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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귀여운 강아지 3화
이제 막 솜털 같은 꽃잎이 돋아나기 시작한 그 나무 아래에 선, 두 사람은 퍽 다정해 보였다. 여자애는 귀까지 새빨개진 채로 어쩔 줄 몰라 했고, 이수하는 무표정으로 여자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음? 무표정? 이수하가?
이수하는 항상 웃었다. 눈이 마주치면 습관처럼 눈꼬리가 휘었다. 열아홉 남자애한테 배시시라는 단어가 어울릴까 싶지만, 그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웃음이었다.
그러다가 김설의가 화를 내거나 귀찮아하면 새파란 우울이 번졌다.
김설의에게 이수하는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방실방실 웃거나 코끝이 새빨개진 채 우물쭈물하는 게 전부였는데 무표정한 것을 보니 괜히 낯설어 보였다.
뭘까, 고백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잘못 봤나 싶어서 누웠던 몸을 일으켜 좀 더 자세히 보려는 순간, 고개를 푹 숙인 여자애가 후다닥 뛰어갔다. 혼자 남은 이수하는 덤덤한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높이 떠오른 햇볕이 머리 위에 둥그렇게 내려앉으며 빛났다.
김설의는 도로 눕는 대신 턱을 괴고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바닥으로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린 이수하는 고개를 돌리다 김설의를 발견하곤 놀란 듯 흠칫하더니 활짝 웃었다. 평소 보던 그 웃음이었다. 아마 등 뒤에 꼬리가 달려 있었으면 좌우로 세차게 흔들리지 않았을까.
“설의.”
한달음에 달려온 녀석이 품에 안고 있던 샌드위치며, 빵이며, 바나나 우유 같은 것을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모두 김설의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뭔데?”
“배고플까 봐.”
“사 달라고 한 적 없는데?”
“으응, 그치.”
싸늘한 말에 생글생글 웃던 이수하는 민망한 듯 코를 매만졌다.
김설의는 결코 이수하가 고백받아서 짜증 난 것이 아니었다. 녀석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인기가 있어서 샘이 난 것도 물론 아니다. 절대, 자신은 저런 고백 한번 받아 보지 못해서 질투하는 게 아니었다.
“아무튼 이수하는 아니야.”
“어, 왜? 내가 뭐 또 잘못했어?”
기가 팍 죽은 이수하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셔츠 소매 밖으로 빠져나온 손가락 끝이 서로 엉기며 엮였다. 처진 눈꼬리나 시무룩한 표정은 마치 엄마에게 야단맞은 꼬마 같은 모양새다.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이런 소심한 놈이 왜 하루가 멀다고 고백을 받는 것인지.
혹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매력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이수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딱히 다른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알아낸 것이라고는 이리저리 방황하는 이수하의 시선과 발그레한 뺨, 벌어진 입 사이로 흩어지는 숨 같은 것뿐이었다.
“야.”
“응?”
햇볕을 받은 먼지처럼 여기저기 시선을 팔락팔락 던지던 이수하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손등으로 새빨간 뺨을 누르다가 손날로 바람을 만들어 제 얼굴을 식힌다.
날씨가 그렇게 덥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또 우냐?”
“……안 울어.”
“우는 것 같은데.”
“아니야.”
김설의는 검지 끝으로 이수하의 턱을 들어 올렸다.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녀석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고 있었다. 못마땅한 김설의의 시선이 이수하의 얼굴을 훑었다.
“설……!”
콜록콜록, 리코더를 잘못 불렀을 때처럼 삑, 소리를 내던 이수하가 별안간 기침을 해 댔다. 얼굴을 구긴 김설의가 한 발짝 물러서자 두 손을 무릎에 대고 허리를 굽히기까지 했다.
허억, 헉. 이수하는 마치 온 힘을 다해 뛴 사람처럼 헉헉 밭은 숨을 내쉬었다. 중간중간 터지는 기침에 등이 들썩였다.
“뭐 하냐.”
“사, 콜록. 사레가 갑자기.”
“가지가지 한다.”
싸늘하게 내뱉은 김설의가 일렬로 예쁘게 늘어선 간식거리들을 내려다봤다. 배가 고프긴 한데 이걸 먹으면 또 무슨 소문이 날지 모르겠다.
김설의가 망설이는 것을 단번에 알아챈 이수하가 마지막으로 숨을 길게 내쉬고는 빨대를 집었다. 뽁, 소리와 함께 빨대가 꽂힌 우유를 건네준다. 어느새 녀석은 미소 짓고 있었다.
“배고프지?”
“이딴 거 사 오니까 내가 너 괴롭힌다고 소문난 거 아니냐.”
“응?”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동그랗게 뜬 눈이 가증스럽다. 김설의는 조금 복잡한 마음으로 제 손바닥 위에 놓인 노란 우유를 내려다봤다.
“이수하 너랑 내가…….”
이수하와 김설의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았다.
왕자님 이수하. 모범생 이수하. 못하는 게 없는 이수하.
이수하는 학교 공식 ‘왕자님’이었다. 그에 비해 김설의는 왕자님 곁에 붙어 그의 피를 쭉쭉 빨아먹는 찰거머리에 지나지 않았다.
또 이수하는 워낙 유명해 그에 대한 소문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었는데 그중 하나가 어릴 적부터 친구라 함께 붙어 다니는 김설의와 관련한 것이었다. 그 소문은 그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진짜 지랄이다. 왕자님은 무슨 얼어 죽을. 지들끼리 아주 영화를 찍네, 찍어.”
