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0화
4화 한 달간의 휴식(休息)(3)
한 번씩 눈을 마주친 시박은 구성원 한번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꼬맹이 하나에 변태 하나, 그리고 물탱이 세 마리…….
“흠흠.”
시박이 새삼스레 목을 가다듬었다.
“천 년, 아니 그전부터 내게는 소박한 꿈이 하나 있었다.”
소박한 꿈이라고 말했지만 사뭇 진지했다.
“행여 환생을 한다면 이승의 음식을 배 터지게 먹어 보자. 제사상에 올려진 음식이 아닌 말 그대로 산해진미로 사치를 떨어 보자!”
이것은 거짓말이다.
시박은 틈틈이 제사상 외의 음식도 먹은 적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취걸개의 마지막 작품이자 지금은 유작(有作)이 돼 버린 황구 구이였다.
“나 김시박은 배고픈 건 못 참는다.”
진실은 항상 거짓 뒤에 초라하게 숨어 있는 걸지도 몰랐다.
시박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고로 너희들이 내 원대한 계획에 동참을 해야겠다.”
“홀홀!”
노움의 웃음소리에 시박이 인상을 찌푸렸다.
“넌 백주대낮부터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이냐?”
노움이 답답한 듯 아미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아미는 혼백이 되었을 시 정령과 교감을 이루어서인지 신기하게도 말이 통했다.
어쩌면 시박이 역시 혼백이었던 아미의 영향을 받아 이곳의 언어를 사용하는 걸지도 몰랐다.
“노움이가 그러는데 오빠야. 그 원대한 계획이라는 게 자기 장가보내 주는 거였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는데?”
“……저기 가서 대가리 박고 있어.”
노움은 ‘네놈이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물론 시박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머리를 박는 건 잊지 않았다.
“본론으로 돌아와 일단 지금부터 내가 하는 것을 잘 보고 배우도록 해라. 나중에 아미 너랑 물탱이들이 해야 되니까.”
시박은 소매를 걷으며 식재료들을 만지기 시작했다.
요리는 처음 하는 것이었지만 천 년간 곁눈질로 본 것만 해도 언뜻 백여 번이 넘었다. 시박은 멥쌀가루를 한 주먹 쥐었다.
“까륵?”
좌측에 있던 운디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박이 자신에게 멥쌀가루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먹어.”
“…….”
“네 시진 정도, 즉 8시간 정도 불려야 한다. 10분 줄게.”
시박이의 이러한 행동은 모두 노움 덕이었다.
종족에 대해 설명할 때 운디네들을 두고 말하길 가정 살림 못하는 여자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정의 내렸기 때문이다.
“까륵…….”
운디네가 불안한 얼굴로 냄새를 맡았다.
머리를 박은 노움이 용케 그 모습을 보았는지 홀홀거렸다.
“나는 뭐 먹어야 돼, 오빠야?”
아미는 모닥불을 피웠다.
땅에 머리를 박은 노움은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운디네가 겨우 멥쌀가루를 불렸을 때는 수전증 환자처럼 몸 전체를 쉴 새 없이 떨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군. 나머지 물탱이는 냄비에 물 좀 만들어라.”
시박은 멥쌀가루가 마르길 기다렸다 소금으로 간을 맞췄다.
‘호박가루가 있어야 하는데.’를 반복하며 곧이어 찜통을 냄비에 넣고 멥쌀가루를 그 속에 넣었다.
“씨박 오빠, 뭐 만드는 거야?”
“…….”
시박은 과장된 몸짓으로 귓구멍을 후벼 팠다.
멥쌀가루가 찜통에서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쪄져 갔다.
아미가 재 묻은 얼굴로 침을 꼴딱 삼켰다.
“이게 바로 떡이라는 거다.”
“떡?”
시박은 찜통 뚜껑을 열고 떡이 된 멥쌀가루를 주먹으로 방아 찧듯 사정없이 때렸다.
