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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의 이름을 내뱉고는 다시 열심히 음식을 먹고 있는 남자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현주는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점심 먹고 뭘 할 생각이에요?”
남자가 한참을 열심히 먹던 숟가락을 놓고는 현주에게 말을 걸었다.
“쌍계사에 들어가 볼 참이에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데, 아름답다 하더라구요.”
“그럽시다.”
‘그럽시다’ 처음부터 동행했던 사람처럼, 여정을 함께 시작한 사람처럼, 평온하고 차분한 말투로 함께하자는 남자를 현주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앞에 있는 이 남자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망상일지 모르지만 이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현주 자신을 따라온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함께하지 않겠다고 해도, 이 남자는 자신을 따라다닐 작정을 한 사람일 테다. 현주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낮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대체가 경험한 적이 없는 혼란이었다.
“고민하지 말아요. 난 당신을 쫓아온 거니까. 당신을 이 낯설고 아름다운 곳에서 놓치는 일 없어.”
짧게 말을 마친 남자가 현주의 무거운 배낭을 집어 들었다.
“이 짐은 내 차에 실어 놓고 다닙시다. 이걸 등에 달고 무겁지도 않았어요? 쌍계사 입구에 가 있을 테니 밥 다 먹고 마음 단단히 먹고 그쪽으로 와요.”
남자는 자기가 할 말만 남기고는 훌쩍 일어나 계산을 하고는 나가 버렸다. 현주는 아직 반 이상이나 남아 있는 산채비빔밥을 한없이 들여다보다가 숟가락을 놓았다. 결정을 해야 했다. 저 사람이 하자는 대로 흘러갈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멈출 것인지.
현주는 한참을 깊이 생각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쌍계사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는 정말 남자가 따뜻한 커피 두 잔을 들고는 서 있었다. 현주가 그의 앞으로 가자, 남자는 차 한 잔을 건넸다.
“다 식으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현주는 아직도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커피 잔을 보다가 왼손으로 받아 들고는 오른손을 내밀어 남자의 눈을 바라봤다.
“저는 이현주예요.”
“뭐 하는 거지?”
“인사, 첫인사.”
남자는 현주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웃음을 머금고는 자신의 오른팔을 뻗어 현주가 내민 손을 잡았다.
“전 박정우입니다.”
낯선 곳, 낯선 풍경, 익숙하지 않은 공기를 품은 곳에서 두 사람의 여정이 새롭게 시작하고 있었다.
#2. 동행
쌍계사 일주문을 통해 대웅전으로 향하는 현주의 발걸음을 조용히 따르던 정우는 대웅전 옆에 서 있던 부도비에 멈춰 섰다. 현주는 정우가 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다가 조용히 곁에 섰다.
“국보 제47호랍니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썼다네.”
문화재 안내문을 보고는 현주에게 말을 건네자, 현주가 곁에서 같이 쓰여진 비문을 바라봤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사람의 글을 직접 보게 되는군요. 그런데 잘 안 보이네요. 887년에 만들어진 거니까, 천 년 전에 만들어진 거네요. 천 년 동안 바람에 닳고 닳아서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글씨들이군요. 오래되어 잊혀지는 건 참 쓸쓸한 일이에요.”
“그렇다고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살 수는 없지. 잊혀질 건 잊혀져야 하는 거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깊어졌다. 현주는 남자를 뒤로하고 쌍계사 대웅전 안으로 들어섰다. 불상들 아래에 자리 잡은 신도들 옆쪽으로 현주는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정우도 조용히 방석을 놓고 현주의 옆에 앉아 함께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현주의 눈은 불상이 아닌 신도들에게 머물러 있었다. 한동안 조용한 시간이 흘러가고 현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대웅전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정우가 물었다.
“종교가 불교인가?”
“아니요, 전 종교 없어요.”
“그런데, 아까 대웅전에서는…….”
“그냥, 불상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는 저 사람들의 간절함이 좋아서, 애달픔이 좋아서 한동안 보고 있었어요. 고즈넉한 사찰 안은 지금 여기와는 다른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마음이 차분해져요.”
차분해지는 마음, 더 이상 가라앉을 마음 따위가 있을까? 현주는 또다시 피식 비웃음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자 자연스럽게 정우의 눈썹이 위로 삐죽 올라갔다.
쌍계사를 나와 주차장으로 향한 둘은 정우의 자동차 곁에 섰다.
“제 여정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헤어지죠. 제 가방 꺼내 주시겠어요?”
“내가 쉽게 꺼내 줄 거란 생각 안 했을 것 같은데.”
