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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4화 한 달간의 휴식(休息)(4)


그들은 얼마 안 있어 성문에 다다랐다.
주렁주렁 몸에 단 것은 뱀이었다. 얼굴을 보니 이방인 듯했는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잭은 하늘을 향해 전쟁터에서나 들을 법한 괴성을 질렀다.
“크하하! 여자다 여자!”
“이런 젠장!”
잭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장장 한 달 만의 승리였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의 앞에 있는 여자를 향해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심정이다.
가만히 보니 옷차림도 어젯밤 꿈속에 나온 처자와 비슷하지 않던가.
잭이 기쁨을 못 이기고 기어코 여자의 손을 잡았다.
“여행자시여! 축복의 땅 스프링필드 영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자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나온 걸쭉한 한마디.
“죽고 싶니?”
시박은 잭의 손을 뿌리쳤다. 잭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잭의 동료는 재빨리 상황 파악에 나섰다.
가만히 보니 꼬마라고 생각했던 자는 어디서 많이 본 게 꼭 노움을 닮았다. 책에서만 봤는데 웃음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생각난 것이다.
‘정령사! 이런 염병. 잭, 너 인마. 한 많은 인생 이렇게 가는 거냐? 대체 무슨 무례를 저지른 거야!’
잭의 동료가 잭을 애처롭게 쳐다봤다.
뭔가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그 역시 시박을 바라봤는데 마음과는 전혀 딴소리가 나와 버렸다.
“가슴이 없네?”
동료의 말에 잭이 정신 못 차리고 큰소리쳤다.
“너 이 첫날밤에 발기부전이나 걸릴 놈아! 여자한테 가슴이 없단 게 말이 되냐! 봐봐, 저게 가슴이…… 어라, 뭐야. 왜 이렇게 절벽이지, 이게?”
잭은 두 눈을 한참 비비더니 결국에는 시박이의 가슴팍에 손을 가져갔다.
탄탄한 가슴 근육이 잭을 맞이했다.
하지만 밋밋하다.
시박이 오우거만 한 거한이 아니고서야 남자한테서 잭이 기대하는 그런 가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잭은 절망했다.
“크하하. 남자다, 남자!”
잭의 동료가 쇠 구슬이 든 돈주머니를 가로챘다.
그 두둑한 무게에 자신들이 직면한 상황은 잊어버렸는지 덩실덩실 춤까지 췄다.
‘대체 뭐야, 이것들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화도 못 내는 시박이었다.
문득 발레포르의 말이 생각났다. ‘바이온 왕국에는 미친놈이 많다.’라는 중얼거림. 어쩌면 가슴을 만지는 게 이곳의 인사인지도 몰랐다.
‘괴상한 곳에 떨어졌군. 하긴 아미도 평범한 꼬맹이는 아니니까.’
시박은 경비대원들을 관찰했다.
돈주머니를 가로챈 녀석이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자신의 가슴을 만진 놈과 주먹 다툼을 하고 있다. 확실히 시박이의 눈엔 미친놈들로 보였다.
“홀홀!”
노움이 시박을 불렀다.
금동아줄에 묶인 살라만다들이 정신을 차렸는지 몸에서 불길이 넘실대고 있었다.
“으힉! 정, 정령사님, 괜찮으십니까?”
살라만다의 불길에 놀라 제정신을 차린 잭의 동료가 물었다.
시박은 가급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고개만 끄덕이고 영지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잠, 잠시만요. 아무리 정령사님이라 해도 이름을 밝혀 주셔야 합니다. 더군다나 검까지 착용하지 않으셨습니까.”
시박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김시박이다.”
“예?”
“허, 허억!”
마지막 소리는 잭이었다.
꿈속에서 들었던 욕이랑 비슷했기 때문이다.
“김시박이라고.”
“씨빡이요?”
“…….”
“왜 욕을 하시고 그러십니까?
뚜둑.

시박이의 인내심이 끊어졌다.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게 섬뜩하게 웃었다. 시박은 금동아줄에 묶여 있는 살라만다들을 허공에 휘둘렀다. 독이 잔뜩 오른 살라만다들이 허공을 수놓았다.
노움이 자지러지게 웃음을 토해 냈다.
스프링필드 영지는 혼란에 휩싸였다.



