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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길 위에서


깊은 겨울이 품은 추위가 걸음을 멈추게 하는 1월, 아직은 녹지 않은 얼음과 강가의 눈 더미 산기슭의 차가움에 현주는 긴 한숨으로 자신의 무거움을 하얀 입김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겨울 강가, 오른쪽으로 섬진강이 흐르고 왼쪽으로는 지리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구례에서 쌍계사 들어가는 길. 일차선 도로 위는 한참 전 낡은 트럭 한 대가 지나가고 지금껏 인기척이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한동안 마음속의 뜨거움을 입 밖의 차가움으로 내뱉고 있던 현주는 갑자기 자신의 곁에 멈춰 선 까만 승용차 안에서의 낯선 부름 때문에 멈춰 섰다.
“어디 가는 길이에요?”
낯선 공간, 낯선 공기, 그리고 낯선 음성. 깊은 눈을 하고 있는 남자는 현주를 향해 물었지만, 현주는 아무런 말 없이 그런 남자를 쳐다만 보았다. 그러자, 남자는 차 문을 열고 내려 현주에게 장갑 한쪽을 건넸다.
“이거, 그쪽이 떨어뜨린 거예요.”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 두었던 분홍색 털장갑 한 쪽.
“아, 감사합니다.”
현주의 감정 없는 인사말 끝에 나뭇가지에 달려 있던 눈꽃 무리들이 바람에 떨어졌다.
“어디 가시는 길이면, 제가 태워다 드리죠.”
장갑을 건넨 남자의 물음에도 현주가 대답 없이 흩어지는 눈꽃들로 시선을 돌리자 남자는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에서 나쁜 사람을 만나게 될 일은 드물죠.”
나쁜 사람이 아니니 동행하자는 남자의 말이 겨울을 품은 지리산 길과 어우러져 비현실적이고도 낭만적이라는 생각까지 들던 현주는 흩어지는 눈꽃들에서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현실적이면서도 이성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이렇게 고요한 길에서 낯선 사람의 차를 타는 것 역시도 드문 일이겠죠. 호의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차가운 겨울 공기처럼 차가운 말소리가 조용한 주위를 흔들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어쩐지 좀 서운하네, 제가 그렇게 나쁜 인상은 아닌 듯한데.”
“좀 걷고 싶어서 걷는 길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장갑은 감사했습니다.”
딱 떨어지는 거절, 남자는 예상했다는 듯 가벼운 묵례를 하고는 차에 올라 현주를 혼자 남겨 둔 채 멀어져 갔다.
현주는 지금 걷는 이 길을, 4월 벚꽃이 한창일 때 걸어 보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회사를 관두지 않고서는 쉽게 엄두가 나지 않던 길, 4월쯤이 되면 영민을 조르곤 했었다. 결국 한번도 함께 걷지 못한 4월의 벚꽃길 대신 눈꽃이 핀 길을 둘이 아닌 혼자 걷고 있었다.
새봄이면 둘이서, 혹은 셋이서 걸어갈지도 모른다는 꿈같은 기대의 시간이 흘러가고, 혼자 남겨져 겨울의 길을 걸어가는 현주는 왜,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생각하자 웃음부터 났다.

‘회사는 네가 나가 줬으면 좋겠다.’

영민과 헤어지기 위해 나누었던 며칠간의 대화들, 그때의 말들이 그녀의 곁에서 떠나지 않고 여전히 현실처럼 맴돌고 있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같은 직장, 내가 버거워.’

4년을 함께한 연인의 이별. 원망 혹은 서글픔으로 가득해야 할 그들의 대화는 생각보다 담백했다. 꼭 기한을 다 채우지 못한 계약서의 파기를 의논하는 것처럼.

‘오빠가 비겁한 사람이었다는 게 참 서글퍼요.’
‘그래, 내가 얼마나 비겁한지 알고 있다는 걸로 위로받기를 바랄게.’

당연한 것을 요구하는 듯한 말투, 사무적인 위로, 현주는 화가 나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더 차분해지고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우리의 4년이 참 하잘 것 없어지네. 이제 버림받은 내가 그럴 수 없다고 화를 내면 되나요?’
‘내가 널 버렸다…….’

