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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시간 2화
Chapter 1. 회귀 전, 비극 (1)
***
세상이 어둠에 잠긴 것만 같았다. 요나스는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억지로 참관해야 했던 마녀의 화형식은 그에겐 끔찍한 상흔으로 남았다. 탑처럼 높이 쌓은 제단 위에서 제국의 황녀가 불타 죽었다. 더없이 귀한 존재가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차마 눈을 돌릴 수 없었다. 형제의 마지막 모습이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끝까지 함께해야만 했다. 그녀가 가지고 싶어 하던 제국, 그녀가 오르고 싶어 하던 태양의 자리. 그것을 가지게 될 사람으로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삼황자님은 제왕 교육을 제대로 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후견인이 있으셔야 합니다.”
상념을 깨는 날카로운 소리에 요나스가 고개를 돌렸다. 회의석에 앉은 귀족들이 각자 의견을 토해 내고 있었다. 혼인, 교육, 세금 문제 등 아직 국정 사안에 미흡한 그를 두고 수많은 의견이 대립했다.
“황자님의 교육은 내가 맡는다.”
“……!”
“네, 네페스하임 각하께서 말입니까?”
귀족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태양의 자리는 비어 있는 상태고 요나스는 연치 어린 황자였다. 제멋대로 휘두르기 딱 좋은 상대란 말이었다. 그들은 충분히 권력을 맛보고 뜯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째서?”
그들의 의문을 대표하듯 중년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르나시아 공작이었다. 네페스하임 공작이 제국의 검이라면 아르나시아 공작은 제국의 눈으로 제국 정보부의 수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의무니까.”
“언제부터 그렇게 친절해졌는지 모르겠소.”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남은 한 명인 비올 공작은 서류를 보며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지긋한 노년인 그는 모든 행정관의 우두머리로서 제국의 방패로 불렸다. 탁, 소리와 함께 서류를 내려놓은 비올 공작이 미간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아직 황태자 전하와 이황자님의 국장도 치르지 않은 상태요. 다음 달에 있을 삼황자님의 성년식 전까지 우리 삼공작이 국정을 책임질 것이오.”
다시 입을 열려는 귀족들에게 경고의 눈짓을 한 비올 공작이 동의를 구하듯 요나스를 쳐다봤다. 일방적인 통보나 다름없는 말이었지만 요나스는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에서 압박하는 시선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비올 공작까지 그렇게 나오자 아르나시아 공작도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국정에 잘 참견하지 않는 네페스하임 공작을 비롯해 나머지 두 공작도 요나스를 지지하고 나서자 귀족들은 때가 아니라고 느꼈는지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탐욕을 보며 요나스는 한숨을 삼켰다. 맹수와 같은 음성으로 제국을 호령했던 황제가 그리워졌다.
새삼 혼자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와닿았다. 삼공작이 사심 없이 그를 도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정치에 관심 없는 요나스라도 권력자의 순수한 호의를 믿진 않았다.
“이만 회의를 마치겠소.”
요나스는 자신의 얼굴이 평온해 보였기를 바랐다. 여전히 자리에 앉아 힐끔거리는 귀족들을 뒤로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문을 나서자 뒤쪽으로 궁인들이 따라붙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들의 기척이 마치 유령과도 같았다. 그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어서 제 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요나스가 복도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반대쪽에서 오는 길이었는지 누군가와 마주쳤다.
“…….”
“…….”
“아레프에 축복을. 황비 마마를 뵙습니다.”
“아레프에 축복을.”
먼저 예를 취한 건 요나스였다. 건조한 예가 끝나고 침묵이 흘렀다. 요나스는 여인의 수척한 얼굴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두 자식을 잃은 어미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나는 형제와 동귀어진 했고 하나는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했다. 그가 지은 죄도 아닌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황궁은 1년 내내 겨울 같다오. 참으로 잔인한 곳이지.”
먼저 입을 연 건 황비였다. 그녀는 정원의 낙엽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바란 건 아니지만…….”
하나로 늘어뜨린 그녀의 금발이 바람결에 천천히 나부꼈다.
“모두가 불행한 결말이 올 줄은 몰랐소.”
요나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모두가 불행한 결말. 그녀의 눈에도 요나스가 최후의 승자로, 하나뿐인 황좌를 차지해 기뻐하는 권력자로 보이진 않는 모양이었다.
“지난한 가을이지요.”
가만히 요나스를 보던 황비가 예를 갖췄다.
“황자의 앞날에 무한한 영광이 있기를 바라겠소.”
예를 푼 황비가 요나스를 스쳐 지나갔다. 황비의 외가가 강력하기에 아무도 그녀를 지탄하지 못했지만, 마녀의 어미란 이유로 사교계에서 완벽히 배척당했다. 이제 그녀는 황궁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하는 유령 신세였다.
사파이어 궁으로 돌아온 요나스는 바로 침실로 향했다. 뒤따라온 막스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막스. 무서워…….”
처음으로 참석한 회의에서 요나스는 만찬이 되었다. 훌륭한 와인이고 육즙이 흐르는 고기였다.
“난 자신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아.”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었다. 배에 얼굴을 비비며 앓는 소리를 내는 요나스를 막스가 조심히 일으켰다. 장갑을 낀 손가락이 물기 어린 눈을 다정히 쓸었다. 그는 가엾은 주인에게 슬픈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은 거리의 가엾은 부랑자를 보는 신의 눈이었다. 자애의 눈이었고 관대한 시선이었다.
