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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남편의 여자 친구 (1)
소울메이트.
그것이 남편과 혜진을 정의하는 단어였다. 남편의 주장이었다.
남편은 또 말했다. 혜진이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의심하고 간섭하면 불쾌하다고. 물론 수정에게 통하진 않았다.
소울메이트는 얼어 죽을.
남녀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어?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남편은 자신이 총각인 줄 착각하며 혜진과의 시간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랜 설득 끝에 남편은 수정의 의견을 일부 받아들여 이젠 병원에서 말고 사석에선 만나지 않았다. 수정이 알기엔 그랬다.
수정은 남편을 믿는다.
사랑이 많은 성격은 아니지만 배신할 성격은 아니다. 도덕적 결벽증이 있으니까 적어도 남편은 혜진에게 감정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혜진은 다르다. 혜진의 첫사랑이 자신의 남편이기 때문이었다.
“어머, 수정 씨. 오셨네요?”
자신의 영역에 어쩐 일이냐는 투다.
남편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수정은 안다. 여자의 직감이다.
수정은 할 수만 있다면 혜진을 남편이 없는 남극이나 오지 같은 곳에 멀리 떨어뜨리고 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속에선 천불이 나지만 겉으론 불쾌한 티를 낼 수 없었다. 티를 내면 촌스러워 보일 테니까. 혜진의 앞에서 체면을 구길 순 없었다.
“진원이랑 환자 이야기하느라 오신 줄 몰랐네요. 특이한 케이스가 들어왔거든요. 아! 이런 이야기 하면 지루하게 느껴지겠다. 미안해요. 수정 씨.”
일부러 이야기해 놓고 배려하는 척이라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수정 씨는 더 예뻐지셨네요.”
혜진은 감탄하듯 내뱉으며 수정을 바라봤다.
이제껏 철저하게 의도된 말이었다면 이건 은연중에 드러난 본심으로 느껴졌다.
적어도 이 말만큼은 진심일 것이다.
남편이 혜진이 아닌 자신을 선택한 이유에는 분명 예쁜 것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수정의 귀엔 ‘넌 예쁜 게 다야.’라는 말로 들렸다.
어쩌면 자격지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런 감정을 들킬 순 없었다. 더 예쁘게 웃으며 맞받아쳤다.
“혜진 씨도요.”
두 여자의 기 싸움에 진원은 피곤했다.
방긋방긋 웃고 있지만 두 여자 사이에 튀는 강렬한 스파크를 모를 리 없는 그다.
아내와 오랜 친구. 두 사람은 친해질 수 없는 걸까? 왜 매번 만나기만 하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날들을 세우는지 진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웬일이야?”
진원은 아내의 용건을 짐작하면서도 두 여자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짐짓 모르는 척 질문을 했다. 수정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당신이랑 점심이나 같이하려고요.”
“오늘은 점심 안 먹을 거야. 바빠.”
“오늘, 같이 먹어요. 꼭 같이 먹고 싶어요.”
바쁘다는데 이 여자가 왜 이래?
진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혜진이 대답했다.
“그래 진원아. 여기까지 오셨는데 안 먹는다는 게 말이 돼? 어서 가봐. 좋은 거 사 드리고.”
자신이 이야기할 땐 눈썹을 구부리고 듣는 시늉도 하지 않더니 혜진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진원의 행동에 수정은 자존심이 상했다. 슬며시 혜진을 바라보니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대체 누가 아내인지 모르겠다.
“일은 내가 처리할게. 가 봐 그럼.”
진원은 혜진의 배려가 고마웠다.
그녀는 일적으로 완벽한 파트너였고 사적으론 항상 자신의 아내를 챙겨 주는 고마운 친구이다.
수정도 이런 혜진의 마음 씀씀이를 깨달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철이 없는 아내는 오늘도 쓸데없이 질투라는 감정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었다.
“여보. 혜진 씨랑 소울메이트인가 그거 그만두면 안 돼요?”
수정이 자존심을 굽혀 가며 사정했다.
