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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시간 3화
Chapter 1. 회귀 전, 비극 (2)
“황자님.”
뜻밖의 부름에 요나스의 몸이 굳었다. 귀족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회의를 마치고 퇴궁하던 길인지 통로 곳곳에 귀족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흥미로 가득한 그들의 시선이 둘에게 꽂혔다.
“에오카에 영광을. 황자님을 뵙습니다.”
“……내게 용건이 있는 건가?”
“그게……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주변 시선을 의식한 듯 귀족이 과장되게 몸짓했다. 뻐기는 듯한 표정에 요나스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한 걸음 성큼 다가온 귀족이 제 목에 닿은 검집에 흠칫했다.
“세 걸음.”
흑기사였다. 그는 손짓으로 요나스와 귀족의 거리를 가늠했다.
“황자님께서 허하기 전엔 지척으로 다가오면 안 됩니다.”
“아. 흠흠. 죄송합니다. 황자님.”
귀족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달아올랐다. 두 걸음 물러선 그는 지금 상황을 만회하려는지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 마녀의 장례를 치른다고 합니다.”
“……!”
요나스가 눈을 홉떴다. 나디아를 언급하는 귀족의 눈이 저열함으로 번들거렸다. 수도 한복판에서 고귀한 황녀가 산 채로 화형당했다. 모두가 칭송하던 토바즈빛 머리카락과 별빛이 흐르던 눈동자 모두 시뻘건 화염에 일그러져 재로 화했다. 요나스는 비열한 이리가 그의 마음을 헤집으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이를 악물고 평온한 신색을 유지했다.
“마녀가 화형당한 자리에 사람의 신장만 한 말뚝을 박았습니다. 신전이 큰 도움을 줬지요.”
그만둬.
“광장을 지나는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 침과 오물을 뱉고 지나갑니다.”
그만둬.
“제국의 꽃이 천민보다 못하게 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이 개자식.
“프레야 백작.”
청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제국 귀족 명부를 외웠기에 눈앞의 귀족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최근 수도에서 세를 불리고 있는 남부 출신의 브리엔 프레야 백작이었다.
“혹 마녀와 친밀한 사이였나?”
“예?”
프레야 백작이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제 예상과 달리 차분한 상대의 모습에 당황한 듯했다.
“이상한 일이군. 마녀는 제국의 태양을 떨어뜨린 반역자. 그런데 안타깝다? 백작의 사상이 의심스럽군.”
“아, 아닙니다! 이 브리엔 프레야. 위대한 황가에 결코 그 어떤 불온한 마음도 먹은 적 없습니다. 소신은 황가의 충실한 지지자입니다.”
“그렇다면 제 역할에 충실하라. 어리석은 처신이 저 이파리와도 같은 신세를 불러오지 않겠는가?”
요나스의 눈짓을 따라간 프레야 백작이 숨을 들이켰다. 정원 구석에 서서히 썩기 시작한 낙엽이 보였다.
“백작의 충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 마음을 의심하는 일이 없길 바라지. 황궁에는 누군지 알 수 없는 눈과 귀가 있어 의도와 다른 말이 퍼질 수도 있으니.”
나직한 경고는 프레야 백작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던 귀족들이 잽싸게 시선을 거뒀다.
“황자님의 자비로우신 조언을 이 프레야 백작,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뒤늦게 정신 차린 프레야 백작이 애써 미소 지었다. 그는 몸을 돌려 씩씩거리며 제 무리로 돌아갔다. 중앙 귀족이 된 지 얼마 안 된 자라 제 이름을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황궁에서 자란 사람치고 그런 얕은 수작에 넘어갈 이는 거의 없었다.
앞으로도 이런 식의 도발은 늘 있을 터였다. 성년식이 가까워질수록 더 심해질 게 명백했다. 황가의 치부로써 두고두고 조롱과 모욕의 대상이 될 나디아가 안타까웠다. 제국의 꽃이 이제는 창녀보다도 못한 신세가 된 것이다.
“……웁.”
복도 모퉁이를 돈 요나스가 정원 안쪽으로 뛰어갔다. 나무를 붙잡고 속을 게워 내니 멀건 침만 주룩 떨어졌다.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손으로 휘휘 내젓자 그의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기척이 멀어졌다.
나무 뒤로 돌아간 요나스가 돌연 뛰기 시작했다. 놀란 궁인들이 비명을 지르고 기사들이 바로 뒤쫓았다. 제 체력으론 얼마 못 가 잡힐 게 뻔했지만 지금 당장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하라고 명했다면 목숨을 걸고 이뤄 드렸을 겁니다.”
“……어?”
요나스의 몸이 들렸다. 누구보다 빠르게 따라잡은 흑기사가 그를 안아 올려 품 안에 가뒀다.
“어딜 가고 싶으십니까.”
“……수, 수도 광장. 대광장으로 가.”
“명대로.”
뒤에서 뭐라고 소리치는 게 들렸다. 걱정스레 흑기사를 올려다보니 그가 씩 웃었다.
“꽉 잡으십시오. 속도를 올릴 겁니다.”
빈말은 아닌지 요나스가 달리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주변 풍경이 휙휙 달라졌다. 비록 이능은 없지만, 황실 기사 대부분이 초인이라 불릴 만큼 극한의 수련을 거쳤다. 이능인도 아닌 이들에게 호위를 맡기는 이유가 있었다.
요나스는 흑기사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귓가에 스치는 바람이 상쾌했다. 제 다리는 아니었지만, 마치 그가 달리는 것처럼 해방감을 느꼈다.
“좋다.”
무심코 속마음이 나왔다.
