까만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선명한 반짝임이었다.
바둑알처럼 유난히 까만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흔히 샛별 같은 눈, 이라고 말하는데 그때 이수하 역시 그랬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김설의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당황이 몰려왔다.
왜, 남, 남자애가 왜 저렇게…….
순수한 동경이 담긴 눈을 선명히 내보이는 이수하에 김설의는 괜히 멋쩍어졌다.
“야. 앞으로 누가 괴롭히면 말해. 내가 다 정리해 줄 테니까.”
그 당시 집에서 최하위 서열이었던 김설의는 누군가가 자신을 동경 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에 매우 우쭐해져 있었다. 한껏 들뜬 그는 과장된 목소리로 말을 툭 내뱉었다. 이수하의 눈이 더 영롱하게 빛났다.
“진…짜?”
“너 몇 월생이야?”
“11월.”
“야, 나 10월생이거든. 이제 너 나보고 형이라고 불러.”
“혀, 혀엉?”
“그래. 형.”
“혀엉, 형.”
그 말을 한 이수하가 통통하고 뽀얀 두 손을 마주 잡고 굼지럭거렸다. 그야말로 툭 누르면 빨간 물이 떨어질 것처럼 양 뺨이 달아올라서는 몸을 배배 꼬고 있던 녀석이 배시시 웃었다.
“어? 아. 서, 설의야. 피, 피.”
“야,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혀, 형, 피, 피.”
“피?”
꿀을 바른 것처럼 반짝이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덜덜 떨리는 이수하의 손가락이 얼굴을 가리키는 것과 동시에 김설의는 코가 뜨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난히 코가 따끔거린다 했더니 결국 코피가 터진 것 같았다.
김설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등으로 코를 문질렀다.
“형……. 괜찮, 아?”
“괜찮아.”
“한쪽…… 더 나는데.”
미친 쌍코피. 그리 오래 살진 않았지만, 김설의 인생에 처음 겪는 쌍코피였다.
헉. 피가 번진 손바닥을 보느라 김설의는 고개를 숙였고 턱 끝을 따라 미지근한 것이 뚝뚝 떨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울멍울멍하던 이수하는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쌍코피 나는 것도 잊을 정도로 놀랐다.
마침 꼬맹이들의 신고를 받고 온 선생님이 하얗게 질린 이수하와 쌍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김설의를 발견했다.
화들짝 놀란 선생님의 긴급한 연락을 받고, 양쪽 집안의 부모님이 우르르 유치원으로 몰려왔다. 처음에는 항의하며 시끄럽게 떠들던 꼬맹이들의 부모님은 그로부터 10분도 채 되지 않아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반년 가까이 묵묵하게 견디던 이수하가 그간 있었던 일 대해 다 불었기 때문이다.
저런 것도 기억하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또박또박 말하는데, 순간 김설의는 저렇게 할 수 있으면서 왜 이제껏 참았는지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연신 죄송하다며 사과하던 엄마도 원인이 밝혀지자 얼굴을 싹 바꾸었다. 물론 그 애들도 다치긴 했지만, 이쪽 역시 쌍코피가 터졌다. 거기다가 싸움의 원인이 이수하를 괴롭힌 저쪽에 있으니 더는 굽실댈 이유가 없었다.
엄마는 아줌마보다 더 흥분했고 결국 꼬맹이들 부모님이 사과하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됐다. 그리고 그날 김설의는 짜장면을 상으로 받았다.
그 뒤로 2인조 꼬맹이는 괴롭히는 대신 끊임없이 이수하 곁을 맴돌며 친해지고 싶다는 뜻을 팍팍 내비쳤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이수하의 관심은 온통 김설의뿐으로 그가 마치 신이라도 되는 듯이 굴었다.
그러나 좋은 추억은 아니었지.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지난 기억을 떠올리던 김설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생각해 보면 아마 그때 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조금이라도 밀어 내려고 하면 불안한 얼굴로 맴도는 게.
초등학교 1학년 때에는 같은 반이 안 됐다고 엉엉 울었었지. 점심시간에 자신과 밥 안 먹고 다른 애들이랑 먹는다고 우울한 얼굴을 했고.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친구 챙겨 주지도 않는다고 엄마한테 한 소리 들었다.
아니, 왜 내 친구가 이수하밖에 없어.
그 당시 김설의는 사내아이들에게 제법 인기가 많았다. 또래보다 훤칠했고 축구, 족구 같은 운동도 곧잘 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남자아이들에게 스포츠를 잘한다는 건 곧 인기인을 말하는 것이었다.
친구들이란 차고 넘칠 만큼 많은 김설의에 비해 이수하에게는 친구라고 불릴 만한 애들이 따로 없었다. 여자애들보다도 하얗고 어여쁜 얼굴은 남자애들에게 흥밋거리가 아니었고,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의 이수하는 그들 사이에서 어딘지 모르게 붕 뜬 존재 같았다.
때문에 녀석에게 동성 친구란 김설의밖에 없었다. 김설의는 딱히 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사람은 둘도 없는 불알친구가 돼 있었다.
아니, 불알을 본 적도 없는데 불알친구는 무슨.
그러나 이수하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아이들은 물론 선생들도 김설의부터 찾았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이수하는 김설의가 나타나야만 얼굴을 풀고 웃었다.
김설의가 아무리 그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었다. 김설의가 놀아 주지 않거나 신경 쓰지 않으면 이수하는 엄마에게 알렸다. 물론 노골적으로 ‘어머님, 아드님이 저랑 안 놀아 줍니다.’ 하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우울하고 처연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설의가…….’ 하고 이름만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을 알아챈 엄마는 그 즉시 김설의를 불렀다. 집 안에 있으면 곧장 끌려갔고 도장에라도 가 있으면 전화를 걸어 호출하기 일쑤였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미 게임은 끝이었다.
