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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다 티가 난 걸까?
진원은 혜진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이 미안했다. 게다가 그녀의 생일을 깜빡 잊은 것도 마음에 걸렸다.
“너한테 미안하다.”
“진원아. 수정 씨가 나 경계하는 거 당연한 감정이야. 수정 씨처럼 배려심 많은 여자 아니면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느냐며 막말로 나 뺨 맞았을지도 몰라.”
“그래. 좋은 여자야. 나한테 과분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내는 진원이 아는 여자 중 가장 마음이 따뜻하고 여린 여자였다.
스물다섯 살 어린 나이에 자신에게 시집을 온 아내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병간호까지 손수 맡을 정도로 정이 많았다.
할머니를 간병하는 그녀의 얼굴엔 가식이란 없었다. 처음엔 얼굴 말고는 볼 것 없는 어린 여자에게 잘난 아들을 빼앗겼다며 아내를 냉대하던 부모님도 할머니를 병간호하는 그녀의 정성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언젠가부터 자신이 아닌 아내의 편을 들고 있었다.
한 달 전엔 냉정하고 정 없는 아들보다 착하고 다정한 며느리가 백배 천배 좋다고 대놓고 말했을 정도였다.
“수정 씨 사랑하니?”
진원의 눈이 조금 커진 듯보였다. 혜진은 말해 놓고도 아차, 싶었다. 내보여서는 안 되는 감정이었다. 진원은 마치 제 감정을 눈치라도 챈 것처럼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사랑해.”
#3. 남편의 여자 친구 (3)
수정은 아이처럼 웃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남편이 꽃바구니를 들고 귀가했기 때문이었다. 결혼기념일을 제외하곤 처음 받는 선물인 것 같다. 아니 실제로 처음이었다.
얼굴 따라 성격 따라가는 건지 차갑게 생긴 이 남자는 반전 없이 쌀쌀맞고 개인적인 성격이었다. 여자 마음을 모르는, 아니 사람 마음을 모르는 남편이지만 오늘만큼은 야속하긴커녕 마음이 설렌다. 아마 꽃이 너무 예뻐서 그런가 보다.
“꽃이 예쁘네요.”
나이가 서른이 됐는데도 수정은 아직도 꽃만 보면 소녀처럼 설렌다. 숫자로 나이만 먹었을 뿐 마음속에 자리 잡은 소녀는 아직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원은 화사하게 웃는 수정을 쳐다보며 처음 만났던 스물다섯 살의 수정의 얼굴을 떠올렸다.
“고마워요. 여보. 당신도 나한테 미안했던 거죠? 나도 낮에 당신한테 큰소리쳐서 미안했어요. 안 그럴게요.”
수정은 금방 저자세로 나갔다. 남편이 이렇게 자신을 생각해 주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큰소리를 내지 않았을 건데 하고 후회도 했다.
“그 꽃 혜진이가 고른 거야.”
남편이 입을 열기 전까진 그랬다.
“뭐라고요?”
이 미친 인간.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수정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시뻘게졌다. 설마하니 지금 이 순간 그 이름을 또 저 입에서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차라리 길에 버려져 있는 꽃을 들고 왔다고 둘러대는 것이 기분이 덜 상했을 것이다.
“열 내지 마. 당신이 혜진이하고 있었던 일은 한 가지도 빠짐없이 보고하라고 해서 설명하는 것뿐이니까. 거짓말하는 거 싫어하잖아. 당신.”
누가 이런 거까지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어? 머리 좋은 양반이 사람 마음은 대체 왜 이렇게 몰라.
“애초에 혜진 씨가 꽃을 왜 고르게 해요?”
수정은 살면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었다.
찔리는 것도 없고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진원은 그런 수정의 낯선 모습에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오늘 자기 때문에 당신, 기분 상한 것 같다며 미안하다고 했어. 그래서 꽃 사 가는 게 좋겠다고 말한 게 혜진이야. 혜진이가 당신 많이 생각해 주더라.”
이 미친 인간.