영민의 말끝에 비웃음이 흘렀다.

‘난 오빠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꿨어요.’
‘알아.’
‘그게 비난받아야 할 일이었어요?’
‘아니, 비난은 내 몫이겠지.’
‘그런데도 왜 나는 오빠에게 비웃음의 대상이 된 것 같은 느낌일까?’

자조 섞인 푸념, 현주의 말끝에 영민은 또다시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네 말대로 4년의 시간이었고 함께 꿈꾼 미래도 있었지. 그런데 현주 너, 날 사랑하긴 했어? 헤어질 수 없다고 내게 화낼 생각 없잖아 너.’
‘이별의 이유가 내게 있다는 건가요?’
‘내 잘못만은 아니란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내가 헤어지자 하고 나서 넌 한 번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어. 왜냐고 묻지도 않았지. 그저 알았다고, 언제나처럼 단정하게 하나의 엇나감도 없이, 네가 만들어 놓은 반듯한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고상한 척 애쓰면서. 아니야?’

헤어지자는 말보다 더 뼈저린 말이었다. 현주 자신 전부에 대한 부정이었다. 울지 않으려고 꽉 잡은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다른 회사 알아봐 줄 테니까, 퇴사는 네가 해. 너 나한테 이렇게 매달리지 않는 건, 내가 왜 헤어지자는지 이해했기 때문이니?’

이해, 그랬다. 어쩌면 영민이 이별을 말하기 전부터 사실 현주는 영민이 자신에게 헤어지자 통보할 걸 예상하고 있었다.
이미 지나간 시간, 지나간 인연이다. 떠난 영민 때문에 감정을 소모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추운 이 길을 다 걷고 나면 자신은 늘 그렇듯 흔들림 없는 이현주로 돌아갈 것이라고, 그녀는 마음을 다잡으며 주머니 속에서 분홍색 털장갑을 꺼냈다.
깊은 눈을 가진 그 남자가 잃어버렸던 한쪽을 찾아 준 분홍색 털장갑을 양손에 하나씩 끼고 그녀는 쌍계사로 들어가는 긴 길을 마저 걸었다.

한 시간 반이나 걸어서 들어간 쌍계사 초입은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한가득 소란스러웠다. 관광객들의 북적임과 지역 촌로들이 지난 가을걷이해 마련한 각종 특산물들로 이룬 장터의 소란함이 가득했다.
현주는 쌍계사로 들어가기 전에 산채비빔밥 집으로 들어가 앉았다. 산채비빕밥을 시키고는 초입에서 산 국화차 한 더미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자신의 식탁 앞에 남자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주머니, 여기 비빔밥 하나 더 주세요.”
남자는 현주의 황당한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자연스럽게 그녀 앞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 두 번째 보는 거니까 아주 낯선 사람은 아니죠? 아까 걸어가는 길을 보니, 여기로 향할 것 같았어요.”
섬진강 길에서 현주가 떨어뜨린 장갑을 주워 주었던 사람이다.
“여행 온 거잖아요, 낯선 시간과 만나는 건데, 낯선 사람도 좀 받아 주면 안 되나?”
낯선 남자가 여러 말을 하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현주는 그저 남자를 바라만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절 아시나요?”
현주의 물음에, 남자는 그동안의 가벼운 웃음을 거두고는 깊은 눈빛이 되어, 현주를 쳐다봤다.
“알고 있다면 당신 여행에 날 끼워 줄 건가?”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가르고, 남자의 깊은 눈빛과 차가운 현주의 눈빛이 서로 만날 때, 음식이 나왔다.
“일단 먹죠, 난 오늘 이게 첫 끼니예요. 먹고 나서 이야기하죠.”
남자는 조금 전의 깊은 눈빛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또다시 가벼운 눈빛으로 비빔밥에 숟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현주는 자신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여기가 아닌 서울에서, 오늘이 아닌 어제에 만났다면 단번에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을 것이라 생각하자 삐죽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요?”
“여행은 참 사람을 낯설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요. 예전의 나라면, 아마…….”
“아마, 벌떡 일어나 나갔겠지, 그게 이현주니까.”
자신의 이름이 낯선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현주는 화가 나거나 당황스럽기보다는 재미있는 상황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