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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의 주인 1화
Prologue. 회상


도현은 구내식당에서 마시듯이 점심 식사를 해치우고, 줄 서서 기다릴 필요가 없는 편의점 아이스커피를 한 잔 사 들고 나왔다. 그는 평소 점심을 먹고 시간이 남으면 옥상에서 멍 때리거나 그늘진 벤치에 누워 떠오르는 소재와 시놉시스를 정리하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핸드폰의 메모장 어플을 쭉 훑어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새벽녘에 꾸었던 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28세의 평범한 성인 남자라면 초등학교 시절에 대해 어느 정도나 기억할까. 스스로의 질문에 답하듯 떠올린 기억들은 죄다 단편적인 정보나 장면뿐이었다. 교문 입구에 심어져 있었던 커다란 벚나무, 그 옆의 철봉과 미끄럼틀, 그네, 4층의 기다란 학교 건물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려 했던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시절 중 가장 선명한 몇 가지 기억은 제발 잊혔으면 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모두 한 사람과 연관되어 있었다.
도현은 메모장을 꺼 버리고 전날 밤 가입한 SNS 어플을 실행했다. 가입 당시 개인 정보에 출신 학교를 적는 부분이 있었다. 이 정보를 기입하면 동창들과 연결될 수 있다는 설명도 함께였다. 이것 때문이다. 뜬금없이 그 시절이 꿈에 나타난 이유가.
정보 기입창을 열어 초등학교 지역과 이름을 입력했다. 확인 버튼을 누르기 직전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눌러 버렸다. 그리고 동창으로 예상되는 몇몇 유저들의 정보가 떴다.
박민재. 그중에는 새벽녘 꿈속의 주인공이 있었다.

정신없는 오후를 보내다 보니 어느덧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시간과는 상관없이 오늘 송금한 내역들을 확인하고, 전표까지 입력해야 집에 갈 수 있었다. 도현은 밥을 먹고 야근을 할지, 집중해서 끝내고 늦은 저녁을 먹을지 잠깐 고민했다.
“이 대리, 저녁 먹냐?”
“글쎄요. 과장님은요?”
“너 먹으면 야근하고, 안 먹으면 일찍 가려고.”
아직 마감 날짜에 여유가 있어서인지 윤 과장은 도현이 야근을 안 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도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팀장님도 안 계신데 오늘은 일찍 들어가시죠. 저도 이 전표만 입력하고 갈 겁니다.”
“어, 그래. 그럼 내일 하지, 뭐.”
맞은편 윤 과장이 책상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다가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오늘 송금 건은 많지 않았으니 한 시간 정도 바짝 하면 끝이 보일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업무 시간 내내 모니터 옆에 뒤집어 놨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켜자마자 알림이 떴다. 점심시간에 추가 정보를 입력한 SNS 어플로 들어온 메시지였다. 발신자는 ‘서원’이라는 낯선 이름이었지만 도현은 작게 뜬 인물의 사진 덕분에 그가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기억을 떠올렸다.
[너 이도현 맞냐? 이 새끼 살아 있었네?]
도현은 피식 웃으면서 답장을 보냈다.
[내가 문명에 뒤떨어진 인간이라 이제 가입했다. 잘 지냈냐.]
옆 동네에 살아 저학년 때는 굉장히 친하게 지냈던 녀석이었다. 도현이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4학년 때부터는 좀 멀어졌지만.
[너 전번 뭐냐.]
잠시 망설였다. 도현은 그다지 살가운 성격이 아니라 극소수의 친구들과 친분을 유지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모두 대학 동창들이었다. 심지어 기숙사 시절을 보낸 고등학교 동창들과도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이였다. 초등학교 동창은 처음 연락이 닿은 거고. 번호를 준다는 건 만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내가 야근해야 돼서 이따 전화하자.]
도현은 아직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자신이 도망쳐 온 초등학교 시절과 마주칠 준비가 되지 않아서였다.
[그래. 내 번호로 먼저 전화해라.]
도현은 잠시 화면에 뜬 전화번호를 바라보다가 ‘저장하기’를 눌렀다.

