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5화
2화 청룡(靑龍)을 개 패듯 패다
시박은 자신을 따라오겠다던 이승차사 이덕춘과 강림차사 이 도령을 생각했다. 웃기는 녀석들이었다.
청룡이란 영물을 보고 싶어선지 아니면 자신의 일을 돕겠다는 건지.
특히 이 도령이 술안주거리로도 말하지 않는 금동아줄을 가져왔을 때는 할 말을 잃었다. 과거 호랑이에게 쫓기는 남매를 구하기 위해 옥황상제가 썼던 밧줄이었다.
청룡이 무슨 개나 소나 같은 가축도 아닌데, 헛웃음만 나왔다.
“청룡을 잡고 오는 대로 정신교육이나 시켜야지.”
정작 그런 말을 하는 시박의 손에는 이 도령이 갖고 왔던 금동아줄이 들려 있었지만.
금동아줄은 최대 900장까지 늘어나는 신물이기도 했다.
지금은 한 자 길이로 본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설원…… 마치 혼마저 얼어붙게 하는 것 같구나.”
시간은 어느덧 자시의 한가운데, 자정에 걸쳐져 있었다.
공간의 균열이 일어나기까지 반 시진 남은 것이다.
시박이 산세를 둘러봤다.
만년설산의 12봉우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날카로운 정상에 바람이라도 한 올 걸린다면 금방이라도 굉음을 내며 눈 더미가 쏟아져 내릴 듯했다.
무언가 달라졌다.
1000년 전 북해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설원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눈이 멀 것만 같은 시박이었다. 모든 것이 눈[雪]에 침식되어 가도 가도 제자리걸음 하는 것만 같았다.
북해는…… 적막하고 차가웠다.
“확실히 청룡이 뭔가 술수를 부려도 단단히 부렸어.”
달빛을 등진 시박은 청룡을 찾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발(發)!”
투아앙.
저승의 사(死)의 기운이 시박의 몸에서 거미줄처럼 뻗어 나갔다. 수십, 수백 개로 늘어난 기는 금방이라도 설원을 집어삼킬 듯 기승을 부렸다.
“네놈이 하늘의 사신(四神) 중 하나인 이상 이 기운에 틀림없이 공명하겠지.”
시박은 청룡을 생각하니 괜스레 웃음이 났다.
놈이 어렸을 적에 참 때리기도 많이 때린 기억이 난 것이다.
“한 번은 낚싯바늘에 주둥이를 꿰어 전설의 기린(麒麟)을 잡으려 했지. 큭큭.”
기린이 물속에 산다고 굳게 믿고 있는 시박이었다.
“그때 녀석의 몸집이 40척 정도 되었으니 지금은 얼마나 커졌을까?”
청룡을 잡으면 다시 낚싯바늘에 꿰어 기린을 잡아 볼까 생각하는 시박이었다.
그때였다.
시박의 몸이 장창에 찔린 것처럼 튕겨져 나갔다. 청룡의 기운이 그만큼 강맹하여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황급히 발(發)의 기운을 걷어 들였다.
“요것 봐라. 제법 영기(靈氣)가 강맹한데?”
설원에 폭설이 휘몰아쳤다.
갑작스런 기상 변화에 시박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청룡의 특기라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눈발 사이를 꿰뚫고 짐승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사신(四神) 중 하나인 청룡이었다.
12봉우리 뒤에서 청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박을 알아보았는지 굉장히 격분해 있었다. 기어코 꼬리로 봉우리 하나를 무너트리는 반가움을 표했다.
“녀석, 내가 그리도 반가울꼬.”
시박이 금동아줄로 어깨를 두드리며 청룡의 마중을 기다렸다. 두려운 기색 따위는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
청룡이 몸을 똬리 틀듯 빙빙 돌리며 다가왔다.
그 크기가 능히 장강을 덮고도 남을 크기였다. 시박이 청룡의 그림자에 가리며 어둑어둑해졌다.
거리는 불과 100장 남짓했다.
‘이놈의 지렁이 새끼가 약을 잘못 처먹었나 왜 이렇게 커진 거지?’
낚시 미끼로는 사용할 수 없겠다 생각한 시박이었다.
