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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3화 낭만사신 환생하다(1)
콰앙―!
시박이 땅바닥에 볼품없이 처박혔다. 꼭 개구리가 혀 내밀고 죽은 꼴이었다. 급소가 채인 것 같은 아픔. 시박은 소피 마려운 아이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파랭이 이런 육시할…….”
시박이 말끝을 흐렸다. 뭔가 이상했다.
어둑한 밤은 같았지만 떠 있는 달이 달랐다.
영혼을 얼어붙게 만들던 추위도 없다. 설상가상 설원의 눈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또 어디야. 달은 또 왜 두 개고.”
파랭이가 뭔가 술수를 부린 것인가. 청룡이 천지조화를 부릴 리 만무했다. 시박은 나무로 둘러싸인 주위를 둘러봤다.
잔잔한 호수까지 있는 걸 보니 분명 설원은 아니었다.
“설마 염라대왕이 말하던 차원의 균열?”
문득 청룡과의 마지막 싸움이 생각났다.
포옹거리던 소리와 함께 백야의 빛이 자신과 청룡을 덮쳐 왔다.
“다행히 소멸하지 않고 사천 인근의 땅까지 튕겨진 모양이군.”
시박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끝내 외면했다.
충격이 커서 보이는 헛것이거나 염라대왕이 또 뭔 장난질을 부리는 거라 생각했다.
“파랭이 이놈은 어디에 있는…… 월영검!”
시박은 월영검(月影劍)을 뽑았다. 은은한 백합 향이 풍겨져 나왔다. 얼음을 곱게 갈아 놓은 것 같은 투명한 검신은 달빛 한 올을 거쳐 반사광을 뿜어냈다.
“날이 부러져 있네?”
뿜어내는 기세에 비해 뭔가 볼품없었다.
검집 크기에 비해도, 월영검은 고작 단도보다 반 자 더 길었다. 설상가상 검끝 역시 뭉뚝해 꼭 포졸들이 들고 다니는 몽둥이 같았다.
“아까와는 분명 다른 모습인 것 같은데…….”
청룡과의 싸움 중 뽑아 든 월영검의 모습과 분명 달랐다. 시박은 월영검을 몇 차례 휘둘렀다.
사악― 사악―
생긴 것과 달리 부웅거리는 묵직한 소리는 나지 않았다.
마치 부끄럼 타는 새색시마냥 한껏 숨소리를 죽인 채 제 할 일을 다하는 월영검이었다.
시박은 만족한 얼굴로 월영검을 검집에 넣었다.
“뭐, 예전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야 낫지.”
시박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이 두 개여서 그런지 주위는 대낮처럼 밝았다.
“일단 저승으로 돌아가야 하나.”
청룡이 그토록 강해졌을 줄이야.
생각할수록 괜스레 신경질이 났다. 하마터면 소멸될 뻔한 위기도 수차례 있었다.
저승으로 돌아가서 이 도령과 이덕춘에게 실컷 화풀이를 할 셈이었다.
부스럭, 부스럭.
“응?”
시박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무 밑에 웬 귀신 하나가 배를 드러낸 채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생긴 것도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한 게 수염까지 길러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허허. 이런 경우 없는 잡귀를 봤나.”
시박은 뒷짐 지며 머리를 흔들었다.
감히 잡귀 따위가 자신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다니.
설마 하니 누워서 하품까지 하고 있다. 시박은 생각했다. 이것은 명백히 자신에 대한 도발이라고.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는 모르겠다만 감히 내 앞에서 배짱을 부려?”
시박은 성큼성큼 잡귀 앞으로 걸어갔다.
잡귀는 여전히 누워 있었다.
“이런 쌍노무 쉐리 보게.”
구수한 욕설에 잡귀가 시박을 올려다봤다. 웬 인간 하나가 자신을 똑바로 보고 씨부렁거리고 있었다. 설마 자신이 보이는 것인가.
잡귀. 아니, 땅의 하급 정령 노움은 피식 웃었다.
자신을 볼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더군다나 시박에게서는 정령과의 친화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웃, 웃어?”
시박은 다짜고짜 노움의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너 같은 놈은 한번 저승에서 썩어 봐야 ‘아! 내가 잠시 미쳤었구나.’ 하고 정신 차리지.”
노움이 당황하며 허공에서 발버둥 쳤다.
