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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뭐? 안 들어왔다고?”
진원은 그대로 그날 밤 들어오지 않았다. 병원에 연락해 보니 다행히 출근한 모양이었다.
혼자 있으면 비참하고 슬픈 생각만 들 것 같아서 청담동에서 노원까지 걸음을 했다. 친구 지영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수정은 장사 준비에 한창인 지영이를 도와 마늘을 까며 하소연을 했다.
“개잡놈 쓰레기. 아오!”
지영은 파르르 몸을 떨며 제 일처럼 분노했다. 저녁 장사 때 쓰일 식기를 닦으며 수정이 웃었다. 지영의 말들에 위로받고 있었다. 남편보다 친구가 오히려 제 마음을 더 알아주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지 말고 친구하고 살 걸 그랬다.
“그년이랑 바람난 게 분명하네. 넌 등신이니 팔푼이니 대체 이게 몇 년째야?”
“아니야. 바람나진 않았을 거야.”
“너 내 남편만은 그럴 리 없다고 말하는 다른 아줌마들이랑 똑같아진 거 아니? 정신 차려. 오수정. 네 남자도 별수 없어.”
“그게 아니라 지영아. 그 사람 결벽증이 심해서 방 안에 머리카락 한 올만 흘려도 인상을 구기는 사람이야. 그래서 그 사람 퇴근하기 전에 얼마나 예민해지는지 몰라. 혹시 머리카락 떨어진 건 없나 하고 열댓 번은 청소를 더 해. 그 결벽증 때문에라도 깊은 관계는 맺지 못해 그 사람.”
“네 남편 얼굴만 잘생긴 사이코다. 의사 마누라 된다고 했을 때 제일 기뻐한 게 나였는데 다 물려 버리고 싶다. 에이, 이 잡놈! 내 친구 속상하게 하지 마!”
욕을 내뱉으며 지영이 북어를 진원으로 생각하며 패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분이 좀 풀리는 지영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수정도 웃는다. 지영은 소녀 같은 친구의 웃음에 좋으면서도 속이 탔다.
“솔직히 네가 제일 등신이야. 그걸 가만히 곱게 보내? 확 죽여 버리든가 했어야지.”
“마음속으론 그렇게 내 마음을 모르겠느냐고 머리도 쥐어뜯고 뺨도 올렸는데 입으론 한 마디도 안 나오더라.”
“너 오수정 맞니? 수정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할 말 다 하고 살던 아가씨가 왜 이렇게 기가 죽었어. 지금은 오수정이 아니라 오 짱돌 같아.”
“짜, 짱돌?”
“그래 짱돌! 이참에 오 짱돌로 개명해 버려.”
그냥 돌도 아니고 짱돌이라니. 친구의 눈에 자신의 현재 모습이 구리긴 심하게 구린 모양이었다.
“근데 지영아 내가 그때 빛났어?”
“그럼. 겁은 많은데도 불의를 보면 못 참고 또 의리는 얼마나 끝내주는지 전교생이 다 네 친구였잖아. 노는 애고 공부하는 애고 다 너 좋아했잖아. 그런데 너 좀 봐라. 나 말고 너 친구 없지?”
수정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하고 한 달이 지났을 때쯤 시할머니가 쓰러졌다. 치매였다. 시어머니는 수정에게 간병을 떠맡겼다. 남편은 간병을 반대하고 요양원을 알아보자고 했다. 마음이 약한 수정은 3년이나 혼자의 힘으로 할머니를 돌봤다.
그때 너무 정신이 없고 시간을 내지 못해 친했던 친구들과도 연락이 끊겼다. 지영이만 남았다.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건 자신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시어머니가 수정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이젠 자기 아들보다 며느리의 편을 더 들어준다는 것에 있었다.
시아버지야 말할 것도 없다. 가진 것 없는 집안 자식이라고 냉대하더니 이젠 우리 보물 며느리라며 따뜻하게 손을 잡아 주시기도 했다. 수정은 살맛이 났다.
“너 계속 그렇게 못 살아. 애도 없겠다 계속 그 지랄 떨면 깔끔하게 이혼해 버려.”
“내 사전에 이혼은 없어. 알잖아. 우리 엄마. 본인이 이혼하고 힘들게 딸 키우셨어. 딸까지 이혼한다고 이야기 꺼내면 우리 엄마 쓰러지실 거야.”
“휴. 알지 너희 어머니 꽉 막힌 분이시라는 거. 혼자 조선 시대에서 살고 계시잖아.”