날 생각해 주는 게 아니라 당신한테 점수 잘 따려는 수작인 걸 모르겠어?
그 순간, 수정은 자신을 만날 때마다 내 아들은 학창시절 전교 1등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는 시어머니의 레퍼토리가 거짓으로 느껴졌다. 오늘따라 진원이 남편이 아니라 반푼이로 보였다.
“좋은 애야 혜진이.”
좋은 여자가 남의 집 남편을 탐내던가? 좋은 여자가 기분 나쁜 티를 내면 쪼잔하게 보일 정도로 약한 스킨십을 하고 수시로 연락하며 남의 남자 주변을 배회하던가?
지금 수정의 눈엔 남편의 입이 주둥이로 보였다.
더 이상은 못 참아. 아니 안 참아!
파르르 몸을 떨던 수정은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남편의 뺨을 올렸다.
하지만 이는 마음속의 상상일 뿐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수정보다 여섯 살이나 위인 진원은 말로는 한 마디도 져주지 않는 말싸움의 달인이었다. 또 혜진과의 사이를 의심하는 자신에게 ‘의심하는 것도 병이야. 피해망상증, 집착증, 편집증 등이 의심되니 자중해.’라고 말하며 그녀를 병적인 환자로 몰고 갈 게 뻔했다.
둘의 사이는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 관계였다. 수정은 마음속 상상으로나마 스트레스를 풀었다.
“샤워하고 올게.”
“네. 그러세요.”
***
진원은 샤워하며 아내의 질색하던 표정을 되짚어 보았다. 또 자신이 선물한 것은 비밀로 하는 게 좋겠다는 혜진의 조언도 함께 떠올렸다. 늘 예쁘게 웃으며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내가 혜진의 이름을 꺼내자 질색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자꾸 생각났다.
그 표정을 떠올리니 슬금슬금 짜증이 올라오는데 이런 감정이 무슨 마음에서 오는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혜진의 말대로 자신이 사 온 것이 맞다고 둘러댔어야 했나.
하지만 이미 자신과 혜진의 사이를 의심하는 아내에게 거짓으로 말했다가 밝혀질 시에 더 큰 의심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자신의 마음에 떳떳하니 거짓말을 할 필요성도 없다고 생각했다.
진원의 입장은 그랬다.
“식사하세요.”
또 얼마나 삐쳐 있으려나 걱정하며 나오는 진원의 앞을 마중 나온 수정의 얼굴은 뜻밖에도 정갈하며 단정했다.
“흠.”
화가 난 게 아니었나?
진원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수정을 본다.
수정은 살짝 미소 지었다. 한동안은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하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그래도 남편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점수를 주고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수정은 늘 참는 쪽이었다. 수정의 무조건 참는 버릇은 1년 전 엄마가 중풍으로 쓰러졌을 때 남편이 직접 병실도 알아봐 주며 내내 신경 써 준 이후 새로 생긴 버릇이었다.
엄마를 따로 만나기도 싫어할 만큼 냉정하고 무관심하던 남편이 그 당시만큼은 지극정성을 보였다.
그때 남편에게 너무도 감사했던 수정은 사는 동안 백 번 정도는 남편이 섭섭하게 굴어도 참고 잘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생전 엄마 생신 때 전화 한번 안 받아 준 못된 인간이지만 힘든 시기에 의지가 되었던 고마운 기억이 오래갔다. 섭섭하고 화가 날 때마다 족쇄처럼 그녀를 옭아맸다.
“여보 많이 먹어요. 그리고 꽃 고마워요. 예뻐요. 두고두고 볼게요.”
남편은 대답이 없었다. 수정은 입을 살짝 삐죽거리다 갈치의 살을 발라 진원의 수저에 올려 주었다. 눈이 마주쳤다. 수정이 방긋 웃었다.
여전히 무뚝뚝하고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갈치조림이 맛있었는지 입맛 까다로운 양반이 두 그릇이나 밥을 비웠다. 미워도 남편의 입으로 밥이 들어가니 수정은 기분이 좋았다.
***
“어디 가세요?”