이내 밤톨만 한 크기로 떼어 신줏단지 모양을 만들고 그 속에 벌꿀을 넣었다.
시박이표 꿀떡이 완성된 것이다.
아미가 부리나케 꿀떡 하나를 입에 가져갔다.
“우와, 맛있어!”
“이 몸이 만들었는데 안 맛있을 수가 있나.”
“우리 이제 매일 꿀떡 배불리 먹는 거야?”
시박이 잔인하게 웃었다.
“아니.”
“오, 오빠야, 그렇게 웃지 마라 사악해 보여.”
운디네들은 행여 시박이 자신들을 볼세라 멥쌀가루를 꾸준히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걸 팔아 장사를 해야지.”
“히히. 나랑 오빠랑 물탱이들이?”
아미의 말에 시박은 떡을 파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다.
저승차사가 머리에 바구니를 얹고 ‘떡 사세요.’라는 모습. 행여 발음이라도 샜다가는 ‘똑 사세요.’라는 신파극 아닌 신파극이 벌어진다.
시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랑 물탱이들이.”
노움은 차라리 시박이가 자신을 때려 주기를 바랐다.
꼬맹이들이 꿀떡을 팔러 가면 일어설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놈이,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었다.
“흐음.”
시박은 나뭇가지를 하나 꺾었다.
어른 팔뚝만 한 두께로 몽둥이로 쓰기에 적당해 보였다.
잔가지를 제거하며 끝의 적당한 간격의 줄기는 남겨 두었다.
꼭 지게를 질 때 사용하는 지게 작대기 같았다.
붕. 부웅.
작대기의 날렵한 소리에 노움의 불알이 오그라들었다.
“홀홀!”
‘때리려면 뜸 들이지 마라.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할 수 있다.’는 노움의 처절한 외침이었지만 시박은 정령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게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시박은 작대기로 노움의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노움은 ‘인생 참 더럽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한 열 번쯤 중얼거렸을까 시박에게서 일어서라는 말이 들려왔다.
“힘드냐?”
“…….”
“내가 왜 널 떡 팔러 보내지 않았을까?”
노움은 고개를 숙이고 돌멩이를 걷어찼다.
문득 머릿속에 아들에게 벌을 준 아버지가 마지막에 따사로이 위로를 해 주는 모습이 연출됐다. 적중이라도 한 듯 시박은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네놈의 발정에 손님들이 사려던 떡도 안 살까 봐서.”
“…….”
시박은 노움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뭐, 굳이 다른 이유를 말하라면 네놈이 자칭 땅의 정령이란 것 정도? 지금부터 할 일에 조금은 도움이 되겠지.”
시박은 죄인을 사로잡은 것처럼 지게 작대기로 노움의 등을 떠밀었다. 자꾸만 숲으로 방향을 잡는 시박이가 불안하기만 했다.
슬쩍 뒤돌아보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금동아줄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자고로 요리에는 불이 필요한 법. 뱀이나 잡으러 가자.”
노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불이랑 뱀은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문득 오늘따라 오후의 햇살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때리려고 숲으로 향하는 걸까, 자칫 땅속에 묻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의 정령이 뱀이라. 쩝, 비밀창고에 있던 독각화망이 생각나는군.”
불의 정령 살라만다. 시박은 지금 범인이 상상도 못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상황을 알아차린 노움이 음침하게 웃음소리를 냈다.
이놈이라면 성질 더러운 불의 정령도 바람 앞의 촛불이다.
운디네와 살라만다를 발밑에 둔 땅의 정령이라, 노움의 발칙한 상상이 발걸음을 빨라지게 했다.
***
풋내기 정령사 네엘은 한숨을 쉬었다.
이 길에 뜻을 둔 지 어언 10년이다. 그동안 계약을 맺은 정령이라고는 새침데기 실프 하나. 근래에는 바람이 났는지 웬만해서는 나오지도 않았다.
“하필이면 살라만다와 계약을 하라니.”
네엘은 스승인 로난드를 떠올렸다.