도현이 처음부터 박민재와 친했던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오히려 같은 반에서 5년간 지내면서도 제대로 말을 섞어 본 적이 없었다. 도현과 민재 둘 다 먼저 말을 거는 타입이 아니었던 데다 서로 노는 무리도 달랐다. 매년 서른다섯 명을 넘지 않는 규모의 학급인데도 그랬다.
둘이 말을 트게 된 계기는 지금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도보로 50분, 자전거로는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그 정도면 다른 애들에 비해서는 꽤 가까운 축에 속했고 도현은 2학년 때부터 쭉 자전거로 통학했다.
아마 5학년 봄쯤이었을 거다. 도현이 한참 추리 소설에 빠져 있을 때기도 했다. 그날도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보다가 학원 시간이 다 되어서야 허겁지겁 자전거를 타고 나왔었다. 차가 드문 차도에서 페달을 힘껏 굴렸던 기억이 났다. 학교에서 5분쯤 왔을까. 작은 개천 위에 놓인 다리를 지나기 직전, 페달을 밟는 느낌이 이상했다. 바퀴가 굴러가지 않고 페달은 헛도는 느낌.
도현은 혀를 차며 브레이크를 잡고 자전거에서 내렸다. 예상대로 체인이 빠져 있었다. 당시 도현의 자전거는 한 번씩 체인이 빠져서 주인을 곤경에 빠뜨리고는 했다.
‘젠장, 지금도 늦었는데!’
도현은 학원 선생님의 꼬장꼬장한 얼굴을 떠올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쓸 만한 막대기 몇 개를 주워 기름이 덕지덕지 묻은 체인을 들어 올려 제자리에 끼우려고 끙끙거렸다. 하지만 걸렸다 싶으면 빠지고 또 빠져서 단단히 열이 받았다.
“도와줄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쪼그려 앉았던 다리를 펴 일어났다. 놀랍게도 박민재였다.
“너 자전거 만질 줄 알아?”
“응.”
별로 친하지도 않은 자신을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다. 도현은 한쪽으로 비켜섰고, 민재는 조금 전 도현이 쪼그려 앉은 곳에 같은 자세로 앉았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막대기들을 흘끔 보더니 맨손으로 체인을 집어 들었다.
“야, 너 손……!”
말릴 새도 없었다. 그 녀석은 거슬린다는 듯 그 서늘한 눈매로 도현을 슥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돌려 말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두 손으로 체인을 들어 올려 조심스럽게 걸더니 페달을 잡고 살짝 돌렸다. 다행히 체인은 한 번에 걸렸지만 그 하얗던 손은 이미 시커먼 기름이 묻어 엉망이 된 상태였다.
“자, 됐네.”
그가 일어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현은 입을 열었다.
“고맙다. 그냥 가도 됐을 텐데……. 손 어떡하냐.”
“괜찮아.”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곧바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세 발자국쯤 옮겼을 때 도현은 소리쳤다.
“야! 박민재.”
그가 돌아봤다.
“뒤에 타라. 너희 집 데려다줄게.”
내내 무표정했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순간 도현은 기분이 좋아졌다. 속 썩이던 체인이 한 번에 걸렸을 때보다 더. 민재의 웃음은 도현의 꿈에서 나왔던 바로 그 미소였다.



1. 재회 (1)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건 사치다. 그 일이 예술 분야라면 더더욱.
도현의 이런 생각은 아버지의 영향이기도 했다. 본래 만화가가 꿈이었던 아버지는 결혼 전 딱 1년만 원 없이 만화를 그려 보겠다고 선언하고 도현의 어머니에게 지원을 받았었다.
그러나 흔한 얘기처럼 재능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재능이 발견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번번이 퇴짜를 맞자 약속대로 1년 후에는 취직을 해서 대기업에 입사했다.
아버지의 책장에는 유난히 만화책이 많았다. 그래서 도현은 아버지의 책장을 매우 좋아했는데 어머니는 도현이 그 근처만 가도 싫어했다. 특히 만화책을 읽는 모습을 들키는 날에는 끝없는 잔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결국 글을 깨치고 1년도 안 돼서 몰래몰래 책장에 꽂혀 있던 만화책을 모조리 읽어 버렸으니까.