막스는 요나스의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허리를 펴십시오.”
그리고 턱을 들어 올렸다.
“시선은 오만하게 내리까십시오.”
다음으론 두 팔을 가지런히 내리게 했다.
“어깨에 힘을 빼되 너무 처지게 해서도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손을 잡고 천천히 걷게 했다.
“걸음은 단정히 보일 수 있게 보폭을 좁게 해선 안 되고 시선은 부산하게 돌리지 말고 정면을 응시하십시오.”
시키는 대로 걸음을 옮기던 요나스는 추억에 젖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뽀얀 뺨이 탐스럽던 시절, 걷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던 그는 막스의 손뼉 치는 소리에 맞춰 짧은 다리를 무던히 놀렸었다.
“이 하늘 아래에서 황자님보다 귀한 이는 없습니다. 원하시면 그 누구라도 황자님의 발치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개처럼 기라 하면 길 것이고 벌레처럼 죽으라 하면 죽을 것입니다.”
“난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아.”
“원하지 않아도 제위에 오르면 제국의 기사 모두가 황자님을 위해 망설임 없이 목숨을 바칠 겁니다. 이제 황자님은 사파이어 궁의, 우리들의 푸른 보석으로만 살 순 없으십니다.”
얼핏 냉정하게도 들리는 말이었다. 요나스는 서글프게 웃으며 맞잡은 손을 꽉 쥐었다.
“내가 황제가 되니까? 황제가 되면 막스에게 어리광 같은 건 부릴 수 없는 거야? 정말 지금까지처럼 살 수 없는 거야?”
“황자님의 모든 것이 파괴될 겁니다. 가치관, 미래, 꿈꾸던 모든 것들이 달라질 겁니다.”
걸음을 멈춘 막스가 요나스의 얼굴을 붙잡았다.
“언제까지고…… 오늘처럼 나약하실 순 없습니다.”
망설이듯 내뱉은 말이 무언의 창이 되어 요나스를 찔렀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황자님……!”
기겁한 막스가 요나스를 붙들었다. 밀랍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린다! 린다!”
“네! 시종장님!”
문이 벌컥 열리고 시녀장 린다가 달려 들어왔다.
“비밀리에 황궁의를 불러와. 빨리!”
린다는 들어왔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흐린 눈으로 그 모습을 멀거니 보던 요나스가 막스의 가슴을 토닥였다.
“괜찮아…….”
많이 놀랐을 노시종을 위해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나약한 신체를 원망하며 간신히 미소 지었다. 막스의 눈이 잔잔히 젖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막스.”
“황자님을 그렇게 다그치는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너무 급하게 굴어…….”
요나스는 두서없이 횡설수설하는 막스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가 잔소리할 때마다 늘 하는 행동이었다.
“그러지 마. 막스.”
손가락으로 입술 끝을 누르며 죽 위로 끌어 올렸다.
“웃어 줘. 나는 막스가 웃는 게 좋아.”
그 말에 기어코 막스의 주름진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요나스를 가둘 때 이후로 보인 두 번째 눈물이었다.
***
요나스는 천천히 옷차림을 점검했다. 오늘부터 네페스하임 공작을 비롯해 각 분야의 교수들에게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수업을 들어야 했다. 생각만 해도 벌써 가슴이 답답했다.
“황자님. 막스입니다.”
“들어와.”
문이 열리자 막스가 다섯 명의 기사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하나같이 요나스가 올려다봐야 할 만큼 건장한 신장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의 정복을 본 요나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부터 황자님을 호위할 기사들입니다.”
막스가 옆으로 물러서자 기사들이 앞으로 나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레프에 영광을. 황자님을 뵙습니다.”
거부하기도 전에 막스가 검을 가져왔다. 약식으로 입궁식을 치른 요나스가 막스에게 작게 속삭였다.
“황금의 궁 기사단장들이 왜 여기 있어? 너무 이른 거 아냐?”
아직 일개 황자인 요나스가 데리고 다니기엔 과한 이들이었다. 금의 기사단, 청의 기사단, 적의 기사단, 백의 기사단, 흑의 기사단으로 구성된 황금의 궁 기사단은 황제의 검으로써 오직 주인만을 위해 검을 드는 이들이었다.
“이제 황자님께서 저희의 주인이 되실 테니까요.”
검은 정복을 입은 흑의 기사단장이 막스 대신 답했다. 기사들의 오감이 뛰어나단 걸 뒤늦게 깨달은 요나스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 닿는 강렬한 열망의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다. 그는 헛기침하며 서둘러 목적지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기사들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뒤따랐다.
***
교육은 엄격했다. 정치, 경제, 역사, 예술, 재정, 군사학 등 광범위한 지식을 하루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채워 넣어야 했다. 쉬는 시간이라곤 식사 시간뿐이었다. 점점 살이 내리는 요나스를 위해 막스가 고군분투했지만, 몸이 축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오늘은 10대 황제께서 펼친 치국 정책의 일환이었던 동부지역 토목 공사에 관해 토론하겠습니다. 당시 수인국의 영토였던…….”
요나스는 책장을 뒤적이며 미간을 짚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깐깐한 노교수가 동부지역의 현재 인구 수와 주 관광자원 등을 물어보자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겨우 대답했다. 오늘은 이 수업이 마지막이었다. 끝날 때까지만 버티자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
“지난번보다는 수월하게 답하시는군요.”