“저도 좋습니다.”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살짝 붉어진 흑기사의 귓불을 본 것도 같지만, 요나스는 착각이라고 치부했다. 실제로 눈 한 번 깜빡이니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둘은 별다른 장애물 없이 황궁을 나올 수 있었다. 아직 소식이 닿지 않았는지 황궁을 나서는 흑의 기사단장을 막는 경비병은 없었다. 요나스는 점점 멀어지는 황궁을 보면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형제들이 죽지 않았다면 이렇게 도망치듯 나오는 게 아니라 당당히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새삼 제 처지가 암울했다.
그것은 광장의 한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마녀의 단죄는 단순히 처형하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두고두고 모욕을 준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원래는 평범한 장소였을 것이다. 오전이면 상점을 여는 상인으로 북적이고 오후면 여행자와 예술가, 휴식을 취하려는 수도 사람들의 쉼터였을 공간이다. 그런 공간의 한복판에 세워진 거대한 하얀 비석 주변엔 온갖 오물이 쌓여 있었다. 지저분한 오물과 달리 새하얗기만 한 몸체가 오히려 기괴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순간 휘청거리는 요나스의 등을 흑기사가 단단히 받쳤다.
“저것이 나디아의 무덤…….”
저토록 흉물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성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것이 제국 황녀의 무덤이었다. 흑기사는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금의 과장도 없이 사실을 전했다.
“황녀님의 재가 저 아래에 묻혀 있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국장이 끝나면 철거한다고 합니다.”
황족의 장례이되 마녀를 향한 심판이기도 했다. 백석을 치운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 광장 아래 묻힌 재는 제국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사람들의 발에 짓밟힐 것이다. 요나스는 이를 악물었다. 어디까지 나디아를 모욕할 셈인가. 있는지도 몰랐던 분노가 치솟았다.
“부수고 싶어.”
“…….”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어.”
이보다 더한 진심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디아를 묶어 두는 저 흉물을 박살 내고 싶었다.
한참을 지켜보던 요나스가 등을 돌렸다. 확인했으니 되었다. 마음 아프지만, 저 또한 방조했으니 제 죄라 여기고 살아갈 생각이었다.
“황자님.”
그런 그를 막은 건 흑기사였다.
“명하십시오.”
“뭘?”
“무엇이든.”
올곧은 흑기사의 눈에 요나스가 피식 웃었다. ‘무엇이든’이라. 말은 쉬웠다. 황족을 향한 황궁 기사의 맹목적인 충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요나스의 입에서 비꼬는 말이 튀어나왔다.
“저걸 부숴 달라고 해도 할 수 있어?”
말을 내뱉고 나서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화풀이할 대상이 틀렸다. 그가 원망할 대사는 눈앞의 충직한 기사가 아니었다. 불공평하게 돌아가는 세상과 그 자신이었다.
“황자님. 잠시 이리로…….”
흑기사는 별말 없이 요나스를 이끌었다. 분수대 근처에 있는 의자에 그를 앉힌 후 몸을 감싼 후드를 꼼꼼히 다시 여몄다. 그리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요나스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걸 가지고 계십시오.”
“……?”
은세공이 세밀하게 양각된 단검과 새까만 돌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조합에 요나스의 눈이 궁금증으로 물들었다.
“이 돌은 알람 마석입니다. 타인의 살기를 감지하니 꼭 쥐고 있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깨트리십시오. 제게 연락이 옵니다. 그리고 단검은 호신용입니다.”
“이걸 왜 나한테 주지?”
“제가 누차 말하지 않았습니까. 황자님이 원하신다면 무엇이든 이뤄 드릴 겁니다. 그게 황족을 모시는 기사의 존재 이유입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흑기사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놀란 요나스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이었다. 쾅! 하고 폭발음이 들렸다.
“헉! 저게 뭐야?”
광장에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곳엔 후드를 입은 어떤 인영이 다리를 뻗고 있었는데 그 앞에 있는 백석의 몸체에 금이 쫙 가 있었다.
“흐억!”
“꺄아악!”
오물을 던지던 이들이 도망가고 멀리서 지켜보던 이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쾅! 콰앙! 쾅!
한 번이 아니었다. 수차례 발길질을 하자 백석이 산산이 부서졌다. 돌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요나스는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누군지 모를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제 앞에 있던 흑기사였다.
삑! 삐이이-익!
뒤늦게 치안대가 출동했다. 가루가 되도록 돌을 부수던 남자가 치안대의 반대편으로 달렸다. 순식간에 사라진 그의 뒤에 남은 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돌가루뿐이었다.
“하…… 하하…….”
요나스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무 놀라면 오히려 덤덤해지는 모양이었다. 신의 창이라 했다. 마녀가 죽어서도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하는 말뚝이기도 했다. 그런 게 단번에 부서졌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황자님.”
흠칫 놀란 요나스가 고개를 돌렸다. 후드를 버리고 왔는지 기사 정복을 드러낸 흑기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나스에게 다가오려던 치안대가 흑기사의 옷을 보곤 다른 곳으로 향했다.
“시간이 부족해서 마무리를 못 한 게 아쉽습니다.”
너무 부순 것 같은데? 기함한 요나스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물들었다.
“어차피 다시 세워질 거야.”
“그럼 또 부술까요?”
어째 흑기사의 뒤로 대형견의 환영이 보였다. 그가 무척 순종적인 눈을 하고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요나스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 정도로 충분해.”
비록 백석이 다시 세워지겠지만, 한동안은 나디아의 영혼이 평안을 찾을 터였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궁으로 돌아가자.”
“예. 모시겠습니다.”
“아니, 그냥 걸어갈…….”