도현은 며칠째 머릿속에서 풀리지 않는 답을 풀기 위해 애쓰다가 연관성 없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떠올렸다. 한 달 뒤 마감인 공모전에 제출할 시나리오가 영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차피 저번처럼 되지도 않을 것, 괜히 공모전에 참여한답시고 초조해져서 작품을 망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됐다. 아니, 그런 걱정보다는 또다시 자신에게 재능이 없음을 확인하고 실망할까 두려운 거다. 그 두려움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고.
도현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서울에 산다는 초등학교 동창 네 명과 종로 번화가에서 만나기로 한 금요일 밤이었다.
[야, 오고 있냐? 나 벌써 도착.]
이 모임을 주도한 서원의 메시지였다. 같은 창에 있는 다른 녀석들은 아직 반응이 없었다.
[나 한 정거장 남음.]
도현은 메시지를 보내면서 문득 생각했다. 녀석들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리고 그 녀석은, 박민재는 어떻게 변했을까.
사실 서원과 연락이 닿고, 만나자는 제안을 수락할 때부터 지금까지 그 궁금증이 도현의 머릿속을 온통 차지했다. 회사에서 자잘한 실수까지 연발할 정도로.
지금껏 그 시절은 일부러 떠올리지 않을 정도로 외면하고 살아왔다. 그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다른 누구보다 박민재에 대한 기억만큼은 또렷해서 당황스러웠다. 일부러 공모전 시나리오를 떠올리다가도 결국 생각은 깔때기에 쏟은 물처럼 한 점으로 흘러들었다.
도현은 그 생각들을 털어 내기라도 하듯 눈을 꼭 감았다 떴다. 귀에 들려온 안내 방송이 곧 내릴 정거장이라는 걸 알려 줬다. 퇴근 시간의 지하철은 오늘도 만원이었지만 도심 한가운데라서 그런지 내리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 사이에 섞여 도현도 지하에서 지상으로 떠밀리듯 올라갔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낮은 목소리가 꽂히듯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도현?”
순간 시간이 정지하는 느낌이었다. 도현은 천천히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지나치는 수많은 군중이 모두 색과 소리를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그 장면 속에 한 인물이 까맣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겨우 계단 세 개 아래에 도현이 궁금해했던 얼굴이 있었다. 도현은 한눈에 알아봤다.
“박민재?”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초등학교 6학년 겨울 방학 직전이었으니까 무려 15년 만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앳된 얼굴은 어느덧 눈앞의 남자다운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오랜만이네.”
몇 초의 정적이 흘렀다. 도현은 그가 입을 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얀 이마 위에 머리끝이 조금 젖은 듯 달라붙어 있었다. 머리를 감고 나온 것일까. 도현은 그가 계단을 올라 자신의 옆에 나란히 서는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생각했다.
바로 옆에 선 그는 키가 컸다. 이제는 도현이 올려다보아야 할 만큼. 지나가는 사람들이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나란히 선 두 사람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 시선에 정신을 차린 도현은 기계적으로 정면을 바라보며 다리를 움직였다. 어깨가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도 도현을 따라 움직였다.
지하철 출구를 벗어나 조금 한적한 길가로 나왔을 때쯤 도현이 입을 열었다.
“우리 만나기로 한 데 어딘지 아냐?”
“이쪽이야.”
음색도 기억 속의 그것보다 더 낮았고, 키는 말할 것도 없이 훨씬 컸으며 위압적인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잘생긴 얼굴만은 여전했다. 허여멀건 피부와 서늘한 눈매도 그랬고.
도현은 그 뒤를 바짝 따라가며 생각했다. 자신의 마음을 자각한 이후로 그만 보면 떨리는 마음도 15년 전과 똑같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둘이 같이 오네? 오다 만났냐?”
오랜만에 본 서원은 옛날처럼 동글동글한 얼굴에 키가 작았다. 170센티미터도 안 되어 보였다. 그때도 작았으니 애초에 더 클 유전자는 아니었나 보다. 도현은 그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대답했다.
“어. 역에서 나오다가 만났어.”
“잘도 알아봤네? 우리는 몇 번 보긴 했는데 도현이 너는 오늘 처음 보잖아.”
