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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골치 아픈 회사 문제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은 듯 일현이 자못 짓궂게 말했다. 할아버지 이 회장이 손주들 짝지어 주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형제는 그것을 계기로 제법 유쾌한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식사를 끝내고 회사로 들어가는 길, 석현은 내내 마음이 무겁고 좋지 않았다. 솔직히 집안 사업에 대해 의무나 책임감을 가져 본 적이 없는 그였다. 당연히 큰형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 가업을 이을 터였고, 둘째 형인 이현은 자신의 힘이 닿는 대로 회사 일을 지원하긴 했지만 좋아하는 음악과 연기를 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며 살고 있었다. 그 덕분에 셋째인 석현은 모든 면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 그도 나이를 먹고 철이 들어 가는지 오늘처럼 가족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투자자라, 어쨌든 나도 알아보긴 해야겠어.”
석현은 회사가 입주한 오피스 빌딩의 지하 주차장으로 진입하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가 막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릴 때였다. 갑자기 스마트폰 벨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오랜만이다, 선우진.”
통화 버튼을 누른 석현은 무뚝뚝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잠깐의 침묵 끝에 평소와 달리 낮게 가라앉은 선우진의 음성이 들려왔다.
― 그래. 잘 지내지?
“그럭저럭. 그런데 무슨 일 있어?”
운전석에서 내린 석현은 한 손에 노트북을 들고 다른 손으로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그때 진의 한숨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 오늘 아침에, 세아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래. 장례식장은?”
석현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차분하게 물었다.
― 서울 병원. 평일이라 다들 저녁에나 갈 것 같은데, 넌?
“나도 퇴근하고 갈게.”
― 그럼 모두 그때 얼굴 보겠구나. 그럼 이따가 보자.
진이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 순간 석현은 자신도 모르게 다급히 물었다.
“강아리는?”
미처 통제하기 전에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건 그동안 친구들 사이에서 금기시되었던 질문이었다. 가장 친했다고 할 수 있는 선우진조차도 아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진이 최근까지도 강아리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다는 걸 보육원 친구들 모두 알고 있었다.
― 아직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선우진이야. 아리 녀석 절대 포기 못 하지. 대체 어디에 왜 숨어 있는지 모르지만 내가 반드시 찾아낸다. 찾아내서…….
“찾아내면?”
― 정신 번쩍 들게 엉덩이를 때려 줄 거다! 감히 이 오빠들 속을 까맣다 못해 시커멓게 태워?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아주 혼쭐을 내 줄 거야, 내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온 진의 목소리엔 장난기가 묻어났지만 석현은 친구가 전혀 웃음기 없는 눈빛을 하고 있을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기다리던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석현은 씁쓸하게 말했다.
“이따가 보자, 진.”
그는 전화를 끊고도 먼 곳을 헤매는 눈빛으로 엘리베이터의 숫자 판이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어째서 강아리가 자신을 이토록 흔들어 놓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이 혼란과 공허함이 여동생 같았던 여자아이를 향한 걱정이나 그리움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맹세코 아리를 여자로 느꼈던 적이 없었기에 더욱 당혹스러웠다.
그렇기에 해결책은 단 한 가지. 그 아이를 다시 만나야 풀어질 문제인데 당사자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찾을 수 없으니 가슴만 답답할 뿐이었다.
사실 석현은 얼마 전부터 아리의 행방을 조용히 찾고 있었다. 행운이 자신의 편이 되어 선우진보다 먼저 그녀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석현은 가만히 한숨을 삼켰다.
석현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다른 직원들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는지 보이지 않고 동업자인 두 친구가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 그를 발견하고 반색을 했다.
“안 그래도 우리 지금 네 얘기 하고 있었는데, 커피 마실래?”
“아니, 됐어. 그런데 나 뭐?”
석현은 자신의 파티션으로 다가가 노트북을 내려놓고 버릇처럼 데스크톱 컴퓨터를 부팅시키며 물었다. 그러자 차윤재가 흥분한 얼굴로 답했다.
“석현이 너 3개월쯤 전에 할아버님과 식사 자리에서 진 회장님 뵌 적 있다고 했었지? 그 전설적인 큰손 말이야.”
“어, 그분이 왜?”
무심히 대답하던 석현은 문득 짚이는 게 있었다. 그래서 관심을 보이자 옆에 있던 상민이 끼어들어 설명해 주었다.
“진 회장이 업계로 돌아왔다는 소문이 파다해. 이미 한다 하는 대기업 총수들도 그쪽에 선을 넣고 있다는 말도 공공연히 돌고 있고 말이야. 석현이 너도 알다시피 요즘 기업들 돈줄이 막혀서 난리잖아. 그 여파로 우리 같은 재정 컨설팅 자문을 하는 업체들도 고전을 하고 있고 말이지. 오늘 점심에 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를 우연히 만났는데 이쪽 업계에서도 진 회장님한테 줄을 대려고 벌써 움직이고 있다는 소릴 들었다. 아직은 정보력 빠른 몇 곳에서만 움직이는 실정인데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니 경쟁이 더 치열해질 거야.”