‘생각이었는데’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요나스를 번쩍 안은 흑기사가 광장을 벗어났다. 어쩐지 그 품이 눈물이 날 만큼 무척이나 따뜻했다.
밤이 오기 전, 개와 늑대의 시간에 요나스는 황궁으로 귀환했다.
“죄인입니다.”
“막스. 내가 가자고 했어.”
“황족을 납치한 죄는 가볍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갚아야 합니다.”
막스의 눈이 단호하게 빛났다. 황궁으로 귀환하자마자 다른 기사들에게 결박된 흑기사를 보며 요나스가 막스의 팔을 잡았다.
“부탁이야.”
“황자님. 이대로 넘어갈 순 없습니다.”
“……명령이야.”
기어코 하고 싶지 않은 말까지 나왔다. 잠시 침묵하던 막스가 한발 물러섰다.
“명이시라면. 하지만 벌은 받아야 합니다. 그게 궁의 질서입니다.”
“과하지 않다면.”
고개를 끄덕인 막스가 손짓으로 흑기사를 풀어 주었다. 제 목숨이 사라질 뻔한 상황이었는데도 흑기사는 담담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요나스를 보며 살짝 웃기까지 했다.
“몸이 많이 굳으셨을 테니 목욕물을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응.”
기사들을 비롯해 막스와 궁인들까지 사라지자 내부가 텅 비었다. 요나스는 창밖으로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을 보았다. 어쩐지 마음이 개운했다.
***
황제가 제국의 주인이긴 하나 드넓은 대륙을 그 혼자서 다스릴 순 없었다. 그리하여 동서남북의 각 지역엔 대귀족이 존재했고 중소귀족이 모인 동부를 제외한 서남북에선 삼공작이 그 위치에 있었다. 그중 네페스하임 공작은 북의 군주이자 용으로 변이하는 이능을 지녀 용공작이라고도 불렸다.
“지난주의 내용을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성년식을 앞둔 황자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제국의 초대 황제는 에오카 여신과 인간의 혼혈로서 이능을 하나밖에 쓰지 못하는 제국민과 달리 총 세 개의 이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두 개의 이능이 세습적으로 내려오고 나머지 하나는 성년식 때 부여됩니다. 세습되는 능력은 천리안과 방어입니다. 그리고 세 가지 모두 성년식 이후에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단은 스승이기 때문에 요나스는 공작에게 공대했다. 가만히 듣던 공작이 눈짓으로 다음 말을 재촉했다.
“이능이 세습되는 건 아니지만 일반 귀족가 중에도 빈번하게 이능이 발현되는 가문이 있는 건 조상 중에 황실의 피가 섞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능의 힘은 에오카인이 아니면, 그리고 성년식을 치르지 않으면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능의 속성에 관해 설명해 보십시오.”
“이능은 대가형과 한계형이 있습니다. 황가를 예로 들자면 천리안은 대가형으로 오래 사용하면 그만큼 눈이 보이지 않고 방어는 한계형으로 목숨이 위험할 만큼의 위협이 아니면 발동되지 않습니다.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이유로는 인간의 몸으론 신의 힘을 완벽히 다룰 수 없다는 추측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그만 되었습니다. 이제 오늘치 교육을 시작하겠습니다.”
요나스는 양피지를 펼치고 깃펜을 들었다. 공작의 교육은 무척 딱딱했다. 뜻을 풀이하는 것보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식이었기에 내용을 죽 적은 후 반복 학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교육은 두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정해진 분량을 마친 공작이 가만히 요나스를 응시했다.
“황자님.”
“예. 스승님.”
“이제 곧 성년식을 치르겠군요.”
“이제 4일 남았습니다.”
둘둘 만 양피지와 깃펜을 궁인에게 건넨 요나스가 공작을 마주 응시했다. 사담 따윈 하지 않는 사람이다 보니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습니다. 매일 하나씩만 낳아도 주인은 풍족하게 먹고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거위의 주인은 욕심을 냅니다. 저것의 배를 가르면 더 많은 황금알이 있지 않을까. 더 빨리 부자가 되지 않을까.”
“…….”
“하지만 배를 갈라 봤자 그 속에 든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
“그리고 주인은 커다란 대가를 치르게 되겠죠.”
제국의 아이들이라면 모두가 아는 동화였다. 탐욕의 대가는 불행이라는 교훈을 담은 이야기였다.
“지성체가 아닌 짐승은 순리를 거스르지 않지만, 인간이란 짐승은 다릅니다. 때론 눈앞의 먹이에 홀려 선을 넘고 맙니다.”
네페스하임 공작의 동공이 가로로 길게 찢어지고 홍채가 세로로 수축했다. 용의 눈이었다.
“거대한 권력이 흔들리면 부나방이 꼬이지 않겠습니까.”
그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따라 일어난 요나스가 굳은 표정으로 먼저 자리를 떴다. 등 뒤로 따라붙은 시선이 오한이 일 만큼 집요했다.
“막스!”
요나스는 사피어어궁으로 돌아와 다급하게 막스를 찾았다. 당황하는 노시종을 끌고 침실로 들어가 공작의 내밀한 암호를 전했다.
“아무래도 곧 습격이 있을 것 같아.”
“무도한 자들이 감히.”
황금알을 가진 거위와 탐욕스러운 주인. 누구를 가리키는지 뻔했다. 거위는 요나스였고 주인은 귀족들이었다.
이능을 세 개나 부리는 황제는 에오카 제국의 살아 있는 신이다. 모두가 황제를 우러르고 누구도 그 권력을 탐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황제는 죽었고 성년식을 치른 황태자와 이황자도 죽었다. 거기에 황녀까지 처리했으니 남은 건 아직 성년식도 맞지 못한 나약한 삼황자 뿐이었다.