새삼 빡쳐 욕을 내뱉자 이수하가 놀란 얼굴을 한다.
이수하가 일방적으로 김설의에게 들러붙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몰랐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럴만 했다.
선생들에게는 신뢰와 예쁨을 받고 동급생은 물론 후배들까지 그를 동경하고 있다. 공부도 곧잘 해 전교에서 한 손 안에 들고 운동 신경도 좋다.
그러니 아무도 하루걸러 한 번씩 고백받을 정도로 인기 폭발인 이수하가 실은, 좋게 말해서 과묵하고 노골적으로 말하면 일진이라고 소문난 김설의에게 매달리고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거기에 녀석은 쉬는 시간이고 점심시간이고 상관없이 매일 빵이며 우유, 과자 등을 김설의에게 사다 날랐다. 심지어는 도시락까지 바치는 모습이 아주 자주, 여러 번 목격되자 소문은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어 어느덧 진실이 되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믿는다. 그들은 김설의와 이수하가 어떤 관계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저들끼리 이해하고 판단하고 결정지었다.
“네가 내 빵 셔틀이라는 소문 말이야.”
“빵 셔틀? 빵 먹고 싶어?”
이수하가 못 알아듣고 반문한다. 이럴 때 보면 참 눈치가 없다. 어느 모습이 진짜인 건지 모르겠다. 설마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거면 진짜 약삭빠른 여우인 거다.
겉으로만 보면 이수하가 갖다 바치고 있는 건 맞았다. 물론 김설의는 전혀 원하지 않았지만.
사랑과 동경을 받는 교내 최고의 인기남과 그 곁에 있는 불량 학생. 소문은 소문을 만들어 냈고 누구도 그 소문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만약 김설의가 화를 내거나 이수하가 아니라는 말을 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설의는 해명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어이없어 언급 자체를 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이수하 역시 침묵했다는 것인데, 어쨌든 당사자 둘 다 아무 말이 없으니 이제는 모두로부터 실체가 없는 소문 따위가 아니라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일례로 재작년 여름, 버스에서 넘어질 뻔한 여자아이를 한 번 잡아 준 적이 있다. 그녀는 김설의의 얼굴을 보더니 흠칫하며 후다닥 내렸다. 새하얗게 질려서 도망치듯 가는데, 김설의는 그때 제가 동급생들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깨달았다.
그제야 김설의는 이수하에게 ‘내가 너 괴롭힌다는 소문, 왜 해명 안 해?’ 하고 물었다. 눈을 둥그렇게 뜨고 촘촘하게 붙은 속눈썹을 팔락이던 이수하가 돌연 웃었다.
‘설의, 넌 소문 같은 거 신경 안 쓰잖아. 근데 갑자기 왜? 다른 애들이랑 잘 지내 보고 싶어서 그래?’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하지 말라고, 이런 빵 쪼가리 안 줘도 괜찮으니까 그냥 좀 내버려 달라는 말에도 이수하는 모른 척 웃었다. 오히려 다음 날에 더 많은 양의 과자와 도시락, 음료수 등을 김설의 앞에 내려놨다.
갖다 바치는 것들을 못 본 척 외면하면 이수하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우울한 얼굴로 빵 봉지를 쥐었다 놓았다 별 지랄을 다 했다. 그 얄미운 모습에 짜증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한두 번도 아니면서 마치 처음 들어 보는 듯 새삼 처연하게 구는 이수하였다.
“여우 같은 새끼.”
완전히 무시하면 될 텐데 엄마한테 등짝을 맞으며 교육받았던 세월이 적지가 않다 보니 이수하가 울적한 얼굴을 하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걸 저 새끼가 모를 리 없을 테니 저건 일부러 보라고 하는 짓이다.
평소 이수하의 모습을 봤을 때는 교활한 여우보다 멍청한 개가 더 어울렸지만, 가끔 저렇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을 때면 여우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 일진 김설의가 이수하 등골을 빨아먹는다는 소문이 3년 내내 돌았는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해 봤자 믿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어차피 곁에 맴도는 게 이수하 하나뿐이어도 그 한 명이 열 명 몫으로 귀찮게 구니까, 다른 사람을 또 곁에 둘 여유도 없고.
혼자 여러 생각을 하는 동안 내용물을 다 먹어치운 빈 빵 봉지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자 이수하가 그것을 곱게 접어 놓는다. 내리깐 속눈썹이 풍성하게 펼쳐진 모습은 파란 잎이 막 돋아난 나뭇가지를 연상시켰다.
딱지 모양으로 반듯하게 접은 게 못내 뿌듯한 듯 입가에 환한 웃음이 번져 있다.
저게 재밌나. 도무지 알 수 없네.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자 이수하가 눈치 보듯 시선을 옆으로 흘리면서 접은 빵 봉지를 슬쩍 내려놨다.
배가 부른 상태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자 몸이 노곤노곤 해졌다. 잠기운이 눈꺼풀에 내려앉으며 하품이 나왔다. 그 모습을 봤는지 옆에 앉은 이수하가 ‘졸려?’ 하고 물었다.
“몇 시지?”
“지금 열두 시 38분.”
작게 중얼거린 말을 귀신같이 알아듣고 이수하가 대답했다. 눈이 마주치자 습관처럼 웃었다.
빨리 반팔 입었으면 좋겠네. 맨살에 닿는 햇볕 느낌은 꽤 좋으니까.
