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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어, 혹시 저 양반, 진승필 회장 아니야?”
“소문에 외국에서 들어오셨다고 하더니, 정말이군.”
그들이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서자 진 회장을 알아본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점차 큰 술렁임으로 바뀌어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주인 세아의 관심도 새로 등장한 인물을 찾아 입구 쪽으로 향했다.
“아아, 어?”
진승필 회장을 발견한 세아의 얼굴이 조금 놀란 듯했다면 진 회장의 곁에 있는 아리를 알아본 순간 기쁨과 반가움으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리는 그런 세아에게 짓궂게 윙크를 해 보이고는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세아도 곧 그녀의 의중을 이해하고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해요.”
아내와 아리의 눈짓을 지켜본 준이 다가온 진 회장에게 먼저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아리가 알기로 진 회장과 준 그레이엄은 사업상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정 회장님 집안과는 오래전부터 친분이 깊었었다네. 내가 당연히 와야지.”
진 회장이 준에게 말했다. 그리고 성숙한 여인이 된 세아에게 깊은 눈빛을 주며 말했다.
“정 회장님께서도 정 사장 자네가 회사를 잘 이끌어 갈 걸 믿고 편히 가셨을 걸세.”
“고맙습니다, 회장님. 다시 뵙게 되어 기뻐요.”
정중하게 인사한 세아는 진 회장의 어깨 너머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진 회장이 뜻 모를 눈빛으로 나직이 말했다.
“살다 보면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된다는 걸 알게 되지. 다만 자네 할아버님을 생전에 한 번 더 뵙지 못했던 게 안타까울 뿐이야.”
“할아버지께서도 회장님 말씀을 가끔 하셨어요.”
“벌써부터 그분이 그립군. 그래도 이젠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려야겠지.”
진 회장이 영정 사진 속에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 회장에게 눈길을 고정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망자에게 정성과 예를 다해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진 회장이 자리를 비켜 주자 아리도 생전에 몇 번인가 뵌 적 있는 정 회장에게 절을 했다.
‘할아버지, 그곳에 가시면 저희 외할머니 잘 계신지 한번 살펴봐 주세요. 그리고 저는 잘 살고 있다고, 이제는 울지 않고 행복하게 웃고만 살 거라고 전해 주세요.’
절을 올리고 나서 일어서는 아리의 가슴이 뜨거운 감정을 삼키느라 먹먹해졌다.
“이렇게 오셨는데 회장님을 뵙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인사라도 나누시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리가 진 회장의 곁에 서자 준이 진승필에게 권했다. 하지만 진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다음 일정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 한다네.”
“아, 그러시다면 붙잡을 수 없겠군요. 나중에 따로 자리 마련해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지. 그리고 아리 너는.”
진 회장이 준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후 아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으니 이야기 나누고 와라.”
“아닙니다, 회장님. 10분만 시간을 주세요. 곧 가겠습니다.”
아리가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하자 진 회장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진 회장은 세아에게 마지막으로 위로의 눈빛을 주고는 이내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그러자 준이 아내에게 진 회장을 배웅하고 오겠다는 눈짓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 마침 문상객이 뜸한 터라 세아는 그나마 사람이 적은 곳으로 아리를 이끌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니?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야? 아니, 그것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아이가 내가 아는 그 아리 맞는 거지?”
세아가 2년 전과는 많이 달라진, 심지어 키도 더 자란 듯한, 아리의 모습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 아리는 숱 많은 긴 생머리를 검은색 리본 핀으로 하나로 고정했고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치마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여성스럽고 늘씬한 몸매와 예쁘장한 얼굴은 소녀의 티를 완전히 벗어 버린 아름다운 여인의 그것이었다. 아리는 믿을 수 없어 하는 세아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오랜만이야, 세아 언니. 그런데 이렇게 슬픈 소식으로 언니를 다시 만나게 되어서 정말 마음 아파.”