이혼만은 안 된다고 드러누워 앓을 수정의 어머니를 생각하니 머리가 다 아파지는 지영이었다.
“내가 그 혜진이라는 년 손 좀 봐 줘? 손 씻은 지 오래인데 이참에 껌 좀 씹어 봐?”
지영은 학창시절 소위 노는 아이였다. 수정도 지영에게 여러 번 돈이 털렸었다. 그땐 원수 같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친구가 되었는지 수정은 인생이 참 아이러니했다.
“주혜진을 패 준다고? 상상만 해도 기분 좋다.”
특히 진원과 수정의 결혼기념일에 급한 환자가 왔다며 제 남편을 고의로 빼앗아갔을 땐 지영이 말하던 것을 수십 번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물론 상상만 했다.
“생각만 하지 말고 우리 확 패 버리자. 남의 집 남편 탐내는 년은 맞아도 싸!”
“내 잘못도 있어. 아이가 있었다면 저 사람도 저렇게 친구가 소중하네! 마네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았을 거야.”
병원에선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언제쯤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
그래. 이번 한 번만 또 내가 봐주자. 우리 엄마 쓰러졌을 때 저이가 애썼잖아. 좋은 면도 많고 내가 아직 좋아하니까 참자.
수정은 자존심을 굽혀 가며 병원 앞에 당도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뭐 하세요? 저 밖인데 같이 저녁 먹어요.”
― 선약이 있어.
“혜진 씨랑요?”
― …….
“혜진 씨랑요?”
제발 그 사람만은 아니길 바라며 수정은 재차 대답을 재촉했다.
― 그래.
그러나 심장은 또다시 곤두박질쳤다.
“그래요, 좋은 시간 보내요.”
쿨하게 전화를 끊은 수정은 화를 참지 못하고 휴대폰 연락처에 저장되어 있는남편의 이름을 ‘미친 인간’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분하고 슬픈 마음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수정의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그 여자들은 행복한 결말이라도 보장받지. 난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해?
또르르 눈물이 흐른다. 비참했다.
“사석에선 안 만난다며. 이게 안 만나는 거야? 저녁은 사석 아니야? 최진원 이 나쁜 놈. 이 나쁜 놈아!”
“오수정?”
헉.
수정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잊고 있었다. 이곳이 남편의 직장 앞이라는 것을. 만약 저 뒤에 서서 자신을 알아본 사람이 남편의 직장동료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안 돼, 안 돼!
수정은 우뚝 멈춰 선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다급하게 입을 움직였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저 오수정 아닙니다!”
냅다 뛰었다. 100m 13초. 수정의 학창시절 달리기 기록이었다. 모든 체육을 잘하지만, 특히 달리기라면 자신 있는 수정이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과거엔 그랬다.
하이힐을 신고도 제법 속력이 나온다. 급박한 상황이라 그런가 보다.
그런데 이 미친 인간이 끝까지 따라왔다. 게다가 속도도 자신보다 훨씬 빨랐다. 남자가 어깨를 짚는 순간 수정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대체 뭐야 이 사람?
“대체 왜 도망가는 거야?”
남자가 말했다.
“그럼 당신은 왜 끝까지 따라오는데요?”
“그야 네가 도망가니까.”
도망가니까 따라왔다는 게 말이 되나. 자기가 무슨 경찰이라도 돼? 그럼 나는 도둑이야?
“그런데 저 오수정 아닌데요.”
다 들킨 것 같지만, 한 줄기 희망을 품으며 수정은 자신의 이름을 부정했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너 수정이 맞잖아. 이름이라도 개명한 거야?”
그제야 수정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진원의 직장동료들이 자신에게 반말할 리 없었다. 게다가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그리운 목소리.
천천히 돌아서는 수정의 두 눈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커다래졌다.
“오빠.”
“이제야 알아본 모양이네. 그래 나야.”
서지훈.
살아서는 다시 못 만날 줄 알았던 그가 눈앞에 서 있었다.
“지훈 오빠. 오빠야?”
“그래 나야. 반갑다 수정아. 우리 6년 만인가?”
그래. 6년 만이다. 그런데 어찌나 동안인지 지훈은 헤어진 6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니 조금 더 남자다워지긴 했다. 또 무늬 없는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이었던 과거에서 족히 수백은 넘어 보이는 명품 슈트 차림으로 변했다. 반갑다는 그의 말은 진심인지 그는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정은 이 사람이 무슨 꿍꿍인가 싶어 함께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지훈 쪽이었다.
