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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8화 데바의 팔찌(4)
그 와중에 카샘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데바의 팔찌가 일 년여 만에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오오, 데바 님의 팔찌시다!”
“이제야 모든 진실이 밝혀지겠어. 데바의 팔찌는 데바 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신물 중 하나니까!”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최고조에 올랐다.
하이 프리스트가 데바의 팔찌를 신주단지 모시듯 공손히 받아 시박에게 다가왔다.
“빛이 뿜어지면 진실이고 그렇지 않으면 손모가지가 잘릴 것이다.”
로난드가 하이 프리스트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라. 팔찌를 채움으로 데바의 교리가 살아 있음을 증명해야겠다.”
“저자는 사람들에게 염라대왕이란 신을 전파한 적이 없다!”
“로난드, 네놈이 먼저 데바의 팔찌를 차고 싶은 것이냐?”
두 늙은이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양측이 한 발짝이라도 물러섰다가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란 걸 서로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찾았다!”
시박의 목소리에 하이 프리스트가 불안한 듯 쳐다봤다.
데바의 팔찌를 눈앞에 두고도 끝까지 반항을 하다니, 설마 염라대왕이란 게 정말 있는 것인가.
시박은 로난드를 제치고 하이 프리스트에게 보란 듯이 품에서 꺼낸 물건을 내밀었다.
“이것은 공식적인 증표는 아니다. 하지만 저승에서 상여의 용두머리 좀 멨다는 놈들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보물, 아니 신물이지.”
하이 프리스트의 눈매가 요상하게 변했다.
옆에 있던 로난드 역시 한참을 바라보다 뒤늦게 얼굴이 붉어졌다.
“염라대왕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며, 애지중지하는 것이다.”
시박의 자신만만한 말에 모두가 시박이 꺼낸 물건에 눈이 쏠렸다. 가장 먼저 반응이 온 것은 카샘이었다.
그는 일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어 가장 먼저 반응을 했다.
“저, 저런 마른하늘에 벼락 맞을…….”
시박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속곳이었다.
북해빙궁 5대 여궁주 한비아(寒妃娥)의 속곳.
하이 프리스트가 신의 증표를 보이라는 말에 시박은 우습게도 염라대왕의 비밀창고가 생각났던 것이다.
거기에 적혀 있던 염라대왕의 소감문 역시 덩달아…….
북해의 속곳은 만년설처럼 희다.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의 오감을 농락하도다. 세 겹으로 이루어진 천의 구조가 불만이지만 정숙한 맛이 가히 북해의 속곳답다.
손가락의 오감을 농락하도다란 구절. 분명 염라대왕의 기운이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시박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손이 가장 많이 탄 신물일 테지.”
9화 파란 머리 꼬마(1)
“찢, 찢어 죽여도 모자랄 놈!”
하이 프리스트의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었다.
“……증거를 보여 줘도 이 지경이네.”
신전 안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다못해 수련생들마저 웃음을 참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다. 몇몇은 자해를 하며 웃음 대신 쇳소리를 냈다.
“더 볼 것도 없다! 데바의 팔찌가 네놈의 경망스런 손모가질 자를 것이다!”
화르륵!
“으악!”
난데없이 시박이의 허리춤에서 불길이 토해졌다.
잠에 취해 있던 살라만다가 하이 프리스트의 고함에 놀라 불을 토해 낸 것이다.
하이 프리스트의 윤기 자르르 흐르는 수염에 불이 붙었다.
삽시간에 타들어 가는 수염은 그 누구도 어찌하지 못했다.
오직 로난드만이 손을 쓸 수 있었지만 그가 절대로 나설 리는 없었다.
시박이 황당한 듯 살라만다를 바라봤다.
살라만다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연신 혓바닥을 놀리며 비명에 가깝게 소리 질렀다.
“꿈을 꿨는데…… 화로에 불을 지피다, 킥. 불 조절이 좋지 않아 오빠한테 사육당하고 있었대. 킥킥.”
아미가 그만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것은 감기처럼 퍼져 나가 모든 이들에게 전파됐다.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신전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순간 하이 프리스트를 회춘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천벌!”
하이 프리스트가 시박의 왼팔을 잡고 나섰다.
얼굴은 수염의 모근이 타다 만 곱슬머리처럼 그 비장한 최후를 다한 후였다.