“나도 그래. 그런데 어떻게 진 회장님과 함께 왔어? 그동안 어디 있었고? 애들이 너 찾느라고 백방으로 뛰었는데. 혹시 나쁜 일이라도 있었던 거니?”
세아가 그녀의 손을 꼭 쥐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아리는 잔잔히 미소 지었다.
“말하자면 너무 길어. 나중에 따로 자리 만들어서 얘기할게, 언니.”
“음.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그런데 석현이 이 녀석은 대체 어딜 간 거지? 내내 여기 있었는데 하필 이럴 때 자리를 비웠네.”
세아가 잠시 뜸했던 조문객들이 들이닥치는 걸 보며 중얼거렸다. 순간 아리의 눈빛이 흔들렸고 세아에게 잡혔던 손도 슬그머니 빼냈다.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석현은 여전히 세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헛헛해지는 걸 보면 기억이란 참 잔인한 회복력을 가진 것 같았다.
“다음에 보면 되지 뭐. 회장님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 난 이만 가 봐야 해, 언니.”
“녀석들이 너 돌아온 걸 알면 까무러칠 거야. 이렇게 널 보내면 안 되는 건데 붙잡을 수가 없네.”
세아가 몸을 돌리는 아리를 보며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회장님께 딱 붙잡혀 있는 거 언니도 봤잖아. 나 이제 어디 안 가. 연락할게요!”
개구쟁이처럼 살짝 콧등에 주름을 잡고 말한 아리는 조문객이 다가오는 걸 흘끗 보고는 마지막으로 세아를 가볍게 포옹한 뒤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리가 빈소가 차려진 곳을 나설 즈음 잠시 바람을 쐰 석현이 장례식장으로 돌아왔다. 막 진 회장을 배웅하고 오던 준이 그런 석현을 보고 말을 걸었다.
“어디 다녀오는 길인가 보군요.”
“좀 답답해서 옥상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왜 나와 있습니까?”
조문객을 상대하고 있는 세아 쪽에 흘깃 눈길을 준 그가 무뚝뚝하게 묻자 준이 말했다.
“방금 진승필 회장님께서 조문을 다녀가셔서 배웅하고 들어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도 벌써 간 모양이군요.”
“그 아가씨요?”
준과 나란히 장례식장으로 걸어 들어가며 석현이 무심히 물었다.
“아리라고 하던가? 그 아가씨가 조문을 왔는데 내 아내가 무척 반가워했…….”
석현은 더 이상 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그는 장례식장 출구를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석현은 지그시 어금니를 물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복도를 오가던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그의 안중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녀석을 붙잡아야 해!’
그 한 가지 생각만으로 심장이 깨어나고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는 행여 아리를 눈앞에서 놓칠세라 주변을 빠르게 살피며 달렸다. 그러다 현관 로비로 향하는 길과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멈칫했다. 순간 석현은 거칠어진 숨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의 운을 시험하기로 했다. 그는 현관 로비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발견했다. 아니, 하마터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놓칠 뻔했다.
“강아리!”
조문을 오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검은색 정장 스커트 차림에 긴 생머리를 검은색 리본으로 묶은 늘씬한 여자를 그대로 스쳐 갈 뻔했다. 석현의 기억 속의 강아리는 어느 청명한 가을날 요정처럼 짧은 단발머리에 달콤한 솜사탕 빛깔의 시폰 원피스를 입고 있던 통통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본능적인 이끌림에 따라 아리임을 확신했다.
이름을 부르자 흠칫 굳어지는 걸 분명히 목격했는데 아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곧은 자세로 걸어갔다. 석현은 이를 악물고 이번에는 확실하게 아리를 세울 호칭을 소리쳤다.
“망할 강아지! 거기 안 서?”
그의 외침을 들은 순간 아리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정확히 석현을 찾아내 차갑게 쏘아보았다. 역시 별명을 부른 건 예나 지금이나 효과 만점이었다.