“수정아 저녁 먹었어? 아직 식사 전이면 우리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저녁?”
“그래 저녁. 오랜만에 수정이 만났으니까 내가 살게.”
“오빠가 내 저녁을 왜 사 줘?”
질색하는 수정의 답에 잠시 당황한 듯 머뭇거리던 지훈은 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고향 오빠가 그 정도도 못 해 줘?”
고향 오빠?
미친 인간은 아무래도 제 남편 하나가 아닌 듯싶었다. 사방이 미친놈이다. 수정은 징그럽단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봤다. 그리고 실제로도 지훈이 징그럽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지훈은 아무것도 모르겠단 표정으로 웃으며 또다시 수정을 보며 말했다.
“고향 오빠 맞잖아 나.”
서지훈은 수정의 고향 오빠가 맞긴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옆에 붙어 있었던 게 지훈이고 헤어지기 직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해 온 게 지훈이었다. 친오빠, 친동생들보다 더 가까웠고 서로 의지하고 아끼며 지냈다.
고등학교 입학을 하자마자 두 사람은 고향 오빠 동생 사이에서 연인이 되었다. 장래도 약속했었다. 과거에 수정은 자신이 지훈의 아내가 되어 있을 거란 생각을 단 하루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지훈은 수정을 떠났다. 말하자면 수정이 지훈에게 차였다. 헤어진 연인과의 상봉이 수정에게 반가울 리 없었다.
“안 먹어! 오빠랑 내가 왜 밥을……. 아니 먹을래. 먹자 밥.”
그대로 질색하며 돌아서려던 수정은 혜진과의 선약 때문에 자신과의 저녁을 거절하던 남편의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지훈에게 남은 감정도 없고 고향 오빠랑 밥 한 끼 먹는 게 뭐 그리 큰 대수인가 싶기도 했다.
“고작 먹고 싶은 게 김밥이야?”
지훈이 굉장히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다. 표정도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수정은 고집을 부렸다.
“어! 먹을 거야 김밥. 다른 건 먹기 싫어.”
상상 이상으로 싸늘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말투가 현재 자신이 심경을 대변하듯 차가웠다. 그래도 자신이 굉장히 반가운 모양이었는지 들뜬 지훈에게 오빠랑 좋은 곳에 가서 식사하기엔 좀 그렇지 않겠냐는 말은 아껴 두었다. 굳이 좋은 음식을 먹고 싶지도 않았다. 고급 일식집, 고급 한정식, 고급 레스토랑은 결혼한 이후 지겹도록 많이 갔다.
“좋아 보이네 오빠. 잘나가나 봐.”
한두 번은 오빠는 뭐 하고 살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연인을 그리워해서가 아니라 친했던 고향 오빠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똑똑하고 착한 오빠이니 잘살고 있을 거라 짐작만 했다.
그런데 지훈은 예상대로 잘 먹고 잘산 모양이다. 못 본 사이 신수가 훤해졌다.
“잠시만.”
서빙되어 온 김밥을 유심히 바라보던 지훈이 갑자기 김밥 하나하나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 수정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봤다.
“너 깻잎 못 먹잖아.”
수정은 할 말이 없어졌다. 뭐 하나 했더니 김밥 속 깻잎을 하나하나 꺼내 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단 말인가?
깻잎은 알레르기까지는 아닌데 향이 역해서 수정은 어릴 때부터 먹지 못했다. 어린아이 같은 식습관이었다. 책잡힐 것이 뻔해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이었다. 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선 역해도 싫은 티 내지 않고 묵묵히 먹었다.
그래서 남편도 수정이 깻잎을 먹지 못한다는 걸 아직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수정은 잊지 않고 자신을 생각해 주는 지훈의 작은 배려에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이 인간에게 고마워할 일은 없다.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이제 잘 먹어.”
“그래?”
하지만 지훈은 수정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사람 좋게 웃으며 넘어갈 뿐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지훈은 왜 자신에게 친근하게 굴고 있는 걸까 수정은 생각해 보았다.
모르겠다. 김밥이나 먹자.
“수정아. 아까 울고 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될까?”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수정의 숨이 턱하고 막혀 왔다. 이 인간, 다 본 모양이로구나. 먹던 김밥도 체하겠다. 수정은 일단 시치미를 뗐다.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래? 나 그런 적 없어 오빠. 잘못 본 거야 오빠가.”
지훈은 굳게 다물어져 있던 입술을 천천히 움직이며 말했다.