“이야, 수염 없으니까 훨씬 간사해 보이고 좋…….”
“데, 데바의 팔찌가!”
“응?”
시박의 왼팔에는 어느새 데바의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하이 프리스트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기괴한 웃음소리는 상관없이 터져 나왔다.
“크하하! 이제 다 끝났다! 신성한 데바를 모독한 대가를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가거라! 평생을 의수에 의지하며…….”
바아앙―!
시박이의 왼팔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졌다.
데바의 팔찌가 진노하듯 반응한 것이다. 한 번 반짝였다 사라질 번개 따위와는 그 규모 자체가 달랐다.
빛은 마침내 신전 전체를 뒤덮었다.
마치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그 진하기가 점점 더해 가, 형체를 더해 갔다.
마침내 하나의 응어리가 진 것처럼 빛이 묵직해졌다.
뽀득 뽀드득…… 콰드득!
땅에 떨어지는 눈의 입자처럼, 사방으로 실금이 간 게 마치 세상에 균열이 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째앵그랑!
빛무리가 빛 조각으로 깨어지며 다시 사람들이 보였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하이 프리스트가 질려 버렸다는 듯 말했다.
방금 전 상황을 겪은 사람들은 모두가 얼이 빠진 듯 누구 하나 쉽게 말하지 못했다.
“데, 데바의 구도자…….”
누군가, 아니 정확히는 카샘이 두려움에 질려 말했다.
“데바의 팔찌…… 는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데바 님의 신물…… 거짓을 말하면 팔이 잘려 나가고 진실을 말하면 빛이 뿜어진다…… 하지만 빛이 온 세상을 덮어 대지에 내리면…… 그것은 운명의 신 데바 님의…….”
시박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왼팔을 크게 한 번 돌렸다.
“뭐야, 이 조잡한 모양의 팔찌는. 갑자기 빛이나 토해 내고 깜짝 놀랐네.”
시박은 자신이 놀란 게 기분 나쁜 듯 팔찌를 벗겨 내려 했다.
하지만 데바의 팔찌는 원래부터 시박과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시, 시박 오빠?”
“왜! 이건 왜 이렇게 안 벗겨져!”
“손목…… 괜찮아?”
“요놈의 꼬맹이가 갑자기 시력을 상실했나. 왜 장님 흉내를 내고 있어. 아서라, 너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심청이 같은 애가 아니니까.”
아미는 시박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잠시 멍했다.
그 틈을 타 로난드가 입을 열었다.
“맙, 맙소사. 염라대왕이란 게 정말 있었다니.”
“쯧쯧. 네놈도 염라대왕을 믿지 못하는 걸 보니 북망산 한번 뻔질나게 오르겠군.”
로난드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함성 비슷하게 소리쳤다.
“속, 속곳 대왕이다!”
“여자 속옷을 애용하는 신이 존재한다!”
사람들의 괴이한 함성에 하이 프리스트의 얼굴이 굳어졌다.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저들 대부분은 수도와 같이 합당한, 아니 자의적으로 데바 신전의 신도가 된 것이 아니다.
시골이란 지리적 요인과 자신의 계획으로 신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 신도가 된 것이다.
그런데 시박이란 놈 때문에 그 두려움이 흔들리고 있다.
결정적이라 믿었던 데바의 팔찌였는데…….
설마 염라대왕이란 것이 정말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설사 사실이라 해도 그건 애초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시박을 처단함으로 밖으로 새는 돈줄과 신에 대한 두려움을 좀 더 깊게 새기려 했었는데.
“……사람들을 내보내라.”
하이 프리스트의 말에 수련생들이 머뭇거렸다.
그들 역시 데바의 팔찌가 내린 판결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당장!”
“시박이한테 사과해!”
아미였다. 아미는 놀랍게도 정면으로 하이 프리스트에게 소리쳤다. 그것은 완벽히 하이 프리스트의 이성을 끊는 행위이기도 했다.
“허허. 세상이 완전 말세로군.”
“사과하라고!”
“감히 데바 님을 모시는 내게 천한 거지 고아, 아니 계집년 따위가 말을 끊는 것도 모자라 명령을 내리다니. 네년은 필시 죽어도 데바 님의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딸, 딸꾹.”
아미가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하이 프리스트가 자신에게 저주에 가까운 말을 했다.