오늘도 허탕 치고 돌아오면 자신의 뼈마디를 뽑아 달밤에 춤을 추겠다고 했다. 환갑인 노인이 달밤에 춤을 추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게 다 변태 노움 때문이야!”
네엘은 며칠 전 숲에서 운디네 무리들을 발견했다.
스물이 넘게 여자 손 한 번 잡아 보지 못한 탓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서일까.
운디네의 활기찬 콧소리가 야밤에 지나치던 물레방앗간을 떠올렸다.
애써 마음을 다잡고 조심스레 다가가는데…….
“홀홀!”
“그래, 이 경박한 웃음소리였어.”
네엘은 자신이 말하고도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하지만 방금 전 웃음소리는 확실히 그날 운디네들에게 찝쩍대던 노움의 웃음소리였다.
“홀홀!”
“변태 노움이다!”
네엘은 웃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뛰어갔다.
내키진 않지만 살라만다보다는 노움이 계약하기에 한결 수월할지도 몰랐다.
“하하! 뱀이 아주 실한 게 맛있게 생겼구나!”
이번에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엘은 본능적으로 나무 뒤에 숨었다. 그 변태 노움이 주인이 있었던 것인가. 호흡을 가다듬고 조심스레 소리의 근원지를 확인했다.
“허, 허억!”
네엘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웬 여성이, 아니 자세히 보니 남자인 듯싶다. 아무튼 정체 모를 인간이 지게 작대기로 사정없이 살라만다를 때려잡고 있었다.
노움은…… 배꼽 잡고 웃으며 땅바닥을 뒹굴었다.
“뭐, 뭐야. 저것들은.”
네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살라만다가 뱀의 형상이라지만 4계열의 하급 정령 중 단연 으뜸의 공격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지금 저 모습. 특히 밧줄에 칭칭 감겨 있는 수많은 살라만다는 대체 뭐란 말인가.
‘땅, 땅꾼이 정령을 괴롭힌다!’
시박은 모처럼 신이 나 있었다.
뱀 잡는 게 이토록 재밌을 줄이야. 마치 낚싯대로 대어를 낚는 짜릿한 손맛이다.
시박은 살라만다를 향해 월영검을 휘둘렀다.
퍼억.
지게 작대기에 머리를 제압당한 살라만다가 정신을 잃었다.
이로써 스무 마리째 포획이었다.
“더는 없는 것이냐?”
“홀홀!”
시박은 살라만다를 주워 금동아줄에 묶었다.
노움의 말대로 불을 토해 내는 게 제법 유용하게 쓰일 듯했다.
“간만에 신명 나게 놀았네. 흐흐, 배고픈데 요놈들을 구워 먹을 순 없으려나?”
시박은 살라만다를 훑어봤다.
정신을 잃어 온몸에 불길이 넘실거리지는 않지만 함부로 먹었다간 배탈이 날 것만 같았다. 설사 맛이 좋더라도 불덩이 자체인 살라만다가 불에 익을지 몰랐다.
“꼬맹이는 잘하고 있으려나?”
문득 아미가 생각난 시박이었다.
꿀떡을 팔러 보내긴 했지만 어린애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행여나 싶어 운디네들을 붙여 놓긴 했지만 수다 떠는 모습만 봤지 제대로 된 쓰임새는 보지 못했다.
“뭐, 겸사겸사 영지란 곳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먹은 거라고는 감자밖에 없었다.
자신이 만든 꿀떡은 분명히 맛있을 것이다. 명색이 첫 요리인데 금화 한 냥쯤은 받았겠지 생각했다.
“그 돈이면 한 달간 먹고 놀 원대한 계획의 자금으로 충분하지.”
시박은 당당하게 영지로 향했다.
노움이 재미난 건수가 생긴 표정으로 시박이의 뒤를 따라갔다.
이미 살라만다가 희롱(?)당하는 걸 보지 않았는가.
스프링필드 영지 남문 경비대원 잭은 내기를 좋아했다.