어떻게 자신을 잡을 수 있는 것인가. 납득이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우선 버릇부터 좀 고쳐야겠다.”
시박이 노움을 허공에서 몇 바퀴 돌리더니 나무에 던져 버렸다.
쿵!
노움이 콧잔등을 붙잡고 아픔에 몸을 떨었다.
시박이 만족스런 얼굴로 품에서 금동아줄을 꺼냈다. 청룡한테 당한 화풀이를 톡톡히 할 생각이었다.
“까르륵―”
“응?”
노움의 허리에 발을 올려놓고 손을 꽁꽁 묶던 시박이 동작을 멈췄다.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호수였다.
“이, 이건 또 뭐야.”
시박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호수 근처에서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처녀 귀신. 아니, 애기 귀신들이 재미있게 노움의 포획 과정을 구경하고 있었다.
수로 보아 열 위(귀신을 세는 단위) 정도 되었다.
“이, 이것들이 쌍으로 저승차사를 무시해?”
시박은 금동아줄을 나무 위에 걸쳤다. 노움이 육질을 다듬기 전 행하는 황구처럼 몸이 묶인 채 대롱대롱 매달렸다.
“오늘 진정한 개차반이 뭔지 확실하게 보여 주마.”
시박이 호수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애기 귀신들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시박에게 물을 뿌려 댔다.
촤악, 철썩.
시박은 얼굴에 그대로 물을 뒤집어썼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축축한 감촉이었다. 당장에 부채를 꺼내 든 시박은 애기 귀신들을 날파리 잡듯 그대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까르륵…… 꺄악!”
애기 귀신들의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비명 소리로 변했다. 그렇게 물의 정령 운디네들은 간만에 나온 마실에서 피를 보게 됐다.
나무에 매달린 노움은 그 모습에 홀홀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 심보가 고약한 턱에 생기발랄한 운디네들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시박은 운디네들을 나무 기둥에 마저 묶었다.
혹 정령사가 이 모습을 봤다면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뭐가 좋다고 홀홀거려!”
빡!
얼떨결에 딱밤을 맞은 노움이 충격에 몸을 축 늘어트렸다.
시박은 양손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며 나무에 포박된 정령들을 바라봤다.
“사천 땅을 관리하는 저승차사가 누구였지? 관리를 어떻게 하면 이런 잡귀들이 설치고 다니는 거야!”
시박은 정령들을 바라봤다.
노움은 자신이 익히 봐 왔던 귀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운디네들은 아니었다. 물로만 이루어진 소녀의 모습이 귀신이라기보다는 천계에 사는 영물 같았다.
“고것 참 신기하게 생겼네. 진짜 영물인가?”
시박은 부채로 운디네들을 쿡쿡 찔렀다.
정신을 차린 운디네들이 놀라 금동아줄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낑낑거리는 모습이 귀여울 법도 한데 시박은 갑자기 입맛을 다셨다.
“나도 염라대왕처럼 영물로 술이나 담가 볼까?”
비밀창고에 있던 독각화망이 생각난 시박이었다.
운디네들이 왠지 모를 공포에 몸을 떨었다.
“일단은 저승으로 돌아가야겠군.”
시박은 정령들을 금동아줄에 굴비 엮듯 엮어 어깨에 들춰 멨다. 노움은 운디네들이 자신의 몸에 닿자 엉큼한 웃음소리로 홀홀거렸다.
“노귀(老鬼)가 아니라 색귀(色鬼)였군.”
시박의 말에 노움의 웃음소리가 그쳤다
한순간에 색귀로 전락한 땅의 정령 노움이었다.
“네놈은 특별히 남옥(男獄)으로 보내 주마. 흐흐.”
남옥(男獄)이란 주로 색귀들이 가는 지옥인데, 일반 지옥과 달리 별다른 형벌을 가하지 않는 곳이었다. 다만 남성의 기근에 좋다는 갖은 영약들을 먹어야 하는데 그 하나하나의 효능이 고자도 발딱 세울 것들이었다.
“남자들만 있는 게 문제지만.”
노움은 뜻도 모른 채 두려움을 느껴야만 했다.
시박은 눈을 감고 저승길을 여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흡사 염불처럼 일정한 흐름을 타더니 말이라 할 수 없는 기괴한 언어로 변해 갔다.