노교수가 책을 덮음으로써 수업이 끝났음을 알렸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손끝이 차갑게 식으며 명치가 아릿했다. 빨리 저만 남았으면 싶었다. 약식으로 예를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노교수가 요나스를 지그시 응시했다.
“제국 법률의 기틀을 완벽히 정립한 7대 황제께선 밤마다 방 안에서 괴성을 지르고 창문을 깨며 난동을 부렸다는 야사가 있습니다.”
“……?”
“때론 자신만의 탈출구를 마련해 놓는 것도 좋습니다. 작은 태양이시여.”
요나스는 문을 열고 나가는 노교수의 뒷모습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 상태를 알아본 것이 틀림없었다. 하긴, 못 알아채는 게 이상하긴 했다.
앙상하게 마른 몸, 창백한 얼굴, 죽은 눈.
딱 봐도 멀쩡한 모습이 아니었다. 원래도 몸이 약했지만, 과중한 부담감에 이젠 중병을 앓을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난 요나스가 크게 휘청거렸다. 중심을 잡지 못한 몸이 맥없이 허물어졌다. 그는 바르작거리며 필사적으로 움직이려 애썼다. 아직 귀족들이 퇴궁하지도 않은 시각이었다. 이 모습을 누군가가 본다면 은근한 어조로 비웃을 게 뻔했다. 최근에도 가녀린 황자님이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냐며 에둘러 비꼬곤 했다.
가련한 작은 새, 제국의 작은 달-달은 보통 여성 황족을 뜻했다-, 우리들의 어린 주군 등 치욕적인 별칭이 따라다닌다는 걸 그도 모르진 않았다.
그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묵직한 음성이 요나스에게 닿았다.
“황자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숨을 크게 들이쉰 요나스가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아무것도! 생각할 일이 있으니 조금만 더 대기해.”
“예, 황자님.”
순순히 수긍하는 기색에 안도했다. 요나스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어차피 바로 일어나긴 힘들었다. 몸이 아프니 체면이고 예법이고 귀찮았다. 서늘한 바닥 때문인지 점차 정신이 맑아졌다.
“힘들다, 진짜.”
채 막을 새도 없이 한탄이 새어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침대에 누워 일주일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자고 싶었다. 아니, 아예 황궁을 떠나 도망치고 싶었다. 요나스는 창 안쪽으로 서서히 스며드는 노을빛을 보며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만 반복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제국의 안녕과 내 사람들의 평안을 위해선 그가 이 혼란을 잠재워야만 했다. 그리고…….
‘또 만나요. 다음 생에서.’
불명예로 스러져 버린 나디아를 위해서라도 헛되이 모든 걸 포기할 수 없었다.
부우우우- 부우우우-
황혼이 저물고 어둠의 장막이 내려오는 시각. 황궁에 밤을 가르는 장송곡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요나스는 눈을 감고 먼저 간 이들의 죽음을 애도했다. 한 달에 걸쳐 치러질 국장에 나디아는 없었다. 불타 버린 육신도 거두지 못하고 그대로 차가운 땅 아래에 갇혔다.
요나스는 어느새 볼을 적신 눈물을 거칠게 훔쳤다. 서러운 흐느낌이 끊길 듯 이어지다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좀 진정된다 싶었을 때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황자님.”
지척에서 들린 목소리에 요나스가 흠칫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기사 하나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 안에 겁에 질린 모습이 비쳤다.
“……밖에서 대기하라고 했을 텐데.”
“황궁의를 부르겠습니다.”
“부르지 마.”
아무도 부르지 마.
무언의 애원이 닿았음인지 기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정복을 보니 흑의 기사단 단장이었다. 기사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을 지니고 있었다. 외양으로 추측했을 때 제국 동부 출신인 듯했다.
“내가 쓰러졌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으면 해.”
“황자님께서 원하신다면 고문 앞에서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일로 고문까지야…….”
극단적인 예시에 요나스의 얼굴이 괴상하게 물들었다. 흑기사는 요나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하곤 이마에 손을 대었다.
“열이 심합니다.”
“그다지 아프지 않아.”
“많이 아플 겁니다.”
“…….”
“밖의 기사와 궁인들을 물리겠습니다.”
귓가에 닿은 목소리가 낮으면서도 묵직했다. 누가 들어도 신뢰가 싹틀 만큼 좋은 목소리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흑기사가 바깥으로 나갔다 들어왔다. 살짝 열린 문 사이로 텅 빈 복도가 보였다.
요나스의 이마에 차가운 게 닿았다. 언제 준비했는지 흑기사가 물에 젖은 손수건으로 의복 밖으로 드러난 피부를 꼼꼼히 닦았다. 궁인이 할 법한 일을 기사가 하고 있으니 웃음이 나려 했다.
웃음, 웃음이라. 요나스는 마지막으로 웃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지금의 그에겐 사치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잠시 주무십시오. 제가 안전하게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거친 손바닥이 눈을 가리고 다른 손이 천천히 등을 쓸었다. 흑기사의 말이 주문이라도 된 것처럼 졸음이 밀려왔다. 의식이 까무룩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부디 황자님께 에오카 여신의 축복이 깃들기를.”
축언과 함께 따뜻한 체온이 이마에 닿았던 것 같지만, 요나스는 확신할 수 없었다.
***
요나스는 며칠간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본 건 막스의 걱정 어린 얼굴이었다. 손을 뻗어 손등을 토닥이니 노시종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황궁의의 말로는 당분간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한답니다. 네페스하임 공작에겐 한동안 교육을 쉬겠다고 통보했습니다.”