“당신이 사석에서 혜진이를 만나기라도 하면 불륜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겨서 그만둔 지 오래야. 그 억지 덕에 사석에선 전혀 만나지 않아.”
“아까 분위기 좋던데요? 화기애애.”
진원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10년 우정 끊는 것도 모자라 밖에선 일절 만나지 않잖아. 대체 여기서 뭘 어떻게 더 할까?”
“병원에서도 되도록.”
“병원 일까지 간섭하려고 하지 마. 피곤해.”
남편의 말도 일리가 있다.
남편과 혜진은 대학 동기이자 같은 병원에서 의사로 함께 근무하고 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깊은 인연이며 서로에게 필요한 동료임을 수정도 잘 알고 있었다.
“소울메이트, 하지 마세요. 그럼 피곤하게 안 굴게요.”
사실 수정에겐 소울메이트란 단어 자체가 충격이었다. 이해도 되지 않았다.
자신은 남편이 불쾌해할까 봐 결혼 전 그 많던 이성 친구와의 연락도 끊었다. 상대도 자신과 같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남편은 아니었다.
남편은 쿨해도 너무 쿨했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미국 국적을 가진 사람처럼 남녀 사이에도 친구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애원해도 혜진과의 10년 세월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도 끝끝내 소울메이트를 포기하겠다는 말은 해 주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극약 처방을 쓸 수밖에 없다.
“당신 끝까지 내 말 무시하고 혜진 씨하고 소울메이트 계속하겠다면 나도 당신처럼 남자 사람 친구 만들 거예요. 나도 소울메이트 만들 거라고요.”
작전 성공인가?
좀처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남편의 얼굴에 미세하게 균열이 일었다. 충격인 모양이다. 결혼 생활 5년 만에 처음 보는 감정변화에 수정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수정은 긴장하며 남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남편이 대답했다.
“그러든가.”
#2. 남편의 여자 친구 (2)
“당신, 진심이에요?”
수정은 질색하며 되물었다. 진심이 아니길 바라며 되물었건만 진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남편이 존재할 수가.
“저 방금 ‘남자 친구’ 만들 거라고 말했어요. 당신 제대로 이해한 거 맞아요?”
“제대로 이해했어. 당신도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필요하다는 거잖아. 그 친구가 남자든 여자든 성별이 중요할까? 난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성별이 남자든 여자든 중요하지 않다고?
이 인간. 여기가 미국인 줄 아나. 여긴 대한민국이야 대한민국!
차마 꺼내지 못한 말들을 속으로 밀어 넣으며 수정은 파르르 떨었다. 쿨해도 너무 쿨한 남편의 태도가 섭섭했다.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심지어 궁금한 마음마저 들었다.
“만들어 봐. 소울메이트.”
분명 처음에 ‘남자 친구’를 만들겠다는 말을 꺼냈을 땐 순간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보인 남편이었다. 잠시였지만 수정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시없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인 척, 아내를 생각하는 척. 무슨 꿍꿍인지 의도가 궁금했다.
“만들 수 있으면 말이지.”
수정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 사람은 자신이 남자 사람 친구 만드는 것을 눈감아 줄 테니 더 이상 혜진과의 관계를 캐묻지 말라고 돌려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절대 남자 사람 친구를 만들지 못함을.
“알았어요. 나도 만들게요. 남자 친구.”
“그래 잘되길 바랄게.”
여유롭게 웃기까지!
그 후론 식사하는 둥 마는 둥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남편과 대화를 나누겠다는 소박한 희망조차 이룰 수 없는 시간이었다.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
“아가야. 너 내 남자 친구 할래?”
수정은 공원에서 흙장난하는 아이 곁으로 다가가 헛소리를 내뱉었다.
아이가 이상한 아줌마 다 보겠다는 듯 경계하며 바라봤다. 질색하는 아이의 표정에 수정은 정신이 들었다.
“아줌마가 미안. 미안하니까 사탕 줄게.”
남편의 짐작이 맞았다.