동료를 꾀어 남문으로 걸어오는 이가 남자인가 여자인가를 두고 술 내기를 종종 벌였는데 이미 월급의 반을 날린 상태였다.
“오늘은 맥주 말고 양주 내기로 하지.”
“크흠, 자네 이번에도 돈 없다고 도망가는 건 아니겠지?”
잭은 수중에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내기를 했다.
덕분에 동료들이 종종 이기고서도 돈을 냈는데 그 발뺌이 웃음이 절로 나 단골 펍에 구경꾼이 모이기도 했다.
“오늘은 돈 있으니까 걱정 말어.”
“못 믿겠네.”
잭은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짤그랑거리는 소리가 제법 묵직한 게 전 재산을 가져온 듯했다. 동료가 잭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크하하. 자넨 역시 남자구만.”
돈주머니에 든 것은 쇠 구슬이다.
잭은 거짓말에 성공했다.
“그럼 단판으로 결정합세.”
“오오, 이 친구 간밤에 좋은 꿈이라도 꾼 모양인데?”
“눈치 한번 빠르군. 간밤에 웬 아름다운 여자 하나가 검은 옷을 입고 내 앞에 나타났다네. 대뜸 욕을 하는 것만 아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거 나쁜 꿈 아닌가?”
잭은 정색했다.
“흥. 꿈은 반대란 말도 모르나? 난 그 여자를 믿어. 여자로 하지.”
“그럼 난 남자.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네.”
때마침 멀리서 사람 하나가 걸어왔다.
잭과 동료는 꿀꺽 침을 삼켰다.
말이 좋아 양주 내기지 그 가격은 하나를 파산시킬 위력이 충분하다.
“뭔가를 주렁주렁 달고 있군.”
잭이 감질나듯 말했다.
“뒤에는 꼬마 하나가 졸졸 따라오고 있고.”
동료도 불안하게 말했다.
“누구 걸음이 더 빠르냐가 승패를 가르겠지?”
동료는 고개를 끄덕였다.
4화 한 달간의 휴식(休息)(3)
한 번씩 눈을 마주친 시박은 구성원 한번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꼬맹이 하나에 변태 하나, 그리고 물탱이 세 마리…….
“흠흠.”
시박이 새삼스레 목을 가다듬었다.
“천 년, 아니 그전부터 내게는 소박한 꿈이 하나 있었다.”
소박한 꿈이라고 말했지만 사뭇 진지했다.
“행여 환생을 한다면 이승의 음식을 배 터지게 먹어 보자. 제사상에 올려진 음식이 아닌 말 그대로 산해진미로 사치를 떨어 보자!”
이것은 거짓말이다.
시박은 틈틈이 제사상 외의 음식도 먹은 적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취걸개의 마지막 작품이자 지금은 유작(有作)이 돼 버린 황구 구이였다.
“나 김시박은 배고픈 건 못 참는다.”
진실은 항상 거짓 뒤에 초라하게 숨어 있는 걸지도 몰랐다.
시박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고로 너희들이 내 원대한 계획에 동참을 해야겠다.”
“홀홀!”
노움의 웃음소리에 시박이 인상을 찌푸렸다.
“넌 백주대낮부터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이냐?”
노움이 답답한 듯 아미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아미는 혼백이 되었을 시 정령과 교감을 이루어서인지 신기하게도 말이 통했다.
어쩌면 시박이 역시 혼백이었던 아미의 영향을 받아 이곳의 언어를 사용하는 걸지도 몰랐다.
“노움이가 그러는데 오빠야. 그 원대한 계획이라는 게 자기 장가보내 주는 거였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는데?”
“……저기 가서 대가리 박고 있어.”
노움은 ‘네놈이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물론 시박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머리를 박는 건 잊지 않았다.
“본론으로 돌아와 일단 지금부터 내가 하는 것을 잘 보고 배우도록 해라. 나중에 아미 너랑 물탱이들이 해야 되니까.”