멍하니 하늘을 보며 생각한 김설의가 누우려는 듯 다리를 들어 올리자 이때다 싶었는지 이수하가 냉큼 다가왔다.
“딱딱한데 누우면 목 아플 텐데, 여기 누워.”
“여기 학교거든, 미친놈아.”
여기, 여기. 자기 허벅지를 툭툭 치는 이수하를 보는 김설의는 심기가 불편했다. 여기서 정말 이수하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올려놓으면 내일 무슨 소문이 날지 뻔했다. 타인이 뭐라고 말하든 상관하진 않지만 굳이 나서서 얘깃거리를 제공하고 싶진 않았다.
“꺼져, 이수하.”
머리맡에 들이민 허벅지를 밀어 내고 누웠다. 팔뚝으로 얼굴을 덮으며 난 너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렸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거부당한 이수하가 그를 슥 내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설의와 이야기할 때에는 간지러운 웃음이 번져 있던 얼굴은 어느새 무표정하게 굳어 있었다.
“나 갈게.”
“…….”
예상했던 대로 반응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이수하가 그대로 벤치 뒤를 돌아 김설의의 손끝을 주시했다.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서늘했다.
기다란 손가락 끝에 달린 손톱, 저걸 깨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쏟아진 머리카락이 김설의의 뺨에 아슬아슬 닿을 정도로 상체를 깊숙이 숙인 이수하가 그의 손가락을 깨무는 대신 뺨을 눌렀다.
“그만해라. 처맞기 전에 손 떼.”
탄탄하고 단단해 보이는 뺨은 의외로 부드러워 누르는 대로 푹 들어갔다.
“하지 말라고. 이수하.”
경고에도 그만두지 않자 눈을 번쩍 뜬 김설의가 이수하의 팔을 잡았다. 아프라고 일부러 더 꽉 잡았는데도 이수하는 별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깼어?” 이 지랄 한다.
“야, 넌 사람 말을 뭐로 듣냐. 하지 말라고. 그리고 머리 치워.”
초점이 맞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이마를 밀어 내려 했지만, 꿈쩍도 안 했다. 손등의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힘을 줘 봐도 반응이 없었다.
더는 참지 못한 김설의가 주먹으로 밑에서부터 치고 나서야 한두 발짝 물러섰다. 턱을 움켜쥔 손 주위로 벌건 기운이 번지기 시작했다.
“아픈데.”
“그러니까 비키라고 했잖아.”
진짜 징글징글하다. 쟤는 도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이유를 알게 된다 해도 여전히 이해하고 싶진 않다.
이런 일로 하나하나 열이 받으면 제명에 살 수가 없으므로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결국은 그냥 입을 닫고 눈을 감았다.
김설의가 포기한 것을 눈치챈 이수하가 늘어져 있는 손을 잡았다. 손바닥을 간지럽히고 손톱을 매만졌다가 손가락 사이로 제 손을 밀어 넣었다. 두 개의 손이 포개지며 깍지를 끼고 있는 모습은 퍽 다정해 보였다.
“근데 너 아까.”
“응?”
얽힌 손을 위아래로 흔들던 이수하가 김설의를 내려다봤다. 눈을 가린 김설의의 팔 밑으로 보이는 입술이 벌어지며 말이 흘러나왔다.
“고백받은 거 아니냐?”
“아…… 봤, 어?”
“봤어? 눈까지 마주쳐 놓고 모르는 척하는 건 뭐냐?”
새삼스럽게 왜 깜짝 놀란 척을 하는지 모르겠네.
사실 지금까지 이수하가 고백받는 것을 본 것은 한두 번이 아녔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이수하는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하얗고 예쁘장한 얼굴에 성격까지 조용하고 소심하다 보니 남자아이들에게도, 여자애들에게도 섞이지 못했다. 따돌림을 당한다기보다 이수하 자체가 다른 애들과 잘 교류하지 않았고 그의 뒤만 졸졸 쫓아다녔다.
공부는 또 곧잘 해 이수하는 초등학교 졸업식 때 대표로 섰는데 그때도 무서워서 못 하겠다고 엉엉 울었다. 결국, 그냥 지나가는 졸업생 1일 뿐인 김설의의 손을 꼭 붙들고 나서야 졸업사를 낭독했다.
그때 얼마나 쪽팔렸는지.
초등학교 때는 확실히 어렸고 중학교는 남학교여서 의식을 잘 못 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보니 이수하의 인기는 어마어마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여름 방학 내내 시골에 있다가 돌아왔던 김설의에게 같이 가고 싶었는데 팔다리가 아파서 못 따라갔다며 웃어 보이는데, 그사이 쑥쑥 큰 이수하는 한참이나 어린 동생이 어른이 된 것처럼 느낌이 묘했다.
이수하네 부모님 두 분 다 키가 크기도 하고 본인도 꼬맹이 때도 손발은 유난히 커 나중에 크지 않을까 했지만 커도 갑자기 너무 컸다. 그 뒤로도 꾸준히 커서 지금은 거의 눈높이가 비슷했다.
그런 이수하가 고등학교 입학식 날 신입생 대표로 단상에 섰는데 그때 운동장에 나와 있던 아이들 틈에서 작은 소요가 일었다. 수군대는 목소리 틈에서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은 김설의가 유일했다.