늦은 새벽.
침대에서 자고 있어야 할 남편이 일어서서 외투를 입고 있었다.
“혜진이한테.”
진원은 아내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 것을 알면서도 솔직히 털어놓았다.
“뭐라고요?”
수정은 진원이 예상한 것 이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아프다네. 오늘 생일이었는데.”
그래서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인 거예요, 당신?
“혜진 씨가 아픈데 당신이 거길 왜 가요?”
“혜진이 챙겨 줄 사람 없는 거 알잖아. 걔 아무도 없어. 나밖엔.”
“혜진 씨가 왜 당신밖에 없어요. 혜진 씨도 당신 말고 친구도 있고 가족도 있어요.”
“걔 가족들 가족이 아니라 거머리고 날강도들이야. 알잖아. 당신도.”
혜진의 오빠는 사기전과만 5범으로 합의금만 수천만 원을 찍었고, 그녀의 부모님은 잘난 딸만 믿고 환갑도 되기 전에 손에서 일을 놓았다.
수정도 혜진의 딱한 사정을 듣고 함께 가슴 아파했고 그녀의 슬픈 인생을 위로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불쌍하다고 남편을 빼앗길 순 없었다.
“생일인데 딱하잖아. 약만 전해 주고 올게.”
“가지 마세요.”
“수정아.”
“그 여자 정말 이상한 여자야. 이 새벽에 유부남을 부른다는 게 말이 돼요? 대놓고 유혹하겠다는 거야 뭐야. 파렴치해. 진짜.”
수정은 속에 있는 말을 전부 쏟아부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터지고 썩어 문드러질 것 같았다.
진원의 표정이 예민해졌다.
“말조심해.”
“말은 당신이 조심하세요.”
수정은 울먹거리면서도 또박또박 받아쳤다.
진원은 처음 보는 아내의 반항에 깜짝 놀랐다. 순종적이고 착한 아내가 아닌 것 같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신, 진짜.”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화가 난 남편의 표정에 수정은 금세 기가 죽었다. 피곤한 듯 한숨 쉬는 그의 얼굴에 안절부절못했다.
결혼 전엔 혼자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살던 자유로운 영혼이 어쩌다 이렇게 남편 눈치만 보는 바보 멍청이가 됐는지 모르겠다.
“간다.”
수정은 진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스르르 무너졌다.
#4. 오수정의 첫 번째 남자 (1)
“아프다더니.”
진원은 으득 이를 물고 혜진을 노려봤다. 당장 응급실에라도 보내야 할 정도로 위급상황을 예상하고 달려왔건만 혜진의 상태는 아주 양호했다.
“아파. 마음이.”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은 혜진이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진원의 얼굴이 날카로워졌다.
“다신 이런 장난치지 마라. 친구라면.”
“정확히 12시에 내 생일 지나가자마자.”
그대로 돌아서는 진원을 붙잡기 위해 혜진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돈 필요하다고 또 전화 왔더라. 오빠가 또 사고 쳤대.”
우뚝 멈춰 선 진원이 돌아섰다. 돌아선 진원의 눈동자가 커졌다. 혜진이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늘 강하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의연한 혜진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진원은 큰 충격을 받았다.
“가족이라면 서로 울타리가 되어 주고 의지가 되어야지, 왜 나만 울타리가 되어야 하는데. 왜 내 가족들은 이 모양인데. 차라리 고아가 낫겠어. 지겹고 환멸스러워. 진원아 나 너무 힘들어.”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진원이 혜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혜진아 넌 혼자가 아니야.”
그 큰 가슴에 기댄 채 혜진이 눈물을 흘렸다.
이대로 진원의 품에 여자로 안기고 싶다. 하룻밤에 사라질 꿈이라 할지라도 혜진은 자신의 모든 걸 바쳐서라도 진원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한 걸음 다가가려 하면 열 걸음 아니 백 걸음은 도망칠 그를 혜진은 잘 알고 있었다. 결벽증 때문에라도 자신을 받아 줄 남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친구로서만 그의 품에 안겼다.
