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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9화 파란 머리 꼬마(2)


시박은 수도에 있다는 데바 신전 총본산에 찾아가 분풀이를 할 요량인 것이었다.
그 이유가 이곳 스프링필드 데바 신전의 하이 프리스트 때문이라고 한다면…… 하이 프리스트가 받는 타격은 어마어마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너 이 맷돌에 골백번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아.”
시박이 하이 프리스트를 향해 집게손가락을 흔들었다.
“내 손모가지를 걸고 필히 네놈을 한 달 안에 노인정 뒷간 청소나 하게 만들어 주마.”
시박의 파격적인 제안에 하이 프리스트가 기가 막혔다.
“이익! 이놈이 그래도!”
하이 프리스트는 더 이상 시박이와 말하는 걸 포기했다. 상대했다가는 망신만 당한다는 걸 충분히 겪은 탓이었다.
하이 프리스트가 하늘에 대고 대뜸 박수를 쳤다.
“몰매를 줘도 시원찮을 것들. 어디 한번 신의 분노를 겪어 봐라!”
하이 프리스트가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놀랍게도 그의 등 뒤에서 나온 이들은 발발이 패거리였다.
발발이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무리를 이끄는 것이 발발이의 오른팔 토니였다.
지금껏 신전 지붕에 몸을 숨겼던 빈센트가 하마터면 땅으로 추락할 뻔했다.
“뭐, 뭐야? 저것들이 왜 여기 있어?”
빈센트 역시 하이 프리스트의 악행을 보고 분을 삭이던 중이었다. 여차하면 시박이를 도와주고 바로 복수를 감행하려 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나타난 것이다.
“후후. 어떤 놈들이 감히 신성한 데바 신전의 뜻을 어지럽히는…… 응?”
기세 좋게 나섰던 토니의 얼굴이 하얘졌다.
자신에게 안 좋은 추억을 선사한 시박이를 발견한 것이다.
토니를 알아본 시박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
“어쭈, 대답 안 해?”
“사, 사업차 출장 나왔습니다!”
토니의 행동에 하이 프리스트의 얼굴이 구겨졌다.
상황을 정리해야 할 놈이 왜 저런단 말인가? 발발이 말로는 그 흉악함이 이를 데 없는 칼잡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반면 토니는 접시에 코 박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똥통에 빠져 염병할 일이 있나!’
자신의 두목인 발발이 말로는 명예를 회복할 기회라 했다.
신전이 눈의 가시 같이 여기는 놈이 하나 있는데 하이 프리스트에게 반항할 경우 손 좀 봐주면 된다, 혹시 모르니 애들도 몇 붙여 주겠다 해서 온 거였는데…….
‘왜 저놈이 여기 있는 거야!’
설상가상 그 옆에는 수비대장 로난드도 있었다.
하이 프리스트가 뒤에 있으니 자신들을 어떻게 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시박이, 저 김시박이란 놈의 성정으로만 보아서는 오늘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익! 뭐 하고 있는 거야! 어서 저 김씨박이란 놈을 처리하지 않고!”
“헙! ……말이 좀 심하십니다. 하이 프리스트님!”
“뭐, 뭐라고?”
하이 프리스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늘 정말이지 개나 소나 자신한테 말대답하는 날인가 보다. 하다못해 상대는 시장 바닥에서 굴러먹는 발발이의 수하였다.
“네놈이 지금 미친 것이냐?!”
“엄연히 잘못하시지 않았습니까!”
하이 프리스트가 머리가 아픈지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는 거냐.”
“엄, 엄연히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이름이 있기 마련입니다! 제게는 토니라는 평범한 이름이 있고 김시박 님에게는 시박이란 아름다운 이름이 있습니다!”
토니는 시박에게서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어떻게 시박이란 이름을 놔두고 씨, 씨박…… 씨박이라니요! 듣는 씨빡 얼마나 기분 나쁘신 줄 아십니까?! 씨박은 욕입니다. 그래도 씨빡보다는 낫지…… 우엑!”
토니의 안면에 정확히 돌멩이가 꽂혔다.
시박이가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하이 프리스트의 말실수보다 토니의 친절한 설명이 더욱 기분 나빴던 것이다.