녀석은 수험생인 지금도 그렇지만 신입생 때는 거의 매시간마다 불려 나갔다. 이수하가 자리에 없으면 ‘아, 또 고백받으러 갔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옆에 김설의가 있는데도 고백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랑에 빠진 소녀들의 눈에 김설의 따위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이수하를 독점하는 짜증 나는 일진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설의와 이수하는 그간 이성이나 연애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내애들이 보통 할 법한 성적인 농담도, 야한 이야기 역시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에게 이수하는 어릴 적 그 울보 꼬맹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왠지 꺼려졌다.
근데 이상한 것은 꼭 섹슈얼적인 것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얘기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이수하가 유독 심했다.
사실 김설의는 몇 번 스치듯 얘기한 적이 있다. 일부러 꺼낸 건 아니었고 어쩌다 보니 가볍게 말한 거였는데 반에 누가 괜찮더라,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이상 이야기가 진행된 적은 없었다.
김설의는 문득, 이수하가 차라리 특정 인물을 사귄다면 지금보다 덜 귀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사귀냐?”
“왜?”
뭐가 왜긴 왜야.
안 사귀냐, 고백 많이 받지 않느냐, 에 대한 이수하의 대답은 늘 왜? 였다.
김설의는 여기서 왜라는 단어가 왜 나오는 것이지 생각했다. 눈을 감고 있는 탓에 이수하가 무슨 얼굴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되물어 오는 말투, 내뱉어지는 숨결은 조금 들떠 있었다.
거기에 들뜰 만한 포인트가 있었나. 설마 질투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 왜 물어봐? 혹시 신경 쓰여……?”
“뭔 개소리야.”
이건 또 무슨 헛소리냐.
신경은 무슨 신경이 쓰여. 진짜 질투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김설의가 이수하한테?
황당한 소리에 눈을 뜬 김설의는 급한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이수하가 쳐다보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바로 앞에서 빤히 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바로 일어났으면 얼굴이 부딪쳤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아. 뜨거운 숨결이 벌어진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입술이 맞닿은 것도 아닌데 생경한 자극에 심장이 덜컹댔다.
저도 모르게 이수하의 얼굴을 밀어 냈다. 손바닥에 부드러운 뺨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수하는 물러서긴커녕 김설의의 손등을 덮었다. 깜짝 놀라 팔을 털어 내는 순간 균형을 잃은 몸이 넘어갔고 그보다 빨리 이수하가 손을 뻗어 김설의의 뒤통수를 감쌌다.
아, 씨발. 왜 이렇게 가까이 와 있어.
“이수하, 미쳤냐? 왜 그렇게 얼굴 들이밀고 있냐.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아, 미안.”
고개를 살짝 숙인 이수하가 제 뺨을 슬슬 문질렀다. 밀어 낼 때 무의식중에 힘을 줬는지 뺨에 자국이 나 있었다. 턱과 뺨, 하얀 얼굴에 벌건 자국은 유난히 선명했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대부분 소심하고 순종적인 이수하는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렸다.
김설의가 아무리 화를 내도 그냥 모르는 척 웃으며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이수하가 정말 무슨 왕자님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알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김설의에게밖에 보여 주지 않았으니까.
“너 내가 갑자기 얼굴 들이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냐? 내 말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어?”
과도하게 화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간 이것 때문에 뭐라고 말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교실에서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라든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도 이수하는 이런 식으로 빤히 내려다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눈이 마주치면 습관처럼 부드럽게 웃는데, 입술이 양쪽으로 올라가는 그 짧은 사이 보이는 얼굴이 낯설었다. 마치 그새 사람이 바뀐 것처럼.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는 김설의는 과학이 증명하지 않는 미지의 존재만은 아주 조금 무서워 이수하가 이런 식으로 빤히 쳐다볼 때마다 흠칫 놀라게 된다.
이러지 마라, 하지 마라. 좋게좋게 타일러도 그때뿐이었다. 꼭 사람을 성나게 해야 만족하는 것처럼 김설의의 주위를 맴도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미안, 설의. 화내지 마.”
더 환장하겠는 건 결국 참지 못한 김설의가 감정을 터트리고 나면 꼭 저렇게 불쌍한 척 고개를 떨군다는 것이다.
순한 느낌을 주는 둥근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지며 속눈썹들이 가라앉았다. 아랫입술이 윗입술에 말려들며 입꼬리가 쳐진 모습은 분명 처연했다.
하지만 10년 넘게 그 모습을 본 김설의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를 안타까워하는 건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아이들이었다.
‘또 저러네.’, ‘야. 김설의가 수하 또 괴롭힌다.’, ‘선생한테 말해야 하는 거 아냐?’, ‘수하 표정 봐라.’ 등의 수군거림이 칼날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별 신경 쓰진 않지만, 굳이 저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김설의는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나쁜 놈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대부분 참다가, 참다가 화를 내는 건데 다른 사람들은 김설의가 ‘일방적’으로 이수하를 괴롭히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이수하를 괴롭히는 김설의. 김설의 일진설은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김설의는 대부분이 무표정인 탓에 이수하처럼 반짝반짝하는 느낌이 없었다. 게다가 눈 끝이 찢어져 가만히 있으면 화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 김설의는 이제껏 누군가를 괴롭힌 적은 없었다.
그 사람에 대해 해를 가할 정도로 미워하는 것은 생각보다 에너지 소모가 심한데 뭐 하러 그런 데 마음을 쏟겠는가. 대부분에 무던한 김설의가 짜증이나 화를 내는 상대는 형 새끼들과 이수하밖에 없었다.