시박이 어색하게 오랜만의 해후(邂逅)에 인사를 건넸다.
“파랭아, 그동안 잘 지냈느냐?”
청룡이 어렸을 적 시박이 자주 부르던 애칭이었다.
시박이 어울리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잡아가기는커녕 잡아먹히지 않으면 다행일 크기였다.
청룡은 시박을 바라보며 어렸을 적 악몽(惡夢)이 생각난 듯 살짝 오한이 들었다.
「크르르.」
낮게 울음소리를 흘리는 청룡.
시박은 거기에 마음이 상했는지 갑자기 눈에 쌍심지를 켰다. 시박이 청룡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기 위해 20장 더 위로 올라갔다.
“파랭이 이놈. 감히 싸가지 없게 어디서 으르렁거리는 것이냐.”
그러고는 대뜸 금동아줄을 휘둘렀다.
금동아줄은 순식간에 120장이 늘어나며 청룡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청룡은 아무런 반응 없이 살짝 감았던 눈을 떴다.
“자자. 나 시박이다, 파랭아. 이제 기억나지?”
청룡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당장에 씹어 삼키려 했는데 하도 하는 짓이 어이가 없어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시박은 청룡이 말이 없는 걸 반성의 의미로 알아들었는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박이 자신의 손을 내밀며 말했다.
“손.”
일말의 장난기 없는 진지한 음색이었다.
애꿎은 눈송이만 손아귀에 내려앉자 시박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라? 이상하네. 덩치가 커지면서 지능이 쇠퇴했나?”
시박이 다시 한 번 말했다.
“파랭이 손!”
「……크르르. 김시박.」
청룡의 선명한 목소리였다.
시박이 청룡의 언어에 놀랐다.
“뭐야 말을 할 수 있었어? 어렸을 적에는 못했는데? 이야, 파랭이 이 녀석! 이제 영물 값 좀 하는구나!”
시박의 놀림에 청룡의 끔찍한 잇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네놈은 오늘 살아서 돌아가지…… 크윽!」
청룡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해괴한 일이었다.
청룡이 자신에게 적의를 나타내는 것도, 대화를 시도한 것도 모두가 처음이었다.
더불어 심마에 걸린 것처럼 괴로워하는 모습은 뭐란 말인가.
“파랭이 너 여의주는 어따 팔아먹었냐.”
그러고 보니 청룡의 손아귀에 여의주가 보이지 않았다.
용에게 있어 여의주란, 갓 새끼를 낳은 어미의 심정처럼 소중하고 진귀한 구슬이었다.
“엿 바꿔 먹었냐?”
청룡의 머리가 시박에게 부딪쳤다.
갑작스레 공격을 허용한 시박이 별똥별처럼 눈 더미에 처박혔다. 필시 봉우리 하나를 박살 낸 일격이었다.
시박이 대(大)자로 몸을 누인 채 황당해했다.
감히 영물인 주제에, 황산 봉우리에 십자수를 박았던 놈이 자신을 냅다 공격해 버린 것이다.
“쳤, 쳤어? 파랭이 네놈이 감히 날 쳤어?”
청룡이 시박이를 향해 아가리를 쫘악 벌리며 달려들었다.
그 속을 보고 있자니 저승의 칠흑 같은 어둠이 생각났다.
“염병하네!”
콰과광!
청룡은 시박이 있던 자리를 땅덩이 채로 물어뜯었다.
족히 30장은 넘을 크기였다. 이빨에 박살 나는 땅덩이의 최후에 시박은 왠지 모를 분노가 어렸다.
자신을 저렇게 만들려 했단 말인가.
허공에 뜬 시박은 잠시 청룡과 눈싸움을 했다. 염라대왕의 말처럼 순리를 거스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친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감히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내다니 말이다.
시박이 부채를 꺼내 들었다.
청룡의 넘실거리는 수염이 더듬이라도 된 듯 빳빳해지며 위험을 감지했다. 부채가 한 장 정도 커지며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한 번, 두 번…… 시박이 쉴 새 없이 부채를 휘둘렀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줄기가 한 마리 풍룡(風龍)이 된 것처럼 청룡에게 날아갔다. 청룡의 몸이 기우뚱하나 싶더니 중심을 잃고 바닥에 처박혔다.