수정에겐 감히 남자 친구를 만들 만한 배짱이 없었다. 또 애초에 남아 있는 남자 사람 친구도 없었다. 결혼하고 혹시라도 오해를 받을까 봐 연락을 끊었다. 자연스레 수정의 주변이 정리됐다. 그때의 수정은 친구들보단 남편과 가정이 소중했었다.
지금까지 후회는 없었는데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으면 딱 한 명쯤은 남겨 둘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너무 늦은 후회였다.
“몇 살이야? 이름은?”
“네 짤이요. 현이요.”
“그래? 현이구나. 예쁘다 참. 어쩜 이렇게 예뻐?”
아이의 얼굴이 수정의 말에 새초롬하게 변했다.
“예쁜 게 아니라 잘생긴 거예요.”
풋.
수정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 그러네. 아줌마가 실수했다. 미안.”
남편이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농락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하는 것이 화가 났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다른 여자들은 뺨이라도 날리며 정신 차리라고 일침을 놓을지도 모르지만, 수정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남편은 너무 어려운 남자였다. 또 혜진과의 관계를 깨끗하게 청산시키지 못해 찝찝했다.
그런 꿀꿀한 기분을 귀여운 아이들을 보며 달랬다. 공원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저절로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위로받은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줌마. 사탕 더 주세요.”
“너무 많이 먹으면 이 썩어.”
“사탕 먹고 이빨 닦으면 돼요.”
“그럼 딱 하나만 더 줄게. 더는 안 돼?”
“넵.”
수정은 따뜻하게 웃으며 가방에서 꺼낸 사탕을 아이의 손에 올려 주었다.
“사탕이다!”
수정은 늘 길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줄 생각으로 가방 안에 사탕을 가득 채우고 다녔다. 사탕을 주면서 아이들과 한두 마디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대리만족이었다.
아이가 갖고 싶다.
아이는 수정의 오랜 소원이었다.
수정은 결혼 전부터 아이 욕심이 많았다. 결혼하기 전 아이를 최소 네 명은 낳고 싶다는 꿈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5년이 지난 지금 아직까지도 아이의 소식은 없었다. 병원에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 것인지 수정은 답답하고 서글펐다.
그래. 우리 남편 잔정 없고 따뜻한 말 할 줄도 모르지만 적어도 불륜을 저지를 위인은 아니잖아. 그냥 이해해 주자. 친구가 필요하다잖아. 배려가 필요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잖아. 남들보다 더 이해하고 그 사람 배려해 줘야 해.
하지만……. 하지만.
주혜진 말고 다른 여잔 안 되는 거야? 그 여잔 당신을 아직도 좋아하고 있다고!
***
[여보, 오늘 제가 잘못했어요. 일찍 들어오세요. 기다릴게요.]
아내의 메시지다.
진원은 작게 미소 지었다. 1년 365일 얼음 같은 표정만 짓는 그에겐 흔치 않은 일이었다.
큰소리 떵떵 쳤지만, 보수적이고 겁이 많은 그녀는 절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을 리 없었다. 그런 아내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진원은 마음 놓고 도발까지 하며 아내를 떠밀었다. 예상대로였다. 이번에도 수정은 반항하지 못했다.
혜진은 그런 진원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쟤가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 애던가?
“누구? 수정 씨?”
진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일찍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오늘만 마무리 부탁할게.”
빠르게 일어나는 진원을 혜진이 다급한 표정으로 붙잡았다.
“오늘 내 생일인데. 진원아.”
애써 투정하듯 말하는 혜진의 표정이 슬펐다. 진원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알고 지냈지만 올해도 자신의 생일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혜진은 섭섭해서 울 것 같았지만, 서글픈 마음을 누르고 쿨하게 웃었다.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미안하다. 선물은 내일 줄게.”
“그래. 꼭 내일 선물 주라.”
“그래야지.”
“수정 씨 잘 챙겨 줘. 나 때문에 많이 섭섭했을 거야. 수정 씨, 아직도 나 많이 신경 쓰고 있잖아.”