마지막엔 결국 엄마가 시키는 대로 서로 껴안고 ‘친하게 지내자.’를 노래처럼 중얼거렸다.
그때는 혼나기 싫어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었다.
엄마는 지나치게 이수하를 좋아했다. 본인 말로는 녀석처럼 참하고 깜찍한 딸을 낳고 싶었는데 현실은 시커먼 아들 셋이라나? 하지만 그 이수하도 시커먼 아들이라는 것을 왜 모르실까.
물론 그만큼 이수하네 아줌마도 김설의에게 잘해 주고 예뻐해 줬지만 글쎄, 친구 엄마랑 잘 지내서 뭐 하냐? 수중에 들어오는 콩고물도 없는 것을.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옛 기억에 김설의는 한숨만 푹 내쉴 뿐이었다.
***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의자 밖으로 한쪽 발을 빼내어 준비하고 있던 아이들은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와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교실을 뛰쳐나갔다. 굶주린 아이들이 운동장 밖으로 쏟아져 나오며 매점까지 이어지는 그들만의 전쟁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열아홉 봄, 지난 2년간 그랬듯 김설의는 운동장 벤치에 누워 있었다. 봄볕이 그대로 얼굴 위로 내려앉으며 따뜻함이 번졌다.
도시락을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벌써 배가 고팠다. 근육량도, 운동량도 많은 김설의에게 도시락 하나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 사실을 엄마에게 어필도 해 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매정한 거절뿐이었다.
‘도시락 하나 싸는 것도 귀찮은데 두 개라니. 네가 직접 싸던가.’
냉정히 말하는 엄마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형들은 이미 졸업했기 때문에 더더욱 찌그러졌다. 괜히 뻗대다가 하나도 안 싸 줄 것 같아서.
매점에 갔다 올까 하는 생각은 들이닥치는 귀찮음에 포기를 했다. 지금 매점에 가면 발 디딜 틈도 없을 터였다.
막 피기 시작하는 꽃봉오리들 사이로 금색 빛이 쏟아져 나왔다. 한쪽 팔로 머리를 받치고 옆으로 누운 김설의는 눈을 감았다. 사실 김설의는 지금 이때가 가장 좋았다.
봄과 여름의 중간. 덥지도 춥지 않은 따뜻한 날씨와 기분 좋은 바람 같은 것들.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아올랐다가 내려앉는 촉감을 느끼던 김설의가 문득 들려오는 소음에 눈을 떴다. 신입생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들이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 저렇게 뛰어다니면 더울 텐데도 잔뜩 신나 보였다.
“좋을 때네.”
김설의도 중학교 때까지는 저렇게 놀았었다.
점심을 먹자마자 운동장에 우르르 몰려가 수업 시작종이 아슬아슬하게 칠 무렵 교실에 앉았다. 한 시간 가까이 뛰어다닌 탓에 온통 땀범벅이었고, 당연히 교복은 척척하게 달라붙고는 했다.
채 가시지 않은 열기가 뺨에 어리고 벌어진 입 사이로는 더운 숨이 훅훅 쏟아졌다.
‘선생 아직 안 왔지?’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다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면 항상 이수하가 있었다. 이수하는 무표정한 얼굴에 눈만 가늘게 뜬 채 김설의를 보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배시시 웃었다.
순간 끼치는 이상한 느낌에 인상을 쓰면 녀석이 웃는 얼굴로 손수건을 건네줬다.
‘땀 닦아.’
‘됐다.’
물론 그것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때, 이수하의 얼굴이, 표정이, 시선이……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기묘했던 그 느낌만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러니까 그때 이수하는 마치…….
“음.”
넓은 운동장에는 축구하는 아이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한편에서는 족구나 농구를 하는 무리도 있었고, 철봉 옆 벤치에서는 여자애들이 과자를 먹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1학년에서부터 이제 막 수험생이 된 3학년까지 적지 않은 숫자의 아이들이 각자 점심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마른 운동장에서 흙바람이 이는 것을 생각 없이 보다가 시선을 돌린 김설의는 생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한 광경을 발견하곤 눈을 깜빡였다.
이수하가 보였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고 앞에 여자애가 있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저 나무 아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슨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애초에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고백을 하면 이루어진다는 이상한 소문이 도는 나무였다.
다른 학교의 전설이라고 하면 보통 자정에 동상이 움직인다든가 과학실의 인체 해부 마네킹이 살아움직인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열세 번째 계단을 밟으면 다른 세계로 떨어진다든가 하는 괴기스러운 것들이 대부분인데, 이 학교는 뭔 놈의 사랑을 이루어 주는 나무 같은 게 존재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뭐, 그렇게라도 짝을 만나고 싶은 솔로들의 한 맺힌 절규를 형상화한 건가.
학교를 세운 사람이 특히 좋아하기라도 한 건지 벚나무는 교정 끝까지 주욱, 연이어 심어져 있었다. 봄이 되면 수많은 가지 끝에 몽글몽글한 꽃이 피어나는 광경 하나는 아주 볼만했다.
그 죽 이어진 수십 그루의 벚나무 중에서도 유독 저 나무는 특별했다. 음, 그러니까 겹벚꽃이라고 하던가? 꽃잎이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가 겹쳐져 더 풍성하고 화려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사랑을 이루어 주니 마니 하는 황당한 소문이 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