생선 비늘처럼 떨어지는 청룡의 비늘이 주위를 수놓았다.
시박이 하늘을 향해 검지를 찔러 댔다.
“염(炎)!”
세상이 붉어졌다. 저승의 팔열지옥(八熱地獄) 중 여섯 번째 초열지옥(焦熱地獄)의 불길을 소환시킨 것이다.
유성 같이 떨어지는 불덩이가 청룡을 강타했다.
「크아악!」
주위가 대량의 수증기로 자욱했다.
적군같이 둘러싼 안개 더미 속에서 초열지옥의 불길이 청룡의 살갗을 파고들며 넘실거렸다.
“허억, 허억. 파랭이 자식 힘쓰게 하기…….”
순간, 시박의 두루마기가 넝마처럼 얼어붙었다.
청룡이 자신의 특기이자 최대 무기인 용트림을 쏜 것이다.
심해에 잠든 빙하의 숨결이 아가리를 벌린 육식 짐승처럼 덮쳐 왔다.
시박이 부채로 몸을 가리며 얼음 폭풍을 막아섰다.
콰과광!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청룡 때문이 아니다. 자신 때문은 더욱 아니었다.
월영검(月影劍)이 위험을 알리듯 미친 듯한 검명을 토해 냈다. 순간 중력을 무시한 충격이 다리 밑에서 터져 나왔다.
청룡과 시박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하늘로 튕겨져 나갔다.
균열의 시간이 당도한 것이다.
설원에 갑작스런 가뭄이 인 것처럼, 사방이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졌다. 시박이 끊어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았다.
“미치겠군. 균열이 시작됐…….”
「끼아악.」
청룡이 비명을 질렀다. 아니, 그것은 용음이었다.
붉어진 눈은 동공마저 덮어 그 기괴함을 더해 나갔다.
“파, 파랭이 자식이 미친 건가?”
균열이 도래할 때 이성을 잃는다는 것은 싸움을 계속하겠다는 뜻이었다. 시박이 눈에 띄게 다급해졌다. 이미 용의 제어(制御)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콰드드득!
청룡의 몸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뱀이 탈피하듯 날카로운 한기와 함께 청룡의 비늘들이 조각나 부서져 나갔다. 필시 폭주에 대한 영향 때문이었다. 시박의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피해야 한다. 아니, 싸워야 한다.’
시박이 부채를 힘주어 잡았다. 하필이면 가져온 부채가 풍(風)의 기운이 담긴 것이다. 화(火)의 기운이 깃든 부채는 시박이 도령 시절 염라대왕의 시중을 들다 수염을 태워 먹어 압수된 지 오래였다.
「크르르…… 김씨빡.」
탈피를 끝낸 청룡이 낮게 울부짖었다.
“……갈!”
생각으로 복잡했던 시박의 머리가 분노로 채워졌다. 청룡은 시박의 앞에서 하지 말아야 할 금기를 저지른 것이다. 감히 자신의 이름을 갖고 놀다니.
청룡이 시박을 집어삼킬 듯 입을 쫘악 벌렸다.
시박은 전력으로 속도를 내 청룡의 이빨 사이를 넘나들었다. 딱딱거리는 이 가는 소리가 한동안 울려 퍼졌다.
청룡이 손을 뻗어 시박의 몸을 잡으려 몸부림쳤다.
시박은 그대로 날아올라 청룡의 턱주가리를 발로 걷어차 올렸다.
“허억, 허억. 오늘 한번 끝장을 내보자!”
포옹― 포옹―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설원의 갈라진 틈 사이로 미세한 빛의 입자가 뿜어져 나왔다.
기이잉―
월영검의 검명이 무거워졌다.
시박이 자신도 모르게 월영검을 뽑았다. 파기된 줄 알았던 검신이 빛을 토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포옹― 포옹―
순간 시박의 머릿속에 아수라 같은 기억이 한 움큼 던져졌다.
포옹― 포옹―
청룡의 용트림이 다시 한 번 발화하려는 순간.
백야(白夜)를 무색하게 할 강렬한 빛이 시박과 청룡을 덮쳤다.
지금껏 없었던 강렬한 차원의 균열이었다.
