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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내민 지폐를 보던 현주가 자신의 손에서 빼낸 반지를 정우에게 건네고는 지폐를 받아, 할머니에게 건넸다. 그러자, 할머니가 국화차를 봉지에 꽁꽁 싸서 현주에게 건넸고, 다시 그 보따리를 정우가 받아 들었다.
“할머니, 건강하세요.”
“젊은 처자도 복받으시게.”
손에 들린 검은 봉지와 정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걸어가던 현주는 그가 걸음을 멈추자 같이 멈춰 섰다. 장터 구석의 금은방으로 정우가 들어서자, 현주는 의중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금은방을 바라보았다. 한참 만에 나온 그가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의 차로 걸어가, 뒷좌석 현주의 가방 옆에 국화차 봉지를 놓고는 다시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타시죠. 지리산의 밤을 함께 보러 갑시다.”

한참을 움직인 차가 지리산 깊은 곳으로 들어갈 때쯤엔 밤도 깊어 겨울밤의 별빛이 빛나고 있었다. 고즈넉한 정취와 어울리는 작은 펜션으로 차가 들어서자 현주는 그제야 자신의 가방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가방을 들고는 펜션 주변으로 펼쳐진 눈 덮인 하얀 지리산 자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정우가 현주에게 펜션 열쇠 하나를 건넸다.
“건전하게, 아름답게.”
“네, 감사해요.”
펜션 안으로 들어선 현주는 짐을 풀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겉옷을 걸쳤다. 이미 저녁을 지나 짙어진 어둠 속에서 겨울나무 타는 소리만이 가득한 펜션 앞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어가 차가운 흔들의자에 몸을 실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현주가 뒤를 돌아봤다.
“안 추워요?”
“네, 별로. 공기가 상쾌하네요.”
정우가 조용히 그네의 곁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한참을 고요하던 공기를 먼저 깬 것은 현주였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따라온 건가요?”
“그럴지도.”
“시련당한 여자에 대한 안타까움과 걱정 같은 건가요?”
“아마도. 내가 누군지 알아냈나 보지?”
“결혼식…… 당신이 날 바라봤었어요. 안타까운 눈으로.”
“맞아. 미련하게 헤어진 남자 친구 결혼식에 앉아서 동료들과 웃고 떠들고 아무렇지 않은 듯 박수까지 쳐 주고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딱 떨어지는 정장을 저 배낭 속에 넣고는 식장을 나서더군.”
현주의 얼굴에 또다시 비릿한 조소가 떠올랐다.
“그 웃음은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한동안 말이 없던 현주가 고개를 숙이자, 현주의 무릎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영민이 헤어지자는 말로 흔들던 시간에도, 헤어지고 자신의 앞에서 새로운 사람과의 시작을 꿈꾸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도, 결혼할 여자의 아버지를 이용해 결국 회사에 사직서를 내게 할 때에도 한 번도 흘린 적이 없던 눈물이다.
천천히 떨어지던 눈물의 간격이 좁아지자, 정우가 조용히 현주에게 다가와, 현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국화차 대신에 건넸던 반지의 자국이 남은 손가락에 금반지 하나를 끼워 넣었다.
“지워지지 않더라도 그냥 묻어. 이걸로 가리고 있다 보면 언젠가는 지워져 있을 테니까. 이 손에 어떤 게 끼워져 있었는지 모르는 순간이 올 거니까.”
잡힌 손등 위로 현주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동안 그녀의 눈물을 바라보던 정우가 자리를 비켜 주듯 펜션 안으로 몸을 감추자 현주는 밖으로 삐져나오는 울음소리를 막지 않고 자신의 안에 묻혀 있던 서러움을 그대로 토해 냈다. 그렇게 현주의 울음소리가 지리산 자락의 밤공기를 거세게 흔들고 있었다.
겨울 지리산 자락의 차가운 바람과 맑은 공기 속에 자신 안에 깊이 가라앉아 있던 울분을 모두 토해 낸 현주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쳐다봤다. 이성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위로,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한 발짝 물러난 외진 곳에 서 있고 싶은 욕망. 현주는 펜션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방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몸을 돌려 남자의 방문 앞에 말없이 가 섰다. 지금껏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탈, 영민과의 4년의 시간 동안 한 번도 내어본 적 없는 용기. 문 앞에서 현주는 피식 기막힌 웃음을 흘렸다. 그때, 그의 방문이 열렸다.
“당신 숨소리가 들렸어. 당신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거든.”
“건전함을 걷어 낸다면, 우리의 오늘이 우스워질까요?”
현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우는 현주의 손을 잡아 자신의 방 문 안으로 당겼다. 여전히 어제와 다른 자신에 놀라 떨고 있는 현주, 그런 그녀를 감싸 안은 그의 팔. 그의 손이 현주의 옷가지 단추를 풀어 헤치는 순간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저 지나가는 하루일 뿐이야…….”