5화 시박마차(嘶搏馬車)(1)


시박의 원대한 계획은 산산조각 났다.
한 치의 착오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엇나갔다.
“나쁜 놈들이 막 내 돈 뺏으려고 했는데 그때 뱀들이 나타났어!”
“…….”
“꿀떡은 진짜진짜 맛있었어. 우웅, 그러니까 내가 몇 개 먹어서 아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맛있다고 해서 아는 거야!”
“…….”
“오빠가 말한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계획이란 게 내가 정하는 거 맞지? 나, 나. 이거 아무한테도 말 안 한 건데.”
아미는 가증스럽게도 몸을 배배 꼬았다.
적어도 시박은 그렇게 느꼈다.
자신은 분명 ‘내 원대한 계획’이라 했지 ‘네가 원하는 계획’이라 말한 적 없었다.
“예전부터 장사하고 싶었어!”
시박은 애꿎은 하늘만 올려다봤다.
꿀떡을 만든 데는 다 이유가 있어서다. 중원의 음식은 먹어 본 적 없을 거라는 확고한 믿음. 더불어 처음 보는 먹거리라도 간식은 부담 없이 손이 간다.
수량이 한정된 거니 값도 비싸게 팔렸을 것이다.
그 돈이면 한 달은 족히 먹고 놀 수 있었을 텐데…… 저 해괴망측한 마차를 사 가지고 오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운디네가 아니라 덜 팔아도 노움을 붙이는 거였는데.’
시박이 포장마차를 바라보자 아미가 신나서 말했다.
“오빠도 마음에 들지?!”
시박은 짐마차 형태에서 진화한 듯한 포장마차란 것을 쳐다봤다. 바퀴까지 달린 걸 보니 영락없이 끌고 다니며 장사를 해야 했다.
‘이걸 부숴 버릴까?’
아미가 저녁밥으로 감자를 건넸다.
시박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차마 이것만 먹고는 못 살겠다 싶었다. 한 달간 쉬겠단 것이지 도를 닦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 딱 한 번만 장사하고 말자. 딱 한 번이다.’
포장마차를 바라보는 시박의 눈에 열의가 불타올랐다.
거기에 자극 받았는지 낮에 다 집어 던지고 한 마리만 남은 살라만다가 시박의 허리춤에서 꿈틀거렸다.
‘역시 오빠가 풀어놓은 살라만다였구나!’
아미는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난생처음 봤던 뱀은 운디네들이 살라만다라 알려 줬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걸까 궁금했었는데.
아미가 아침밥으로 먹으려던 감자를 시박에게 마저 건넸다.
시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침이 밝았다. 시박은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볼품없는 포장마차였다. 꿈이려니 했지만 역시 꿈은 아니었다.
“노점상은 끽해 봐야 군것질거리인데.”
시박은 포장마차 내부를 살폈다.
화로와 석쇠 같은 간단한 주방 도구가 보였다. 돈이 좀 남았는지 소금, 설탕 같은 조미료도 즐비했다. 아무 생각 없이 돈을 쓴 건 아니었다.
“멧돼지와 사슴은 땅속에 묻어 뒀으니 재료는 충분한데.”
시박은 자신의 짐들을 바닥에 풀어놓았다.
금동아줄, 부채, 월영검, 명부, 호리병, 찢어진 속곳…….
“금동아줄은 멧돼지 묶을 때나 사용할 수 있겠고, 명부는 쩝, 가게부로 쓰기는 아까운데.”
시박은 호리병을 흔들었다.
목마를 때 목이나 축이려고 염라대왕의 비밀창고에서 가득 채운 공청석유가 생각난 것이다.
시박은 호리병 마개를 열었다.
“이게 뭐야.”
공청석유가 가출했다. 아니, 증발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한 모금도 안 된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이토록 애처로울 수 없다.
“여차하면 한몫 하려 했던 거였는데.”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것이다.
아미가 잠에서 깼는지 주위가 소란스럽다.
시박은 아미가 감자를 건네기 전에 장사 준비를 마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일어나.”
시박은 땅바닥에 배를 드러내 놓고 잠자는 노움을 깨웠다.
늦장을 부릴 만도 한데 시박의 얼굴 표정을 보니 그랬다가는 아침부터 곡소리가 날 것 같았다.
“빨리 삽질 시작해라.”