시박은 소매를 걷으며 식재료들을 만지기 시작했다.
요리는 처음 하는 것이었지만 천 년간 곁눈질로 본 것만 해도 언뜻 백여 번이 넘었다. 시박은 멥쌀가루를 한 주먹 쥐었다.
“까륵?”
좌측에 있던 운디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박이 자신에게 멥쌀가루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먹어.”
“…….”
“네 시진 정도, 즉 8시간 정도 불려야 한다. 10분 줄게.”
시박이의 이러한 행동은 모두 노움 덕이었다.
종족에 대해 설명할 때 운디네들을 두고 말하길 가정 살림 못하는 여자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정의 내렸기 때문이다.
“까륵…….”
운디네가 불안한 얼굴로 냄새를 맡았다.
머리를 박은 노움이 용케 그 모습을 보았는지 홀홀거렸다.
“나는 뭐 먹어야 돼, 오빠야?”
아미는 모닥불을 피웠다.
땅에 머리를 박은 노움은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운디네가 겨우 멥쌀가루를 불렸을 때는 수전증 환자처럼 몸 전체를 쉴 새 없이 떨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군. 나머지 물탱이는 냄비에 물 좀 만들어라.”
시박은 멥쌀가루가 마르길 기다렸다 소금으로 간을 맞췄다.
‘호박가루가 있어야 하는데.’를 반복하며 곧이어 찜통을 냄비에 넣고 멥쌀가루를 그 속에 넣었다.
“씨박 오빠, 뭐 만드는 거야?”
“…….”
시박은 과장된 몸짓으로 귓구멍을 후벼 팠다.
멥쌀가루가 찜통에서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쪄져 갔다.
아미가 재 묻은 얼굴로 침을 꼴딱 삼켰다.
“이게 바로 떡이라는 거다.”
“떡?”
시박은 찜통 뚜껑을 열고 떡이 된 멥쌀가루를 주먹으로 방아 찧듯 사정없이 때렸다.
이내 밤톨만 한 크기로 떼어 신줏단지 모양을 만들고 그 속에 벌꿀을 넣었다.
시박이표 꿀떡이 완성된 것이다.
아미가 부리나케 꿀떡 하나를 입에 가져갔다.
“우와, 맛있어!”
“이 몸이 만들었는데 안 맛있을 수가 있나.”
“우리 이제 매일 꿀떡 배불리 먹는 거야?”
시박이 잔인하게 웃었다.
“아니.”
“오, 오빠야, 그렇게 웃지 마라 사악해 보여.”
운디네들은 행여 시박이 자신들을 볼세라 멥쌀가루를 꾸준히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걸 팔아 장사를 해야지.”
“히히. 나랑 오빠랑 물탱이들이?”
아미의 말에 시박은 떡을 파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다.
저승차사가 머리에 바구니를 얹고 ‘떡 사세요.’라는 모습. 행여 발음이라도 샜다가는 ‘똑 사세요.’라는 신파극 아닌 신파극이 벌어진다.
시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랑 물탱이들이.”
노움은 차라리 시박이가 자신을 때려 주기를 바랐다.
꼬맹이들이 꿀떡을 팔러 가면 일어설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놈이,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었다.
“흐음.”
시박은 나뭇가지를 하나 꺾었다.
어른 팔뚝만 한 두께로 몽둥이로 쓰기에 적당해 보였다.
잔가지를 제거하며 끝의 적당한 간격의 줄기는 남겨 두었다.
꼭 지게를 질 때 사용하는 지게 작대기 같았다.
붕. 부웅.
작대기의 날렵한 소리에 노움의 불알이 오그라들었다.
“홀홀!”
‘때리려면 뜸 들이지 마라.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할 수 있다.’는 노움의 처절한 외침이었지만 시박은 정령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게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시박은 작대기로 노움의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노움은 ‘인생 참 더럽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한 열 번쯤 중얼거렸을까 시박에게서 일어서라는 말이 들려왔다.
“힘드냐?”