“성년식이 지나면 늦어. 그땐 내가 이능을 가지고 있을 때니까. 하지만 그 전에 처리하면 그들의 입맛에 맞는 황제를 세울 수 있지. 황제가 이능을 부리는 건 국가적 행사 때뿐이니 다른 이능인의 능력으로 제국민을 속일 수도 있고.”
“아르나시아 공작이 주도한 걸 겁니다. 그가 밀었던 이황자와 차선책이었던 황녀 모두 죽었으니 다음 수를 생각해 낸 모양이군요.”
“이미 준비가 끝났을 거야. 이틀 후에 네페스하임 공작이 황궁을 떠나니 그들이 공격한다면 성년식 하루 전이겠지.”
“공작에게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그가 이 말을 해 준 게 무슨 의미겠어? 방관한다는 거겠지.”
“……이런.”
용공작이 황궁에 있는 한은 누구도 요나스를 건드릴 수 없었다. 누가 용과 맞서겠는가. 그러니 그가 자리를 비우는 단 하루에 총력을 쏟아부을 게 뻔했다.
“방법을 생각해야 해. 방법을…….”
요나스는 초조하게 방 안을 배회하며 생각에 잠겼다. 효과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적에게 경고하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
“아.”
날이 밝을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새운 요나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래. 배를 가르기 전에 스스로 가르면 돼. 그러면 저들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황지님?”
“막스.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과격한 방법이긴 하지만 효과는 클 터였다. 요나스를 보던 막스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막스?”
“조금 변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
“예. 좋은 쪽으로 변하셨습니다.”
요나스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로선 달라진 점을 잘 모르겠지만, 변한 이유의 원인으로 짐작 가는 건 있었다. 그는 백석을 때려 부수던 흑기사를 떠올렸다. 그 이후로 묵직하게 얹혀 있던 응어리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게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온 것일 테다. 어쩐지 웃음이 나올 듯해 입술을 꽉 물었다.
“황자님. 제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막스의 말에 정신 차린 요나스가 필요한 것을 천천히 나열했다. 노시종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
성년식을 하루 앞둔 밤.
오지 않길 바란 날이 왔다. 혹시나 해 지난 이틀 동안에도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위험할 거라 예상한 오늘, 불길한 추측이 적중했다. 어둠의 피조물처럼 몸을 흑의로 감싼 수많은 자객이 사파이어 궁으로 짓쳐 들었다. 탐욕스러운 이리와 승냥이의 주구들이었다.
“막스. 준비는?”
“단단히 밀봉해서 냄새조차 나지 않을 것입니다.”
“대피는 다 했겠지?”
“예. 기사들을 제외하고 모두 토파즈 궁으로 보냈습니다.”
요나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녀의 궁이라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곳이니 궁인들은 안전할 것이다. 그도 일을 마치면 그쪽에 합류할 생각이었다.
“호위 기사들을 불러.”
“예. 황자님.”
요나스는 품에서 알람 마석을 꺼냈다. 경고로 붉은빛을 내뿜는 그것을 바닥으로 힘껏 내던졌다. 파삭 깨진 마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쩐지 흑기사를 빨리 보고 싶었다.
그때, 나갔던 막스가 다급하게 돌아왔다.
“황자님!”
“막스?”
“배신입니다! 호위 기사가 한 명도 없습니다!”
“없, 다니?”
“원래는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 명도 보이질 않습니다.”
맙소사. 다섯 명이 모두 배신을 했단 말인가.
요나스는 현기증이 일었다. 황궁 기사는 집안 내력을 비롯해 출신지까지 여러 가지를 꼼꼼하게 따진 후에야 선별했다. 그런 철저한 틈을 통과하고 들어온 이들 모두 귀족의 끄나풀이었을 줄이야. 처음부터 그랬는지 후일 변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막중한 순간에 제 주인을 배신했다는 게 문제였다.
요나스는 제게 심장이라도 떼 줄 듯이 굴었던 흑기사를 떠올렸다. 정말 대단한 자였다. 그런 얼굴로, 그런 눈으로 사람을 홀렸다. 넘어간 자신의 잘못도 있지만, 진심이라 믿을 만큼 매 순간 저에게 최선을 다한 자였다. 어찌 안 믿을 수 있을까. 다른 기사의 배신보다 더 뼈아팠다.
“……어차피 변하는 건 없어. 바로 실행해.”
“예. 황자님.”
막스가 급하게 1층으로 내려갔다. 그가 적을 만나지 않길 바라며 요나스는 창가로 다가갔다. 무기가 부딪치는 금속음이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죽어 갈 제 기사들을 떠올리니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하라!”
누군가의 외침과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내부까지 침범한 모양이었다. 요나스가 있는 곳은 사파이어 궁에서도 가장 외진 방이었다. 이곳까지 도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터였다.
그는 협탁 위의 병을 들어 밀봉지를 찢었다. 그리고 창밖으로 연결된 가느다란 줄에 부었다. 끈적한 기름이 줄을 따라 궁 외벽으로 흘러내렸다.
쾅!
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놀란 요나스가 문 쪽을 쳐다봤다. 아직 불을 붙이지도 못했다. 안으로 들어온 두 명의 복면인이 지체없이 요나스에게 검을 휘둘렀다. 본능적으로 피한 요나스가 불붙인 촛대를 꽉 쥐었다.
“기름?”
침입자들이 뒤늦게 기름 냄새를 맡았다. 복면인 하나가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자칫 일이 틀어질 것 같아 요나스는 무작정 몸을 날렸다. 남은 복면인이 빛살처럼 그에게 검을 휘둘렀다.