한때는 데바 신전의 사제, 아니 신도가 되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을 어린 나이에 굳게 믿었었다.
지금은 시박이를 만나 생각이 많이 바뀌었지만…….
아미가 아무리 당돌한 꼬맹이라 하지만 하이 프리스트가 자신에게 내뱉은 말은 그 희망을 산산조각 내기 충분했다.
아미의 큰 눈망울에 눈물이 고였다.
“사, 사람들을 어서 내보내라. 당장!”
카샘이 당황해 수련생들에게 소리쳤다.
수련생들 역시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사람들을 강제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울먹이는 아미에 운디네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수련생들이 시박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내보내려 약간의 몸싸움을 벌였다.
“오늘 하루 종일 농땡이 치는구나.”
시박이 아미의 머리에 손을 올려놨다.
아미가 흠칫거렸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먼저 돌아가 장사 준비하고 있어.”
“흐끅, 시, 시박이, 흐끅, 오빠…….”
시박이 아미를 향해 보일 듯 말 듯 하게 미소 지었다.
“금방 돌아갈 테니.”
“흐끅, 약속해.”
“그래, 약속.”
시박은 새끼손가락까지 걸어 주며 아미를 신전 밖으로 내보냈다. 이제 신전 안의 불청객은 오로지 시박 하나…….
“넌 왜 안 나가?”
시박이 말을 건 상대는 로난드였다.
로난드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헛기침을 했다.
“나는 스프링필드의 수비대장일세. 우리 영지의 손님이 다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허허. 그것 참 기특한 놈이로세.”
시박의 말투에 로난드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야.”
“부탁?”
“자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절대 프리스트과 싸우면 안 되네.”
시박은 하마터면 알겠다고 대답할 뻔했다.
무의식적으로 끄덕이려는 얼굴도 가까스로 멈췄다.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로난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시박의 한 마디가 정곡을 찌른 것이다. 명색이 수비대장이란 게 악행을 보고도 참으라 하다니.
자신이 생각해 봐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예전에 내가 했을 거야.”
시박은 로난드를 쳐다봤다.
확실히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평범치 않은 것이었다.
그를 오래 두고 봐 오지는 않았지만 성정도 괜찮아 보였는데 싸우지 말라니…….
“그런 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어설프게 저들을 건드린다면 분명 더 골치 아픈 자들이 이곳에 오게 될 걸세. 비록 부패하긴 했지만 오엔트 제국의 국교인 데바 신전이야.”
“확실하게 건드리면 되겠군.”
로난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는 이곳에 정착할 생각인가?”
“나는 굼벵이처럼 한가한 애가 아냐.”
“그러면 이곳에 염라대왕이란 종교를 전파할 생각인가?”
“염라대왕도 그건 원하지 않을 거야.”
“우스운 얘기 하나 들을 텐가?”
시박은 자꾸만 자신을 말리는 로난드가 답답했다.
“참 이해 못할 일이기도 하지. 스프링필드의 데바 신전은 분명 부패, 아니 타락했다고 할 수 있어.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가 뭐겠나?”
“…….”
“신전이 있음에 사람들은 희망을 품고 버틸 수 있는 거라네.”
시박은 로난드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깨끗한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누군가 무심코 던진 더러움이 있기에 이들이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그만큼 데바라는 신의 권능이 위대하다는 것인가.
어느 쪽이 됐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네는 떠나면 그만이지만, 아미라는 꼬마는 여기서 살아가기 힘들게 될 걸세.”
“…….”
시박은 눈물을 글썽이던 아미를 떠올렸다.
확실히 로난드가 말한 것처럼 그럴 가능성이 컸다. 악마 앞에서도 당당했던 계집이 하이 프리스트의 한 마디에 울먹이지 않았던가.
“완전 도적 소굴이군.”
“…….”
“도적들의 본거지가 어디냐?”
“응?”
시박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설마 이런 시골 촌구석에 있는 도적 소굴이 본거지는 아니겠지. 데바라는 애를 믿는 인간들의 시발점이 어디냐 묻고 있는 거다.”
“그, 그거야 당연히 오엔트 제국의 수도이긴 하다만.”
제국의 수도. 이번이 두 번째다.
빈센트에게 들은 얘기 외에 자신이 수도에 가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은.
“자고로 피라미를 잡을 땐 윗대가리를 치는 게 나은 법이지.”