이제 막 솜털 같은 꽃잎이 돋아나기 시작한 그 나무 아래에 선, 두 사람은 퍽 다정해 보였다. 여자애는 귀까지 새빨개진 채로 어쩔 줄 몰라 했고, 이수하는 무표정으로 여자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음? 무표정? 이수하가?
이수하는 항상 웃었다. 눈이 마주치면 습관처럼 눈꼬리가 휘었다. 열아홉 남자애한테 배시시라는 단어가 어울릴까 싶지만, 그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웃음이었다.
그러다가 김설의가 화를 내거나 귀찮아하면 새파란 우울이 번졌다.
김설의에게 이수하는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방실방실 웃거나 코끝이 새빨개진 채 우물쭈물하는 게 전부였는데 무표정한 것을 보니 괜히 낯설어 보였다.
뭘까, 고백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잘못 봤나 싶어서 누웠던 몸을 일으켜 좀 더 자세히 보려는 순간, 고개를 푹 숙인 여자애가 후다닥 뛰어갔다. 혼자 남은 이수하는 덤덤한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높이 떠오른 햇볕이 머리 위에 둥그렇게 내려앉으며 빛났다.
김설의는 도로 눕는 대신 턱을 괴고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바닥으로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린 이수하는 고개를 돌리다 김설의를 발견하곤 놀란 듯 흠칫하더니 활짝 웃었다. 평소 보던 그 웃음이었다. 아마 등 뒤에 꼬리가 달려 있었으면 좌우로 세차게 흔들리지 않았을까.
“설의.”
한달음에 달려온 녀석이 품에 안고 있던 샌드위치며, 빵이며, 바나나 우유 같은 것을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모두 김설의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뭔데?”
“배고플까 봐.”
“사 달라고 한 적 없는데?”
“으응, 그치.”
싸늘한 말에 생글생글 웃던 이수하는 민망한 듯 코를 매만졌다.
김설의는 결코 이수하가 고백받아서 짜증 난 것이 아니었다. 녀석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인기가 있어서 샘이 난 것도 물론 아니다. 절대, 자신은 저런 고백 한번 받아 보지 못해서 질투하는 게 아니었다.
“아무튼 이수하는 아니야.”
“어, 왜? 내가 뭐 또 잘못했어?”
기가 팍 죽은 이수하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셔츠 소매 밖으로 빠져나온 손가락 끝이 서로 엉기며 엮였다. 처진 눈꼬리나 시무룩한 표정은 마치 엄마에게 야단맞은 꼬마 같은 모양새다.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이런 소심한 놈이 왜 하루가 멀다고 고백을 받는 것인지.
혹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매력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이수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딱히 다른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알아낸 것이라고는 이리저리 방황하는 이수하의 시선과 발그레한 뺨, 벌어진 입 사이로 흩어지는 숨 같은 것뿐이었다.
“야.”
“응?”
햇볕을 받은 먼지처럼 여기저기 시선을 팔락팔락 던지던 이수하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손등으로 새빨간 뺨을 누르다가 손날로 바람을 만들어 제 얼굴을 식힌다.
날씨가 그렇게 덥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또 우냐?”
“……안 울어.”
“우는 것 같은데.”
“아니야.”
김설의는 검지 끝으로 이수하의 턱을 들어 올렸다.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녀석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고 있었다. 못마땅한 김설의의 시선이 이수하의 얼굴을 훑었다.
“설……!”
콜록콜록, 리코더를 잘못 불렀을 때처럼 삑, 소리를 내던 이수하가 별안간 기침을 해 댔다. 얼굴을 구긴 김설의가 한 발짝 물러서자 두 손을 무릎에 대고 허리를 굽히기까지 했다.
허억, 헉. 이수하는 마치 온 힘을 다해 뛴 사람처럼 헉헉 밭은 숨을 내쉬었다. 중간중간 터지는 기침에 등이 들썩였다.
“뭐 하냐.”
“사, 콜록. 사레가 갑자기.”
“가지가지 한다.”
싸늘하게 내뱉은 김설의가 일렬로 예쁘게 늘어선 간식거리들을 내려다봤다. 배가 고프긴 한데 이걸 먹으면 또 무슨 소문이 날지 모르겠다.
김설의가 망설이는 것을 단번에 알아챈 이수하가 마지막으로 숨을 길게 내쉬고는 빨대를 집었다. 뽁, 소리와 함께 빨대가 꽂힌 우유를 건네준다. 어느새 녀석은 미소 짓고 있었다.
“배고프지?”
“이딴 거 사 오니까 내가 너 괴롭힌다고 소문난 거 아니냐.”
“응?”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동그랗게 뜬 눈이 가증스럽다. 김설의는 조금 복잡한 마음으로 제 손바닥 위에 놓인 노란 우유를 내려다봤다.
“이수하 너랑 내가…….”
이수하와 김설의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았다.
왕자님 이수하. 모범생 이수하. 못하는 게 없는 이수하.
이수하는 학교 공식 ‘왕자님’이었다. 그에 비해 김설의는 왕자님 곁에 붙어 그의 피를 쭉쭉 빨아먹는 찰거머리에 지나지 않았다.
또 이수하는 워낙 유명해 그에 대한 소문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었는데 그중 하나가 어릴 적부터 친구라 함께 붙어 다니는 김설의와 관련한 것이었다. 그 소문은 그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진짜 지랄이다. 왕자님은 무슨 얼어 죽을. 지들끼리 아주 영화를 찍네, 찍어.”