다 티가 난 걸까?
진원은 혜진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이 미안했다. 게다가 그녀의 생일을 깜빡 잊은 것도 마음에 걸렸다.
“너한테 미안하다.”
“진원아. 수정 씨가 나 경계하는 거 당연한 감정이야. 수정 씨처럼 배려심 많은 여자 아니면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느냐며 막말로 나 뺨 맞았을지도 몰라.”
“그래. 좋은 여자야. 나한테 과분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내는 진원이 아는 여자 중 가장 마음이 따뜻하고 여린 여자였다.
스물다섯 살 어린 나이에 자신에게 시집을 온 아내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병간호까지 손수 맡을 정도로 정이 많았다.
할머니를 간병하는 그녀의 얼굴엔 가식이란 없었다. 처음엔 얼굴 말고는 볼 것 없는 어린 여자에게 잘난 아들을 빼앗겼다며 아내를 냉대하던 부모님도 할머니를 병간호하는 그녀의 정성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언젠가부터 자신이 아닌 아내의 편을 들고 있었다.
한 달 전엔 냉정하고 정 없는 아들보다 착하고 다정한 며느리가 백배 천배 좋다고 대놓고 말했을 정도였다.
“수정 씨 사랑하니?”
진원의 눈이 조금 커진 듯보였다. 혜진은 말해 놓고도 아차, 싶었다. 내보여서는 안 되는 감정이었다. 진원은 마치 제 감정을 눈치라도 챈 것처럼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사랑해.”
#3. 남편의 여자 친구 (3)
수정은 아이처럼 웃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남편이 꽃바구니를 들고 귀가했기 때문이었다. 결혼기념일을 제외하곤 처음 받는 선물인 것 같다. 아니 실제로 처음이었다.
얼굴 따라 성격 따라가는 건지 차갑게 생긴 이 남자는 반전 없이 쌀쌀맞고 개인적인 성격이었다. 여자 마음을 모르는, 아니 사람 마음을 모르는 남편이지만 오늘만큼은 야속하긴커녕 마음이 설렌다. 아마 꽃이 너무 예뻐서 그런가 보다.
“꽃이 예쁘네요.”
나이가 서른이 됐는데도 수정은 아직도 꽃만 보면 소녀처럼 설렌다. 숫자로 나이만 먹었을 뿐 마음속에 자리 잡은 소녀는 아직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원은 화사하게 웃는 수정을 쳐다보며 처음 만났던 스물다섯 살의 수정의 얼굴을 떠올렸다.
“고마워요. 여보. 당신도 나한테 미안했던 거죠? 나도 낮에 당신한테 큰소리쳐서 미안했어요. 안 그럴게요.”
수정은 금방 저자세로 나갔다. 남편이 이렇게 자신을 생각해 주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큰소리를 내지 않았을 건데 하고 후회도 했다.
“그 꽃 혜진이가 고른 거야.”
남편이 입을 열기 전까진 그랬다.
“뭐라고요?”
이 미친 인간.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수정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시뻘게졌다. 설마하니 지금 이 순간 그 이름을 또 저 입에서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차라리 길에 버려져 있는 꽃을 들고 왔다고 둘러대는 것이 기분이 덜 상했을 것이다.
“열 내지 마. 당신이 혜진이하고 있었던 일은 한 가지도 빠짐없이 보고하라고 해서 설명하는 것뿐이니까. 거짓말하는 거 싫어하잖아. 당신.”
누가 이런 거까지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어? 머리 좋은 양반이 사람 마음은 대체 왜 이렇게 몰라.
“애초에 혜진 씨가 꽃을 왜 고르게 해요?”
수정은 살면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었다.
찔리는 것도 없고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진원은 그런 수정의 낯선 모습에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오늘 자기 때문에 당신, 기분 상한 것 같다며 미안하다고 했어. 그래서 꽃 사 가는 게 좋겠다고 말한 게 혜진이야. 혜진이가 당신 많이 생각해 주더라.”
이 미친 인간.
