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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7화 적과의 동침(4)


달밤에 소란이 일어난 지 나흘이 지났다.
나흘이란 시간은 스프링필드에서 시박이를 단순한 유명인사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만들어 놓기 충분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날로 솟구치는 떡갈비의 인기가 스프링필드 주민들의 푼돈을 시박마차로 향하게 했기 때문이다.
푼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직종은 의외로 많다.
노점상은 물론이며 요식업, 숙박업 같은 계통이 대체로 그 주를 이루는데 스프링필드는 괴팍하게도 하나가 더 얹혀 있는 상태였다.
그것은 바로 신전이었다.
오엔트 제국의 국교이기도 한 데바 신전.
운명의 신 데바를 모시는 이곳은 그 역사가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기도 했는데 시골 바닥에서는 가장 타락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스프링필드에서는 수비대장 로난드 덕에 그 위세가 많이 죽었지만 여전히 성금이란 명목하에 자신들의 이속을 챙기기 바빴다.
그러던 중 시박이가 등장한 것이다.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떡갈비 꼬치 덕에 사람들의 성금은 당연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신전에서는 대책 회의에 들어갔다.
성금도 성금이었지만 시박이가 부리는 정령들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혹시나 로난드가 자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모종의 수를 부린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해결책은 다소 엉뚱하게 진행됐다.

데바 신전 프리스트 카샘은 뒷짐을 쥐고 신전을 나섰다.
서른이란 젊은 나이에 임무 수행 능력을 인정받아 스프링필드 선교 활동에 있어 총책임자를 맡고 있는 그였다.
“후후. 아직도 데바 님을 믿지 않는 자가 있었단 말인가.”
하이 프리스트의 말로는 이방인이라 했다.
아미라는 금전 능력 없는 거지를 돌보는 걸로 보아 한몫 챙기고 떠나려는 여행자는 아닌 듯싶었다.
“건방진 놈 같으니. 어디 한낱 장사치가 신전의 돈줄을 만지작거려. 하긴 정령까지 부린다니 로난드 그 작자의 수작일 수도 있겠어.”
카샘을 비롯해 신전의 모든 이들은 이 사태가 로난드의 행패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령사라는 것이 어디 흔한가.
더불어 이런 촌구석까지 내려와 떡갈비라는 장사를 한다.
필시 자신들을 견제하려는 로난드의 수작 아닌 수작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늙은이가 제법 머리를 썼…… 응?”
카샘은 광장으로 가는 걸음을 멈췄다.
스프링필드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노숙자를 발견한 것이다.
신전과 영주의 협력하에 빈민 구제 조치를 한 지 어언 이 년째에 접어들었다.
“노숙자들은 전부 사라진 줄 알았는데.”
카샘은 흥미로운 눈길로 노숙자를 바라봤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초라한 몰골로 마지막 힘을 짜내 목 놓아 울었다. 땅바닥에 누워 알 수 없는 갑갑함에 목 늘어난 옷을 쥐어뜯기도 했다.
“쯧쯧. 나이 먹어서 추태는.”
뒤늦게 출동한 경비병들이 노인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들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노인은 칼에 찔린 것처럼 발작했다.
“할, 할아버지,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으흑, 으허엉!”
의도치 않게 노인의 몸이 바닥에 쓸렸다.
싸늘히 죽은 시체처럼 드러누운 노인에 장정의 경비원들이 중심을 잃으며 휘청거렸다.
“잠깐, 잠깐 이보게들. 나이 드신 양반에게 그리 막 대하면 쓰나!”
카샘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그를 발견한 경비병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로난드와 데바 신전의 사이가 안 좋듯 자연스레 그 밑의 이들도 껄끄러웠다.
“아이고, 할아버지.”
카샘이 손수건을 꺼내 쓰레기를 집듯 노인의 팔목을 잡았다.
데바 신전의 프리스트라는 명함이 노인의 눈을 잠시나마 빛냈다.
“쿨, 쿨럭. 신은 정말 존재하는 걸까요?”
“자자, 어린애들이 흉봅니다. 어서 일어나셔야죠.”
“대답, 대답을……!”
노인은 여전히 몸을 일으킬 생각을 안 했다.
카샘은 그런 노인의 팔을 붙잡고는 강제로 들어 올렸다.
노인의 한쪽 어깨가 땅에서 멀어졌다 닿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카샘은 노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셋을 셀 동안에도 어깨가 모두 땅에 있으면 데바 님은 없습니다. 하나, 둘, 세에……!”
카샘이 노인의 팔을 잡아당겼다.
노인의 한쪽 어깨가 땅에서 떨어졌다. 노인이 기겁하며 힘을 짜낸 것이다.
“하하, 보세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경비병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아이들의 눈을 가리거나 노인을 외면했다.
데바 신전의 권능은 증명된 지 오래다.
분명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신이란 막연한 두려움이 이 상황을 정당화시킨 것이다.
“자자, 한 번 더 해 봅시다. 하나, 둘 그렇죠. 하나, 둘, 세에…… 다시, 다시 하나, 둘 옳지 잘하십니다.”
카샘은 한동안 노인에게 장난을 쳤다.
이내 장난감에 싫증난 어린아이처럼 경비병에게 노인의 팔을 집어 던지듯 건넸다.
“데바 님에 대한 믿음을 보여 주시길. 그러기 위해서는 성금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데바 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권능을 보여 주십니다.”
“……예.”
“착한 아이군요. 후후.”
카샘은 그 말을 끝으로 시장통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에게 경비병들은 여전히 아무런 제재도 못하고 분을 삭였다.
조용히 하늘 높이 주먹을 치켜들 뿐.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저놈인가.’
카샘은 한눈에 김시박을 알아봤다.