정확히는 박민재가 자신을 먼저 알아본 거지만. 도현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답은 의외로 박민재에게서 나왔다.
“나는 한 번에 알아보겠던데? 너 별로 안 변했어.”
서원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도현은 순간 뭐라 말해야 할지 당황한 얼굴로 박민재의 곧은 시선과 마주했다.
너도 별로 안 변했다. 아니, 많이 변했나. 여자애들한테 인기 있을 법한 면상은 그대로네. 재수 없다, 새끼야. 이런 대사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한마디도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었다. 여전히 자신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만 퍼뜩 깨달았을 뿐이다.
“그러네. 이도현 너도 키 큰 거 빼곤 별로 안 변했다. 아니 뭐, 좀 남자다워지긴 했네. 짜식. 샌님 같던 놈이. 양복 입어서 그런가?”
옆에 있는 김창식은 주유소집 아들이었다. 학교 가는 길에 있었던 톨게이트 바로 맞은편 주유소가 그의 집이었다. 도현과 서원은 한때 김창식과 꽤 친하게 지냈는데 그의 집에 게임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넌 더 아저씨스러워졌다. 하긴 초딩 때 면상도 이미 아저씨였지.”
도현의 대꾸에 서원이 킬킬거렸다. 도현은 서원이 내미는 메뉴판에 시선을 주었다. 바로 옆에 앉은 박민재와 오른팔 팔꿈치가 슬쩍 닿았다. 순간 도현은 현기증이 일 만큼 긴장했다. 그런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도현은 메뉴판을 박민재 쪽으로 밀면서 입을 열었다.
“그냥 맥주 피처 시켜라. 안주는 박민재 네가 아무거나 골라.”
눈앞에 앉은 서원은 평범한 옷차림이었다. 청바지에 검은색 티, 바람막이 차림. 옆의 김창식은 좀 더 멋을 부린 느낌이었지만 그래서 더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연신 손목시계를 매만지는 꼴이 분명 평소에는 차고 다니지 않는 걸 억지로 한 느낌이었다. 어쨌든 짧은 머리칼에 잔뜩 왁스를 발라 세운 모양이며, 피어싱으로 뚫은 귀, 짧게 기른 콧수염을 보아하니 절대 직장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도현은 마지막으로 옆자리의 박민재에게 시선을 주었다. 머리카락이 젖은 듯 보였던 건 착각이 아니었다. 가까이 앉으니 옅은 샴푸 냄새도 났다. 흰 셔츠에 얇은 곤색 니트 카디건을 걸치고, 베이지색 면바지와 그 아래 가죽 로퍼까지 신은 모습은 꼭 대학생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28세의 초등학교 동창들 중 직장인은 도현뿐인 것 같았다.
“너희는 뭐 하고 사는데 나만 양복이냐?”
결국 이런 투덜거림이 흘러나왔다. 김창식이 먼저 피식거리며 대꾸했다.
“서원이 이 새끼는 고시생이야. 말 안 하던? 뭐, 만년 고시생이라 서른 넘어서도 이 꼴일 것 같지만. 나는 홍대 잘나가는 클럽 디제이다. 그리고 네 옆에 앉은 인간은 의사 선생님.”
“뭐?”
“선생님은 무슨. 그냥 레지야.”
박민재가 대꾸했다.
“외과의 레지 2년 차란다.”
덧붙인 김창식의 설명에도 여전히 도현이 놀란 눈으로 민재를 바라보자 그가 멋쩍은 듯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낯설면서도 낯익은 미소였다.
도현이 전학 간 이후 지금까지의 삶을 요약 보고한 후에 이런저런 근황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박민재는 옛날처럼 말수가 적었다. 주로 떠드는 건 서원과 김창식이었다. 문득 서원이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야, 이도현, 너 생각나냐? 우리 6학년 때 박민재 이 새끼 고백 편지 받은 거.”
순간 반쯤 딴생각에 잠겨 있던 도현이 서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거 김현주가 쓴 거라고 다들 생각했잖아. 그런데 걔 얼마 전에 딴 애 결혼식에서 본 김에 물어봤는데 자기 아니라더라.”