석현은 자신을 향한 그녀의 눈빛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벅차게 인식하며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마침내 그는 아리와 눈을 마주하고 섰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죠!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아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화난 얼굴로 톡 쏘아붙였다. 하지만 석현의 돌발 행동에 놀란 그녀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앗, 석현 군!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그에게 덥석 손목을 잡힌 아리는 방어할 틈도 없이 그에게로 몸이 확 기울었고 본능적으로 뭔가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 석현의 단단한 가슴팍이 닿았다. 깜짝 놀란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황당하다는 얼굴로 노려보자 석현이 나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짜 강아리였어. 나를 그렇게 부르는 여자는 너뿐이니까.”
“그럼 내가 귀신이라도 된 줄 알았어요?”
아리는 농담 섞인 비웃음으로 당혹감을 감추었다. 석현의 손을 떨쳐 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점점 더 그의 몸 가까이 끌려가고 말았다. 급기야 거의 끌어안긴 듯한 자세로 서로의 눈을 마주 보게 되자 아리는 진심으로 당황해서 외쳤다.
“왜, 왜 이래요? 놔줘요!”
“싫은데? 네가 말했다시피 귀신이 된 강아리가 나한테 또 못된 장난을 치는 건지, 확인하기 전엔 안 돼.”
“설마, 그걸 농담이라고 한 건 아니겠죠.”
그녀의 빈정거림에 그의 깊은 눈동자에 언뜻 웃음기가 스친 듯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석현은 새카맣게 잦아든 눈빛으로 그녀를 강렬하게 응시했다. 아리는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마음을 어지럽히는 그만의 향기에 사로잡혀 꼼짝도 하지 못했다.
‘혹시, 이 남자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마음 강하게 먹자! 끝까지 태연하게 보여야 해.’
짧은 순간 오만 가지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고 그런 갈등은 고스란히 아리의 눈동자에 드러났다. 그걸 포착한 석현의 눈빛이 매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강아리…… 너 혹시 2년 전에.”
“이거 놔요!”
위험을 직감한 아리는 힘껏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얼굴은 붉어졌고 심장은 도둑질하다가 들킨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마구 쿵쾅거렸다.
“너…….”
석현의 눈매가 의심을 품고 가늘어졌다. 망했다! 머릿속에서 북처럼 울리는 소리에 아리는 좌절하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가벼운 헛기침 소리와 함께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을 끊고 끼어들었다.
“아가씨?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회장님께서 아가씨를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경호원인 박 실장이었다. 그제야 아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이곳이 어디인지 자각했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고 속을 헤아릴 수 없는 눈빛이 되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오늘은 바빠서 이만 가 봐야겠어요. 나중에 기회 되면 또 봐요.”
아리는 굳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과 박 실장, 로비 밖에 대기 중인 검은색 세단을 차례로 주시하는 석현에게 냉담하게 작별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제발 다리가 꼬이지 않고 저 회전문을 통과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아리는 걸음을 떼어 놓았다.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싸늘하게 울리는 석현의 음성이 날아왔다.
“누구야? 설마, 그동안 애인이라도 만든 거니?”
그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의미한 냉소와 경멸이 아리의 몸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걸음을 멈춘 그녀는 입가에 부드럽고 달콤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돌려 석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낮고 쌀쌀맞은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누구와 사귀든 말든, 그건 석현 군과 상관없는 일이죠. 오빠는 내 가족도 뭣도 아니니까.”
“……!”
깨진 유리에 베인 듯한 눈빛으로 미소 짓는 그녀를 본 순간 석현은 자신이 어쩌면 실수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이 그녀가 지나치게 상냥한 눈빛으로 작별을 고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가시죠, 박 실장님.”
도도하게 눈인사를 한 아리는 박 실장의 경호를 받으며 여왕처럼 우아하게 회전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갔다. 아리가 박 실장이 열어 주는 검은색 세단의 뒷좌석에 타자마자 승용차는 지체 없이 서울 병원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그 세단의 뒤를 두 대의 경호 차량이 따르고 있는 걸 석현은 지그시 어금니를 물고 노려보며 서 있었다.