#1. 남편의 여자 친구 (1)
소울메이트.
그것이 남편과 혜진을 정의하는 단어였다. 남편의 주장이었다.
남편은 또 말했다. 혜진이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의심하고 간섭하면 불쾌하다고. 물론 수정에게 통하진 않았다.
소울메이트는 얼어 죽을.
남녀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어?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남편은 자신이 총각인 줄 착각하며 혜진과의 시간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랜 설득 끝에 남편은 수정의 의견을 일부 받아들여 이젠 병원에서 말고 사석에선 만나지 않았다. 수정이 알기엔 그랬다.
수정은 남편을 믿는다.
사랑이 많은 성격은 아니지만 배신할 성격은 아니다. 도덕적 결벽증이 있으니까 적어도 남편은 혜진에게 감정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혜진은 다르다. 혜진의 첫사랑이 자신의 남편이기 때문이었다.
“어머, 수정 씨. 오셨네요?”
자신의 영역에 어쩐 일이냐는 투다.
남편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수정은 안다. 여자의 직감이다.
수정은 할 수만 있다면 혜진을 남편이 없는 남극이나 오지 같은 곳에 멀리 떨어뜨리고 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속에선 천불이 나지만 겉으론 불쾌한 티를 낼 수 없었다. 티를 내면 촌스러워 보일 테니까. 혜진의 앞에서 체면을 구길 순 없었다.
“진원이랑 환자 이야기하느라 오신 줄 몰랐네요. 특이한 케이스가 들어왔거든요. 아! 이런 이야기 하면 지루하게 느껴지겠다. 미안해요. 수정 씨.”
일부러 이야기해 놓고 배려하는 척이라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수정 씨는 더 예뻐지셨네요.”
혜진은 감탄하듯 내뱉으며 수정을 바라봤다.
이제껏 철저하게 의도된 말이었다면 이건 은연중에 드러난 본심으로 느껴졌다.
적어도 이 말만큼은 진심일 것이다.
남편이 혜진이 아닌 자신을 선택한 이유에는 분명 예쁜 것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수정의 귀엔 ‘넌 예쁜 게 다야.’라는 말로 들렸다.
어쩌면 자격지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런 감정을 들킬 순 없었다. 더 예쁘게 웃으며 맞받아쳤다.
“혜진 씨도요.”
두 여자의 기 싸움에 진원은 피곤했다.
방긋방긋 웃고 있지만 두 여자 사이에 튀는 강렬한 스파크를 모를 리 없는 그다.
아내와 오랜 친구. 두 사람은 친해질 수 없는 걸까? 왜 매번 만나기만 하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날들을 세우는지 진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웬일이야?”
진원은 아내의 용건을 짐작하면서도 두 여자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짐짓 모르는 척 질문을 했다. 수정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당신이랑 점심이나 같이하려고요.”
“오늘은 점심 안 먹을 거야. 바빠.”
“오늘, 같이 먹어요. 꼭 같이 먹고 싶어요.”
바쁘다는데 이 여자가 왜 이래?
진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혜진이 대답했다.
“그래 진원아. 여기까지 오셨는데 안 먹는다는 게 말이 돼? 어서 가봐. 좋은 거 사 드리고.”
자신이 이야기할 땐 눈썹을 구부리고 듣는 시늉도 하지 않더니 혜진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진원의 행동에 수정은 자존심이 상했다. 슬며시 혜진을 바라보니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대체 누가 아내인지 모르겠다.
“일은 내가 처리할게. 가 봐 그럼.”
진원은 혜진의 배려가 고마웠다.
그녀는 일적으로 완벽한 파트너였고 사적으론 항상 자신의 아내를 챙겨 주는 고마운 친구이다.
수정도 이런 혜진의 마음 씀씀이를 깨달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철이 없는 아내는 오늘도 쓸데없이 질투라는 감정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었다.
“여보. 혜진 씨랑 소울메이트인가 그거 그만두면 안 돼요?”
수정이 자존심을 굽혀 가며 사정했다.