두 개의 달이 거짓말처럼 먹구름에 모습을 감췄다.
이윽고 시박의 입이 다물어졌을 땐 먹색 비단에 불똥이라도 튄 것처럼 하늘에 구멍이 뚫리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천둥, 번개도 치지 않았다. 하늘은 다시 보름달 두 개가 환히 떠 있었다.
“뭐야. 왜 저승길이 안 열려?”
시박은 다시 한 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 기괴한 언어가 흡사 동네 미친놈 신음 소리 같아 정령들이 본능적으로 긴장을 했다. 미친놈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 아닌가.
“염라대왕이 치질에 죽은 것도 아닐 터인데, 이것들이 단체로 술잔치를 벌이는 건가?”
시박은 비밀창고에 있던 독각화망이 생각났다.
설마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개봉을 한 것인가.
저승길을 여는 수문장들이 뱀술을 마시고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이 김시박이 호락호락 당할 것 같나!”
시박이는 저승길을 여는 주문 대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문을 안 열면 강제로라도 열면 된다. 감각이 예민해지며 청각과 전음이 극대화됐다.
“처음에는 협박이다. 안 되면 무력이고.”
시박은 눈깔을 부라리며 저승을 향해 전음의 최고 단계인 심어(心語)를 사용했다. 저승길 수문장에게 닿았다 생각한 시박은 갖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문 열어라, 문지기야. 열어도 맞고 안 열어도 맞는다. 이왕이면 열어 주고 맞는 걸로 하자꾸나.
열 대 맞을 거 곱절로 맞는 수 있다. 뱀술에 목숨 걸지 마라. 나 김씨박, 아니 김시박이다. 당장에 문 열어라, 죽일 놈아.
헛간에서 보초 서고 싶더냐? 너 정말 피똥 한번 싸 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그런 거야? ……이보게, 문 공(門公).
하늘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시박이 주먹을 부르르 떨며 이를 갈았다.
저승차사 생활 평생 이런 굴욕은 처음이었다.
“결국 무력을 쓰게 한다 이거지?”
시박은 월영검을 뽑아 들었다. 강제로 저승길로 가는 문을 열려는 것이었다. 워낙 무식한 짓이라 금기에도 없는 내용이었다.
설령 금기라 해도 망설일 시박이 아니었지만.
“흐흐. 여보게, 문 공(門公). 정확히 네놈이 죽을 정도의 힘만 발휘해 주마.”
시박은 월영검을 좌측에 떠 있는 달에 겨눴다.
누가 보면 머리에 꽃 꽂고 살풀이하는 미친놈의 기세라고 했을 것이다. 정말이지 달이라도 벨 표정이었다.
“어디 한번 죽어 봐라.”
월영검 주위로 묵빛 소용돌이는 휘몰아치지 않았다.
청룡과 싸울 당시 보였던 풍룡(風龍)의 기운을 띤 힘도 보이지 않았다.
시박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살기등등한 눈으로 숲 속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누군가 주위에 있다.”
바람이 풀잎에 스치는 소리는 아니었다.
사람의 인기척도 아니었고 짐승의 기(氣)는 더더욱 아니었다.
“분명 구천을 떠도는 혼백의 울음소리였는데. 내가 잘못 들었나?”
“……흐윽.”
다시 한 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했다. 시박의 귓가에 들려온 소리는 육체를 떠난 혼백의 울음이었다. 새벽에 해금을 키는 것 같은 음색.
막 끊어지려는 삶을 야속하게 바라만 봐야 하는 혼백의 구슬픈 울음 소리였다.
시박이 금동아줄을 등에 멘 채 소리가 들린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승차사 특유의 감은 변함없던지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100년은 되었을 법한 낯선 나무들을 몇 그루 지나치고, 시박은 소리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오호. 동업자가 있었구만.”
시박의 눈에 어린 여아의 혼백을 붙잡은 저승차사가 보였다.
저승길이 열리지 않는 이유를 바로 물어볼 법도 한데 시박은 무슨 꿍꿍인지 반가움 마음도 잠시 나무 뒤에 숨어 버렸다.
필시 얄궂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로 보아 눈앞의 저승차사에게 화풀이를 할 요량이었다.
‘기분도 더러운데 너 마침 잘 걸렸다.’
마침 등에 증거물도 있다 망설일 연유가 없는 시박이었다.