북해가 진동하기를 잠시 다시금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2화 청룡(靑龍)을 개 패듯 패다
시박은 자신을 따라오겠다던 이승차사 이덕춘과 강림차사 이 도령을 생각했다. 웃기는 녀석들이었다.
청룡이란 영물을 보고 싶어선지 아니면 자신의 일을 돕겠다는 건지.
특히 이 도령이 술안주거리로도 말하지 않는 금동아줄을 가져왔을 때는 할 말을 잃었다. 과거 호랑이에게 쫓기는 남매를 구하기 위해 옥황상제가 썼던 밧줄이었다.
청룡이 무슨 개나 소나 같은 가축도 아닌데, 헛웃음만 나왔다.
“청룡을 잡고 오는 대로 정신교육이나 시켜야지.”
정작 그런 말을 하는 시박의 손에는 이 도령이 갖고 왔던 금동아줄이 들려 있었지만.
금동아줄은 최대 900장까지 늘어나는 신물이기도 했다.
지금은 한 자 길이로 본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설원…… 마치 혼마저 얼어붙게 하는 것 같구나.”
시간은 어느덧 자시의 한가운데, 자정에 걸쳐져 있었다.
공간의 균열이 일어나기까지 반 시진 남은 것이다.
시박이 산세를 둘러봤다.
만년설산의 12봉우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날카로운 정상에 바람이라도 한 올 걸린다면 금방이라도 굉음을 내며 눈 더미가 쏟아져 내릴 듯했다.
무언가 달라졌다.
1000년 전 북해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설원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눈이 멀 것만 같은 시박이었다. 모든 것이 눈[雪]에 침식되어 가도 가도 제자리걸음 하는 것만 같았다.
북해는…… 적막하고 차가웠다.
“확실히 청룡이 뭔가 술수를 부려도 단단히 부렸어.”
달빛을 등진 시박은 청룡을 찾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발(發)!”
투아앙.
저승의 사(死)의 기운이 시박의 몸에서 거미줄처럼 뻗어 나갔다. 수십, 수백 개로 늘어난 기는 금방이라도 설원을 집어삼킬 듯 기승을 부렸다.
“네놈이 하늘의 사신(四神) 중 하나인 이상 이 기운에 틀림없이 공명하겠지.”
시박은 청룡을 생각하니 괜스레 웃음이 났다.
놈이 어렸을 적에 참 때리기도 많이 때린 기억이 난 것이다.
“한 번은 낚싯바늘에 주둥이를 꿰어 전설의 기린(麒麟)을 잡으려 했지. 큭큭.”
기린이 물속에 산다고 굳게 믿고 있는 시박이었다.
“그때 녀석의 몸집이 40척 정도 되었으니 지금은 얼마나 커졌을까?”
청룡을 잡으면 다시 낚싯바늘에 꿰어 기린을 잡아 볼까 생각하는 시박이었다.
그때였다.
시박의 몸이 장창에 찔린 것처럼 튕겨져 나갔다. 청룡의 기운이 그만큼 강맹하여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황급히 발(發)의 기운을 걷어 들였다.
“요것 봐라. 제법 영기(靈氣)가 강맹한데?”
설원에 폭설이 휘몰아쳤다.
갑작스런 기상 변화에 시박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청룡의 특기라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눈발 사이를 꿰뚫고 짐승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사신(四神) 중 하나인 청룡이었다.
12봉우리 뒤에서 청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박을 알아보았는지 굉장히 격분해 있었다. 기어코 꼬리로 봉우리 하나를 무너트리는 반가움을 표했다.
“녀석, 내가 그리도 반가울꼬.”
시박이 금동아줄로 어깨를 두드리며 청룡의 마중을 기다렸다. 두려운 기색 따위는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
청룡이 몸을 똬리 틀듯 빙빙 돌리며 다가왔다.
그 크기가 능히 장강을 덮고도 남을 크기였다. 시박이 청룡의 그림자에 가리며 어둑어둑해졌다.
거리는 불과 100장 남짓했다.
‘이놈의 지렁이 새끼가 약을 잘못 처먹었나 왜 이렇게 커진 거지?’
낚시 미끼로는 사용할 수 없겠다 생각한 시박이었다.