“당신이 사석에서 혜진이를 만나기라도 하면 불륜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겨서 그만둔 지 오래야. 그 억지 덕에 사석에선 전혀 만나지 않아.”
“아까 분위기 좋던데요? 화기애애.”
진원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10년 우정 끊는 것도 모자라 밖에선 일절 만나지 않잖아. 대체 여기서 뭘 어떻게 더 할까?”
“병원에서도 되도록.”
“병원 일까지 간섭하려고 하지 마. 피곤해.”
남편의 말도 일리가 있다.
남편과 혜진은 대학 동기이자 같은 병원에서 의사로 함께 근무하고 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깊은 인연이며 서로에게 필요한 동료임을 수정도 잘 알고 있었다.
“소울메이트, 하지 마세요. 그럼 피곤하게 안 굴게요.”
사실 수정에겐 소울메이트란 단어 자체가 충격이었다. 이해도 되지 않았다.
자신은 남편이 불쾌해할까 봐 결혼 전 그 많던 이성 친구와의 연락도 끊었다. 상대도 자신과 같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남편은 아니었다.
남편은 쿨해도 너무 쿨했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미국 국적을 가진 사람처럼 남녀 사이에도 친구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애원해도 혜진과의 10년 세월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도 끝끝내 소울메이트를 포기하겠다는 말은 해 주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극약 처방을 쓸 수밖에 없다.
“당신 끝까지 내 말 무시하고 혜진 씨하고 소울메이트 계속하겠다면 나도 당신처럼 남자 사람 친구 만들 거예요. 나도 소울메이트 만들 거라고요.”
작전 성공인가?
좀처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남편의 얼굴에 미세하게 균열이 일었다. 충격인 모양이다. 결혼 생활 5년 만에 처음 보는 감정변화에 수정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수정은 긴장하며 남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남편이 대답했다.
“그러든가.”
#2. 남편의 여자 친구 (2)
“당신, 진심이에요?”
수정은 질색하며 되물었다. 진심이 아니길 바라며 되물었건만 진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남편이 존재할 수가.
“저 방금 ‘남자 친구’ 만들 거라고 말했어요. 당신 제대로 이해한 거 맞아요?”
“제대로 이해했어. 당신도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필요하다는 거잖아. 그 친구가 남자든 여자든 성별이 중요할까? 난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성별이 남자든 여자든 중요하지 않다고?
이 인간. 여기가 미국인 줄 아나. 여긴 대한민국이야 대한민국!
차마 꺼내지 못한 말들을 속으로 밀어 넣으며 수정은 파르르 떨었다. 쿨해도 너무 쿨한 남편의 태도가 섭섭했다.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심지어 궁금한 마음마저 들었다.
“만들어 봐. 소울메이트.”
분명 처음에 ‘남자 친구’를 만들겠다는 말을 꺼냈을 땐 순간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보인 남편이었다. 잠시였지만 수정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시없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인 척, 아내를 생각하는 척. 무슨 꿍꿍인지 의도가 궁금했다.
“만들 수 있으면 말이지.”
수정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 사람은 자신이 남자 사람 친구 만드는 것을 눈감아 줄 테니 더 이상 혜진과의 관계를 캐묻지 말라고 돌려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절대 남자 사람 친구를 만들지 못함을.
“알았어요. 나도 만들게요. 남자 친구.”
“그래 잘되길 바랄게.”
여유롭게 웃기까지!
그 후론 식사하는 둥 마는 둥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남편과 대화를 나누겠다는 소박한 희망조차 이룰 수 없는 시간이었다.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
“아가야. 너 내 남자 친구 할래?”
수정은 공원에서 흙장난하는 아이 곁으로 다가가 헛소리를 내뱉었다.
아이가 이상한 아줌마 다 보겠다는 듯 경계하며 바라봤다. 질색하는 아이의 표정에 수정은 정신이 들었다.
“아줌마가 미안. 미안하니까 사탕 줄게.”
남편의 짐작이 맞았다.