3화 낭만사신 환생하다(1)
콰앙―!
시박이 땅바닥에 볼품없이 처박혔다. 꼭 개구리가 혀 내밀고 죽은 꼴이었다. 급소가 채인 것 같은 아픔. 시박은 소피 마려운 아이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파랭이 이런 육시할…….”
시박이 말끝을 흐렸다. 뭔가 이상했다.
어둑한 밤은 같았지만 떠 있는 달이 달랐다.
영혼을 얼어붙게 만들던 추위도 없다. 설상가상 설원의 눈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또 어디야. 달은 또 왜 두 개고.”
파랭이가 뭔가 술수를 부린 것인가. 청룡이 천지조화를 부릴 리 만무했다. 시박은 나무로 둘러싸인 주위를 둘러봤다.
잔잔한 호수까지 있는 걸 보니 분명 설원은 아니었다.
“설마 염라대왕이 말하던 차원의 균열?”
문득 청룡과의 마지막 싸움이 생각났다.
포옹거리던 소리와 함께 백야의 빛이 자신과 청룡을 덮쳐 왔다.
“다행히 소멸하지 않고 사천 인근의 땅까지 튕겨진 모양이군.”
시박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끝내 외면했다.
충격이 커서 보이는 헛것이거나 염라대왕이 또 뭔 장난질을 부리는 거라 생각했다.
“파랭이 이놈은 어디에 있는…… 월영검!”
시박은 월영검(月影劍)을 뽑았다. 은은한 백합 향이 풍겨져 나왔다. 얼음을 곱게 갈아 놓은 것 같은 투명한 검신은 달빛 한 올을 거쳐 반사광을 뿜어냈다.
“날이 부러져 있네?”
뿜어내는 기세에 비해 뭔가 볼품없었다.
검집 크기에 비해도, 월영검은 고작 단도보다 반 자 더 길었다. 설상가상 검끝 역시 뭉뚝해 꼭 포졸들이 들고 다니는 몽둥이 같았다.
“아까와는 분명 다른 모습인 것 같은데…….”
청룡과의 싸움 중 뽑아 든 월영검의 모습과 분명 달랐다. 시박은 월영검을 몇 차례 휘둘렀다.
사악― 사악―
생긴 것과 달리 부웅거리는 묵직한 소리는 나지 않았다.
마치 부끄럼 타는 새색시마냥 한껏 숨소리를 죽인 채 제 할 일을 다하는 월영검이었다.
시박은 만족한 얼굴로 월영검을 검집에 넣었다.
“뭐, 예전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야 낫지.”
시박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이 두 개여서 그런지 주위는 대낮처럼 밝았다.
“일단 저승으로 돌아가야 하나.”
청룡이 그토록 강해졌을 줄이야.
생각할수록 괜스레 신경질이 났다. 하마터면 소멸될 뻔한 위기도 수차례 있었다.
저승으로 돌아가서 이 도령과 이덕춘에게 실컷 화풀이를 할 셈이었다.
부스럭, 부스럭.
“응?”
시박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무 밑에 웬 귀신 하나가 배를 드러낸 채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생긴 것도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한 게 수염까지 길러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허허. 이런 경우 없는 잡귀를 봤나.”
시박은 뒷짐 지며 머리를 흔들었다.
감히 잡귀 따위가 자신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다니.
설마 하니 누워서 하품까지 하고 있다. 시박은 생각했다. 이것은 명백히 자신에 대한 도발이라고.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는 모르겠다만 감히 내 앞에서 배짱을 부려?”
시박은 성큼성큼 잡귀 앞으로 걸어갔다.
잡귀는 여전히 누워 있었다.
“이런 쌍노무 쉐리 보게.”
구수한 욕설에 잡귀가 시박을 올려다봤다. 웬 인간 하나가 자신을 똑바로 보고 씨부렁거리고 있었다. 설마 자신이 보이는 것인가.
잡귀. 아니, 땅의 하급 정령 노움은 피식 웃었다.
자신을 볼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더군다나 시박에게서는 정령과의 친화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웃, 웃어?”
시박은 다짜고짜 노움의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너 같은 놈은 한번 저승에서 썩어 봐야 ‘아! 내가 잠시 미쳤었구나.’ 하고 정신 차리지.”
노움이 당황하며 허공에서 발버둥 쳤다.