“절 아신다면서요, 그렇다면 제가 저 차를 타지 않을 거란 것도 잘 아실 듯한데요.”
“알지, 그래서 잠깐이나마 날 당신의 여행에 끼워 줬다는 게 대단한 일이란 것도 알지.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아? 내가 당신을 어떻게, 얼마나 아는지?”
“네, 궁금해요. 하지만 그게 이 차를 타고 당신과 동행할 이유는 되지 못하죠.”
“저런, 내가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은가? 난 당신을 쫓아서 여기까지 왔어, 당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고.”
현주는 이 사람이 태워 주겠다는 따뜻한 저 차를 타면 다시는 자신의 앞에 선 남자의 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조용히 차 조수석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바라보는 정우를 보자 현주는 복잡한 심경으로 자동차에 올랐다.
운전석에 오른 정우가 만족스러운 눈으로 현주를 향해 물었다.
“자, 이제 어디로 갈까요?”
“당신 마음대로. 이미 이 차를 타는 순간, 전 갈 곳을 잃었거든요.”
“그거 좋네, 그럼 이후의 시간은 나에게 주는 걸로 합시다.”
현주의 여행 일정을 미리 보기라도 한 듯, 정우는 차를 몰아 이제는 쇠퇴한 화개장터로 들어서고 있었다.
“내려서 여기서 저녁 먹을까?”
겨울의 화개장터는 현대화란 이름 아래, 다들 반듯반듯 늘어선 상가들로 가득 차 있었다.
“플라스틱 모형들 같아요. 쌍계사 비문처럼 천 년의 시간 동안 조금씩 조금씩 마모되어 가는 것들의 아름다움 따위는 여기엔 없네요.”
“그래, 그래도 여기에서 흐른 시간들을 부정하지는 말자고. 은어회나 먹을까? 지금 은어가 있을라나.”
정우는 현주가 자신의 가방을 향해 몸을 돌리는 것을 감지하고는 빨리 차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가방은 그대로 두고, 몸만 내리시지.”
“제 가방이 볼모인가요?”
“그런 셈이군.”
현주는 피식 웃으며 조수석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두 사람은 한동안 쓸쓸하게도, 식당에서 호객하는 사람들의 소리만이 무성한 겨울의 화개장터를 걸었다. 볼 것도 들을 것도 없는 쓸쓸한 화개장터의 빙어횟집으로 정우가 들어서자, 현주도 뒤따라 들어섰다. 정우가 이것저것 알아서 시키고 나서 한참을 현주를 바라봤다.
“은어는 철이 아니니까 빙어나 먹읍시다.”
“네.”
음식이 나올 때까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시간들이 흘러가는 동안, 그렇게 말이 많았던 정우 역시도 아무런 말 없이 촌스럽게 놓여 있는 식탁 위 반찬 그릇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일정을 물어도 될까요?”
“밥 먹고 우리 지리산 근처 펜션으로 갑시다.”
“일상적인 스토리 라인이네요.”
“통속적이고 퇴폐적인 시간이 될 거냐고 묻는 거라면 아니라고 대답하지, 믿을지 모르겠지만.”
“믿어 드리죠. 여기 이곳의 아름다운 밤을 보고 싶어졌거든요.”
“훗, 예전의 이현주는 서울에 완전히 두고 온 모양이야.”
“네, 전 이전에는 없던 이현주예요.”
두 사람이 식당에서 나올 무렵, 산허리가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저녁녘의 장터는 더욱 쓸쓸하여 마음이 스산해졌다. 식당 앞 노점의 할머니가 낡은 목도리를 여미며 아직도 다 팔지 못한 말린 국화차를 만지고 있었다. 조용히 할머니의 곁으로 간 현주가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할머니, 이거 할머니가 말리신 국화차예요?”
“그럼, 내가 가을에 손수 따서 말리고 덕은 거래. 맛있어, 좀 사 가. 내 싸게 줄게.”
“할머니, 이거 전부 얼마예요?”
“이거 전부? 이거, 돈 10만 원 정도만 주면 되겄네.”
그러자, 현주는 손에서 반지를 빼 들어 할머니에게 건네주며 다시 물었다.
“할머니, 제가 지금 현금이 없어요. 이거 금반지인데. 10만 원은 훨씬 넘을 거예요. 이거 받아 주시면 안 될까요?”
“이 처자가 내가 우수워 비나? 이기 금인지 똥인지 알게 뭐로?”
“하하하, 그렇네요. 할머니.”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정우는 지갑을 꺼내 오만 원짜리 지폐 두 개를 꺼내 현주에게 건넸다.