“괜, 괜찮으십니까!”
토니가 끌고 왔던 덩치들이 놀라며 그를 감쌌다.
덩치 하나가 시박을 향해 삿대질하며 말했다.
“네놈이 소문의 김시박이냐? 이제 보니 이거 순 날건달 아냐? 오늘 네놈의 버르장머리를…… 응?”
토니가 재빨리 덩치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안, 안 돼. 그러지 마.”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싸우다 보면 한 번 질 수도 있는 거지 왜 꼬리 말린 강아지처럼…… 쳐, 쳐라!”
덩치는 시박이 쇄도하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시박의 도포 자락이 크게 한 번 펄럭였다.
토니를 감쌌던 덩치의 콧잔등에 정확히 시박의 주먹이 날아갔다.
퍼억!
둔기로 맞은 듯한 둔탁한 소리, 덩치는 빗길에 미끄러지는 아이처럼 저 멀리 날아갔다.
“죽여!”
발발이 패거리 한가운데 들어온 시박을 향해 하이 프리스트가 소리쳤다.
시박은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외쳤다.
“강!”
화르륵!
살라만다가 머리를 쑤욱 내밀어 불길을 토해 냈다.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물 한 바가지가 쏟아진 것처럼 강렬한 불길이었다.
“으악!”
“내 머리에 불! 그건 네 머리잖아!”
두 명의 덩치가 머리에 붙은 불길을 잡으려 바닥을 뒹굴었다.
순간 뒤에서 시박이의 머리 위로 대거가 떨어졌다.
시박이 반사적으로 왼팔을 들어 올렸다.
쨍그랑!
데바의 팔찌와 부딪친 대거가 두 동강 났다.
시박이 질려 버렸다는 듯이 말했다.
“뭐, 이리 튼튼해!”
여유를 부리는 시박이의 등 뒤로 누워 있던 토니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껴안았다.
“빨, 빨리 어떻게 해 봐!”
동료들이 나가떨어지는 걸 넋 놓고 있던 나머지 하나가 퍼뜩 정신 차렸다.
시박은 웬일로 반항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단검을 빼 든 잔당이 시박이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노움.”
콰앙!
대리석 바닥을 부수고 노움의 두 팔이 나타났다.
낮게 깔리는 먼지 사이로 감탄을 자아내는 팔근육이었다.
흔히 알통이라 불리는 상완이두근에 철사 줄기 같은 핏줄까지 선 게 팔근육의 완성형이었다.
“키우는 보람이 있어.”
잔당은 노움에게 다리를 붙잡힌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시박은 여전히 토니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입만 움직였다.
“물어.”
“응?”
“물라고.”
살라만다의 머리가 다시 한 번 앞으로 쭈욱 나왔다.
마치 개구리가 파리 잡아먹듯 살라만다는 그대로 잔당의 사타구니를 물어 버렸다.
“으…… 으아악!”
정말이지 구슬픈 음색이었다.
잔당은 이때껏 한 번도 겪지 못한 고통에 그만 정신을 잃었다.
토니는 순식간에 혼자 남겨지게 됐다.
“어, 어버버.”
토니가 애처롭게 울었다.
이번에도 죽도록 뺨을 맞는 것일까? 저 끔찍하리만큼 잔인한 살라만다는 자신의 입속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방금 전 수하는 사타구니를 물렸으니 자신은 어떻게 될까?
토니의 머릿속은 벌떼가 윙윙대듯 어지러웠다.
“뭐야, 이놈. 왜 기절한 거지?”
시박은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기절한 토니를 바라봤다.
다리까지 겹쳐진 게 다소곳하기 그지없었다.
“흥. 이제 네놈의 패는 다 꺼낸 건가?”
시박이 토니를 지나쳐 하이 프리스트에게 다가갔다.
그 무뚝뚝한 표정이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하이 프리스트를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안 돼! 그 늙은이를 건드리는 건!”
로난드가 다급하게 외쳤다. 시박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른손이 월영검의 칼 머리를 매만지는 게 신전 안을 더욱 긴장시켰다.
“히, 히익!”
하이 프리스트가 처음으로 겁에 질렸다.
