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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9화 파란 머리 꼬마(3)


“오오! 벌써 50개째야!”
“예끼, 이 사람아, 50개는 아까 넘겼어!”
“그럼 몇 개째야 대체?!”
“오십하고도 하나!”
사람들의 관심사는 오직 꼬맹이가 먹고 있는 떡갈비 꼬치 개수였다. 꼬맹이가 아미에게 손바닥을 모두 펼쳤다.
“설마 꼬치를 더 주문하겠단 건가!”
이제는 시박이도 고개를 처박고 걸신들린 듯 떡갈비를 먹는 꼬맹이에게 관심이 갔다.
옆에 수북이 쌓여 있는 막대기로만 보아도 족히 3골드는 먹어치우지 않았을까 싶었다.
“고놈 참 떡갈비 한번 맛나게…… 응?”
시박이 갑자기 말을 하다 멈췄다.
꼬맹이가 숨을 한 번 돌리려는 듯 들어 올린 머리 때문이었다.
파란 머리였다.
유난히 색이 강해 하마터면 발정 나듯 난장판을 벌인 누군가를 떠올릴 뻔했다.
시박은 끔찍한 것을 보기라도 했다는 듯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이상했다. 뭔가 일을 보고 밑을 닦지 않은 기분이랄까.
파란 머리 꼬맹이는 어딘지 모르게 너무나 익숙했다.
‘그래, 그놈이 여기에 왜 나타나. 결벽증 환자라 소문난 그놈이 저렇게 초라한 행색일 리도 없지.’
생각은 그리했지만 몸은 머리를 따르지 않았다.
‘근데 친숙해도 이리 친숙할 수가 있는 건가? 내가 여기에서 아는 인물이 있을 리가 없는데. 배고파서 몸이 이상해졌나?’
문득 파란 머리 꼬맹이의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백색이 아닌 황토색이었다.
순간 그놈이 가끔씩 바람이 나 중원에 동자 차림으로 돌아다닌다는 게 생각났다.
파란 머리 꼬맹이와 시박이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정지한 듯 두 사람은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파란 머리 꼬맹이의 손에서 떡갈비 꼬치가 떨어졌다.
시박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 너……! 혹시 내가 아는 그놈이 맞는 거냐?”
“……글쎄요.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파란 머리 꼬맹이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차하면 도망갈 생각인 듯 자세가 상당히 어정쩡했다.
“……맞는 것 같은데?”
“이상한 저승차, 아니 사람이네요. 전 그럼 엄마가 불러서 이만…….”
돌멩이를 씹어 먹기라도 한 것처럼 시박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윽고 시박이는 자연스레 월영검을 매만졌다.
시박이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불려졌다.
“파랭이.”
파란 머리 꼬맹이의 몸이 굳어졌다.
“……파랭이.”
두 번째 부름에는 갑자기 겨울이라도 맞이한 것처럼 몸을 떨었다.
“파랭이, 너 이…….”
“흐윽…… 씨빡아!”
파란 머리 꼬맹이가 작정이라도 한 듯 시박이의 품에 안겨들었다.
워낙에 서럽게 울어 그 모습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했다.
“나, 나 파랭이 맞아. 흐윽.”
청룡이었다.
저 멀리 빈센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달덩이 한번 청승스런 밤이었다.
청룡이 정말 쉬지 않고 떡갈비며 감자며 먹어치우는 것이 개방의 거지들이 울고 갈 지경이었다.
“그래, 맛있냐?”
“응. 시박, 꿀꺽…… 아, 진짜 맛있다. 흑흑.”
청룡은 떡갈비를 삼키지도 않고 대답했다.
하루 반나절을 처먹기만 하니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볼 틈도 없었다.
시박이는 어울리지 않게 계속 미소 짓고 있었다.
오랜만에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낸 노움은 그것이 불안했다.
낯설기만 한 시박이의 모습이 폭풍이 오기 전의 고요함처럼 자신을 자꾸만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노움아.”