어떻게 자신을 잡을 수 있는 것인가. 납득이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우선 버릇부터 좀 고쳐야겠다.”
시박이 노움을 허공에서 몇 바퀴 돌리더니 나무에 던져 버렸다.
쿵!
노움이 콧잔등을 붙잡고 아픔에 몸을 떨었다.
시박이 만족스런 얼굴로 품에서 금동아줄을 꺼냈다. 청룡한테 당한 화풀이를 톡톡히 할 생각이었다.
“까르륵―”
“응?”
노움의 허리에 발을 올려놓고 손을 꽁꽁 묶던 시박이 동작을 멈췄다.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호수였다.
“이, 이건 또 뭐야.”
시박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호수 근처에서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처녀 귀신. 아니, 애기 귀신들이 재미있게 노움의 포획 과정을 구경하고 있었다.
수로 보아 열 위(귀신을 세는 단위) 정도 되었다.
“이, 이것들이 쌍으로 저승차사를 무시해?”
시박은 금동아줄을 나무 위에 걸쳤다. 노움이 육질을 다듬기 전 행하는 황구처럼 몸이 묶인 채 대롱대롱 매달렸다.
“오늘 진정한 개차반이 뭔지 확실하게 보여 주마.”
시박이 호수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애기 귀신들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시박에게 물을 뿌려 댔다.
촤악, 철썩.
시박은 얼굴에 그대로 물을 뒤집어썼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축축한 감촉이었다. 당장에 부채를 꺼내 든 시박은 애기 귀신들을 날파리 잡듯 그대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까르륵…… 꺄악!”
애기 귀신들의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비명 소리로 변했다. 그렇게 물의 정령 운디네들은 간만에 나온 마실에서 피를 보게 됐다.
나무에 매달린 노움은 그 모습에 홀홀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 심보가 고약한 턱에 생기발랄한 운디네들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시박은 운디네들을 나무 기둥에 마저 묶었다.
혹 정령사가 이 모습을 봤다면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뭐가 좋다고 홀홀거려!”
빡!
얼떨결에 딱밤을 맞은 노움이 충격에 몸을 축 늘어트렸다.
시박은 양손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며 나무에 포박된 정령들을 바라봤다.
“사천 땅을 관리하는 저승차사가 누구였지? 관리를 어떻게 하면 이런 잡귀들이 설치고 다니는 거야!”
시박은 정령들을 바라봤다.
노움은 자신이 익히 봐 왔던 귀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운디네들은 아니었다. 물로만 이루어진 소녀의 모습이 귀신이라기보다는 천계에 사는 영물 같았다.
“고것 참 신기하게 생겼네. 진짜 영물인가?”
시박은 부채로 운디네들을 쿡쿡 찔렀다.
정신을 차린 운디네들이 놀라 금동아줄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낑낑거리는 모습이 귀여울 법도 한데 시박은 갑자기 입맛을 다셨다.
“나도 염라대왕처럼 영물로 술이나 담가 볼까?”
비밀창고에 있던 독각화망이 생각난 시박이었다.
운디네들이 왠지 모를 공포에 몸을 떨었다.
“일단은 저승으로 돌아가야겠군.”
시박은 정령들을 금동아줄에 굴비 엮듯 엮어 어깨에 들춰 멨다. 노움은 운디네들이 자신의 몸에 닿자 엉큼한 웃음소리로 홀홀거렸다.
“노귀(老鬼)가 아니라 색귀(色鬼)였군.”
시박의 말에 노움의 웃음소리가 그쳤다
한순간에 색귀로 전락한 땅의 정령 노움이었다.
“네놈은 특별히 남옥(男獄)으로 보내 주마. 흐흐.”
남옥(男獄)이란 주로 색귀들이 가는 지옥인데, 일반 지옥과 달리 별다른 형벌을 가하지 않는 곳이었다. 다만 남성의 기근에 좋다는 갖은 영약들을 먹어야 하는데 그 하나하나의 효능이 고자도 발딱 세울 것들이었다.
“남자들만 있는 게 문제지만.”
노움은 뜻도 모른 채 두려움을 느껴야만 했다.
시박은 눈을 감고 저승길을 여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흡사 염불처럼 일정한 흐름을 타더니 말이라 할 수 없는 기괴한 언어로 변해 갔다.