“이, 이놈 날 죽이면 네놈이 원하는 신탁은 들을 수가 없다!”
“그딴 신탁 필요 없다.”
“날, 날 죽이면 네놈이 데리고 있던 꼬마는…… 으악!”
시박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하이 프리스트 머리 위로 시박의 검은 그림자가 덮쳐 왔다.
죽음을 직시한 하이 프리스트의 비명.
워낙 갑작스런 상황에 로난드가 미처 정령을 불러낼 틈도 없었다.
“으아아…… 응?”
하이 프리스트가 비명을 지르다 말고 감았던 눈을 떴다.
멀쩡하다.
분명 떨어질 거라 생각했던 자신의 목덜미가 여전히 제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팔, 다리 그 어느 한 곳 하나 상한 곳도 없었다.
“지붕이다!”
“데바의 깃발에 시박이란 놈이 있다!”
하이 프리스트의 시선이 신전 지붕으로 향했다.
수련생들 말대로 그곳에 시박이가 있었다.
“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시박이가 월영검을 뽑아 하이 프리스트를 향해 겨눴다.
빛에 번쩍이는 월영검의 날이 하이 프리스트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나는 종교에 대해 잘 모른다.”
“이, 이놈. 당장 내려오지…….”
“특히 너같이 입만 산 놈이 몸담고 있는 종교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누, 누가 저놈을 끌어내려라!”
“종교란 것이 내 심기를 이토록 거슬리게 하는 것이면!”
시박이 월영검을 하늘 높게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그대로 데바의 깃발을 향해 휘둘렀다.
찌익!
하이 프리스트가 턱 빠진 사람처럼 입을 쩍 벌렸다.
깃발이 찢어졌다. 지금껏 데바의 역사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불충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찢겨진 데바의 깃발이 시박의 손에 잡혀 펄럭였다.
“내 밑이나 닦게 될 것이다!”
시박이 엉덩이를 내밀며 그대로 깃발을 똥 닦는 지푸라기처럼 문질렀다. 그 행동이 워낙 거칠어 살라만다가 그만 불길을 토해 냈다.
깃발이 불타며 시박의 바지가 벗겨졌다.
여전히 자신의 행동에 충실한 시박이의 모습에 로난드, 빈센트, 카샘, 수련생들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동공에 힘이 풀렸다.
하이 프리스트는…… 충격에 기절해 버렸다.

시박이는 유유히 신전을 빠져나왔다.
워낙 자연스런 모습에 시박이를 붙잡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질려 버린 것이었다.
한낱 시골 영지에서 대장 노릇 하던 자신들이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상대가 아니란 것도 확실히 즉시 했고 말이다.
신전 밖에서 시박이를 기다렸던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시박이는 시장통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전 안에 있던 이들은 빈센트를 제외하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저놈의 꼬맹이도 대단해.”
아미는 정말 시박마차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도 진동하는 떡갈비 꼬치의 달착지근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꼬르륵.
시박이 뱃속에서 거지 떼가 단체로 표주박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해 보니 아침부터 카샘을 만나 정말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염병…… 신탁도 받지 못할 거 괜히 신전에 가 가지고 백주대낮부터 엄한 기운만 소비했어.”
시박이는 떡갈비가 간절한 듯 단숨에 시박마차로 뛰어갔다.
시박마차 주위에는 역시나 주민들로 문전성대를 이루고 있었다.
“꼬맹아, 시박이 오셨다!”
시박이는 득의만만하게 말했다.
신전에서 험한 꼴을 당했는데 정말 자신의 말대로 장사를 하고 있는 아미가 기특하기도 했다.
원한다면 머리라도 한 번 다시 쓰다듬어 줄 요량이 있었다.
“응?”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항상 스프링필드의 유명인사였던 자신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사람들의 관심과 눈길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다니.
“김시박이 오셨다니까!”
여전히 조용했다.
아미는 둘째 치고라도 사람들마저 자신을 쳐다보지 않았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꼬맹이 하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 내가 왔다니…….”
“거 되게 시끄럽네!”
시박이에게 뒤통수를 보이고 있던 남자가 보란 듯이 소리쳤다.
“…….”
염라대왕, 아니 그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았던 시박이 의기소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