시박이 어색하게 오랜만의 해후(邂逅)에 인사를 건넸다.
“파랭아, 그동안 잘 지냈느냐?”
청룡이 어렸을 적 시박이 자주 부르던 애칭이었다.
시박이 어울리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잡아가기는커녕 잡아먹히지 않으면 다행일 크기였다.
청룡은 시박을 바라보며 어렸을 적 악몽(惡夢)이 생각난 듯 살짝 오한이 들었다.
「크르르.」
낮게 울음소리를 흘리는 청룡.
시박은 거기에 마음이 상했는지 갑자기 눈에 쌍심지를 켰다. 시박이 청룡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기 위해 20장 더 위로 올라갔다.
“파랭이 이놈. 감히 싸가지 없게 어디서 으르렁거리는 것이냐.”
그러고는 대뜸 금동아줄을 휘둘렀다.
금동아줄은 순식간에 120장이 늘어나며 청룡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청룡은 아무런 반응 없이 살짝 감았던 눈을 떴다.
“자자. 나 시박이다, 파랭아. 이제 기억나지?”
청룡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당장에 씹어 삼키려 했는데 하도 하는 짓이 어이가 없어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시박은 청룡이 말이 없는 걸 반성의 의미로 알아들었는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박이 자신의 손을 내밀며 말했다.
“손.”
일말의 장난기 없는 진지한 음색이었다.
애꿎은 눈송이만 손아귀에 내려앉자 시박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라? 이상하네. 덩치가 커지면서 지능이 쇠퇴했나?”
시박이 다시 한 번 말했다.
“파랭이 손!”
「……크르르. 김시박.」
청룡의 선명한 목소리였다.
시박이 청룡의 언어에 놀랐다.
“뭐야 말을 할 수 있었어? 어렸을 적에는 못했는데? 이야, 파랭이 이 녀석! 이제 영물 값 좀 하는구나!”
시박의 놀림에 청룡의 끔찍한 잇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네놈은 오늘 살아서 돌아가지…… 크윽!」
청룡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해괴한 일이었다.
청룡이 자신에게 적의를 나타내는 것도, 대화를 시도한 것도 모두가 처음이었다.
더불어 심마에 걸린 것처럼 괴로워하는 모습은 뭐란 말인가.
“파랭이 너 여의주는 어따 팔아먹었냐.”
그러고 보니 청룡의 손아귀에 여의주가 보이지 않았다.
용에게 있어 여의주란, 갓 새끼를 낳은 어미의 심정처럼 소중하고 진귀한 구슬이었다.
“엿 바꿔 먹었냐?”
청룡의 머리가 시박에게 부딪쳤다.
갑작스레 공격을 허용한 시박이 별똥별처럼 눈 더미에 처박혔다. 필시 봉우리 하나를 박살 낸 일격이었다.
시박이 대(大)자로 몸을 누인 채 황당해했다.
감히 영물인 주제에, 황산 봉우리에 십자수를 박았던 놈이 자신을 냅다 공격해 버린 것이다.
“쳤, 쳤어? 파랭이 네놈이 감히 날 쳤어?”
청룡이 시박이를 향해 아가리를 쫘악 벌리며 달려들었다.
그 속을 보고 있자니 저승의 칠흑 같은 어둠이 생각났다.
“염병하네!”
콰과광!
청룡은 시박이 있던 자리를 땅덩이 채로 물어뜯었다.
족히 30장은 넘을 크기였다. 이빨에 박살 나는 땅덩이의 최후에 시박은 왠지 모를 분노가 어렸다.
자신을 저렇게 만들려 했단 말인가.
허공에 뜬 시박은 잠시 청룡과 눈싸움을 했다. 염라대왕의 말처럼 순리를 거스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친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감히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내다니 말이다.
시박이 부채를 꺼내 들었다.
청룡의 넘실거리는 수염이 더듬이라도 된 듯 빳빳해지며 위험을 감지했다. 부채가 한 장 정도 커지며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한 번, 두 번…… 시박이 쉴 새 없이 부채를 휘둘렀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줄기가 한 마리 풍룡(風龍)이 된 것처럼 청룡에게 날아갔다. 청룡의 몸이 기우뚱하나 싶더니 중심을 잃고 바닥에 처박혔다.
