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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그녀의 결혼식


대지를 태울 듯 강렬하게 타오르던 태양의 기세가 수그러들고 계절은 이제 성숙하고 깊어진 색채를 자랑하는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때문에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하고 낮엔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볕이 좋은 날씨가 이어졌다.
그런 축복받은 계절과 날씨에 가족과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선남선녀의 모습은 행복으로 가득해 보였다. 서로만을 바라보는 신랑 신부의 강렬하고 짜릿한 눈빛에 어떤 사람들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고 어떤 사람은 공연히 얼굴이 붉어져 슬그머니 눈길을 돌리기도 했다. 그건 스물셋, 내년 2월이면 대학 졸업을 앞둔 강아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돌린 아리는 한 남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심장이 지끈거리는 듯한 아픔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주례의 성혼 선언이 있은 후 신랑 친구인 사회자의 키스 요청이 있었다. 그러자 멋진 신랑은 주저 없이 아름다운 신부를 끌어안고 열렬히 키스를 퍼부었다. 순간 여기저기에서 환호성과 야유, 웃음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아리는 ‘그 남자’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바보, 멍청이!’
신랑의 집 정원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결혼식이었고 그는 신랑 친구들이 잔뜩 모여 있는 무리 중에 섞여 있었다. 그렇지만 그 남자의 시선은 신랑의 무한한 사랑과 신뢰의 눈빛을 받으며 눈부시게 빛나는 신부에게 머물러 있었다.
아리는 그 남자의 입가에 맺힌 옅은 미소와 깊은 눈빛에서 전해져 오는 아릿한 아픔에 반응하는 자신이 싫었다. 그래서 있는 힘껏 그를 째려보며 속으로 외쳤다. 그때 마치 그녀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그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순간 아리는 심장이 떨리는 기분을 느꼈지만 무시하고 그를 향해 혀를 쏙 내밀어 보였다.
‘흥! 메롱이다, 이석현!’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석현이 놀란 듯 몸을 굳혔지만 이내 가늘게 뜬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아리는 기죽지 않고 그런 그에게 악동 같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윙크를 해 보인 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도 마음 어딘가가 자꾸만 욱신거리자 아리는 심술이 났다. 죽었다 깨어나도 이석현이란 남자가 오늘의 신부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보아 줄 일은 없을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죽일 놈의 짝사랑! 오늘로 나도 끝낼 거야, 쫑이다! 끝이라고, 끝!’
그녀는 마음속으로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다짐했다. 그때 언제 다가왔는지 평소에 아리가 잘 따르는 선우진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놀렸다.
“야, 항아리! 오늘 너 좀 여자 같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아 씨! 선우진, 오빠야. 나 원래 여자거든?”
그녀는 진이 잡아당긴 짧은 단발머리를 재빨리 정돈하면서 곱게 흘겨보았다. 사실 아리는 오늘을 위해 공들여 짧은 머리를 드라이하고 예쁜 꽃모양 보석 머리띠에 보랏빛 미니 원피스까지 차려입었다. 물론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틈틈이 모은 거금을 들여 메이크업도 받고 새 구두에 백까지 샀다는 건 비밀이다. 그것까지 눈치채면 선우진을 비롯해 소위 독수리 5형제들은 그녀를 놀리느라 밤이 새는 줄도 모를 테니 말이다.
“그리고! 항아리라고 부르지 말랬지! 난 다섯 살이 아니라 스물셋이라고!”
아리가 뿌루퉁한 얼굴로 입술을 쑥 내밀며 덧붙인 말에 선우진이 키득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강아지라고 부를까?”
“오빠! 정말 이럴 거야?”
“자식아, 네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 봐라. 호호 할머니가 돼도 나한테 넌 언제나 엄마 보고 싶다고 울던 다섯 살의 꼬맹이니까, 강아리 양. 가자! 이제 우리 여왕님도 시집보냈으니 실컷 먹고 마시면서 즐길 시간이야!”
진은 심통 난 아이처럼 신경질을 부리는 아리를 가뿐히 무시하고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화려한 차양 아래 차려진 뷔페 테이블로 이끌었다. 아리는 뭐라 툴툴거리면서도 못 이기는 척 진의 손에 끌려갔다. 파랗고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그런 그녀의 모습이 싱그럽고 귀여운 요정처럼 비치고 있다는 걸, 그 모습을 석현이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아리는 몰랐다.
“흐음.”
이거 이상하게 거슬리네. 석현은 결혼식이 끝나자 손님들 사이를 물 흐르듯 다니며 술과 음료를 제공하는 직원의 쟁반에서 샴페인 잔을 집어 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선우진과 함께 웃고 먹고 떠드는 강아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리를 처음 만난 건 그가 스무 살이고 아리가 열여섯 살일 때였다. 하지만 첫 만남부터 아리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그때부터 지금까지 석현을 놀리거나 괴롭히는 일에 쾌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선우진에게는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보이는 걸 감추지 않았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나랑 상관없는 애야. 신경 끄자, 좀.’
그는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샴페인이 쓴 이유가, 강아리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시선은 다시 오늘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에게로 향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아름다운 신부에게 고정되었다.
“행복해라, 정세아!”
그때 신랑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세아가 석현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석현은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살짝 들어 올리며 옅은 미소를 보냈다. 그러자 세아가 그에 대한 답례로 티 없이 빛나는 행복의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이걸로 됐어.”