“우리도 도전해 볼 가치가 있단 말이군. 좋아 내가 한번 알아보지.”
석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에 관한 한 까다롭고 원칙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그가 이리 선선히 나오자 두 친구는 놀란 눈빛을 주고받았다. 윤재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정말 해 볼래?”
“마침 개인적인 용건이 생겨서 그분을 한번 찾아뵐 생각이었어. 진 회장님 연락처 알아내는 대로 약속 잡아 보겠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젊은 시절 지하 경제와 어두운 주먹 세계까지 주름잡다가 완벽하게 사업가로 변신한 진승필 회장. 70대 후반이라고 보기엔 젊고 활력 넘치던 모습과 상대를 꿰뚫어 보는 깊고 날카로운 눈빛을 한 진 회장의 모습을 떠올린 석현은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윤재와 상민의 얼굴엔 마치 승리의 트로피라도 눈앞에 둔 사람처럼 기쁨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자식, 겸손하기까지! 요즘 너만 찾는 고객들이 많아져서 내가 기죽을 정도거든? 아무튼 우린 너만 믿는다!”
현재 회사의 경영을 맡은 윤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석현에게 말했다. 그러자 상민이 거들었다.
“부담 팍팍 느끼게 좀 더 압력을 넣어야지, 사장님아. 솔직히 우리로서는 진 회장을 잡으면 업계에서 인정을 받는 셈이니 한번 멋지게 해 보자, 이석현!”
“작작해라, 이상민. 아, 난 고객 상담이 잡혀서 나가 봐야 하거든? 사무실 잘 부탁한다, 이사님들.”
윤재가 싱긋 웃더니 책상에 올려놓았던 서류 가방을 들고 사무실 문으로 걸어갔다. 그런 친구에게 상민이 투덜거리는 투로 소리쳤다.
“우리 포함해 직원이 달랑 다섯인데 사장, 이사 다 해 먹는 건 좀 그렇지 않냐? 내 말대로 신입 직원 몇 더 뽑자니까?”
“고려해 볼게! 나 간다. 다들 수고!”
윤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 닫히는 문을 노려보며 상민이 툴툴거렸다.
“예전엔 저런 짠돌이는 아니었는데. 처자식 먹여 살리는 게 무섭긴 무섭구나. 휴! 난 결혼하지 말고 자유롭게 즐기며 살아야지. 이석현, 오늘 시간 괜찮으면 저녁에 술 한잔할래?”
“미안, 난 초상집 가야 돼.”
“저런……. 그럼 다른 놈들을 물색해 봐야겠군. 그건 그렇고 독신으로 외롭게 늙어 죽지 않으려면 미리미리 술친구를 많이 만들어 놔야겠어.”
석현은 농담 반 진담 반인 상민의 말을 웃어넘기며 오전에 미팅을 했던 고객에게서 넘겨받은 자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이 산란해서 집중을 할 수가 없는 날이었다.
‘일현 형이 말한 그 큰손이라는 사람, 진승필 회장일 가능성이 높아. 여러모로 복잡하게 얽히게 생겼군.’
눈과 머리로는 기계적으로 자료를 분석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어쨌든 그날 오후는 밀려드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빠르게 지나갔다.

석현이 해월 그룹 창업주이자 세아의 할아버지인 정 회장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병원에 도착한 건 조금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일을 마치고 독립해 나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와야 했기에 시간이 약간 지체된 탓이었다.
“이석현!”
장례식장으로 들어선 그를 먼저 발견하고 다가온 건 선우진이었다.
“다른 놈들은?”
“아직. 밤새우려면 하던 일 대충 마무리라도 짓고 와야 하니 시간이 걸리겠지. 본격적인 조문객들도 그때나 들이닥칠 테고 말이야. 가서 상주하고 인사 나눠야지?”
“그래야지. 그런데 넌 왜 나와 있어? 어디 가?”
석현은 진의 손에 들려 있는 자동차 열쇠를 흘끗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진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대답했다.
“가게에 취객들 때문에 문제가 좀 생긴 모양이야. 가서 해결하고 바로 올 테니까 너라도 여기 좀 지켜라. 세아 남편이 잘하고 있긴 하지만 아기 돌보랴 빈소 지키랴 세아가 자리 비울 일이 종종 있거든.”
“걱정 말고 다녀와.”
석현은 선선히 대답했고 진은 그런 그의 어깨를 툭 한 번 치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제법 큰 규모의 클럽을 운영하자니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자주 발생하는 듯했다.
“석현아, 와 줘서 고마워.”
장례식장 입구에서 그를 본 세아가 반갑고도 쓸쓸한 표정으로 다가와 말했다. 석현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답했다.