***
“뭐? 안 들어왔다고?”
진원은 그대로 그날 밤 들어오지 않았다. 병원에 연락해 보니 다행히 출근한 모양이었다.
혼자 있으면 비참하고 슬픈 생각만 들 것 같아서 청담동에서 노원까지 걸음을 했다. 친구 지영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수정은 장사 준비에 한창인 지영이를 도와 마늘을 까며 하소연을 했다.
“개잡놈 쓰레기. 아오!”
지영은 파르르 몸을 떨며 제 일처럼 분노했다. 저녁 장사 때 쓰일 식기를 닦으며 수정이 웃었다. 지영의 말들에 위로받고 있었다. 남편보다 친구가 오히려 제 마음을 더 알아주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지 말고 친구하고 살 걸 그랬다.
“그년이랑 바람난 게 분명하네. 넌 등신이니 팔푼이니 대체 이게 몇 년째야?”
“아니야. 바람나진 않았을 거야.”
“너 내 남편만은 그럴 리 없다고 말하는 다른 아줌마들이랑 똑같아진 거 아니? 정신 차려. 오수정. 네 남자도 별수 없어.”
“그게 아니라 지영아. 그 사람 결벽증이 심해서 방 안에 머리카락 한 올만 흘려도 인상을 구기는 사람이야. 그래서 그 사람 퇴근하기 전에 얼마나 예민해지는지 몰라. 혹시 머리카락 떨어진 건 없나 하고 열댓 번은 청소를 더 해. 그 결벽증 때문에라도 깊은 관계는 맺지 못해 그 사람.”
“네 남편 얼굴만 잘생긴 사이코다. 의사 마누라 된다고 했을 때 제일 기뻐한 게 나였는데 다 물려 버리고 싶다. 에이, 이 잡놈! 내 친구 속상하게 하지 마!”
욕을 내뱉으며 지영이 북어를 진원으로 생각하며 패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분이 좀 풀리는 지영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수정도 웃는다. 지영은 소녀 같은 친구의 웃음에 좋으면서도 속이 탔다.
“솔직히 네가 제일 등신이야. 그걸 가만히 곱게 보내? 확 죽여 버리든가 했어야지.”
“마음속으론 그렇게 내 마음을 모르겠느냐고 머리도 쥐어뜯고 뺨도 올렸는데 입으론 한 마디도 안 나오더라.”
“너 오수정 맞니? 수정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할 말 다 하고 살던 아가씨가 왜 이렇게 기가 죽었어. 지금은 오수정이 아니라 오 짱돌 같아.”
“짜, 짱돌?”
“그래 짱돌! 이참에 오 짱돌로 개명해 버려.”
그냥 돌도 아니고 짱돌이라니. 친구의 눈에 자신의 현재 모습이 구리긴 심하게 구린 모양이었다.
“근데 지영아 내가 그때 빛났어?”
“그럼. 겁은 많은데도 불의를 보면 못 참고 또 의리는 얼마나 끝내주는지 전교생이 다 네 친구였잖아. 노는 애고 공부하는 애고 다 너 좋아했잖아. 그런데 너 좀 봐라. 나 말고 너 친구 없지?”
수정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하고 한 달이 지났을 때쯤 시할머니가 쓰러졌다. 치매였다. 시어머니는 수정에게 간병을 떠맡겼다. 남편은 간병을 반대하고 요양원을 알아보자고 했다. 마음이 약한 수정은 3년이나 혼자의 힘으로 할머니를 돌봤다.
그때 너무 정신이 없고 시간을 내지 못해 친했던 친구들과도 연락이 끊겼다. 지영이만 남았다.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건 자신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시어머니가 수정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이젠 자기 아들보다 며느리의 편을 더 들어준다는 것에 있었다.
시아버지야 말할 것도 없다. 가진 것 없는 집안 자식이라고 냉대하더니 이젠 우리 보물 며느리라며 따뜻하게 손을 잡아 주시기도 했다. 수정은 살맛이 났다.
“너 계속 그렇게 못 살아. 애도 없겠다 계속 그 지랄 떨면 깔끔하게 이혼해 버려.”
“내 사전에 이혼은 없어. 알잖아. 우리 엄마. 본인이 이혼하고 힘들게 딸 키우셨어. 딸까지 이혼한다고 이야기 꺼내면 우리 엄마 쓰러지실 거야.”
“휴. 알지 너희 어머니 꽉 막힌 분이시라는 거. 혼자 조선 시대에서 살고 계시잖아.”