생선 비늘처럼 떨어지는 청룡의 비늘이 주위를 수놓았다.
시박이 하늘을 향해 검지를 찔러 댔다.
“염(炎)!”
세상이 붉어졌다. 저승의 팔열지옥(八熱地獄) 중 여섯 번째 초열지옥(焦熱地獄)의 불길을 소환시킨 것이다.
유성 같이 떨어지는 불덩이가 청룡을 강타했다.
「크아악!」
주위가 대량의 수증기로 자욱했다.
적군같이 둘러싼 안개 더미 속에서 초열지옥의 불길이 청룡의 살갗을 파고들며 넘실거렸다.
“허억, 허억. 파랭이 자식 힘쓰게 하기…….”
순간, 시박의 두루마기가 넝마처럼 얼어붙었다.
청룡이 자신의 특기이자 최대 무기인 용트림을 쏜 것이다.
심해에 잠든 빙하의 숨결이 아가리를 벌린 육식 짐승처럼 덮쳐 왔다.
시박이 부채로 몸을 가리며 얼음 폭풍을 막아섰다.
콰과광!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청룡 때문이 아니다. 자신 때문은 더욱 아니었다.
월영검(月影劍)이 위험을 알리듯 미친 듯한 검명을 토해 냈다. 순간 중력을 무시한 충격이 다리 밑에서 터져 나왔다.
청룡과 시박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하늘로 튕겨져 나갔다.
균열의 시간이 당도한 것이다.
설원에 갑작스런 가뭄이 인 것처럼, 사방이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졌다. 시박이 끊어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았다.
“미치겠군. 균열이 시작됐…….”
「끼아악.」
청룡이 비명을 질렀다. 아니, 그것은 용음이었다.
붉어진 눈은 동공마저 덮어 그 기괴함을 더해 나갔다.
“파, 파랭이 자식이 미친 건가?”
균열이 도래할 때 이성을 잃는다는 것은 싸움을 계속하겠다는 뜻이었다. 시박이 눈에 띄게 다급해졌다. 이미 용의 제어(制御)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콰드드득!
청룡의 몸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뱀이 탈피하듯 날카로운 한기와 함께 청룡의 비늘들이 조각나 부서져 나갔다. 필시 폭주에 대한 영향 때문이었다. 시박의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피해야 한다. 아니, 싸워야 한다.’
시박이 부채를 힘주어 잡았다. 하필이면 가져온 부채가 풍(風)의 기운이 담긴 것이다. 화(火)의 기운이 깃든 부채는 시박이 도령 시절 염라대왕의 시중을 들다 수염을 태워 먹어 압수된 지 오래였다.
「크르르…… 김씨빡.」
탈피를 끝낸 청룡이 낮게 울부짖었다.
“……갈!”
생각으로 복잡했던 시박의 머리가 분노로 채워졌다. 청룡은 시박의 앞에서 하지 말아야 할 금기를 저지른 것이다. 감히 자신의 이름을 갖고 놀다니.
청룡이 시박을 집어삼킬 듯 입을 쫘악 벌렸다.
시박은 전력으로 속도를 내 청룡의 이빨 사이를 넘나들었다. 딱딱거리는 이 가는 소리가 한동안 울려 퍼졌다.
청룡이 손을 뻗어 시박의 몸을 잡으려 몸부림쳤다.
시박은 그대로 날아올라 청룡의 턱주가리를 발로 걷어차 올렸다.
“허억, 허억. 오늘 한번 끝장을 내보자!”
포옹― 포옹―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설원의 갈라진 틈 사이로 미세한 빛의 입자가 뿜어져 나왔다.
기이잉―
월영검의 검명이 무거워졌다.
시박이 자신도 모르게 월영검을 뽑았다. 파기된 줄 알았던 검신이 빛을 토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포옹― 포옹―
순간 시박의 머릿속에 아수라 같은 기억이 한 움큼 던져졌다.
포옹― 포옹―
청룡의 용트림이 다시 한 번 발화하려는 순간.
백야(白夜)를 무색하게 할 강렬한 빛이 시박과 청룡을 덮쳤다.
지금껏 없었던 강렬한 차원의 균열이었다.
북해가 진동하기를 잠시 다시금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