Chapter 1. 회귀 전, 비극 (2)
“황자님.”
뜻밖의 부름에 요나스의 몸이 굳었다. 귀족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회의를 마치고 퇴궁하던 길인지 통로 곳곳에 귀족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흥미로 가득한 그들의 시선이 둘에게 꽂혔다.
“에오카에 영광을. 황자님을 뵙습니다.”
“……내게 용건이 있는 건가?”
“그게……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주변 시선을 의식한 듯 귀족이 과장되게 몸짓했다. 뻐기는 듯한 표정에 요나스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한 걸음 성큼 다가온 귀족이 제 목에 닿은 검집에 흠칫했다.
“세 걸음.”
흑기사였다. 그는 손짓으로 요나스와 귀족의 거리를 가늠했다.
“황자님께서 허하기 전엔 지척으로 다가오면 안 됩니다.”
“아. 흠흠. 죄송합니다. 황자님.”
귀족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달아올랐다. 두 걸음 물러선 그는 지금 상황을 만회하려는지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 마녀의 장례를 치른다고 합니다.”
“……!”
요나스가 눈을 홉떴다. 나디아를 언급하는 귀족의 눈이 저열함으로 번들거렸다. 수도 한복판에서 고귀한 황녀가 산 채로 화형당했다. 모두가 칭송하던 토바즈빛 머리카락과 별빛이 흐르던 눈동자 모두 시뻘건 화염에 일그러져 재로 화했다. 요나스는 비열한 이리가 그의 마음을 헤집으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이를 악물고 평온한 신색을 유지했다.
“마녀가 화형당한 자리에 사람의 신장만 한 말뚝을 박았습니다. 신전이 큰 도움을 줬지요.”
그만둬.
“광장을 지나는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 침과 오물을 뱉고 지나갑니다.”
그만둬.
“제국의 꽃이 천민보다 못하게 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이 개자식.
“프레야 백작.”
청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제국 귀족 명부를 외웠기에 눈앞의 귀족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최근 수도에서 세를 불리고 있는 남부 출신의 브리엔 프레야 백작이었다.
“혹 마녀와 친밀한 사이였나?”
“예?”
프레야 백작이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제 예상과 달리 차분한 상대의 모습에 당황한 듯했다.
“이상한 일이군. 마녀는 제국의 태양을 떨어뜨린 반역자. 그런데 안타깝다? 백작의 사상이 의심스럽군.”
“아, 아닙니다! 이 브리엔 프레야. 위대한 황가에 결코 그 어떤 불온한 마음도 먹은 적 없습니다. 소신은 황가의 충실한 지지자입니다.”
“그렇다면 제 역할에 충실하라. 어리석은 처신이 저 이파리와도 같은 신세를 불러오지 않겠는가?”
요나스의 눈짓을 따라간 프레야 백작이 숨을 들이켰다. 정원 구석에 서서히 썩기 시작한 낙엽이 보였다.
“백작의 충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 마음을 의심하는 일이 없길 바라지. 황궁에는 누군지 알 수 없는 눈과 귀가 있어 의도와 다른 말이 퍼질 수도 있으니.”
나직한 경고는 프레야 백작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던 귀족들이 잽싸게 시선을 거뒀다.
“황자님의 자비로우신 조언을 이 프레야 백작,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뒤늦게 정신 차린 프레야 백작이 애써 미소 지었다. 그는 몸을 돌려 씩씩거리며 제 무리로 돌아갔다. 중앙 귀족이 된 지 얼마 안 된 자라 제 이름을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황궁에서 자란 사람치고 그런 얕은 수작에 넘어갈 이는 거의 없었다.
앞으로도 이런 식의 도발은 늘 있을 터였다. 성년식이 가까워질수록 더 심해질 게 명백했다. 황가의 치부로써 두고두고 조롱과 모욕의 대상이 될 나디아가 안타까웠다. 제국의 꽃이 이제는 창녀보다도 못한 신세가 된 것이다.
“……웁.”
복도 모퉁이를 돈 요나스가 정원 안쪽으로 뛰어갔다. 나무를 붙잡고 속을 게워 내니 멀건 침만 주룩 떨어졌다.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손으로 휘휘 내젓자 그의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기척이 멀어졌다.
나무 뒤로 돌아간 요나스가 돌연 뛰기 시작했다. 놀란 궁인들이 비명을 지르고 기사들이 바로 뒤쫓았다. 제 체력으론 얼마 못 가 잡힐 게 뻔했지만 지금 당장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하라고 명했다면 목숨을 걸고 이뤄 드렸을 겁니다.”
“……어?”
요나스의 몸이 들렸다. 누구보다 빠르게 따라잡은 흑기사가 그를 안아 올려 품 안에 가뒀다.
“어딜 가고 싶으십니까.”
“……수, 수도 광장. 대광장으로 가.”
“명대로.”
뒤에서 뭐라고 소리치는 게 들렸다. 걱정스레 흑기사를 올려다보니 그가 씩 웃었다.
“꽉 잡으십시오. 속도를 올릴 겁니다.”
빈말은 아닌지 요나스가 달리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주변 풍경이 휙휙 달라졌다. 비록 이능은 없지만, 황실 기사 대부분이 초인이라 불릴 만큼 극한의 수련을 거쳤다. 이능인도 아닌 이들에게 호위를 맡기는 이유가 있었다.
요나스는 흑기사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귓가에 스치는 바람이 상쾌했다. 제 다리는 아니었지만, 마치 그가 달리는 것처럼 해방감을 느꼈다.
“좋다.”
무심코 속마음이 나왔다.