석현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오랜 습관처럼 마음에 담아 온 무언가를 놓아 버린 기분, 그것은 가뿐한 느낌이기도 했고 다시 빈자리가 생겼다는 걸 자각한 외로움이기도 했다. 맹세코 소유하려는 마음을 먹은 적 없었고 불순한 욕망을 품었던 적도 없었던 대상에 대한 존중과 애정. 석현은 오늘 자신의 유년 시절에 마침표를 찍는 듯한 아쉬움과 달곰쌉쌀한 슬픔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런 그의 마음과 상관없이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흥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신랑이 해외 입양아 출신이라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이 다른 외국인들도 많이 눈에 띄었고 완벽하게 기쁨에 겨운 표시를 팍팍 내는 신랑 아버지와 그 가족들이 인상적이었다. 그에 비해 신부의 가족들은 어딘지 어색하면서도 불편해 보이는 기색을 완벽하게 숨기지 못한 채 결혼식과 피로연이 치러지는 이 아름다운 가을 정원 한쪽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순탄치만은 않았던 신랑 신부의 만남과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지켜본 석현은 세아가 선택한 남자 준과 눈길이 마주치자 가볍게 눈인사를 보냈다. 저 남자라면 이 험한 세상에서 그의 여자를 안전하게 지킬 거라 믿었다.
‘세아, 잘 부탁합니다.’
이게 정말 마지막이다. 석현은 심장 깊은 곳에서 뭔가 울컥하는 기분을 간신히 가누며 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눈길이 옮겨 간 곳에 아리가 있었다. 깜찍한 웃음을 지으며 진에게 뭐라 재잘재잘 수다를 떨며 웃고 있는 아리의 주위엔 평소와 같이 친구들이 많았다.
“이건…… 뭐지?”
문득 그의 머릿속에 오늘의 주인공들 대신 그 자리에 아리와 진이 함께 있는 영상이 펼쳐졌다. 그 순간 석현은 심장을 강타하는 묘한 통증에 숨을 삼켰다. 그건 명백한 불쾌감이었기에 당황한 석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샴페인 잔의 목을 부러뜨릴 듯이 꽉 움켜쥐었다. 그때였다.
“야, 이석현! 여기서 혼자 뭐 하냐?”
“뭐, 그냥. 왜?”
석현은 자신을 이상한 감정에서 깨어나게 해 준 친구에게 내심 고마워하며 물었다.
“오늘 밤 신랑 신부 신혼여행 가기 전에 신나게 놀기로 했어. 같이 가자. 예쁜 여자들 많이 올 거래.”
친구가 대뜸 석현의 팔을 잡아끌며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어디서 모이는데?”
“진이 놈이 자기 클럽을 통째로 내놨거든. 같이 갈 거지?”
석현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아리가 있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오늘 신부가 던진 부케를 잡은 아리가 깔깔 웃으며 그 꽃다발을 요술봉처럼 이리저리 휘둘러 진과 친구들을 놀리고 있었다. 그 순간 석현은 애초의 마음과 달리 이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가지 뭐.”
“오케이! 그럼 우리도 가서 뭐 좀 먹자. 신랑이 아낌없이 돈을 쓴다는데, 오늘 같은 호사를 놓치면 안 되지!”
친구는 싱긋이 웃더니 앞서 걸어갔다. 바로 진과 아리가 있는 뷔페 테이블을 향해서였다. 석현은 빈 샴페인 잔을 지나가는 웨이터의 쟁반에 올려놓고 친구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런데 진과 열심히 대화를 하고 있던 아리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를 향했다. 그리고 씩,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석현 군? 받아요!”
“무슨…… 음?”
오직 강아리만이 그를 석현 군이라고 불렀다. 이 나이에, 그것도 한참 어린애한테 군 소리를 듣다니. 석현은 나직이 체념의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가 미처 무슨 일인지 깨닫기도 전에 신부의 부케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석현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허공에서 낚아채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리를 보았다. 그런데 아리는 그가 아닌 진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봤지? 이제 나보고 6개월 안에 남자 안 생기면 평생 시집 못 간다는 말 하지 마! 그런 저주는 이제 석현 군한테 넘어갔거든?”
“허!”
석현은 자신에게 혀를 쏙 내밀어 보인 아리가 총총총 또래 친구들과 오늘의 신부가 함께 있는 곳으로 가는 모습을 멍청하게 쳐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석현의 귀에 선우진과 다른 녀석들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가 찌푸린 얼굴로 그들을 쏘아보았을 때에야 다들 딴청을 피우거나 웃음을 삼키며 음식과 음료를 먹는 척했다.
“이석현, 넌 어째 아리한테는 그렇게 당하기만 하냐?”
선우진은 안됐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입가를 비집고 나오는 유쾌한 웃음은 숨길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노려보는 석현의 굳은 어깨를 툭 쳐 주고는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젠장!”
석현은 나직이 투덜거렸다. 실은 그가 강아리의 밥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표현한 적은 없지만 그가 오늘의 신부를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다는 사실 또한 그랬다. 아마 아리는 그렇게 미련스러운 그를 비웃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니, 이젠 정신 차리라고 한 방 먹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석현은 힘없이 웃으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가을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파랬다. 그리고 곧 자신도 모르게 옮겨 간 시선은 오래오래 아리가 있는 풍경에 머물렀다.
‘강아리, 이 못된 강아지야! 너 대체 나한테 왜 그러냐.’
석현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날 하루 종일 이상하게도 석현의 망막에서 아리의 모습들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친구들의 장난과 심술궂은 놀림에 못 이기는 척 넙죽넙죽 받아 마신 술은 그를 완벽하게 케이오 시켰다.
그날 밤, 석현은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혼란스러운 꿈을 꾸었다. 석현의 꿈속 주인공은 세아가 아닌 강아리였다. 엉망진창이 된 그를 부축해 일으켜 준 사람. 그리고 지독히도 감각적이고 달콤한 키스를 나눈 여자. 모두 아리였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속 쓰림, 타는 갈증을 느끼며 깨어났을 때, 그는 혼자였다.