날 생각해 주는 게 아니라 당신한테 점수 잘 따려는 수작인 걸 모르겠어?
그 순간, 수정은 자신을 만날 때마다 내 아들은 학창시절 전교 1등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는 시어머니의 레퍼토리가 거짓으로 느껴졌다. 오늘따라 진원이 남편이 아니라 반푼이로 보였다.
“좋은 애야 혜진이.”
좋은 여자가 남의 집 남편을 탐내던가? 좋은 여자가 기분 나쁜 티를 내면 쪼잔하게 보일 정도로 약한 스킨십을 하고 수시로 연락하며 남의 남자 주변을 배회하던가?
지금 수정의 눈엔 남편의 입이 주둥이로 보였다.
더 이상은 못 참아. 아니 안 참아!
파르르 몸을 떨던 수정은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남편의 뺨을 올렸다.
하지만 이는 마음속의 상상일 뿐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수정보다 여섯 살이나 위인 진원은 말로는 한 마디도 져주지 않는 말싸움의 달인이었다. 또 혜진과의 사이를 의심하는 자신에게 ‘의심하는 것도 병이야. 피해망상증, 집착증, 편집증 등이 의심되니 자중해.’라고 말하며 그녀를 병적인 환자로 몰고 갈 게 뻔했다.
둘의 사이는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 관계였다. 수정은 마음속 상상으로나마 스트레스를 풀었다.
“샤워하고 올게.”
“네. 그러세요.”
***
진원은 샤워하며 아내의 질색하던 표정을 되짚어 보았다. 또 자신이 선물한 것은 비밀로 하는 게 좋겠다는 혜진의 조언도 함께 떠올렸다. 늘 예쁘게 웃으며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내가 혜진의 이름을 꺼내자 질색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자꾸 생각났다.
그 표정을 떠올리니 슬금슬금 짜증이 올라오는데 이런 감정이 무슨 마음에서 오는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혜진의 말대로 자신이 사 온 것이 맞다고 둘러댔어야 했나.
하지만 이미 자신과 혜진의 사이를 의심하는 아내에게 거짓으로 말했다가 밝혀질 시에 더 큰 의심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자신의 마음에 떳떳하니 거짓말을 할 필요성도 없다고 생각했다.
진원의 입장은 그랬다.
“식사하세요.”
또 얼마나 삐쳐 있으려나 걱정하며 나오는 진원의 앞을 마중 나온 수정의 얼굴은 뜻밖에도 정갈하며 단정했다.
“흠.”
화가 난 게 아니었나?
진원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수정을 본다.
수정은 살짝 미소 지었다. 한동안은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하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그래도 남편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점수를 주고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수정은 늘 참는 쪽이었다. 수정의 무조건 참는 버릇은 1년 전 엄마가 중풍으로 쓰러졌을 때 남편이 직접 병실도 알아봐 주며 내내 신경 써 준 이후 새로 생긴 버릇이었다.
엄마를 따로 만나기도 싫어할 만큼 냉정하고 무관심하던 남편이 그 당시만큼은 지극정성을 보였다.
그때 남편에게 너무도 감사했던 수정은 사는 동안 백 번 정도는 남편이 섭섭하게 굴어도 참고 잘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생전 엄마 생신 때 전화 한번 안 받아 준 못된 인간이지만 힘든 시기에 의지가 되었던 고마운 기억이 오래갔다. 섭섭하고 화가 날 때마다 족쇄처럼 그녀를 옭아맸다.
“여보 많이 먹어요. 그리고 꽃 고마워요. 예뻐요. 두고두고 볼게요.”
남편은 대답이 없었다. 수정은 입을 살짝 삐죽거리다 갈치의 살을 발라 진원의 수저에 올려 주었다. 눈이 마주쳤다. 수정이 방긋 웃었다.
여전히 무뚝뚝하고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갈치조림이 맛있었는지 입맛 까다로운 양반이 두 그릇이나 밥을 비웠다. 미워도 남편의 입으로 밥이 들어가니 수정은 기분이 좋았다.
***
“어디 가세요?”