‘그래. 난 너에게 아무것도 아니지. 그런데 내 가슴은 그걸 모르나 보다. 널 본 순간부터 이렇게 미친놈처럼 구는 걸 보면. 마치 네가 돌아와서 좋아 죽겠다는 듯이. 널 붙잡지 않은 날 책망하는 것처럼.’
석현은 한 가지로 정의하기 어려운 뜨거운 감정으로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며 자신을 조롱했다.
제 감정이 무엇인지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느낀 맹목적인 질투였다. 석현은 그런 스스로에게 어이없어하면서도 벌써부터 방금 떠나간 아리가 보고 싶었다.
아리가 왜 떠났든, 무슨 비밀을 숨기고 돌아왔든 석현은 상관없었다. 이제부터 직접 알아내면 되니까.
석현은 그녀가 빠져나간 빈주먹을 지그시 움켜쥐며 몸을 돌렸다. 아리가 돌아온 이상 다시 그녀를 놓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로비의 회전문으로 들어오던 선우진이 그를 발견하고 불렀다.
“이석현? 왜 나와 있어?”
“선우진, 강아리가 돌아왔다.”
석현은 친구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강아리의 귀환을 알렸다.
“뭐? 정말이야? 어디? 그 자식 지금 어디 있는데?”
진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순식간에 기쁨과 걱정이 교차하며 확 날카롭게 변했다. 석현은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머금고 돌아서며 대답해 주었다.
“갔어.”
“뭐라고? 어디로?”
“몰라. 하지만 곧 만나게 될 거다. 그런데 말이야. 아리, 이제 진짜 여자가 되었더라.”
아리를 떠올린 석현의 입술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놀라 입을 딱 벌리고 멍청히 서 있는 진을 뒤에 남겨 두고 석현은 빈소가 차려진 곳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이 아주 길 것 같았다.
“어, 혹시 저 양반, 진승필 회장 아니야?”
“소문에 외국에서 들어오셨다고 하더니, 정말이군.”
그들이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서자 진 회장을 알아본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점차 큰 술렁임으로 바뀌어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주인 세아의 관심도 새로 등장한 인물을 찾아 입구 쪽으로 향했다.
“아아, 어?”
진승필 회장을 발견한 세아의 얼굴이 조금 놀란 듯했다면 진 회장의 곁에 있는 아리를 알아본 순간 기쁨과 반가움으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리는 그런 세아에게 짓궂게 윙크를 해 보이고는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세아도 곧 그녀의 의중을 이해하고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해요.”
아내와 아리의 눈짓을 지켜본 준이 다가온 진 회장에게 먼저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아리가 알기로 진 회장과 준 그레이엄은 사업상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정 회장님 집안과는 오래전부터 친분이 깊었었다네. 내가 당연히 와야지.”
진 회장이 준에게 말했다. 그리고 성숙한 여인이 된 세아에게 깊은 눈빛을 주며 말했다.
“정 회장님께서도 정 사장 자네가 회사를 잘 이끌어 갈 걸 믿고 편히 가셨을 걸세.”
“고맙습니다, 회장님. 다시 뵙게 되어 기뻐요.”
정중하게 인사한 세아는 진 회장의 어깨 너머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진 회장이 뜻 모를 눈빛으로 나직이 말했다.
“살다 보면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된다는 걸 알게 되지. 다만 자네 할아버님을 생전에 한 번 더 뵙지 못했던 게 안타까울 뿐이야.”
“할아버지께서도 회장님 말씀을 가끔 하셨어요.”
“벌써부터 그분이 그립군. 그래도 이젠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려야겠지.”
진 회장이 영정 사진 속에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 회장에게 눈길을 고정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망자에게 정성과 예를 다해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진 회장이 자리를 비켜 주자 아리도 생전에 몇 번인가 뵌 적 있는 정 회장에게 절을 했다.