“…….”
“내가 왜 널 떡 팔러 보내지 않았을까?”
노움은 고개를 숙이고 돌멩이를 걷어찼다.
문득 머릿속에 아들에게 벌을 준 아버지가 마지막에 따사로이 위로를 해 주는 모습이 연출됐다. 적중이라도 한 듯 시박은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네놈의 발정에 손님들이 사려던 떡도 안 살까 봐서.”
“…….”
시박은 노움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뭐, 굳이 다른 이유를 말하라면 네놈이 자칭 땅의 정령이란 것 정도? 지금부터 할 일에 조금은 도움이 되겠지.”
시박은 죄인을 사로잡은 것처럼 지게 작대기로 노움의 등을 떠밀었다. 자꾸만 숲으로 방향을 잡는 시박이가 불안하기만 했다.
슬쩍 뒤돌아보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금동아줄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자고로 요리에는 불이 필요한 법. 뱀이나 잡으러 가자.”
노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불이랑 뱀은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문득 오늘따라 오후의 햇살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때리려고 숲으로 향하는 걸까, 자칫 땅속에 묻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의 정령이 뱀이라. 쩝, 비밀창고에 있던 독각화망이 생각나는군.”
불의 정령 살라만다. 시박은 지금 범인이 상상도 못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상황을 알아차린 노움이 음침하게 웃음소리를 냈다.
이놈이라면 성질 더러운 불의 정령도 바람 앞의 촛불이다.
운디네와 살라만다를 발밑에 둔 땅의 정령이라, 노움의 발칙한 상상이 발걸음을 빨라지게 했다.
***
풋내기 정령사 네엘은 한숨을 쉬었다.
이 길에 뜻을 둔 지 어언 10년이다. 그동안 계약을 맺은 정령이라고는 새침데기 실프 하나. 근래에는 바람이 났는지 웬만해서는 나오지도 않았다.
“하필이면 살라만다와 계약을 하라니.”
네엘은 스승인 로난드를 떠올렸다.
오늘도 허탕 치고 돌아오면 자신의 뼈마디를 뽑아 달밤에 춤을 추겠다고 했다. 환갑인 노인이 달밤에 춤을 추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게 다 변태 노움 때문이야!”
네엘은 며칠 전 숲에서 운디네 무리들을 발견했다.
스물이 넘게 여자 손 한 번 잡아 보지 못한 탓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서일까.
운디네의 활기찬 콧소리가 야밤에 지나치던 물레방앗간을 떠올렸다.
애써 마음을 다잡고 조심스레 다가가는데…….
“홀홀!”
“그래, 이 경박한 웃음소리였어.”
네엘은 자신이 말하고도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하지만 방금 전 웃음소리는 확실히 그날 운디네들에게 찝쩍대던 노움의 웃음소리였다.
“홀홀!”
“변태 노움이다!”
네엘은 웃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뛰어갔다.
내키진 않지만 살라만다보다는 노움이 계약하기에 한결 수월할지도 몰랐다.
“하하! 뱀이 아주 실한 게 맛있게 생겼구나!”
이번에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엘은 본능적으로 나무 뒤에 숨었다. 그 변태 노움이 주인이 있었던 것인가. 호흡을 가다듬고 조심스레 소리의 근원지를 확인했다.
“허, 허억!”
네엘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웬 여성이, 아니 자세히 보니 남자인 듯싶다. 아무튼 정체 모를 인간이 지게 작대기로 사정없이 살라만다를 때려잡고 있었다.
노움은…… 배꼽 잡고 웃으며 땅바닥을 뒹굴었다.
“뭐, 뭐야. 저것들은.”
네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살라만다가 뱀의 형상이라지만 4계열의 하급 정령 중 단연 으뜸의 공격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지금 저 모습. 특히 밧줄에 칭칭 감겨 있는 수많은 살라만다는 대체 뭐란 말인가.
‘땅, 땅꾼이 정령을 괴롭힌다!’