“저도 좋습니다.”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살짝 붉어진 흑기사의 귓불을 본 것도 같지만, 요나스는 착각이라고 치부했다. 실제로 눈 한 번 깜빡이니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둘은 별다른 장애물 없이 황궁을 나올 수 있었다. 아직 소식이 닿지 않았는지 황궁을 나서는 흑의 기사단장을 막는 경비병은 없었다. 요나스는 점점 멀어지는 황궁을 보면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형제들이 죽지 않았다면 이렇게 도망치듯 나오는 게 아니라 당당히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새삼 제 처지가 암울했다.
그것은 광장의 한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마녀의 단죄는 단순히 처형하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두고두고 모욕을 준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원래는 평범한 장소였을 것이다. 오전이면 상점을 여는 상인으로 북적이고 오후면 여행자와 예술가, 휴식을 취하려는 수도 사람들의 쉼터였을 공간이다. 그런 공간의 한복판에 세워진 거대한 하얀 비석 주변엔 온갖 오물이 쌓여 있었다. 지저분한 오물과 달리 새하얗기만 한 몸체가 오히려 기괴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순간 휘청거리는 요나스의 등을 흑기사가 단단히 받쳤다.
“저것이 나디아의 무덤…….”
저토록 흉물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성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것이 제국 황녀의 무덤이었다. 흑기사는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금의 과장도 없이 사실을 전했다.
“황녀님의 재가 저 아래에 묻혀 있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국장이 끝나면 철거한다고 합니다.”
황족의 장례이되 마녀를 향한 심판이기도 했다. 백석을 치운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 광장 아래 묻힌 재는 제국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사람들의 발에 짓밟힐 것이다. 요나스는 이를 악물었다. 어디까지 나디아를 모욕할 셈인가. 있는지도 몰랐던 분노가 치솟았다.
“부수고 싶어.”
“…….”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어.”
이보다 더한 진심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디아를 묶어 두는 저 흉물을 박살 내고 싶었다.
한참을 지켜보던 요나스가 등을 돌렸다. 확인했으니 되었다. 마음 아프지만, 저 또한 방조했으니 제 죄라 여기고 살아갈 생각이었다.
“황자님.”
그런 그를 막은 건 흑기사였다.
“명하십시오.”
“뭘?”
“무엇이든.”
올곧은 흑기사의 눈에 요나스가 피식 웃었다. ‘무엇이든’이라. 말은 쉬웠다. 황족을 향한 황궁 기사의 맹목적인 충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요나스의 입에서 비꼬는 말이 튀어나왔다.
“저걸 부숴 달라고 해도 할 수 있어?”
말을 내뱉고 나서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화풀이할 대상이 틀렸다. 그가 원망할 대사는 눈앞의 충직한 기사가 아니었다. 불공평하게 돌아가는 세상과 그 자신이었다.
“황자님. 잠시 이리로…….”
흑기사는 별말 없이 요나스를 이끌었다. 분수대 근처에 있는 의자에 그를 앉힌 후 몸을 감싼 후드를 꼼꼼히 다시 여몄다. 그리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요나스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걸 가지고 계십시오.”
“……?”
은세공이 세밀하게 양각된 단검과 새까만 돌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조합에 요나스의 눈이 궁금증으로 물들었다.
“이 돌은 알람 마석입니다. 타인의 살기를 감지하니 꼭 쥐고 있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깨트리십시오. 제게 연락이 옵니다. 그리고 단검은 호신용입니다.”
“이걸 왜 나한테 주지?”
“제가 누차 말하지 않았습니까. 황자님이 원하신다면 무엇이든 이뤄 드릴 겁니다. 그게 황족을 모시는 기사의 존재 이유입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흑기사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놀란 요나스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이었다. 쾅! 하고 폭발음이 들렸다.
“헉! 저게 뭐야?”
광장에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곳엔 후드를 입은 어떤 인영이 다리를 뻗고 있었는데 그 앞에 있는 백석의 몸체에 금이 쫙 가 있었다.
“흐억!”
“꺄아악!”
오물을 던지던 이들이 도망가고 멀리서 지켜보던 이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쾅! 콰앙! 쾅!
한 번이 아니었다. 수차례 발길질을 하자 백석이 산산이 부서졌다. 돌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요나스는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누군지 모를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제 앞에 있던 흑기사였다.
삑! 삐이이-익!
뒤늦게 치안대가 출동했다. 가루가 되도록 돌을 부수던 남자가 치안대의 반대편으로 달렸다. 순식간에 사라진 그의 뒤에 남은 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돌가루뿐이었다.
“하…… 하하…….”
요나스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무 놀라면 오히려 덤덤해지는 모양이었다. 신의 창이라 했다. 마녀가 죽어서도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하는 말뚝이기도 했다. 그런 게 단번에 부서졌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황자님.”
흠칫 놀란 요나스가 고개를 돌렸다. 후드를 버리고 왔는지 기사 정복을 드러낸 흑기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나스에게 다가오려던 치안대가 흑기사의 옷을 보곤 다른 곳으로 향했다.
“시간이 부족해서 마무리를 못 한 게 아쉽습니다.”
너무 부순 것 같은데? 기함한 요나스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물들었다.
“어차피 다시 세워질 거야.”
“그럼 또 부술까요?”
어째 흑기사의 뒤로 대형견의 환영이 보였다. 그가 무척 순종적인 눈을 하고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요나스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 정도로 충분해.”
비록 백석이 다시 세워지겠지만, 한동안은 나디아의 영혼이 평안을 찾을 터였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궁으로 돌아가자.”
“예. 모시겠습니다.”
“아니, 그냥 걸어갈…….”