‘할아버지, 그곳에 가시면 저희 외할머니 잘 계신지 한번 살펴봐 주세요. 그리고 저는 잘 살고 있다고, 이제는 울지 않고 행복하게 웃고만 살 거라고 전해 주세요.’
절을 올리고 나서 일어서는 아리의 가슴이 뜨거운 감정을 삼키느라 먹먹해졌다.
“이렇게 오셨는데 회장님을 뵙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인사라도 나누시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리가 진 회장의 곁에 서자 준이 진승필에게 권했다. 하지만 진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다음 일정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 한다네.”
“아, 그러시다면 붙잡을 수 없겠군요. 나중에 따로 자리 마련해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지. 그리고 아리 너는.”
진 회장이 준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후 아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으니 이야기 나누고 와라.”
“아닙니다, 회장님. 10분만 시간을 주세요. 곧 가겠습니다.”
아리가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하자 진 회장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진 회장은 세아에게 마지막으로 위로의 눈빛을 주고는 이내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그러자 준이 아내에게 진 회장을 배웅하고 오겠다는 눈짓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 마침 문상객이 뜸한 터라 세아는 그나마 사람이 적은 곳으로 아리를 이끌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니?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야? 아니, 그것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아이가 내가 아는 그 아리 맞는 거지?”
세아가 2년 전과는 많이 달라진, 심지어 키도 더 자란 듯한, 아리의 모습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 아리는 숱 많은 긴 생머리를 검은색 리본 핀으로 하나로 고정했고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치마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여성스럽고 늘씬한 몸매와 예쁘장한 얼굴은 소녀의 티를 완전히 벗어 버린 아름다운 여인의 그것이었다. 아리는 믿을 수 없어 하는 세아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오랜만이야, 세아 언니. 그런데 이렇게 슬픈 소식으로 언니를 다시 만나게 되어서 정말 마음 아파.”
“나도 그래. 그런데 어떻게 진 회장님과 함께 왔어? 그동안 어디 있었고? 애들이 너 찾느라고 백방으로 뛰었는데. 혹시 나쁜 일이라도 있었던 거니?”
세아가 그녀의 손을 꼭 쥐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아리는 잔잔히 미소 지었다.
“말하자면 너무 길어. 나중에 따로 자리 만들어서 얘기할게, 언니.”
“음.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그런데 석현이 이 녀석은 대체 어딜 간 거지? 내내 여기 있었는데 하필 이럴 때 자리를 비웠네.”
세아가 잠시 뜸했던 조문객들이 들이닥치는 걸 보며 중얼거렸다. 순간 아리의 눈빛이 흔들렸고 세아에게 잡혔던 손도 슬그머니 빼냈다.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석현은 여전히 세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헛헛해지는 걸 보면 기억이란 참 잔인한 회복력을 가진 것 같았다.
“다음에 보면 되지 뭐. 회장님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 난 이만 가 봐야 해, 언니.”
“녀석들이 너 돌아온 걸 알면 까무러칠 거야. 이렇게 널 보내면 안 되는 건데 붙잡을 수가 없네.”
세아가 몸을 돌리는 아리를 보며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회장님께 딱 붙잡혀 있는 거 언니도 봤잖아. 나 이제 어디 안 가. 연락할게요!”
개구쟁이처럼 살짝 콧등에 주름을 잡고 말한 아리는 조문객이 다가오는 걸 흘끗 보고는 마지막으로 세아를 가볍게 포옹한 뒤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리가 빈소가 차려진 곳을 나설 즈음 잠시 바람을 쐰 석현이 장례식장으로 돌아왔다. 막 진 회장을 배웅하고 오던 준이 그런 석현을 보고 말을 걸었다.
“어디 다녀오는 길인가 보군요.”
“좀 답답해서 옥상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왜 나와 있습니까?”