시박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8화 데바의 팔찌(4)
그 와중에 카샘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데바의 팔찌가 일 년여 만에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오오, 데바 님의 팔찌시다!”
“이제야 모든 진실이 밝혀지겠어. 데바의 팔찌는 데바 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신물 중 하나니까!”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최고조에 올랐다.
하이 프리스트가 데바의 팔찌를 신주단지 모시듯 공손히 받아 시박에게 다가왔다.
“빛이 뿜어지면 진실이고 그렇지 않으면 손모가지가 잘릴 것이다.”
로난드가 하이 프리스트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라. 팔찌를 채움으로 데바의 교리가 살아 있음을 증명해야겠다.”
“저자는 사람들에게 염라대왕이란 신을 전파한 적이 없다!”
“로난드, 네놈이 먼저 데바의 팔찌를 차고 싶은 것이냐?”
두 늙은이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양측이 한 발짝이라도 물러섰다가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란 걸 서로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찾았다!”
시박의 목소리에 하이 프리스트가 불안한 듯 쳐다봤다.
데바의 팔찌를 눈앞에 두고도 끝까지 반항을 하다니, 설마 염라대왕이란 게 정말 있는 것인가.
시박은 로난드를 제치고 하이 프리스트에게 보란 듯이 품에서 꺼낸 물건을 내밀었다.
“이것은 공식적인 증표는 아니다. 하지만 저승에서 상여의 용두머리 좀 멨다는 놈들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보물, 아니 신물이지.”
하이 프리스트의 눈매가 요상하게 변했다.
옆에 있던 로난드 역시 한참을 바라보다 뒤늦게 얼굴이 붉어졌다.
“염라대왕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며, 애지중지하는 것이다.”
시박의 자신만만한 말에 모두가 시박이 꺼낸 물건에 눈이 쏠렸다. 가장 먼저 반응이 온 것은 카샘이었다.
그는 일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어 가장 먼저 반응을 했다.
“저, 저런 마른하늘에 벼락 맞을…….”
시박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속곳이었다.
북해빙궁 5대 여궁주 한비아(寒妃娥)의 속곳.
하이 프리스트가 신의 증표를 보이라는 말에 시박은 우습게도 염라대왕의 비밀창고가 생각났던 것이다.
거기에 적혀 있던 염라대왕의 소감문 역시 덩달아…….
북해의 속곳은 만년설처럼 희다.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의 오감을 농락하도다. 세 겹으로 이루어진 천의 구조가 불만이지만 정숙한 맛이 가히 북해의 속곳답다.
손가락의 오감을 농락하도다란 구절. 분명 염라대왕의 기운이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시박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손이 가장 많이 탄 신물일 테지.”
9화 파란 머리 꼬마(1)
“찢, 찢어 죽여도 모자랄 놈!”
하이 프리스트의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었다.
“……증거를 보여 줘도 이 지경이네.”
신전 안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다못해 수련생들마저 웃음을 참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다. 몇몇은 자해를 하며 웃음 대신 쇳소리를 냈다.
“더 볼 것도 없다! 데바의 팔찌가 네놈의 경망스런 손모가질 자를 것이다!”
화르륵!
“으악!”
난데없이 시박이의 허리춤에서 불길이 토해졌다.
잠에 취해 있던 살라만다가 하이 프리스트의 고함에 놀라 불을 토해 낸 것이다.
하이 프리스트의 윤기 자르르 흐르는 수염에 불이 붙었다.
삽시간에 타들어 가는 수염은 그 누구도 어찌하지 못했다.
오직 로난드만이 손을 쓸 수 있었지만 그가 절대로 나설 리는 없었다.
시박이 황당한 듯 살라만다를 바라봤다.
살라만다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연신 혓바닥을 놀리며 비명에 가깝게 소리 질렀다.
“꿈을 꿨는데…… 화로에 불을 지피다, 킥. 불 조절이 좋지 않아 오빠한테 사육당하고 있었대. 킥킥.”
아미가 그만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것은 감기처럼 퍼져 나가 모든 이들에게 전파됐다.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신전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순간 하이 프리스트를 회춘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천벌!”
하이 프리스트가 시박의 왼팔을 잡고 나섰다.
얼굴은 수염의 모근이 타다 만 곱슬머리처럼 그 비장한 최후를 다한 후였다.