‘생각이었는데’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요나스를 번쩍 안은 흑기사가 광장을 벗어났다. 어쩐지 그 품이 눈물이 날 만큼 무척이나 따뜻했다.
밤이 오기 전, 개와 늑대의 시간에 요나스는 황궁으로 귀환했다.
“죄인입니다.”
“막스. 내가 가자고 했어.”
“황족을 납치한 죄는 가볍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갚아야 합니다.”
막스의 눈이 단호하게 빛났다. 황궁으로 귀환하자마자 다른 기사들에게 결박된 흑기사를 보며 요나스가 막스의 팔을 잡았다.
“부탁이야.”
“황자님. 이대로 넘어갈 순 없습니다.”
“……명령이야.”
기어코 하고 싶지 않은 말까지 나왔다. 잠시 침묵하던 막스가 한발 물러섰다.
“명이시라면. 하지만 벌은 받아야 합니다. 그게 궁의 질서입니다.”
“과하지 않다면.”
고개를 끄덕인 막스가 손짓으로 흑기사를 풀어 주었다. 제 목숨이 사라질 뻔한 상황이었는데도 흑기사는 담담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요나스를 보며 살짝 웃기까지 했다.
“몸이 많이 굳으셨을 테니 목욕물을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응.”
기사들을 비롯해 막스와 궁인들까지 사라지자 내부가 텅 비었다. 요나스는 창밖으로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을 보았다. 어쩐지 마음이 개운했다.
***
황제가 제국의 주인이긴 하나 드넓은 대륙을 그 혼자서 다스릴 순 없었다. 그리하여 동서남북의 각 지역엔 대귀족이 존재했고 중소귀족이 모인 동부를 제외한 서남북에선 삼공작이 그 위치에 있었다. 그중 네페스하임 공작은 북의 군주이자 용으로 변이하는 이능을 지녀 용공작이라고도 불렸다.
“지난주의 내용을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성년식을 앞둔 황자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제국의 초대 황제는 에오카 여신과 인간의 혼혈로서 이능을 하나밖에 쓰지 못하는 제국민과 달리 총 세 개의 이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두 개의 이능이 세습적으로 내려오고 나머지 하나는 성년식 때 부여됩니다. 세습되는 능력은 천리안과 방어입니다. 그리고 세 가지 모두 성년식 이후에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단은 스승이기 때문에 요나스는 공작에게 공대했다. 가만히 듣던 공작이 눈짓으로 다음 말을 재촉했다.
“이능이 세습되는 건 아니지만 일반 귀족가 중에도 빈번하게 이능이 발현되는 가문이 있는 건 조상 중에 황실의 피가 섞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능의 힘은 에오카인이 아니면, 그리고 성년식을 치르지 않으면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능의 속성에 관해 설명해 보십시오.”
“이능은 대가형과 한계형이 있습니다. 황가를 예로 들자면 천리안은 대가형으로 오래 사용하면 그만큼 눈이 보이지 않고 방어는 한계형으로 목숨이 위험할 만큼의 위협이 아니면 발동되지 않습니다.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이유로는 인간의 몸으론 신의 힘을 완벽히 다룰 수 없다는 추측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그만 되었습니다. 이제 오늘치 교육을 시작하겠습니다.”
요나스는 양피지를 펼치고 깃펜을 들었다. 공작의 교육은 무척 딱딱했다. 뜻을 풀이하는 것보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식이었기에 내용을 죽 적은 후 반복 학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교육은 두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정해진 분량을 마친 공작이 가만히 요나스를 응시했다.
“황자님.”
“예. 스승님.”
“이제 곧 성년식을 치르겠군요.”
“이제 4일 남았습니다.”
둘둘 만 양피지와 깃펜을 궁인에게 건넨 요나스가 공작을 마주 응시했다. 사담 따윈 하지 않는 사람이다 보니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습니다. 매일 하나씩만 낳아도 주인은 풍족하게 먹고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거위의 주인은 욕심을 냅니다. 저것의 배를 가르면 더 많은 황금알이 있지 않을까. 더 빨리 부자가 되지 않을까.”
“…….”
“하지만 배를 갈라 봤자 그 속에 든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
“그리고 주인은 커다란 대가를 치르게 되겠죠.”
제국의 아이들이라면 모두가 아는 동화였다. 탐욕의 대가는 불행이라는 교훈을 담은 이야기였다.
“지성체가 아닌 짐승은 순리를 거스르지 않지만, 인간이란 짐승은 다릅니다. 때론 눈앞의 먹이에 홀려 선을 넘고 맙니다.”
네페스하임 공작의 동공이 가로로 길게 찢어지고 홍채가 세로로 수축했다. 용의 눈이었다.
“거대한 권력이 흔들리면 부나방이 꼬이지 않겠습니까.”
그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따라 일어난 요나스가 굳은 표정으로 먼저 자리를 떴다. 등 뒤로 따라붙은 시선이 오한이 일 만큼 집요했다.
“막스!”
요나스는 사피어어궁으로 돌아와 다급하게 막스를 찾았다. 당황하는 노시종을 끌고 침실로 들어가 공작의 내밀한 암호를 전했다.
“아무래도 곧 습격이 있을 것 같아.”
“무도한 자들이 감히.”
황금알을 가진 거위와 탐욕스러운 주인. 누구를 가리키는지 뻔했다. 거위는 요나스였고 주인은 귀족들이었다.
이능을 세 개나 부리는 황제는 에오카 제국의 살아 있는 신이다. 모두가 황제를 우러르고 누구도 그 권력을 탐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황제는 죽었고 성년식을 치른 황태자와 이황자도 죽었다. 거기에 황녀까지 처리했으니 남은 건 아직 성년식도 맞지 못한 나약한 삼황자 뿐이었다.