조문객을 상대하고 있는 세아 쪽에 흘깃 눈길을 준 그가 무뚝뚝하게 묻자 준이 말했다.
“방금 진승필 회장님께서 조문을 다녀가셔서 배웅하고 들어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도 벌써 간 모양이군요.”
“그 아가씨요?”
준과 나란히 장례식장으로 걸어 들어가며 석현이 무심히 물었다.
“아리라고 하던가? 그 아가씨가 조문을 왔는데 내 아내가 무척 반가워했…….”
석현은 더 이상 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그는 장례식장 출구를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석현은 지그시 어금니를 물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복도를 오가던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그의 안중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녀석을 붙잡아야 해!’
그 한 가지 생각만으로 심장이 깨어나고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는 행여 아리를 눈앞에서 놓칠세라 주변을 빠르게 살피며 달렸다. 그러다 현관 로비로 향하는 길과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멈칫했다. 순간 석현은 거칠어진 숨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의 운을 시험하기로 했다. 그는 현관 로비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발견했다. 아니, 하마터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놓칠 뻔했다.
“강아리!”
조문을 오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검은색 정장 스커트 차림에 긴 생머리를 검은색 리본으로 묶은 늘씬한 여자를 그대로 스쳐 갈 뻔했다. 석현의 기억 속의 강아리는 어느 청명한 가을날 요정처럼 짧은 단발머리에 달콤한 솜사탕 빛깔의 시폰 원피스를 입고 있던 통통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본능적인 이끌림에 따라 아리임을 확신했다.
이름을 부르자 흠칫 굳어지는 걸 분명히 목격했는데 아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곧은 자세로 걸어갔다. 석현은 이를 악물고 이번에는 확실하게 아리를 세울 호칭을 소리쳤다.
“망할 강아지! 거기 안 서?”
그의 외침을 들은 순간 아리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정확히 석현을 찾아내 차갑게 쏘아보았다. 역시 별명을 부른 건 예나 지금이나 효과 만점이었다.
석현은 자신을 향한 그녀의 눈빛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벅차게 인식하며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마침내 그는 아리와 눈을 마주하고 섰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죠!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아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화난 얼굴로 톡 쏘아붙였다. 하지만 석현의 돌발 행동에 놀란 그녀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앗, 석현 군!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그에게 덥석 손목을 잡힌 아리는 방어할 틈도 없이 그에게로 몸이 확 기울었고 본능적으로 뭔가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 석현의 단단한 가슴팍이 닿았다. 깜짝 놀란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황당하다는 얼굴로 노려보자 석현이 나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짜 강아리였어. 나를 그렇게 부르는 여자는 너뿐이니까.”
“그럼 내가 귀신이라도 된 줄 알았어요?”
아리는 농담 섞인 비웃음으로 당혹감을 감추었다. 석현의 손을 떨쳐 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점점 더 그의 몸 가까이 끌려가고 말았다. 급기야 거의 끌어안긴 듯한 자세로 서로의 눈을 마주 보게 되자 아리는 진심으로 당황해서 외쳤다.
“왜, 왜 이래요? 놔줘요!”
“싫은데? 네가 말했다시피 귀신이 된 강아리가 나한테 또 못된 장난을 치는 건지, 확인하기 전엔 안 돼.”
“설마, 그걸 농담이라고 한 건 아니겠죠.”
그녀의 빈정거림에 그의 깊은 눈동자에 언뜻 웃음기가 스친 듯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석현은 새카맣게 잦아든 눈빛으로 그녀를 강렬하게 응시했다. 아리는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마음을 어지럽히는 그만의 향기에 사로잡혀 꼼짝도 하지 못했다.
‘혹시, 이 남자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마음 강하게 먹자! 끝까지 태연하게 보여야 해.’
짧은 순간 오만 가지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고 그런 갈등은 고스란히 아리의 눈동자에 드러났다. 그걸 포착한 석현의 눈빛이 매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강아리…… 너 혹시 2년 전에.”
“이거 놔요!”