“이야, 수염 없으니까 훨씬 간사해 보이고 좋…….”
“데, 데바의 팔찌가!”
“응?”
시박의 왼팔에는 어느새 데바의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하이 프리스트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기괴한 웃음소리는 상관없이 터져 나왔다.
“크하하! 이제 다 끝났다! 신성한 데바를 모독한 대가를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가거라! 평생을 의수에 의지하며…….”
바아앙―!
시박이의 왼팔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졌다.
데바의 팔찌가 진노하듯 반응한 것이다. 한 번 반짝였다 사라질 번개 따위와는 그 규모 자체가 달랐다.
빛은 마침내 신전 전체를 뒤덮었다.
마치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그 진하기가 점점 더해 가, 형체를 더해 갔다.
마침내 하나의 응어리가 진 것처럼 빛이 묵직해졌다.
뽀득 뽀드득…… 콰드득!
땅에 떨어지는 눈의 입자처럼, 사방으로 실금이 간 게 마치 세상에 균열이 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째앵그랑!
빛무리가 빛 조각으로 깨어지며 다시 사람들이 보였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하이 프리스트가 질려 버렸다는 듯 말했다.
방금 전 상황을 겪은 사람들은 모두가 얼이 빠진 듯 누구 하나 쉽게 말하지 못했다.
“데, 데바의 구도자…….”
누군가, 아니 정확히는 카샘이 두려움에 질려 말했다.
“데바의 팔찌…… 는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데바 님의 신물…… 거짓을 말하면 팔이 잘려 나가고 진실을 말하면 빛이 뿜어진다…… 하지만 빛이 온 세상을 덮어 대지에 내리면…… 그것은 운명의 신 데바 님의…….”
시박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왼팔을 크게 한 번 돌렸다.
“뭐야, 이 조잡한 모양의 팔찌는. 갑자기 빛이나 토해 내고 깜짝 놀랐네.”
시박은 자신이 놀란 게 기분 나쁜 듯 팔찌를 벗겨 내려 했다.
하지만 데바의 팔찌는 원래부터 시박과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시, 시박 오빠?”
“왜! 이건 왜 이렇게 안 벗겨져!”
“손목…… 괜찮아?”
“요놈의 꼬맹이가 갑자기 시력을 상실했나. 왜 장님 흉내를 내고 있어. 아서라, 너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심청이 같은 애가 아니니까.”
아미는 시박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잠시 멍했다.
그 틈을 타 로난드가 입을 열었다.
“맙, 맙소사. 염라대왕이란 게 정말 있었다니.”
“쯧쯧. 네놈도 염라대왕을 믿지 못하는 걸 보니 북망산 한번 뻔질나게 오르겠군.”
로난드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함성 비슷하게 소리쳤다.
“속, 속곳 대왕이다!”
“여자 속옷을 애용하는 신이 존재한다!”
사람들의 괴이한 함성에 하이 프리스트의 얼굴이 굳어졌다.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저들 대부분은 수도와 같이 합당한, 아니 자의적으로 데바 신전의 신도가 된 것이 아니다.
시골이란 지리적 요인과 자신의 계획으로 신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 신도가 된 것이다.
그런데 시박이란 놈 때문에 그 두려움이 흔들리고 있다.
결정적이라 믿었던 데바의 팔찌였는데…….
설마 염라대왕이란 것이 정말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설사 사실이라 해도 그건 애초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시박을 처단함으로 밖으로 새는 돈줄과 신에 대한 두려움을 좀 더 깊게 새기려 했었는데.
“……사람들을 내보내라.”
하이 프리스트의 말에 수련생들이 머뭇거렸다.
그들 역시 데바의 팔찌가 내린 판결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당장!”
“시박이한테 사과해!”
아미였다. 아미는 놀랍게도 정면으로 하이 프리스트에게 소리쳤다. 그것은 완벽히 하이 프리스트의 이성을 끊는 행위이기도 했다.
“허허. 세상이 완전 말세로군.”
“사과하라고!”
“감히 데바 님을 모시는 내게 천한 거지 고아, 아니 계집년 따위가 말을 끊는 것도 모자라 명령을 내리다니. 네년은 필시 죽어도 데바 님의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딸, 딸꾹.”
아미가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하이 프리스트가 자신에게 저주에 가까운 말을 했다.