두 개의 달이 거짓말처럼 먹구름에 모습을 감췄다.
이윽고 시박의 입이 다물어졌을 땐 먹색 비단에 불똥이라도 튄 것처럼 하늘에 구멍이 뚫리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천둥, 번개도 치지 않았다. 하늘은 다시 보름달 두 개가 환히 떠 있었다.
“뭐야. 왜 저승길이 안 열려?”
시박은 다시 한 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 기괴한 언어가 흡사 동네 미친놈 신음 소리 같아 정령들이 본능적으로 긴장을 했다. 미친놈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 아닌가.
“염라대왕이 치질에 죽은 것도 아닐 터인데, 이것들이 단체로 술잔치를 벌이는 건가?”
시박은 비밀창고에 있던 독각화망이 생각났다.
설마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개봉을 한 것인가.
저승길을 여는 수문장들이 뱀술을 마시고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이 김시박이 호락호락 당할 것 같나!”
시박이는 저승길을 여는 주문 대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문을 안 열면 강제로라도 열면 된다. 감각이 예민해지며 청각과 전음이 극대화됐다.
“처음에는 협박이다. 안 되면 무력이고.”
시박은 눈깔을 부라리며 저승을 향해 전음의 최고 단계인 심어(心語)를 사용했다. 저승길 수문장에게 닿았다 생각한 시박은 갖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문 열어라, 문지기야. 열어도 맞고 안 열어도 맞는다. 이왕이면 열어 주고 맞는 걸로 하자꾸나.
열 대 맞을 거 곱절로 맞는 수 있다. 뱀술에 목숨 걸지 마라. 나 김씨박, 아니 김시박이다. 당장에 문 열어라, 죽일 놈아.
헛간에서 보초 서고 싶더냐? 너 정말 피똥 한번 싸 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그런 거야? ……이보게, 문 공(門公).
하늘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시박이 주먹을 부르르 떨며 이를 갈았다.
저승차사 생활 평생 이런 굴욕은 처음이었다.
“결국 무력을 쓰게 한다 이거지?”
시박은 월영검을 뽑아 들었다. 강제로 저승길로 가는 문을 열려는 것이었다. 워낙 무식한 짓이라 금기에도 없는 내용이었다.
설령 금기라 해도 망설일 시박이 아니었지만.
“흐흐. 여보게, 문 공(門公). 정확히 네놈이 죽을 정도의 힘만 발휘해 주마.”
시박은 월영검을 좌측에 떠 있는 달에 겨눴다.
누가 보면 머리에 꽃 꽂고 살풀이하는 미친놈의 기세라고 했을 것이다. 정말이지 달이라도 벨 표정이었다.
“어디 한번 죽어 봐라.”
월영검 주위로 묵빛 소용돌이는 휘몰아치지 않았다.
청룡과 싸울 당시 보였던 풍룡(風龍)의 기운을 띤 힘도 보이지 않았다.
시박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살기등등한 눈으로 숲 속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누군가 주위에 있다.”
바람이 풀잎에 스치는 소리는 아니었다.
사람의 인기척도 아니었고 짐승의 기(氣)는 더더욱 아니었다.
“분명 구천을 떠도는 혼백의 울음소리였는데. 내가 잘못 들었나?”
“……흐윽.”
다시 한 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했다. 시박의 귓가에 들려온 소리는 육체를 떠난 혼백의 울음이었다. 새벽에 해금을 키는 것 같은 음색.
막 끊어지려는 삶을 야속하게 바라만 봐야 하는 혼백의 구슬픈 울음 소리였다.
시박이 금동아줄을 등에 멘 채 소리가 들린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승차사 특유의 감은 변함없던지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100년은 되었을 법한 낯선 나무들을 몇 그루 지나치고, 시박은 소리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오호. 동업자가 있었구만.”
시박의 눈에 어린 여아의 혼백을 붙잡은 저승차사가 보였다.
저승길이 열리지 않는 이유를 바로 물어볼 법도 한데 시박은 무슨 꿍꿍인지 반가움 마음도 잠시 나무 뒤에 숨어 버렸다.
필시 얄궂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로 보아 눈앞의 저승차사에게 화풀이를 할 요량이었다.
‘기분도 더러운데 너 마침 잘 걸렸다.’
마침 등에 증거물도 있다 망설일 연유가 없는 시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