“홀홀!”
시박이가 노움의 귓가에 뭔가를 작게 속삭였다.
노움의 안색이 잠시 창백해지더니 이내 숲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우리 파랭이?”
상냥함마저 느껴지는 시박의 물음에 청룡이 기름기 가득한 입가를 천천히 닦았다.
“흐끅…….”
“울지 말고.”
“여기에 떨어진 지는 두 달 정도 지났어, 시박아.”
두 달 만에 그렇게 씨를 뿌리고 다녔던 것인가.
문득 빈센트가 말했던 드래곤. 즉, 청룡의 자손들이 생각난 시박이었다.
“처음에는 중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배는 고프고 아는 이도 없고…… 그러던 와중에 익숙한 기운에 이끌려 파라얀 산맥이란 곳을 가게 됐어.”
시박이는 미소를 잃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줬다.
“익숙한 기운은 나와 같은 존재였어. 여의주가 없는 걸로 보아 배불뚝이 이무기인 줄 알았는데…… 날 보고 동족 망신이라는 거야. 흐끅.”
청룡이 서러웠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 울먹였다.
시박은 청룡의 등을 토닥여 줬다.
“마침 기분도 더럽겠다. 이무기 따위한테 무시 받은 게 화나서 그놈의 보금자리를 뺐으려고 했는데…….”
“했는데?”
“그때 가서야 알았어.”
“뭐를?”
“본체로 돌아간 내 덩치가 쥐꼬리만 하다는 것을.”
덩치가 작아졌다는 청룡의 말에 시박이 본인도 공감했다.
차원이동에 대한 부작용.
실제로 시박이 역시 능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형태로 변화되어 그 쓰임새를 아직 못 찾고 있었다.
“가까스로 도망쳐서 여기저기 떠돌다가 이곳에서 힘이 다해 다시 정신을 잃었어.”
“흐음.”
“그러다가 어떤 얼라 하나가 나한테 접근하더라고. 척 보기에도 돈 좀 있을 법한 놈이었는데, 난 마지막 힘을 다해 날치기했지. 히히.”
염라대왕이 들었다간 당장에 벼루를 집어 던질 소리였다.
명색이 사방신이란 게 날치기나 하다니.
멀리서 청룡의 얘기를 엿듣고 있던 빈센트의 인내심이 끊어질듯 위태로웠다.
“역시 사람이든 용이든 모름지기 돈이 있어야 하더라고. 그 돈으로 돈 없을 때 먹지 못했던 음식들을 모두 사 먹었어!”
시박이 이마에 힘줄 하나가 돋았다.
자신은 죽어라 고생해서 돈 벌고 있었는데 이놈은 식도락을 즐기고 다녔단 것인가.
시박은 슬쩍 숲 속을 바라보며 어서 빨리 노움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다시 이곳에 와서 시장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친숙한 냄새가 나는 거야. 마치 고향의 따스함이랄까.”
청룡이 남은 떡갈비를 마저 집어먹었다.
“이곳에도 떡갈비가 있구나 하고 한창 무전취식을 하고 있는데 재수 없게…… 아니 다행히 씨박, 아니 시박이 널 만나게 된 거고.”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
어쩌면 가장 먼저 물어봤어야 했다.
시박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북해, 아니 만년설산에서의 폭주는 어찌 된 것이냐?”
“그거 절대로 연극한 거 아냐!”
“아마도 여의주가 없어진 탓이겠지?”
청룡이 다시 생각해도 잊을 수 없는 치욕인 듯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엿 바꿔 먹은 건 아닐 테고…… 설마 잃어버렸나?”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빼앗겼어.”
시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자신이 봤을 때 아무리 덜떨어졌어도 청룡은 명색이 사방신 중 하나이다. 그런 청룡이 여의주,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것을 빼앗겼다니.