시박은 모처럼 신이 나 있었다.
뱀 잡는 게 이토록 재밌을 줄이야. 마치 낚싯대로 대어를 낚는 짜릿한 손맛이다.
시박은 살라만다를 향해 월영검을 휘둘렀다.
퍼억.
지게 작대기에 머리를 제압당한 살라만다가 정신을 잃었다.
이로써 스무 마리째 포획이었다.
“더는 없는 것이냐?”
“홀홀!”
시박은 살라만다를 주워 금동아줄에 묶었다.
노움의 말대로 불을 토해 내는 게 제법 유용하게 쓰일 듯했다.
“간만에 신명 나게 놀았네. 흐흐, 배고픈데 요놈들을 구워 먹을 순 없으려나?”
시박은 살라만다를 훑어봤다.
정신을 잃어 온몸에 불길이 넘실거리지는 않지만 함부로 먹었다간 배탈이 날 것만 같았다. 설사 맛이 좋더라도 불덩이 자체인 살라만다가 불에 익을지 몰랐다.
“꼬맹이는 잘하고 있으려나?”
문득 아미가 생각난 시박이었다.
꿀떡을 팔러 보내긴 했지만 어린애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행여나 싶어 운디네들을 붙여 놓긴 했지만 수다 떠는 모습만 봤지 제대로 된 쓰임새는 보지 못했다.
“뭐, 겸사겸사 영지란 곳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먹은 거라고는 감자밖에 없었다.
자신이 만든 꿀떡은 분명히 맛있을 것이다. 명색이 첫 요리인데 금화 한 냥쯤은 받았겠지 생각했다.
“그 돈이면 한 달간 먹고 놀 원대한 계획의 자금으로 충분하지.”
시박은 당당하게 영지로 향했다.
노움이 재미난 건수가 생긴 표정으로 시박이의 뒤를 따라갔다.
이미 살라만다가 희롱(?)당하는 걸 보지 않았는가.
스프링필드 영지 남문 경비대원 잭은 내기를 좋아했다.
동료를 꾀어 남문으로 걸어오는 이가 남자인가 여자인가를 두고 술 내기를 종종 벌였는데 이미 월급의 반을 날린 상태였다.
“오늘은 맥주 말고 양주 내기로 하지.”
“크흠, 자네 이번에도 돈 없다고 도망가는 건 아니겠지?”
잭은 수중에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내기를 했다.
덕분에 동료들이 종종 이기고서도 돈을 냈는데 그 발뺌이 웃음이 절로 나 단골 펍에 구경꾼이 모이기도 했다.
“오늘은 돈 있으니까 걱정 말어.”
“못 믿겠네.”
잭은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짤그랑거리는 소리가 제법 묵직한 게 전 재산을 가져온 듯했다. 동료가 잭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크하하. 자넨 역시 남자구만.”
돈주머니에 든 것은 쇠 구슬이다.
잭은 거짓말에 성공했다.
“그럼 단판으로 결정합세.”
“오오, 이 친구 간밤에 좋은 꿈이라도 꾼 모양인데?”
“눈치 한번 빠르군. 간밤에 웬 아름다운 여자 하나가 검은 옷을 입고 내 앞에 나타났다네. 대뜸 욕을 하는 것만 아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거 나쁜 꿈 아닌가?”
잭은 정색했다.
“흥. 꿈은 반대란 말도 모르나? 난 그 여자를 믿어. 여자로 하지.”
“그럼 난 남자.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네.”
때마침 멀리서 사람 하나가 걸어왔다.
잭과 동료는 꿀꺽 침을 삼켰다.
말이 좋아 양주 내기지 그 가격은 하나를 파산시킬 위력이 충분하다.
“뭔가를 주렁주렁 달고 있군.”
잭이 감질나듯 말했다.
“뒤에는 꼬마 하나가 졸졸 따라오고 있고.”
동료도 불안하게 말했다.
“누구 걸음이 더 빠르냐가 승패를 가르겠지?”
동료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