이혼만은 안 된다고 드러누워 앓을 수정의 어머니를 생각하니 머리가 다 아파지는 지영이었다.
“내가 그 혜진이라는 년 손 좀 봐 줘? 손 씻은 지 오래인데 이참에 껌 좀 씹어 봐?”
지영은 학창시절 소위 노는 아이였다. 수정도 지영에게 여러 번 돈이 털렸었다. 그땐 원수 같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친구가 되었는지 수정은 인생이 참 아이러니했다.
“주혜진을 패 준다고? 상상만 해도 기분 좋다.”
특히 진원과 수정의 결혼기념일에 급한 환자가 왔다며 제 남편을 고의로 빼앗아갔을 땐 지영이 말하던 것을 수십 번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물론 상상만 했다.
“생각만 하지 말고 우리 확 패 버리자. 남의 집 남편 탐내는 년은 맞아도 싸!”
“내 잘못도 있어. 아이가 있었다면 저 사람도 저렇게 친구가 소중하네! 마네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았을 거야.”
병원에선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언제쯤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
그래. 이번 한 번만 또 내가 봐주자. 우리 엄마 쓰러졌을 때 저이가 애썼잖아. 좋은 면도 많고 내가 아직 좋아하니까 참자.
수정은 자존심을 굽혀 가며 병원 앞에 당도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뭐 하세요? 저 밖인데 같이 저녁 먹어요.”
― 선약이 있어.
“혜진 씨랑요?”
― …….
“혜진 씨랑요?”
제발 그 사람만은 아니길 바라며 수정은 재차 대답을 재촉했다.
― 그래.
그러나 심장은 또다시 곤두박질쳤다.
“그래요, 좋은 시간 보내요.”
쿨하게 전화를 끊은 수정은 화를 참지 못하고 휴대폰 연락처에 저장되어 있는남편의 이름을 ‘미친 인간’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분하고 슬픈 마음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수정의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그 여자들은 행복한 결말이라도 보장받지. 난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해?
또르르 눈물이 흐른다. 비참했다.
“사석에선 안 만난다며. 이게 안 만나는 거야? 저녁은 사석 아니야? 최진원 이 나쁜 놈. 이 나쁜 놈아!”
“오수정?”
헉.
수정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잊고 있었다. 이곳이 남편의 직장 앞이라는 것을. 만약 저 뒤에 서서 자신을 알아본 사람이 남편의 직장동료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안 돼, 안 돼!
수정은 우뚝 멈춰 선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다급하게 입을 움직였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저 오수정 아닙니다!”
냅다 뛰었다. 100m 13초. 수정의 학창시절 달리기 기록이었다. 모든 체육을 잘하지만, 특히 달리기라면 자신 있는 수정이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과거엔 그랬다.
하이힐을 신고도 제법 속력이 나온다. 급박한 상황이라 그런가 보다.
그런데 이 미친 인간이 끝까지 따라왔다. 게다가 속도도 자신보다 훨씬 빨랐다. 남자가 어깨를 짚는 순간 수정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대체 뭐야 이 사람?
“대체 왜 도망가는 거야?”
남자가 말했다.
“그럼 당신은 왜 끝까지 따라오는데요?”
“그야 네가 도망가니까.”
도망가니까 따라왔다는 게 말이 되나. 자기가 무슨 경찰이라도 돼? 그럼 나는 도둑이야?
“그런데 저 오수정 아닌데요.”
다 들킨 것 같지만, 한 줄기 희망을 품으며 수정은 자신의 이름을 부정했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너 수정이 맞잖아. 이름이라도 개명한 거야?”
그제야 수정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진원의 직장동료들이 자신에게 반말할 리 없었다. 게다가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그리운 목소리.
천천히 돌아서는 수정의 두 눈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커다래졌다.
“오빠.”
“이제야 알아본 모양이네. 그래 나야.”
서지훈.
살아서는 다시 못 만날 줄 알았던 그가 눈앞에 서 있었다.
“지훈 오빠. 오빠야?”
“그래 나야. 반갑다 수정아. 우리 6년 만인가?”
그래. 6년 만이다. 그런데 어찌나 동안인지 지훈은 헤어진 6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니 조금 더 남자다워지긴 했다. 또 무늬 없는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이었던 과거에서 족히 수백은 넘어 보이는 명품 슈트 차림으로 변했다. 반갑다는 그의 말은 진심인지 그는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정은 이 사람이 무슨 꿍꿍인가 싶어 함께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지훈 쪽이었다.