한때는 데바 신전의 사제, 아니 신도가 되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을 어린 나이에 굳게 믿었었다.
지금은 시박이를 만나 생각이 많이 바뀌었지만…….
아미가 아무리 당돌한 꼬맹이라 하지만 하이 프리스트가 자신에게 내뱉은 말은 그 희망을 산산조각 내기 충분했다.
아미의 큰 눈망울에 눈물이 고였다.
“사, 사람들을 어서 내보내라. 당장!”
카샘이 당황해 수련생들에게 소리쳤다.
수련생들 역시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사람들을 강제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울먹이는 아미에 운디네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수련생들이 시박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내보내려 약간의 몸싸움을 벌였다.
“오늘 하루 종일 농땡이 치는구나.”
시박이 아미의 머리에 손을 올려놨다.
아미가 흠칫거렸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먼저 돌아가 장사 준비하고 있어.”
“흐끅, 시, 시박이, 흐끅, 오빠…….”
시박이 아미를 향해 보일 듯 말 듯 하게 미소 지었다.
“금방 돌아갈 테니.”
“흐끅, 약속해.”
“그래, 약속.”
시박은 새끼손가락까지 걸어 주며 아미를 신전 밖으로 내보냈다. 이제 신전 안의 불청객은 오로지 시박 하나…….
“넌 왜 안 나가?”
시박이 말을 건 상대는 로난드였다.
로난드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헛기침을 했다.
“나는 스프링필드의 수비대장일세. 우리 영지의 손님이 다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허허. 그것 참 기특한 놈이로세.”
시박의 말투에 로난드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야.”
“부탁?”
“자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절대 프리스트과 싸우면 안 되네.”
시박은 하마터면 알겠다고 대답할 뻔했다.
무의식적으로 끄덕이려는 얼굴도 가까스로 멈췄다.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로난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시박의 한 마디가 정곡을 찌른 것이다. 명색이 수비대장이란 게 악행을 보고도 참으라 하다니.
자신이 생각해 봐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예전에 내가 했을 거야.”
시박은 로난드를 쳐다봤다.
확실히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평범치 않은 것이었다.
그를 오래 두고 봐 오지는 않았지만 성정도 괜찮아 보였는데 싸우지 말라니…….
“그런 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어설프게 저들을 건드린다면 분명 더 골치 아픈 자들이 이곳에 오게 될 걸세. 비록 부패하긴 했지만 오엔트 제국의 국교인 데바 신전이야.”
“확실하게 건드리면 되겠군.”
로난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는 이곳에 정착할 생각인가?”
“나는 굼벵이처럼 한가한 애가 아냐.”
“그러면 이곳에 염라대왕이란 종교를 전파할 생각인가?”
“염라대왕도 그건 원하지 않을 거야.”
“우스운 얘기 하나 들을 텐가?”
시박은 자꾸만 자신을 말리는 로난드가 답답했다.
“참 이해 못할 일이기도 하지. 스프링필드의 데바 신전은 분명 부패, 아니 타락했다고 할 수 있어.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가 뭐겠나?”
“…….”
“신전이 있음에 사람들은 희망을 품고 버틸 수 있는 거라네.”
시박은 로난드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깨끗한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누군가 무심코 던진 더러움이 있기에 이들이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그만큼 데바라는 신의 권능이 위대하다는 것인가.
어느 쪽이 됐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네는 떠나면 그만이지만, 아미라는 꼬마는 여기서 살아가기 힘들게 될 걸세.”
“…….”
시박은 눈물을 글썽이던 아미를 떠올렸다.
확실히 로난드가 말한 것처럼 그럴 가능성이 컸다. 악마 앞에서도 당당했던 계집이 하이 프리스트의 한 마디에 울먹이지 않았던가.
“완전 도적 소굴이군.”
“…….”
“도적들의 본거지가 어디냐?”
“응?”
시박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설마 이런 시골 촌구석에 있는 도적 소굴이 본거지는 아니겠지. 데바라는 애를 믿는 인간들의 시발점이 어디냐 묻고 있는 거다.”
“그, 그거야 당연히 오엔트 제국의 수도이긴 하다만.”
제국의 수도. 이번이 두 번째다.
빈센트에게 들은 얘기 외에 자신이 수도에 가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은.
“자고로 피라미를 잡을 땐 윗대가리를 치는 게 나은 법이지.”
시박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