*

“그날, 내가 본 건 정말 환상이었을까?”
2년이 지난 지금도 석현은 문득문득 궁금했다. 왜냐하면, 그에게 그날의 진실에 대해 말해 줘야 할 아리가 모두의 인생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날,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그림자처럼 떨쳐 낼 수 없는 궁금증. 그 순간 석현은 깨달았다. 자신의 인생에 작은 구멍 하나가 생겼고, 불행히도 그건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을 거란 사실을…….



#1장 재회


덥고 후텁지근하게 이어지던 여름날도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한낮에는 햇빛이 뜨거웠지만 아침저녁 공기엔 어느새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여름내 짙푸른 빛을 뽐내던 가로수들도 조금씩 가을 옷으로 갈아입을 준비를 했고,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한결 따뜻해졌다.
석현은 그런 계절의 변화를 무감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지금 그는 아버지와 큰형을 만나 점심 식사를 하고 회사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그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할아버지가 창업하셨고 현재 아버지가 대표로 있는 회사에서 일했었다. 그러다 올해 친구 둘과 함께 창업을 해 집안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완벽하게 독립했다. 그리고 신학기부터는 일주일에 두 번씩 모교에서 강의를 맡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가족과의 식사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가족 회사가 경영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사업 확장을 했던 시기가 조금 나빴던 건 인정해. 하지만 최근 들어 자금난은 우리 회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석현이 너도 알다시피 요즘 세계 경제가 디플레이션 쪽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발전 가능성 있는 우량 기업이라고 평가받아 해외에서 투자자를 찾는다 해도 소극적으로 추이를 지켜보는 말만 하더구나. 그래도 걱정 마라. 아버지와 내가 열심히 뛰고 있고, 이현이 놈도 제 인맥을 동원해 나름대로 돕고 있으니 점차 나아질 거다.’

큰손 투자자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자리를 떠나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그에게 큰형 일현이 위로하듯 말했다. 그래도 석현이 표정을 풀지 못하자 일현이 그의 기억을 환기시켜 주었다.

‘할아버지께서 지인을 통해 큰손 한 분을 소개받으셨다. 불행한 일을 겪으시고 한동안 그쪽 방면에서 모습을 감추고 지냈던 분인데, 너도 이름 들으면 알 만한 양반이야.’
‘성함은요?’
‘아직은 섣불리 말하기가 그렇구나. 혹시 네 손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말할 테니 그때 도와주면 된다. 그건 그렇고 막내 넌 요즘 어떠냐? 만나는 여자는 있고? 이현이도 작년에 결혼했으니 할아버지께서 이번엔 너에게 눈독 들이고 계신다는 거.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