***

스프링필드 영지 수비대장 로난드는 심기가 불편했다.
자신이 40년간 애지중지 길렀던 붉은 수염을 홀라당 태워 먹었기 때문이다.
“으음.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뱀들 같으니라고.”
“스승님, 제자가 생각하기 분명 땅꾼의 짓이 풋, 분명합니다.”
네엘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로난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불만 어린 어조로 물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사실 어제 숲에서 괴상한 자를 봤습니다.”
“흥, 난 10년간 실프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네놈이 더 괴상하다.”
“…….”
네엘은 로난드에게 어제 숲에서 보았던 시박의 기행에 대해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지게 작대기로 살라만다의 머리를 누르고, 몽둥이를 휘둘러 기절을 시켰다. 또 딴에는 먹을 수 있는가 고민까지 하는 것 같았다.
평범한 정령사가 듣기에는 경악할 일이었다.
하지만 로난드의 반응은 의외로 차분했다. 오히려 한숨을 내쉬며 어울리지 않게 분위기를 잡았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예, 틀림없이 제 눈으로 봤습니다. 필시 정령사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동이 분명했습니다!”
로난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감춰진 얼굴에서는 흐뭇한 미소가 가득했다.
‘흐흐 아직 내 명성이 죽지는 않았군. 어떤 귀여운 얼라가 내 흉내를 내고 다니는 건가?’
놀랍게도 로난드 역시 과거에 그런 경력을 갖고 있었다.
물론 신성시되는 정령의 이미지를 손상시켰단 이유로 아는 이 몇 안 되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이런 시골까지 와서 그러는 걸 보니 내 관심을 끌어 보겠다는 건가? 하긴 내가 제자 안 두기로 한때 유명했으니까. 여자일까 남자일까? 귀여운 애였으면 좋겠는데…….’
로난드는 잠시 헛기침을 했다.
“살라만다를 때려잡은 게 남자냐 여자냐?”
“그게 여자인 듯싶기도 했…….”
“예쁘냐?”
네엘이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뭐 제가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 예쁘긴 합니다.”
‘노년에 내가 여복이 끼었구나.’
로난드의 착각은 계속되었다.
‘하긴 내가 왕년에는 수도에서 이름 좀 날렸지. 지금은 복잡한 게 싫어 여기 시골로 내려온 것이지만. 근데 이상하네, 내가 젊었을 때는 여자한테 인기 없었는…… 요새 애들이 나이 든 남자를 좋아하나?’
로난드는 거울을 보며 남은 수염을 이리저리 만졌다.
어떻게 만져도 얍삽해 보이는 게 꼭 전형적인 사기꾼 얼굴이었다.
‘이 모습 보고 실망하는 건 아니겠지?’
수염을 보고 있자니 다시 속에서 열불이 올라왔다.
“대체 고것들이 왜 나타난 거야! 모두 뽕이나 맞은 것 같은 몰골을 하고서는, 에잉!”
상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그였기에 진압에는 자신이 있었다.
이 기회에 사이비라 생각하는 신전 놈들 앞에서 콧대도 세워 보이려 했다.
하지만 시박이 풀어놓은 19마리의 살라만다는 평범하지 않았다. 이미 지게 작대기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지 않았던가.
악착같이 로난드에게 덤벼들었다.
“그자는 살라만다를 스무 마리 정도 잡은 상태였습니다.”
“뭐라고? 스무 마리?”
“예. 저는 이번 사태를 모두 그자의 소행으로 생각합니다.”
로난드가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어렸을 적 천재라 불리던 자신도 겨우 다섯 마리가 한계였다.
네엘의 말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로난드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호통쳤다.
“입 다물어라, 이놈아! 땅꾼이 무슨 드래곤이야? 어디서 헛것을 보고 와서는, 보약이나 한 첩 지어 먹으려는 네놈 얕은 수를 내가 모를까!”
네엘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남문 경비대원 잭도 여장남자의 소행이라 했잖아요?”
“내기에 환장한 놈의 말을 믿으면 그게 바보지! 그리고 아무리 상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나라도 하급 정령 살라만다를 19마리씩이나 다스리진 못해!”
“그러게 진작 샐라임을 소환하시지 왜 말로 타일러 보신다고 하셔서. 으헉!”
네엘은 기어코 정강이를 걷어차였다.
“어디서 실프 한 마리도 제대로 소환하지 못하는 놈이 거룩한 스승의 행동에 꼬박꼬박 토를 달꼬!”
“그, 그건 스승님이 제자에 비해 재능이 없어서…….”
네엘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제자가 스승에 비해 재능이 없단 걸 거꾸로 말해 버린 것이다.
“…….”
“스, 스승님 그게 아니라 거 뭣이냐.”
로난드의 붉은 로브가 강풍이라도 맞은 것처럼 거칠게 펄럭였다. 필시 그가 불의 상급 정령 샐라임을 소환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설마 제자를 죽이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로난드는 이 기회에 제자를 한번 바꿔 볼까 생각했다.
“정령사의 수치는, 어쩌면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제가 어렸을 때 말하시길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친화력이라며 꼬드기지 않았습니까?”
“그게 유언이냐?”
로난드는 이번에야말로 네엘의 정신 상태를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네엘도 긴장하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스, 스승이 미쳤다!”
“이놈이 그래도!”
네엘은 그대로 줄행랑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