수정에겐 감히 남자 친구를 만들 만한 배짱이 없었다. 또 애초에 남아 있는 남자 사람 친구도 없었다. 결혼하고 혹시라도 오해를 받을까 봐 연락을 끊었다. 자연스레 수정의 주변이 정리됐다. 그때의 수정은 친구들보단 남편과 가정이 소중했었다.
지금까지 후회는 없었는데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으면 딱 한 명쯤은 남겨 둘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너무 늦은 후회였다.
“몇 살이야? 이름은?”
“네 짤이요. 현이요.”
“그래? 현이구나. 예쁘다 참. 어쩜 이렇게 예뻐?”
아이의 얼굴이 수정의 말에 새초롬하게 변했다.
“예쁜 게 아니라 잘생긴 거예요.”
풋.
수정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 그러네. 아줌마가 실수했다. 미안.”
남편이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농락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하는 것이 화가 났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다른 여자들은 뺨이라도 날리며 정신 차리라고 일침을 놓을지도 모르지만, 수정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남편은 너무 어려운 남자였다. 또 혜진과의 관계를 깨끗하게 청산시키지 못해 찝찝했다.
그런 꿀꿀한 기분을 귀여운 아이들을 보며 달랬다. 공원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저절로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위로받은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줌마. 사탕 더 주세요.”
“너무 많이 먹으면 이 썩어.”
“사탕 먹고 이빨 닦으면 돼요.”
“그럼 딱 하나만 더 줄게. 더는 안 돼?”
“넵.”
수정은 따뜻하게 웃으며 가방에서 꺼낸 사탕을 아이의 손에 올려 주었다.
“사탕이다!”
수정은 늘 길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줄 생각으로 가방 안에 사탕을 가득 채우고 다녔다. 사탕을 주면서 아이들과 한두 마디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대리만족이었다.
아이가 갖고 싶다.
아이는 수정의 오랜 소원이었다.
수정은 결혼 전부터 아이 욕심이 많았다. 결혼하기 전 아이를 최소 네 명은 낳고 싶다는 꿈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5년이 지난 지금 아직까지도 아이의 소식은 없었다. 병원에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 것인지 수정은 답답하고 서글펐다.
그래. 우리 남편 잔정 없고 따뜻한 말 할 줄도 모르지만 적어도 불륜을 저지를 위인은 아니잖아. 그냥 이해해 주자. 친구가 필요하다잖아. 배려가 필요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잖아. 남들보다 더 이해하고 그 사람 배려해 줘야 해.
하지만……. 하지만.
주혜진 말고 다른 여잔 안 되는 거야? 그 여잔 당신을 아직도 좋아하고 있다고!
***
[여보, 오늘 제가 잘못했어요. 일찍 들어오세요. 기다릴게요.]
아내의 메시지다.
진원은 작게 미소 지었다. 1년 365일 얼음 같은 표정만 짓는 그에겐 흔치 않은 일이었다.
큰소리 떵떵 쳤지만, 보수적이고 겁이 많은 그녀는 절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을 리 없었다. 그런 아내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진원은 마음 놓고 도발까지 하며 아내를 떠밀었다. 예상대로였다. 이번에도 수정은 반항하지 못했다.
혜진은 그런 진원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쟤가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 애던가?
“누구? 수정 씨?”
진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일찍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오늘만 마무리 부탁할게.”
빠르게 일어나는 진원을 혜진이 다급한 표정으로 붙잡았다.
“오늘 내 생일인데. 진원아.”
애써 투정하듯 말하는 혜진의 표정이 슬펐다. 진원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알고 지냈지만 올해도 자신의 생일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혜진은 섭섭해서 울 것 같았지만, 서글픈 마음을 누르고 쿨하게 웃었다.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미안하다. 선물은 내일 줄게.”
“그래. 꼭 내일 선물 주라.”
“그래야지.”
“수정 씨 잘 챙겨 줘. 나 때문에 많이 섭섭했을 거야. 수정 씨, 아직도 나 많이 신경 쓰고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