어제와 다른 공간. 공기. 그리고 낯선 남자와의 하룻밤. 현주는 원초적인 욕망의 흐름에 의식을 맡겨 버리고는 따뜻한 남자의 체온에 자신을 묻었다.
“이게, 시작이 될 거야.”
“아니요. 난 끝이기를 바라요.”
두 사람의 온기가 서로를 감싸고, 처음이자 마지막과 같은 간절한 시간들이 지리산의 밤바람 사이로 흘러갔다.

반짝이는 햇빛이 지리산에 내려앉은 하얀 눈빛을 비추고,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아침이 되자, 현주는 어제와는 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취해, 아침 산책을 시작했다. 한동안 거닐던 곁에 어느새 나타난 정우가 걸음의 폭을 맞추어 걷자, 현주는 그것이 백 마디의 말보다 따뜻한 위로가 되어 준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여길 떠나서도 한동안 이곳의 공기가 그리울 것 같아요.”
“내가 그립지는 않을 거 같아?”
“그리울 거예요. 항상 그리워할게요.”
“다시 만나지 말자는 말보다 훨씬 간결하고 확실한 이별 인사네.”
현주는 꿈같던 동행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래도 낯선 사람에게 의지하고 위로받던 순간을 기억해 내며 살아가야겠다고,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는 서울에 도착해서 빼내어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손가락을 쳐다봤다.
“처음 현주 씨를 쫓아왔을 때는 말이야, 그냥 당신이 위태로워 보였어.”
“아무도 몰랐던 내 위태로움을 알아봐 줘서 감사해요. 제자리로 돌아가서 이 시간을 기억하며 살게요.”
“오늘까지만 동행해라? 당신 인생에 끼어든 나에게 발 빼라고 하는 거군.”
“네, 전 이전의 이현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거든요.”
“그래, 그럽시다. 난 그래도 당신이 내 눈에서 벗어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야.”
방으로 돌아와, 현주가 어제까지 볼모로 잡혀 있던 배낭을 들고는 펜션을 나서자, 이미 기다리고 있던 정우가 무거운 가방을 받아 들었다.
“여기서 작별하지는 맙시다.”
“서울까지 혼자 가고 싶어요. 저에게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럼, 타협할까? 기차역까지만 데려다주지. 어때?”
현주는 자신이 거절한다 하더라도 쉽게 물러나지 않을 정우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둘을 태운 자동차가 지리산 자락을 지나 하동을 거쳐 섬진강을 끼고 서울로 향하자, 둘 사이의 침묵이 낯설고 무거운 것이 아니라 가볍고 익숙한 것처럼 느껴졌다.
“난 현재의 이현주에게로 갈 생각인데 받아 줄 건가?”
“현재로 돌아간 이현주는 구직 활동으로 바쁠 참이라 당신을 받아 줄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럼 당신은 그냥 그 자리에 있어, 내가 다가갈 테니까. 이번 여행처럼.”
“어제와 오늘의 내가 다른 것처럼 내일의 난 또 다른 사람일 거예요.”
“그거 기대되네. 다른 이현주라, 올라가면 뭘 할 생각이지?”
“아까도 말했지만, 구직 활동?”
“굳이 그만둘 필요 있었어? 헤어진 애인이 같이 일을 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가?”
“도대체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궁금하네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뭐 어쨌든, 내가 그만둔 게 아니거든요. 말하자면, 헤어진 애인이 결혼한 상대가 우리 회사 오너 딸이거든요. 사장님이 절 내치신 거죠, 당신 딸을 위해서.”
“당신이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 구멍가게도 아니고 정직원을 그렇게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 사장님과 따님이 워낙 유능해서 말이죠. 타인의 감정을 어떻게 쥐고 흔들어야 가장 아픈지 너무나 잘 알더라고요. 그래서 잘렸음에도 표면적으로는 제 발로 나온 셈이 됐죠. 근데, 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이렇게 아름다운 데서 하기는 싫은데요.”
말소리는 처음보다 더욱 가벼워져 있었고, 아침을 열고 비치는 햇빛이 국도에 쌓인 눈 위에 반짝이자, 현주는 지금의 순간이 그만 멈춰 섰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마치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하듯 햇빛에 반짝이는 눈 빛이 아니라 거대한 트럭의 불빛이 자신을 덮쳐들고 있음을 인식하는 순간, 정우의 두 팔이 자신을 감싸 안았다는 것도, 터지는 에어백 너머로 부서진 차 유리 파편이 흩어지고 있다는 것도 기억을 모두 삼켜 버릴 암흑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