새삼 빡쳐 욕을 내뱉자 이수하가 놀란 얼굴을 한다.
이수하가 일방적으로 김설의에게 들러붙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몰랐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럴만 했다.
선생들에게는 신뢰와 예쁨을 받고 동급생은 물론 후배들까지 그를 동경하고 있다. 공부도 곧잘 해 전교에서 한 손 안에 들고 운동 신경도 좋다.
그러니 아무도 하루걸러 한 번씩 고백받을 정도로 인기 폭발인 이수하가 실은, 좋게 말해서 과묵하고 노골적으로 말하면 일진이라고 소문난 김설의에게 매달리고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거기에 녀석은 쉬는 시간이고 점심시간이고 상관없이 매일 빵이며 우유, 과자 등을 김설의에게 사다 날랐다. 심지어는 도시락까지 바치는 모습이 아주 자주, 여러 번 목격되자 소문은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어 어느덧 진실이 되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믿는다. 그들은 김설의와 이수하가 어떤 관계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저들끼리 이해하고 판단하고 결정지었다.
“네가 내 빵 셔틀이라는 소문 말이야.”
“빵 셔틀? 빵 먹고 싶어?”
이수하가 못 알아듣고 반문한다. 이럴 때 보면 참 눈치가 없다. 어느 모습이 진짜인 건지 모르겠다. 설마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거면 진짜 약삭빠른 여우인 거다.
겉으로만 보면 이수하가 갖다 바치고 있는 건 맞았다. 물론 김설의는 전혀 원하지 않았지만.
사랑과 동경을 받는 교내 최고의 인기남과 그 곁에 있는 불량 학생. 소문은 소문을 만들어 냈고 누구도 그 소문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만약 김설의가 화를 내거나 이수하가 아니라는 말을 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설의는 해명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어이없어 언급 자체를 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이수하 역시 침묵했다는 것인데, 어쨌든 당사자 둘 다 아무 말이 없으니 이제는 모두로부터 실체가 없는 소문 따위가 아니라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일례로 재작년 여름, 버스에서 넘어질 뻔한 여자아이를 한 번 잡아 준 적이 있다. 그녀는 김설의의 얼굴을 보더니 흠칫하며 후다닥 내렸다. 새하얗게 질려서 도망치듯 가는데, 김설의는 그때 제가 동급생들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깨달았다.
그제야 김설의는 이수하에게 ‘내가 너 괴롭힌다는 소문, 왜 해명 안 해?’ 하고 물었다. 눈을 둥그렇게 뜨고 촘촘하게 붙은 속눈썹을 팔락이던 이수하가 돌연 웃었다.
‘설의, 넌 소문 같은 거 신경 안 쓰잖아. 근데 갑자기 왜? 다른 애들이랑 잘 지내 보고 싶어서 그래?’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하지 말라고, 이런 빵 쪼가리 안 줘도 괜찮으니까 그냥 좀 내버려 달라는 말에도 이수하는 모른 척 웃었다. 오히려 다음 날에 더 많은 양의 과자와 도시락, 음료수 등을 김설의 앞에 내려놨다.
갖다 바치는 것들을 못 본 척 외면하면 이수하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우울한 얼굴로 빵 봉지를 쥐었다 놓았다 별 지랄을 다 했다. 그 얄미운 모습에 짜증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한두 번도 아니면서 마치 처음 들어 보는 듯 새삼 처연하게 구는 이수하였다.
“여우 같은 새끼.”
완전히 무시하면 될 텐데 엄마한테 등짝을 맞으며 교육받았던 세월이 적지가 않다 보니 이수하가 울적한 얼굴을 하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걸 저 새끼가 모를 리 없을 테니 저건 일부러 보라고 하는 짓이다.
평소 이수하의 모습을 봤을 때는 교활한 여우보다 멍청한 개가 더 어울렸지만, 가끔 저렇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을 때면 여우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 일진 김설의가 이수하 등골을 빨아먹는다는 소문이 3년 내내 돌았는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해 봤자 믿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어차피 곁에 맴도는 게 이수하 하나뿐이어도 그 한 명이 열 명 몫으로 귀찮게 구니까, 다른 사람을 또 곁에 둘 여유도 없고.
혼자 여러 생각을 하는 동안 내용물을 다 먹어치운 빈 빵 봉지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자 이수하가 그것을 곱게 접어 놓는다. 내리깐 속눈썹이 풍성하게 펼쳐진 모습은 파란 잎이 막 돋아난 나뭇가지를 연상시켰다.
딱지 모양으로 반듯하게 접은 게 못내 뿌듯한 듯 입가에 환한 웃음이 번져 있다.
저게 재밌나. 도무지 알 수 없네.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자 이수하가 눈치 보듯 시선을 옆으로 흘리면서 접은 빵 봉지를 슬쩍 내려놨다.
배가 부른 상태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자 몸이 노곤노곤 해졌다. 잠기운이 눈꺼풀에 내려앉으며 하품이 나왔다. 그 모습을 봤는지 옆에 앉은 이수하가 ‘졸려?’ 하고 물었다.
“몇 시지?”
“지금 열두 시 38분.”
작게 중얼거린 말을 귀신같이 알아듣고 이수하가 대답했다. 눈이 마주치자 습관처럼 웃었다.
빨리 반팔 입었으면 좋겠네. 맨살에 닿는 햇볕 느낌은 꽤 좋으니까.