“성년식이 지나면 늦어. 그땐 내가 이능을 가지고 있을 때니까. 하지만 그 전에 처리하면 그들의 입맛에 맞는 황제를 세울 수 있지. 황제가 이능을 부리는 건 국가적 행사 때뿐이니 다른 이능인의 능력으로 제국민을 속일 수도 있고.”
“아르나시아 공작이 주도한 걸 겁니다. 그가 밀었던 이황자와 차선책이었던 황녀 모두 죽었으니 다음 수를 생각해 낸 모양이군요.”
“이미 준비가 끝났을 거야. 이틀 후에 네페스하임 공작이 황궁을 떠나니 그들이 공격한다면 성년식 하루 전이겠지.”
“공작에게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그가 이 말을 해 준 게 무슨 의미겠어? 방관한다는 거겠지.”
“……이런.”
용공작이 황궁에 있는 한은 누구도 요나스를 건드릴 수 없었다. 누가 용과 맞서겠는가. 그러니 그가 자리를 비우는 단 하루에 총력을 쏟아부을 게 뻔했다.
“방법을 생각해야 해. 방법을…….”
요나스는 초조하게 방 안을 배회하며 생각에 잠겼다. 효과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적에게 경고하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
“아.”
날이 밝을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새운 요나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래. 배를 가르기 전에 스스로 가르면 돼. 그러면 저들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황지님?”
“막스.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과격한 방법이긴 하지만 효과는 클 터였다. 요나스를 보던 막스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막스?”
“조금 변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
“예. 좋은 쪽으로 변하셨습니다.”
요나스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로선 달라진 점을 잘 모르겠지만, 변한 이유의 원인으로 짐작 가는 건 있었다. 그는 백석을 때려 부수던 흑기사를 떠올렸다. 그 이후로 묵직하게 얹혀 있던 응어리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게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온 것일 테다. 어쩐지 웃음이 나올 듯해 입술을 꽉 물었다.
“황자님. 제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막스의 말에 정신 차린 요나스가 필요한 것을 천천히 나열했다. 노시종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
성년식을 하루 앞둔 밤.
오지 않길 바란 날이 왔다. 혹시나 해 지난 이틀 동안에도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위험할 거라 예상한 오늘, 불길한 추측이 적중했다. 어둠의 피조물처럼 몸을 흑의로 감싼 수많은 자객이 사파이어 궁으로 짓쳐 들었다. 탐욕스러운 이리와 승냥이의 주구들이었다.
“막스. 준비는?”
“단단히 밀봉해서 냄새조차 나지 않을 것입니다.”
“대피는 다 했겠지?”
“예. 기사들을 제외하고 모두 토파즈 궁으로 보냈습니다.”
요나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녀의 궁이라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곳이니 궁인들은 안전할 것이다. 그도 일을 마치면 그쪽에 합류할 생각이었다.
“호위 기사들을 불러.”
“예. 황자님.”
요나스는 품에서 알람 마석을 꺼냈다. 경고로 붉은빛을 내뿜는 그것을 바닥으로 힘껏 내던졌다. 파삭 깨진 마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쩐지 흑기사를 빨리 보고 싶었다.
그때, 나갔던 막스가 다급하게 돌아왔다.
“황자님!”
“막스?”
“배신입니다! 호위 기사가 한 명도 없습니다!”
“없, 다니?”
“원래는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 명도 보이질 않습니다.”
맙소사. 다섯 명이 모두 배신을 했단 말인가.
요나스는 현기증이 일었다. 황궁 기사는 집안 내력을 비롯해 출신지까지 여러 가지를 꼼꼼하게 따진 후에야 선별했다. 그런 철저한 틈을 통과하고 들어온 이들 모두 귀족의 끄나풀이었을 줄이야. 처음부터 그랬는지 후일 변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막중한 순간에 제 주인을 배신했다는 게 문제였다.
요나스는 제게 심장이라도 떼 줄 듯이 굴었던 흑기사를 떠올렸다. 정말 대단한 자였다. 그런 얼굴로, 그런 눈으로 사람을 홀렸다. 넘어간 자신의 잘못도 있지만, 진심이라 믿을 만큼 매 순간 저에게 최선을 다한 자였다. 어찌 안 믿을 수 있을까. 다른 기사의 배신보다 더 뼈아팠다.
“……어차피 변하는 건 없어. 바로 실행해.”
“예. 황자님.”
막스가 급하게 1층으로 내려갔다. 그가 적을 만나지 않길 바라며 요나스는 창가로 다가갔다. 무기가 부딪치는 금속음이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죽어 갈 제 기사들을 떠올리니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하라!”
누군가의 외침과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내부까지 침범한 모양이었다. 요나스가 있는 곳은 사파이어 궁에서도 가장 외진 방이었다. 이곳까지 도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터였다.
그는 협탁 위의 병을 들어 밀봉지를 찢었다. 그리고 창밖으로 연결된 가느다란 줄에 부었다. 끈적한 기름이 줄을 따라 궁 외벽으로 흘러내렸다.
쾅!
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놀란 요나스가 문 쪽을 쳐다봤다. 아직 불을 붙이지도 못했다. 안으로 들어온 두 명의 복면인이 지체없이 요나스에게 검을 휘둘렀다. 본능적으로 피한 요나스가 불붙인 촛대를 꽉 쥐었다.
“기름?”
침입자들이 뒤늦게 기름 냄새를 맡았다. 복면인 하나가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자칫 일이 틀어질 것 같아 요나스는 무작정 몸을 날렸다. 남은 복면인이 빛살처럼 그에게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