순간 맥주잔을 쥐었던 도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그때 모인 동창들이 다 의아했었지. 그럼 그때 왜 잠자코 있었냐고 하니까 어차피 다들 안 믿어 줄 거 같아서 그냥 입 다물고 있었대. 진짜 누구였을까?”
김창식이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뭐, 이 새끼는 원래 인기 많았으니까.”
“내 생각에는 걔 있잖아, 고윤정. 5학년 때 전학 온 여자애. 걔일 거 같아.”
서원이 언급한 이름에 김창식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받아쳤다.
“걔는 아냐. 걔는 얘 안 좋아한다고 했단 말이야.”
옛날 일에 대한 반응치고는 격했다. 서원이 좋은 건수를 잡았다는 것처럼 피식거리면서 창식을 살살 긁었다.
“이 새끼, 네가 물어보기라도 했냐?”
김창식이 고개를 팍 돌렸다. 순간 도현은 푸흡, 웃어 버렸다. 스물여덟 살이나 처먹어서는 하는 짓이 딱 초딩 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해서 도현은 조금 전의 기분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걔는 아니야.”
의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박민재였다.
“네가 어떻게 아냐? 너 그 편지 주인공 누군지 알고 있어?”
“아니.”
짧은 대답에 푸식, 식었다는 얼굴로 서원이 폈던 허리를 구부렸다.
“근데 뭘 가지고 그렇게 단정해?”
“걔는 나 안 좋아했어. 딴 애 좋아했어.”
그러면서 박민재가 슬쩍 도현을 쳐다봤다. 의미심장한 눈길이었다. 도현은 지레 찔려서 놀란 눈으로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어? 뭐야? 설마?”
눈치 빠른 서원이 도현에게 시선을 돌리고 물었다.
“고윤정이 이도현 좋아했냐?”
도현은 옅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게 이제 와서 뭐가 중요하냐, 인마.”
도현의 대답에 김창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씨발! 이도현 너였냐?”
김창식이 다혈질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도현이 의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자 서원이 웃으면서 설명했다.
“이 녀석 첫사랑이 고윤정이잖아. 게다가 얼마 전에 그 결혼식에서 걔 만나서 번호 땄다고 좋아하더라고. 걔도 여태 솔로라던데…….”
“15년도 더 된 얘기야. 옛일에 뭘 그렇게 버럭하냐. 뭐, 걔가 지금 나 본다고 여전히 좋아한다 하겠냐?”
도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자 김창식도 민망한 듯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그저 그가 귀여워 보였다. 그 시절 풋풋한 감정을 아직도 품고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근데 너는 걔가 나 좋아한 거 어떻게 알았냐?”
도현이 박민재에게 의문 섞인 시선을 보내자 그가 또다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보면 알지.”
도현은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이도현, 담배 안 피우냐?”
“어, 끊었다.”
도현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서원과 김창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은 호프집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있어도 주변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라 마음이 편치 않다며 두 사람은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순식간에 적막이 흘렀다. 하필 자리도 좁아서 도현은 의식하지 않는 척 벽 쪽에 바짝 붙어서 박민재와 닿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었다. 왜 이 호프집은 자리도 이딴 식으로 만들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침묵에 숨이 막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너 레지라면 엄청 바쁜 거 아니냐?”
“응. 바빠.”
도현도 체구가 작은 편은 아니라 대화 상대의 얼굴을 보려면 몸을 살짝 틀어야 했는데 그러자니 또 그에게 닿을 것 같아서 망설여졌다. 그 순간 도현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박민재가 조금 바깥쪽으로 옮겨 앉았다.
“일부러 오프 맞췄어. 너 나온다고 해서.”
뺨에 똑바로 박혀 오는 시선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곧게 부딪치는 시선. 이것도 옛날 그대로였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우스웠다. 김창식을 우습다고 생각한 자신은 더 우스운 놈이었다. 첫사랑을 만났다고 이렇게 마음이 떨리다니. 아무렇지 않은 듯 15년이나 더 지난 일이라고 말한 이유는 자기 암시였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냐?”
“응.”
웃기지 말라는 듯 도현은 피식 웃었다. 그러나 박민재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너 왜 편지 안 했어? 편지한다고 했잖아. 내가 주소도 적어 줬잖아.”
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설마 이런 걸 물어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