“공작이 허락해 줄까?”
“황자님.”
막스가 엄격한 얼굴로 요나스의 손을 잡았다.
“누구도 황자님을 강압할 순 없습니다. 그 누가 에오카의 작은 태양이자 아레프의 정점에 선 분을 허락하고 말고 할까요. 황자님께선 자신의 위치를 명확하게 알고 계셔야 합니다.”
요나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위축된 마음 때문에 잊고 있었던 자신의 위치가 새삼 와닿았다. 그랬다. 그는 이제 황태자나 다름없는 신분이었다. 직계 황족이 하나도 남지 않은 이 상황에서 그가 성년식에서 이능을 받는 건 절대불변의 진리였다. 그 어떤 이도 그보다 우위에 설 순 없었다.
“무조건 쉬셔야 합니다. 절. 대. 안. 정. 아시겠지요?”
막스의 기백에 요나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꼼꼼히 이불을 정리한 막스가 시녀장을 불렀다. 린다를 비롯한 시녀들이 안으로 들어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침대 옆 협탁엔 숙면에 좋은 향초가, 품 안에는 따듯하게 데운 가죽 물주머니가, 맨발에는 털실로 짠 양말이 씌워졌다. 그 모든 게 순식간에 끝났다.
물끄러미 모든 걸 지켜보던 요나스가 작게 미소 지었다. 제국의 태양과 빛나던 황족 셋이 지고 그 혼자만이 남았다. 하지만 곁에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피가 이어지진 않았지만, 저들이야말로 그를 목숨 걸고 지킨 가족이었다.
창밖으로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붉게 물든 낙엽이 천천히 낙하했다. 가을은 한때 요나스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었지만, 이젠 가장 지옥 같은 계절이 되었다. 좋아하지 않았던 겨울이 빨리 오기를 바랄 정도였다. 눈이 쌓이고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면 모두가 숨을 죽이고 바깥출입을 자제했다. 그때가 되면 요나스도 숨을 돌릴 수 있을 터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방을 정비한 린다가 침대로 다가왔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린다.”
“예. 황자님.”
“고마워.”
“후후. 별말씀을요. 생각 같아선 네페스하임 각하를 확! ……아시죠?”
“응. 알아들었어.”
다소 무엄한 발언을 했음에도 린다는 개의치 않아 했다. 유모의 딸인 그녀는 요나스와 함께 자랐기에 다른 궁인보다는 좀 더 가까운 사이였다. 그녀의 손이 요나스의 눈을 덮었다. 잠이 들기 전 그는 문득 자신을 데려다줬을 흑기사를 떠올렸다. 조금은 특이했던 검은 기사를.
***
사방이 시끌벅적했다.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또래로 보이는 소녀였는데, 어린 시절의 린다임을 자연스레 깨달았다.
이것은 꿈인가.
가판대에 갖가지 물건을 올려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상인들의 소음, 곁눈질로 물건을 보는 행인의 분주한 걸음, 하늘로 연신 쏘아 올리는 폭죽까지. 주변이 무척이나 난잡했다. 요나스는 이곳이 수도 한복판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오늘만 구경하는 거예요. 몰래 나왔으니 조금만 놀다 돌아가는 거예요. 아셨죠, 황자님?”
“응!”
요나스의 입에서 앳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황궁에선 볼 수 없는 다양한 볼거리를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여신의 날 같은 대규모 축제는 어린 황자의 넋을 빼놓기 충분했다.
“황자님이 성인이 되시면 언제라도 볼 수 있어요. 물론 그때는 호위 기사가 줄줄이 따라붙겠지만요.”
한쪽 눈을 찡긋한 린다가 요나스의 손에 솜사탕을 쥐여 주었다.
“제 손을 놓으시면 안 돼요. 이렇게 큰 시장엔 소매치기도 있고 아이만 노리는 납치범들도 있어요. 저하고 떨어지면 크왕 하고 잡아가요.”
린다의 과장된 표정에 요나스가 겁을 잔뜩 집어먹었다. 잡은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머리 위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때, 시장의 소란스러움과는 다른 웅성거림이 들렸다. 호기심에 린다와 요나스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무리 안을 헤집고 들어가자 더러운 옷을 입은 소년이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독한 새끼. 퉤!”
사방에서 시선이 느껴지자 소년에게 발길질하던 사내가 침을 탁 뱉곤 골목 안쪽으로 사라졌다. 생소한 광경에 요나스가 린다의 뒤로 몸을 숨겼다. 누워 있던 소년이 작게 기침하며 눈을 떴다. 정처 없이 떠돌던 새까만 눈동자가 요나스에게 닿았다.
“여동생이…….”
아파.
아주 작은 소리였음에도 밀랍처럼 귀에 들러붙었다. 요나스는 자신도 모르게 린다의 손을 흔들었다.
“도와주면 안 될까?”
아이의 순수한 물음에 린다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요나스와 소년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소년에게 다가가 품에 무언가를 넣어 주었다.
“우리 주인의 호의에 감사하렴.”
돌아온 린다가 요나스의 손을 다시 잡았다.
“가요, 황자님.”
“응. ……앗!”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었다. 놀란 린다가 뒤로 벗겨지려는 요나스의 후드를 잡았다. 바람에 너울거리던 청발이 금세 후드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소년이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천천히 풍경이 이지러졌다. 어린 날의 추억도 이내 꿈속 저편으로 가라앉았다.