소문대로 시장통에서 인상을 쓰는 흑발의 장사치는 하나밖에 없었다.
‘고것 참 곱상하게 생겼네.’
머리카락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여자라 착각했을 것이다.
“앗. 카샘 님이시다!”
사람들이 뒤늦게 카샘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시장통의 시선이 자연스레 카샘에게 몰렸다.
“하하.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사람들의 관심에 카샘은 손님을 맞이한 장사꾼처럼 입을 움직였다. 눈동자는 여전히 시박을 주시한 채 말이다.
‘저건 또 뭐야…….’
시박은 아까부터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년의 남자 카샘을 바라봤다. 사람들의 관심에도 팔짱을 낀 채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한테 시비 거는 것인가?’
남자의 몸에서 소림사의 내공심법 같은 순백한 기운이 풍기는 게 괜히 수상하기까지 했다.
카샘이 시박을 향해 걸어왔다.
여전히 시박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말이다.
기어코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까지 걸어온 카샘에게 시박의 입이 움직였다.
“내 얼굴에 금가루 묻었냐?”
시박의 하대에도 카샘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시박에게 말을 걸기까지 했다.
“당신이 김시박입니까?”
“……그런데?”
장사 준비를 하던 아미가 바깥의 소란스러움에 시박마차에서 얼굴을 보였다.
그러고는 시박과 같이 있는 카샘을 보고는 눈동자가 급격하게 커졌다. 카샘은 당연한 반응이라는 듯 피식거렸다.
“저는 데바 님의 고귀, 위대, 진리, 현명하신 말씀을 전파하는 프리스트 카샘이라 합니다. 스프링필드에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 누군가 했는데 당신이었군요.”
“고귀, 위대, 진리, 현명?”
시박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지었다.
무슨 놈의 형용사가 이리 많은 건지 듣는 자신이 다 부끄러웠다.
카샘은 여전히 웃으며 시박마차에 눈길을 줬다.
‘겨우 저딴 노점상이 신전의 성금에 영향을 주다니, 믿을 수가 없군. 한낱 꼬치 상인 듯한데 말이야.’
김시박이 부린다는 변태 노움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미라는 꼬마 주변에 운디네들이 하나둘 눈에 알짱거릴 뿐이었다.
“이봐, 내 말이 안 들리나?”
‘우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겠지.’
카샘은 다시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고 시박을 향해 사뭇 진지한 물음을 던졌다.
“당신…….”
“그래.”
“신을 믿습니까?”
“…….”
“신이란…….”
“이게 뭔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시박의 진심 어린 대답이었다.
명색이 저승차사인 자신에게 ‘신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다니. 카샘의 얼굴색이 순간 똥 씹은 것처럼 찌푸려졌다.
“그러면 안 돼!”
아미가 황급히 시박에게 달려왔다.
표정으로 보아 상당히 심각해 보이는 게 발레포르 앞에서도 지어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하하. 신을 모시는 프리스트에게 그런 불경한 말은 하시면 안 되긴 하죠.”
카샘이 기분 좋게 아미에게 동조했다.
신전이 작성한 스프링필드 주민 명단에 아미는 고아로 올라 있다. 부모 없이 자라 버릇이 없는 줄 알았는데, 카샘은 기특한 듯 아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시박이에게 그러면 안 돼. 큰일 나!”
“응?”
아미는 카샘의 손을 치우며 다시 말했다.
“턱수염, 너 시박이 귀찮게 하면 큰일 난다고! 얘는 악마도 발로 막 걷어차는 애야!”
아미가 딴에는 겁을 주려는 듯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것뿐인 줄 알아? 성질 더러운 뱀으로 허리띠를 하고 다니기도 하고 힘없는 노인네 목욕 재개시켜서 돈을 벌기도 한단 말이…… 아얏!”
기어코 한 대 쥐어 맞은 아미였다.
시박은 다시 카샘에게 눈을 맞췄다.
카샘은 뭔가 자존심이 상한 듯 풀렸던 얼굴이 다시 구겨져 있었다.
‘싸가지 없는 꼬맹이 같으니라구. 누가 천한 고아 아니랄까 봐 버르장머리가 없어. 이런 걸 데리고 있는 시박이란 놈의 수준도 뻔하군.’
순간 멀리서 빛이 번쩍였다.
아미가 잔돈 정리를 하다 달려온 모양인지 시박마차 선반 위에 바구니 한가득 돈이 올려진 게 보였다.
“나한테 신을 믿느냐고 했나?”
카샘이 생각을 바꿔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신이란 인간에게 있어 무한한 행복만을 안겨 주는 존재죠. 특히 데바 님은 그 자애함이 저 바닷물처럼 마를 날이 없습니다.”
카샘의 고리타분한 표현에 시박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시박은 무신론자가 아니다.
죽음을 관장하는 신, 염라대왕에게 불과 며칠 전까지 대가리를 들이밀지 않았던가.
‘이곳에는 어떤 신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랫것의 행동거지를 보아하니 그 역시 반동분자임이 틀림없어.’
시박은 잇몸을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내가 알고 있는 신이랑은 많이 다른 것 같군.”
“응? 혹 믿고 있는 신이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
카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떤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이라 하여 다 같은 신은 아닙니다. 실제로 대륙에 종교 열풍이 일어난 이래 수없는 사이비 신들이 나타났고 그것을 모시는 이단아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까요.”
시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카샘이 자신감이 붙어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데바 님은 끝없는 의심과 번뇌로 가득한 인간들에게 계속해서 믿음의 손길을 내미시는 분입니다. 인간과의 유대를 항상 이어 가시려 노력하죠.”
어느덧 주위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안타까움, 그리고 일종의 기대 심리가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