멍하니 하늘을 보며 생각한 김설의가 누우려는 듯 다리를 들어 올리자 이때다 싶었는지 이수하가 냉큼 다가왔다.
“딱딱한데 누우면 목 아플 텐데, 여기 누워.”
“여기 학교거든, 미친놈아.”
여기, 여기. 자기 허벅지를 툭툭 치는 이수하를 보는 김설의는 심기가 불편했다. 여기서 정말 이수하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올려놓으면 내일 무슨 소문이 날지 뻔했다. 타인이 뭐라고 말하든 상관하진 않지만 굳이 나서서 얘깃거리를 제공하고 싶진 않았다.
“꺼져, 이수하.”
머리맡에 들이민 허벅지를 밀어 내고 누웠다. 팔뚝으로 얼굴을 덮으며 난 너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렸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거부당한 이수하가 그를 슥 내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설의와 이야기할 때에는 간지러운 웃음이 번져 있던 얼굴은 어느새 무표정하게 굳어 있었다.
“나 갈게.”
“…….”
예상했던 대로 반응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이수하가 그대로 벤치 뒤를 돌아 김설의의 손끝을 주시했다.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서늘했다.
기다란 손가락 끝에 달린 손톱, 저걸 깨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쏟아진 머리카락이 김설의의 뺨에 아슬아슬 닿을 정도로 상체를 깊숙이 숙인 이수하가 그의 손가락을 깨무는 대신 뺨을 눌렀다.
“그만해라. 처맞기 전에 손 떼.”
탄탄하고 단단해 보이는 뺨은 의외로 부드러워 누르는 대로 푹 들어갔다.
“하지 말라고. 이수하.”
경고에도 그만두지 않자 눈을 번쩍 뜬 김설의가 이수하의 팔을 잡았다. 아프라고 일부러 더 꽉 잡았는데도 이수하는 별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깼어?” 이 지랄 한다.
“야, 넌 사람 말을 뭐로 듣냐. 하지 말라고. 그리고 머리 치워.”
초점이 맞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이마를 밀어 내려 했지만, 꿈쩍도 안 했다. 손등의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힘을 줘 봐도 반응이 없었다.
더는 참지 못한 김설의가 주먹으로 밑에서부터 치고 나서야 한두 발짝 물러섰다. 턱을 움켜쥔 손 주위로 벌건 기운이 번지기 시작했다.
“아픈데.”
“그러니까 비키라고 했잖아.”
진짜 징글징글하다. 쟤는 도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이유를 알게 된다 해도 여전히 이해하고 싶진 않다.
이런 일로 하나하나 열이 받으면 제명에 살 수가 없으므로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결국은 그냥 입을 닫고 눈을 감았다.
김설의가 포기한 것을 눈치챈 이수하가 늘어져 있는 손을 잡았다. 손바닥을 간지럽히고 손톱을 매만졌다가 손가락 사이로 제 손을 밀어 넣었다. 두 개의 손이 포개지며 깍지를 끼고 있는 모습은 퍽 다정해 보였다.
“근데 너 아까.”
“응?”
얽힌 손을 위아래로 흔들던 이수하가 김설의를 내려다봤다. 눈을 가린 김설의의 팔 밑으로 보이는 입술이 벌어지며 말이 흘러나왔다.
“고백받은 거 아니냐?”
“아…… 봤, 어?”
“봤어? 눈까지 마주쳐 놓고 모르는 척하는 건 뭐냐?”
새삼스럽게 왜 깜짝 놀란 척을 하는지 모르겠네.
사실 지금까지 이수하가 고백받는 것을 본 것은 한두 번이 아녔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이수하는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하얗고 예쁘장한 얼굴에 성격까지 조용하고 소심하다 보니 남자아이들에게도, 여자애들에게도 섞이지 못했다. 따돌림을 당한다기보다 이수하 자체가 다른 애들과 잘 교류하지 않았고 그의 뒤만 졸졸 쫓아다녔다.
공부는 또 곧잘 해 이수하는 초등학교 졸업식 때 대표로 섰는데 그때도 무서워서 못 하겠다고 엉엉 울었다. 결국, 그냥 지나가는 졸업생 1일 뿐인 김설의의 손을 꼭 붙들고 나서야 졸업사를 낭독했다.
그때 얼마나 쪽팔렸는지.
초등학교 때는 확실히 어렸고 중학교는 남학교여서 의식을 잘 못 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보니 이수하의 인기는 어마어마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여름 방학 내내 시골에 있다가 돌아왔던 김설의에게 같이 가고 싶었는데 팔다리가 아파서 못 따라갔다며 웃어 보이는데, 그사이 쑥쑥 큰 이수하는 한참이나 어린 동생이 어른이 된 것처럼 느낌이 묘했다.
이수하네 부모님 두 분 다 키가 크기도 하고 본인도 꼬맹이 때도 손발은 유난히 커 나중에 크지 않을까 했지만 커도 갑자기 너무 컸다. 그 뒤로도 꾸준히 커서 지금은 거의 눈높이가 비슷했다.
그런 이수하가 고등학교 입학식 날 신입생 대표로 단상에 섰는데 그때 운동장에 나와 있던 아이들 틈에서 작은 소요가 일었다. 수군대는 목소리 틈에서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은 김설의가 유일했다.