Chapter 1. 회귀 전, 비극 (1)
***
세상이 어둠에 잠긴 것만 같았다. 요나스는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억지로 참관해야 했던 마녀의 화형식은 그에겐 끔찍한 상흔으로 남았다. 탑처럼 높이 쌓은 제단 위에서 제국의 황녀가 불타 죽었다. 더없이 귀한 존재가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차마 눈을 돌릴 수 없었다. 형제의 마지막 모습이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끝까지 함께해야만 했다. 그녀가 가지고 싶어 하던 제국, 그녀가 오르고 싶어 하던 태양의 자리. 그것을 가지게 될 사람으로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삼황자님은 제왕 교육을 제대로 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후견인이 있으셔야 합니다.”
상념을 깨는 날카로운 소리에 요나스가 고개를 돌렸다. 회의석에 앉은 귀족들이 각자 의견을 토해 내고 있었다. 혼인, 교육, 세금 문제 등 아직 국정 사안에 미흡한 그를 두고 수많은 의견이 대립했다.
“황자님의 교육은 내가 맡는다.”
“……!”
“네, 네페스하임 각하께서 말입니까?”
귀족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태양의 자리는 비어 있는 상태고 요나스는 연치 어린 황자였다. 제멋대로 휘두르기 딱 좋은 상대란 말이었다. 그들은 충분히 권력을 맛보고 뜯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째서?”
그들의 의문을 대표하듯 중년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르나시아 공작이었다. 네페스하임 공작이 제국의 검이라면 아르나시아 공작은 제국의 눈으로 제국 정보부의 수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의무니까.”
“언제부터 그렇게 친절해졌는지 모르겠소.”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남은 한 명인 비올 공작은 서류를 보며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지긋한 노년인 그는 모든 행정관의 우두머리로서 제국의 방패로 불렸다. 탁, 소리와 함께 서류를 내려놓은 비올 공작이 미간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아직 황태자 전하와 이황자님의 국장도 치르지 않은 상태요. 다음 달에 있을 삼황자님의 성년식 전까지 우리 삼공작이 국정을 책임질 것이오.”
다시 입을 열려는 귀족들에게 경고의 눈짓을 한 비올 공작이 동의를 구하듯 요나스를 쳐다봤다. 일방적인 통보나 다름없는 말이었지만 요나스는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에서 압박하는 시선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비올 공작까지 그렇게 나오자 아르나시아 공작도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국정에 잘 참견하지 않는 네페스하임 공작을 비롯해 나머지 두 공작도 요나스를 지지하고 나서자 귀족들은 때가 아니라고 느꼈는지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탐욕을 보며 요나스는 한숨을 삼켰다. 맹수와 같은 음성으로 제국을 호령했던 황제가 그리워졌다.
새삼 혼자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와닿았다. 삼공작이 사심 없이 그를 도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정치에 관심 없는 요나스라도 권력자의 순수한 호의를 믿진 않았다.
“이만 회의를 마치겠소.”
요나스는 자신의 얼굴이 평온해 보였기를 바랐다. 여전히 자리에 앉아 힐끔거리는 귀족들을 뒤로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문을 나서자 뒤쪽으로 궁인들이 따라붙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들의 기척이 마치 유령과도 같았다. 그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어서 제 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요나스가 복도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반대쪽에서 오는 길이었는지 누군가와 마주쳤다.
“…….”
“…….”
“아레프에 축복을. 황비 마마를 뵙습니다.”
“아레프에 축복을.”
먼저 예를 취한 건 요나스였다. 건조한 예가 끝나고 침묵이 흘렀다. 요나스는 여인의 수척한 얼굴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두 자식을 잃은 어미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나는 형제와 동귀어진 했고 하나는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했다. 그가 지은 죄도 아닌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황궁은 1년 내내 겨울 같다오. 참으로 잔인한 곳이지.”
먼저 입을 연 건 황비였다. 그녀는 정원의 낙엽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바란 건 아니지만…….”
하나로 늘어뜨린 그녀의 금발이 바람결에 천천히 나부꼈다.
“모두가 불행한 결말이 올 줄은 몰랐소.”
요나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모두가 불행한 결말. 그녀의 눈에도 요나스가 최후의 승자로, 하나뿐인 황좌를 차지해 기뻐하는 권력자로 보이진 않는 모양이었다.
“지난한 가을이지요.”
가만히 요나스를 보던 황비가 예를 갖췄다.
“황자의 앞날에 무한한 영광이 있기를 바라겠소.”
예를 푼 황비가 요나스를 스쳐 지나갔다. 황비의 외가가 강력하기에 아무도 그녀를 지탄하지 못했지만, 마녀의 어미란 이유로 사교계에서 완벽히 배척당했다. 이제 그녀는 황궁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하는 유령 신세였다.
사파이어 궁으로 돌아온 요나스는 바로 침실로 향했다. 뒤따라온 막스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막스. 무서워…….”
처음으로 참석한 회의에서 요나스는 만찬이 되었다. 훌륭한 와인이고 육즙이 흐르는 고기였다.
“난 자신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아.”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었다. 배에 얼굴을 비비며 앓는 소리를 내는 요나스를 막스가 조심히 일으켰다. 장갑을 낀 손가락이 물기 어린 눈을 다정히 쓸었다. 그는 가엾은 주인에게 슬픈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은 거리의 가엾은 부랑자를 보는 신의 눈이었다. 자애의 눈이었고 관대한 시선이었다.