위험을 직감한 아리는 힘껏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얼굴은 붉어졌고 심장은 도둑질하다가 들킨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마구 쿵쾅거렸다.
“너…….”
석현의 눈매가 의심을 품고 가늘어졌다. 망했다! 머릿속에서 북처럼 울리는 소리에 아리는 좌절하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가벼운 헛기침 소리와 함께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을 끊고 끼어들었다.
“아가씨?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회장님께서 아가씨를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경호원인 박 실장이었다. 그제야 아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이곳이 어디인지 자각했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고 속을 헤아릴 수 없는 눈빛이 되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오늘은 바빠서 이만 가 봐야겠어요. 나중에 기회 되면 또 봐요.”
아리는 굳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과 박 실장, 로비 밖에 대기 중인 검은색 세단을 차례로 주시하는 석현에게 냉담하게 작별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제발 다리가 꼬이지 않고 저 회전문을 통과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아리는 걸음을 떼어 놓았다.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싸늘하게 울리는 석현의 음성이 날아왔다.
“누구야? 설마, 그동안 애인이라도 만든 거니?”
그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의미한 냉소와 경멸이 아리의 몸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걸음을 멈춘 그녀는 입가에 부드럽고 달콤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돌려 석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낮고 쌀쌀맞은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누구와 사귀든 말든, 그건 석현 군과 상관없는 일이죠. 오빠는 내 가족도 뭣도 아니니까.”
“……!”
깨진 유리에 베인 듯한 눈빛으로 미소 짓는 그녀를 본 순간 석현은 자신이 어쩌면 실수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이 그녀가 지나치게 상냥한 눈빛으로 작별을 고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가시죠, 박 실장님.”
도도하게 눈인사를 한 아리는 박 실장의 경호를 받으며 여왕처럼 우아하게 회전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갔다. 아리가 박 실장이 열어 주는 검은색 세단의 뒷좌석에 타자마자 승용차는 지체 없이 서울 병원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그 세단의 뒤를 두 대의 경호 차량이 따르고 있는 걸 석현은 지그시 어금니를 물고 노려보며 서 있었다.
‘그래. 난 너에게 아무것도 아니지. 그런데 내 가슴은 그걸 모르나 보다. 널 본 순간부터 이렇게 미친놈처럼 구는 걸 보면. 마치 네가 돌아와서 좋아 죽겠다는 듯이. 널 붙잡지 않은 날 책망하는 것처럼.’
석현은 한 가지로 정의하기 어려운 뜨거운 감정으로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며 자신을 조롱했다.
제 감정이 무엇인지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느낀 맹목적인 질투였다. 석현은 그런 스스로에게 어이없어하면서도 벌써부터 방금 떠나간 아리가 보고 싶었다.
아리가 왜 떠났든, 무슨 비밀을 숨기고 돌아왔든 석현은 상관없었다. 이제부터 직접 알아내면 되니까.
석현은 그녀가 빠져나간 빈주먹을 지그시 움켜쥐며 몸을 돌렸다. 아리가 돌아온 이상 다시 그녀를 놓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로비의 회전문으로 들어오던 선우진이 그를 발견하고 불렀다.
“이석현? 왜 나와 있어?”
“선우진, 강아리가 돌아왔다.”
석현은 친구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강아리의 귀환을 알렸다.
“뭐? 정말이야? 어디? 그 자식 지금 어디 있는데?”
진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순식간에 기쁨과 걱정이 교차하며 확 날카롭게 변했다. 석현은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머금고 돌아서며 대답해 주었다.
“갔어.”
“뭐라고? 어디로?”
“몰라. 하지만 곧 만나게 될 거다. 그런데 말이야. 아리, 이제 진짜 여자가 되었더라.”
아리를 떠올린 석현의 입술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놀라 입을 딱 벌리고 멍청히 서 있는 진을 뒤에 남겨 두고 석현은 빈소가 차려진 곳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이 아주 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