“그 반지 내가 사죠. 10만 원이면 되나?”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의 이름을 내뱉고는 다시 열심히 음식을 먹고 있는 남자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현주는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점심 먹고 뭘 할 생각이에요?”
남자가 한참을 열심히 먹던 숟가락을 놓고는 현주에게 말을 걸었다.
“쌍계사에 들어가 볼 참이에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데, 아름답다 하더라구요.”
“그럽시다.”
‘그럽시다’ 처음부터 동행했던 사람처럼, 여정을 함께 시작한 사람처럼, 평온하고 차분한 말투로 함께하자는 남자를 현주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앞에 있는 이 남자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망상일지 모르지만 이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현주 자신을 따라온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함께하지 않겠다고 해도, 이 남자는 자신을 따라다닐 작정을 한 사람일 테다. 현주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낮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대체가 경험한 적이 없는 혼란이었다.
“고민하지 말아요. 난 당신을 쫓아온 거니까. 당신을 이 낯설고 아름다운 곳에서 놓치는 일 없어.”
짧게 말을 마친 남자가 현주의 무거운 배낭을 집어 들었다.
“이 짐은 내 차에 실어 놓고 다닙시다. 이걸 등에 달고 무겁지도 않았어요? 쌍계사 입구에 가 있을 테니 밥 다 먹고 마음 단단히 먹고 그쪽으로 와요.”
남자는 자기가 할 말만 남기고는 훌쩍 일어나 계산을 하고는 나가 버렸다. 현주는 아직 반 이상이나 남아 있는 산채비빔밥을 한없이 들여다보다가 숟가락을 놓았다. 결정을 해야 했다. 저 사람이 하자는 대로 흘러갈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멈출 것인지.
현주는 한참을 깊이 생각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쌍계사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는 정말 남자가 따뜻한 커피 두 잔을 들고는 서 있었다. 현주가 그의 앞으로 가자, 남자는 차 한 잔을 건넸다.
“다 식으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현주는 아직도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커피 잔을 보다가 왼손으로 받아 들고는 오른손을 내밀어 남자의 눈을 바라봤다.
“저는 이현주예요.”
“뭐 하는 거지?”
“인사, 첫인사.”
남자는 현주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웃음을 머금고는 자신의 오른팔을 뻗어 현주가 내민 손을 잡았다.
“전 박정우입니다.”
낯선 곳, 낯선 풍경, 익숙하지 않은 공기를 품은 곳에서 두 사람의 여정이 새롭게 시작하고 있었다.
#2. 동행
쌍계사 일주문을 통해 대웅전으로 향하는 현주의 발걸음을 조용히 따르던 정우는 대웅전 옆에 서 있던 부도비에 멈춰 섰다. 현주는 정우가 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다가 조용히 곁에 섰다.
“국보 제47호랍니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썼다네.”
문화재 안내문을 보고는 현주에게 말을 건네자, 현주가 곁에서 같이 쓰여진 비문을 바라봤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사람의 글을 직접 보게 되는군요. 그런데 잘 안 보이네요. 887년에 만들어진 거니까, 천 년 전에 만들어진 거네요. 천 년 동안 바람에 닳고 닳아서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글씨들이군요. 오래되어 잊혀지는 건 참 쓸쓸한 일이에요.”
“그렇다고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살 수는 없지. 잊혀질 건 잊혀져야 하는 거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깊어졌다. 현주는 남자를 뒤로하고 쌍계사 대웅전 안으로 들어섰다. 불상들 아래에 자리 잡은 신도들 옆쪽으로 현주는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정우도 조용히 방석을 놓고 현주의 옆에 앉아 함께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현주의 눈은 불상이 아닌 신도들에게 머물러 있었다. 한동안 조용한 시간이 흘러가고 현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대웅전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정우가 물었다.
“종교가 불교인가?”
“아니요, 전 종교 없어요.”
“그런데, 아까 대웅전에서는…….”
“그냥, 불상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는 저 사람들의 간절함이 좋아서, 애달픔이 좋아서 한동안 보고 있었어요. 고즈넉한 사찰 안은 지금 여기와는 다른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마음이 차분해져요.”
차분해지는 마음, 더 이상 가라앉을 마음 따위가 있을까? 현주는 또다시 피식 비웃음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자 자연스럽게 정우의 눈썹이 위로 삐죽 올라갔다.
쌍계사를 나와 주차장으로 향한 둘은 정우의 자동차 곁에 섰다.
“제 여정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헤어지죠. 제 가방 꺼내 주시겠어요?”
“내가 쉽게 꺼내 줄 거란 생각 안 했을 것 같은데.”