막스는 요나스의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허리를 펴십시오.”
그리고 턱을 들어 올렸다.
“시선은 오만하게 내리까십시오.”
다음으론 두 팔을 가지런히 내리게 했다.
“어깨에 힘을 빼되 너무 처지게 해서도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손을 잡고 천천히 걷게 했다.
“걸음은 단정히 보일 수 있게 보폭을 좁게 해선 안 되고 시선은 부산하게 돌리지 말고 정면을 응시하십시오.”
시키는 대로 걸음을 옮기던 요나스는 추억에 젖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뽀얀 뺨이 탐스럽던 시절, 걷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던 그는 막스의 손뼉 치는 소리에 맞춰 짧은 다리를 무던히 놀렸었다.
“이 하늘 아래에서 황자님보다 귀한 이는 없습니다. 원하시면 그 누구라도 황자님의 발치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개처럼 기라 하면 길 것이고 벌레처럼 죽으라 하면 죽을 것입니다.”
“난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아.”
“원하지 않아도 제위에 오르면 제국의 기사 모두가 황자님을 위해 망설임 없이 목숨을 바칠 겁니다. 이제 황자님은 사파이어 궁의, 우리들의 푸른 보석으로만 살 순 없으십니다.”
얼핏 냉정하게도 들리는 말이었다. 요나스는 서글프게 웃으며 맞잡은 손을 꽉 쥐었다.
“내가 황제가 되니까? 황제가 되면 막스에게 어리광 같은 건 부릴 수 없는 거야? 정말 지금까지처럼 살 수 없는 거야?”
“황자님의 모든 것이 파괴될 겁니다. 가치관, 미래, 꿈꾸던 모든 것들이 달라질 겁니다.”
걸음을 멈춘 막스가 요나스의 얼굴을 붙잡았다.
“언제까지고…… 오늘처럼 나약하실 순 없습니다.”
망설이듯 내뱉은 말이 무언의 창이 되어 요나스를 찔렀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황자님……!”
기겁한 막스가 요나스를 붙들었다. 밀랍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린다! 린다!”
“네! 시종장님!”
문이 벌컥 열리고 시녀장 린다가 달려 들어왔다.
“비밀리에 황궁의를 불러와. 빨리!”
린다는 들어왔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흐린 눈으로 그 모습을 멀거니 보던 요나스가 막스의 가슴을 토닥였다.
“괜찮아…….”
많이 놀랐을 노시종을 위해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나약한 신체를 원망하며 간신히 미소 지었다. 막스의 눈이 잔잔히 젖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막스.”
“황자님을 그렇게 다그치는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너무 급하게 굴어…….”
요나스는 두서없이 횡설수설하는 막스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가 잔소리할 때마다 늘 하는 행동이었다.
“그러지 마. 막스.”
손가락으로 입술 끝을 누르며 죽 위로 끌어 올렸다.
“웃어 줘. 나는 막스가 웃는 게 좋아.”
그 말에 기어코 막스의 주름진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요나스를 가둘 때 이후로 보인 두 번째 눈물이었다.
***
요나스는 천천히 옷차림을 점검했다. 오늘부터 네페스하임 공작을 비롯해 각 분야의 교수들에게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수업을 들어야 했다. 생각만 해도 벌써 가슴이 답답했다.
“황자님. 막스입니다.”
“들어와.”
문이 열리자 막스가 다섯 명의 기사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하나같이 요나스가 올려다봐야 할 만큼 건장한 신장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의 정복을 본 요나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부터 황자님을 호위할 기사들입니다.”
막스가 옆으로 물러서자 기사들이 앞으로 나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레프에 영광을. 황자님을 뵙습니다.”
거부하기도 전에 막스가 검을 가져왔다. 약식으로 입궁식을 치른 요나스가 막스에게 작게 속삭였다.
“황금의 궁 기사단장들이 왜 여기 있어? 너무 이른 거 아냐?”
아직 일개 황자인 요나스가 데리고 다니기엔 과한 이들이었다. 금의 기사단, 청의 기사단, 적의 기사단, 백의 기사단, 흑의 기사단으로 구성된 황금의 궁 기사단은 황제의 검으로써 오직 주인만을 위해 검을 드는 이들이었다.
“이제 황자님께서 저희의 주인이 되실 테니까요.”
검은 정복을 입은 흑의 기사단장이 막스 대신 답했다. 기사들의 오감이 뛰어나단 걸 뒤늦게 깨달은 요나스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 닿는 강렬한 열망의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다. 그는 헛기침하며 서둘러 목적지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기사들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뒤따랐다.
***
교육은 엄격했다. 정치, 경제, 역사, 예술, 재정, 군사학 등 광범위한 지식을 하루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채워 넣어야 했다. 쉬는 시간이라곤 식사 시간뿐이었다. 점점 살이 내리는 요나스를 위해 막스가 고군분투했지만, 몸이 축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오늘은 10대 황제께서 펼친 치국 정책의 일환이었던 동부지역 토목 공사에 관해 토론하겠습니다. 당시 수인국의 영토였던…….”
요나스는 책장을 뒤적이며 미간을 짚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깐깐한 노교수가 동부지역의 현재 인구 수와 주 관광자원 등을 물어보자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겨우 대답했다. 오늘은 이 수업이 마지막이었다. 끝날 때까지만 버티자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
“지난번보다는 수월하게 답하시는군요.”