“처음 보는 인간들이었어. 색목인 듯했는데 모두가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생전 처음 보는 사술, 아니 술법 같은 것들을 내게 썼어.”
시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색목인이 왜 북해 벌판까지 가 청룡의 여의주를 빼앗는단 말인가. 더군다나 색목인이 술법을 사용하다니 모두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열 명 정도 됐었는데 모두 찢어발기려 했는데…….”
청룡이 지금 생각해도 분노가 치미는 듯 말투가 거칠어졌다.
“일곱 명째를 죽일 때 여의주를 빼앗겼어. 그리고 나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라. 그 후로 만년설산의 차원의 균열이 심해지고 내 정신도 이상해졌어.”
“그랬었구나.”
시박은 이번 청룡의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함을 느꼈다.
청룡의 여의주는 거대한 에너지 집합체라 봐도 무리가 없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을 정도로 진귀하기도 한 그것은 누구의 손에 들어가냐에 따라서 세상에 흉(兇)이 될 수도 있는 물건이었다.
“근데 이곳에서 내 여의주를 가져간 놈들이랑 비슷한 술법을 쓰는 놈들을 봤어.”
“지금 뭐라고 했어?”
시박이 놀라 다시 물었다.
“똑같지는 않았는데 뭐랄까 느낌이 닮았다고 해야 하나.”
“자세히 잘해 봐라. 정확히 어떤 것이었나!”
시박의 호통에 청룡이 몸을 움찔거렸다.
“마른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기도 하고 거대한 불덩이가 날아오기도 했어. 특히 종체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순간이동하는 기술이 기억에 남아.”
시박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빈센트가 자신에게 말했던 마법사라는 것들이 사용하는 술법과 비슷한 것이, 우연이 아닌 것 같다는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때마침 노움이 숲 속에서 제법 실해 보이는 몽둥이를 한 아름 들고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에 청룡이 신기하게 바라봤다.
처음에는 웬 잡귀 하나가 시박이와 같이 있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심부름까지 하는 걸로 보였다.
“아, 맞다! 이거는 진짜 아껴 먹으려고 남겨 두었던 건데.”
청룡이 품속에서 뭔가를 뒤적였다.
“시박이 너도 분명 좋아할 거야. 원래 저승차사는 제사상에 올려진 것 외에는 먹으면 안 되는데 넌 뻔질나게 먹어 댔지? 히히. 예전에 같이 염라대왕 몰래 이거 먹었던 거 생각난다.”
청룡은 식어 빠진 만두 한 덩이를 꺼내 시박에게 건넸다.
생각지도 못한 중원의 음식에 시박이는 혀에 군침이 도는지 진심으로 기뻐했다.
“오호, 만두라니! 이거 네가 직접 만든 거냐?”
“아니, 나처럼 고귀한 애가 어떻게 요리 같은 걸 하겠어. 커밍햄이란 곳에서 산 거야.”
“쿨럭!”
시박은 목구멍에 만두가 걸렸는지 그대로 만두를 토해 냈다.
한참을 기침을 하던 시박이 다급하게 물었다.
“지, 지금 뭐라고 했어?”
“응? 뭐가?”
“샀다고 했냐?!”
청룡이 순진무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박이 얼굴에 경악 어린 감정이 한 움큼 떠올랐다.
“이, 이 미련한 곰, 아니 천 년 동안 낚시 미끼로 사용…….”
시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욕을 떠올렸다.
어쩐 일인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아 우울해졌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원의 문물은 절대 이곳에 있을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한낱 떡갈비 따위가 그토록 열풍이 불었던 것도 새로운 문화, 음식에 대한 신선함 때문이지 않았던가.
순간 자신이 저승을 떠나기 전 염라대왕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죄인 천병세(天兵勢)를 기억하느냐?”
“북해 만년설산은 천병세가 차원의 균열에 휩쓸린 곳이다.”

“만두, 여의주, 차원이동…….”
시박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소리 질렀다.
“천병세(天兵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