“절 아신다면서요, 그렇다면 제가 저 차를 타지 않을 거란 것도 잘 아실 듯한데요.”
“알지, 그래서 잠깐이나마 날 당신의 여행에 끼워 줬다는 게 대단한 일이란 것도 알지.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아? 내가 당신을 어떻게, 얼마나 아는지?”
“네, 궁금해요. 하지만 그게 이 차를 타고 당신과 동행할 이유는 되지 못하죠.”
“저런, 내가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은가? 난 당신을 쫓아서 여기까지 왔어, 당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고.”
현주는 이 사람이 태워 주겠다는 따뜻한 저 차를 타면 다시는 자신의 앞에 선 남자의 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조용히 차 조수석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바라보는 정우를 보자 현주는 복잡한 심경으로 자동차에 올랐다.
운전석에 오른 정우가 만족스러운 눈으로 현주를 향해 물었다.
“자, 이제 어디로 갈까요?”
“당신 마음대로. 이미 이 차를 타는 순간, 전 갈 곳을 잃었거든요.”
“그거 좋네, 그럼 이후의 시간은 나에게 주는 걸로 합시다.”
현주의 여행 일정을 미리 보기라도 한 듯, 정우는 차를 몰아 이제는 쇠퇴한 화개장터로 들어서고 있었다.
“내려서 여기서 저녁 먹을까?”
겨울의 화개장터는 현대화란 이름 아래, 다들 반듯반듯 늘어선 상가들로 가득 차 있었다.
“플라스틱 모형들 같아요. 쌍계사 비문처럼 천 년의 시간 동안 조금씩 조금씩 마모되어 가는 것들의 아름다움 따위는 여기엔 없네요.”
“그래, 그래도 여기에서 흐른 시간들을 부정하지는 말자고. 은어회나 먹을까? 지금 은어가 있을라나.”
정우는 현주가 자신의 가방을 향해 몸을 돌리는 것을 감지하고는 빨리 차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가방은 그대로 두고, 몸만 내리시지.”
“제 가방이 볼모인가요?”
“그런 셈이군.”
현주는 피식 웃으며 조수석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두 사람은 한동안 쓸쓸하게도, 식당에서 호객하는 사람들의 소리만이 무성한 겨울의 화개장터를 걸었다. 볼 것도 들을 것도 없는 쓸쓸한 화개장터의 빙어횟집으로 정우가 들어서자, 현주도 뒤따라 들어섰다. 정우가 이것저것 알아서 시키고 나서 한참을 현주를 바라봤다.
“은어는 철이 아니니까 빙어나 먹읍시다.”
“네.”
음식이 나올 때까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시간들이 흘러가는 동안, 그렇게 말이 많았던 정우 역시도 아무런 말 없이 촌스럽게 놓여 있는 식탁 위 반찬 그릇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일정을 물어도 될까요?”
“밥 먹고 우리 지리산 근처 펜션으로 갑시다.”
“일상적인 스토리 라인이네요.”
“통속적이고 퇴폐적인 시간이 될 거냐고 묻는 거라면 아니라고 대답하지, 믿을지 모르겠지만.”
“믿어 드리죠. 여기 이곳의 아름다운 밤을 보고 싶어졌거든요.”
“훗, 예전의 이현주는 서울에 완전히 두고 온 모양이야.”
“네, 전 이전에는 없던 이현주예요.”
두 사람이 식당에서 나올 무렵, 산허리가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저녁녘의 장터는 더욱 쓸쓸하여 마음이 스산해졌다. 식당 앞 노점의 할머니가 낡은 목도리를 여미며 아직도 다 팔지 못한 말린 국화차를 만지고 있었다. 조용히 할머니의 곁으로 간 현주가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할머니, 이거 할머니가 말리신 국화차예요?”
“그럼, 내가 가을에 손수 따서 말리고 덕은 거래. 맛있어, 좀 사 가. 내 싸게 줄게.”
“할머니, 이거 전부 얼마예요?”
“이거 전부? 이거, 돈 10만 원 정도만 주면 되겄네.”
그러자, 현주는 손에서 반지를 빼 들어 할머니에게 건네주며 다시 물었다.
“할머니, 제가 지금 현금이 없어요. 이거 금반지인데. 10만 원은 훨씬 넘을 거예요. 이거 받아 주시면 안 될까요?”
“이 처자가 내가 우수워 비나? 이기 금인지 똥인지 알게 뭐로?”
“하하하, 그렇네요. 할머니.”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정우는 지갑을 꺼내 오만 원짜리 지폐 두 개를 꺼내 현주에게 건넸다.
“그 반지 내가 사죠. 10만 원이면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