늦은 새벽.
침대에서 자고 있어야 할 남편이 일어서서 외투를 입고 있었다.
“혜진이한테.”
진원은 아내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 것을 알면서도 솔직히 털어놓았다.
“뭐라고요?”
수정은 진원이 예상한 것 이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아프다네. 오늘 생일이었는데.”
그래서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인 거예요, 당신?
“혜진 씨가 아픈데 당신이 거길 왜 가요?”
“혜진이 챙겨 줄 사람 없는 거 알잖아. 걔 아무도 없어. 나밖엔.”
“혜진 씨가 왜 당신밖에 없어요. 혜진 씨도 당신 말고 친구도 있고 가족도 있어요.”
“걔 가족들 가족이 아니라 거머리고 날강도들이야. 알잖아. 당신도.”
혜진의 오빠는 사기전과만 5범으로 합의금만 수천만 원을 찍었고, 그녀의 부모님은 잘난 딸만 믿고 환갑도 되기 전에 손에서 일을 놓았다.
수정도 혜진의 딱한 사정을 듣고 함께 가슴 아파했고 그녀의 슬픈 인생을 위로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불쌍하다고 남편을 빼앗길 순 없었다.
“생일인데 딱하잖아. 약만 전해 주고 올게.”
“가지 마세요.”
“수정아.”
“그 여자 정말 이상한 여자야. 이 새벽에 유부남을 부른다는 게 말이 돼요? 대놓고 유혹하겠다는 거야 뭐야. 파렴치해. 진짜.”
수정은 속에 있는 말을 전부 쏟아부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터지고 썩어 문드러질 것 같았다.
진원의 표정이 예민해졌다.
“말조심해.”
“말은 당신이 조심하세요.”
수정은 울먹거리면서도 또박또박 받아쳤다.
진원은 처음 보는 아내의 반항에 깜짝 놀랐다. 순종적이고 착한 아내가 아닌 것 같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신, 진짜.”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화가 난 남편의 표정에 수정은 금세 기가 죽었다. 피곤한 듯 한숨 쉬는 그의 얼굴에 안절부절못했다.
결혼 전엔 혼자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살던 자유로운 영혼이 어쩌다 이렇게 남편 눈치만 보는 바보 멍청이가 됐는지 모르겠다.
“간다.”
수정은 진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스르르 무너졌다.
#4. 오수정의 첫 번째 남자 (1)
“아프다더니.”
진원은 으득 이를 물고 혜진을 노려봤다. 당장 응급실에라도 보내야 할 정도로 위급상황을 예상하고 달려왔건만 혜진의 상태는 아주 양호했다.
“아파. 마음이.”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은 혜진이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진원의 얼굴이 날카로워졌다.
“다신 이런 장난치지 마라. 친구라면.”
“정확히 12시에 내 생일 지나가자마자.”
그대로 돌아서는 진원을 붙잡기 위해 혜진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돈 필요하다고 또 전화 왔더라. 오빠가 또 사고 쳤대.”
우뚝 멈춰 선 진원이 돌아섰다. 돌아선 진원의 눈동자가 커졌다. 혜진이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늘 강하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의연한 혜진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진원은 큰 충격을 받았다.
“가족이라면 서로 울타리가 되어 주고 의지가 되어야지, 왜 나만 울타리가 되어야 하는데. 왜 내 가족들은 이 모양인데. 차라리 고아가 낫겠어. 지겹고 환멸스러워. 진원아 나 너무 힘들어.”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진원이 혜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혜진아 넌 혼자가 아니야.”
그 큰 가슴에 기댄 채 혜진이 눈물을 흘렸다.
이대로 진원의 품에 여자로 안기고 싶다. 하룻밤에 사라질 꿈이라 할지라도 혜진은 자신의 모든 걸 바쳐서라도 진원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한 걸음 다가가려 하면 열 걸음 아니 백 걸음은 도망칠 그를 혜진은 잘 알고 있었다. 결벽증 때문에라도 자신을 받아 줄 남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친구로서만 그의 품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