녀석은 수험생인 지금도 그렇지만 신입생 때는 거의 매시간마다 불려 나갔다. 이수하가 자리에 없으면 ‘아, 또 고백받으러 갔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옆에 김설의가 있는데도 고백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랑에 빠진 소녀들의 눈에 김설의 따위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이수하를 독점하는 짜증 나는 일진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설의와 이수하는 그간 이성이나 연애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내애들이 보통 할 법한 성적인 농담도, 야한 이야기 역시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에게 이수하는 어릴 적 그 울보 꼬맹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왠지 꺼려졌다.
근데 이상한 것은 꼭 섹슈얼적인 것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얘기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이수하가 유독 심했다.
사실 김설의는 몇 번 스치듯 얘기한 적이 있다. 일부러 꺼낸 건 아니었고 어쩌다 보니 가볍게 말한 거였는데 반에 누가 괜찮더라,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이상 이야기가 진행된 적은 없었다.
김설의는 문득, 이수하가 차라리 특정 인물을 사귄다면 지금보다 덜 귀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사귀냐?”
“왜?”
뭐가 왜긴 왜야.
안 사귀냐, 고백 많이 받지 않느냐, 에 대한 이수하의 대답은 늘 왜? 였다.
김설의는 여기서 왜라는 단어가 왜 나오는 것이지 생각했다. 눈을 감고 있는 탓에 이수하가 무슨 얼굴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되물어 오는 말투, 내뱉어지는 숨결은 조금 들떠 있었다.
거기에 들뜰 만한 포인트가 있었나. 설마 질투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 왜 물어봐? 혹시 신경 쓰여……?”
“뭔 개소리야.”
이건 또 무슨 헛소리냐.
신경은 무슨 신경이 쓰여. 진짜 질투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김설의가 이수하한테?
황당한 소리에 눈을 뜬 김설의는 급한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이수하가 쳐다보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바로 앞에서 빤히 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바로 일어났으면 얼굴이 부딪쳤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아. 뜨거운 숨결이 벌어진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입술이 맞닿은 것도 아닌데 생경한 자극에 심장이 덜컹댔다.
저도 모르게 이수하의 얼굴을 밀어 냈다. 손바닥에 부드러운 뺨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수하는 물러서긴커녕 김설의의 손등을 덮었다. 깜짝 놀라 팔을 털어 내는 순간 균형을 잃은 몸이 넘어갔고 그보다 빨리 이수하가 손을 뻗어 김설의의 뒤통수를 감쌌다.
아, 씨발. 왜 이렇게 가까이 와 있어.
“이수하, 미쳤냐? 왜 그렇게 얼굴 들이밀고 있냐.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아, 미안.”
고개를 살짝 숙인 이수하가 제 뺨을 슬슬 문질렀다. 밀어 낼 때 무의식중에 힘을 줬는지 뺨에 자국이 나 있었다. 턱과 뺨, 하얀 얼굴에 벌건 자국은 유난히 선명했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대부분 소심하고 순종적인 이수하는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렸다.
김설의가 아무리 화를 내도 그냥 모르는 척 웃으며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이수하가 정말 무슨 왕자님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알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김설의에게밖에 보여 주지 않았으니까.
“너 내가 갑자기 얼굴 들이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냐? 내 말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어?”
과도하게 화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간 이것 때문에 뭐라고 말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교실에서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라든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도 이수하는 이런 식으로 빤히 내려다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눈이 마주치면 습관처럼 부드럽게 웃는데, 입술이 양쪽으로 올라가는 그 짧은 사이 보이는 얼굴이 낯설었다. 마치 그새 사람이 바뀐 것처럼.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는 김설의는 과학이 증명하지 않는 미지의 존재만은 아주 조금 무서워 이수하가 이런 식으로 빤히 쳐다볼 때마다 흠칫 놀라게 된다.
이러지 마라, 하지 마라. 좋게좋게 타일러도 그때뿐이었다. 꼭 사람을 성나게 해야 만족하는 것처럼 김설의의 주위를 맴도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미안, 설의. 화내지 마.”
더 환장하겠는 건 결국 참지 못한 김설의가 감정을 터트리고 나면 꼭 저렇게 불쌍한 척 고개를 떨군다는 것이다.
순한 느낌을 주는 둥근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지며 속눈썹들이 가라앉았다. 아랫입술이 윗입술에 말려들며 입꼬리가 쳐진 모습은 분명 처연했다.
하지만 10년 넘게 그 모습을 본 김설의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를 안타까워하는 건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아이들이었다.
‘또 저러네.’, ‘야. 김설의가 수하 또 괴롭힌다.’, ‘선생한테 말해야 하는 거 아냐?’, ‘수하 표정 봐라.’ 등의 수군거림이 칼날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별 신경 쓰진 않지만, 굳이 저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김설의는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나쁜 놈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대부분 참다가, 참다가 화를 내는 건데 다른 사람들은 김설의가 ‘일방적’으로 이수하를 괴롭히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이수하를 괴롭히는 김설의. 김설의 일진설은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김설의는 대부분이 무표정인 탓에 이수하처럼 반짝반짝하는 느낌이 없었다. 게다가 눈 끝이 찢어져 가만히 있으면 화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 김설의는 이제껏 누군가를 괴롭힌 적은 없었다.
그 사람에 대해 해를 가할 정도로 미워하는 것은 생각보다 에너지 소모가 심한데 뭐 하러 그런 데 마음을 쏟겠는가. 대부분에 무던한 김설의가 짜증이나 화를 내는 상대는 형 새끼들과 이수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