“수정아 저녁 먹었어? 아직 식사 전이면 우리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저녁?”
“그래 저녁. 오랜만에 수정이 만났으니까 내가 살게.”
“오빠가 내 저녁을 왜 사 줘?”
질색하는 수정의 답에 잠시 당황한 듯 머뭇거리던 지훈은 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고향 오빠가 그 정도도 못 해 줘?”
고향 오빠?
미친 인간은 아무래도 제 남편 하나가 아닌 듯싶었다. 사방이 미친놈이다. 수정은 징그럽단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봤다. 그리고 실제로도 지훈이 징그럽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지훈은 아무것도 모르겠단 표정으로 웃으며 또다시 수정을 보며 말했다.
“고향 오빠 맞잖아 나.”
서지훈은 수정의 고향 오빠가 맞긴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옆에 붙어 있었던 게 지훈이고 헤어지기 직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해 온 게 지훈이었다. 친오빠, 친동생들보다 더 가까웠고 서로 의지하고 아끼며 지냈다.
고등학교 입학을 하자마자 두 사람은 고향 오빠 동생 사이에서 연인이 되었다. 장래도 약속했었다. 과거에 수정은 자신이 지훈의 아내가 되어 있을 거란 생각을 단 하루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지훈은 수정을 떠났다. 말하자면 수정이 지훈에게 차였다. 헤어진 연인과의 상봉이 수정에게 반가울 리 없었다.
“안 먹어! 오빠랑 내가 왜 밥을……. 아니 먹을래. 먹자 밥.”
그대로 질색하며 돌아서려던 수정은 혜진과의 선약 때문에 자신과의 저녁을 거절하던 남편의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지훈에게 남은 감정도 없고 고향 오빠랑 밥 한 끼 먹는 게 뭐 그리 큰 대수인가 싶기도 했다.
“고작 먹고 싶은 게 김밥이야?”
지훈이 굉장히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다. 표정도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수정은 고집을 부렸다.
“어! 먹을 거야 김밥. 다른 건 먹기 싫어.”
상상 이상으로 싸늘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말투가 현재 자신이 심경을 대변하듯 차가웠다. 그래도 자신이 굉장히 반가운 모양이었는지 들뜬 지훈에게 오빠랑 좋은 곳에 가서 식사하기엔 좀 그렇지 않겠냐는 말은 아껴 두었다. 굳이 좋은 음식을 먹고 싶지도 않았다. 고급 일식집, 고급 한정식, 고급 레스토랑은 결혼한 이후 지겹도록 많이 갔다.
“좋아 보이네 오빠. 잘나가나 봐.”
한두 번은 오빠는 뭐 하고 살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연인을 그리워해서가 아니라 친했던 고향 오빠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똑똑하고 착한 오빠이니 잘살고 있을 거라 짐작만 했다.
그런데 지훈은 예상대로 잘 먹고 잘산 모양이다. 못 본 사이 신수가 훤해졌다.
“잠시만.”
서빙되어 온 김밥을 유심히 바라보던 지훈이 갑자기 김밥 하나하나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 수정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봤다.
“너 깻잎 못 먹잖아.”
수정은 할 말이 없어졌다. 뭐 하나 했더니 김밥 속 깻잎을 하나하나 꺼내 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단 말인가?
깻잎은 알레르기까지는 아닌데 향이 역해서 수정은 어릴 때부터 먹지 못했다. 어린아이 같은 식습관이었다. 책잡힐 것이 뻔해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이었다. 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선 역해도 싫은 티 내지 않고 묵묵히 먹었다.
그래서 남편도 수정이 깻잎을 먹지 못한다는 걸 아직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수정은 잊지 않고 자신을 생각해 주는 지훈의 작은 배려에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이 인간에게 고마워할 일은 없다.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이제 잘 먹어.”
“그래?”
하지만 지훈은 수정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사람 좋게 웃으며 넘어갈 뿐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지훈은 왜 자신에게 친근하게 굴고 있는 걸까 수정은 생각해 보았다.
모르겠다. 김밥이나 먹자.
“수정아. 아까 울고 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될까?”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수정의 숨이 턱하고 막혀 왔다. 이 인간, 다 본 모양이로구나. 먹던 김밥도 체하겠다. 수정은 일단 시치미를 뗐다.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래? 나 그런 적 없어 오빠. 잘못 본 거야 오빠가.”
지훈은 굳게 다물어져 있던 입술을 천천히 움직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