노교수가 책을 덮음으로써 수업이 끝났음을 알렸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손끝이 차갑게 식으며 명치가 아릿했다. 빨리 저만 남았으면 싶었다. 약식으로 예를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노교수가 요나스를 지그시 응시했다.
“제국 법률의 기틀을 완벽히 정립한 7대 황제께선 밤마다 방 안에서 괴성을 지르고 창문을 깨며 난동을 부렸다는 야사가 있습니다.”
“……?”
“때론 자신만의 탈출구를 마련해 놓는 것도 좋습니다. 작은 태양이시여.”
요나스는 문을 열고 나가는 노교수의 뒷모습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 상태를 알아본 것이 틀림없었다. 하긴, 못 알아채는 게 이상하긴 했다.
앙상하게 마른 몸, 창백한 얼굴, 죽은 눈.
딱 봐도 멀쩡한 모습이 아니었다. 원래도 몸이 약했지만, 과중한 부담감에 이젠 중병을 앓을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난 요나스가 크게 휘청거렸다. 중심을 잡지 못한 몸이 맥없이 허물어졌다. 그는 바르작거리며 필사적으로 움직이려 애썼다. 아직 귀족들이 퇴궁하지도 않은 시각이었다. 이 모습을 누군가가 본다면 은근한 어조로 비웃을 게 뻔했다. 최근에도 가녀린 황자님이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냐며 에둘러 비꼬곤 했다.
가련한 작은 새, 제국의 작은 달-달은 보통 여성 황족을 뜻했다-, 우리들의 어린 주군 등 치욕적인 별칭이 따라다닌다는 걸 그도 모르진 않았다.
그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묵직한 음성이 요나스에게 닿았다.
“황자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숨을 크게 들이쉰 요나스가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아무것도! 생각할 일이 있으니 조금만 더 대기해.”
“예, 황자님.”
순순히 수긍하는 기색에 안도했다. 요나스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어차피 바로 일어나긴 힘들었다. 몸이 아프니 체면이고 예법이고 귀찮았다. 서늘한 바닥 때문인지 점차 정신이 맑아졌다.
“힘들다, 진짜.”
채 막을 새도 없이 한탄이 새어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침대에 누워 일주일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자고 싶었다. 아니, 아예 황궁을 떠나 도망치고 싶었다. 요나스는 창 안쪽으로 서서히 스며드는 노을빛을 보며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만 반복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제국의 안녕과 내 사람들의 평안을 위해선 그가 이 혼란을 잠재워야만 했다. 그리고…….
‘또 만나요. 다음 생에서.’
불명예로 스러져 버린 나디아를 위해서라도 헛되이 모든 걸 포기할 수 없었다.
부우우우- 부우우우-
황혼이 저물고 어둠의 장막이 내려오는 시각. 황궁에 밤을 가르는 장송곡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요나스는 눈을 감고 먼저 간 이들의 죽음을 애도했다. 한 달에 걸쳐 치러질 국장에 나디아는 없었다. 불타 버린 육신도 거두지 못하고 그대로 차가운 땅 아래에 갇혔다.
요나스는 어느새 볼을 적신 눈물을 거칠게 훔쳤다. 서러운 흐느낌이 끊길 듯 이어지다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좀 진정된다 싶었을 때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황자님.”
지척에서 들린 목소리에 요나스가 흠칫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기사 하나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 안에 겁에 질린 모습이 비쳤다.
“……밖에서 대기하라고 했을 텐데.”
“황궁의를 부르겠습니다.”
“부르지 마.”
아무도 부르지 마.
무언의 애원이 닿았음인지 기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정복을 보니 흑의 기사단 단장이었다. 기사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을 지니고 있었다. 외양으로 추측했을 때 제국 동부 출신인 듯했다.
“내가 쓰러졌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으면 해.”
“황자님께서 원하신다면 고문 앞에서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일로 고문까지야…….”
극단적인 예시에 요나스의 얼굴이 괴상하게 물들었다. 흑기사는 요나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하곤 이마에 손을 대었다.
“열이 심합니다.”
“그다지 아프지 않아.”
“많이 아플 겁니다.”
“…….”
“밖의 기사와 궁인들을 물리겠습니다.”
귓가에 닿은 목소리가 낮으면서도 묵직했다. 누가 들어도 신뢰가 싹틀 만큼 좋은 목소리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흑기사가 바깥으로 나갔다 들어왔다. 살짝 열린 문 사이로 텅 빈 복도가 보였다.
요나스의 이마에 차가운 게 닿았다. 언제 준비했는지 흑기사가 물에 젖은 손수건으로 의복 밖으로 드러난 피부를 꼼꼼히 닦았다. 궁인이 할 법한 일을 기사가 하고 있으니 웃음이 나려 했다.
웃음, 웃음이라. 요나스는 마지막으로 웃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지금의 그에겐 사치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잠시 주무십시오. 제가 안전하게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거친 손바닥이 눈을 가리고 다른 손이 천천히 등을 쓸었다. 흑기사의 말이 주문이라도 된 것처럼 졸음이 밀려왔다. 의식이 까무룩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부디 황자님께 에오카 여신의 축복이 깃들기를.”
축언과 함께 따뜻한 체온이 이마에 닿았던 것 같지만, 요나스는 확신할 수 없었다.
***
요나스는 며칠간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본 건 막스의 걱정 어린 얼굴이었다. 손을 뻗어 손등을 토닥이니 노시종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황궁의의 말로는 당분간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한답니다. 네페스하임 공작에겐 한동안 교육을 쉬겠다고 통보했습니다.”