“당연히 와야지. 미향이도 태어나고, 할아버님께서 조금 더 버티실 줄 알았는데 유감이야. 할머님은?”
석현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 세아의 할머니 금 여사의 행방을 묻자 세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쓰러지셔서 지금 병실에서 수액 맞고 계셔. 정신 돌아오시더니 내려오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계시고.”
“강한 분이시니까 걱정 마. 그건 그렇고 미향이는?”
“내 고등학교 친구 지남철 알지? 우리 외할아버지가 운영하셨던 보육원에 있었던 지은이라는 친구하고 결혼했잖아. 지은이가 우리 아기 맡아서 보살펴 준다고 데려갔어. 언니, 오빠들이 있으니까 미향이도 낯설어하지 않고 잘 지낼 거야. 진도 제일 먼저 달려와서 도와주고. 너도 이렇게 와 주고. 내가 친구들 덕을 많이 봐.”
세아가 창백한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결혼한 후 한결 더 우아하고 성숙한 여인이 된 세아는 아름다웠다. 그 순간 석현은 이제 정세아라는 여자가 자신의 마음에 친구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련도 그 어떤 감정도 사라진, 그저 아름다운 시절을 함께해 준 좋은 친구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알면 더 잘 살아. 이제 나, 회장님께 마지막 인사 드려야겠는데.”
“아, 그래. 할아버지도 생전에 널 참 많이 아끼셨었지.”
세아는 잠시 회상에 잠긴 눈빛으로 웃고는 그를 데리고 남편이 상주 역할을 하고 있는 빈소로 갔다.
‘이제 편히 쉬세요, 회장님.’
석현은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오랫동안 사업을 해 오셨고 동종 업계에서도 존경받는 어른이셨기에 그런지 조문객들이 많았다. 석현은 세아의 곁에서 상주 역할을 하고 있는 준과 인사를 나눈 뒤 고인에 대한 조문을 마쳤다.
“아직 저녁 전이지? 가서 뭐 좀 먹어. 진이 말이 곧 친구들이 온다니까 혼자 외롭지는 않을 거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가서 네 자리 지켜.”
석현이 담담하게 말하고는 돌아서는데 세아가 혼잣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때 아리가 있으면 좋을 텐데.”
석현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조문객을 위해 음식을 준비한 곳으로 걸어갔다.
어느새 강아리라는 이름은 친구들의 기억에서 그리움과 추억이라는 의미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방심하고 있을 때면 그 못된 강아지는 불쑥 석현의 생각 속으로 끼어들어 정신을 산란하게 만들었다.
그는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를 끊은 지 십 년이 넘었는데 오늘 밤 저 낯선 남자들에게 다가가 한 개비 빌려 입에 물고 싶은 이유는, 자꾸만 새어 나오는 이유 모를 한숨을 숨기고 싶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석현은 잠시 바깥바람이라도 쐬고 싶은 마음에 장례식장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그래서 한 무리의 조문객 속에 그에게 아주 낯익은 인물이 섞여 있었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

멀리 보이던 병원 건물이 점차 가까워지자 가슴을 짓눌러 오는 압박감과 심란한 기분을 떨쳐 내기 힘들었다.
아리는 어둠 속에서 하얀 탑처럼 우뚝 서 있는 건물을 가만히 바라보며 자신이 한국을 떠나 있던 시간이 벌써 2년이나 흘러 다시 가을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사이 그녀에겐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유일한 가족이었던 외할머니 없이 살아가는 일상에 익숙해졌다는 거였다. 어떤 의미에서 지난 2년은 친구들이 놀림 반 부러움 반으로 소위 독수리 5형제라고 불렸던 오빠들과 어린 시절 잠시 머물렀던 보육원 친구들이 철저히 그녀의 인생에서 배제된, 온전히 강아리라는 존재로 사는 방법을 배운 시간이었다. 아리가 짧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 인물이 묵직한 어조로 그녀를 불렀다.
“아리야.”
“네? 아, 네, 회장님!”
“마음 내키지 않으면 차에 남아 있어도 된다.”
“아니에요, 회장님. 한국에 돌아왔으니 이제 만나야 할 사람들과 마주해야죠. 어차피 일을 시작하려면 그래야 하고요.”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아리는 자동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는 진 회장에게 말했다. 그러자 잠시 말이 없던 진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염려 마세요. 회장님께 드린 약속은 절대 잊지 않고 있으니까요.”
아리는 안심하시라는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진 회장은 그런 아리의 속내를 파악하려는 듯 한참 동안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다 무뚝뚝하게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인 후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을 태운 세단은 잠시 후 서울 병원 장례식장 앞에 도착했고 앞서 도착한 경호 차량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자 자연스럽게 호위를 해 주었다. 이제 아리는 이런 방식에 익숙해진 터라 무표정하게 진 회장에게서 한두 발자국 떨어져서 뒤따랐다. 현재 그녀의 공식 위치는 진 회장의 수행 비서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