“공작이 허락해 줄까?”
“황자님.”
막스가 엄격한 얼굴로 요나스의 손을 잡았다.
“누구도 황자님을 강압할 순 없습니다. 그 누가 에오카의 작은 태양이자 아레프의 정점에 선 분을 허락하고 말고 할까요. 황자님께선 자신의 위치를 명확하게 알고 계셔야 합니다.”
요나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위축된 마음 때문에 잊고 있었던 자신의 위치가 새삼 와닿았다. 그랬다. 그는 이제 황태자나 다름없는 신분이었다. 직계 황족이 하나도 남지 않은 이 상황에서 그가 성년식에서 이능을 받는 건 절대불변의 진리였다. 그 어떤 이도 그보다 우위에 설 순 없었다.
“무조건 쉬셔야 합니다. 절. 대. 안. 정. 아시겠지요?”
막스의 기백에 요나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꼼꼼히 이불을 정리한 막스가 시녀장을 불렀다. 린다를 비롯한 시녀들이 안으로 들어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침대 옆 협탁엔 숙면에 좋은 향초가, 품 안에는 따듯하게 데운 가죽 물주머니가, 맨발에는 털실로 짠 양말이 씌워졌다. 그 모든 게 순식간에 끝났다.
물끄러미 모든 걸 지켜보던 요나스가 작게 미소 지었다. 제국의 태양과 빛나던 황족 셋이 지고 그 혼자만이 남았다. 하지만 곁에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피가 이어지진 않았지만, 저들이야말로 그를 목숨 걸고 지킨 가족이었다.
창밖으로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붉게 물든 낙엽이 천천히 낙하했다. 가을은 한때 요나스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었지만, 이젠 가장 지옥 같은 계절이 되었다. 좋아하지 않았던 겨울이 빨리 오기를 바랄 정도였다. 눈이 쌓이고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면 모두가 숨을 죽이고 바깥출입을 자제했다. 그때가 되면 요나스도 숨을 돌릴 수 있을 터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방을 정비한 린다가 침대로 다가왔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린다.”
“예. 황자님.”
“고마워.”
“후후. 별말씀을요. 생각 같아선 네페스하임 각하를 확! ……아시죠?”
“응. 알아들었어.”
다소 무엄한 발언을 했음에도 린다는 개의치 않아 했다. 유모의 딸인 그녀는 요나스와 함께 자랐기에 다른 궁인보다는 좀 더 가까운 사이였다. 그녀의 손이 요나스의 눈을 덮었다. 잠이 들기 전 그는 문득 자신을 데려다줬을 흑기사를 떠올렸다. 조금은 특이했던 검은 기사를.
***
사방이 시끌벅적했다.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또래로 보이는 소녀였는데, 어린 시절의 린다임을 자연스레 깨달았다.
이것은 꿈인가.
가판대에 갖가지 물건을 올려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상인들의 소음, 곁눈질로 물건을 보는 행인의 분주한 걸음, 하늘로 연신 쏘아 올리는 폭죽까지. 주변이 무척이나 난잡했다. 요나스는 이곳이 수도 한복판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오늘만 구경하는 거예요. 몰래 나왔으니 조금만 놀다 돌아가는 거예요. 아셨죠, 황자님?”
“응!”
요나스의 입에서 앳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황궁에선 볼 수 없는 다양한 볼거리를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여신의 날 같은 대규모 축제는 어린 황자의 넋을 빼놓기 충분했다.
“황자님이 성인이 되시면 언제라도 볼 수 있어요. 물론 그때는 호위 기사가 줄줄이 따라붙겠지만요.”
한쪽 눈을 찡긋한 린다가 요나스의 손에 솜사탕을 쥐여 주었다.
“제 손을 놓으시면 안 돼요. 이렇게 큰 시장엔 소매치기도 있고 아이만 노리는 납치범들도 있어요. 저하고 떨어지면 크왕 하고 잡아가요.”
린다의 과장된 표정에 요나스가 겁을 잔뜩 집어먹었다. 잡은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머리 위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때, 시장의 소란스러움과는 다른 웅성거림이 들렸다. 호기심에 린다와 요나스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무리 안을 헤집고 들어가자 더러운 옷을 입은 소년이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독한 새끼. 퉤!”
사방에서 시선이 느껴지자 소년에게 발길질하던 사내가 침을 탁 뱉곤 골목 안쪽으로 사라졌다. 생소한 광경에 요나스가 린다의 뒤로 몸을 숨겼다. 누워 있던 소년이 작게 기침하며 눈을 떴다. 정처 없이 떠돌던 새까만 눈동자가 요나스에게 닿았다.
“여동생이…….”
아파.
아주 작은 소리였음에도 밀랍처럼 귀에 들러붙었다. 요나스는 자신도 모르게 린다의 손을 흔들었다.
“도와주면 안 될까?”
아이의 순수한 물음에 린다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요나스와 소년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소년에게 다가가 품에 무언가를 넣어 주었다.
“우리 주인의 호의에 감사하렴.”
돌아온 린다가 요나스의 손을 다시 잡았다.
“가요, 황자님.”
“응. ……앗!”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었다. 놀란 린다가 뒤로 벗겨지려는 요나스의 후드를 잡았다. 바람에 너울거리던 청발이 금세 후드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소년이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천천히 풍경이 이지러졌다. 어린 날의 추억도 이내 꿈속 저편으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